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6)
이기주와 류성옥(16) .
조선일보
입력 1997.11.03.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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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주와 류성옥(16) ##.
궁정동 경비원 관리책임자 이기주(당시32세) 는 1층으로 내려와서 경비원 엄현에게 "리볼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근무용으로 차고 있는 게 하나 있어요."
"주세요."
"근무용이라니까요."
"과장님이 달라고 하셔요.".
엄현은 허리에서 권총을 풀어서 건네주었다. 이기주는 박선호와 같은 해병대 출신(하사)으로서 태권도가 3단, 유도가 초단이었다. 다른 경비원들과 함께 매주 수요일에 공기권총으로 사격훈련을 하고 있었다. 근무할 때도 허리에 찬 권총에는 항상 실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박선호 과장은 '지시만 떨어지면 아무데나 쏴도 좋다'는 지침을 주어놓고 있었다.해병대 출신끼리의 독특한 인간관계 덕분에 이기주는 박선호의 특별한 배려를 받고 있었다.
박선호는 이기주로부터 5연발 38구경 리볼버와 권총집을 받아가지고는 탄알집을 열고 다섯 발이 든 것을 확인했다. 권총을 다시 집에 넣고 혁대에 끼운 뒤에 허리에 찼다. 이기주와 함께 1층으로 내려오면서 박선호는 "M15로 무장하고 와. 양복 상의 안에 넣고"라고 했다. 이때 박선호의 눈에 뜨인 사람이 자신의 승용차 운전사 유성옥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유성옥은 성격이 괄괄하고 용감하며 복종심이 강한자이므로 그를 선발하기로 결정했다'(합수부 진술서)는 것이다. 박선호 이기주는 같이 대기실 입구에 있는 총기함으로 갔다. 경비원이 꺼내주는 기관단총 M15 한 정과 15발이 든 탄창 한 개를 이기주가 받았다. M15는 M16 소총의 개머리판을 잘라내고 쇠손잡이를 붙여 기관단총처럼 변형시킨 것이었다. 경비원 관리책임자 이기주는 M15를 양복 저고리 안에 넣고 바깥으로 나갔다. 박선호는 신관을 나서서 건물의 모서리를 돌아 길을 건너가다가 따라오는 이기주에게 불쑥 "유성옥이 총 쏠 줄 아는가"라고했다.
"유성옥은 육군중사출신입니다."
총을 잘 쏠 줄 아는 지는 모르지만 육군중사출신이니 최소한 쏠 줄은 알지 않겠느냐란 뜻으로 한 말이었다.
"권총에 장전하고 오라고 해."
유성옥은 그날 오후 동대문시장에 가서 반찬거리를 6만원어치 사다가 주방에 가져다 준 뒤에 대기실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기주는 대기실 문앞에 서서 안에 있는 경비원들한테 "과장님이 유성옥이 권총을 휴대하고 나오라고 하신다"라고 소리쳤다.
유성옥이 황급하게 일어나 엄현을 향해서 리볼버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
"내가 차고 있던 것은 과장님께서 가져갔고 저 방에 있는 유석술이 차고 있을 거요.".
누군가가 유석술이 한테서 권총을 받아서 유성옥한테 가져다 주었다. 유성옥은 권총을 받아 허리에 차면서 뛰어나갔다. 이기주,유성옥 두 사람은 캄캄한 가을 밤공기를 가르면서 박 과장을 따라나섰다.
"그 총 숨겨."
박 과장이 이기주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M15를 외투 안에 가리느라고 애를 먹었다.세사람은 본관 정문을 통과하여 구관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쪽문을 지나 그때 만찬이 무르익고 있던 나동의 뒷마당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이때의 심정을 박선호는 군검찰의 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본인은 이기주 유성옥 두 명을 제미니 차에 태워 곧장 나동으로 올수도 있었지만 초조하고 불안한 나머지 본관으로 해서 몇번 멈추다가 구관을 지나 나동으로 들어섰습니다.'.
유신정권의 핵심 인물 네 명이 식사중인 나동 건물의 캄캄한 뒷마당 구석쪽으로 걸어가면서 박선호가 말했다.
