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란 무엇인가”, 존스토트, 크리스토퍼 라이트
이 책의 근원이 되어 준
로잔 운동에 바칩니다
존 스토트의 초판을 크리
스토퍼 라이트가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총 다섯 장의 해설을 더한 전면 확대개정판이다.
1. 선교 2, 선교에 관한 고찰
3, 전도 4, 전도에 관한 고찰
5, 대화 6, 대화에 관한 고찰
7, 구원 8, 구원에 관한 고찰
9, 회심 10, 회심에 관한 고찰
초판서문
네 가지 특별한 경험
1. 1968년 웁살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4차 총회의 ‘고문’의
로 참석했다. 그때 내게 맡겨진 것이 두 번째 항목(‘선교의 갱신’)이었고,
나는 곧바로 선교의 의미에 관한 당시의 격렬한 논의에 뛰어들었다.
2.1973년 1월 방콕에서 열린 “오늘의 구원” 다음 해 멜버른에서 열린 연례 베이커 강연
주제를 “어제와 오늘의 구원:으로 잡았다.
3.1974년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국제대회의 기획위원회는 내게, 성경적 전도의 본질을 주 제로 개회 설교를 하고, 선교, 전도, 대화, 구원, 회심이라는 다섯 단어에 대해 성경적 정의 를 모색해 달라고 요청했다.
4.1975년 차바스 강연요청을 받고 내가 로잔 대회에서 해설을 시도한 그 다섯 단어에 대
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적절해 보였다.
확대개정판서문
1975년 구약학 박사’ 과정 중이자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사제 교육
을 받는 신학생으로서 이 책을 구입했던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1974년 제1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 보고서들과, 획기적인 로잔 언약으로 인
한 흥분에 뒤이은 일이었다. 영국의 젊은 복음주의자들이었던 우리 대
부분은, 여전히 자유주의가 대학의 신학과를 주도하던 현실에서, 복음주
의 신학이 재기하는 것을 보며 용기를 얻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역사에
남을 만한 복음주의 사회적 양심의 회복에 고무되었다.
이들은 선교를,우리 시대의 사회 .경제 정치 . 문화적 현실에 관여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 두 영역에서 존 스토트는 우리의 영웅이자 멘토였다.그는 세계교회협의회 회합에서 선교와 전도에 대한 성경적.복음주의적 이해를 굳건히 변호하며 일어서지 않았던가! 그는 이미 우리에게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문화에서 물러서지 말고 문화 속으로 침투하라고 촉구하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는 1978년 전국 복음주의 사회윤리 대회에서 처음으로 존 스토트를 만났
다. 그는 그 대회 의장이었고, 나는 오전 성경 강해자 가운데 하나로 초
대받았었다(구약윤리 박사학위를 받은 젊은 성공회 부교역자로서).
그곳에서의 첫 만남은 지속적인 우정으로 이어졌고, 2001년 그가 내게 랭햄 파트
너십 내에서 시작한 사역의 대표를 맡아 달라고 초청하여, 결국 우리는 함께 일하게 되었다.
『선교란 무엇인가』초판 출간 40주년을 맞아 출간하는 개정판 작업에 참여해 달라는 존 스토트의 저작물 관리 협회와 IVP의 요청을 내가 받아들인 것은 이것이 대단한 특권이자 엄청나게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과 함께 개인적으로 빚을 졌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책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을 덜어 내고 각 장에 대한 나의 고찰을 덧붙여 달라고 요청했다.
존 스토트가 쓴 장들을 개정하면서. 어느 지점에서든 그의 뜻을 수정하는 일은 피하려고 세심하게 신경 썼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의 논쟁들의 경우 때를 놓치고 의미를 잃은 지 오래된 내용은 덜어 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다양한 장소에서 했던 다섯 차례의 강연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했다. ‘구원’에 관한 존 스토트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책의 7장을 재빨리 섭렵하고, 폭넓고 깊이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탐구해야 함을 기억하기 바란다.
지면의 한계와, 훨씬 더 심각한 내 경험의 한계 내에서 세가지를 시도했다.
1. 존 스토트의 생각과 글을그대로 설명하는 경우 가능한 곳 어디에서든 인용구로 표시
2.각 주제는 계속해서 신학과 선교학 분야에서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1975년 이후 수십 년간 그 논쟁들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전하려고 노력했다.
3. 나는 자유롭게 내고찰을 나누었다. 때로는 스토트의 사고의 흐름을 발전시키기도 했고,때로는 거기서 벗어나기도 했으며, 때로는 내가 다른 데서 쓴 내용을 길게 인용하기도 했다.
1장 선교(존스토트)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기독교 세상 전체
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에 답하여, 선교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논하며 ‘선교’라는 개념을 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선교’란 무엇인지, 선교에서 ‘전도’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전도에서 ‘대화’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하여 우리는 아주 다양하게 생각한다.
선교와 전도와 대화의 본질뿐 아니라, 이 세 가지의 목표에 대해서도 우리 의견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닌가 두렵다. 목표를 정의할때에는 어느 지점에선가 회심과 구원이라는 용어가 중요하겠지만, 이 단어들의 의미에 대해서도 거의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과제는 이 다섯 단어. 곧 선교, 전도, 대화, 구원, 회심에 대해 성경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리라.
최근 들어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이 단어들을 편리한 약칭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나는 이 두단어가 전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본다) 대립하는 듯한 양상으로 경색되었다. 현재의 에큐메니컬사상은 일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전통적인 복음주의 체계에도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큐메니컬 진영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권위 아래서 사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 반면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그렇게 하며,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자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아주 선택적으로 복종하고. 또 어떤 경우 복음주의 원로들의 전통은 성경보다는 문화에서 얻은 것인듯하다.
다시 말해, 그 기준은 성경의 계시다.
두 극단적인 입장
더 오래된 혹은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선교와 전도, 선교사와 복음 전도자, 선교 프로그램과 전도 프로그램을 동일시한다. 이렇게 전도 설교를 우선적으로 강조하다 보니. 학교나 병원을
포함하여 ‘실제 선교’로 여겨지는 다른 종류의 사역을 위한 여지가 거의 없었다.
전통적인 시각의 선교를 지지하는 이들 대부분은 교육과 의료 사역을 아주 적절한 것으로, 실제로 전도사역에 매우 유용한 부속 사역이라 여겼다.
대개 이는 무지하고 병든 이들을 향한 기독교적 긍휼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때로는 뻔뻔하게도 복음 전도를 위한 ‘도약대’ 혹은 ‘발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병원의 환자들과 학교의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 청중이 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선교는 그 자체로 전도의 견지에서 이해되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입장은 전혀 사장되지 않았다. 때로 이 입장은 문화와 사회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과 뜻을 같이한다. 세상은 불타고 있는 건물 같아서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임무는 너무 늦기 전에 구조 활동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말이다.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때든 오실 수 있다. 더욱이 사회를 개선하려는 어떤 시도도 무익하다. 갱신되지 않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거듭나는 데 있다. 그럴 때에만 사회가
거듭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기에도 너무 늦었다.이렇게 세상을 부정하는 염세주의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그들에게 하나님은, 태초에 인류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문화 명령’을 주신 창조주가 아니다.사회의 질서를 잡고 정의를 지키도록 그분의 ‘사역자,들로 정부를 구성하신 분이 아니다. 또 로잔 언약이 말하듯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자 심판자"로서 “인간 사회 모든 곳에서 정의와 화해”를, 염려하시는 분이 아니다.
선교가 전도로만 구성된다는 이러한 비성경적인 선교 개념의 반대 극단에는. 1960년대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주창하고 있는 시각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선교,곧 ‘미시오 데이의 목적은 사회적 조화라는 의미에서의 ‘샬롬’(‘평화,를 나타내는 히브리어)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또 이 ‘샬롬’(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되는)은 인종차별과의 싸움, 인도적인 노사 관계 계급 분화의 극복 지역 사회 개발 사업과 다른 직업 영역에서 정직과성실의 윤리를 추구하는 등의 영역에서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지역 사회 개발 사업과 다른 직업 영역에서 정직과성실의 윤리를 추구하는 등의 영역에서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하나님은 주로 세상과 관계를 맺으시므로 참된 순서는 더 이상 ‘하나님-교회-세상’ 공식이 아니라, ‘하나님-세상-교회’ 공식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 의제를 제시하는 것은 세상이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동시대의 사회적 필요에 따라 섬기고자 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교를 사회적 갱신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네 가지로 비평할 수 있다.
첫째로 모든혁명 운동을 신적 갱신의 표지라 일컫는 것은 순진한 처사다 혁명 이후 새로운 상황은 이전 상황보다 더 불의와 압제를 품고 있는 경우도 있다.
둘째로, 성경이 말하는 ‘샬롬’의 범주, 곧 새로운 인류와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 갱신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다.진지하게 성경을 해석한다면, 신약성경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러한 평화를 쟁취해 내시고, 그것을 사회 전체에 베풀어 주신 분으로 제시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이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성취된다고 전제하는 것은,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이 예수님을 강제로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을 때와(요 6:15) 동일한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사도들에 따르면,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주신 평화는 더 깊고 더 풍성한 것, 즉 하나님과의 또 서로와의 화해와 사귐이다.(예를 들어, 엡 2:13-221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평화를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속한 이들, 예수님이 구속하신 공동체에 주신다.
(예를 들어, 엡 2:13-221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평화를 모든 사람에게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속한 이들, 예수님이 구속하신 공동체에 주신다.그러므로 ‘샬롬은 메시아가 자기 백성에게 가져다주시는 복이다.분명 우리그리스도인의 임무는, 그 나라를 받지 못했거나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에게 그 나라의 의로운 기준을 논증과 본보기로써 권하는 것이다.
그 나라의 의는 이런 식으로 세상 곳곳에 ‘흘러넘치고’, 또 그럼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경계가 얼마간 흐릿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여전히 신을 믿지 않는 사회와 구별되며, 실제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영적인 거듭남에 달려 있다
셋째로, 선교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는 모든 일을 아우르는 데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선교’는, 구속받은 그분의 백성,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세상에 보내어 하게 하시는 일과 관련이 있다.
넷째로사회 변화에만 몰두한다면 복음 전도에 관심을 기울일 여지가 거의 혹은 아예 없어질 수 있다. 사회적 목표와 활동은 정당한 일이지만 거기에 몰두하느라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성경적인 종합
선교를 전도로만 여기는 전통적인 입장과, 선교를 ‘샬롬’의 성취로 보는 현재 에큐메니컬 진영의 입장을 보며, 우리는 교회의 선교를 정의하고,하나님의 백성이 지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를 표현하는 더 나은길, 더 균형 있고 더 성경적인 길이 있을까 묻게 된다
우리는 모두 선교가 일차적으로 교회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임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최초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다 그분의 예언자, 그분의 아들, 그분의 성령을 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교들 가운데서도 아들의 선교는 가장 중요하다. 대위임령의 내용을 숙고해 보자
주 예수께서 자기 백성에게 위임하신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 대부분이(예수님은 여러 상황에서 여러 형태로 그 말씀을 반복하신 것으로 보인다) 전도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반복되는 강조점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선포, 증언, 제자 삼기다
오로지 선포, 회심, 가르치는 사명만 끌어낸다. 사실 나도 1966년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전도대회에서, 복음서에 나온 주요 세 가지 대위임령을 해설할 때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다르게 표현하려 한다. 대위임령은 세례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이전에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는 임무(마 28:20)만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것 가운데는 사회적 책임도 있다. 내가 이제 더 분명히 아는 바는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대위임령의 결과뿐 아니라 실제 대위임령 자체에도 전도의 책임은 물론 사회적 책임도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자신의 선교를 우리 선교의본으로 삼으셨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의 선교를 이해하고자 할 때, 아들의 선교에 대한 이해에서 추론해 내야 한다. 아버지는 왜, 어떻게 아들을 보내셨는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나라의 도래와 본질, 그 나라에 들어가는 법, 그 나라를 확장하는 법에대해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분은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섬기셨고, 예수님의 사역에서 사역과 말을 분리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예수님은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고 더러운 발을 씻기셨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다.이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를 보낸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교는 그분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종의 역할에서 전도와 사회적 행동의 올바른 통합을 찾을 수 있다.또 교회의 선교가 따라야 하는 아들의 선교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즉 섬기기 위해 세상 속으로 보냄 받으셨다는 점이다.그분이 그러셨던 것처럼 연약해지도록 우리를 ‘세상속으로’ 보내신다 이 성육신의 원리를 좀처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우리가 가장 크게 실패한 일이다. 로잔 언약이 말하듯이, “우리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 받은 백성을 세상으로 보내신다고 주장한다.
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첫째로,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행동을 전도의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우리의 자선 활동은 위선의 냄새를 풍긴다. 솔직히 우리는 어떤 속셈을 가지고 그러한 활동에 참여한다.
전도와 사회적 행동의 관계를 규정하는 둘째 방법은 조금 더 낫다.사랑과 긍휼의 행동 자체가 그 행동의 근원인 복음 메시지를 ‘선포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서로 묶여 있었으며. 말씀이 행동을 해석하고 행동이 말씀을 구현해 주었다. 그분은 그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나라의 표적’을 행하셨다.
전도와 사회적 행동의 관계를 표현하는 셋째 방법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곧 사회적 행동이 전도의 동반자라는 것이다. 동반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독립되어 있기도 하다. 각각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다.전도와 긍휼 사역은 하나님의 선교에서 한 세트다
궁핍을 보았는데 해결책을 가지고 있으면 사랑의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그 행동이 전도(영적궁핍)냐 사회적 활동이냐 정치 활동이냐는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모두가 항상 둘 다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양한 상황들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소명도 다양하다
강도 만난 사람은 그 순간 주머니에 든 전도 소책자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 상처에 바를 기름과 붕대가 필요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귀가 없다”원수가 굶주려 있다면, 우리의 성경이 명령하는 바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먹이라는 것이다(롬 12:20)
또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다양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소명에 신실해야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계명과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대위임령이다. 이 둘은 어떤 관계
인가?
대위임령은 대계명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다 망라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대체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내 이웃인 사람을 공동체 속의 육체-영혼으로 창조하셨다.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하나님이 지으신 대로 사랑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들의 총체적인 안녕 그들의 영혼과 육체와 공동체가 잘되는 데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 사랑은 그 자체로 해명할 필요가 없다. 사랑은 필요가 보이는 곳 어디에서든 섬김으로 표현된다.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소금이 되도록 땅에 보내시고, 빛이 되도록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이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 은 우리를 세상과 격리시키는 경향이 있었던 이전의 경건주의를 회개하고, 우리에게 전도의 책임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도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는 실제에서 어떤 의미일까?
나는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지역교회라는 두 가지 영역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소명으로 시작해 보자 나는 여기서 이 말을 그리스도인의 직업이라는 뜻으로 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제자를 ‘사역으로, 즉 섬기라고 부르신다.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며 일생을 보내야 한다. 심지어 전도하는 장소나 전도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곳으로 보지 않고, 대신 그들에게 주신기독교적 소명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불러 섬기며 살게 하신 일로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의 부르심의 일부는, 더 이상 그들을 받아 주지 않는 사회에서 정의, 공의, 정직, 인간의 존엄, 긍휼에 대한 그리스도의 기준을 지키고자 애쓰는 일일 것이다.어떤 공동체의 상태가 악화되면, 그 책임은 악화되고 있는 그 공동체가 아닌, 악화를 막기 위해 소금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교회가 져야 한다.
소금은 사회에 스며들어야만,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은 폭넓고 다양함을 배울 때에만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세속 사회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에만 그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의 폭넓음을 보여 주고, 그것을 오늘날의 세상에 적용하여, 청년들이 기독교 선교의 측면에서 섬기겠다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헌신하도록 도전하는 선교 집회를 보고 싶다.
둘째 적용은 지역 교회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의 은사와 부르심에 따른 전문화가 있어야 한다. 지역 교회의 어떤 구성원들은 분명 전도의 은사가 있고 전도로 부르심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사회적인 쪽을향해 그리스도의 은사와 부르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우리 구주께서 세상에서 선교로 본을 보이신 대로 더 넓게 이해해야 할 개념이다. 우리가 이렇게 전도와 사회적 행동으로 구성된 선교라는 더 폭넓은 개념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섬긴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사회에 훨씬 큰 영향 우리의 수적인 힘과 그리스도의 위임령의 급진적인 요구에 걸맞은 영향을 미칠수 있을 것이다.
