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후서 1장, 2장, 3장
부르심과 택하심,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 하나님의 날(주의날)
<경건한 삶의 원천>
1~11절
1:1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동일'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특권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동일한 지위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성취 되었습니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가리키며 믿음은 예수님에게 온 선물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구주로 불리며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신약의 가장 분명한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1절).
'신기한 능력', 하나님은 친히 그 무한하신 능력으로 자신만이 이루실수 있으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성품과 조화되게 살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3절).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허락하셨습니다. 신자들은 바로 이 약속들을 통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됩니다. 신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일부가 되지는 않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을 점점 더 닮아가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합니다. 베드로는 신자에 변화된 삶에 도덕적 초점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심할 때 정욕에 뿌리를 둔 이 세상에 썩어질 것에서 건져 냄을 받습니다(4절).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 점점 더 자라가는 평생에 걸친 패턴이 기대되며 이는 열매맺는 사역의 핵심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5~7절의 특성들을 점점 더 많이 나타내는 삶이 수반되지 않으면 효력이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8절).
이런것(참조, 5~7절)이 없는 자는 영적으로 '맹인'이며 '그의 옛 죄과 깨끗하게 된 것을' 잊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열매의 결여는 그 사람의 '깨끗하게 된 것'이 진정으로 변화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단지 외적인 변화일 뿐이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심각한 오류에 빠진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묘사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사람의 참된 상태를 아십니다(9절).
그리스도인은 더욱 힘써 자신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신자들을 믿음으로 부르시지만 또한 그들을 창세 전에 택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선 안 됩니다.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실족이란 아마도 배교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지만 결코 구원의 기초는 아닙니다. 베드로의 표현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도 배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배교하는 이들은 결코 진실로 "부르심"이나 "택하심"을 받거나 거듭난 적이 없습니다(10절).
'이같이', 즉, 배드로가 5~10절에서 언급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이러한 생활 방식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가는 길입니다. 이런 일들을 실천하는 이들은 영생의 상급을 넉넉히 받을 것입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넉넉히'라는 말이 이 세상과 하늘에서의 복과 보상의 정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거짓 선생들이 맞이할 운명과는 대조적으로 영생 그 자체가 여기서 말하는 상급이라고 생각합니다(11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경의 예언>
12~21절
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교묘히 만든 이야기', 이야기는 헬로우 '위토스'(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이야기, 전설)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신화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 사건 때 그리스도의 "위엄"을 친히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능력으로 임하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신화적인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문학적으로 등장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사건의 전주곡이자 예고편의 역할도 했습니다(16절).
'우리가....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변화산 사건과 관련해서 자신과 다른 사도들의 목격자로서의 지위를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성부가 예수님을 자신의 아들로 선포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만일 다른 누군가가 이 편지를 배드로의 이름으로 썼다면 그 사람이 스스로 목격자의 지위를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18절).
'더 확실한', 어떤 이들은 더 확실함을 구약의 예언서들이 변화산 내에서의 베드로의 굉장한 개인적 체험보다 훨씬 더 확실하다는 단언으로 이해해왔으며 그로 인해 기록된 성경에 완전한 신뢰성을 강조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베드로의 변화산 체험이 구약의 예언에 대한 확증을 제공하며 이미 확실한 구역의 예언에 변화산의 경험을 통해 확증된 것으로서 훨씬 더 확실한 것으로 만든다고 이해해 왔습니다. 어느 경우에는 베드로는 예언의 확실성에 주의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에게는.... 있어"와 "너희가....하는 것이 옳은이라" 사이의 대조를 통해 베드로는 사도들("우리")의 해석을 교회에 있어서 권위가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날이 새는' 것과 '샛별'은 둘 다 재림을 가리킵니다. '주의 날은' 구역에서 자주 가르치는 것처럼 마지막 심판과 구원이 날입니다(19절).
이 구절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 주요 견해가 제기되어 왔습니다. (1) ESV에 번역과 가장 잘 조화를 이루는 견해인 첫 번째 견해는 이 구절의 구약성경의 예언들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즉,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해석한 데서(즉, 사건이나 환상이나 그 밖의 것들에 대한 누군가의 개인적인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즉, 기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나왔다는 점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이는 헬라어 단어 '기노마이'의 가장 흔한 의미인 '생겨나다'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첫 번째 견해에 따르면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모든 구약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신자들은 아마도 성경을 펌하하고 있던 거짓 교사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런 말씀들에 면밀히 주의해야 한다는 점을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2) 두 번째 견해는 이 구절 구약의 예언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어떤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해석한 문제가 아니니라고 번역합니다(개역개정의 입장).