"부장님 지시이다. 오늘 일이 잘 되면 한 몫 볼 것이다. 저 방안에서 부장님이 쏘는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주방앞에 있다가 경호원들을 몰아붙여."
"경호원이 총을 쏘면 어떻게 하나요."
이기주가 겁먹은 듯 물었다.
"그때는 쏴버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박선호도 마찬가지였다. 박과장은 유성옥에게 "제미니를 주방 쪽에 옮겨놓아"라고 했다.
"주방 앞에 차를 대놓고 그 안에서 기다려. 경호원이 뭐라고 하면 과장이 시켰다고 해. 주방앞에 서있는 경호원들은 주방으로 몰아넣는다.반항하면 사살해.".
박선호는 나동 정문초소로 가더니 경비를 서고 있던 서영준에게 이기주와 교대하라고 지시했다. 서영준은 '교대한 지 2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교대인가'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말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박선호는 나동에 들어가 상황을 살피고 나오다가 정문에서 있는 이기주를 보니 윗옷 안에서 M15의 개머리판이 삐죽이 나와 있고 움직이면 소리가 났다. 권총으로 바꿔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이기주는 박 과장이 권총으로 바꾸어 차고 오라고 했을 때 '이 길로 도망가버릴까 하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그는 법정에서 진술하기를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과장이 나를 신임했는데 거절할 수가 있는가. 과장이 유사시에는 생명을 걸고 충성하라고 했는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라고 했다.
그는 항소심에서 "과장님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을 시켰는지 원망도 했으나 저를 신임했기 때문에 그와같이 시켰을 것이라고 자위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조금 전에 박선호와 박흥주 두 사람이 김재규로부터 거사에 대한 지시를 갑자기 받았을 때 느꼈던 똑 같은 충격과 당황을 이번엔 이기주와 유성옥이 느끼고 있었다. 이기주는 법정에서 "과장의 지시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부터 뜁니다"라고 했다. 변호사가 "불응한다거나 승낙한다거나 선택적으로 판단할 여유가 없다는 것인가요"라고 물었다.
"무조건 지시에 따랐습니다. 상관의 지시이니까 무조건 따르고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유성옥은 그때 나이가 서른 여섯이었다. 경기도 고양이 고향인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생모는 두살때 죽고 계모밑에서 살았다.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다음에는 근처 미군공병대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주워 팔아 생계비를 보탰다. 그의 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하여 서울에 가져다가 파는 등짐장수였다. 유성옥은 어릴 때는 고아처럼 자랐다. 그에게 군대는 피난처이자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계속]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7)
조선일보
입력 1997.11.04. 19:09
## 제미니 차 ##.
1966년에 육군에 입대한 유성옥은 하사관을 자원하여 월남전선에 갔다. 맹호부대에서 근무하다가 1970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중사로 제대했다. 그해 정보부에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 과장에게 부탁하여 1급 근무지인 궁정동 안가로 옮겨 박 과장 차인 제미니 승용차 운전사로 일하게 되었다. 유성옥은 다음 달에 결혼을 하기로 날짜를 받아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합수부에서 진술할 때 '저는 직속상관인 박 과장이 당장 그만두라면 그만 실직해야 할 입장입니다'라고 했다.
김재규-두 박씨-이기주, 유성옥으로 이어지는 이 다섯 명의 자객들이 정보부의 경직된 상명하복 관계에다가 특수한 의리관계로 뭉쳐 다섯명의 방심한 대통령 경호원들을 기습하게 된 것이다.
신관(가동) 경비원 대기실에 있던 이광철은 저녁 7시를 조금 지나서 대통령의 저녁식사가 진행중이던 나동의 정문경비원 서영준이 들어오기에 놀랐다.
"왜 이렇게 일찍 교대하고 오는 거요?" "정문에 이기주하고 과장님이 계셔요.".
7시25분쯤 경비원 관리책임자 이기주가 대기실로 뛰어왔다. 그는 황급하게 서영준이 차고 있던 38구경 리벌버 권총을 달라고 했다. 권총에는 네 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한 10분쯤 지나서 이번엔 동료 경비원 김태원이 오더니 서영준에게 "박 과장이 찾으니 식당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서영준은 나동 정문으로 뛰어갔다. 과장은 안 보이고 이기주가 "권총차고 왔느냐?"고 물었다. 서영준은 다시 대기실로 달려가서 김태원이 차고 있던 권총을 받아왔다.
