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작] 최준영
■대상
파지 / 최준영
잔뜩 취한 오 부장이 오기 전까지도, 진철은 눈앞에서 익어가는 고기 한 점을 먹지 않았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진철에게 무언의 굴복 선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 부장이 3분기 호황 실적을 축하하며 “위하여”를 외치기 전 덧붙인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불법 파업을 단죄합시다!”
본인을 저격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철은 꿋꿋이 잔을 들었다. 그 누구도 진철에게 술잔을 맞대주지 않았지만, 진철은 안면몰수하고 가장 크게 “건배”를 외쳤다. 시위라도 하듯이.
순간 회식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해졌는데, 분위기 메이커 박 대리가 재빠르게 “위, 위하여!”를 외치지 않았다면 꽤 난처해졌을 것이다. 어색했던 분위기는 어물쩍 넘어갔지만, 진철은 그사이 탄 연기를 마시는 바람에 술잔을 잡고 캑캑대고 있었다. 물이 아닌 소주를 한입에 털어넣으며 희뿌연 연기와 모욕감을 동시에 삼킨 진철은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
진철은 회식 내내 석고상처럼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술을 마시자는 사람도, 고기를 먹어보라는 사람도 없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를 도우면 본인도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같은 것이 분위기 저변에 깔려 있었다. 시끌벅적한 시간 속에서 진철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불판의 남은 연기와 함께 홀로 고립됐다.
잠시 뒤, 오 부장이 비틀대며 진철 앞에 앉았다. 그는 참이슬 한 병과 고춧가루 한 톨이 묻어 있는 소주잔을 턱 내려놨다. 박 대리와 김 대리는 혹시나 불똥이 튈까봐 바지춤을 잡고 쉬가 마렵다며 화장실로 피신했다. 진철은 겸허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말없이 소주 뚜껑을 열었다. 오 부장은 앉은키가 커서 진철을 위에서 내려다봤다. 진철은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 연거푸 마셨다. 잠시 빈틈이 보이면 오 부장은 “에헴” 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사람들은 못 본 척 쉬쉬했다. 진철이 술을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몇몇 동료들조차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표면적인 대화들로서 그들의 모든 집중과 시선은 진철과 오 부장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진철이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나서야 오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정진철, 너 인마 잘하는 놈이잖아, 할 수 있지?”와 같은 말 같지도 않은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한꺼번에 많은 알코올을 섭취해 시야가 흐려진 진철의 주위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라비틀어진 항정살 몇 점만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그사이 식당 아주머니가 불판을 빼며 “이거 먹을 거예요?” 하고 묻더니 진철의 앞접시에 새까맣게 탄 고기를 놓고 갔다. 몸을 가누지 못해 오뚝이처럼 앞뒤로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거라 착각한 것이었다. 진철은 차갑게 식어버린 고깃덩이를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불현듯 예서가 떠올랐다.
회사에서 신임을 받던 진철이 갑작스레 미운 오리 새끼로 전락한 데는 여자친구 예서의 영향이 있었다. 예서와 진철은 산다이테크의 유일무이 사내커플이었다. 사내커플이라 함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실상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두 사람에게는 어떠한 구설도 없었다. 예서는 생산직원이고 진철은 사무직원으로 부서가 달랐기 때문이고, 서로 사용하는 층이 달라 점심시간 30분이 겹치는 것 말곤 공통분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선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로서만 알 뿐 실체를 본 사람은 없었다. 손을 잡거나 연애를 하거나 눈빛을 주고받는 일, 보통 연인들이 하는 애정 행각 따위 산다이테크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사내연애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영향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옮겨와 괴롭히는 것은 진철에겐 매우 당황스럽고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1999년 밀레니엄 시대의 부푼 기대감을 업고 설립된 산다이테크는 얼마 전, 스티커, 잉크젯 라벨지 등을 만드는 생산공장을 파주에서 오산으로 옮겼다. 그 결과 10여 년을 이곳에 몸 바친 생산직원들, 5년간 손가락 휘어지게 스티커를 붙여낸 예서는 하루아침에 전근을 가야 했고, 결국 이 모든 것이 외주화를 위한 발판이라는 것을 알고 파업을 시작했다. 단풍이 낙엽으로 변질되는 계절이 되었을 때, 직원들은 파업 조끼를 입고 파주 본사 앞에 농성천막을 쳤다. 열다섯 명쯤 되는 인원이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천막 안을 파고드는데 한두 명만 자리에 없어도 냉기가 돌았다. 생산과장은 본인이 만든 견출지에 파업 참가자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 피켓에 붙였다. 그러면서도 불량을 발견하면 “이거 유통된 거야?”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실직 상태인데도 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생산과장을 보며 예서는 이름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저 사람의 인생엔 일이 전부인데, 전부를 잃어서 무척 공허하겠구나.’ 예서는 본인 처지는 생각도 않고 그렇게 생산과장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파업은 진행 중이었지만, 당사자들 말고는 누구도 이 파업에 관심이 없었다. 공장지대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고, 천막을 쳐다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출퇴근 시간에 회사를 오가는 직원들 말고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회사 직원들조차 시선을 거두고 모르는 체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자 사람들은 의기소침해졌다. 당장 이번 달 생활비- 보험료, 통신료, 아이들 학원비, 교통비 등- 자잘하게 나갈 것은 많은데 월급이 삭감되니 불안했다. 애초에 파업을 포기하고 오산 공장으로 옮겨간 직원들이 부러운 사람도 있었다. 요새 생산직은 이렇다더라, 사내 하청이 아닌 곳이 없다, 같은 말을 들으면 본인들이 하고 있는 싸움이 달걀로 바위 치는 일이 아닌가 싶어 괜한 고립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불안함은 산다이테크의 회식이 있던 날 인사팀 과장이 주고 간 쪽지로 증폭됐다. 예서는 그 쪽지를 펴보았을 때,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어 앞뒤로 뒤집어보았다. 끄트머리에 이름이 휘갈겨 쓰여 있지 않았다면, 본인 것으로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서의 눈에 ‘발령- 영업팀’이라는 글자가 궁서체로 들어왔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단호한 문체였다. 그것은 쪽지를 받은 사람들 모두 느끼는 감정이었다. 다섯 살 아들과 두 살 딸이 있는 문씨는 주먹으로 가슴을 턱턱 치며, 마흔두 살에 기획팀 인턴이 웬 말이냐며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
회식을 마친 진철은 파주 시내에 있는 롯데리아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니 구석에 앉아 있는 예서가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진철과 예서는 서로 다른 이유로 말이 없었다. 진철은 오 부장의 말을 생각하느라, 예서는 발령 쪽지를 생각하느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문득 진철이 예서에게 뭐 좀 먹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면서 침묵이 깨졌다. 예서는 온종일 농성을 하느라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지 못했지만, 허기를 느낄 새가 없었다. 진철의 옷에 축적된 고기, 술, 담배, 그리고 그런 것들을 없애고자 황급히 털어넣은 은단 냄새가 속을 울렁이게 했기 때문이다. 예서는 괜히 그런 냄새가 나자 진철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것도 못 먹고 농성한 사람을 앞에 두고 고기 냄새나 풍기는 그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반대로 진철은 빈속에 소주 한 병을 ‘원샷’ 하는 바람에 속이 쓰려 햄버거라도 먹고 싶은데, 예서가 먹지 않겠다고 해서 눈치가 보였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예서를 앞에 두고 게걸스럽게 햄버거를 먹을 수는 없어서 결국 다 식어빠진 감자튀김 두 봉지와 콘아이스크림을 사왔다.