선교에 관한 고찰
크리스토퍼 라이트
존 스토트는 아홈 살이던 해가 거의 지나갈 무렵 회심한 이후 아주 일찍부터, 선교 신학과 그 실천을 그의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 책은 1974년제1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이다.그때 스토트는 대회 내용을 정리한 문서인, 로잔 언약의 기획자로 중대한 역할을 했다.그리고 생애 말엽에는 눈이 전혀 보이지 않았을 때에도 2010년 제3차 로잔 대회의 성명서인 케이프타운 서약을 며칠에 걸쳐 한 단락씩 달라고 고집했다. 그는 그 선언문을 아주 좋아했고, 지지했고,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이 그 위대한 문서에서 선교의 총체성과 온전성을 이해한 대로 세계 선교에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에 깊은 격려를 받았다
그러니 1975년에 나온 이 책의 주제들이, 2011년 그가 죽기까지 수십 년 동안 계속 그의 관심사였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스토트는 선교를 오로지 전도로만 보거나 거의 전적으로 사회 - 정치적행동으로 보는 양극단을 넘어, “교회의 선교를 정의하는 더 나은 길, 더균형 있고 더 성경적인 길"이라 부르는 것으로 나아가면서, 마땅히 선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님 중심적인 이해를 강조한다
우리는 모두 선교가 일차적으로 교회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임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성경 계시를 통해 아는 내용, 곧특히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뜻과 행동과 어떤 관련이있는가?" 하고 질문하곤 한다 존 스토트의 세계관은 성경에 흠빽 빠진,하나님 중심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어떤이슈를 바라볼 때 쓰는 안경이었다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혹은하지 않아야 하느냐)만 질문하기보다는,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를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모든 민족과 모든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선교를 숙고하게 된다.우리는 ‘선교를 할’ 때 무언가를 하도록 사람들을 보낸다 하지만 스토트의 요지는, 교회인 우리가 어디에든 누군가를 보내기 훨씬 전에 하나님이 그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다.항상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창조 세계를 향해 ‘바깥쪽으로 움직이고’ 계신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은 역사‘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계속 이어진 보내는 일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성령을 보내시고 땅끝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이 모든 내용은 어떤 상황에서든 선교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성경의 배경이다.최초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다.
그분의 예언자, 그분의 아들. 그분의 성령을 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선교’는 단지 보내는 행동이나 보냄 받는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보내는 자에게는 장기적인 목적이 있어야 하고. 보냄 받는 사람은보내는 이의 더 큰 목적에 참여해야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그저 보내셨고 보내시는 하나님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해 중요한 목적을 지니신 하나님과 그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선교하고 계신’ 하나님을가리키게 된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내셨을 때, 그것은 이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목적과 관련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내셔서 어떤 행동을 하도록 구원 혹은 심판에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대행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보내셔서 말하도록,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전령과 전달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보낸다는 다수의 행동이나 소위 대위임령 같은 극적인 하나의 행동이 아닌, 성경 내러티브 전체를 아우르는 더 포괄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교에 관해이야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하나님의 모든 경륜(행 20:27, 새번역)이라 언급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아래서, 온 세상을 화해의 연합에 이르
게 하시는 그분의 궁극적인 목표를 가리킨다.이를 통해 우리의 선교를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전적으 로 하나님의 선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온 백성과 온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뜻의 포괄성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그선교에 참여하도록 하나님께 부름 받은 방식도 그와 닮은 포괄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선교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 속으로 보내셔서 하라고 하시는 모든 것올 아우르는, 상당히 포괄적인 단어다.”
하나님의 선교를 ‘성경의-전체-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은. 스토트가‘ 이 책에서 (세심하게 설명하며) 주장하는, 선교에 대한 더 총체적인 이해의 든든한 토대가 된다.
‘선교적 해석학’은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 백성의 선교라는 시각에서 성경 전체를 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탐구하는 데 헌신한 학자 공동체로 인해 진지한 학문이 되었다.
대위임령은 세례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이전에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는 임무(마 28:20)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것 가운데 는 사회적 책임도 있다. 내가 이제 더 분명히 아는 바는,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대위임령의 결과뿐 아니라 실제 대위임령 자체에도 전도의 책임은 물론 사회적 책임도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문장은 아주 중요하며 수많은 분석을 할 수 있지만. 어떻게 해도 보편적인 합의에 이르지는 못한다.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관한 질문은, 로잔 대회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분열을 초래하는 이슈다.
요한복음의 대위임령(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그리고 요17:18)을 언급할 때 그 구절이 우리의 선교가 (그리스도의 선교처럼) 대가를 지불하며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는 ‘성육신’을 본으로 삼아 섬김이라는(전도만이 아닌) 특징을 보여야 한다는 그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대위임령은 더 제한적이며, 교회의 사명의 일부로서(그러한 실제적인 사랑과 긍휼 사역이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일부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강하게 주장하지만), 선행과 사회적 행동을 포함하거나 암시하지 않는다. “선교는 설교와 가르침. 선포와 증거, 제자 삼는 일과 증언으로 구성된다. 선교는 처음부터 계속 복음을 말로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고 믿을 때 그분 안에서 발견하는 생명을 알리는 일에 그 초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요지는, 스토트가 이 책에 서 주장하는 논지다 그 둘은 동반자라는 것이다. 그 둘은 가위의 양날 혹은 새의 두 날개 같은 것이다. 이 동반자 관계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에 분명히 나타난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고 병든 자를 고쳐 주셨다. 그분의 사역에서 ‘케리그마’와 ‘디아코니아’는 함께 나타났다.
따라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서로 분명히 구별되지만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에 순종할 때 통합적으로 연관된다. 동반자 관계는 사실 결혼이다.
전도에 일차적으로 사회적인 의도가 없다 해도 그럼에도 사회적인 차원이 있으며, 사회적 책임에 일차적으로 전도의 의도가 없다 해도 그럼에도 전도의 차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제3차 로잔 대회가 열렸을 때, ‘총체적 선교’ 라는 어구는 이미 통합적 선교에 어느 정도 추월당하고 있었다. 강조점이 변화함에 따라 ‘통합적으로 연결된’‘말씀
과 행동의 통합’(마닐라)이라는 표현이 선택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두가지 행동(전도와 사회적 행동)을 나란히 함께 가는 혹은 함께 가는 단순한 동반자로 보기보다는 선교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활동들의 통합 체계로 본다. 인간의 몸은 통합된 체계다. 그 안에는 호흡계, 소화계, 순환계 등등이 있다
일상 생활에서는 육체의 모든 기능이 꼭 필요하고 통합되어 있으며. 살아 있는 인간이 되도록 각기 자기 나름대로 기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합된 선교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모든 영역을 하나로 묶는다. 그래서 전도와 사회적행동은 서로 필수적이다. 선교라는 전체 생명 안에서. 서로 다르지만 필요한 기능이다.
전도와 사회적 행동을 묶어 주는 선교의 통합적 중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복음 자체다. 여기서 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하나님 나라를 도래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서 하신 모든 일에 관한 성경의 좋은 소식을 뜻한다. 다시 말해, ‘복음은 단순히 개인들이 구원 받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이야기이며, 사실들이며 하나님의 구원 행위다. 그리고 우리가 그 복음을 듣고 반응할 때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들이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그 복음이라는 핵심을 중심으로 선교를 통합한다.
우리 선교의 통합성. 우리의 모든 선교의 근원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이 온 세상의 구속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이다. 우리의 전도 과업은 그 복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선교의 상황은, 우리가 사는 세상 곧 죄, 고통, 불의. 창조 세계의 무질서가 있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그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위해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선교에는 전도와 세상 속의 헌신적인 참여가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이 담긴 온전한 성경의 계시는 이 둘을 지시하고 추동한다.
우리는 1975년 이 책이 출판된 이후 발전된 복음주의 선교 신학에서 통합에 또 하나의 영역이 더해졌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한 차원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3 장
전도(존스토트)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선교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속으로 보내셔서 하라고 하시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상당히 포괄적인 단어다. 그러므로 선교는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포함한다. 둘 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섬기려는 사랑의 진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전도의 우선성
그러나 나는 우리가 “교회가 희생적으로 감당하는 선교 사역에서 전도는 최우선이다라는 로잔언약의 선언에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압제당하고 무시당할 때, 그들이 빼앗긴 것이 시민의 자유든, 인종에 대한 존중이든, 교육이든, 의료든, 고용이든, 충분한 의식주든 간에, 양심의 극심한 고통과 연민을 느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를 향한 모욕으로 여겨야한다. 그러나 복음을 모르거나 거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것만큼 인간 존엄성에 파괴적인 것이 있을까? 또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 경제적 해방이 영원한 구원만큼 똑같이 중요하다고 진지히게 주장할 수 있올까?
전도의 의미
전도의 우선성을 인정하면, 이제 전도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
유앙겔리조마이,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을 가져오거나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
이 동사의 일상적인 용례는 기독교의 복음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복음을전파하는 것이 전도의 구성 요소다.
신약성경에서 ‘전도하다,라는 단어의 용례는, 우리가 보통 그 단어를 사용하듯이 회심자를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전도는 결과에 상관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선교에 관한 글과 설교에서 이 단어를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일로 정의하곤 하지만, 신약성경의 의미에는 그런 결과가 들어있지 않다.
전도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것도 아니고, 회심자를 얻는 것도 아니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실제- 이것들이 전도의 일차적인 목표이긴 하지만 말이다. 전도는 복음을전하는 것이다.
실제로 당신이 전도를 하고 있느냐를 가리기 위해서는 당신이 증언한 결과로 회심자가 나왔는지를 질문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당신이 복음 메시지를 정확하게 알리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이렇게 덧붙인다. “선포의 결과는 인간의 소망이나 의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전도는 기본적으로 선포이므로, 복음의 내용을 어떻게든 정확하게 전하려면 어느정도 언어화가 필요하다.
성경적인 전도에서는 성경적인 복음이 필수불가결하다.
신약의 복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첫째. 실제로 신약의 복음이란 것이 있는가? 신약성경은 분명 확고부동하고 정형화된 표현을 제시하지 않는다. 저자의 배경과 기질에 따라 또 성령의 계시에 따라 그 강조점의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히, 그에게 드러난 특정한 ‘신비,를 언급할 때 ‘내 복음’이라 쓸 수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형태들이 용인된다 해도, 또 신약에 신학적 표현이 아주 다양하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대한 단 하나의 기본적인 사도적 전통이 있었다.
유일하고 변함없는 신약 복음이란 무엇인가?
첫째이자 가장 좋은 대답은, 성경 전체가 놀라울 정도의 적실성을 가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인 듯하다. 성경과 복음은 거의 대체 가능한 용어다.
그 모든 폭과 길이에서 성경의 주요한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를 위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으로 증류되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핵심이요, 정수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제시했을까? 그들의 복음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 요소가 있었다.
복음의 사건
첫째로, 당연히 복음의 사건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그 일들이 그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눅 1:1; 24:14, 18),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부활했다.
실제로 네 가지 사건, 즉 예수님의 죽음 장사, 부활, 나타남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의 강조점은 두 가지, 즉,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것(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장사 지낸 바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타나셨다는 것)에 있음이 분명하다. 장사 지낸 일이 그분의 죽음의 실재를 입증했듯이, 나타나심은 그분의 부활의 실재를 입증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단지 역사적 사건으로만 제시하지 않고, 의미 있는 사건, 구원의 사건으로 제시했다.
복음의 증거
사도들의 메시지에 담긴 둘째 요소는 복음의 증거다.
이는 복음을 입증해야 할 때 제시하는 증거를 뜻한다. 두 명의 증인이 증언의 진실성을 확립해야 하므로 그 증거는 두 가지였다.
첫째 증거는 구약성경이었다.‘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기록되었으니’(눅 24:44-47)
둘째 증거는 사도들이 눈으로 본 증거였다.
성경을 언급하신 다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라고 덧붙이셨다(눅 24:481 또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 “너희가…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셨다(행 1:8)
그래서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사도들이 증인이라는 언급을 자주 포함시켰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중인이로다. (행 2:32)
이러한 이중적인 입증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인간적으로 재해석된 예수에 맞서, 진정한 예수, 성경의 예수인 역사의 예수를 되찾고 회복하는 일이 긴급하게 필요하다.
우리의 개인적인 증언은 성경 저자들의 증언, 특히 사도들의 증언을 확증하는 것이다.
신약과 구약의 놀랍도록 통일된 증언에서 하나님이 세상에 제시하신 그대로 한 분이시고 유일한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복음의 확언
셋째로, 복음의 확언들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있다.
그 근본적인 확언은 “예수는 주님이시다"이다.
바울은 우리가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썼다(롬 10:91 사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목적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는 것이었다(롬 14:91)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하셨기 때문이다(빌 2:9-11) 이것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의 확언이다. 이는 누구도 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조명하심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고전 12:3)
바울이 이 본문들에서 주장하는 바는, 예수님의 주되심 혹은 주권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이다.개인적 사회적 삶 전체를 예수님의 주권 아래로 가져와야 한다. 그분의 나라 안에 있다는 것 혹은 그분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것은 완전한 복과 완전한 요구 둘 다를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다는 상징적인 선언은, 복음의 두 가지 위대한 확언, 곧 그분이 구세주이시며(구원을 주시는 권위가있는), 그분이 주님이시라는(복종을 요구할 권위가 있는) 확언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예수는 주님이시다’, ‘예수는 구세주시다’라는 현재 시제로 된 그 말을 기다리고 있다.
복음의 약속
넷째로, 우리는 복음의 확언들에서 논리적으로 복음의 약속들로 향하게 된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두 가지 선물, 즉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행 10:43)
바울도 안디옥 회당에서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행 13:38)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과거를 용서하시는 것 이상을 주신다.
거듭남과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현재의 새 삶도 주신다. 성령은 우리가 미래에 하늘에서 받을 기업의 보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로 합치신 복음의 두 약속, 곧 죄 사함과 성령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둘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고 주장한 ‘구원’에 속해 있으며 (행 4:12),둘 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해방’의 일부다. 진정한 자유는 죄에서 구원받는 것 이상이다. 죄와 자기 중심성으로 부터 구원받고 나서,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헌신할 수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됨에서만 참된 자유를 찾을 수 있다.
복음의 요구
다섯째로 우리는 복음의 요구에 이른다. 하나님이 “이제는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라는 선언으로 마무리했다(행 17:30)
회개란 죄에서 돌아서는 것, 그리고 특히 예수님을 거절한 통탄할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사고방식, 가치관의 재조정,회개를 요구한다
회개는 개인과 하나님의 사이의 사적인 일 훨씬 그 이상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응답하여, 세상에서의 삶, 사람들 사이에서의 삶을 전면 재조정하는 것이다.우리 이웃을 향해 회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진정 회심한다는 것은 (마지막 장에서 살펴볼 것처럼) 불가능하다.
복음의 요구 사항은 회개와 믿음, 그리고(공적)세례다.
전도의 상황
전도는 다른 이들과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그 좋은 소식은 예수님이다.
그리고 우리가 선포하는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은,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이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주와 구세주로 통치하고 계시며 회개와 믿음을 명하실뿐 아니라,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는 모든 이에게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이다.
교회가 가시적인 존재가 되려면 매력적이어야 한다.초기의 교회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 교회는 그 삶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끈 공동체였다.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그 메시지를 듣기만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메시지가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메시지는 그것을 구현하고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맞이하여 교제하는 공동체로부터 나온다.
나는 전도 활동 자체에 설득의 요소를 포함하는 식으로 전도를 정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도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에 대한 복음을 나
누는 것이다. 결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다.
전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지금은 통치하시는 주로서 회개하고 믿는 모든 이에게 죄 사함과 자유롭게 하시는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설득할 목적으로. 구세주요 주님이신 역사적 .성경적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전도의 결과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순종. 교회에 속하는 것. 세상 속에서 책임 있게섬기는 것이 포함된다.
전도에 관한 고찰(크리스토퍼 라이트)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으로 거듭난 이후 초기 시절부터 이땅에서의 삶을 마칠 때까지 뼛속 깊이 복음 전도자였다 탁월한 전도자 내쉬를 통해 17세의 학생이었을 때 그리스도를 믿게 된 그는, 이내 이원 민스터에서 열린 남학생 복음 전도 캠프의 리더가 되었다., 또 유명한 대학 전도자로서 처음에는 모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그다음에는 미국, 캐나다 그리고 세계 여러 지역의 대학 교정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런던 랭햄 플레이스에 있는 올소울즈 교회를 교구 전도의 모델이 되도록 이끌었다. 개인 전도역량을 키우고 새신자들을 체계적으로 훈련하여 평신도 부대를 구비시켰다.