이기주는 그에게 경비를 서달라고 한 뒤 나동 주방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서영준은 오늘은 종잡을 수가 없는 날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곧 역사가 격동치려고 하는 나동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운전사 유성옥은 박선호 과장이 시키는 대로 신관에 세워 두었던 제미니차를 골목길 건너편 나동으로 몰고왔다. 문은 박선호 과장이 열어주었다.
나동 관리책임자 남효주는 대통령 비서실장도 못들어오게 되어 있는 이곳에 제미니차가 들어온 것이 궁금하여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유성옥은 "과장님이 여기에 차를 대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는 제미니차를, 대통령 경호원들이 모여 있는 주방 벽면과 나란히 세워두었다. 이때 대통령 경호원 박상범 김용섭은 대통령 차운전사 김용태, 정보부 식당차인 뉴코티나 운전사 김용남과 함께 주방 바깥에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뉴코티나의 앞지붕 위에다가 원동에서 사온 플라스틱 막걸리 통(10되짜리)을 얹어놓고 김용남과 김용섭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고 박상범은 속이 거북하다면서 김용태가 주는 가스명수를 마셨다.
박상범 등 경호원들은 유성옥이 모는 제미니가 신관 경비원대기실쪽에서 제2대문을 통해서 나동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박선호 과장이 대문을 열어주는 것도 보았다.
주방 운전사 김용남이 한참 있다가 제미니로 다가가서 유성옥에게 "어떻게 해서 왔느냐?"고 물었다. 유성옥은 "과장님이 여기에 차를 대라고 하셨다"고 했다.
무서운 과장이 시킨 일에 토를 달 수가 없었다. 대통령 경호원들은 이곳의 대통령 경호는 정보부 소관으로 되어 있으니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타성에 지배되고 있었다. 제미니의 창이 검게 칠해져 있어 안에 누가 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대통령 측근 경호를 맡고 있었던 수행계장 박상범(현재 보훈처장)은 고려대학을 졸업한 후 해병대에 입대하여 대위로 전역한 경력의 소유자로서 해병대 선배인 박선호와도 알고지내고 있었다.
그 박선호가 아까 주방 안에 몇 번 왔다가 갔다가 하더니(그는 경호원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미니차까지 가서 기웃거리고 가는 것이 보였다(이때 박선호는 유성옥에게 격려를 하고 갔다). 유성옥은 1979년12월12일 육군보통계엄군법회의에서 신호양 변호인의 신문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박 과장의 암살지시에 반항하면 나중에라도 죽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주방으로 차를 옮겨 놓고 제미니차에 타고 있다가 문을 열어달라고 했는데 경호원이 모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때 문을 열어 주었다면 도망하려고 했습니다.".
경호원이 다가와서 제미니차 문을 열어주면 "각하가 위험하다"고 알린 뒤에 달아날 생각을 했다는 뜻인 것 같다. 만약 그 경호원이 문을 열어주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주방에 있던 두 명의 경호원과 대기실에 있던 두 경호원이 자위조치를 취했을 것이고, 오히려 김재규쪽이 당했을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유성옥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경호원이 그의 신호를 듣지 못했기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어느 쪽으로도 확실한 행동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그냥 상황에 끌려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사람의 의지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판이 짜여져 있었다.
그는 운이 나쁘게도 '연출자' 박선호에 의하여 이 역사의 무대에서 한 배역을 맡도록 지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날 밤 드라마의 한 조역인 정보부장 수행 비서관 박흥주(당시 40세) 대령과 김재규와의 인간관계도 박선호에 못지 않을만큼 끈끈한 것이었다. 그는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육군사관학교 생도 18기로 들어갔다. 졸업 후 제6사단의 포병대대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브리핑 솜씨가 사단장 김재규의 눈에 띄여 그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된 것은 1964년8월이었다. 6사단 포병사령관 박재종 대령이 차를 보내 "사단장이 부르니 가보라"고 했다.