이 두 번째 견해에 따르면 베드로는 구약성경을 사도들이 해석하는데로 해야 하며 따라서 거짓 선생들에 의한 구약해석은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견해도 가능하지만 인접 문맥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베드로의 전반적인 강조에 비추어보면 첫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해 보입니다(20절).
어떤 성경의 예언도 단지 인간이 예언하기를 원했기 때문에('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은 오직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주신 것이며 '성령에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말한"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의 선지자들 안에서 그들이 예언할 때 그들의 삶과 환경을 통해 역사하신 능동적인 계시의 동인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 교리에 대한 핵심적인 구절로 성경이 성령의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자신의 인격, 지식, 배경, 어휘, 문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성경의 영감이 인간 저자의 인격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게 성령의 인도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비록 인간의 말로 기록되었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21절).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베드로는 편지의 이 네 번째 주요 단락에서 거짓 선생들과의 논쟁에 뛰어들면서 이를 위해 성경적 유비를 사용합니다.
1~10절
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3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0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을 묘사합니다. '가만히',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교회에 은밀하게 끌어들임으로써 진리를 파괴할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근본적으로 교리로 제시한 것과 반대되며 생명이 아닌 영적인 파멸로 비교될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마저 부인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거짓 선생들의 가짜 구원을 묘사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듯 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교회의 일부였으므로 스스로 구속받고 구원받았다고 주장했지만 거짓 선생들의 배교는 그들이 진실로 신자는 아니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거짓 선생들의 죄에 대한 대가 마저도 치렀지만 자기들을 사신 그들 스스로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가 지불을 그들에게 적용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절)
탐심도 거짓 교사들의 원동력입니다. 그들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 지어낸 말을 가지고 신자들을 이용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역사적으로 성적인 죄, 돈에 대한 탐욕, 부정직함으로 특정 지어졌습니다. 그런 모든 거짓 선생들은 '심판'과 '멸망'에 직면합니다(3절).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을 입증하는 자세한 논증으로 화제를 전환합니다. 베드로는 소전제에서 대전제로 전개되는 랍비식 증명 방식(A가 참이라면 B는 얼마나 더 참이겠는가?)을 사용하며 4~8절에서의 유비는 9~10절에서의 대전제로 이어지는 소전지에 해당됩니다.
첫 번째 소전제,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A) 하나님이 죄지온 천사들을 영원히 심판하셨다면 (B) 이 거짓 선생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은 얼마나 더 확실하게 정죄하시겠는가?(대전제). (4절)
두 번째 소전제, (A) 하나님이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셨다면 (B) 거짓 선생들은 얼마나 더 확실하게 심판하시되(대전제) 그와 동시에 경견한 자들은 보존하실 것인가?(대전제) 그리스도인들은 적은 소수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5절).
세 번째 소전제,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마지막 날에 있을 불에 의한 심판의 '모형'(신적인 예고)으로 보지만 거짓 선생들은 이 일을 부인할 것입니다. (A)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정죄하셨다면 (B) 복음을 거부하는 '경견하지 아니할 자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임은 얼마나 더 확실한가?(6절).
네 번째 소전제, (A) 하나님이 소돔에 있는 '무법한 자들'의 '행실'로 인해 '고통 당하는' 심지어 심령이 상한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면 (B) "경건한 자"는 얼마나 더 "건지실" 것인가?(대전제) 어떤 이들은 롯이 저지른 심각한 죄들(창세기 19장)을 고려하여 롯이 진정한 의인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결코 완벽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롯이 방문한 천사들을 영접하고 그들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려 했다는 점에서 롯을 소돔주민들과 구별합니다. 롯의 행동은 무법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환경에서 중요하고 용기있는 행동이었습니다(7~8절).
베드로는 소전제를 진술한 뒤에 이제는 대전제로 넘어갑니다. 4~8절이 사실이라면 9~10절은 얼마나 더 참이겠는가? 하나님은 진실로 '경견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십니다. 베드로의 신자들의 경우에는 거짓 선생들과 그들의 영향으로부터의 신적인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불의한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두고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의 날 이전에도 부분적이고 예비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은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들', 아마도 거짓 선생(이단)들에 대한 언급일 것입니다(9~10절).