그러니 그가 전도에 관한 장을 “교회가 희생적으로 감당하는 선교 사역에서 전도는 최우선이다"라는 로잔 언약 제6항의 선언(그가 직접 초안을 쓴)을 되풀이하며 시작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그는 이미 그 말
이 전도가 교회의 유일한 과제라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서두에서 ‘선교라는 단어는…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 속으로 보내셔서 하라고 하시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상당히 포괄적인 단어다. 그러므로 선교는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나는 총체적.통합적 선교의 의미를 정의할 때,전도의 우위성보다는 복음의 중심성을 말하는 쪽을 선호한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스토트가(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간의 절박한 필요를 근거로 전도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방식에서 강조점만 미세하게 바꾼 것이다.
복음의 중심성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어려움에 처한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에 대한 성경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의 구성 요소로서 위대한 성경 내러티브에초점을 맞추면, 성경에 계시된 바 인간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미치는 모든 차원이 그 복음에 통합된다.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영원한 것과 땅의 것을 분리하지 않게 된다.
실제적으로, 그 논지를 표현하는 이 방식과, 스토트가 ‘우선성이 있는 총체성’이라는 균형을 이루어 낸 것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스토트의 경우 복음의 중심성이 전도의 우위성을 낳았다고 할 수 있는 반면, 내 경우는
선교에 대한 통합된 이해에서 복음의 중심성이 전도의 궁극성과 필요성을 낳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중심성은 나머지 모든 것을 그저 지엽적이고, 주변적이며 사소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중심성을 중심으로 다른 모든 것이 통합되고, 결합하며, 그 중심성이 다른모든 것에 방향과 의미를 부여한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복음이다
스토트는 이 짧고 강력한 문장에서 복음에 관한 관점을 분명히 표현하는데, 이는 놀랍게도 복음주의자들을 향한 최근 요청의 전조가 되었다.
그것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마치 ‘구원 계획’만을 의미하는 것인 양 사용하거나, 사람들이 죽을 때 하늘에서 자기 자리를 보증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사소한 영적 법칙으로 사용하는 데서 돌아서라는 요청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복음을 이야기할 때, 신약성경의 방식대로, 즉 근본적으로 성경 이야기 전체로 이루어진 좋은 소식으로 이야기해야 한다.이는, 하나님이 약속된 메시아요 속죄하는 구세주이자 재림하는 왕인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약속하고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완성하실 모든 것을 다루는 이야기다.
성경과 복음은 거의 대체 가능한 용어다. 성경 전체의 주요한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다.…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다.“
스토트의 간결한 논리를 다시 살펴보면, 그 논지는 다음과 같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중점을 둔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언하신 복음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는, 것은 바로 성경이다. 성경 전체가 온통 예수님을 증언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성경 전체가 ‘복음을을 구성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알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 모두가 이론의 여지 없이 참이다 이는 복음을 몇몇 성경 구절을 발췌한 것으로 축소하는 경향에 대항한다.즉, 먼저 나의 개인적인 죄 문제에 대한 구절들, 그다음 내 죄를 대신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구절들.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죄 사함과 영생에 대한 구절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여 정렬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개인화된 구원 계획은, 물론 복음 안에서 성취되고 보증되어 있음에도, 전체 이야기는 아니다. 혹은 더 정확하게 하자면, 근본적으로 복음이 말하는 전체이야기가 아니다.
전체 성경 이야기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세상과 인간 그리고 그 둘의 미래를 이해할때에만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성경 이야기로 이루어진 성경적 세계관이 없다면 우리의 복음 이해와 제시는 결함이 있을 것이다.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을 언급하
실 때(눅 24:44),그것을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으로만 명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 장엄한 내러티브의 전 범위와 방향과 흐름 가운데서, 우리가 지금 구약성경이라 부르는 정경 전체를 명시하셨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이야기가 하나님이 구속하시고 복을 주겠다고 하신 언약 안에 모든 민족이 포함되고, 실제로 모든 창조 세계가 포함되는 것임을 상기하게 된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복음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야기다.
구약의 좋은 소식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야웨께서 악을 이기시고, 왕으로 다스리시며, 세상 끝날에 구원을 가져오시리라는 약속과 사라지지 않는 소망이다.
바울은 창세기 12장 3절을 인용하며 그 ‘복음’이 먼저 아브라함에서 선포되었다고 말한다(갈 3:8)그리고 심지어 신약에 나오는 복음에 대한 핵심 단어 ‘유앙겔리온’과 ‘유앙겔리조마이’도, 시편 96편 1-3절과 이사야 52장 7-10절같이 민족들가운데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좋은 소식’에 대한 구약 본문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그분의 인격 안에서 역사속으로 들어왔다고 선포하셨을 때, 사람들은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그분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려고 사전을 찾아볼 필요가 없었다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때에만.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에서 기뻐하는 좋은 소식, 모든 민족과 땅끝을 위한 좋은 소식,그리고 실로 모든 창조 세계가 기뻐하는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임을 알았다(사 52:9-10; 시 96:10-13)
복음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승리의 부활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스토트의 의견에 우리가 동의하고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 해도, 또한 창조에서 새 창조에 이르는 성경의 전체 이야기라는 틀에서 그 ‘그리스도 이야기’를 보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바울이"하나님의 모든 경륜/계획/뜻"(행 20:27 새번역; 비교. 엡1:9-10;골 1:15-23)이라고 언급했을 때 의미한 바일 것이라 생각한다.
신학과 윤리를 아우르는 바울의 사상은, 거대 내러티브와, 그 내러티브에서 계속 발전되어 온 하나의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
그 위대한 이야기, 곧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주도하신. 그리스도 중심인, 소망으로 충만한 그 이야기 전체가 좋은 소식을 구성한다.
우리는 바로 이 좋은 소식에 먼저 믿음과 삶으로 참여하고, 그런 다음 전도라는 ‘복음’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는다.
어느 지점에서 스토트는 전도의 긴급성을 잃은 것을 한탄한다. 그는 우리가 복음 자체에 대한 확신을 잃은 것으로 여긴다. “오늘날 복음의 진리, 복음의 적실성,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잃은 일보다 전도를 방해하는 것은 없다." 나도 동의한다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복음에 대한 그러한 확신을 잃은 한 가지 이유는, 복음주의자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우리가 속해 있는 이야기, 복음이 들어가 있는 그 이야기를 잊었기(혹은 실제로 전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그들은 복음을, 십
자가의 대속 사역을 믿음으로써 미래에 ‘하늘에’ 있을 것을 개별적으로 보증 받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런 다음에는 이 세상에서 그들의 특정 문화적 환경에 존재하는 어떤 이야기든, 이 세상의 이야기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은 우주에 관한 진짜 이야기이자 역사와 현재와 미래를 해석하는 이야기인 복음이, 가장 깊은 차원에서 그들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진보와 ‘성장’의 신화를 밑에 깔고 살아가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과 주변의 우상 숭배적인 소비지상주의가 거의 차이가 없어보이는 서구 기독교의 엄청난 혼합주의를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복음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도, 복음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주적인 차원까지 모든 차원에서 좋은 소식으로 만드는 그 유일한 이야기, 즉 성경 이야기를 알고 믿고 그에 따라 살아간다는 표지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
2004년에 나는 로잔 운동 이사회로부터 로잔 신학 분과의 의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존 스토트가 1974년 제1차 로잔 대회를 뒤이은 신학적 씨름을 하는 동안 맡았던 자리였다.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제3차 대회를 하기 직전 몇 년 동안 우리는 로잔의 표어인 “온 세개에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온 교회"를 놓고 일련의 회담에 착수했다
복음은 성경 전체의 시각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한다.온전한 복음을 알기 위해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복음을 소통과 ‘마케팅’의 편의를 위해 몇 가지 공식으로 줄이는 환원주의에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2008년 치앙마이에서 열린 첫 회담에서는 ‘온전한 복음’에 대해 논의했다. 그 모임에서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바울이 ‘유앙겔로 시작하는 명사나 동사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 보고서의 첫 번째 요지는 복음의 내러티브적성격에 대한 것이다.
1.복음은 성경 전체의 시각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한다
2.복음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새롭게 화해한 인류를 창조한다.
3.복음은 십자가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한다.이 메시지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모든 족속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복음은 윤리적 변화를 낳는다
한쪽은 ‘복음,이고 다른 한쪽은 ‘윤리’인 경우는 없다. 신앙의 믿음과 신앙의 삶은 떼어놓을 수 없다. 이 둘은 복음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5.복음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우주적 능력을 가진다.
복음은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진 듯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 대해 전 세계에서 역사하고, 활동하고, 퍼지고,열매를 맺고 있다고 의인화할 수 있었다(골 1:6)
바울은 복음에 대한 가장 웅변적인 요약에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과 화해될 것이라고 선포한다(골1:15-23)
그 나라의 복과 요구
스토트의 글에서 짧은 항목 ‘복음의 요구’는 앞의 요지 복음은 윤리적 변화를 낳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더 정확히 말해서, 복음이 회개와 믿음이라는 반응과 만날 때 그렇게 된다.
스토트는 복음 선표가 하나님 나라 선포라고 말할 수 있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 둘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스토트는 몇 십 년이 지나 두각을 나타낼 개념을 몇몇기본 문장으로 요약하려 한다. 바로 ‘복음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이 하나님의 통치 즉 다스림은, 구원을 주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이 보좌에서 실행하신다. 그것이 그 나라의 복이며 요구다. 모든 신실한 전도자들이요구한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반응은, 회개와 믿음이라는 한 쌍의 반웅이다. 그것은 약속이 따라오는 요구다. 요구와 약속은 하나님 통치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면 구원이 약속된다. 그러나 하나
님이 왕이시라면 변화가 요구된다. 혹은 스토트가 간결하게 말하듯이.‘이 하나님의 통치 즉 다스림은 보좌에서 예수께서 행하시며 그분은 구원을 주시고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것이 그 나라의 복이며 요구이다
회개는 대중적인 설교에서 ‘메타노이아’의 의미로 설명하곤 하는 ‘마음의 변화’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구약에 깊은 뿌리를 둔 그 단어는, 하나님께 반역하여 사는 악한 삶과 우상숭배에서 돌이키는 것, 철저히 변화된 삶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포함한다
믿음과 선행은 같은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그 둘은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케이프타운 서약에서 한 단락을 인용함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사랑한다
1. 우리는 악한소식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좋은 소식을 사랑한다.
2.우리는 복음이 전해 주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3.우리는 복음이 확증하는 바를 사랑한다.
4.우리는 복음이 빚어내는 변화를 사랑한다.
5장 대화(존스토트)
지금까지 내가 펼친 주장은, 선교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 속으로 보내셔서 하게 하시는 자기 희생적인 섬김을 뜻하며 거기에는 전도와 사회 정치적 행동이 포함된다는 것, 이러한 폭넓은 선교의 개념 내에서 전도에 긴급성이 더해지며 전도에 우선성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전도는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을 알리거나 선포하는 일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복음을 선포할 때 대화의 여지가 있는가?
지난 일이십 년 동안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과의 대화’라는 개념이 에큐메니컬 쪽에서 유행했다는것, 복음주의자들은 오히려 그 경향에 강하게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부정적인 반응은 정당한가?
극단적인 견해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늘 그리고 내 판단으로는 당연하게도, 복음 선포의 필수불가결성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교회를 복음의 전령으로 임명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은 선포에 적합한 것이지,우호적인 토론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마틴로이드존스)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협상할 수 없는 계시다. 우리의 목적이 복음을 더 굳게 붙잡고, 사람들이 더 받아들이기 쉽게 권하는 것인 한, 우리는 분명 그 의미와 해석에 관해 토론할 수 있다 우리의 목적이 복음을 더 굳게 붙잡고, 사람들이 더 받아들이기 쉽게 권하는 것인 한, 우리는 분명 그 의미와 해석에 관해 토론할 수 있다
대화’와 ‘토론은 서로 다른 두 가지임을 덧붙여야 한다.
다른 극단에는 선포, 혹은 적어도 권위적이거나 교조적인 설교를 싫어하는 경향이 커지는 현상이 있다. 선포는 오만한 것이라고들 한다.겸손한 소통 방식은 대화라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의 진리와 만날 때, 우리의 진리가 교정될수도 있고 깊어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대화에 들어가는 일은 어려울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완전히 마음을 열어 놓으면 대화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 믿음은 위태로운 상태가 된다.
복음진리에 관한 우리의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까지 유보할 정도로 전적으로 ‘열린 마음을 함양할 일은 아니다. 그런 시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진정성을 파괴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대화
대화에 관한 이 대화에서, 아마도 먼저 해야 할 것은 정의를 내리는 일인 것 같다
데살로니가 회당에서는 3주 동안 ‘‘바울이…성경은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라고 했다. 그런 다음 누가는 ‘그 중의 어떤 사람[이] …권함을' 받았다고 덧붙인다〈행 17:1-4),여기 다섯 개의 단어, 즉 강론, 뜻을 풀어, 증언, 전하는, 권함이 함께 나온다. 이는 바울이 실제로 유대인들과 토론을 하고, 그의 메시지에 대한 그들의 반대를 듣고 대답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요약하면, 바울이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무리와 개인에게 한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대부분의 설교에 어느 정도의 대화를 포함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의 사역에 포함된 종류의 ‘대화’는, 오늘날 보통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는 전혀 다르다.
그가 세상과 나눈 대화의 주제는 항상 그가 직접 선택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
목적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로의 회심이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 나누는 대화에는 신앙보다는 불신, 선포보다는 타협의 기미가 있는 듯하다 이제 대화에 대한 반론을 볼 때다
대화를 반대하는 주장
1910년 에든버러에서 큰 확신의 분위기에서 세계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비기독교 종교들이 곧 붕괴할 것이라 예언했다.이러한 분위기는 4년 후 제1차 세계대전
의 발발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러고 나서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제2차 선교대회에서는 분위기가 이미 달라졌다. 참석자들은 세속주의의 성장을 인식했고. 심지어 이러한 전 세계적인 적에 맞설 공통의 종교적 전선이 필요하다고까지 제안했다.
10년 후 1938년 제3차 에큐메니컬 선교대회가 마드라스 인근 탐바람에서 열렸다. 그 대회의 핵심 인사는 네덜란드인 헨드릭 크래머였는데, 그의 책『비기독교 세상에서의 기독교 메시지』
가 대회 개최 직전에 쓰여 출판되었다"
그는 공격적인 기독교 선교도 거부했지만, 그리스도가 비기독교 종교들의 성취라는 개념도 거부했다. 대신, “설득하고 이기려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타협하지 않는 복음 선포를 권했다. 그는 교회에게 ‘유일무이하고 타당하고 능력 있는" 신앙을 되찾으라고 요청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감히 사람들에게 이들(즉, 다른 종교들)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발 앞으로 오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온전한 구원이 그분 안에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탐바람 대회가 끝나자, 제2차 세계대전과 전쟁이 불러온 새로운 이교도의 검은 폭풍 구름이 이미 지평선을 어둡게 물들였고, 전쟁 이후 에큐메니컬 활동이 재개되자, 크래머가 예언했던 “다가올 동구와 서구의 대화’가 이미 다른 목소리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었다.
1963년에 슐레테(I 1. 휴. 801116“)는 “누구든지 진리에 기반한 질서에 따라 인생을 살고자 하는 진정한 갈망에 따라, 개인의 윤리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방식을 정하는 사람은 구원에 이른다”라고 썼다.’
이와 비슷하게 칼 라너는, 진실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오히려 “익명의 그리스도인들"로 보아야 한다는 개념을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복음 선포는 그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완전히 저버린 누군가를 그리스도인이 되게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객관적인 성찰과 신앙고백을 통해, 은혜를 받은 그 존재 깊숙한 곳에 있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유사한 생각이 라이문도 파니카의 [힌두교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에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비기독교 세상에 존재하시는가? 점점 다원화되어 가는 사회와 혼합주의적인 시대에, 이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기본적인 신학적 질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이러한 계시, 종종 ‘일반 계시’(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므로) 혹은 ‘자연 계시’(자연과 인간 본성에 주어지므로)라 불리는 이러한 계시는 그들을 구원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분은 진정한 빛이다. 다른 빛은 모두 그 빛의 표상과 그림자일 뿐이다. 그 기원을 모른다 해도, 우리는 온 역사와 온 땅에서
모든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고 서슴없이 주장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이 보편적인 빛은 구원하는 빛이 아님을 덧붙여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과 “생명의 빛”을 받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충분한 빛과 비교할 때 어스름한 빛일 뿐이기 때문이다(요 8:12)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의 증언은 한결같다. 세 사람 모두 비기독교 세상에서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활동하신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비기독교 체계에 진리의 요소들이 있음을, 자연에 하나님의 일반 계시의 흔적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우리가 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구원에 충분하다는 견해이며, (더 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비기독교 신앙들이 하나님께 이르는 대체 가능하며 동일하게 유효한 길들이라는 견해다.
