집자 주: '내가 겪은 6.25'를 6월 25일 전까지 연재합니다. 올인코리아의 회원이신 화곡 김찬수는 도서출판 명문당으로부터 이 글의 게재를 허락얻었다고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은 32년 교직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가 교감으로 명퇴하시고, 수필가로 활동하시고, 시인이며 농업인이기도 합니다.통일부 통일교육위원이며, 강원도의 좌경적 신부들과 투쟁하는 애국적 천주교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의 연락처는 <alex223@hanmail.net>입니다.]
내가 겪은 6.25 (화곡 김찬수) <머리말> 이 수기는 1945년부터 1958년까지의 내 생애 일부의 기록입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남북의 분단을 만났고 급기야는 이북의 김일성에 의하여 저질러진 해괴한 6․25 동란을 겪게 되었던 역사적 아픔이 있습니다. 나는 1950년 6월 25일 이전엔 38선 이북의 공산치하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나의 가족은 형언하기도 어려운 슬픈 삶을 겪었습니다. 6․25가 나던 해엔 이산가족이 되었고 6․25가 난 이후엔 나와 할머니는 동해 중부전선에 남아 공산 인민군과 대한민국 국방군이 대치하여 공방전을 치르는 와중에서 생명의 위험이 경각에 달린 처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1952년 이후엔 이산가족이었던 나와 할머니는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6․25때 헤어졌던 가족과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국민 모두가 다 그랬듯이 우리도 쓰라린 피난민 생활을 하였습니다. 내가 겪은 6․25 동란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992년이 지난 언제인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역사 속에서 이미 다 알려진 진실되었던 사실들이 점차로 왜곡되는 방향으로 부풀려 지고, 있지도 않은 일들이 새롭게 기록되어 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6․25를 생생하게 경험한 많은 이웃들이 당황하게 되었고 나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나는 내가 직접 경험한 6․25 동란 때의 기억나는 일들을 상기하여 여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글을 쓴 목적은 첫째, 우리 국민들 누구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은 반드시 그리고 옳게 찾아서 알아야 하고, 후손들에게는 이를 교육적으로 정확하게 전수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형태의 전쟁도 이 땅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입니다. 셋째, 나라를 이끄는 위정자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정신으로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모범된 자세를 앞세워야 되겠다는 바람입니다. 처음 이 글의 시작은 2005년 1월 29일부터 5월 6일까지 내가 조선일보 닷컴의 회원이 되어 블로그에 3개월간 연재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연재를 하는 동안에 독자들이 나에게 많은 의견을 주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6․25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 이야기가 아직도 도처에서 숨겨져 있는데 이러한 생생한 역사적인 사실이 자꾸 소멸되어 가는 현실에서 나와 같은 생생한 수기의 내용이 반드시 책자로 기록되어 후대에 알려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독자들의 뜻을 소중하게 받들어 기록되지 못한 나의 기억들을 다시 보충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더 보충할 내용을 다듬고 중복된 이야기들을 간추리곤 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내용의 서술이 되지를 않아 심히 송구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한 사실을 세상에 알림이 더 소중하다는 일념에서 크게 용기를 내어 이 책자를 내 놓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제작하려는 초기부터 망설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각계에서 많은 분들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또 진실 됨을 증거함에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비로소 밝힙니다만 조선일보 닷컴의 운영자님과 관계자님들이 나를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나의 아내와 가족 모두가 하나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글자 한 자 문장 한 구절에 관심을 가져 주었던 두 아들과 며느리들에게 감동했던 마음을 소개합니다. 수필가 김두수님의 문장 작성에 대한 세심한 일깨움 및 수기 내용의 검토와 수필가 김용진님, 시조시인 이정오님의 교육적인 바람과 서석용 박사의 우국의 조언에 감사드리며 수원 가톨릭 사진 작가회 한상국님이 동해안 속초에서 강릉, 부산 그리고 거제도까지의 여정을 통하여 우정 어린 촬영 동행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이 책이 나오기 처음부터 나의 부족한 점을 내치기에 앞서 더욱 격려하며 나라사랑의 열정으로 이 책자를 펴내어 나의 뜻을 기려 주신 명문당 김동구 사장님의 따뜻하고 우정 깊은 마음에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표지부터 본문 활자 그리고 사진 배열에 이르기까지 전체 구성을 빈틈없이 이루어 주신 도서출판 팬더북 채희걸 사장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아울러 전체적인 제작을 주관하여 주신 양승웅 부장님의 배려에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2007년 6월 20.화곡(華谷) 김찬수 식(識) <차례> 1. 귀향(歸鄕) / 12 2. 인공치하(人共治下) / 14 3. 아버지의 설악산 잠적 / 28 4. 감시 대상 우리 집 / 28 5. 깊은 밤중에 본 아버지 / 30 6. 금강산 수련과 아오지 탄광 / 31 7. 고향에 남은 할머니와 나 / 36 8. 김일성의 기습남침 / 42 9. 양양 군청 철수 이동 / 49 10. B-29 항공기의 강현 역과 철다리 폭파 / 54 11. 낙동강 패잔병 인민군의 퇴각행렬 / 57 12. 1950년 10월 1일―나의 태극기 사랑 / 60 13. 동해 중부전선의 끔찍한 전쟁터 와중에서 / 66 14. 인민군 총사령관 무정 / 71 15. 끊이지 않는 우리 동네의 상흔(傷痕) / 74 16. 인민위원장의 말로 / 79 17. 눈이 많이 온 해 1ㆍ4 후퇴 / 82 18. 설악산 전투 / 87 19. 전쟁 유행병 장티푸스 / 92 20. 소금재 고개 / 95 21. 1951년 최전방 국방군 주둔지 강현면 / 97 22. 양양군 남대천 하류 / 102 23. 비목(碑木) / 109 24. 동해안 삼팔교 / 111 25. 강릉의 피난민 생활 / 113 26. 전방 신병 전투훈련소가 된 복골 / 118 27. 전선야곡(戰線夜曲) / 123 28. 내 고향 진달래 피는 마을 / 127 29. 총기사고 / 132 30. 쌍천(雙川) / 134 31. 아버지의 난중일기 / 144 32. 선영이의 죽음 / 147 33. 거제도 인민군 포로수용소 / 150 34. 포로수용소 폭동과 연초중학교 개교 / 156 35. 재회를 약속한 할머니와의 이별 / 159 36. 부산 거제리 병영의 하우스보이 생활 / 164 37. 장승포 항에서의 아버지와 만남 / 166 38. 피난민 집합지 거제도 연초면 / 170 39. 