“나보고 영업팀 가래.”
예서는 진철이 건넨 아이스크림을 감자튀김 봉지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반투명 포장지에 찐득한 아이스크림 국물이 희끗 비쳤다. 진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모습을 지켜봤는데, 속에서 위액이 올라와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도 쓴맛을 느꼈다.
“어떻게 하게?”
“뭘 어떻게 해?”
진철의 태도가 무성의하다고 느낀 예서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사실 예서는 파업을 시작하고 진철에게 쌓인 게 많았다. 노조에 가입하겠다고 하자, 한숨을 푹 쉬며 외면하던 모습이나 예서의 눈을 피해 농성천막 옆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가 맞나, 2년 사귄 애인 사이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동료들조차 “진철씨 왜 옆문으로 돌아가는 거야? 헤어졌어?” 하며 의아해할 때마다 예서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서는 진철의 상황을 알 리 없었다.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거라고 진철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 간부들은 종종 진철을 불러, 농성자들의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예서가 여자친구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은 듯했다. 그들은 진철이 본인들의 편일 거라 확신했고, 그 태도는 아주 노골적이었다. 한 간부는 박예서가 원하는 게 뭔데 이 소란을 피우냐며 회의 시간에 진철을 대놓고 나무랐다. 어쩔 수 없이 진철은 예서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예서가 서운할지 모른대도 할 수 없었다.
“예서야, 오산 공장은 정말 싫어?”
몇 번이고 참았지만, 끝내 식도를 역류하는 위액처럼 그 말을 내뱉고야 마는 진철이었다. 예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직 11월 중순밖에 안 됐는데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히터 바람 때문인지도 몰랐다. 예서는 멀찌감치 떨어져 바닥을 쓸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을 불러세웠다.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앳된 소년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섰다.
“춥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히터를 세게 틀어요?”
예서가 쏘아붙이며 묻자 아르바이트생은 히터 쪽으로 손을 올려보더니 “꺼져 있는데요” 하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가 떠나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에 예서의 눈에 눈물이 그렁 맺혔다. 반면 그 말을 들은 진철의 속에서도 일순간 뭔가가 욱하고 튀어올랐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난 뭐 편하게 회사 다니는 줄 알아? 내가 파업하는 것도 아닌데 너 때문에 나까지 이게 뭐냐.”
“뭐라고?”
“회사에서 내 입장이 어떨지 생각해본 적 있어?”
본인의 상황이 진철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하지 못한 예서였다. 약자는 본인이므로, 그 외 것들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진철은 오늘 회식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나, 예서를 피해 도망가면서 어떤 기분이 드는지, 간부들이 매일 찾아와 괴롭히는 얘기 등을 쏟아냈다. 그렇게 더는 어떤 찌꺼기도 남아 있지 않아 텅 빈 상태가 되었을 때, 진철은 아차 싶었다. 예서의 뺨에 눈물이 톡 떨어졌다. 예서와 사귀면서 단 한 번도 우는 모습을 보지 못한 진철이었다. 슬픈 영화를 봐도 우는 쪽은 늘 본인이었으니까.
진철이 조심스레 냅킨을 내밀었지만, 예서는 벗어둔 웃옷을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예서에게 이런 상황은 버거울 뿐이었다.
*
며칠 후 예서는 파업 조끼를 벗고, 동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게 됐다고. 상황상 어쩔 수가 없다고.
동료들은 함구했고, 천막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생산과장은 파업 피켓에서 예서의 이름이 적힌 견출지를 뗐다. 예서는 웅크리고 서서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미동도 할 수 없었다.
예서가 선택한 것은 오산 공장이 아닌 영업팀으로의 부서 이동이었다. 오산 공장으로 간다는 것은 사실상 비정규직이 되는 거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서른다섯의 나이에 그런 위험한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 예서에겐 적성보단 고용 보장의 안정성이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새로운 일을 배우고,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란 예서의 기대는 출근 첫날부터 무참히 어긋났다.