타종교인 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가 있지만(내가 곧 주장할 것처럼)그들과의 ‘대면’, 심지어 ‘대립’도 필요하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충분하지 못함과 허위를 폭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진리, 절대성과 궁극성을보여 줄수 있다.
대화란 진정 어떠해야 하는지, 어떻게 호의적으로 소통할지 우상대화를 고려할 때.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신념을 타협해서도 안 되고 타협할 필요도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대화 찬성론
첫째로, 진실한 대화에는 진정성이 있다.먼저 웁살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의 성명서에서 일부를 인용하고자 한다.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인이 타종교인과 대화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거나,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헌신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기독교적으로 다가가려면 인간적이고, 인격적이고, 상황에 적절하고 겸손해야 한다.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같은 존엄성과 타락을 지닌 인간임을 공유하고, 그 인간성에 대한 공통의 관심을 표현한다.
만약 우리가 먼 데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한다면, 우리의 인격적 진정성은 미심쩍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복음을 나누고 싶은 그사람에게도 관심이 있다. 대화는 전도를 진정으로 인간적인 상황에 들어가게 한다.
둘째, 진실한 대화에는 겸손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지음 받은 한 인간으로서 그 사람에 대한 존중이 자란다는 뜻이다. 그가 타락하여 죄를 짓는다면 우리도 그렇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 사이의 거리가 좁혀진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신념들을, 경솔하고 무정하게 묵살하고 없애 버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를 희생시켜 자신감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전도에서 겸손은 아주 멋진 은혜다.
셋째, 진실한 대화에는 일관성이 있다.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친구의 진짜 신념과 문제들을 듣고,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던 거짓된 이미지를 걷어낸다. 우리 둘다 한 가지에만, 즉 진리가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나는 그리스도가 진리임을 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두에게 같은 요구를 하시므로, 나는 당연히 나의 깨달음과 헌신도 불충분함을 안다. 그래서 대화는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도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격적인 일관성이 있으면, 대화 상대의 자유와 존엄성을 존중하고, 나 스스로 묻거나 바라지 않는 것을 그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관
성이 진실한 대화에 꼭 필요하다.
넷째. 진실한 대화에는 민감성이 있다.전도는 정형화된 모습으로 전락할 때 오명을 얻게 된다
미리 정한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미리 정한 길을 따라 대화를 하는것은, 안타깝지만 친구의 실제적인 필요뿐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둔감함은 신앙의 측면에서도 사랑의 측면에서도 실패한 것이다
대화는 본질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다.
로잔 언약은 대화에 대해 두 번 언급한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종교와 이념을 통해 동일하게 말씀하신다고 암시하는 대화와 혼합주의는 모두 그리스도와 복음을 경멸하는 것으로 여겨 거부한다"고 확고하게 말한다.,7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위해 민감하게 귀 기울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는’실제로 “전도에 필수적인” 것임을 마찬가지로 확고하게 말한다.
힌두교도들과의 대화
첫째 예는,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번창한 인도에서 사역한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스탠리 존스다. 그는 다작의 작가로, 가장 유명한 두 권의 책은 아마(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와 (원탁의 그리스도)로 이 두 책에 그의 사역 원리가 묘사되어 있다.
사역 시절, 한 힌두교도가 그 지역 사회에서 중요한 힌두교도들 몇을 소개한다며 자기 집에서 열리는 티파티에 그를 초대했다 그들은 바닥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존스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서양 사상과는 관계없이 인도에 직접 왔다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 시의 시장이 끼어들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에 관해 말하는 거군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존스는 그 답으로 자신의 회심 이야기를 했다. 시장은 “그러면 내가‘ 어떻게 그를 발견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존스는 그 답으로 자신의 회심 이야기를 했다.
이 대화에서 존스의 유명한 원탁회의가 나왔다. 각자의 종교가 자신의 경험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한번은 영국 합리주의 협회 회원으로 그 협회에서 제공한 최신 정보를 활용하여 기독교를 맹렬하게 공격하는 글을 썼던 한 힌두교도가 좀더 깊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야기해 달라는 도전을 받고 금세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맨발에다 단순하고 수수한 옷을 입은 한 그리스도인 청년이 자연스럽게 주 예수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했다. 존스에 따르면, “그 모임에 참석한 나머지 사람들과 이 청년은 영적 사회적 문화가 아주 달랐지만" 누구도 그 청년이 이야기할 때 드러난 진실성과 진정성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스탠리 존스의 ‘원탁’ 방법론에서 독특한 두 가지 측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그가 공평성과 상호 존중을 강조한다는 것이다.종교의 가장 깊은 부분은 공감의 분위기를 필요로 한다. 토론과 논쟁의 분위기에서는 가장 깊은 부분, 즉 종교의 진정한 측면들이 시들고 사라진다.
그의 회의에서 두 번째 인상적인 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이 분명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리스도가 도덕적 영적 주도권을 잡지 않으신 채로 원탁회의가 끝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에는 다른 모든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구석으로 밀쳐지고 그리스도가 상황을 주도하셨다.
한번은 어떤 회의의 끝 무렵 한 힌두교도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 여덟 명이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 중 누구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 그리스도인 다섯 명은 이야기하고 나서 모두 찾은 것 같았습니다. 정말 보기 드문 일입니다.’ 또 다른 회의에서 한 힌두교도 변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에서 꽃을 가져다가 방을 가로질러 가더니 그 꽃을 한 그리스도인의 발 앞에 두고 그의 발에 손을 대며 말했다. “당신은 신을 찾았군요. 당신이 나의 구루입니다.
무슬림과의 대화
내 세대에 이 분야에 서 가장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하나는 케네스 크래그주교다. 크래그의 주장은 모두 그의 책『첨탑의 외침』에 담겨 있다. 그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외침을 무슬림들에게 기도하라 는 요청이 아닌, 무슬림 세상의 도전에 반응하라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외침으로 해석한다.
“첨탑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된 둘째 부분에서는 우리를 향한 다섯 가지 외침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해하고, 섬기고,복구하고(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심히 미심쩍어 하는 상황이 있는데,그 상황을 고치라는), 해석하고, 인내하라는 외침이다.
그 책을 읽으며 특별한 두 가지 강조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크래그가 “이해하려는 열망”이라 부르는 강조점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이해는, 그저 이슬람 연구로 얻어질 수 있는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무슬림들과 충분히 만나는 데서 나오는 훨씬 더 친밀한 앎이다.
우리는 단지 책이 아닌 사람을 통해 이해에 이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자이자 추종자이자 사람인 무슬림들의 일상 생활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크래그가 기독교 신학에 대한 무슬림의 “심각한 오해"라 부른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과 삼위일체, 그리스도와 십자가; 구원에 관한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다
둘째로 그것은 또한 소극적으로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라는 외침이다.“이슬람의 부흥에
기여한 요소들 가운데는 기독교 교회의 실패가 있었다. 그것은 사랑, 순결. 열정의 실패였고, 정신의 실패였다.
이슬람은 불완전한 기독교" 심지어 “직무 태만의 기독교라는 환경에서 발전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멀어진 것을 원상태로 돌리고, 이슬람에게 낯선 이가 된 그리스도에 대해 할수 있는 충분한 배상으로 과거에 대해 보상하려 한다. 목적은. 십자군의 생각처럼 기독교 왕국이 잃은 것을 회수하는 것이 아니라. 무슬림들에게 그들이 놓친 그리스도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복구는 영토와 관련 있지 않다는 것이다.…복구는 영적인 것이다. 그 목표는 더 기독교적인 지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널리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마땅히 제시되어야 할 분이라는 유일한, 충분한 이유로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그래서 크래그는 해석 작업에 헌신한다 그 작업에서 그는 신학의 주요한 다섯 가지 영역을 아우른다 곧 성경,예수님의인격,십자가,하나님,교회에 대한 교리다. 그리고 그 과정 내내 인내를 요청한다 “어떻게든 제거해야 하는, 엄청난 오해에 대한 인내: 실제로 “그 자체가 기독교 선교인 인내의 수고"를 요청한다
영국산업 지역에서의 대화
셋째 예로, 후기 기독교 사회 영국, 복음을 듣지 못한 산업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진 데이비드 셰퍼드주교를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주장들을 진지한 주제로 삼는 교회에는, 최소한 네 가지 특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곧 지역의 교회이자 지역을 위한 교회, 믿고 예배하는 교회. 판단하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사귐이 있는 공동생활 지역 지도자와 의사 결정자다.
그는먼저 ‘다리 놓기’가 필요하다고 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역 사회의 다른사람들과 함께하는 데" 시간의 우선순위를 두고 중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또 함께 지역의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을 밝히고 다루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다리 놓기 다음은 우정으로 나아간다.매주 화요일 저녁을 따로 떼어놓았다.” 화요일마다 교대로 한 주는 그들의 집을 찾아가고, 다른 한주는 자신의 집에서 부부들을 접대했다.
일부가 집에 간 후에. 그리고 우리가 다른 가정들을 방문할 때 이런 모임이 있었고 최고의 대화는 대부분 저녁 10시 반에서야 시작되었다
다리 놓기에서 출발하여, 편안하게 토론하는 비공식적인 저녁 모임에서 우정을 쌓고 나면, 조금 더 진지한 ‘탐색 그룹으로 나아갔다 “다섯부부가 왔다. 그들은 이미 어떤 생각을 표현하든 어리석다고 여겨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그때 나는, ‘대화 그룹’이 생겨날 때
그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들도 인생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감지할 때. 얼마나 강력한 학습 무기가 생성되는지 알게 되었다.
2년 반후 데이비드 셰퍼드는 ‘그 지역의 수많은 부부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쓸 수 있었다.
데이비드 에드워즈는 그책을 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책은 탁월하게도 실제로 살고 실제로 사랑하는 일에 인내하라고 요청한다. 우리에게 계속하기를 계속하라고 요청한다
대화는 진정한 기독교의 사랑의 표시다.
대화는 우리 마음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품은 편견과 왜곡을 없애겠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그들의 귀를 통해 듣고 그들의 눈을 통해 보려고 애쓰겠다는, 또 그들의 온갖 회의와 두려움과 ‘거리낌에 공감하겠다는 확고한 다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감에는 듣는 것이 포함될 것이고, 듣는 것은 대화를 뜻한다
다시 한 번, 완고한 표어들로 행하는 전도를 내려놓고, 사람들이 마주한 진짜 난제에 민감하게 참여하는 것은 성육신의 도전이다.
대화에 관한 고찰(크리스토퍼라이트)
존 스토트는 성경의 진리와 권위에 순복한 것과 더불어, 구세주이시고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궁극성에 평생 헌신했기에, 어느 쪽에 대해서든 위협이 되는 듯한 신학이나 이념과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다원성이라는 사회적 사실과, 상대주의적인 종교적 다원주의라는 이념을 세심하게 구분했다. 적어도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단순히 인간적인 존중과 존엄의 행위로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종교 다원주의라는 이념이나 신학은, 모든 종교가 ‘구원에 이르는 길’로(어떻게 정의되든)그 나름의 독자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종교도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 이르는 단일하고 배타적으로 유일무이한 길을 제공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스토트는 상대주의적 대화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성경적 믿음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전제들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나는 이 주제에 아주 약하게 조금 관여했는데, 이는 우리의 길이 엇갈리는 또 다른 영역이다.
“그리스도께서 비기독교 세계에(다른 종교들의 세상을 뜻하는) 존재하시는가?"에 대한 답은, 일반 계시의 측면에서는 ‘그렇다’이고, 구원의 측면에서는 ‘아니다’가될 것이다.
주류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뉘앙스를 가진 대답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들은 거기서 더 나아간, 구원이 가능한 포용주의는 거부한다 이러한 포용주의는 로마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서들과 그 공의회의 공식 고문이었던 칼 라너의 영향력 있는 신학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이 거부하는 ‘포용주의’의 형태로, 다른 종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한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하나님의 섭리적인 허용에 의해) 시각이다.
스토트는 아주 간단히 라너의 ‘익명의 기독교’ 신학을 언급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라너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은혜는 너무도 강력하게 사람들을 찾고 있어서. 아직 기독교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도 그들의 종교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럼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적극적인 수단,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포함된 수단을" 찾도록 “허용된다." 그는 진실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로 여긴다. 이는 그들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자신도 모르게 그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실한 힌두교도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겠지만, 그것은 힌두교의 ‘성례전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그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는 사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
스토트는 이런 형태의 구원 가능한 포용주의에 대해,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의 글에서, 사도의 예들과 가르침을 조사하며 답한다. 그런 다음 이렇게 결론짓는다.그러므로 우리는 비기독교 체계에 진리의 요소들이 있음을, 자연에 하나님의 일반 계시의 흔적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우리가 강하게 부인하는 것은,이런 것들이 구원에 충분하다는 견해이며, (더 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비기독교 신앙들이 하나님께 이르는 대체 가능하며 동일하게 유효
한 길들이라는 견해다.
나는 이 평가에 동의한다. 그러나 스토트가 고넬료의 경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 다르다. 포용주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넬료가‘ 베드로가‘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하러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으로써 ‘구원’받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해 듣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토트는 그렇게단순화한 결론을 부인한다. 그러나 나는 ‘고넬료가 이미 구원받은 것인가. 아닌가?,라는 단순한 질문보다 더 함축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내용은 내가 다른 데서 고넬료에 대해 논의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질문하는 것은 약간 정확하지 않다. 우선. 전체 문맥에서 볼 때 베드로의 선언[행 1034-35, 여기서 베드로는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말한다]은, 단순히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보편적인 단언이 아니다. 그것은…예수님의 복음이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을 무너뜨렸다는 베드로의 인식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요지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든 환영하신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이 사건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을 눈여겨봐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고넬료는 예수님에 대해 듣기 전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에
따라 행하게 된 구약의 이방인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고넬료는 구약게 나오는 신자들과는 달리, 실제로 메시아가 오신
세대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고넬료는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에게 갔는지를 이야기하는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그 이야기의 전체적인 요지는 메시아 예수가 오셨으므로 구원이 그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인 듯하다" …고넬로 가 전도를 받기 전 ‘구약의 행위’를 한 것에 대한 호의적인 평이 어쨌든 전도가 불필요함을 암시한다고 일반화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만약 ‘배타주의자; ‘포용주의자; ‘다원주의자.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한다면(그리고 내가 말했듯이, 다른 종교들의 질문을 다루는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그 분류는 심히 복잡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라 말한다), 앞에서 ‘구원이 가능한 포용주의’로 설명한 입장에 대한 중간적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가 일반 계시
를 통해 타종교의 가르침에도 들어 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다른 종교의 ‘성례전’을 통해 어떤 식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견해다. 이 견해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들 종교의 진실한 실천을 통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한 종류의 포용주의는 어떤 구원 능력, 기능 혹은 유효성을 다른 종교들에게 부여한다 이는 존 스토트와 나 둘 다 거부하는 형태의 포용주의다
이는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수용한 견해와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앞
의 ‘배타주의자’ 패러다임에서 규정한 모든 요소를 고수하지만(특히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만 배타적으로 발견된다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에 대해 들어 보지 못했지만 어떤 형태의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느냐 하는(은혜로-그리스도를 통해) 질문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 둔다
나는 지금은 그러한 입장을 ‘포용주의자’라 부르지 않기를 바란다(그 이름이 내게 불여졌음에도) 오히려 ‘배타주의자’(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이면서 제한주의자(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은 사람들, 다시 말해 복음화된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는, 즉 실제로 그런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닌 입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 종교의 매개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미에서의 ‘포용주의’는 분명 아니다
구원이 종교를 통해(어떤 종교든) 온다는 바로 그 생각은, 성경 자체가 강력하게 자주 부인하는 것이다.
대화하는 존스토트
나는 스토트가 세계의 주요 종교인들과 개인적으로 지속적인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계 안에서는 종종 복음주의가 아닌 시각에(심지어 일부 복음주의자들에게도!)동의하지 않았다(때로는 철저하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늘 취하는 방식은 가능할 때마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 혹은 그가 공개적으로 혹은 글로 의견이 다름을 표현한 이들을 초대하거나 찾아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으며 혹은 오후에 차를 마시면서 말이다.
그는 듣는 일, 이해받을 뿐 아니라 이해하려 하는 것, 어디에 진짜 중요한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지점이 있는지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그와 의견이 다른 이들의 글을 깊게 주석을 달며, 자세하고 폭넓게 읽었다.
그는 언젠가 내게 이것이 가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필요한 훈련이라고 말했다.불행히도. 스토트의 의견을 재빨리 묵살해 버리는 이들(주로 몇몇 그리스도인 지도자나 논평자에게 전해 들은 말에 따르면) 대부분은 그런 수고를 하지 않는다고 말해야겠다.
