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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함평)이씨 뿌리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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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공원성씨조형물 스크랩 한국인의 성씨 뿌리공원에서-1
咸李사랑 추천 0 조회 85 14.08.13 21: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뿌리공원

 

여기올리는 순서는 없습니다.

다만 입구에서 사진을 찍는 순으로 올렸슴을 알림니다.

 

01.충주박씨      02.경주최씨     03.함양여씨     04.고성남씨       05.빈      씨

06.해평길씨      07.청주한씨     08.남평문씨     09.성주이씨       10.원주원씨

11.선산김씨      12.한산이씨     13.상산연씨     14.한산이씨       15.문화류씨

16.양주최씨      17.반남박씨     18.진주유씨     19.파평윤씨       20.평산신씨

21.온양정씨      22.영월엄씨     23.순흥안씨     24.경주손씨       25.고흥유씨

26.안동권씨

 

뿌리공원 입구에 서있는 커다란 돌 입니다.

 

뿌리공원 유래비문

 

 

족보박물관

 

 

성씨의 탄생

 

족보박물관 내부

 

[01]

충주박씨(忠州朴氏)의 시조는 고려 중엽 부정(副正)을 지냈던 박영(朴英)이다.

시조 박영의 8세손 박광리(朴光理)는 고려 말 충주박씨의 대표적 인물이다. 개성소윤이었던 박광리는 권신 임견미(林堅味)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이에 항거하다 파직되었다.

 

그 후 아들 박진(朴?)과 박소(朴蘇) 형제는 고려의 정국이 어지럽자 충청도 공주, 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가장동으로 낙향하였다. 오늘날 충주박씨는 대부분 이 두 형제의 후손들이다.

전국 4천여 가구에 인구는 약 2만여 명이다.

 

[02]

시조 최치원(崔致遠)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이며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 이다.

최치원은 869년(신라 경문왕 9) 12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간지 5년후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에 이르고 자금어의를 하사받았으며, 제도행영 병마도총 고변의종사관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으나 외직을 원하여 대산, 천령, 부성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고

아손이 되었다.

그 후 난세를 비관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며 수도하다 63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03]

함양여씨(咸陽呂氏)는 당나라 희종 때 신라에 건너와 창성한 여어매(呂御梅)를 시조로 삼는 성씨이다.

최초 정착한 곳이 함양(咸陽) 혹은 성산(星山)이라는 설로 인해 함양여씨와 성산여씨로 갈라진다.

시조 여어매는 고려 때 대장군을 지낸 여임청과 낭장을 지낸 여광유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함양여씨는 여임청의 세 아들 중 여자장, 여존혁 두 형제와 여광유의 아들이 세계를 잇고 있다.

 

[04]

서기 755년(신라 경덕왕 14)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다녀오다

풍랑을 만나 신라(新羅)에 표착(漂着)했던 중국(中國)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

김충(金忠)이 정착하면서 경덕왕(景德王)으로부터 남씨(南氏)를 사성(賜姓)받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받은 후 민(敏)으로 개명(改名)하였다.

남민의 7대손 진용(鎭勇)의 세 아들 중 남광보(南匡甫)는 셋째 아들로서 고성(固城)에 관적(貫籍)하여 고성남씨(固城南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05]

빈씨는 중국 성씨로 노나라 때 공자의 문인(門人)인 빈모가(賓牟賈)의 후예들이다.

우리가 모시는 빈우광(賓宇光) 시조는 자를 대용(大用)이라 하고 호는 송헌(松軒)이다.

몽고가 송나라를 점령하여 남으로 피난하면서 당시 송나라 비각에 소장된 사천여책(일만칠천권)을 배에 싣고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 학문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충숙왕은 그 공을 높이 받아 수성군으로 봉하고 수성부(대구)를 식읍지로 하셨다.

결혼은 판도판서 이실의 딸인 진성군부인(진보이씨)과 결혼하여 아들 빈규창을 낳았는데 자는 백세며 호는 만목당 이다.

그 후 후손이 번창하여 밀양, 수성, 달성, 대구, 남원, 육창, 안주, 영광, 경주, 의성 등으로 퍼져 본관을 두고 있었다.

 

[06]

길당(吉塘)은 고려 문종 때 송나라에서 귀화한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서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졌는데, 이것이 해평길씨의 뿌리가 되었다.

그 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었다가 후손인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 길시우(吉時遇)를 시조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해평길씨는 야은 길재(吉再)의 음덕으로 내내 명문의 자리를 누릴수 있었다.