영업팀으로 이동한 첫 주, 마땅히 자리도 없어서 탕비실 탁자 위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 말곤 할 게 없었다. 영업팀장은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일주일쯤 지나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할 일 없냐고 묻자, 지금은 없고, 정 할 거 없으면 물통이라도 갈든가 하며 정수기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영업팀장이 나가고, 예서는 물통을 갈고 탕비실을 청소했다. 제대로 된 물걸레도 없어서 휴지에 물을 적셔 먼지를 닦았다. 종이컵도 채워넣고, 녹차 티백의 열도 맞췄다. 예서를 감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인사를 하기도 안 하기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휴대폰이라도 하면 괜찮으련만, 꼬투리를 잡힐 수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눈을 오래 감고 있지도 않았다. 조는 것처럼 보일까봐 사람들이 올 때면 긴장했다. 신경 쓰이기는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분위기는 일주일쯤 지나니 말끔히 사라졌다. 실상 영업팀장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언제쯤 자리가 생기냐는 예서의 항의에도 기다리라는 말뿐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지친 예서가 거칠게 항변하면 팀장은 “왜 또 파업하려고?” 같은 말을 하며 비아냥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항의와 체념의 시간이 축적되던 사이, 예서는 어느새 탕비실 담당이 되어 있었다. 커피가 떨어지거나 녹차 티백이 동나면 어김없이 예서의 이름을 불렀다. 예서씨, 휴지가 없네요, 예서씨, 여기 좀 닦아줘요, 예서씨, 녹차 말고 율무차로 사다주세요 등등의 요구들이었다. 공장에서 동료들과 부대끼던 때가 그리웠다. 이곳은 너무 삭막하고 외로웠다. 그럼에도 예서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농성천막을 애써 외면한 채 커피믹스를 채워넣었다. 현재로선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으므로, 묵묵하게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예서가 파업을 포기했음에도 진철을 향한 시선은 좀처럼 나아질 길이 없었다. 직원들은 뒤에서 예서를 흉봤다. 옮기란다고 진짜 옮기냐고 눈치 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동료를 배신했다는 사람, 본인들은 면접에 시험에 힘들게 입사했는데 쉽게 사무직으로 신분 세탁했다고 억울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기획서를 제출할 때, 점심 먹을 때, 모든 순간에 예서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도 진철은 참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사람들은 화젯거리가 생기면 곧잘 잊어먹으니까. 어쨌든 예서는 잘리지 않았고, 파업을 관뒀기에 제자리를 찾을 거라는 믿음이 진철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다른 건 다 참아도, 그중에서 진철을 가장 견딜 수 없게 하는 게 있었다. 사람들이 예서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들은 예서를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파지 취급을 했다.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같았다. 마치 예서의 고용주가 본인들인 양, 뭔가를 시켜댔다. 처음엔 자잘한 부탁도 눈치 보며 하던 사람들은 총무팀장 박찬숙이 탕비실 하수구에서 냄새가 난다며 예서에게 청소를 시킨 이후부터 요구의 크기를 키워갔다. 진철은 일부러 탕비실에 가지 않았는데, 그곳을 쓸고 닦는 예서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예서는 누구보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불량 스티커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고 꼼꼼히 체크하며 한 부분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다. 예서에게도 실직에 대한 상실감이 클 터였지만, 그 모습을 보는 건 진철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본인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걸 알았기에 진철의 죄책감은 커졌다.
사무실 사람들이 밥 먹으러 내려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예서는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달걀말이와 시금치무침, 연근조림, 김치 등 반찬들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냄새날까 미리 열어둔 창문에서 제법 차가워진 초겨울 바람이 들어왔다. 따뜻한 밥과 반찬은 아니었지만, 예서는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점심시간만큼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니까,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으니까 긴장이 좀 풀렸다. 직원식당에 가지 않은 지는 꽤 됐다. 남아 있는 생산팀 직원들을 마주치는 것보다 차라리 다 식어 딱딱해진 찬밥을 먹는 게 나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서러움이 복받쳤다.
예서가 반쯤 밥을 먹었을 때, 다이어트를 시작해 끼니를 거른 박찬숙이 불쑥 탕비실로 들어왔다. 찬숙은 문을 열자마자 “이게 무슨 냄새야?” 하며 코를 막았는데, 예서는 까다로운 성미인 찬숙을 잘 알아서 얼른 뚜껑을 덮으려다 도시락을 바닥에 엎었다. 찬숙은 그 광경을 보고, 어이없게 쳐다봤다.
“박예서씨, 소풍 왔어요?”
예서가 어쩔 줄 몰라 당황하자 찬숙이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안 치우고 뭐 해요?”
예서는 무릎을 꿇고 맨손으로 반찬을 모았다. 손바닥 모양대로 김칫국물 자국이 남았다. 박찬숙은 예서를 밀치고 싱크대로 가서 손을 닦았다. 그녀는 불길한 것을 없애려는 듯 손을 탈탈 털었는데, 그때 찬숙의 손에서 이탈한 물방울이 예서의 이마 위로 톡 떨어져 미간으로 흘러내렸다. 간질거렸지만 양손이 더러워진 예서는 할 수 없이 어깨춤으로 쓱 닦고, 반찬 뚜껑을 덮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탕비실에서 식사를 금지한다는 경고문이 붙었다. 경고문은 예서가 붙였다. 예서는 치욕스러운 마음이 들어 차라리 회사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는데, 조금만 버티면 한 달 월급이 나오는 것을 알고 남은 날짜를 세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문득 그러고 있는 본인의 처지를 생각하자, 무척이나 서러워졌다. 금세 눈물이 고였다. 요새 예서는 자주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씩씩했는데, 바닥으로 곤두박질쳐버린 자존감이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갔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었다. 소속되어 있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느낌이 들어 처참했다.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그들은 더 강하게 예서를 밀어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예서는 한숨조차 삼키며 흘러나오는 눈물을 재빠르게 닦아냈다.
*
결국 예서는 피켓을 들고 다시 거리에 섰다. 회사는 한 달이 지나도 직무를 주지 않았고, 자리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강력한 항의는 비아냥과 인신공격으로 되돌아왔고, 아무도 예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제 발로 나가라는 듯, 방치와 방임만이 있을 뿐이었다.
농성천막에는 고작 다섯 명만이 남아 있었다. 예서는 그 옆에서 1인시위 피켓을 들었다. “부당 해고를 위한 강제 발령 철회하라”는 말을 노란 글씨로 써 붙였다. 파업 참가자들은 그런 예서를 두고 보이지 않게 혀를 찼다. 배신하고 가더니 꼴좋다며 없는 사람 취급했다. 파업을 시작할 때, 함께 이겨내보자던 끈적한 동료애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예서는 그들에게도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생산과장이 예서에게 다가왔다. 예서는 고개 숙여 꾸벅 인사했다. 생산과장은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신 후, 예서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묶어 볼 것 같으니, 좀 떨어져서 할 수 없겠느냐고, 엄연히 다른 시위인데 경계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예서는 그들에게 밀려 경비실 옆 외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문보다 더 인적 드문 별관 건물 앞이었다. 커다란 느티나무 가지에 해가 가려서 그늘이 늘 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경비 아저씨는 바닥을 쓸 때마다 예서를 귀찮아했다. 왜 여기서 그러냐고, 다른 데서 하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예서는 이를 악물고 피켓을 힘껏 쥐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느낌이 들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악에 받쳤다. 종일 서 있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초겨울 바람에 몸이 꽁꽁 얼었다. 잠깐 햇볕이 들 때 몸이 녹았다가 다시 싸늘하게 식어 더 추웠다. 농성장 천막이 그나마 보호막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예서는 멍하니 서서, 진철에 대해 생각했다. 며칠 전, 참지 못하고 이별을 고해버린 그날이 떠올랐다. 1인시위를 하겠다는 말에 결국 진철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꼭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느냐고, 나 좀 살려달라고, 우리 같이 좀 살자고 울었다. 그러면서도 진철은 본인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다고 거듭 미안하다고 했는데, 예서는 그런 진철이 불쌍해 헤어지자고 했다. 진철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그치고, 진심이냐고 물었다. 내심 잡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예서는 매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눈물을 닦고 예서의 자취방을 나갔다.