사단장실에 갔더니 김재규 사단장은 이름을 물어보고 위 아래로 한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자네 오늘부터 내 부관좀 하게." 박흥주는 누가 자신을 추천한 것이 아니고 며칠 전에 화력시범을 할 때 브리핑, 시범, 통제를 담당한 자신을 사단장이 잘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김재규의 제6사단은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폭력화되어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1964년6·3사태) 계엄부대로 서울에 출동했다가 본대로 돌아와 있었다.
박흥주는 1966년1월에 김재규가 6관구 사령관으로 옮길 때도 같이 따라가서 여섯 달 동안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월남전선을 지원하여 1966년10월부터 2년간 파월 9사단(백마부대) 52포병 제3포대 전포대장으로 근무했다.
귀국한 뒤에는 21사단 제1포대장을 거쳐 육군 보안사령부 서울지구대(506부대)에 있으면서 3년6개월간 수경사 파견대 조장, 영등포 팀장, 한수이북 대공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때도 보안사령관은 김재규였다.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장교로 근무중이던 1978년4월 정보부장 수행비서관으로 다시 불려와 근무하기 시작한 것이 김재규와의 네 번째 인연이었다.
10·26 당시 그의 생활수준은 자필진술서에 따르면 '시가 1천5백만원짜리인 대지20평 건평18평의 슬라브 집과 약4백만원어치의 부동산에 약 40만원의 월급으로서 중하류'였다.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8)
조선일보
입력 1997.11.05 19:18
최후의 24시간
김재규의 민주주의 .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대령은 저녁 7시20분쯤 궁정동 정보부 시설의 본관을 나와 정보부장 운전사 유석문에게 차에 가 있으라고 지시한 뒤에 한 울타리에 있는 나동쪽으로 갔다. 대통령을 모신 은밀한 만찬이 열리는 이 건물에는 그도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나동으로 뚫린 쪽문에 갔더니 이름을 알 수 없는 경비원이 제지했다.
"비서관님은 나동에 못들어가십니다."
"박 과장 좀 불러줘.".
경비원은 들고 있던 워키토키 무전기로 연락을 취했다. 의전과장 박선호(당시 45세)가 나오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나동 정원은 컴컴하고 바닥에 작은 돌들이 박혀있어 울퉁불퉁하였다.
"나는 어디에 가지?"
"저쪽으로.".
박선호는 주방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가니 제미니가 한 대 서 있었다.공격목표인 주방쪽을 보니 서너 명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의 윤곽만어리고 누가 누구인지는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제미니 안에는 운전사(유성옥)만 타고 있었다. 운전석 오른 쪽 옆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박흥주대령은 박선호 과장이 관할하는 경비원들의 얼굴이나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말없이 차중에 앉아있는데 곧 한 사람이 오더니 뒷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경비원 관리책임자인 해병대 하사 출신 이기주였다.
박흥주는 주방 쪽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 뒤에 몇 사람이 있나?".
이기주가 답했다.
"경호원이 3∼4명 될 거예요.".
박흥주 대령은 주방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다시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이지?"
"글쎄요. 음식 나르는 사람인가.".
박 대령은 흥분상태라서 몇분을 기다리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김재규가 두 박씨에게 암살지령을 내린 뒤 나동 만찬장으로 들어가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라고 중얼거렸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김재규가 박정희 암살의 이유로 든 민주회복이란 말은 그가 자신의 행동을합리화하기 위하여 사후에 지어낸 것이란 해석이 강하다. 그런데 김재규가 거사하기 직전에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란 말을 한 사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는 적어도 그의 뇌리에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란 씨앗이 뿌려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것은 그가 암살을 결심하는데 영향을 준 여러 요인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굽이치는 역사적 상황이 한 인간의 생각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가는지를 알아보는 데는 좋은 실마리이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맹목적 추종을 사대주의라고 단정하고 주체적 입장에서 한국식 민주주의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던 사람이 박정희였다.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여 탄생한 유신체제를 수호하는 수문장으로 임명되었던 정보부장이 이미 상대방(민주화세력)의 논리에 감염되어 있었다. 김재규에게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을 확인시켜 준 것은 부마사태였다.