생이별한 이산가족 / 175 40. 대한민국이 배척하는 마르크스 레닌 사상 / 176 41. 할머니 거제도 도착, 이산가족 상봉 / 179 42. 명견 에쓰와의 만남 / 183 43. 할머니의 발병과 동생 선심이의 사망 / 184 44. 한 많은 내 할머니의 애환(哀歡) / 189 45. 아버지의 가정교육 / 192 46. 절약정신 / 193 47. 가고파 / 197 48. 고현 미군부대 위문 활동 / 200 49. 친구 영희 언니의 애절한 이야기 / 204 50. 기초학업 손실 / 207 51. 학습 불안심리 / 209 52. 상담 심리치료 방식으로 학업 상실감 해소 / 211 53. 우선해야 할 교육풍토 확립 / 213 54. 아버지의 용단 부산으로 이사 결정 / 215 55. 명견 에쓰와의 이별 / 219 56. 자갈치 시장과 청구중학교 / 223 57. 학습 지진아 열등생 / 227 58. 멍드는 동심 / 231 59. 깡패천국 / 234 60. 부산 거인 노장군 / 238 61. 부산 대 화재 / 241 62. 이별의 부산 정거장 / 243 63. 아미동 판자촌 / 244 64. 판잣집 철거 수난 / 249 65. 남동생 웅수 출생 / 252 66. 영도 청학동 후생주택 27호 / 254 67. 내 아버지의 자녀교육(동행) / 258 68. 1955년도(6․25 5년 뒤) 부산 거리 / 262 69. 최의준 선생 / 266 70. 독립운동가 후예 / 269 71. 휴전반대와 영도다리 난간 / 274 72. 대연동 재한 UN 공원 / 276 73. 영도다리 아래 점보는 집 / 278 74. 상표 없는 밀가루 포대 / 279 75. 장갑송 아저씨의 피난 이야기 / 281 76. 원산 형무소 / 289 77. 친구 김승엽의 피난 이야기 / 292 78. 친구 이영일의 1․4 후퇴 직후 피난 이야기 / 297 79. 오신혜 선생님 / 300 80. 서부영화 / 309 81. 사춘기 / 312 82. 신문배달 고학생 / 317 83. 부두 노동자 / 322 84. 막내 여동생 선옥이의 출생 / 326 85. 한찬식 선생님 / 327 86. 영도 고갈산 / 331 87. 학창시절 나의 애국심 / 334 88. 좌파괴수 김일성의 종교탄압 / 337 89. 전쟁고아 / 343 90.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 345 후기 / 349 1. 귀향(歸鄕) 나의 고향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중복리이다. 마을 뒤로는 산이 높고 수려하며, 앞으로는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 바라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특히 늦가을이 되어 물치 장거리에서 우리 동네를 올라올 때 설악산 대청봉을 올려다 볼라치면, 마을에는 집집마다 감나무 가지에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송암산 너머 저 멀리 우뚝한 대청봉 산마루엔 눈이 하얗게 덮여 동해 바다를 장엄히 내려다 보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가을과 겨울이 한눈에 보이는 놓치기 아까운 장관이 연출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곳은 나의 선조들과 부모가 태어난 곳이고 선영들이 모셔진 곳이기에 정신적인 고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45년 해방의 기쁨을 안고 어른들을 따라 고향으로 내려와 1952년까지 8년간 살면서 끔찍했던 6ㆍ25 동란 전후의 아픈 추억만 가득한 곳일 뿐이다. 태생도 그곳이 아니고, 온전히 성장한 곳도 그곳이 아니다. 지금까지 객지에서만 살았기에 많이 산 곳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서울이 고향이요, 동심이 묻혀 있는 청소년기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시원하고 아름다운 항도 부산이 내 고향이고, 태생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조선조 세종대왕 때 김종서 장군이 육진을 개척 시 진영을 쳤다는 함경북도 종성군 행영면 영리가 나의 고향이고, 사랑하는 내 아내가 자란 내륙의 호반도시 춘천에서 36년 동안이나 행복을 간직하고 오가며 지내고 있으니 이곳 또한 내 고향이랄 수도 있겠다. 1945년 8ㆍ15 해방 이후 그 해 11월, 29세인 아버지는 직장 생활을 정리한 뒤 우리 식구를 데리고 함경북도를 떠나 고향 강원도 양양으로 내려왔다. 그때 기차에 자리가 없어서 기차 화통이 있는 맨 앞 차량 꼭대기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오는데, 거기도 사람이 빼곡히 들어차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판이었다. 게다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 다리를 오랫동안 깔고 앉은 것이 원인이 되어 고향에 도착한 뒤에 절뚝거리며 걸어 다녀야 했다. 치료를 위해 민간요법으로 탄 볏짚재에 오줌을 부어 재운 것을 짓이겨 보리개떡 반죽같이 두툼하게 만들어 아픈 부위에 붙여 놓고서 붓기를 빼곤 했다. 이때 아픈 무릎께가 한동안 몹시 근질근질하고 못 견디게 따끔거렸던 생각이 난다. 함경북도에서 원산 쪽으로 내려올 때 기차가 달리다가 굴이 나타나면 앞에 있는 사람들이 ‘칙칙폭폭 칙칙폭폭’ 하는 기차소리 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엎드려!” 하고 외치면 화통의 맨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납죽 엎드려 가며 여러 차례 기차 굴을 빠져 나갔었다. 그러던 중에 원산 근처 덕원 역에서 승객들이 잠시 쉴 때였다. 로스께(소련군인)가 갑자기 귀중품과 사진 등 온갖 소중한 자료가 들어 있는 우리 아버지의 커다란 가방을 날치기해 도망간 일이 있었다. 이를 목격한 아버지는 도망가는 로스께를 쫓아가고 나를 업고 있던 할머니는 한참을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큰 소리로 울면서, “아범이 오지 않는걸 보니 소련군 놈이 필시 총질을 하였을 것이다. 아범이 오지 않으니 내가 살아서 뭣하랴!”하면서 기차 바퀴에 몸을 던져 죽겠다고 하던 절규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기차가 떠날 시간이 임박해서야 우리 집 전 재산이었던 가방을 잃어버린 채로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온 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알거지 행색이 되어 고향 강현 역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나를 안고, 어머니는 8ㆍ15 해방이 지나 갓 태어난 여동생을 안고, 할머니는 아기 옷가지 몇 개 달랑 손에 들고서 다섯 식구가 지친 모습으로 집도 없는 고향 마을로 향했던 것이다. 뒷날 할머니는 이때를 떠올리면서 두고두고 말하기를,“예전에는 강현 역에서 우리 집 동네를 오갈 때는 발걸음도 가벼웠었는데, 해방되었다고 기쁜 마음으로 객지에서 고향에 가다가 덕원에서 귀한 물건 들치기 당하여 다 잃어버리고 맨주먹으로 오게 되다니……. 고향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고, 10리도 못 되는 길을 초겨울에 들어서서 우리 텃밭까지 걷는데 그렇게도 멀게 느껴져 보기는 처음이었다.”라고 했다. 고향에 온 우리 가족은 택호가 ‘반재집’이라는 친척집 뒷방 하나를 빌려 살게 되었다. 38선 이북 공산 치하의 생활은 그렇게 무일푼으로 시작되었다.(계속) 내가 겪은 6.25(3)/화곡 김찬수 2. 인공치하(人共治下) 아버지는 1946년 봄부터 초가을까지 간성에 있는 오호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그 해 가을부터 소련 공산주의 앞잡이 김일성 우상화와 공산정권의 세력 다지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때부터 우리 집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개울마을 어느 잔칫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을 ‘인민위원장’인 지씨의 집에 가서 젊은 사람들끼리 사상 논쟁을 벌이다가 공산주의 패들과 싸움이 붙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힘이 모자란 아버지 일행 세 사람, 개울마을 봉근 아저씨와 과수원집 종대 아저씨 등이 숫자가 많은 그들에 밀려 무수히 구타를 당하여 들것에 실려 온 것이었다. 