진철은 파주 시내 한복판을 터벅거리며 걷다가 예서와 본인의 삶이 왜 붕괴돼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곱씹었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 뭐 때문에 이렇게 꼬인 건지. 애초에 예서가 오산 공장으로 갔다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본인이 회사를 관둬야 했던 건지. 그는 자문했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진철이 알 수 있는 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내일의 현실이었다. 고작 현실, 처절함에 술이라도 진탕 먹고 싶은데 아침 7시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 그러지도 못하는 현실. 불투명한 미래를 희망 삼아 시위해야 하고, 피켓을 들어야만 하는 현실이 그들에겐 남아 있던 것이다. 벗어날 수 없고, 답이 없는 현실을 살아내느라 두 사람은 그렇게 멀어져야 했다.
그 후 진철이 예서를 만난 건, 예서가 삭발하던 날이었다.
진철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예서의 방에 두었던 옷가지를 챙기러 갔다. 외근이 있어 그날은 회사에는 가지 못했다. 예서에게 옷을 가지러 가겠다고 문자를 남겨놓았지만, 답은 받지 못했다. 밤 아홉 시가 되었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진철은 본인들의 생일 끝자리를 조합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예서의 자취방 문을 열었다. 불은 꺼졌는데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예서야?”
이불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진철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는데, 예서의 두 발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예서야, 자?”
다시 한번 묻자, 예서가 턱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옷 가지고 가. 불은 켜지 말고.”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했지만, 진철은 시키는 대로 했다. 하지만 어두워서 옷을 찾을 수 없어 되물었다.
“예서야, 옷 구별이 안 돼서 그러는데 불 켜면 안 돼?”
예서는 그제야 이불 밖으로 나오더니 전기 스위치를 딸각 눌렀다. 진철의 눈앞엔 훤히 두상을 드러낸 예서가 있었다. 아직 다듬지 않은 정원의 덤불처럼, 제멋대로 자라난 잔디처럼 머리카락이 제각기 잘려나가 있었다. 진철은 당황스럽고,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옷가지를 떨어뜨렸다. 예서는 그 옷들을 다시 주워 주며 “이상해?” 묻고, 웃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바닥엔 정리하지 못한 진철의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진철은 두 손을 모으고 천장 귀퉁이를 쳐다봤다. 예서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예서는 혹여 진철이 더는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마음 한편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란히 침대에 누웠는데도, 야릇한 감정이 들기는커녕 분위기가 서먹했다. 바닥이 따뜻했는데도 집에 한기가 도는 것처럼 냉랭했다.
“머리 왜 밀었어?”
진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것까지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려고.”
“삭발한다고 회사에서 알아주는 건 아니지 않나….”
“생산팀장이 다시 받아줄 테니까 삭발식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했어. 너무 외로워서.”
“….”
그 말을 들은 진철은 쓸쓸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씩 모든 걸 잃어가는 예서가 안쓰럽고 불쌍하게 느껴져서 목이 메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진철의 마음을 잘 아는 예서가 돌아누워 분위기를 바꿨다. 진철을 밑에서 올려다봤다. 어색하게 손을 진철의 허리춤에 둘렀다. 진철은 그런 예서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변한 건 상황이지 감정이 아니었다. 예서의 심장이 툭 내려앉았다. 떨리는 마음을 미소 속에 억지로 감추듯 예서는 배시시 웃었다.
“이제 나 안 예뻐? 남자 같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긴 예서는 그 말을 하고 진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진철은 예서를 꽉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흐느꼈다. 까끌까끌한 예서의 머리카락이 턱 밑을 따갑게 할수록 진철은 더 꽉 예서를 품었다. 그의 온기에 몇 달간 꽁꽁 얼어붙은 예서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렇게 그 겨울, 두 사람은 마음을 다해 서로를 위로하며 처절했던 시간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바깥에선 창문을 두드리는 매서운 바람 소리만이 공허하게 들려왔지만, 두 사람의 귓가엔 닿지 않았다.
■가작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 고문희
장은 소장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삼 일 후였다. 그만 나가보라는 소장의 손짓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와 곧장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오랜 신호음이 울려도 받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한창 손님이 몰려 바쁠 때였다. 소식을 들으면 제일 먼저 기뻐할 아내가 연락이 되지 않자 장은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지금 장이 느끼는 기쁨은 그보다 훨씬 큰 것이어서 그런 감정은 잠깐이었다. 하긴 지금보다 저녁에 깜짝 선언을 하면 더 좋아하겠지, 삼겹살이라도 사서 파티를 해야겠어. 혼잣말을 하며 장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장은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삼 일 후면 저 거대한 아파트를 지키고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 감정은 실로 오랜만이어서 누구라도 말을 건네온다면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휴대폰도 울리지 않았다. 형제들과 장모와 처남, 처제들을 떠올렸지만 오랫동안 연락 없이 지내온 터라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행여 난처한 부탁이라도 할까 전화를 받길 주저하거나 갚지 않은 돈을 재촉할 것 같았다. 돈이 원수지. 한숨처럼 뱉어내며 장은 그러한 모든 것이 결국 돈 때문에 생겨났고 해결 방법도 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금 장이 우선적으로 해결할 일은 아내였다. 방에만 틀어박혀 얼굴 본 지 오래인 아들과 집을 나가 발길을 끊은 딸은 나중 문제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장은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오늘 같은 날 소주 한 잔쯤은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생수 한 모금으로 떨쳐냈다.
장은 이동통신사 번호인 010만 눌렀다 지우길 반복했다. 하루에 몇 번이나 걸려오던 통신사와 보험회사의 끈질긴 권유 전화도 웬일인지 오늘은 잠잠하다. 지금이라면 기쁘게 응대해줄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장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버스는 신도시를 벗어나고 있었다. 저게 모두 몇 층이야. 목을 주무르며 장은 멀어지는 고층 아파트들을 올려다봤다. 대충 눈어림으로 세어봐도 오십 층 이상은 되어 보였다.