10월17일 늦은 밤, 중앙청에서 소집된 임시국무회의가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로 의결하고 있을 때 김재규는 야간비행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야간시위가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던 광복동 남포동 중앙동 일대를 관할하는 중부경찰서로 갔다. 시위군중 속에 놓여있었던 중부경찰서에서 상황보고를 듣고 정보부 부산분실로 돌아가려는데 시위대 때문에 승용차가 경찰서로 접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김재규는 정보부 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한 20분을 걸어서 차가 기다리는 광복동
쪽으로 갔다.
암흑이 깔린 도심 곳곳에서 시위대가 외치는 함성과 최루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중심부는 철시상태라 음산하기도 했다. 캄캄한 뒷골목을 걸으면서 김재규는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는데"라고 혼잣말로 몇번 중얼거렸다. 수행하던 정보부 요원이 들으니 '물리적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되고 아무래도 근본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었다.
김재규는 이 시위현장의 체험을 통해서 '이 정권의 운명이 다했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전쟁, 시위, 화재사건의 현장에 지휘자가 빠져버리면 상황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김재규는 현장을 목격함으로 해서 부마사태를 실제보다도 더 심각하게 해석하게 되었고 '제2의 4·19가 다가오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산에서 올라오는 즉시 18일 저녁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출장보고를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장이 식사하고 있는 자리에서 '부산사태는 체제저항, 정책불신,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며 전국 5대 도시로 확대될 것이다'고 보고를 하자 박 대통령은 화를 내더니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김재규 항소이유보충서).
"부산사태 같은 것이 또 생기면 이제는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내렸다가 사형되었는데 대통령인 내가 내리는데 누가 나를 사형시킬 수가 있겠는가.".
옆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을 죽여도 까딱 없는데…"
라고 거들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의원직 제명 전날인 10월3일 박준규 공화당의장서리, 태완선 유정회의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정보부장은 신라호텔의 한 방에서 만나 다음날의 전략을 논의했다. 김 실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 아침 모 대사관에서도 전화가 왔는데 김 총재의 제명을 재고해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우리 네 사람이 지금 각하를 뵙고 재고해 달라고 건의합시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했다. 이때 차지철이 나타났다. 그는 이야기를듣더니 펄펄 뛰었다.
"방금 각하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각하의 뜻은 절대로 제명쪽입니다.".
이러니 청와대행은 포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밤 김재규는 김영삼을 위해서 마지막 노력을 해본다. 남산에 있는 공관으로 김영삼 총재를 극비리에 초청하여 한 시간 동안 간청하다시피 했다. 김영삼 총재가 1987년에 기자에게 전한 대화의 요지는 이러했다.
"김 부장은 전날 대통령과 장시간 나의 제명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서, 내일 아침 자연스럽게 기자들과 만나서 뉴욕타임스 기사에 대한 해명을 해주면 이걸 명분으로 하여 제명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거부했습니다. 김 부장은 애원조로 사정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는 몇번이나 '그렇게 하면 나라도, 김 총재도, 대통령도 불행하게 됩니다'라고 했어요.".
김재규는 야당이나 학생세력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무리를 안하려고 애쓴 흔적들이 더러 나타나고 있다. 김재규는 권력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인간형은 아니었다. 그가 1979년에 즐겨 썼던 붓글씨 '자유민주주의' '민주민권자유평등' '위민주정도' '위대의' '비리법권천' 같은 것들도 그의 심리를 엿보게 한다.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9)
조선일보
입력 1997.11.06. 19:13
## (19) 김재규와 박정희 ##.
김재규(당시 53세)는 박정희보다 나이가 아홉 살이 아래인 것을 빼고는 공통점이 많았다. 고향이 같고, 키도 같고, 육사는 동기(2기)이고,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경력도 같았다. 그의 합수부(합수부) 진술, 즉 그의 육성을인용하여 박정희와의 관계를 살펴본다.
[1954년9월경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 장군께서 사단장으로 부임함으로써 재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상하관계이나 친형제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1960년3월 본인은 진해의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있고, 박 장군께서는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을 때 3·15부정선거로 국민들의 원성이 많으니 군사혁명을 일으키자고 동의하였습니다. 박장군께서는 당시 육군대학 총장이시던 이종찬 장군을 주동으로 하는 게 좋은데 그의 의견을 타진해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 장군을 원거리에서 타진한 바 그는 위험한 일에는 가담할 만한 위인이 못되어 그대로 박정희장군에게 보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5·16 후에는 호남비료 사장도 시켜 주시고 준장으로 진급도 시켜주셨으며, 6사단장을 거쳐 6관구 사령관, 그리고 상당한 위치에 있는 보안사령관직도 맡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각하와 자주 뵙게 되었고, 이어서 3군단장, 유정회 의원,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으로 등용해 주셨습니다.