가톨릭의 자유주의 전통 내의 유명한 영국 성공회교회 지도자요, 교회사가이자 저술가였던 데이비드 에드워즈는 존스토트를 비판적으로 숭배하는 사람이었다.1960년대와 1970년대에 상당 부분 스토트의 지도력에 힘입어 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났음을 알고 스토트의 모든“
책(이 책을 포함하여)과 로잔 언약과 같은 그의 폭넓은 기고문들을 읽은 에드워즈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스토트가 대변한 복음주의신학을 탐구하고 비평하기 시작했에드워즈는 스토트보다여덟 살쯤 어렸다. 그는 실제로 스토트가 올소울즈교회와 더큰복음주의 세계에서 한 모든일에 대해 놀라울정도로 자세하고 따뜻한 감사를 담아 자신의 책을 시작하면서 그 모든장에 응답해 달라고 스토트에게 청했다.
그 책의 장 제목들은 그 주제의 폭넓음을 보여준다. 또 에즈워드가 복음주의 신앙과 실천의 핵심요소들을 얼마나 잘 규명했는지 알 수 있다.
1. 복음의 능력
2, 성경의 권위
3, 그리스도의 십자가
4, 기적적인 그리스도
5, 성경과 행위
6 세상을 위한 복음
각 장마다 에드워즈는 그 주제에 대한 전형적인 자신의 자유주의적 이해를 주장한 다음(그리스도인으로서 개인적인 신앙 안에서), 스토트 같은 복음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내용에 대해 과격하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고 나면 장마다 스토트의 긴 응답이 뒤따르는데, 스토트는 그 주장 하나하나에 대해 논증하고, 성경 본문에 대한 자세한 주해를 했다(스토트의 웅답만으로도 3만 5천 단어가 되었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서로 교류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둘 다 서로의 입장에 강력하게 도전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다가갔고, 서로의 힘 있는 반론에 존경을 담아 감사했다.
스토트는 그럴 만하다면 복음주의자 들에 대한 비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어떤 전통적인 견해들이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는 바를 넘어서는 경우에 그랬다.
둘 다 그리스도를 향한 상대방의 개인적인 신앙과 헌신의
진실성을 존중했지만, 둘 다 상대방이 각자의 신학적 이해를 분명히 표현하고, 가르치고, 정당성을 입증하는 방식에 진지하게 도전했다.
스토트는 분명 많은 부분에서 위태로웠다. 결국 모든 장의 주제는 복음주의 신념의 핵심에 있는 것들이었다.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 성경, 십자가, 복음서의 역사성,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서 성경의 권위, 세계 선교의 긴급성 등이 그러했다.
따라서 그는 이 모든 주제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힘 있게 지속적으로 논증하며 복음주의의 입장을 변호한다. 그는 신학적 자유주의의 한계와 모순, 그리고 그것이 우리 신앙에 대한 전통적인 성경적 이해를 어떻게 왜곡하고 일탈했는지를 드러낸다.
에드워즈가 제시한 것과 같은 자유주의는 여전히 건재하기에(게다가 그들이 복음주의의 신념들을 거부할 때 우호적이거나 존중하는 태도가 없음에도), 정통 기독교 교리들에 대한 수많은 비판에 총명하고 철두철미하고 성경적이고 설득력 있게 대응하는 본으로 그 책은 여전히
충분히 읽을 만하다. 다시 말해, 이는 1975년 스토트가 주장한 바로 그대로의 대화다. 진정성과 겸손과 일관성과 민감함이 담겨 있지만, 복음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대화다
저는 로잔 언약이 대화와 전도에 관한 질문에 대해 보인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있는 것은 전도에 필수 불가결하며, 이해하기 위한 경청을 목표로 하는 대화 역시 필수 불가결하다. 그러나 전도 자체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설득할 목적으로, 구세주요 주님이신 역사적 성경적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구원(존스토트)
선교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상 속으로 보내시며 하라고 하신 일이며 이 희생적인 섬김의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전도, 곧 예수님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며 그것이 우리가 고찰할 네 번째 단어다. 구원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구원의 중심성
성경의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이시며, 주도권을 쥐고 구원하시는 분이다. 목회서신에서 하나님은 “우리 구주 하나님으로 6회 불린다.
성경 전체가 ‘구속사’즉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역사다. 실제로 성경은 과거의 연대기 이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는’(딤후 3:15, 새번역) 현대의 구원 안내서다
당연히 복음은 “구원의 복음'(엡 1:13)으로 불리고, 심지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라 불린다. 하나님은 ‘케리그마’를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고전 1:21)
성경적 기독교에서 구원이라는 주제가 이렇게 두드러지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고, 그리
스도께서 성취하셨으며, 성경이 펼쳐 보이는. 복음이 제공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과육체적 건강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받는 구원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해로운 데서 구조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조되는 것이며, 예수님이 두 범주에 대해 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질병, 익사, 죽음에서) 물리적으로 구해 내시는 사역이 의도적으로 그분의 구원을 나타내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도 그렇게 이해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이 계속해서 ‘세메이온즉 그분의 나라의 표징(표적), 그분의 구원의 표징이라 불리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더나아가 사도들도 그렇게 인지했고, 당연히 이러한 기적 이야기들을 그들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사용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은.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붓고 죄 사함을 받은 부도덕한 여인에게 선포되었다(눅 7:48-50),또 맹인에게도, 나병으로 고통받는 이에게도. 출혈 문제가 있었던 여인에게도 선포되었다. 이는 그들이 병 고침을 받은 것이 그들에게 구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병 고침이 구원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비유였기 때문이다
구원과 정치적 해방
둘째. 구원은 사회 정치적 해방이 아니다. 육체적 정신적 질병이 아닌 사회적.정치적 구조의 측면에서 우리 인간이 처한 주요한 곤경을 기반으로. 구원 교리를 설명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에 대해 궁핍하고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기아와 가난과 전쟁에서,식민 지배와 정치적 탄압과 인종 차별과 경제적 착취에서, 빈민가와 정치범 수용소와 현대 세계의 삭막한 기술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재해석한다. 질병이 아닌 압제가 문제다.
따라서 구원은 건강이 아니라 정의다.
이렇게 구원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세계교회협의회가 보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평화와 자유와 존엄과 정의를 누리며 더불어 살도록 하셨다. 이러한 것들은 모든 사회에서 하나님의 관심사다. 성경의 하나님은 의롭게 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정의의 하
나님이시며. 불의와 폭정을 미워하신다. 더 나아가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적 .정치적 책임에서 손을 떼는 죄를 범하곤 했다.이렇게 등한시한것은 우리의 과실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부르고 계신다고 우리 자신과 서로에게 서슴지 않고 도전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서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인종 간 관계, 공중위생, 발전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그러한 수많은 영역에 헌신하라고 부르셨지만, 그런 부르심을 들은 이들보다 훨씬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부르고 계신다고 말이다.
해방신학
구원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은 ‘해방신학을 지지하는 이들이다.
배경이 된 것은 세 가지, 곧‘압제 받고 있던 대륙’ 남미,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의 현대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다.
우리는 그가 규정한 목표 즉 “사람의 자아 실현을 제한하거나 막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 사람의 자유 행사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로 부터의 해방에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으므로, 우리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모든 것에 반대해야 한다.
사회적 해방을 성경이 말하는 구원인 양 제시하려 할 때, 그래서 정치적 행동을 위해 전도를
생략하려 할 때, 나는 마지못해 그러나 단호히 그들과 결별한다.
신약 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과 그 안에 있지 않은 이들, 성령을 소유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계속 구분하며 끊임없이 이러한 개념을 부정한다(예를 들어. 롬 8:9; 요일 5:12)
그렇다면 구티에레스의 체계에서 회심의 자리는 없는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웃을 향한 회심’이다. 그는 이미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면. 비록 그가 그렇게 하고 있음을 분명히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구원받는다’’라고 주장했다.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와 거의 똑같다.바울이 쓴 “한 새 사람” 혹은 “단 하나의 새로운 인류’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은 구조보다 는 사람에 관심을 둔다 그것은 정치적 .경제적 압제보다는 또 다른 멍에에서 건짐 받는 것이다
해석학적 질문
에큐메니컬 운동 내에서 지지하는 해방신학에서 내가 아주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은 기본적으로 해석학적 측면이다
해방신학이 성경을 다룰때 구약과 신약에 다 관심을 두지만 해방신학 지지자들은 성경을 가지
고 그 신학을 강화하려 한다
때로는 임의로 선택적으로 사용하고(불편한 부분은 제외하며), 또 어떤 때에는 심히 무신경하다(이미 정립한 이론을 지지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하기 편한 대로 구절을 왜곡하면서)는 것이다.
1973년 방콕에서 열린 오늘의 구원 집회에서 한 가톨릭 참관인은, 이 집회에서 ‘구원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지만 사도 바울이 구원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탄했다 아무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혹은 영생을 언급하지 않았다.
구원을 사회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구약에서 성경의 구원을 사회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구약에서 성경의 증거를 끌어온다. 바로, 이집트의 압제자들에게서 이스라엘이 해방된 사건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내러티브를 압제 받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 또 그것을 하나님이 모든 압제 받는 자들을 향해 뜻하시거나 약속하신 해방으로 여길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분명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모든 형태의 압제가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임은 분명하다. 또 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심도 분명하다.
하나님은 다시 아모스를 통하여. 그(이스라엘과)관계의 독특성, 그러므로 거기에 담긴 도덕적 의미를 주장하셨다.
내가 땅의 모든족속가운데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너희 모든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3:2 시147:20)
출애급 배후에도 이와 똑같은 관계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하시고 또 시내산에서 그 언약의 갱신을 기대하셨다(출 2:24)
성경에서 구원과 언약은 항상 한 세트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출애굽은 정치적으로 압제받는 소수들에 대한 해방의 약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죄에서 구속받는것에 대한 이미지가 된다.
신약은 구약의 구원 약속들을 다룰 때 그것을 물리적인 측면보다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해석한다 세례요한은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그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할 것이다(눅1:67-79)
물질적 가난, 물리적으로 눈먼 것. 부당한 투옥은 다양한 수준으로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조건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런 식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나의 요지는, 이런 것들에서 구해 내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 구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성경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려고 죽으시고 지금 세상에 제공하시는 그‘구원’은 심신의 치유도 아니고 사회 정치적 해방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시도를 했다.
이러한 소극적인 측면은 적극적인 측면과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이 영역들, 즉 우리 몸과 사회에 관심이 아주 많으시다. 둘째, 언젠가는 몸과 사회 둘 다 구속 받을 것
이다 우리는 새로운 몸을 부여받고 새로운 사회에서 살 것이다. 셋째,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사랑 때문에 그 두 영역에서 일한다. 즉 육체적 건강을 증진시키고(치료와 예방 수단으로), 또 사람들에게 자유와 존엄과 의와 평화를 가져다줄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 질서를 창조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따라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들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이 하나님이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주시는 구원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
로잔 언약은 그 긴장을 분명히 표현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자 심판자시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든 정의와 화해에 관심이 있으시고 사람을 모든 압박에서 해방시키는 데 관심이 있으신 하나님과 함께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인종. 종교, 피부색, 문화. 계급. 성.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타고난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때문에 존중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착취당하지 말아야 한다.…사람과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적 행동이 전도가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구원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가 둘 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인정한다. 둘 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교리와, 이웃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필수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온갖 소외와 압제와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불의가 있는 곳 어디에서든 서슴없이 그것들을 고발해야 한다“
구원과 개인의 자유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이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주시는 그 구원은, 가장 추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새로운 섬김의 삶으로 해방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주시는 그 구원은, 가장 추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새로운 섬김의 삶으로 해방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마이클 램지는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아는가?"라고 썼다.
그는 계속해서 그러한 자유는 예수님에게서만 완벽하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분은 누군가로부터 벗어나 누군가를 위해 자유로워지신다. 그분은 자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 자유로워지신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세 단계 혹은 세 시제로 (과거. 현재. 미래) 신약의 구원 교리를 검토할 것이다.
‘해방’은 구원을 나타내는 훌륭한 표현이다. 무엇보다 해방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심판에서 벗어나 아들 자격을 위해 얻는 자유
먼저 과거 시점에서 보면, ‘구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 시점에서 구원은 유죄 선고와 반대 개념인 칭의와 동등하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하나님이 사랑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셔서 죄에 대한 거룩한 진노를 가라앉히는 성경의 화목 제사가 남는다
그러나 사도들은 구원의 첫 단계를 펼쳐 보이면서, 하나님의 진노에대한 화목 제사‘ 이상으로 나아간다 심지어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것, 즉 그들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이들로 받아주시는 것 너머로 간다
바울은 우리가 진노에서 벗어나 아들이 되기 위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자아에서 벗어나 섬김을 위해 얻는 자유
나는 진실로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로 그분의 진노에서, 또 내 죄책과 유죄 선고에서 구원받았다. 그러나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죄가 여전히 내 안에 거하고 내 몸이 아직 구속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약에 자주 나오는 ‘지금’과 ‘아직 아니’ 사이의 긴장이다.
현재 시제가 나오는 또 다른 이유는 칭의와 영화사이 중간 기간에 성화라 불리는 과정, 즉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고후 3:18) 신자의 점진적인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온전히 이르기까지 말이다(롬 8:29: 비교. 요일 3-2)
더 나아가, 우리가 그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두 번째 사람’, ‘두 번째 아담’(롬 5장과 고전 15장), 새 인간성의 선구자이시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 새 인간성을 함께 지닌 이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에큐메니컬의 주장은 이렇게 전개되는 것 같다 즉 신약에 따르면, 구원이 사람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므로, 사람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구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추론은 신학에서 그렇듯 논리적으도 결함이 있다. 똑같이 이런 식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스피린이 통증을 덜어 준다. 그러므로 통증을 덜어 주는 것은 무엇이든 아스피린이다.”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쓰면서(빌 2:12-13),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이루고 계신 구원을 날마다 살아 내면서 실제로 드러내보이라고 요청한다. 반면 사도 베드로는 독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 것이 필요함을 강조한다(벧전 2: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고 할 때의 그 ‘구원’은 행동에서 그리스도를 닮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현재의 구원에서 우리는 또다시 적극적인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우리는 자기 중심성의 속박에서 구원을 받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 더 나쁜 노예 상태는 없다. 루터는 타락한 인간을 ‘자신을 향
해 구부러진 인간’이라 묘사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그분은 만약 우리가 이기심으로 우리 삶에 매달려 우리 자신을 ‘구원’하겠다고 고집한다면, 우리 자신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 반대로. 섬김으로 그분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자신을 잃을 준비가 된다면 우리는 진정 우리 자신을 찾게 될 것이다(막 8:35) 우리가 죽을 때에만 우리는 살
고, 우리가 섬길 때에만 우리는 자유롭다.
이 현재의 구원, 우리가 자기 중심성의 족쇄에서 해방되어 섬김의 자유를 얻게 된 이 구원은 보통 우리 생각보다 더 철저한 요구를 한다.
다
로잔 언약에서 인용해 본다 “전도의 결과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그분의 교회에 속하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의 책임 있는 섬김이 포함된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전통과 관습과 세상 문화의 속물적인 물질주의를 맹종하는 데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우리 제자도가 기득권층의태도를 비판하고 모든 형태의 압제에 분개할 만큼 급진적이지 못하다면.우리가 지금 자유롭게 사심 없이 그리스도와 교회와 사회에 헌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의 구원받았다고. 혹은 구원받는 과정 중에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동의어이며(비교. 막 10:23-27),그나라에서는 예수님의 권위가 절대적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실패에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신약에 묘사된 대로 이 구원의 현재 단계를 온전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값없이 받은 선물인 과거의 구원을 너무 기뻐하는 나머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는]" 부르심과 동료 신자들과 하나님과 인류를 섬기는데 전심으로 헌신하라는 부르심을 무시한다. 현재 ‘구원받고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숙고한다면, 우리는 교회 자체가 해방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게 된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향한 요구에 성실하지 못한 모습에서. 복음의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능력에 반하는 모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부패에서 벗어나 영광을 위해 얻는 자유
셋째, 미래의 측면으로 가 보자 선물이면서 계속되는 과정인 하나님의 구원은 또한 우리 소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구원받기를 소망하여 구원받았다. “구원의 소망’은은 그리스도인 군사들이 쓰는 투구다(살전5:8: 비교. 롬 8:24)
이 최종적인 구원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그것은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받는 것이다(롬 5:9: 살전 1:10: 5:91 그뿐 아니라. “우리 몸의 속량'도 포함할 것이다. 우리 몸도 창조 세계처럼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몸과(육체적 약함, 타락한 본성, 죽을 운명에서 해방될). 새로운 우주(압제가 없고 오직 공의만 있을)를 갈망한다.