온 몸에 선혈이 낭자하였고, 특히 왼쪽 눈두덩이는 인민위원장 지씨가 아버지를 들어 거꾸로 문지방에 내리 꽂는 바람에 찢어졌는데, 나는 왼쪽 눈썹께에 또 하나의 커다란 눈이 있는 것처럼 벌겋게 찢어져 살이 너덜 너덜거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 생존시에 왼쪽 눈썹 가운데의 길고 커다란 흉터만 보면 어린 시절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집에 와 정신을 차리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할머니더러 어서 빨리 바늘을 가져와 생살을 꿰매라고 연신 고함을 쳤는데,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면서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안타까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할머니가 뒤뜰 장독대의 된장 항아리에서 된장을 한 움큼 떠다가 생살 갈라진 상처에 붙이고는 헝겊으로 싸매어 주었다. 머리를 동인 나의 아버지…… 밤낮으로 신음소리만 내던 내 아버지…… 나는 지금도 그 일만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사흘쯤 지나 물치 내무서에서 내무서원이 몸져누운 아버지를 조사할 일이 있다면서 데리고 갔다. 인민위원장 지씨 패거리의 고발로 연행된 것이다. 양양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면회를 다녀온 어머니 말로는 혹독한 고문에 온몸이 퉁퉁 부어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몽둥이로 온 몸을 맞아 전신이 구렁이 감아 놓은 것처럼 얼룩덜룩 무섭고 끔찍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외아들인 아버지는 나의 할머니, 즉 당신 어머니가 놀랠까봐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어머니에게 가서 내가 이렇게 무서운 매를 맞았다고 말하지 말라.”하고 신신당부하였다 한다. 할머니가 너무 애통하여 충격을 받을까 염려해서 한 말이었다. 얼마 뒤 내무서원들과 양양 정치보위부 놈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어머니와 할머니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여러 차례 짓이기며, “감춰둔 서류 어디 있어! 모두 죽여버리겠어!”하고 윽박지르면서 위협했다. 그들은 새로 한 집 천정을 마구 뜯어내며 아버지가 썼다는《공산주의의 허구성》,《마르크스 레닌의 공산사회주의의 비판》등 논문집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난리를 쳤다. 다행히 그 논문과 글들은 어머니가 집 뒤 장독대 근처의 큰 돌 밑에 숨겨 놓아 발각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할머니는 아버지가 쓴 논문과 다른 글들을 모두 찾아서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렸다. 1945년 8ㆍ15 광복 이후 1950년 6ㆍ25가 발발할 때까지 이북의 통치 방식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시골 우리 동네까지 철저히 행해졌다. 먼저 이북의 위정자들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종교를 탄압했다. ‘종교는 아편이다!’ 이 말은 6ㆍ25 전 이북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귀가 아프도록 들은 말이다. 이렇게 해야 김일성을 살아있는 신으로 온전히 숭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종교도 용납하지 않았고 종교 자체를 말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음으로 친일청산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강조했다. 친일파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과 정치적 노선이 다른 사람과 항일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까지 친일파로 몰아세워 숙청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의 사례와 김구 선생을 이용한 것도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민족을 위한다는 구호를 내세워 사리사욕을 채우는 타락한 정치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이북 주민들은 갑자기 낮도깨비같이 나타난 공산당 패거리들이 억압적으로 내세우는 그들의 명분(?)을 대놓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김일성과 그를 돕는 자들이 자행했던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들은 친일청산이란 명분을 업고 정당화되었다. 친일청산을 비롯한 과거청산의 문제는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 번째로 재산의 몰수와 재분배를 실시했는데 대 지주나 잘 사는 사람들은 물론, 인민군에 지원한 집안에 경작지를 나누어 주기 위해 다른 집의 토지를 빼앗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모두 다 잘 살게 해주려고 재산을 몰수해 재분배한다는데 성실하게 일하면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일시에 죄인으로 전락하고,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가난했던 사람들이 일시에 위세를 떨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전통시대의 신분적인 한계로 인해 가난했던 이들은 성실하게 일했지만 사회적인 구조가 가져다준 가난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기도 했다. 노력하지 않고 남 잘되는 것만 보면 배가 아파하는 이들이 무조건 몰수와 분배만 떠들어대고 있었다. 내가 겪은 6.25(4)/화곡 김찬수 (1). 전 국토를 국유화 이들은 훗날 점차적으로 극렬하게 “북조선 인민의 어버이는 김일성 수령님이다!”라고 외쳐댔다. ‘어버이 수령’이라는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족’의 해체를 앞당겨야만 했던 것이다. 젊은 여성들을 정치 선전도구로 이용해 ‘호주제’를 폐지하고, 자식들이 친부모를 고발하는 행위를 장려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가 서서히 커져 부모나 스승, 그리고 어른을 공손히 대하던 우리의 미풍양속이 붕괴되었다. 여기에 배급제까지 실시하며 전 국토를 국유화하였는데 농지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면서 핍박하였다. 평생 농사를 지어온 이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빼앗아 놓고서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니! 그야말로 선량한 농민들을 굶어 죽이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인민군에 자식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경작할 토지와 온갖 혜택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현상으로 가득 찬 사회가 이른바 그들이 주장하는 ‘인민의 나라’, ‘공산주의’의 실태였던 것이다. 이런 양상은 그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날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한편 아버지의 연행과 구금 소식에 온 동네 친척들은 야단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속마음으로 두 패로 갈라진 것이다. 