1976년12월4일 건설부장관으로 있을 때인데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빨리 각하 집무실로 가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각하께서는 금일중으로 신직수 부장과 교대해서 근무하라는 명령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은데 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연구해서 잘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 타인의 추천은 일절 없었고 각하의 의중에서 결정된 것입니다.].
1978년 어느날 김재규 부장은 서울 근교에 있는 한 천주교 건물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 배석했던 이동복 당시 부장특보(현재 자민련 의원)에 따르면, 김재규는 담담하게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에 대해서 "고해성사로 알고 들어주십시오"라면서 이렇게 설명하더라고 한다.
"1973년12월에 제가 유정회 국회의원을 할 때인데 각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가라고 하시더군요. 당시에 부장은 신직수씨였습니다. 신 부장은 제가 5사단에서 참모장으로 있을 때 저의 밑에서 법무참모를 했던 이였습니다. 그래서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정보부 차장으로 부임하기 하루 전에 각하께서 저녁이나 하자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청와대 본관 2층에 있는 각하의 사저에서 저녁을 주시는데 식사가 시작되자마자 각하와 육영수 여사가 고성으로 다투시는 것이었습니다.
육 여사께서 이후락 박종규 같이 국민들의 원성을 듣는 사람들을 왜 중용하느냐고 따지니까 각하께서는 "왜 아녀자가 국정에 참견하느냐"고 나무라시고 육 여사도 지지 않고 대어드시니 저는 불안해서음식을 한 숟갈도 뜨지 못했습니다. 한 10시쯤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서니 각하께서는 화가 나셔서 저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육 여사께서는 현관까지 저를 배웅해주셨습니다.
제가 신발을 신고 인사를 하려는데 저를 등 뒤에서 껴안으시더니 "김 장군님, 들으셨죠. 김 장군께서는 누구 편이세요"라고 하셔요. 저는 "경모님과 같은 생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육 여사께서는 "김 장군께서 중요한 자리로 가시는데 제발 저 분이 하시는 인사문제를 잘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간섭도 해주세요"라고 당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육 여사께서 그 이듬해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욱이 말씀을 유훈으로 생각하고 깊게 새기고 있습니다. 저의 머리에는 이 말씀이 항상 남아 있습니다. 추기경께서도 저를 그렇게 아시고 대해 주십시오.".
김재규는 나름대로의 정의감과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1979년에 일어난 정치적 격동은 그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5월 김영삼 총재 당선으로 시작된 민주화 세력의 도전은 8월의 YH여공농성사건, 9월의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결정, 10월의 김영삼 의원직 제명과 부마사태로 이어지는 격랑을 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시국대책을 결정하는 주도권은 차지철 경호실장 손으로 넘어갔다.
김재규는 대체로 온건론을 견지한 것처럼 보였지만 김치열법무장관의 말대로 그것은 논이랄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김재규는 YH여공의 신민당사 농성때는 청와대와 경찰이 안전대책이 미흡하다고 반대하는 것을 누르고 경찰을 투입하도록 했고, 한 여공의 사망을 가져왔다.
그는 또 8월 하순 대통령이 주재한 시국수습대책회의에서 "각하, 칼날이 시퍼런 긴급조치 10호를 풀어 주십시오. 그래야만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지금 학생 종교 근로자들을 다 적으로 돌리면 어떻게 이 난국을 타결해나가겠소. 당분간 9호로 밀고나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보시오.".
정보부 간부들도 긴급조치 10호를 신설하자는 발상에 반대하였다.
김재규는 인간적인 바탕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격동기를 주도할만한 안목과 추진력은 갖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 커지면서 김재규라는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하고 있었다.
이런 과부하 상태에서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 열등감, 차지철을 편 드는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통령에게 사표를 내든지 담판을 하여 차지철의 월권을 저지시키려 했을 텐데 김재규는 이 수모를 참기만 했다.