나는 성경이, 개인의 구원의 각 단계에서 우리를 구해 내는 것(진노에 서, 자아에서, 부패와 죽음에서)보다는 이러한 구해 냄이 가져올 자유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변화된 삶과 생활 방식으로 구원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원 메시지는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는 그 누구보다 복음 전도자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존 풀턴은 이렇게 쓴다.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자신이 말하는 바를 구현해 내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이 곧 그들의 메시지다.그리스도인들은…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처럼 보여야 한다. 사람은 말이나 사상으로 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진정성이 사람들 마음 깊숙한 곳에 전달된다.…지금 소통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격적 진정성이다”
구원에 관한 고찰(크리스토퍼 라이트)
존 스토트는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라 말하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보다, 성경 계시에서 자주 그리고 포괄적으로 하나님을 정의하는 다른 말은 없다.구속 받은 인류의 찬양대는 “구원하심이…우리 하나님…에게 있도다"라고 찬양한다(계7:10).다른 누구에게도 있지 않다고 말이다
구원은 성경의 하나님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명확히 해 줄 뿐 아니라,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정체성 자체를 명확히 해 준다.
히브리어 어근 ‘야샤’ ‘구원하다’)는 시편에 136회 나온다(이는 구약 전체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경우의 총 40퍼센트에 달한다).
신약으로 가 보면,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의 아들을 여호수아(요수아. 예수아. 즉 헬라어 형태로 예수)라고 부르라고 지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다(마 1:211 예수라는 이름이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는 그분의 유일하심을 드러내는 독특한 표지이자, 그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표지다
구원의 범위—구원에 무엇이 포함되는가?
명료함을 열정적으로 중시하는 스토트는 예리하게 정의 내리고 예리하게 구분한다. 스토트는 기독교의 구원을 병 고침으로, 혹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에큐메니컬 운동의 해방신학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더 광범위하게) 경제적 정치적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급진적으로 재구성하여 표현하는 데 반발하여, 성경적 구원은 이 둘 다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육체적인 병 고침과 압제받는 이들을 위한 정의 둘 다 그 자체로 선한 일임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성경이 말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둘을 “하나님이 행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 성령이 나타내시고. 복음이 제공하는”(그의 고전적인 어법을 인용한다면) 그 구원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주시는 그 구원’ 그럼에도 스토트는 오해에 빠지지 않도록, 두 가지 다른 요지를 주장하고, 셋째 요지를 인정한다. 그러나 내게는 이렇게 균형을 잡으려는 요지들이 그의 전체 논지에 약간의 어려움과 갈등을 가져오는 것 같다.
우선, 그는 기독교 선교의 총체성에 관해 1장에서 주장한 내용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자들과 압제 받는 자들을 위해 치유 사역과 사회 정치적 활동에 관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그두 영역에서 일한다. 즉 육체적 건강을 증진시키고(치료와 예방 수단으로),또 사람들에게 자유와 존엄과 의와 평화를 가져다줄 근본적으로 다른사회 질서를 창조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스토트의 마음에서는(적어도 그가 이 장에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그러한 사역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부이거나 그 구원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내게는 이것이, 우리의 선교 신학과 구원 신학 사이에 이상한 괴리감을 낳는 둣 보인다
성경은 그 둘을 아주 단단히 결합시키는것 같은데 말이다.우리의 선교의 한 부분(사회적 측면. 스토트는 성경이 이를 분명하게 명하고 있다고 믿었다)을,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우리의 선교의 한 부분(사회적 측면. 스토트는 성경이 이를 분명하게 명하고 있다고 믿었다)을,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내용에서 분리하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내용에서 분리하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둘째로. 스토트는 물론 궁극적으로(종말론적으로)하나님의 구원하시고 구속하시는 사역은 몸의 온전한 치유(모든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끝나는 것과 함께)를 포함할 것이고, 새 창조에서의 정의와 평화의 온전한 확립(모든 압제와 폭력이 끝나는 것과 함께)을 포함할 것임을 잘 알았고, 그것을 여러 번 언급한다.그는 “질병과 아픔과 죽음은 하나님이 언젠가 창조하실 새로운 육체와 새로운 세계에는 없으리라는 사실’을 전혀 부인하지 않는다.반대로 그는 세 가지 적극적인 측면을 단언한다.첫째로, 하나님은 이 영역들, 즉 우리 몸과 사회에 관심이 아주 많으시다. 둘째 언젠가는 몸과 사회 둘 다 구속 받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몸을 부여받고 새로운 사회에서 살 것이다. 셋째,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사랑 때문에 그 두 영역에서 일한다. 즉 육체적 건강을 증진시키고(치료와 예방 수단으로). 또 사람들에게 자유와 존엄과 의와 평화를 가져다줄 근본적으로 다른사회 질서를 창조하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다시 조금 이상하게도. 성경적으로 말해서 구원이 이러한 놀라운 종말론적 복을 포함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지금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그 구원”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러한 괴리(구원을 제시하는 전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지만 구원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 사회 참여 사이의 괴리)가 바로, 로잔 언약에서 관련 조항의 구조를 결정했다.
사람과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적 행동이 전도가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구원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가 둘 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인정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이 있기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교리에 근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셋째로, 존 스토트가 양보한 내용은 성경이 실제로 ‘구원하다’와 ‘구원’이라는 단어를. 치유와 정치적 해방을 포함하여 아주 폭넓고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성경의 구원 교리’는“질병. 익사, 심지어 죽음까지 포함해서 각종 육체적인 아픔에 대해 일종의 종합 보험 같은 것"과 동일시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범위를 축소한다.
그러한 기적은 구원 자체가 아니라 “구원의 표징”이었다
그는 죄와 악과 그 궁극적이고 영원한 결과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전도와 그리스도를 통한 개인적인 거듭남의 필요를 위한 여지는 없는, 구원이 오로지 물질적 .육체적 사회적,정치적 ‘해방’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란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성경이 새창조 세계에 있으리라 말하는 구원의 궁극적인 모든 복을 현재 이 세상의 삶에 약속된 것으로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나친 현재적 종말론에 저항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동일한 목표, 즉 성경적 구원 개념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육체적 정치적 해석을 피하는 더 좋은 방법은, 구원을 그 ‘내용’의 측면에서 ‘나누고’(신구약 아주 많은 부분에서 그 단어는 매우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모두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런 다음 어떤 부분들에 괄호를 치고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베푸시는 그 구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스토트 자신의 이차적인 본능을 따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즉 구원의 내용보다는 우리가 구원의 전체 내용을 경험하는 시기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전한 성경적 구원(하나님의 사역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동해 성취되는 모든 것) 안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서 보장 받을 수 있는 것과, 지금 여기에서 반드시 경험하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새로운 창조 세계의 실재로 멋지게 축하할 것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구원의 현재적 영역과 종말론적 영역을 구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고 복음이 제공하는 전체 ‘꾸러미’ 속에서 둘다 확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이들에게 정확히 무엇을 약속할 수 있을까?
성경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믿으면 죄가 용서받았음을 알 수 있고, 마지막 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을 보장받을 수 있고, 영생의 선물을 받음을 확신할 수 있다 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죄와 그 영원한 결과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여, 구원받았고, 구원받고 있으며. 구원받을 것이라고 보장하신다.우리는 이를 자신 있게 신뢰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약속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에 근거하여 말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구원이라는 표현으로 말하는 다른 많은 것들, 육체적 병 고침, 해방, 위험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조 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이생에서 일어날 수 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고, 특별한 때와 장소에서 몇몇 사람에게 이런 일을 하심을 종종 보여 준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구하거나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항상 그렇게 하시리라고 보장할 수 있는가?
어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예를 들어, 당신을 지금 여기의 가난에서 구하셔서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고, 당신을 지금 여기의 질병에서 구해 내어 건강하게 해 주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믿음을 가지라. 충분한 믿음, 올바른 믿음을 가지라,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의 모든 혜택이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스토트는 이 장에서 번영 복음의 가르침을 언급을 하지는 않지만, 그가 그것을 왜곡된 신앙으로 보고 비난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믿음은 성경이 구원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모든 구원을 보장하는가?
히브리서 11장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이 장에는 수많은 구약의 인물들이 믿음을 보임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신 일들의 목록이 있다. 그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 믿음이었다. 히브리서 1132-35에 따르면,그들 숭 다수가 물질적, 육체적, 군사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선지자들이 그 실례로 제시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즉각적인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다 오히려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
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다(히 11:35-38),그렇다면 저자는 많은 의미에서의 구원이 그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전혀 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받았다.이 구절은 믿음의 필연적인 산물로 즉각적인 건강과 부가 온다는 거짓되고 과장된 모든 주장을 밀어낸다.
우리는 하나님이 확실하게 약속하시는 것을 약속할 수 있다(회개하고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구원과. 새로운 창조 세계에서 모든 질병과 죽음과 압제로부터 구원받는 것)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시지 않는 것(이생에서 모든 문제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이생에 서 우리가 사랑의 수고, 긍휼, 중재, 정의 추구로써(부분적이고 임시적인 노력이더라도) 선교적 참여를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치유와 정의를 가져다주시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새로운 창조 세계에서 구속하신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신 궁극적인 구원을 기대하게 하는 첫 열매들이다.
스토트는 성경에 근거하여 구원을 이해할 때 시간에 따른 차이를 잘 인식하고 있다.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 시제에 관해서다. 그는 이 장의 주요한 부분인 “구원과 개인의 자유’”에서 이를 아주 효과적으로 적용한다.
주요한 부분인 “구원과 개인의 자유’”에서 이를 아주 효과적으로 적용한다. 소제목이 보여 주듯, 그의 강조점은 개별 신자가 누리는 구원의 복과 혜택에 있다. 그러나 이 장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구원의 다른 영역이 있다. 곧 구원의 집합적이고 우주적(혹은 창조적) 영역이다.
더 최근의 복음주의적 사고와 글들은, 구원의 모든 시제(과거. 현재. 미래)와 모든 영역에서(개인, 사회, 창조 세계), 이러한 성경적 구원의 온전한 개념을 충분하게 다시 담아냈다.
그들도 존 스토트가 그랬듯,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이루신 것으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과(이스라엘의 유일하신 분 야웨가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 메시아 안에서 구현하신), 하나님은 그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셨다는 사실을 헌신적으로 주장한다는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이 바로, 창조 세계에서 새로운 창조 세계로 확장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다루는 위대한 성경 내러티브의 중심이 된다.
구원의 해석학—우리는 구약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1975년에 이 책을 쓸 때 존 스토트는, 남미의 해방신학에 대응한 가장 초기의 영국 복음주의자 가운데 하나였다.당시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영향력 있는 책『해방신학』의 번역으로, 영어권에서 해방신학이 갑자 기 부상한 때였다.
스토트의 반응은 독특하다 먼저. 그는 아주 세심하고 철저하게 그 책을 확실히 연구했다
둘째, 긍정적이라 할 수 있는 점과, 복음주의자들이 지지하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려 한다.
그런 다음 셋째로. 구티에레스가 성경적으로 타당한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고 여겨지는 부분들, 혹은 구별해야 하는 범주들을 혼란스럽게 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예리한 성경적 비평을 한다.스토트는 이 장에서, 구티에레스 등이 주창한 것과 같은 해방신학과 의 논쟁에서 그의 주안점은 해석학, 즉 그들이 성경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고 주장한다.
해방신학의 출애굽 사용에 대해서는 양 전선에서 반대한다. 먼저 소극적으로는 “이러한 성경의 내러티브를 압제 받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 또 그것을 하나님이 모든 압제 받는 자들을 향해 뜻하시거나 약속하신 해방으로 여길 수 있는지" 질문하고, “분명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신약은 출애굽을 “정치적으로 압제 받는 소수들에 대한 해방의 약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죄에서 구속 받는 것에 대한 이미지”로 변화시킨다 고주장한다.
나는 이 두 논지에 한편으로는 동의하고 또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논지에 대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 역사에서 압제 받는 모든 집단에게 똑같이 하시리라는 기대나 약속으로 바꿀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이는 육체적 치유와 물질적 번영이 지금 여기에서 보장된다고 약속하는 번영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개념들을 통해 이런 생각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먼저,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하나님이 ‘그 일을 다시 행하실’ 수 있고 행하실 것이라는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개인적인 차원(시편은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자주 호소하고 있으므로)뿐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예언서들에서 강력한 ‘새 출애굽’이라는 주제를 볼 수 있다)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이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고 언약 관계를 확장하시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은 현재에 보장된 것이나 당면한 지정학적 의제가 아니라 종말론적 소망이다.
그럼에도 이는 출애굽 내러티브가‘ 단순히 혹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한’(분명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의 한 영역임에도) 기능만 있는 것이아니라 예중의 목적도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을 위해 이를 행하신 하나님은 사실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방인과 압제 받는 이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그 특징인 분이다(신 10:17-19)
출애굽의 목적은 단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오로지 지리적 . 정치적 의미에서의 ‘자유)만이 아니라, 그들을 시내 산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땅에서 구속 받은 자로서 언약에 순종하며 살아 내
게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단지 출애굽을 사회 정치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은, 비록 그 이야기의 한 요소 때문이지만, 성경의 용례에서도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다.
둘째 논지에 대해서 보자면, 신약이 출애굽 내러티브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일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출애굽은 단지 미래에 일어날 영적 구속의 ‘이미지’인 것만은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 하나님이 실제로 사람들을 영적인 압제뿐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압제, 진짜 압제에서 구해 내신 일이다. 그리고 구약은 계속해서 출애굽 전체를 구속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는, 그 온전한 성경적 의미를. 죄에서의 구속이라는 영적인 이해로 축소하고 예증적 힘이 있는 다른 영역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물론 그것을 그저 사회 정치적 영역으로 축소시키고 고유한 영적 의미를 간과해서도 안 된다. 둘 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결국 구원(과 선교)을 성경적으로 온전히 이해하려 할 때 출애굽 내러티브의 역할을 왜곡하게 된다.
이에 대해 내 책『하나님의 선교』에서 한장 전체를 할애하여 훨씬 자세히 이야기하고, 그 모든 영역에 충분한 가치를 부여하는 출애굽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호소하며 마무리 지었다.
구원 이야기-다른 이야기들이 그 길을 준비할수 있는가?
구원은 항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절정인 일련의 약속과 사건들을 통해 역사 속에서 이루신 일로 묘사된다.
성경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꺼내면, 한 이야기, 다른 어떤 이야기도 아닌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하나님이 행하신다 하나님이 이루신다 하나님이 적극적인 주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도록 설득하거나 조종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또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내러티브역사에 기록된 사건들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신다.성경에서 구원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것’에 근거를 둔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과 창조 세계를 구원하시려고 행하신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이미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그 결과 미래에 어떤 결과들이 보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는 현재 변화된 삶을 산다. 다른 종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없다. 그들은 좋은 소식의 유일한 구성 요소인 그 이야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범위—누가포함될까?
하나님이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주시는 구원에 관해 많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다시 말해 전도를 받지 못한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스토트의「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라는 제목의 장이 있다 여기서 그는 예수만이 주님이요 구세주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여전히 명확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끝 부분에서 그는 독자들이 바로 앞과 같은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한다. 그는 그에 대한 답을 시도하면서. “우리는 확신과 불가지론을 겸비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가 아는 것(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이 있고 모르는 것(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거나 심지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아는 것"을 말한다. 곧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근거에서만,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비를 부르짖고 구원을 받기 위해 정확히 얼마만큼 복음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구약의 사람들은 비록 그리스도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분명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아마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악한 죄인이라는 것과. 그분의 은종을 입기 위해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에 빠져,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희미하게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을 부른다. 만일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머못거리며 믿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신다면, 그들의 구원은 여전히 은혜에 의해, 오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직 믿음에 의해서 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스토트는 ‘비제한주의적 배타주의자’(이것이 그리 끔찍한 단어 조합이 아니라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다시 말해, 그는 구원이 다른 어디에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있다는 것과, 구원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만 받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구원이, 궁극적으로 땅에서 사는 동안 복음에 대한 이해할 만한 설명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에게만 제한되느냐에 대해 교조적이 되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전도를 받았든 아니든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겸손하게 가장 정의롭고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이들과 손을 잡았다. 스토트가 이러한 가능성을 표현하는 데 얼마나 신중했스토트가 이러한 가능성을 표현하는 데 얼마나 신중했는지는 “아마’…만일…머뭇거리며"라는 단어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는지는 “아마’…만일…머뭇거리며"라는 단어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구원의 범위와 전도를 받지 못한 이들의 운명에 관한 이러한 논쟁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과 선교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나 둘 다 이러한 입장을 지나치게 교조적이지 않게 표현하고 싶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에 대해 듣지 못했다 해도 어떤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을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리라는 견해를 지지하며, 몇 가지 주장이 제시된다.