친척들을 중심으로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우리 문중에서 아버지의 형님뻘 되는 종순 아저씨가 적극 나서서 구명운동을 하였고, 아버지는 달포 반이 지나서야 풀려났다. 집안 아저씨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몸을 숨길 것을 제안했고,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동네에서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 종적을 감추었다. 외갓집 동네인 설악동 상도문을 지나 그 윗동네 몇 집이 살지 않는 핏골 마을 위 설악산 신흥사로 몸을 피한 것이다. 이 때부터 1952년까지 나는 두세 번밖에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1949년 여름이 조금 지나 우리 동네와 이웃 동네에서는 갑자기 우리보다 나이 많은 형들과 젊은 아저씨들이 모두 인민군에 입대를 하였다. 어른들 말이 “농사짓는 젊은이들이 모두 다 일시에 군대를 가니 마을이 둘러빠진 것처럼 여자들만 남았다.”라고도 했고, 또 “근본도 모르는 젊은 조선노동당, 공산당 애놈의 새끼들이 위아래도 없이 설치는데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다.”라고도 하였다. 동네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을 비롯해 마을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 작은댁 아재들이 인민군에 입대하던 1947년, 작은댁 할머니와 나의 할머니는 위험할 때 군대 간다고 몇날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아재들이 입대한 후 작은댁 할머니는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지냈다. 이북 전체에서 인민군으로 징집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는데 심지어 나보다 예닐곱 살 많은 어린 형들도 모두 군대로 끌려갔다. 6ㆍ25가 일어난 뒤의 이야기이지만 인민군대가 된 어린 병사들이 자신의 키만큼 큰 총을 땅에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그 해 아주 늦은 가을 즈음인가 해서 우리 마을엔 또 커다란 사건이 하나 터졌다. 한밤중 자정이 넘어서 개울말에서 갑자기 여러 차례 총성이 콩 볶듯 난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해서양짓말 사람들이 모두 방안에서 궁금해 하고 있는데 얼마간 있다가 갑자기 우리 집 툇마루 밑에서 나직하게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저예요! 저 종익이에요! 지금 쫓기고 있으니 어서 문을 열고 집안에 숨겨 주세요!” 목소리가 매우 다급했다. 어린 둘째 여동생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창호지 문틈으로 내다보니 총을 든 사람 여럿이 마당 바닥에 납죽 엎드려 있었다. 사태를 짐작하신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 문 밖을 향하여 나직하게 말했다. “종익 서방님, 찬수 애비가 어디로 갔는지 집에 없고, 여기는 어머니와 애들과 저만 있는데 지금 총소리가 콩 볶듯 나니 여기는 아주 위험합니다. 또 우리도 지금 지목을 받고 있으니 깊은 산속으로 어서 피하세요.” 그러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잠시 조용하더니 아무런 기척이 없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공포에 떨었다. 종익 아저씨 일행들이 사라지고 조금 있으려니 총을 든 내무서원 여럿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문을 열라고 고함을 치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문을 열었고,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방안 구석구석을 모두 뒤졌다. 장독대부터 심지어 부엌 아궁이 속까지 속속들이 뒤진 다음 아무런 징후도 발견하지 못하고는 양짓말 여러 집을 똑 같은 방법으로 다 뒤졌다.(계속) 내가 겪은 6.25(5)/화곡 김찬수 (2). '말뼉다구'라는 별명을 가진 종익 아저씨. 고요한 한밤중에 총성이 있은 연후에 내무서원들이 “나와라!”, “저기 숨었을 게다!” 어쩌고 하면서 총을 들고 이집 저집 드나들며 설치는 바람에 온 동네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고는 새벽까지 청룡산 뒤쪽으로 쫓아가면서 총질을 해대는데 온 동네 사람들의 간이 콩알만 해질 지경이었다. 이튿날, 겁에 질렸던 마을 사람들은 다시 일하러 나갔고, 집안 아저씨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이야!” 하면서 종익 아저씨와 그 일행들의 용맹스러움을 귓속말로 쑥덕이면서 영웅시하였다. 이때의 사건은 우리 마을에서 유명한 얘깃거리 중 하나이다. 양양 우리 집안 가운데 개울마을 종면 아저씨의 동생 되는 "말뼉다구"라는 별명을 가진 종익 아저씨가 남조선으로 넘어갔다가, 호림부대 첩보대의 중대장이 되어 38 이북 고향 일대의 군사 동정을 정탐하려고 동료 여럿과 함께 잠입하여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마을 인민위원장 패거리가 이 사실을 눈치 채고 물치에 있는 내무서에 신고를 하였다. 급히 총을 들고 온 내무서원들이 우리 동네로 들이닥쳐 아저씨와 일행이 한밤중에 달아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먼 뒷날에서야 안 일이지만 아저씨 일행은 우리 집 뒤 ‘청룡언덕’ 허리를 타고 ‘넘은들’(소금재 고개 너머 벌판. 넓은들이라고도 한다)을 지나 상도문 위(지금의 설악동 성당 설악산 쪽 마을) 핏골을 지나 능선을 치달아 멀리 ‘권금성’ 건너편 달마봉 아랫길을 넘어서 금강산까지 잠입하여 움직였다고 했다. 아저씨는 젊었을 때부터 배짱이 대단했고 눈빛이 샛별처럼 빛났으며, 몸이 날래기가 비호와 같았다고 나의 부모가 말했다. 그 이후 6ㆍ25가 발발한 해 10월에 국군이 진격해 우리 고향에 들어왔을 때 함께 들어온 아저씨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허리에 권총을 차고서는 대뜸 한다는 말이 내 아버지와 우리 집을 지칭해, “그 형님이 이북 원산으로 올라갔다구요? 그러면 그렇지 빨갱이구만! 아, 내가 그때 밤중에 도망해 그 형님 집엘 가서 몸을 좀 숨겨달라고 하니까 문도 열어주지 않더니만 과연 빨갱이구만! 그 쌍년 지금 내 앞에 있었으면 이 권총으로 쏴 죽였을 거야!” 하며 아저씨한테는 형수가 되는 나의 어머니를 지칭해 종익 아저씨가 함부로 말하는 것이었다. 할머니와 내 면전에서 들으라고 함부로 떠들어 무안을 주었는데 할머니와 나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죄인처럼 가만히 있었다. 먼 훗날 1967년인가, 종익 아저씨가 6ㆍ25 사변 전 남북 정세 기록 책자를 편찬하기 위해 자료 수집차 서울로 올라왔다가 아버지를 만나러 서울 성북동 우리 집엘 다녀간 적이 있었다. 대화 도중 나의 아버지가 그때까지 참고 있던 그 당시 상황을 말하면서 “그때 자네 형수가 자네에게 문을 열고 숨겨주지 않았기에 마을 사람들이 다 살아났지 그놈들이 조금 있다가 들이닥쳐 온 동네와 우리 집을 이 잡듯이 뒤질 때 자네가 잡혔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자네도 죽었고 마을사람 전체가 어떻게 됐겠느냐 말이야! 다행이 먼 곳으로 피했으니 망정이지 그렇게 함부로 말하다니!”하며 호되게 야단을 쳤고 종익 아저씨도 6ㆍ25때 젊은 기백으로 함부로 말한 것을 사과한다고 해서 오해가 풀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6ㆍ25 이후부터 최근까지도 그 아저씨를 집안 어른이기에 함부로는 못 대했지만 속으로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던 모습을 용서할 수 없어서 데면데면 하게 대했다. 아저씨도 올해 여든셋 되었고, 오랜 동안 강릉에서 사는데 얼마 전 갑자기 병약해져서 외롭게 투병 중이란 얘기를 전해 듣고는 그로부터 연락을 취하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드리곤 한다.