장은 자신이 살고 있는 반지하 빌라를 떠올리며 높아도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저렇게 높은 건물을 지키고 관리하는 일이야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뿌듯했다. 장은 환승역을 알아보기 위해 노선도를 찾아 버스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장의 눈에 건너편에 앉아 있는 중년 여자가 들어왔다. 굵은 허벅지를 벌리고 앉아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먹고 있었다. 장은 여자의 통통한 손가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장의 시선을 느낀 여자가 불쾌한 얼굴로 가방을 추슬렀다. 과자 부스러기인지 떡고물인지 모를 가루가 불룩하게 나온 상의에 묻어 있었다. 장은 여자를 보며 밥상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힘들어하며 밥을 먹는 아내를 떠올렸다. 뱃살 때문에 아내는 언제나 국과 밥을 들고 먹었다. 조심한다고 해도 아내의 앞섶 옷자락에는 늘 반찬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장은 첫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식탁을 사야겠다 생각했다. 좁은 부엌을 탓하며 반대하겠지만 서로 마주 앉아 밥 먹는 모습을 상상하자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생각만으로 흐뭇한 풍경이었다.
그래, 강 사장. 강 사장이 있었지, 한번 부탁을 해봐야겠어. 식탁을 떠올리며 장은 강 사장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울리고 한참 뒤에 강 사장이 전화를 받았다. 몇 달 만에 듣는 강 사장의 목소리가 장은 무척 반가웠다.
강 사장님, 저 장주석입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지요. 아, 예. 물론 저도 사장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시는 사업은 잘되시고. 아, 무슨 일로 전화를 했냐고요? 무슨 일은요, 그냥 오랫동안 안부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 겸사겸사, 부탁드릴 것도 좀 있고, 지금 잠깐 통화 괜찮습니까? 한 3~4분 정도면 되는데. 아, 지금 좀 어렵다고요. 그럼 언제쯤 다시 걸까요, 20분쯤 후면 괜찮겠습니까? 아, 그쪽에서 하신다고요. 급한 일 마무리 짓는 대로, 곧.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화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휴대폰에 대고 당부하는 장의 목소리가 버스 안을 울렸다. 몇몇 승객이 찌푸린 얼굴로 돌아보았다. 건너편에 앉은 여자 역시 장을 향해 얼굴을 찡그렸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장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퉁퉁한 볼에 파묻힌 낮은 코와 목이 파인 라운드티를 입은 모습이 아내와 사뭇 닮았기 때문이다.
다이어트? 그것도 돈이 있어야 하지. 돈이 없는데 뭘로 매일 비싼 채소와 과일을 사 먹어! 운동을 하라고?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돈 버느라 잠잘 시간도 없는데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어! 살 좀 빼라는 말을 꺼냈다 화살처럼 쏘아대는 아내의 돈타령에 장은 두 번 다시 다이어트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살을 조금만 뺐으면 했다. 장의 시선이 불편했는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쪽으로 옮겨갔다.
장은 용건도 꺼내지 못하고 끊어버린 강 사장의 전화가 아쉬웠다. 그래도 식탁은 강 사장에게 부탁하는 편이 낫겠지 싶었다. 옛정을 생각하면 원가는 당연하고 잘만 하면 재고 물건을 거저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연락이 닿으면 곧 문 닫을 것처럼 힘들어했는데 제대로 통화하지 못할 만큼 바쁜 걸 보니 요즘 가구공장 일이 그럭저럭 돌아가는 것 같았다. 전화를 달라고 말미에 다짐을 주었으니 궁금해할 것이고 곧 연락이 올 것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장은 강 사장의 전화를 기다렸다.
곧 하겠다던 강 사장의 전화는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장은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차창으로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장은 이번 일요일엔 아내와 함께 꽃놀이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함께 외출을 한 지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러한 모든 것이 자신 탓이라는 생각을 하며 혹시 하는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장은 휴대폰의 연락처를 들여다보았다. 연락처 옆에 126이라는 숫자를 보며 이토록 많은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장은 126명의 이름을 대충 검색했다. 그중에는 기억에도 없는 사람들의 이름과 한때 정수기 판매 일을 하며 알고 지낸 거래처들과 잠시 머물다 떠나온 동네의 세탁소와 슈퍼, 중국집 번호도 있었다. 장은 먼저 그런 번호부터 제거해나갔다. 연락을 거의 끊었지만 형제들과 처갓집 식구들과 친구들의 번호는 그냥 두기로 했다. 비록 지금은 서로가 반갑지 않은 사이지만 언젠가 다시 인연의 끈이 이어지리라 믿기 때문이다.
장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자음 순서대로 하나씩 검색해나갔다. ㄱ, ㄴ을 훑어 내려가다 ㄴ 자음에서 장은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남덕형. 일 년여 전 한때 지방의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형제처럼 막역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오 개월을 같은 숙소에서 지내며 공사가 끝나고도 가끔 연락하곤 했는데 작년부터 뜸해지더니 최근 들어 전혀 연락이 없었다. 장은 남덕형이라면 이야기가 통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덕형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번호가 바뀌었는지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이 나왔다. 진작 연락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쉰이 가까운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치매에 걸린 팔순 노모를 부양한 남덕형의 모습을 떠올리며 장은 그동안 자신의 무심함을 자책했다.
장은 남덕형의 노모를 만난 적이 있다. 오 개월간의 공사장 일을 끝내고 남덕형의 차에 동승해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남덕형의 집은 장이 사는 도시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작은 읍이었다. 장이 사는 도시의 이정표가 나타났을 때 남덕형 노모가 있는 요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요양원은 도시와 가까웠다. 노모의 사고 소식을 듣고 불안해하는 남덕형 대신 장이 운전을 했다. 다행히 노모의 사고는 그리 크지 않았다. 발목이 접질려 부목을 대고 있었지만 노모의 소화력만은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 장이 사간 참외를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한번에 두 개나 먹어치우는 노모를 보며 장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장의 어머니도 참외를 좋아했다. 변변치 못한 아들 벌이로 며느리 눈치 보느라 참외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한 어머니가 생각나 장은 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장은 노모와 달리 자주 체해 소화제를 비타민처럼 먹던 남덕형을 떠올렸다. 그리고 괜한 불길함을 지우기 위해 다시 연락처를 검색했다.