하나는 구약의 신자들과 연관짓는 주장이다. 구약에는 우리가 분명 ‘구원받았다’고 여길 신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 아직 역사적인 나사렛 예수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에 의해(그 죽음이 모든 인간 역사에 효력이 있다) 구원받았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서(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이야기. 즉 신약의 복음을 안다는 의미에서)는 아니다.
에녹과 유사한, 즉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고 진지하게 그분을 찾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고 또 있는가?
성경이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도—역사적으로 그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한다면, 오늘날 지리적인 문제나 다른 장애물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 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마
찬가지로 가능하지 않을까?
요한계시록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구원의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말한다(계 7:9,)
요한계시록 7:9이 말하려는 바라면, 구속 받은 이들의 최종 숫자에는 오순절 이후 수세기 동안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명백하게 복음을 들은 이들보다 분명 훨씬 많은 이들이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아주 조심해야 한다 우선, 이는 믿든 말든 어떻게 살든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리라는 보편구원론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성경과 모순된다. 오히려 이 견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으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믿음으로써만 받아들여진다고 말한다.
둘째, 이 견해는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그들의 선함과 진실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확히 그 반대다. 결국 구원받는 모든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복음의 핵심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죄와 자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죄인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셋째. 이 견해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 체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거나, 다른 종교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잠정적인 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교회가 복음을 들고 다가가지 못한 이들(혹은 교회가 그들에게 이르기전에 죽은 이들)을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하실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교회의 선교와 전도의 의무가 덜어지지는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은혜의 주권 안에서 그러나 인간의 전도 활동과는 별개로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서 회개와 믿음의 반응을 일으키셔서 그들로 그리스도를 통한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면, 이는 우리가 지금 혹은 새 창조 세계에서 그들을 만날 때 기뻐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선택 교리가 그렇듯, 이것도 대위임령에 불순종할 타당한 이유를 주지는 못한다. 이미 그것이 복음 전도 의욕을 꺾는다는 비난을 받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의 지평에서,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증언에 충실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회심(존스토트)
선교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세상에 보내시며 하라고 하시는 사랑의 섬김이다. 선교에는 전도는 물론 사회 참여도 포함된다. 둘 다 각각 그자체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며, 하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하나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끔찍한 인간성의 상실로 인해, 전도는 지속적인 긴급성을 지닌다. 전도의 본질은,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듣기가 선포에 선행해야 하듯이, 대화는 전도에 꼭 필요한 예비 단계이며 전도의 목표인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개인이 자유를 얻는 것이다. 물론 구원에는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실 종말론적 ‘영광의 자유’를 기대하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적 함의가 있다.
이제 다섯째로 볼 단어는 회심이다. 이는 복음이 요구하는 응답 그것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응답을 뜻한다.
‘회심’에 대한 오늘날의 혐오감
강압과 부적절한 승리주의 정신에 대항하여, 후켄데이크가 주장하는 정반대의 자질을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전도란 공손한 겸손과 기대하는 소망으로 씨를 뿌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겸손으로 기다리는 까닭은 우리가 뿌리는 씨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고, 소망으로 기다리는 까닭은 하나님이 씨를 활성화 시키셔서 적절한 줄기를 주시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형태의 전도도 회심에 불리한 혐오를 일으키지만 또 다른 이유는 종교적 상대주의와 보편구원론의 인기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객관적이고 결정적인 무언가를 하셨다고 설명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하나님]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18-19) 그러나 이는 모든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사역과 메시지를 맡기신다.그리고 이 사역과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미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다고 간청하는 것이다.참으로 성경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두 진리를 함께 취해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 화목하게 하심을 받아들이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고후 5:18-21; 비교.고후 5:17: 롬 5:11)
더 나아가 우리의 엄중한 임무는, 복음 선포와 호소를 듣는 이들에게 그들이 ‘멸망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는 까닭은, 그들이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다.여전히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이들에게 듣기좋은 말을 하듯 평화를 전하는 것, “평화가 없는데 평화, 평화"라고 말하듯이 평화를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전도자가 아닌 거짓예언자의 말이다.
멸망은 끔찍한 단어다. 지옥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 그리하듯, 지옥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도 어떤 겸허하고 겸손한 불가지론을 유지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지옥이 끔찍하고 영원한 실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하고 확고해야 한다 지옥의
실상을 말할 때 적합하지 않은 태도는 독단이 아니다. 오히려 경박하고 경솔한 태도다. 어찌 눈물 없이 지옥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까?
회심과 거듭남
또 복음에 대한 어떤 응답이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회심이다. 한 방향에서 다른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우상과 죄에서 돌아서는 것을 일반적으로 ‘회개’라 부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것을 ‘믿음’이라 부르므로, 우리는 회개+ 믿음=회심’이라는 흥미로운 성경적 등식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회심과 거듭남은 어떤 관계인가?
분명 둘 다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하나에 속해 있다. 우리는 회심한 이들은 모두 거듭나며 거듭난 이들은 모두 회심한 것이라고, 어떤 모순의 여지없이 주장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둘은 신학적으로 구분해야 한다. 세 가지 다른 점을 언급할 수있다.
첫째. 거듭남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반면 회심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새로운 탄생, 즉 ‘위로부터’나는 것,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이는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성령의 독특한 사역이다. 반면 회심은 우리가 회개하고 믿을 때 하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둘 다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는 그분의 은혜 없이 회개하거나 믿을 수 없다(예를 들어, 행 18:27),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하시는 일은, 우리를 어둠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것이며 그로인해 우리로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에 대한 질문은 크게 고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성경은 거듭남에도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 같고 회심에도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 같다. 실제로 중요한 진리는 둘은 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거듭남은 무의식적인 반면, 회심은 보통 의식적이다. 물론 회심이 항상 기억할 수 있는 의식적인 행위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많은 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그들이 믿지 않은 기간이나 처음 믿었던 순간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회심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기억되는 회심의 순간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그러나 성인들의 경우,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과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로 가는 일은, 회개하고 믿은 의식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거듭남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물론 우리는 그 결과를, 확신, 해방, 하나님과의 사귐, 사랑, 기쁨, 평화의 형태로 의식적으로 누릴 것이다.“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거듭나는 것 자체는 신비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명백하다.
거듭남과 회심의 셋째 차이는, 거듭남은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완성된 사역인 반면, 우리가 ‘회심’이라 부르는, 회개와 믿음으로 돌아오는 일은 사건이라기보다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거듭남은 마치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거듭날 수 있다는 듯이, 단계로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어느
정도 거룩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순종적일 수 있고, 어느 정도 그리스도와 우리 하늘 아버지를 닮을 수 있다. 이를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도 있고, 제자도의 변화하는 여정과도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거듭나거나 덜 거듭나거나 할 수는 없다. 더 태어나거나 덜 태어나거나 할 수 없듯이 그러나 수많은 회심에는 명백한 점진성이 있다. 분명 많은 이들의 경험에서, 회심이라는 돌이킴이 완료되는 때, 희미한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이 되는 때가 있다. 더욱이 이 순간을 자각하는 이들도 때때로 있다. 그러나 성령은 온화한 영이시다. 많은 경우 그분은 사람들을 자기 중심성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일을 천천히 하신다.
우리가 마땅히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어질 수 있는 때가 지나도, 그분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거듭남은 자라날 수 없어도. 회심의 구성 요소인 회개와 믿음은 자랄 수 있고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깊은 회개와 더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 회심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 앞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해 가는 평생의 삶이 있다.
회심과 회개
우리 주님(예를 들어, 막 1:15; 눅 13:3, 5)과 사도들(예를 들어. 행 2:38; 3:19; 1730)의 메시지에서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음에도,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많은 전도 설교에서 빠뜨리는 요소가 바로 회개다.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먼저 앉아 비용을 계산해 보라"고 요청하셨다.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분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으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은, 새로운 태도, 새로운 야망 새로운 기준이 반드시 따를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기독교의 회심은 옛것을 버리고 그 자
리에 새것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5:17)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을 때, 그는 사람들의 반응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구체적인 문제들로 나아갔다. 부자는 잉여 재산을 궁핍한 이들과 나누어야 했다. 세리들은 갈취하는 대신 정직해야 했다. 군인들은 권력으로 사람들을 강탈하지 말고 급료에 만족해야 했다(눅 3:8, 10-14),예수님도 분명 똑같이 하셨다. 삭개오에게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부당 이득을 반환하는 것을 포함하는 일임을 아주 분명히 하셨던 것이다.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준다 아마도 누구에게서 강탈했는지 대부분은 추적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역시 회개와 회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용어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회심과 교회
둘째로 회심에 함의된 바는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그런데 몇몇 영향력있는 이들이, 회심자들이 반드시 교회에 소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목소리를 드높였다.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단체”라 부른 공동체와, 인도의 상황에서 “힌두교의 종교 공동체 내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믿음과 윤리 단체’'를 지지했다
그는 ‘그리스도께로의 회심”이 반드시 “기독교 공동체로의 회심"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했다 대신 회심자들은 “그들이 사는 사회, 문화, 종교 안에서, 그 안에서부터 구조와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믿음의 단체를’ 구축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이는 심지어 세례를 거부하는 것을포함할 수도 있었다. 토머스 박사의 제안이 아무리 혁명적으로 들려도, 내가 보기에 우리
는 그 말에 공감하며 응답해야 할 것 같다. 그 주장의 배경에는, 절망적이게도 인도 등지에서 소위 ‘공동체주의’가 발달한 상황이 있다. 기독교공동체가, 비기독교 사회 전체로 소금과 빛으로 흘어지는 대신, 그 사회와 고립되어 독특한 문화적 독립체로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할 것이다
토머스 박사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둘째 이유는, 회심자들이 속하리라 기대되는 교회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인도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지역의 교회들에 좋지 못한 모습들이 아주 많다. 분열이 있고, 진실성이 없고, 권력을 추구하고, 심지어 타락과 부도덕이 있디-. 교회에 깊이 환멸을느끼고 왜 ‘밖에’ 있는 사람을 그 안으로 데려가려 해야 하는지 의아할 정도다.
그러나 이로 보아 확실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교회를 피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닌 교회의 갱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파벌, 부도덕의 용인, 무질서한 공예배, 불확실한 교리가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 대해. 바울은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불렀다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백성과의 사귐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을 포함하므로,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인 특성을 지닌다. 사람들에게 회심한 다음 교회에 속하라고 요구하는 기독교 회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셋째, 우리는 회심과 사회적 책임의 관계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개인의 회심은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아니 이어져야 한다. 교회들이 그 구성원을 ‘교회 중심’으로 만들려 하는 경향으로 인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회심하고 교회에 속하기를 경계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회심은 회심자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대신 세상 속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예수님의 첫 명령이 ‘오라’였다면, 두 번째 명령은 ‘가라!’였다.즉 우리는 우리가 나온 세상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로 돌아가야 한다.역설적이게도 회심에는. 세상(죄를 짓고 하나님께 반역한 세상)에서 돌아서는 것과, 세상 속으로 향해 돌아서는 것이 함께 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해 소망하고 알기 때문이다
회심과 문화
넷째로, 회심과 인간 문화에 관한 질문으로 가 보자.
회심은 우리가 물려
받은 모든 문화를 자동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회심은 회개를 포함하고 회개는 이전 것을 거부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회심이 회심자에게, 이전 문화에서 바로 빠져나와 완전히 구별된 기독교 하위문화로 들어가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간혹 우리는 그들이 진짜 세계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서양에서든 동양에서든 꼭 필요한 것이, 성경과 문화를 구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문화에서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거부해야만 하는 것과, 선한 것 혹은 선악과 상관없는 것이므로 유지해도 되는 것, 변화시키고 풍성하게 만들어야 할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서양에서 회심은 때로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수 세계에서도, 또 비기독교 종교가 문화를 지배하는 국가 어디에서든, 그리스도인들은 유지할 것과 거부할 것을 분별하는 깊은 지혜가 필요하다.
수많은 경우 새로운 회심자들은 그들의 이전 문화에 대한 아주부정적인 태도를 수용한다. 이는 몇 가지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자신이 양육 받은 사회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그리스도인은 뿌리를 잃고 불안해 할 수 있고, 심지어 관습적인 규제가 없어지면서 도덕적 방종에 빠질 수도 있다 급기야 기독교 ‘공동체주의’를 발전시키기도 한다.이는 삶을 살아가는 데 새로운 안정감을 주지만 이전의 친구와 친척들을 그들과 단절시킨다.또 그들의 반대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문화는 관습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들은 자신의 관습이 도전받으면 위협을 느낀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평화를 교란시키는 분이었다. 그분은 물려받은 모든 관습, 관례, 전통에 도전하시고. 삶 전체가 그분의 감독과 판단 아래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시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이유 없이 그 문화를 무너뜨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충성하는 데 필수 요소는 아니다.
문화는 항상 성경을 기준으로 검토하고 판단해야 하고 우리에게는 문화를 평가할 분별력이 필요하다.
회심은 ‘이민’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의 인종과 언어와 전통의 틀 안에서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의미를 개인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회심과 성령
다섯째로 살펴보아야 할 회심의 마지막 측면은, 회심과 성령의 역사의 관계다.
내 생각에 이는 결론으로 알맞은 항목인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쓴 대부분은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고 인간적 확신인 듯하다. 나는 선교란 우리가 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보냄 받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원은 우리 친구들이 받기를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에 대한 이 모든 표현은, 결국 선교가 인간의 일이며 회심이 인간의 업적이라는 뜻으로 쓰이면, 심각주게 호도하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런 인상을 줄 때가 많다.
이러한 실용적인 시대에 교회는 쉽게 세상의 세계관에 빠져, 전도에 성공하는 열쇠는 업무 능
률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전도 지침서를 발간하고, 교회의 방법론을 만든다 그렇다 나 자신도 효율성을 믿고, 그리스도인들이 왜 비능률을 과시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절대로 전도를, 그저 혹은 심지어 주로 배워야 할 기술이나 암기해야 할 공식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현대의 위풍당당하고 자신감에 찬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에 겸손히 의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두드러져 보인다. 그들은 사람들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며,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하고, 죄와사탄의 종이라고 믿었다(우리도 그들처럼 믿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돌아설’ 수 없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성령만이 그들의 눈을 여시고, 그들의 어둠을 밝히시고, 그들을 속박에서 해방시키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 신약은 분명 회개와 믿음을 인간의 의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행 2:38; 16:31; 17:30),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들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다(예를 들어. 행11:18; 엡 2:8; 빌 1:29),또 이러한 모순이 아무리 당황스럽다 해도, 우리의 인간 중심적 세계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꼭 필요하며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출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강요하려는 노력을 거부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시도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며. 성령의 특권을 강탈하는 죄다.
성령을 신뢰하는 것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네 가지 결론을 간단하게 이야기해 보겠다.
첫째로, 성령을 신뢰하는 일이 조잡한 준비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성령을 신뢰하라는 것은 우리를 성가신 준비에서 해방시켜 주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연구할 때에도 우리의 생각을 명료하게 해 주시고 지도하신다. 실제로 경험에 따르면 그분은 강단보다는 그런 자리에서 일을 더 잘하신다.
둘째로, 성령을 신뢰한다고 해서 일반적인 반지성주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와 그의 동료 사도들은 그저 복음을 주는 전령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건을 변호하는 변호사였다.
논증과 성령의 역시는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바울은 성령을 의지하면서도 전혀생각하거나 논증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셋째로, 성령을 신뢰한다고 해서 부적절성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성령을 신뢰하는 일이 성경을 연구하고 동시대를 연구하는 짐을 덜어 주는 핑계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넷째로, 성령을 신뢰한다고 해서 우리 개성을 억제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어떤 사람들은 만약 성령이 모든 것을 장악하신다면, 자신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고, 자연스러워야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개발하고 발휘해야 하며, 그와동시에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일하러 오신 성령을 신뢰해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겸손과 인간성을 적절하게 조합하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현대의 기독교 선교에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는 가운데 겸손과 인간성을 이렇게 건강하게 융합하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을 것 같다.
회심에 관한 고찰(크리스토퍼라이트)
“그가 죽었으나…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유명한 기독교 설교자나 저술가의 묘비에서 볼 수 있는 이 말은, 존 스토트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이 작은 책의 여러 장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가 짧은 단락에 혹은 심지어 지나가는 말로 예측했던 여러 이슈들이, 이후 수십 년동안 기독교 신학자들, 특히 선교학자들이 벌인 토론에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슈였다는 사실에 거듭 놀랐다 이 장에서는 그중 세 가
지가 두드러진다.