(계속) 3. 아버지의 설악산 잠적 (1). 만해 한용운 선생댁과의 인연 당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내세운 38 이북 공산 치하에서는 ‘종교는 아편이다.’라며 김일성만 숭배하라는 시대여서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악산 신흥사엔 많은 스님들이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다만 얼굴이 넓적스레하고 눈에 눈곱이 더께더께 낀 나이 많은 절 지킴이 스님 한 사람만 있었는데 이름을 한흥운이라 하였다. 어머니는 그 스님의 이름이 만해 한용운 선생과 비슷하여 한용운 선생의 동생이 아닌가 하였는데 이름이 비슷한 것뿐이었다. 한용운 선생과 우리 집안의 인연은 내 외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해주 오씨이고 함자가 진(振)자 환(煥)자를 쓰는 어른이다. 사찰 같은 큰 건물을 짓는 상도문(지금의 속초시 설악동)의 대목(大木)이고, 소시 적엔 인제의 용대리에서 살다가 다시 고향인 도문으로 왔는데 백담사, 오세암, 봉정암, 신흥사, 낙산사, 홍련암 등 우리지방 근처엔 외할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대형 사찰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만해 선생보다 6살이 아래였는데 호형호제 하는 사이라 하였고, 봄철에 백담사 절의 밭에 옥수수를 심어 놓고 여름이 조금 지나 일이 없을 때는 늘민령(저항령의 별칭)을 넘어 옥수수를 한 지게씩 얻어 수북이 담아 지게에 지고 왔다고 한다. 어머니의 소싯적 기억 속에도 만해 선생이 집에 들르던 정경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 모두가 1962년에 우연히 서울 만해 선생 댁 이웃에 이사를 가서 그분의 딸과 병약한 만해 선생 부인을 처음 만나 나의 어머니와 만해 선생의 딸이 옛날 얘기를 하면서 친하게 지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있지 않아 만해 선생 부인은 그 곳 성북동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신흥사에 숨어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속초에 탁발 나갔던 스님이 허겁지겁 돌아와 지금 밖의 공기가 수상하니 피하라고 하여 설악산 울산바위를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흔들바위 옆에 있는 계조암으로 또 피신하였다. 주로 그곳에서 나무껍질, 산나물, 풀뿌리 등으로 생식을 하면서 1947년부터 1950년 1월 하순까지 있었으니 참으로 오랜 동안 숨어 지낸 시절이었다. 가끔 어머니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 만나보면 아버지 모습은 머리는 어깨 너머로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렸고, 수염을 깎지 않아 흡사 산 귀신 으시미(이무기?) 같아 아주 우스운 꼴이라 하였다. 이때 아버지는 설악산 일대의 모든 역사와 일화들을 기록해 두었다. 아버지가 안 보이는 사실을 이튿날 아침에야 안 나는 아버지가 어디 갔느냐고 자꾸 물었는데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때마다 어린 나를 보고 아버지는 저 멀리 돈 벌러 갔는데 이담에 돈 많이 벌어 올 거라고만 하였다. 아버지의 행적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어머니는 한밤중에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설악산 깊은 산골에 식량을 준비하여 아버지에게 비밀리에 가져다주고는 밤새도록 왕복 40리 길도 넘는 거리를 목숨을 걸고 다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1948년 봄 4월 회룡인민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할머니의 손만 잡고 입학식에 참석했다. 그 때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학교 교실 쪽으로 다가가 교실 안을 신기한 장소로 알고 호기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여기가 어떤 곳인가’ 하는 생각에 유심히 여러 차례 들여다보던 어린 시절의 느낌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지난 30여 년간 교직생활을 하면서 항상 학교를 사랑하고,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갖게 만들어준 ‘학교’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47년 우리 집의 얼마 되지 않는 농경지는 모두 김일성 집단에게 몰수당하였다. 인민군에 입대한 아버지의 4촌형제 종각, 종숙 두 아재의 어머니(나에게는 작은댁 할머니)는 밭일도 할 줄 모르는 분이었는데 우리 텃밭은 작은집의 소유가 된 것이었다. 우리 집은 농사지을 손바닥만한 땅도 그나마 없는 완전한 거지꼴이 되었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 때 작은댁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자기 집에 땅이 공짜로 생긴 일을 두고 “에이그! 세월이야 참 잘 됐지 뭐유.”라고 말하여 나의 할머니에게 평생의 한을 심어 주었던 일도 있었다. 당시 38 이북 공산 치하에서는 공산 사회주의로 인해 분배라는 핑계대며 친척과 이웃간의 인간적인 관계의 파괴가 도처에서 이런 현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계속) 2). 원산 여행. 1950년 2월 초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여동생을 데리고 비밀리에 기차를 타고, 원산에서 생활했을 때의 친한 친구인 팔용 아저씨 댁에 몸을 숨기고 지내게 되었다. 그 때 그 아저씨는 원산에서 커다란 양조장을 경영하였는데 아버지가 그 곳에서 일자리를 얻은 것이었다. 1948년 여름에 할머니는 인민학교 1학년생인 나를 데리고 기차 편으로 강현 역을 출발하여 원산까지 갔다 온 일이 있었다. 그 때에 할머니는 팔용 아저씨와 내 부모의 거취 문제를 은밀하게 논의하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할머니와 원산으로 올라갈 때 기차간에 웬 허름한 젊은 여자가 머리를 부스스하게 하고선 뛰어 올라와서 열차 통로에 서서 불안한 듯이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갑자기 러시아 노래를 빠르게 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카츄사 노래 ‘딴―따라 딴―따 딴딴딴딴 딴―따 딴―따라 딴―딴 딴딴딴딴따―’ 하는 음률이었는데 그 여자가 멋들어지게 연달아 불러 군인들의 박수를 받았다. 기차 승무원이 제지를 하면서 끌어내려고 하니까 그 기차간 여기저기에 앉아 있던 소련군 로스케들과 모든 군인들이 역무원 보고 가만 놔두라고 해서 그 여자는 연달아 노래만 부르면서 금강산 쪽으로 가다가 어느새 사라진 기억도 난다. 그 해 회룡 인민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한글을 배웠다. 겨우 ‘ㄱ’자 옆에 ‘ㅏ’하면 ‘가’자이고 ‘ㄴ’ 자 아래 ‘ㅜ’ 하면 ‘누’자라고 알고 있을 정도였다. 열차 역을 지날 때마다 역 이름을 읽으며 지나고 있는데 금강산 역을 지나 통천 역에서는 ‘통천’이란 글자가 어려워 어물어물거리고 넘어갔었다. 옆에 동승한 어떤 할머니도 글자를 모르는지 나를 가리키면서 내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 저 나이에 글자를 저렇게 잘 읽으니 참으로 똑똑하다 하면서 할머니 앞에서 나를 칭찬하여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다. 요즈음 나의 손녀딸을 예로 하여 보아도 우리 나이로 이제 겨우 네 살인데 웬만한 글자를 다 짐작하고 컴퓨터를 조작해 어린이 프로그램을 열고 제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의 영어주소까지 구분하여 마우스 조정을 잘도 하며 찾아보는 정도인데 그 할머니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천재들 세상이라고 기절할 판이 되었다. 