<거짓 선생들의 특성>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의 기본적인 특성에 대해 길게 묘사합니다.
11~22절
2: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거짓 선생들은(무모하고 소견머리 없이) '당돌하고 자긍하며'(완고하고 거만하며) 천사들도 피하는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그들은 '영광있는 자들을 비방'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무모하게도 이런 귀신의 세력에게 능력이 있거나 자신들의 고의적인 죄로 인해 자신들이 귀신의 공격에 노출될 것이라는 어떤 생각도 거부합니다. 그러나 선한 천사들은 지혜로운 인간들처럼 이런 악한 세력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11절).
거짓 선생들은 이성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은 짐승같이 행동하며 이성도 진리도 따르지 않고 본능을 따르며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마저도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와 함께 연회'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행세를 하면서 이와 같이 행동합니다. 여기서 연회란 아마도 성만찬에 대한 언급일 것입니다. 그들은 심각한 신성모독의 죄를 지으며 부도덕하게 삽니다(12~13절).
그들의 눈은 그들이 만나는 거의 모든 여자에게 음심을 품습니다. 그들의 죄에 대한 욕망은 결코 만족되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굳세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들의 방탕에 동참하도록 유혹합니다. 성적인 제어와 탐욕은 이 거짓 선생들의 특징입니다. '저주의 자식이라',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이단들은 하나님의 저주에 직면할 것이라고 확언합니다(14절).
'그들이....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민 22~24장), 이는 악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이익을 얻으며 사는 삶입니다. 발람은 특별히 탐욕으로 인해 정죄 받았습니다. 발람은 아마도 영적인 통찰력이 있는 인물이겠지만, 하나님은 이성적이고 책임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친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제지하는데 '나귀'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15~16절).
거짓 선생들은 '물 없는 샘'이며(그들은 원기 회복을 약속하지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바람에 '밀려가는 안개'여서(그들은 가는 곳마다 혼란의 씨를 뿌려) 어떤 내재적 가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악한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습니다(17절).
거짓 선생들은 죄의 마수에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서....유혹'합니다. 그들은 새롭게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먹이감으로 삼아 그들에게 성적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도 거기서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가리킵니다(18절).
거짓 선생들은 자유를 가장하여 활동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처럼 다시 한 번 악에 정복당한 '멸망의 종들'이 되도록 유혹합니다(19절).
거짓 교사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길을 따르다가 결국 그 길을 버리고 죄와 어둠의 삶으로 되돌아가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세상을 피한 적이 없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거룩한 명령'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나은 한 가지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거짓 되게 고백한 뒤에 돌아서는 이들은 다시는 그리스도를 고려하지 않는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 시도에는 삶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경험이 그들의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책임이 있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였지만 배교의 악한 행실을 통해 스스로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속한적이 없음을 보여준 이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진정으로 아는 이들은 자신이 은혜로 지켜줄 것이므로 결코 타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들은 자신의 본래 성품이 '개'(참조, 잠 26:11)나 '돼지'의 성품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 토하였던 것과 세상의 더러운 구덩이로 되돌아감으로써 스스로 진정으로 거듭난 적이 없음을 입증한 것입니다(20~22절).
<하나님의 날(주의날)>
베드로는 주님이 약속하신 재림을 설명하는 일과 특별히 재림의 시기에 대한 논쟁처럼 보이는 것에 주위를 돌립니다 베드로는 주의 재림에 대해 의심을 불러일으키려 하는 회의론자들에 대해 성경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1~10절
3: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베드로는 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들'(헬, '아가페토스') 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주의 재림에 대해 상기시키며 그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줍니다(1절). '기억하게 하려', 배드로는 교회가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사도들'이 주의 계명으로 전해진 내용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 가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는 예언은 재림입니다(2절). '말세'에는 자기의 '정욕'을 따라 비웃는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벌 받지 않고 죄 가운데 살려는 그들의 욕망은 그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와 그 진리를 믿는 이들을 비웃게합니다. 베드로는 나머지 신약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말세"가 이미 도래했음을 알고 있습니다(3절).