회심과‘내부자 운동
스토트는 “회심과 교회"라는 단락에서 자신보다 몇 살 위인 유명한 인도학자 토머스의 말을 인용한다.예를 들어. 토머스박사는 그가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단체’라 부르는 공동체와, 인도의 상황에서 “힌두교의 종교 공동체 내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믿음과 윤리 단체"를 지지했다.
그는 그리스도께로의 회심이 반드시 기독교 공동체로의 회심을 의미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했다.
대신 회심자들은 “그들이 사는 사회. 문화. 종교 안에서. 그 안에서부터 그 구조와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믿음의 단체를" 구축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힌두교에서 회심한 사람을 강제로 ‘‘사회적 법적 . 종교적 의미에 서의 힌두 공동체에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사실 토머스가 ‘지지한’ 일은 최근 몇 십 년 동안 힌두 문화권의 인도뿐 아니라 이슬람 국가 대부분에서도 엄청난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 그현상은 ‘내부자 운동’이라 지칭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로 믿지만 그들의 이전 신앙 공동체와 주변 신앙 공동체 ‘내부에’ 계속 남아 있거나. 어떻게든 가시적으로는 공식적인 기독교 교회에 합류하는 식으로(혹은 전통적인 이미지로 교회를 세우거나) 공동체를 떠나지는 않는 사람들의 운동이다. 당연히 이는 기독교 선교 신학자들과 선교사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태다.
그는 “토머스 박사의 제안이 아무리 혁명적으로 들려도, 내가 보기에 우리는 그 말에 공감하며 반응해야 할 것같다"고 쓴다.
그는 그의 ‘공감’의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로, 회심자들을 그들의 문화적 환경에서 빼내어 기독교 교회와 공동체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실제로 더 넒은 사회에서 고립되고 소금과 빛으로서의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게 된 ‘절망적인’ 결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회심자들이 합류하게 되는 교회의 ‘매력적이지 못한’ 특성 때문이다.
몇몇 나라들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십자군과 식민주의, 그리고 기독교가 선교사들과 제국주의자들이 강요한 낯선 ‘서양 종교’라는 느낌을 포함한 각종 역사적 앙금과 관련이 있다.우리는 진짜 ‘십자가에 대한 불쾌감’—제자도의 대가 자체—과,종교적 . 문화적 제도적 현상으로서 역사적으로 모욕적으로 기독교에 첨가된 것들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부자 운동’에 대한 논란은 몇 가지 핵심 질문을 구체화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들을 둘러싼 문화의 종교와 관계를 계속유지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일종의 혼합주의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만약 다른 대안(그리스도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가족과 공동체의 종교 관행을 완벽하게 버리는)이 결국 거절과 추방 심지어 죽음(가끔 그런 것처럼)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이 더 나쁜 결과가 아닌가?
혹은 그 반대로, 신약에 따르면 순교를 포함하여 그러한 일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 예상되는 대가가 아닌가?
선교학계에서는, 내부자 운동을 단순히 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방
식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주권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으로 인식해
야 하느냐(심지어 ‘외부자들’이 보는 데서), 혹은 그러한 내부자 운동을 실제
로 선교 전략으로 육성하고 격려해야 하느냐 아니면 복음에 대한 배신이자 사람들의 진정한 구원에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 적극적으로 말려야하느냐를 놓고, 논란이 아주 격렬했다.
나는 스토트가, 더 참되게 토착적인 인도의 신앙 표현을 향한 토머스의 요청에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혼합주의의 위험을 엄히 경계했고, 그리스도께 새로이 회심한 이들이 ‘내부에’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야 하고, 성경 전체의 독특한 진리와 유일한 구속이야기를 배워야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확신해야 한다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고 확신한다.
나는 그가 케이프타운 서약 전문을 읽어 달라고 하면서 그 내용에 기꺼이 동의했음을 알고 있으므로, 그가 그 문제에 관한 조항에 동의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 내용은 IIC항 “타종교인들 가운데 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기’에 들어 있으며 아래와 같다.
사랑은 제자도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소위 ‘내부자 운동’이 여러 종교들 내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하나님이자 구세주로 따르는 그룹이다. 이들은 예수님과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제, 가르침, 예배, 기도를 위해 소그룹으로 함께 모이지만. 사회적 문화적으로 계속해서 그들이 태어난 사회 안에서 살아가며 그들의 종교적 의무를 준수하기도 한다. 이는 복잡한 현상이며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수많은 의견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운동을 추천한다. 반면 혼합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혼합주의는 우리가 우리문화 안에서 신앙을 표현할 때 어디에서든 나타나는 위험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법이나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을 볼 때 상황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지 않고 성급하게 비난하는 경향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안디옥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한[행 11:20-24】 바나바의 심정으로 이 이슈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호소한다.
1,사도의 결정과 실천을 주요 지침으로 삼는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행 15:19]
11. 다양한 시각을 인정하며 겸손과 인내와 친절을 보이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상호 비난 없이 대화를 나눈다[롬 14:1-31]
회심, 교회, 복음
스토트는 여전히 ‘회심과 교회’ 단락에서, 교회로 방향을 돌려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한 백성, 실제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부르셨으며 여전히 부르시고 창조하시는 그 백성임을 상기시킨다.
스토트는 구약의 어느 부분이라고 언급하지는 않지만, 성경의 “일관된 증언”과 “역사적 과정”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성경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며 신구약의 모든 시대에 걸쳐 이어져 있었음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확실하다.
그런 다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압축적이고 ‘함축적인’문장으로 “에베소서에 따르면 이 구속 받은 공동체는 복음에도 중요하지만 역사에도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물론 그는 옳았을 뿐 아니라, 최근 복음주의 신학에서 더 첨예한 관심사가 된 두 가지에 대한 인식이 점점 커지리라 예상한다. 그것은 곧 교회는 그 존재 자체로 복음의 필수 요소라는 것과, 교회는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것이다(이것이 교회가 ‘역사에,도 중요한 이유다).
혹은 전문적인 용어로, 우리는 교회론을 구원론과 분리해서는 안 되며, 선교학과 교회론을 분리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왜 에베소서를 지목했을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에 에베소서가 그의 큰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1979년 그는 에베소서 주해인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를 출판했을 때,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난 5년 넘는 기간 나는 에베소서 본문을 연구하며. 그메시지에 빠져 있었고, 그 영향을 느끼며, 에베소서 꿈을 꾸었다.
그는 “에베소서 3장 전반부가 가르치는 주요한 교훈은 교회가 성경의 중심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한 후에, 어떻게 “교회가 역사의 중심에 있으며" “교회가 복음의 중심에 있는지’’ 개략적으로 서술한다. 역사에 관해 말하자면.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역사와 영원 모두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계획, 유대인과 이방인이 화해한 다국적 공동체의 창조, “국경선이 없고, 온 세계가 그리스도의 소유라고 주장하는"공동체 “그분의 새로운 사회, 그분의 새 창조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이는 교회에 대한 선교적 이해다. 온 창조 세계를 그리스도 아래서 통일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교에 교회가 필수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엡 1:10)
복음에 관해 말하자면, 바울은 1장에 나오는 우주적 통합이라는 하나님의 목적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인종적 화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했다(엡 2:11-3:11) 또 그는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이루신 것으로(엡 2:14-18),또 복음 자체의 ‘비밀’이 실현된 것으로(엡 33-6) 본다. 복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좋은 소식. 그분이 화해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서로 화해한 공동체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포함하는 좋은 소식이다.
바울이 전파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에 대한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이 나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물론 그분이 구원하셨지만) 또한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우리를 죄에서 구속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킬 뿐 아니라 서로와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복음은 새로운 삶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이렇게 교회를 복음과 선교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모습은, 바울의 글 다른 부분에서도 볼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온갖 잘못에도 불구하고,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사도의 복음의 진리와 진정성을 드러내 보이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여긴다(고후 3:2-3)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 3:8)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10-11)그리고 바울이 자주 계속 주장하듯이, 교회가 복음의 중심이므로, 교회가 함께 살고 사랑하며 예배하며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세상에서 교회의 증언과 선교에 중요한 부분이다.
교회의 이러한 복음 중심적, 선교 중심적 속성은 최근 출간된 책들에 담겨 있다. 예를 들어, 톰 라이트의 저작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난다.
내 책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도 창세기로부터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적 연속성과, 또 그들이(우리가) 성경적 복음의 좋은 소식을 구현하는 백성이 되도록 우리 선교의 본질인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증언하는-역사‘ 내에서 우리의 존재 이유인—백성이 되도록 지음 받았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미 레슬리 뉴비긴의 작품에서는, ‘최근’ 많은 인기 있는
선교학적 주제들과 같이, 복음과 선교에 교회가 중요하다는 이러한 이해를 예견했다.
그는 “복음을 믿을 만하다고 여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이 인간사의 결정권을 가진 권세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유일한 대답, 복음의 유일한 해석은 그것을 믿고 그대로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회중이라고 제안한다’라는 강력하고 선교적인 표현으로 “복음의 해석으로의 회중”을 이야기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스토트는 1970년대에 이 주제를 마음 깊이 품고 있었는데, 그것은 1974년 로잔 언약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다음 내용은 제6항 “교회와 전도”에서 발췌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 목적의 바로 중심에 있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복음 전파 수단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선포하는 교회 자체가 십자가의 흔적을 지녀야 한다.”
이는 윤리적 명령으로 이어진다. 이는 바울이 복음을 직설법으로 설명하다가 그것이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이들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법으로 옮겨 가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교회가 만일 복음을 배반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산 믿음이 없거나,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거나, 사업추진과 재정을 포함한 모든 일에서 철저한 정직성이 없다면, [교회는] 오히려 전도의 걸림돌이 된다”
이러한 교회, 선교, 윤리 영역의 통합은, 로잔 운동에도 똑같이 계속 살아 있다.
케이프타운 서약의 교회에 관한 항목(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한다’)이, 선교와 관련한 교회의 역할과 그로 인한 윤리적 요구사항으로 신속하게 옮겨 가고, 선교에 관한 항목(“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사랑한다’)이, 교회의 정체성 및 역할과 세상에서 교회의 삶의 질로 신속하게 옮겨 가는 모습은 흥미롭다. 교회학과 선교학은 뗄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세대와 모든 족속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서 그분의 소유 된 백성으로 사랑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셔서, 새 창조 세계의 시민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시는 이들이다. 하나님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또 우리 격변의 반역의 역사 내내 사랑하신 이들인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닮은 자:가 되어야 하고…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단지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명령이다. 그 사랑이 복음에 순종한다는 첫째 증거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순복한다는 꼭 필요한 표현이며, 세계 선교의 강력한 원동력이다[살후2:13-14; 요일 4:11; 엡 5:2; 살전 1:3; 4:9-10; 요 13:35]
⑴ 사랑은 일치를 요구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의 뿌리 깊은 분열의 장벽들. 즉 인종. 피부색. 성별. 사회 계층 경제적 특권, 정치적 제휴를 넘어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가운데서 세상과 똑같은 분열을 일으키고 확대하는 것처럼 우리의 증거를 망치는 일은 없다. 우리는 온 대륙에 걸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운 전 세계적 동반자 관계를 긴급히 추구한다. 그것은 가부장주의나 건강하지 않은 의존이 아닌. 서로 간에 깊은 사랑과 복종 그리고 감격적인 경제적 나눔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하나 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이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부르셔서 그분의 선교를 함께 하게 하신다. 모든 족속으로 이루어진 교회는 메시아 예수를 통해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과 연속선상에 있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부르심을 받고 모든 족속에게 복과 빛이 되라는 위임을 받았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죄와 고통의 세상에서 거룩과 긍휼과 정의의 공동체가 되도록.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 빚어지고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 받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들을 증언한다.
교회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선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로부터 나오고,그 중심인 십자가의 구속의 승리에 근거한다. 우리는 이 백성에 속해 있고,그 믿음을 고백하며. 그 선교에 함께한다
회심, 문화, 상황화
스토트의 이 장에서 ‘회심과 문화’라는 단락은. 교회 역사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이슈들(이는 또한 구약으로 바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선교 신학자들과 전략가들과 실무자들이 머리와 마음과 손을 쓰고 있는 이슈들을 언급한다.기독교 선교 역사에서(현대뿐만이 아니라. 예수회 선교 단체들은 인도와 중국에서 이 문제와 씨름했다) ‘상황화’ 논쟁(혹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부르듯이 ‘문화화’)이 두드러졌던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이 어쩔수 없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문화의 관계는(문화 없는 인간 삶은 없다) 성경 자체에서도 논쟁점임을 기억할 만하다.
회심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은 문화 내에서, 문화와의 역동적이고 피할 수 없는 교전 가운데서 일어나야만 한다. 그 현상 자체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성경의 표현을 조사해 보면 분명히 그렇다.
"문화는 항상 성경을 기준으로 검토하고 판단해야 하고" 우리에게는 문화를 평가할 분별력
이 필요하다. 내가 방금 말했듯이, 그러한 분별의 과정은 성경 자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내 초창기 책에서(스토트의 이 책 1975년 판을 읽고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한 책), 구약이 이스라엘과 주변 문화의 복잡한 관계를 어떻게 증언하는지 탐구했다.
그 내용을 보면, 앞에 인용한 스토트의 첫 단락이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반응이(특히 토라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전적인 ‘배척과 금지’에서 ‘조건부 관용을을 거쳐(예를 들어, 일부다처제. 이혼. 노예 제도) ‘비판적 인정’에까지(예를 들어, 친족과 가족 결속력과 생존 능력의 중요성) 걸쳐 있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스토트는 1974년 로잔 대회와 1975년 이 책의 출판 직후 복음과 문화라는 이 긴급한 이슈에 관한 협의회를 위해, 그의 생각, 소집 권한, 협의회 의장으로서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량 글 쓰는 능력을 쏟아부었다.
그 회의는 1978년 1월 버뮤다의 윌로우뱅크에서 열렸고, “복음과문화에 관한 윌로우뱅크 신학협의회 보고서”를 만들어 냈다. 이 보고서는, 여전히 아주 분명한 정의, 구분. 신학적 성찰, 실제적인 권고를 제시하는, 36쪽짜리 뛰어난 문서다. 그 문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은, 그 복음이 나온 문화 또는 그 복음이 선포될 지역의 문화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1974년 7월에 열린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의 중대한 관심사였다. 그래서 로잔 위원회의 신학과 교육 분과는 이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 1978년 1월에 협의회를 소집했다. 이 협의회에서는 6개대륙으로부터 33명의 신학자, 인류학자. 언어학자. 선교사. 목사들이 함께 모여 '복음과 문화’에 대해 연구했다. 로잔 위원회의 전략 실행 분과와 공동으로 발기한 이 협의회는, 다음의 네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1.복음과 문화의 상호 관계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킨다 이는 특히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가 그 계시를 이해하고 전달하는 일, 그리고 복음을 듣는 자들이 회심, 교회. 생활 방식으로 보이는 반응과 관련이 있다.
2.타문화권에 복음을 전달할 때의 결과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돌아본다.
3.복음을 더 적절하게 전달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알아본다.
4.이 협의회에서 얻은 결과를 교회와 선교 단체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나눈다.
이전에는 ‘선교지’여서 선교사가 떠난 후 자신들의 토착 문화와의 교전이라는 이슈로 씨름하던 여러 나라의 수많은 선교 단체와 교회들이 로잔의 특별 보고서들 중 가장 초기의 문서인 이 문서에서 아주 유용한 지침을 얻었다.
우리는 존 스토트의 결론을 들어 보아야 한다 종종 그렇듯이, 그는 각종 인간적인 문제. 전략 도전, 의도를 숙고한 뒤에, 겸손히 하나님 앞으로 오라는 요청으로 돌아왔다. 우리에게 선교가 어떤 의미든지, 우리가 함께하도록 부르심 받은 일은 하나님의 선교다. 어떤 구원을 포함하든지.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어떤 회심을 포함하든지 돌아오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현대의 위풍당당하고 자신감에 찬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에 겸손히 의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두드러져 보인다. 그들은 사람들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며,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하고, 죄와 사탄의 종이라고 믿었다(우리도 그들처럼 믿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돌아설’ 수 없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돌이키거나, 구원할 수 없다. 성령만이 그들의 눈을 여시고. 그들의 어둠을 밝히시고, 그들을 속
박에서 해방시키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 신약은 분명 회개와 믿음을 인간의 의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행 2:38; 1631; 17:30),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들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다(예를 들어, 행 11:18; 엡 2:8; 빌 1:29),또 이러한 모순이 아무리 당황스럽다 해도, 우리의 인간 중심적 세계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꼭 필요하며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