시골 문맹지역이고 호랑이 담배 피울 시절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여덟 살이나 되어 기차 타고 가면서 한글 몇 자 짝 맞추어 띄엄띄엄 읽었는데 그걸 가지고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은 아이는 아마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나만을 고향 마을에 남겨두고 비밀리에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올라가면서 그곳에서 자리 잡으면 가을께나 할머니와 나를 데리러 올 테니 그리 알고 있으라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해 6월 25일 갑자기 사변이 터져 서로 생사도 모르고 할머니와 나는 단둘이 고향에 떨어져 먼 북쪽 원산에 있는 가족과 전쟁 통에 난데없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계속) 4. 감시 대상 우리 집 1948년 10월 중순이 조금 지나 내 둘째 여동생이 태어났다. 나의 아홉 형제자매 중 다섯만이 살아 있는데 고향에서 난 형제는 바로 둘째 여동생뿐이다(나의 형과 바로 아래 남동생은 해방되기 전 함경북도에 살 때 홍역으로 사망하였고, 거제도에서 태어난 여동생 둘은 앞으로 다시 말하겠지만 피난 시절 거제도에서 사망하였다). 우리 집이 가장 가난했고, 가족 모두가 공포 속에 살았던 시절이라 둘째 여동생은 영양실조 등 잔병치레도 참 많이 하면서 자랐다. 갓 태어난 동생이 어느 정도 큰 뒤 내가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가 동생을 어린 나의 등에 업히고 포대기 끈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너무 꽉 매주는 바람에 가슴이 답답하여 숨이 막혀 쩔쩔매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나에게 동생을 업혀 주고서 농토가 없어 농사일은 못하고 그나마 바느질 솜씨가 좋아 동네 삯바느질을 도맡아 하였다. 당시 어머니의 이 삯바느질 삯이 우리 집안 수입의 전부였다. 1948년 늦가을의 일이다. 시골 벽촌이라 머리가 길면 할머니가 잘 들지도 않는 재봉 가위로 듬성듬성 머리카락을 짧게 깎아 주었는데, 아무리 열심히 깎고 다듬어도 사내인 내 머리는 흡사 얼룩말 가죽 씌워 놓은 꼴이었다. 나는 이것이 창피해 누가 있으면 양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고 지내던 중에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려는데 담임선생이 나를 아주 다정히 불렀다. 이제까지 선생이 그렇게 다정하게 부른 적이 없는데 나는 의아해 하면서 예의 그 얼룩말 가죽 같은 내 머리통을 감싸고 긴장한 자세로 선생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선생이 내 머리를 아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어 주면서, “찬수야! 네 아버지 요즈음 잘 계시지? 아버지 집에 오셨니?”하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젊고 예쁜 우리 선생이 왜 갑자기 우리 아버지 안부를 묻는지 의아했고 그때 내 아버지는 내무서원들에게 사상이 이상하다고 감시를 받다가 잠적하여 이웃도 모르게 설악산 계조암에 몇 년간 몰래 숨어 있을 때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못 보았기에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오히려 머리 깎은 창피함보다 나의 또 다른 관심사는 내 어머니가 있는데 왜 예쁜 선생이 관심을 갖느냐, 이것이 더 큰 의문거리였다. 어렸지만 나의 이성 감각은(?) 상당한 수준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기도 한다. 선생은, “찬수야! 네 아버지 오시면 꼭 아무도 모르게 살짝 알려줘!”하고 당부하는 사랑 넘치는 듯한 말투를 뒤로 하고 창피한 까까머리를 감싸며 집으로 갔다. 그 뒤 내가 철이 들면서 생각하니 그 선생을 통하여 내무서원들이 아버지를 수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공포를 느꼈다. 어린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심리를 이용하여 그들은 나에게 아버지 행방 여부를 추적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때부터 세상은 김일성을 서서히 신격화시키는 세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요즘 김일성 항일 전투랍시고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나 ‘김일성 일제 항쟁’이란 내용을 우리는 알지도 못했고 또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았다. 다만 우상화 작업으로 김일성을 내세울 때는 콧수염 달리고 모자를 쓴 스탈린 대원수라고 씌어진 사진 옆에 김일성 장군 또는 김일성 원수란 명칭으로 된 새파랗게 젊은 사람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 사람들이 지나다가 눈에 띌 만한 벽에는 거의 놓치지 않고 붙여 놓았다. 초기에는 김일성이 너무 젊어서인지 어버이, 아버지 등의 칭호도 그 사진 밑에 자신 있게 붙이지 못했던 분위기였다. 주로 김일성 장군, 원수라는 칭호를 썼다. 아마 당시는 김일성의 배경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고 김일성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을 다 숙청시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리라. 그리고 그 먼발치엔 남조선의 미국의 꼭두각시 대통령 이승만이란 설명글을 사진 아래에 써서 걸어 놓았는데 사진이라기보다 괴상하게 그린 만화 초상화를 그려서 붙여 놓았다. 코는 꼬불꼬불 길게 하고, 길게 그린 손가락 발가락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금반지가 모두 스무 곳에 가득 가득 끼워져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계란 깨 넣은 목욕통에서 도깨비들처럼 좋아라고 놀아나며 목욕을 하는 그런 해괴한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집안 어른들끼리는 ‘김일성은 가짜다’라는 소리만 비밀스럽게 오갔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38선 이북 인공치하에서 그렇게 나도는 말을 부지기수로 많이 들었다.(계속) 5. 깊은 밤중에 본 아버지 늦은 가을 어느 날, 한밤중 웬일인지 홀연 잠이 깬 내가 들으니 주변에서 두런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못 뵙던 아버지가 한밤중에 보고 싶은 가족을 보러 온 것이다. 아버지가 어리둥절한 나의 까까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잠든 어린 두 동생도 안아 보고 머리를 쓰다듬어 보며 한참 그렇게 있다가 보따리를 챙기더니만 밖으로 조용히 나갔다. 어머니가 먼저 밖으로 나가서 망을 보고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할머니도 허겁지겁 밖으로 따라 나갔다. 영문도 모르고 잠결에 불안한 마음으로 있다가 순간 ‘아버지는 참으로 이상하다’라고 생각했고, 왜 집에서 같이 재미있게 살지 않고 저렇게 밤중에 먼데로 가는가 하고 몹시 의아해 하였다. 1947년부터 1950년 1월 말까지, 아버지가 설악산 신흥사 계조암에 잠적한 뒤부터 원산으로 몰래 피신할 때까지 나는 이렇게 아버지를 두세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이튿날, 내가 학교에 가려는데 어머니와 할머니는 번갈아 가며 나를 붙들고,“누가 아버지에 대해 물으면 아버지 못 보았다고 대답해라.알겠니. 아버지 못 보았다고, 알았지!” 하면서 수도 없이 나에게 다짐받던 생각이 난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어른들로부터 거짓말을 강요(?)