대통령이 워낙 어렵게 보이기도 했고 자신의 논리가 부족하기도 했을 것이다. 울분이 발산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폭발성은 증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총을 대통령에게 겨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 행동을 했다는 점에 김재규의 남다른 면이 있다. 그가 지녀왔던 인간적인 선량함과 정의감에다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소신, 그리고 이런 소신을 확인시켜준 부마사태의 민란화가 보조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또 남자다운 사생관을 핵심으로하는 일본 무사정신의 숭배자였다.
10월26일 남산 사무실에서 궁정동으로 이동하는 차중에서도 김재규는 일본 무사들이 즐겨 읊었던 시 낭송 테이프를 들었다.
김재규는 안동농림학교 4학년 재학중에 강제지원을 당해서 일본 욧카이치 항공병학교의 특별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1944년1월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배출되고 있었다. 임관을 여섯 달 앞두고 해방을 맞았다. 그는 안동농림을 다닐 때도 친구들 사이에선 유별난 의협심으로 해서 별명이 노기 대장이었다.
노기 대장은 러시아-일본 전쟁때 여순요새의 공격을 지휘했던 일본 장군으로서 명치천황이 죽자 부인과 함께 자결한 사무라이 정신의 화신이었다.
김재규는 김녕김씨였다.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불만을 품고 친 단종쿠데타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충신 김문기의 18대손이다.
그는 정보부장의 직위를 이용하여 학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무리하게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시키려고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 무리를 할 만큼 대의에 목숨을 건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20)
20 그때 그 사람 .
조선일보
입력 1997.11.07. 19:08
사진설명:현장 검증때 당시 상황을 재현한 모습. 기타를 들고 있는 사람이 가수
심수봉의 역할을 하고 있고 그의 오른쪽으로 박대통령. 신재순의 대역이 앉아있다.
식탁 모서리에 앉은 차지철경호실장의 대역 뒤로 실내 화장실이 보인다.
## 20 그때 그 사람 ##.
다시 나동 안방.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시계를 보면서 "삽교천 중계방송은 안하나"라고 재촉했다. 차지철이 "시간이 되면 틀겠습니다"라고 안심시켰다. 그 뒤로는 차 실장이 시계를 자주 보았다. 심수봉도 이때 시계를 보았는데 나중에 기억을 살려보니 7시 10분 전쯤이었다. 대통령은 윗양복을 벗었다. 오른쪽에 있던 신재순이 받아서 옷걸이에 걸었다. 김계원 차지철도 바깥 마루로 나가더니 상의를 벗어놓고 들어왔다. 이때 김재규가 들어왔다. 대통령이 웃옷을 벗은 것을 보고는 김재규도 상의를 벗어걸고 들어왔다.
대통령은 KBS TV 7시 뉴스를 보면서 미국 대사가 김영삼총재를 만났다는 보도에 대하여 심사가 다시 뒤틀린 듯했다.
"아니 총재도 아닌 사람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
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김영삼총재의 직무집행이 정지되었는데도 미국측이 총재 대우를 해주고 있는 데 대한 불평이었다. 대통령은 김재규부장을 향해서 퉁명스럽게 던졌다.
"거, 정보부에서 부산사태 사진을 만들어주는데 깡패들 사진만 만들지 말고 진짜 소요 사태의 사진을 좀 크게 뽑아 보여주게.".
김부장은 짤막하게 "예"라고만 대답했다. 박정희는 고향 후배인데다가 육군사관학교는 동기이고 줄곧 자신이 끌어주고 키워주었던 김재규에 대해서는 동생처럼 편하게 대하다가 보니 도가 지나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은 자신이 내심으로는 끔찍이 아낀다는 것을 깔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미국 브라운 장관이 오기 전에 김영삼이를 구속 기소하라고 했는데 유혁인이가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안되겠어. 국방장관회의고 뭐고 볼 것 없이 법대로 하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미국 놈은 범법해도 처벌 안하나."
"각하 김영삼이는 사법조치는 아니지만 국회에서 제명한 걸로 이미 처벌받았다고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속하면 두 번 처벌하는 인상을 줍니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시지요.".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당신네들은 비행조사서만 움켜쥐고 있으면 뭣하나. 딱딱 입건해야지."