자음 ㄷ의 연락처를 훑어 내려가다 따리, 라고 저장된 번호를 장은 복잡한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따리, 따리… 마치 생소한 단어를 처음 입에 담아보는 듯 한참을 입속에서 되뇌었다. 긴 한숨이 장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딸이 집을 나가던 날이 떠올랐다. 아내는 아들의 은둔과 딸의 가출이 술 때문이라 원망했지만 술은 훨씬 이전부터 마셔왔다. 사고 전 기분 좋아 마신 술이 사고 후 괴로움을 잊기 위해 마시는 술이 되었을 뿐이다. 장은 유효기간이 일 년 남짓 남은 개인택시 면허 자격증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다행히 상대편 과실도 있어 형사처벌을 면하고 합의금만으로 해결이 되었지만 개인택시를 몰기 위해 10년 이상 쌓아온 시간과 모아둔 돈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돈이 없어, 먹고 죽으려 해도 돈이 있어야지. 입만 열면 돈타령을 하는 아내만 보면 장은 술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아내의 돈타령과 사고 당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건 오직 술뿐이었다. 술에 취한 세상은 현실과 반대였다. 그곳에선 돈다발을 안고 활짝 웃는 아내가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돈이 많아, 돈이, 집구석을 뒤지기만 하면 막 돈이 나와, 이러다가 돈다발에 묻혀 죽겠어, 라고. 그러나 술이 깨면 현실은 언제나 아내의 돈타령과 함께 납입 기한을 넘겨버린 세금 고지서만 방바닥에 나뒹굴 뿐이었다.
차라리 아빠가 없는 게 낫겠어, 그럼 엄마도 나도 찬이도 지금처럼 살지 않을 테고 아빠도 미워하지 않을 텐데.
뭐라고? 왜, 아예 죽어버리라고 대놓고 말을 해라! 천하에 못돼먹은 년!
장은 마시던 소주병을 딸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이후 이 년이 되도록 장은 딸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딸이 한 말은 뇌리 깊숙이 박혀 아무 때고 불쑥 고개를 치밀어 떠올랐다.
택시 사고 후 이 년여 만에 장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운전 외에 특별한 기술이 없는 장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순 노동뿐이었다. 건설현장을 전전하며 잡일을 하다 인력사무소를 통해 강 사장을 만났다. 강 사장은 부엌가구를 만들고 설치하는 일을 했다. 하루를 일하면 몸져눕는 날이 삼 일은 되었다. 벌이는 건설현장 일할 때와 비슷했다. 백만 원이라도 좋으니 매달 받아봤으면, 장의 아내는 남편이 내민 푼돈을 받을 때마다 고장난 테이프처럼 반복해 말했다. 기사식당에서 주방일을 하는 아내의 벌이보다 시원찮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장은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술에 취해 흔들리는 벽을 보며 장은 밤새 혼자 떠들었다.
아내의 입을 통해 딸이 미용실에서 일을 배우며 먹고 잔다는 소식은 들었다. 장은 딸을 만나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아빠가 취직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마음을 풀고 집에 들어올 것도 같았다. 그러나 막상 통화 버튼을 누르는 건 내키지 않았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올 딸의 반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ㄹ과 ㅁ, ㅂ의 자음에선 딱히 연락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인력시장의 문 소장과 한때 잠깐 일했던 사람들의 번호가 있었다. 그냥 둘까 고민하다 장은 과감하게 삭제를 했다. 이제 취직했으니 연락할 일은 없을 터였다. ㅅ에서 장은 고물상 성 사장의 번호를 발견했다. 그동안 잊고 있던 일당이 생각났다. 보름치면 웬만한 식탁 하나는 살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한동안 잊고 있던 어깨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 성 사장이 문병을 와 건넨 치료비 몇 푼이 일당의 일부라는 걸 장은 후에 알았다. 퇴원 뒤 성 사장을 찾아갔지만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 사고로 손해를 입었다는 말에 사과하고 돌아섰다.
아니, 그런다고 그냥 돌아오면 어떡해! 멱살을 잡든지, 매달리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장 받아와욧! 펄쩍 뛰는 아내에게 등을 떠밀려 며칠 후 다시 찾아갔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장은 지금도 그때 고물을 분리하다 무너진 고철 더미에 다친 어깨가 날만 흐리면 쑤시고 아프다. 전화를 해볼까? 장은 성 사장의 번호를 보며 고민했다. 물론 일당을 받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성 사장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어깨를 다치기 전까지 유일한 술친구였다. 술 생각이 간절해지며 입안이 바짝 타올랐다. 그냥 오랜만에 술 한잔하자고 해볼까? 아니, 지금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오늘까지 어떻게 참았는데. 굳은 다짐을 하며 장은 성 사장의 번호를 꾹 눌러 삭제를 했다. 이제 성 사장이야말로 두 번 다시 연락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래도 그때 성 사장 밑에서 잠깐이나마 일한 경험이 인정되어 오늘 면접에서 점수를 얻었다고 생각하자 조금은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쓰레기 분리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아직 어깨가 완치된 건 아니지만 분리수거장에서 뒤섞인 쓰레기를 분리하고 정리하는 일쯤이야 벽돌을 지고 계단을 오르는 것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장은 경비원들이 입고 있는 제복과 모자가 마음에 들었다. 땀에 절어 쉰내 나는 셔츠 대신 감색 제복은 제법 폼이 나 보였다. 장은 그 옷을 입고 이천 세대가 넘는 대단지에서 일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또 벅차올랐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장은 경비원을 모집하는 아파트를 찾아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다. 푼돈을 내밀 때마다 푸념하는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결혼 후 한 번도 아내에게 매달 일정한 돈을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 택시를 몰았을 때도, 인력시장을 전전했을 때도 장의 벌이는 들쑥날쑥했다. 일을 해야만 했다. 아들과 함께 제대로 된 벌이도 없이 소주병만 끼고 사는 남편을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버리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런 생각은 장을 불안하게 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불안함을 떨치기 힘들었고 맨정신으로 아내를 보는 날은 손꼽을 정도였다. 경력, 학력 무관이라는 공고를 보고 찾아갔지만 문제는 자격 요건이 60살 이상이라는 점이다. 장은 오십 초반인 자신의 나이가 인력시장은 물론 경비직에서도 반기지 않는 사실에 기분이 씁쓸했다.