받은 셈이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와 어머니 말은 처절한 삶의 절규였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가 왜 저렇게나 두려운 눈빛으로 야단인가 속으로 의아해 했다. 거짓말까지 하라니……. 그러나 어린 나였지만 할머니 어머니 말을 명심하고 누구를 만나도 아버지에 관한 얘기엔 시치미를 딱 떼고 모르는 척했다.(계속) 6. 금강산 수련과 아오지 탄광 1949년 여름방학이 될 무렵 우리 학교에서는 기억나는 행사 하나가 있었다. 상급생 어린이위원장(학생회장 격) 형이 금강산 수련을 떠난다 하였다. 운동장에서 교문까지 선생들과 학생들이 모두가 도열한 한가운데로 그 형이 양 어깨에 손바닥만 한 계급장 같은 것을 달고 어깨를 재며 당당하고 멋스럽게 지나 갈 때 선생이 커다란 목소리로, “우리의 최영호가 영명하신 김일성 장군님의 은혜로 금강산 수련을 떠난다!” 하면서 요란하게 박수를 치며 환송하던 기억이 난다. 얼마쯤 뒤 그 어린이위원장 형이 돌아올 땐 더 대단했다. 선생이 “보라! 드디어 최영호 동무가 김일성 장군님의 가르침을 받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라!”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나는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나도 이다음에 커서 저 형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면서 몹시 부러워했다. 지금도 나는 그 때의 생각이 나서 우리 대한민국의 청소년 학생들이 우리나라 입장에서 단순한 목적으로 금강산으로 관광 가는 것을 그리 좋은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김일성 우상화의 사상교육에 자칫하면 동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 여기고 있다. 또 ‘동무’란 호칭이 그때부터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강요되었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이 ‘동무’ 호칭이 너무 우습다고 수군거리며 웃던 기억도 난다. 아버지 동무, 어머니 동무, 아저씨 동무, 할아버지 동무, 위원장 동무, 어버이 수령 동무……. 그저 갖다가 붙이는 게 동무라서 형들은 한편으로는 재미도 있지만 비아냥거리면서 쓰레기 동무, 바가지 동무, 삽살개 동무, 송아지 동무 하며 킥킥대고 웃던 생각도 난다. 나도 그 때 처음 불러 보는 이 ‘동무’ 호칭이 이상하게만 들렸다. 아버지 동무라니! 1949년 3월 중순, 그러니까 6ㆍ25가 나기 전 해에 우리 동네 개울마을 아래쪽 다리께 돌담 울타리 안에 커다랗고 멋진 노송이 있는 집에 머일 이모할머니 가족이 이사를 왔다. 머일 이모할머니는 나의 할머니의 막내 여동생이다. 이모할아버지는 윤씨이고 키가 크며 거의 대머리인데 상투가 정수리에 틀어 올려있지 않고 뒤통수에 매달려 있어서 볼 때마다 그 상투 매달린 이상한 모습부터 눈에 띄었다. 중국 청나라 때의 변발을 한 사람과 이모할머니 집터 개울말 노송 고목 비슷한 모습이었다. 나보다 연하인 아재 둘과 6촌 동생 남매와 아주머니 이렇게 일곱 식구가 이사를 왔다. 그런데 이모할머니 가족에게는 슬픈 사연이 있었다. 1947년 이모할머니 가족이 38선이 가까운 양양 광정리 머일에 살 때에 일어난 일이다. 이모할머니의 둘째아들, 당시 중학교 3학년인 석빈 아저씨와 몇몇 친구가 서로 짜고 38선 넘어 남쪽으로 몰래 숨어서 내려간 일이 있었다. 그때 광정리 쪽은 38선이 가까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숨어서 왕복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당시 공산주의 김일성 우상 숭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인데, 담임선생이 너무 심하게 학생들을 혼내며 몰아치는 바람에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학생들이 담임선생에 대한 반항심으로 이남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내려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대한민국 국방군 경비초소에 들키고 말아 모두들 초소 한 곳에 모여 있게 되었다. 국방군이 이들을 보고 내려온 사유를 자세히 말하라고 하니 석빈 아저씨와 친구들은 담임선생이 너무 못살게 굴어 기분 나빠서 길을 들이려고 내려 왔다고 철부지 같은 말을 했다. 말을 듣고 난 후에 국방군이 사춘기 어린 소년들을 설득하기를, “너희들은 한참 공부할 나이고 또 부모와 떨어져서는 살지 못하는 나이다.” 라고 하면서 “어서 다시 넘어가서 열심히 공부 하고 어른들 말씀을 잘 들으라.” 하고 당부까지 하니 순진한 그들은 다시 몰래 넘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이 사실을 담임선생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 때의 학생들을 모두 호출하고 족쳐대어 이들은 일시에 사상범으로 몰려 조사를 받게 되었고 이어서 학생들 가족까지 모두 조사받게 되었다. 이 바람에 그 동네 몇몇 학생들의 형들도 억울하게도 사상범으로 몰려 함경도 아오지 탄광으로 징역을 보내게 되니 부모들과 친척들은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어 온 마을이 슬픔으로 가득하였다. 석빈 아저씨의 형인 석순 아저씨도 쇠사슬 차고 아오지 탄광으로 가게 되었고, 두 아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이모할머니와 이모할아버지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그 이후로 슬픔 속에서 인생을 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머일 이모할아버지 가족은 그 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큰 딸이 출가해 사는 하복리 동네 개울말로 이사를 온 것이다. 이사 온 뒤에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몇 번인가 수도 없이 아오지 탄광으로 면회를 갔지만 면회를 시켜주지 않아 헛걸음하고 돌아와 아들들에게 주려고 가지고 간 미숫가루가 든 보따리를 땅에다 내동댕이치며 주저앉아 땅을 치고 통곡을 하는 이모할머니를 여러 번 보았다. 6ㆍ25 동란 중 미군의 폭격으로 아오지 탄광에서 석빈 아저씨와 친구 한 사람이 감옥을 탈출하였는데 탈출할 때 어디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곳에 먼저 온 친구가 여러 시간 숨어서 기다렸지만 오지를 않자 석빈 아저씨를 뒤로 하고 혼자 고향에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고향에서는 잔치가 벌어졌고 그 일가친척들은 좋아하였지만 이모할머니는 두 아들들이 오지 않아 또 한 번 더 큰 슬픔에 잠겼다. 혹시나 하며 그 탈출 때까지의 아들 얘기를 더 들으려고 고향에 온 그 아저씨 집을 한동안 출퇴근하듯이 하였고, 나중에는 그 아저씨를 수양아들로 삼고 지냈지만 할머니의 한이 그것으로 풀리랴. 1992년, 머일 할머니가 세상 떠나기 1년 전에 나는 양양 읍내 장거리께에 사는 아흔셋 되는 이모할머니를 찾아갔다. 허리가 꼿꼿하고 안광이 빛나기는 여전하였다. 송이와 산삼을 캐러 한 달여씩이나 산에서 텐트를 치고 노숙할 정도라기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가끔 찾아뵈었지만 안방에 나와 같이 앉으면 그때마다 으레 공산당 놈들에게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아저씨들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하도 많이 들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내가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소연하듯 그냥 내뱉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온유한 이모할머니가 아저씨들의 기억을 떠올릴 때는 아주 달랐다. 그 연약하고 가냘픈 팔의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내 앞에서 방바닥을 손목에 멍이 들도록 내리치면서, “네 이놈! 