조롱하는 자들은 주께서 '강림'(헬, '파루시아') 하신다는 성경의 약속들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의 약속을 비웃으며 창조 이후로 모든 것이 그대로 있으므로 하나님은 세상에 개입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조상들'은 구약의 족장들을 언급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신약에서 1세대 기독교인들을 언급하는 데는 결코 사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조롱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 입의 말씀으로써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창 1:3~31)와 물로 땅을 심판해서 땅이 멸망했을 때도(창 6~9장) 세상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일부러 잊으려'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신구약에서 여러 번 입증된 대로 자신이 원하실 때마다 창조 세계에 개입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개입하신 두 가지 분명한 경우 즉,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땅을 만드시기 위해(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창 1:6~10), 역사하신 때와 노아 시대에 홍수로 땅을 멸하시면서 역사상 결정적으로 행동하신 때를 언급합니다(4~6절).
'사랑하는 자들아', 이 단어는 새로운 단락을 도입 합니다. 베드로는 재림의 지연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긴 시간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그러한 지연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기도 하며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역사의 한 시기를 금방 끝내시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모든 악의 패배를 갈망하지만 역사의 현 시기가 지속되는 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8~9절).
'주의 날',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히 연기되지 않을 것입니다. 재림 때에 그리스도는 도둑같이 경고없이 갑자기 오실 것입니다. '하늘'(창공)은 '떠나가고' 천체들(별들)은 뜨거운 불에 풀어질 것입니다. 숨을 곳은 없을 것입니다(계 6'15~16). 땅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심판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10절).
<주님의 재림을 염두에 둔 삶>
베드로는 또 다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 논의의 주제를 전환함으로써 주의 재림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합니다. 재림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11~18절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행실과 경견함' 가운데 살고 불경견한 자들에게 다가오는 형벌을 피하며 심판을 넘어서 지속될 일들에 헌신해야 합니다(11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실제로 주의 재림에 대해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언제 재림실지 미리 아시거나 미리 정하시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을 정하실 때 또한 신자들을 구원하고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자신의 모든 목적이 성취 된 이후에 그 일이 일어나도록 정하셨으며 그 목적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간 대리자들을 통해 그 목적을 성취하도록 역사 하실 때 성취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며 다른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때 실제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포함한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앞당기고 있는 것입니다(12절).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악인과 그들이 한 일의 파멸(비록 그것도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 필연적인 일부지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약속에 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의인들의 영원한 처소가 될 것입니다(13절).
신자들은 최후의 상급을 얻기 위해 경건한 삶을 살며 거짓 교사들의 성적 방임주의에 대응해야합니다. 베드로는 이 장에서 총 네 번 중에 세 번째로 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재림에 비추어 '점도 없고 흠도 없이'(교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순전하게) 나타나며 이를 통해 영생의 완전한 상급을 받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는 악인들의 영적인 상태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14절).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베드로후서가 기록되기 전 어느 시점에 같은 신자들에게 편지를 썼고 두 장의 거짓 선생들은 독자들 중의 일부를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기 위해 바울의 자유의 복음을 왜곡한 형태로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모든 편지에도', 여기에 그 편지가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일종의 바울 서신 모음집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이는 바울의 편지에 모든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것은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말도 아니며 성경의 몇몇 어려운 구절들을 정확히 해석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과 같이 바울의 가르침도 억지로 풉니다.
이는 바울의 글도 신약시대에 구약성경과 같은 수준의 신적 권위를 지닌 성경으로 간주되었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성경"으로 번역된 헬라어 '그리페'는 신약에서 51회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정경이 된 구약성경을 가리키며 다른 어떤 문헌도 가리키지 않지만 예외적으로 두 번(이 구절과 디모데전서 5장 18절)은 일부 신약 문헌도 포함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쓰거나 공헌한 신학의 책들이 매우 이른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었음을 보여줍니다(16절).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반응, 3장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들'의 네 번째 용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신자들은 이제 이전에는 몰랐더라도 거짓 교사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죄도, 무법함도 옹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거짓 가르침이 바울을 권위의 근거로 삼더라도 이에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따름으로써 '굳센 데서' 떨어지지 않아야 하며 도리어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통해, 특히 그리스도의 '은혜'(헬, '카리스', '은총', 특히 과분한 은총')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헬, '그노시스')에서 자라 감으로써 안정성을 길러야 합니다(17~18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