"정치는 대국적으로 해서 상대방에게도 구실을 주고 국회에 나오라고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이번 회기에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해외여론도 좋지 않습니다.".
김재규는 이 말을 유달리 강경하게 했다. 그때까지 침울하게
"예, 예"
하고 있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김재규가 약간 불손하게 대통령의 말을 반박한 것은 이미 거사준비를 시켜놓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또 차지철이 끼여들어 예의 탱크 이야기가 나왔다.
"신민당 놈들 그만두고 싶은 놈은 하나도 없습니다. 언론을 타고 반정부적인 놈들이 선동해서 그러는 거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자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겠어요.".
신재순이 보니 맞은 편에 앉은 김재규가 손목시계를 자주 보고 있었다. 대통령은 주한미군 방송에서 카터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무언가 한 마디 하더니 텔레비전을 끄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도승지 한 잔 하시오"하면서 술잔을 김계원실장에게 건넸다. 오른쪽 자리에 앉은 신양 앞 접시로 음식을 집어 건네주기도 했다. 대통령은 술기운이 돌자 김계원 실장을 도승지, 김 부장을 포도대장이라고 불렀다.
신양에게는 "김 부장은 술을 아주 잘하니 많이 권하게"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김재규는 간이 나빠서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이날 술은 대통령과 김계원 두 사람이 거의 다 마셨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잔을 빨리
돌렸다. 한 시간 40분 사이에 시버스 리걸 한 병 반이 비워졌다.
차지철 자리 앞에 놓여 있던 잔에서는 김계원의 지문이 검출되었는데 이는 김계원이 술이 약한 차 실장에게도 잔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날 김재규도 그의 주량에 비해서는 술을 많이 마신 편이었다.
분위기가 좀 풀리고나서 대통령이 "이제 노래나 좀 듣자"고 했다.
대통령 왼쪽에 앉아 있던 심수봉이 바깥에 나가서 기타를 들고 들어왔다. 심양은 기타를 대기실에 두고 왔었다.
안재송부처장이 노래를 부를 때 자기가 기타를 갖다주겠다고 했었는데 막상 노래를 부를 시각이 되어도 가져다 주지 않아서 나갔다가 온것이었다.
심양은 돌아와서 '그때 그 사람'을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박정희는 "하나 더"라고 했다. 심수봉은 구성진 목소리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만찬장의 분위기는 흥겨워지기 시작했다.
두번째 노래가 끝나자 차 실장이 "이제부터는 노래를 한 사람이 다음 사람을 지명하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했다.
심수봉이 "경호실장님"이라고 했다. 심양은 지명을 하려고 좌중을 둘러보았는데 김재규와 김계원의 표정이 어두워 차 실장을 지명했다.
심양은 그 전에도 한번 여기에 와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때 김 부장은 지금처럼 침울하지는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났다.
신재순은 차 실장의 생김새에 어울리는 노래는 군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엉뚱하게도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를 부르는 것이었다.
분위기는 한결 고조되어 갔다. 이때 남효주가 들어와서 김 부장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 심수봉한테도 들렸다.
"과장님께서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공격 준비를 끝낸 박선호 대기실에서 경호처장 정인형, 부처장 안재송과 같이 있다가 안방 옆에 붙은 부속실로 나와 아무것도 모르는 남효주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이었다. 김재규가 슬그머니 나가는 것을 박정희는 눈치를 못채는 것 같았다.
차 실장의 앙코르곡은 '나그네 설움'이었다. 대통령은 손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김 실장이 "각하 차 실장이 저런 노래도 다 하는군요"라고 했다.
"예, 뭐, 국민학교 다니는 딸이 저의 노래선생입니다.".
만찬장의 중심인 식탁의 크기는 1.5×1m. 박정희가 이 식탁을 너머서 맞은 편으로 볼 수 있는 출입문은 열려 있었다. 대통령에게 시야를 틔어주려고 그런 것이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김재규가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것은 다 알수 있는 위치였다.
차 실장도 김재규가 무엇 하는지를 의식적으로 감시안해도 다 볼수가 있는 자리에 있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