“사시는 집하고 거리가 상당한데 출퇴근은 괜찮습니까? 그쪽에서 오시려면 교통도 좀 불편하실 텐데.”
“괜찮습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관리소장의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며 장은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집에서 가깝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곳은 연락도 오지 않았다. 장은 두 시간 이상이 걸려도 받아주기만 하면 일할 생각이었다. 환승 시간만 잘 맞춘다면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니 문제될 건 없었다.
도심에 들어서자 버스는 하교하는 학생들로 금세 만원이 되었다. 장의 옆자리에도 중학생인 듯한 남학생이 앉았다. 시큼한 땀 냄새를 맡자 장은 아들이 생각났다. 좁은 방구석에서 종일 뭘 하고 지내는지. 장은 긴 한숨을 토하며 옆자리 학생을 흘깃 보았다. 시험 기간인지 통로에 서 있는 친구들과 시험문제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들은 정상대로라면 지금 고3 수험생이 되었어야 했다. 밤새워 공부에 매달려도 시원찮을 마당에 컴퓨터게임이나 하고 잠으로 시간을 버리는 아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차창을 열자 4월의 봄바람이 들어왔다. 그때 그놈 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어.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또 밀려왔다.
아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학기가 끝날 무렵 자퇴를 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무의미한 학교생활을 하는 대신 혼자 공부해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장과 아내는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아들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학교에 사정해 자퇴를 유보했지만 결국 새 학년에 올라갈 무렵 희망을 포기했다.
독학해 검정고시를 보겠다는 아들은 매일 방에 틀어박혀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고 있다. 장은 깊은 밤 혼자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아들의 뒷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부스스한 뒷머리에 두드러진 등뼈가 최근 장이 기억하는 아들의 모습이다. 앞모습을 본 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왠지 장은 내키지 않았다. 장이 기억하는 아들의 얼굴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장은 자음 ㅇ에서 아들이라고 저장된 번호를 찾았다. 생각해보니 아들에게 전화를 건 기억이 없었다. 몇 번 아들에게서 전화가 온 적은 있었다. 아마 처음 휴대폰을 사준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때 택시를 몰고 있던 장은 운전 중 걸려온 아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그때 아들의 전화를 받았더라면, 아니면 나중에 걸어보기라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꼭 할 말이 있어 전화를 했을지 몰랐다. 장은 아들이 말문을 닫아버린 것이 그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 영장이 나오면 바로 군대에 보내버려야겠어, 훈련받고 단체생활을 하다보면 인간이 돼 나올지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장은 옆자리의 학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열심히 공부해라! 부모 속 썩이지 말고. 장의 말에 힐끗 돌아본 옆자리 학생이 얼굴을 찡그리며 통로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ㅇ을 지나 ㅊ, ㅌ, ㅍ을 검색했다. 채범식? 탁재만? 이 친구들 아직도 택시 몰고 있나? 참, 셋이서 한창 마셔댔는데. 그때 자주 가던 진미식당 해장국 참 일품이었지. 지금도 하고 있는지 몰라. 해장국을 떠올리자 갑작스레 허기가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어제 관리사무소의 전화를 받은 이후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었다. 간절해진 술 생각을 생수로 달래며 장은 기쁜 일이 있어도 술이 마시고 싶어진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이상했다. 그런데 이놈의 마누라는 궁금하지도 않나, 생전 잘 하지도 않는 전화를 세 번씩이나 했는데. 장은 연락 없는 아내가 야속했다. 채범식과 탁재만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만약 연결이 되면 술 한잔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테고 거절하기 또한 힘들 것이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진미식당 번호를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기억에도 없는 이름들과 기억이 나도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몇몇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장은 삭제 버튼을 눌러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편현주? 누구지? ㅍ에서 장은 낮선 이름을 발견했다. 이름만 보면 여자인 것 같았다. 그러나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깐 스치듯 만난 여자 번호를 저장해놓았을 리는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누구보다 철저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편현주라는 이름이 더욱 궁금해졌다. 호기심이 일었다. 장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가늘고 높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장주석이라고 합니다만. 제 폰에 그쪽 번호가….”
“어머, 장 사장님. 웬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그동안 건강하셨지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반갑게 안부 인사를 하는 상대방의 대응에 장은 당황했다. 자신의 느닷없는 전화를 반갑게 받아주니 기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여자에 대해 기억이 없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사장도 아닌데 무조건 같은 직함을 붙여 불러주는 여자라면 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론 그런 여자의 번호를 저장해놓은 데 대한 의구심이 일었다.
“미안합니다만, 제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그런데, 혹시 저를 잘 아십니까?”
“물론이죠. 잘 알다마다예. 그렇지 않아도 장 사장님께 마침 좋은 상품이 있어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어예.”
어미에 요, 가 아닌 예, 를 붙인 걸로 보아 남쪽 지방 출신 같았다. 장은 그제야 여자를 기억했다. 택시를 몰 때 사무실에 매일같이 오던 보험설계사였다. 장과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한두 번 식사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장은 여자의 끈질긴 권유에 변액보험을 계약했다. 그러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중도 해약을 하고 납입한 보험료를 돌려받으려 했지만, 일 년 가까이 납입한 보험료를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장은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막 상품 설명에 들어간 여자의 전화를 장은 바쁘다는 핑계로 끊고 편현주의 번호를 삭제했다. 이제 연락처는 103명으로 줄었다.
정류장마다 학생들이 내리자 드문드문 빈자리가 드러났다. 아직 환승할 정류장까지는 조금 더 가야 했다. 환승하면 집까지는 다섯 정거장밖에 되지 않는다. 신도시를 떠나온 지 한 시간이 더 걸렸다. 출근을 하려면 넉넉잡아 두 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나와야겠다고 장은 생각했다. 그런데, 곧 전화를 주겠다는 사람이 한 시간이 지나도 왜 연락이 없지. 아무래도 잊어버린 거 같은데. 장은 다시 강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랫동안 신호음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내에게 걸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화 한 통 받을 새도 없이 바쁜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통화 기록은 확인했을 텐데. 장은 아내도 강 사장도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끊은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는데 마치 열 달은 된 것 같구먼. 장은 간절해진 술 생각을 생수로 대신했다.