김일성 이놈! 내 그 놈의 살을 깨물어 으깨 먹어도 시원찮은 놈! 그놈의 살이 내 앞에 있으면 씹어 찢어 버리고 말테야!”하며 입에 거품을 물어 가며 말할 땐 처절하기 짝이 없었다. 방바닥을 내리치면서 절규할 때마다 나는 눈물이 나서 할머니 앞에서 같이 주먹을 불끈 쥐어 가며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할머니 말을 듣곤 하였다. “김일성 이놈 뒈지는 꼴을 보고 난 뒤 나도 눈을 감아야 할 텐데!”하던 이모할머니가 김일성이 죽기 전, 1993년 조금이나마 한도 풀어 보지 못하고 두 아들을 천국에서나 만나려고 돌아가신 것이다. 1993년 초겨울 장례식날 나는 대성통곡을 하였다. 발인 때 이모할머니가 생전에 땅을 친 것처럼 나도 땅을 치며 관을 붙들고 소리 내어 울었다. 할머니의 평생의 한이 떠올라 너무 슬펐다. 지금도 이모할머니의 슬픔이 생각나 눈물이 앞을 가린다. (계속) 7. 고향에 남은 할머니와 나 나는 학교 가는 날만 빼고는 매일 할머니 치맛자락만 붙들고 졸졸 따라다니다시피 하였다. 할머니의 나에 대한 정성은 대단했다. 할머니는 7남매를 낳았는데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다 유행병(주로 홍역)에 걸려 6남매를 잃은 충격과 한을 가슴에 가득 지니고 산 분이었다. 심지어 하루 저녁에 두 아들을 잃은 적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 한번은 석 달 가량이나 정신을 잃고 지냈다고 했다. 오직 나의 아버지만 무녀 독남으로 살아나 성장한 것이다. 그러니 아들과 손자에 대한 사랑과 집념이 대단하였다. 연년생으로 난 내 아우 때문에 나는 돌이 조금 지나 할머니 차지가 되었고, 할머니의 젖을 5살까지 먹어 젖이 나왔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주로 다른 집 농사일을 거들어 주고 겨우 끼니 되는 정도만 얻어 와서 우리 집 양식으로 했다. 할머니는 체구는 작았으나 워낙 부지런하고 기운이 세어 장정들이 지는 지게를 지고 일을 해 동네 어른들이 놀랄 정도라 하였다. 또 삼베 베틀에 앉아 하루 종일 삐이꺽 찰가닥, 삐이꺽 찰가닥 하는 소리를 내면서 북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왔다갔다 건네고, 그때마다 오른손 쪽에서 건네받은 북을 왼손에 쥐고 동시에 오른손으로 바디집을 잡아당겨 가로로 이어진 실을 다지고 한쪽 발에 베를 짜는 신을 신고 그 신의 코끝에 굵은 끈이 달려 베틀 뒤쪽 위로 이어진 끈이 잡아 당겨졌다가 풀어질 때마다 들리는 베 짜는 소리는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특이하고도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베 짜는 모습과 누에명주실로 비단을 짜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한 폭의 예술적인 동작과 같다고 생각된다. 그 동네에서 베와 비단을 제일 잘 짰다고 소문이 났으니까. 아버지가 열다섯 되던 해 음력 동짓달 초여드렛날, 할아버지는 대포에 가마니를 짜러 갔다가 밀폐되다시피 한 방안에 숯불 피운 데서 가스가 나와 일산화탄소에 중독이 되어 48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할머니는 외아들을 데리고 억척스럽게도 세상 속에서 살았다. 세상에서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다 해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공깃돌과 땅 따먹기 놀이 할 때 손가락을 굽혀 튕기는 사금파리를 동그랗게 다듬은 것이라든지, 심지어 자치기 막대까지 방 한구석에 신주단지 모시듯 잘 보관해 놓았다. 그리고 매일 저녁 옛날 얘기를 해주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우리 집안 내력을 노상 들려주었고, 특히 7대조부터 우리 집안의 가계 이야기라든지 조상님들과 얽힌 이야기, 할머니가 경험한 이야기와 이에 얽힌 동네 다른 집 이야기, 해방 전 함경북도에서 가장 유명한 전 포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때 나는 매일저녁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었다. 할머니가 얘기할 때 나는 할머니의 청수(聽手) 곧 지음(知音)이 돼 드린 것이다. 할머니가 입만 열면 나는 할머니의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다 알 정도였다. 내가 일흔이 가까운 나이가 되었어도 나는 지금까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 매번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반복되는 이야기라도 할머니는 처음 말하는 것처럼 항상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날짜라도 잊어버리겠니? 아무 해 동짓달 스무 아흐렛날 저녁이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 기억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할머니는 17살 되던 해 할아버지와 혼인을 했다. 할머니의 친정, 즉 나의 진외가는 양양군 서면 서림리 황이라는 곳이다. 바로 작년에 새로 생긴 양수 발전소 하부 댐 저수지가 있는 윗마을 황이라는 곳이다. 지금은 구룡령으로 길이 아주 잘 나서 홍천에서 쉽게 넘어 미천골 입구 쪽으로 올 수 있지만 예전엔 타지 사람들 구경도 잘 못하는 산골이었었고 사철 맹수가 출몰하였으며 특히 겨울철에 눈이 많이 왔을 때에는 사냥꾼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이라 한다. 17살의 나이에 시집온 할머니는 아주 부끄러움이 많아 농담 잘하는 시어머니(나의 증조할머니)의 말을 듣고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고 애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하루는 시아버님 즉 나의 증조할아버지가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 때 술이 아주 거나해서 들어왔다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술을 아주 좋아했는데, 술을 마시면 집에 들어와 밥을 먹고는 잠들지 않고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어느 날 증조할머니에게 술 더 가지고 오라고 술주정을 하는 바람에 시어머니가 새 며느리에게 이러이러하게 일러 17살 된 할머니가 술 대신에 쌀뜨물을 걸쭉하게 퍼서 가져다 드리니 증조할아버지가 여러 차례 맛이 좋다고 들곤 주정을 더 심하게 했단다. 이튿날 일찍 증조할아버지는 고조모의 부름을 받아 몸을 생각하지 않고 과음하고 주정까지 한다고 야단을 맞곤 어색하게 증조할머니한테 다가와서는, “어제 내가 주정을 많이 했나?” 하고 묻기에 증조할머니가 “내 보다 보다 쌀뜨물 마시고 주정하는 양반 처음 보았네.” 하고 말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대뜸 “아! 어제 저녁 새아기(나의 할머니)가 나중에 가지고 온 것이 쌀뜨물이었단 말이야? 어쩐지 내 주정이 좀 뜨더라!” 하고 농담을 했다. 할머니는 어른 앞에서 웃지도 못하고 혼자 장독대 뒤로 돌아 나가서 한참 동안 소리 내어 웃었다고 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할머니는 마치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며 소박하게 웃으면서 얘기해 주었다. 할머니는 친정 동네에서 일어난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다. 할머니 동기간이 4남매인데, 딸 형제가 셋이고 남동생이 하나였다. 나에게는 진외가 댁 할아버지가 되는 할머니 동생은 기운이 천하장사처럼 세었고 성함이 이갑산인데 깊은 산골 마을에 눈이 많이 내리면 마을 청년들과 같이 사냥을 자주 하곤 했다. 당시는 호랑이를 비롯해서 곰이나 산돼지 등 맹수도 많았다. 눈이 많이 온 어느 날에 마을 청년들이 산골짜기에서 곰 몰이를 했다.(계속) [화곡 김찬수/올인코리아:http://allinkorea.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