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권25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아래와같은 내용이 있다.
도림(道琳)은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의 명을 받들어 백제로 위장 잠입한다.
당시 백제의 왕인 개로왕(蓋鹵王)이 "박혁"(博奕 : 바둑과 장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백제의 대궐로 찾아가서 뛰어난 박혁 실력을 보여 개로왕(蓋鹵王)을 현혹시켰다.
개로왕(蓋鹵王)은 도림(道琳)을 가까이 하여 도림(道琳)을 왕의 스승인 국사(國師)로 삼았다.
개로왕(蓋鹵王)의 환심을 산 도림(道琳)은 점차 본색을 드러내어
개로왕(蓋鹵王)에게 각종 토목 공사를 건의하여 백제의 국력을 낭비하게 만든다.
목표대로 백제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들이 곤궁해지자 고구려로 돌아가 장수왕(長壽王)에게 알렸다.
475년 "장수왕"은 옛 백제의 장수를 앞세워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공격한다.
백제는 한성을 필사적으로 방어 했지만, 고구려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초토화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불과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만다.
이어서 "남성"(南城)마저 공격당하니 성중(城中)은 크게 동요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
개로왕(蓋鹵王)은 도림(道琳)에게 속은 것을 한탄하며 도망치다가 배신자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왕을 잡은 백제의 배신자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은
개로왕(蓋鹵王)의 얼굴에 침을 뱉고 "아단성"(阿且城)으로 끌고 가 참수(斬首)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아차산" 어딘가에 개로왕(蓋鹵王)의 유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묘비도 없고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는 현재까지도 알 수가 없다.
위의 내용에서 살펴볼 것은 "도림"(道琳)의 말이다.
백제의 나라는 산,언덕,강,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했다.
또 백성의 가옥은 강물에 의한 수해를 입는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욱리하"에서 큰 돌을 가져왔다고 언급한다.
"욱리하"는 지금의 한강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말하기를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모두 지니고 있는 땅은 지금의 강동구(江東區) 풍납동(風納洞)이 유일하다.
북성(北城)은 "풍납동 토성"(風納洞 土城)을 일컫는 것이고,
남성(南城)은 "몽촌토성"(夢村土城)을 가르키는 것이라면 이 이상 맞는 곳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석촌동 고분군"(石村洞 古墳群)이 가까이 있어 도성(都城)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의 풍납동에 있는 풍납토성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주목을 받아왔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주택들과 아파트가 들어서서 발굴을 가로막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단순히 살고자 그곳에 들어 온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아야 하겠지만 중요한 유적을 훼손해서는 안될것이다.
풍납토성의 위치.
"천호대로"쪽에 위치한 토성(土城)부터 "강동대로"쪽에 위치한 토성(土城)까지의 직선거리가 대략 1.5Km이고,
"갑을 아파트"에서 "현대 리버빌 아파트가 있는 곳의 토성까지가 약 680M정도이다.
현재 토성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성곽과 현재 발굴중인 성곽을 감안해 볼 때 이 정도의 크기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어느 城의 크기 보다 더 크다고 한다.
올림픽 대교가 원래는 일직선으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풍납토성의 훼손을 막기 위해 아산병원 쪽으로 틀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