장은 두 번 다시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아내와 약속했다. 술을 끊지 않으면 당장 이혼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아내에게 각서를 쓰고 다짐을 한 게 몇 번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내의 태도가 이전과 달랐다. 장이 몰래 마신 술병을 보고도 모른 척할 뿐 아니라 입에 달고 살던 돈타령도 눈에 띄게 줄었다. 가끔 응답 없는 아들의 방문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고 악을 쓰는 일도 하지 않았고 방문을 노크하지도 않았다. 장은 그런 아내가 무서웠다. 어느 날 말없이 아내가 집을 나간 후 시커먼 곰팡이에 둘러싸여 있는 아들과 자신을 상상하면 참을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일 년 내내 습기를 품은 벽은 늘 곰팡이투성이였다. 오랫동안 들어가보지 못한 아들의 방은 상상만으로 짐작이 갔다. 그 속에서 조금씩 아들의 세포가 썩어가는 상상을 하면 술을 마시지 않고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건 불과 육 개월 전이었다. 어느 날 잠을 자다 목이 말라 부엌으로 향하던 장은 딸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살짝 방문 틈을 들여다보았다. 딸이 집을 나간 후 아내는 딸의 방에서 잠을 잤다. 자연히 부부관계도 멀어졌지만 두 사람 모두 그런 데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터라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아들을 낳고 점점 살이 찌기 시작한 아내는 잠자리를 귀찮아했고 장은 그런 아내를 배려했다. 물론 배려라는 말로 미화를 했지만 솔직히 장도 아내와 마찬가지였다. 장이 그날 밤 딸의 방문 틈으로 본 건 자위행위를 하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아내는 TV를 보고 있었다. 잠옷처럼 입고 자는 헐렁한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고 모로 누워 TV 화면을 보고 있었다. 반라의 남녀가 정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아마 케이블 채널에서 보여주는 성인영화라고 장은 짐작했다. 장은 아내의 바지 속에서 꼬물거리는 손가락을 몰래 지켜보다 조용히 돌아섰다. 방으로 돌아온 장은 자신의 속옷에 손을 넣어 늘어진 페니스를 오래도록 주물렀다. 그러나 그 밤 끝내 장은 아내가 누워 있는 방문을 열지 못했다. 그날 이후 장은 왠지 아내의 얼굴과 손을 똑바로 보질 못했다. 얼굴만 보면 그 밤 텔레비전의 푸른 불빛에 비친 몽롱한 표정의 아내가 생각났고 손을 보면 바지 속에서 꿈틀대던 광경이 떠올랐다. 돈타령을 하며 악다구니를 쳐대는 아내의 얼굴과 묵은지를 찢어 건네는 통통한 손가락이 밤마다 그런 행위를 한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장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내를 어떻게 해줄 수 없음에 몹시 괴로웠다. 그런 괴로움은 매일 조금씩 커져만 갔고 급기야 언젠가 견디지 못한 아내가 집을 뛰쳐나가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장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약한 의지력 때문에 이틀을 버티지 못했다.
어떡하든지 돈을 벌어야 해, 한꺼번에 많은 돈은 안길 순 없어도 매달 백만 원이라도 벌어줘야지. 그러기 위해선 제대로 된 취직을 해야만 해. 하루에도 몇 번을 다짐을 하고 술을 멀리해보려 하지만 술을 끊으면 어깨 통증이 느껴졌고 아픈 어깨로는 막노동은 물론 운전 또한 무리였다. 그래, 바로 저거야. 저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어느 날 TV 속 드라마에 나온 아파트 경비원을 본 장은 결심을 했다.
한경태? 어, 이 친구 번호가 아직 있네. 장은 ㅎ에서 낯익은 이름과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착잡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미안하네,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네, 나도 사는 게 이 모양이니 자네 식구들 생각할 여유가 없었네. 마치 눈앞에 한경태와 마주한 것처럼 장은 머리를 조아려 용서를 빌었다.
한경태는 장과 입대 동기로 함께 전역하고 유일하게 연락하고 지내던 사이였다. 장이 교통사고를 냈을 때 자신의 일처럼 뛰어다니며 피해자 가족을 만나 사죄를 하고 절망에 빠진 장을 위로해주었다. 장은 한경태가 죽기 두 달 전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방까지 갔다. 그날은 버스 기사인 한경태의 월급날이었다. 장과 헤어진 그날 한경태는 잠을 자다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쓰러져 입원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불과 일 년여 전이었다. 장은 그토록 멀쩡했던 친구가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가끔 소화가 안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러기는 장도 마찬가지였다. 걱정 말게, 제수씨와 애들은 내가 자네 대신 잘 돌봐줄 테니. 한경태가 숨을 거두기 직전 장은 약속을 했다. 이후 장례가 끝나고 장이 한경태의 가족을 찾은 건 두 번 정도였다.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성 사장의 고물상에서 어깨를 다친 이후 자연스레 연락이 끊어졌다. 잘 살고 있겠지. 장은 스스로 위로를 하며 한경태의 번호를 삭제했다.
정리를 끝내자 연락처는 91개로 줄었다. 아마 남은 91개도 시간이 지나면 삭제가 필요할 것이고 새로운 연락처가 늘어날 것이었다. 우선 다음 주부터 함께 근무할 동료들의 번호로 또다시 훌쩍 100개가 넘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장은 100이라는 숫자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야말로 대단한 거 아니야? 내 나이면 대부분 은퇴하고 들어앉는 마당에 떡하니 취직을 했으니. 장은 아내가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왜 아직 전화를 안 주는 거야.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전화 한 통 할 시간이 없다니. 한 달 후 백만 원이 든 봉투를 받고 기뻐하는 아내의 모습을 그리며 장은 생각을 부풀렸다.
네 아빠가 술도 끊고 취직을 했다지 뭐냐, 이제 그만 집에 들어오너라. 상상 속에서 장의 아내가 딸을 불러들인다. 집을 떠난 딸이 돌아오고 다시 제 방을 찾으면, 아내는 어쩔 수 없이 장과 함께 안방에서 자야 하고, 아들은, 그놈이 문제긴 하지만 절간 같은 집안이 사람 소리로 시끄러워지면 제 놈도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오지 않겠어.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상상은 한없이 부풀었다.
어이쿠, 이런. 정신을 놓다 정류장을 지나쳐버렸네. 다음 주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 한눈팔다 또 정류장을 놓치고 그러다가 지각해 잘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어떻게 잡은 일자린데. 허둥대며 장은 하차 벨을 눌렀다. 그때 장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그러나 갈아탈 환승역을 놓친 장의 귀에는 다음 역을 안내하는 방송 멘트만 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