이후로는 길회(吉誨)와 길면주(吉冕周)가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길회는 1577년(선조 10)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검열(檢閱)·지평(持平)·형조정랑(刑曹正郎)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의 분조(分朝)에 수행했고, 이듬해 헌납(獻納)·장령(掌令)·직강(直講) 등을 역임했다.

1604년(선조 37) 호종의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철종 때의 대학자인 길면주는 1855년(철종 9) 조상 길재의 『야은속집(冶隱續集)』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07]

시조 한란(韓蘭, 태위공)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려고 그의 집앞을 지날 때 칼을 차고 나가 종군하여

삼한통합의 공을 세우고 삼중대광 문하태위가 되고 개국벽상공신에 서훈 되었다.

 

'한씨세보'에 의하면 한란은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며 한씨는 기자의 31세손 준왕(고조선의 마지막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와 금마(현 익산)에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이라 하고 위만에게 억류된

왕자 및 친족이 성을 한이라고 한것으로 보아 준왕 이전에 한씨로 하였다고 한다.

 

마한 말기의 원왕에게 세형제가 있었는데 마한이 망하자 우평은 고구려에서 태원 선우씨, 우성은 백제에서 행주 기씨,

우경은 신라에서 청주 한씨가 되었다고 한다.시조 한란은 우경의 31세손인 한지원에게 한만, 한간, 한란, 한영

네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08]

문다성은 신라 제20대 왕인 자비 마립간 때의 인물로,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인 남평현 출신이었다.

신라 지증왕과 진흥왕, 진지왕 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지내고 남평 문씨의 시조가 되었다.

갓난 아기 때 남평현의 장자못이라는 연못가의 높은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장자못가에 문암(文巖)이라는 전설 속의 바위가 남아 있다.

종파간략하게 충혜공파, 헌납공파, 순질공파, 의안공파, 시중공파, 성숙공파, 감천군파, 남제공파, 순평군파, 판도판서공파로 나뉘어 있다.

 

[09]

성주(星州)는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로,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는 신라 경순왕 때의 재상이었다.

신라가 망하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에 이주하여 숨어 살았다.

이에 태조 왕건이 그 절의에 감복하여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고려 원종 때의 인물인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이 중흥 시조로, 그의 손자인 평장사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서

벼슬할 때 공이 많아 원 황제가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西郡公)에 추봉하여 본관을 농서로 하였다.

 

그 후 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낭장 이만년(李萬年), 참찬 이억년(李億年), 정당문학 이조년 등

아들 5형제가 각기 문과에 급제하고 가세가 번성해지자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에 따라 본관을 성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이포(李褒)와 이인부(李仁復)가 이름을 날렸고, 이인민(李仁敏)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이인임(李仁任)은 문하시중에 올랐다.

조선시대에는 이발(李潑), 이숭문(李崇文), 이지활(李智活), 이지원(李智源) 그리고 이견기(李堅基)와 이집이 유명하다.

이직(李稷)은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이의(李誼)와 이자건(李自建)은 대사헌을 지냈다.

<전두환 전대통령 처가 즉 부인 이순자씨가 성주이가 이다>

 

[10]

원씨(元)는 4파가 있는데 각각 시조를 다르게 하고 있다.

응암 운곡계는 당나라 태종 때 우리나라에 파견온 원경을 시조로 하며, 원성백계는 원극유, 시중공계는 원익겸, 충숙공계는 원충갑을 시조로 하고 있다.

 

[11]

시조 김선궁(金宣弓)의 원래 이름은 김선(金宣)이다.

김선궁은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30세 손이자 문성왕의 8세 손이며 김알지의 30세손이다.

그는 어렸을때 아버지에게 상해를 입힌자의 목을 베고 처벌을 자청하여 투옥이 된후 조정에서 효자라며 석방하고 표창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 할때 선산군에 이르러 군사를 모집했는데 종군할 것을 희망하자 태조가 기뻐하여 친히 소지한 활을 하사하고 선궁(宣弓)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때 부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정란보국공신에 오르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개경(開京)에 계속 머물러 벼슬을 하게 되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일선(一善)’이라 하였다.

그러나 조선 태종때 일선이 선산으로 지명이 바뀌어 선산김씨로 본관이 바뀌게 되었다.

김선궁의 큰 아들로 문하시중을 역임한 김봉술(金奉述)과 삼사우윤 김봉문(金奉文)의 형제대에서 세계가 갈라졌다.

 

[12]

시조 연계령은 중국 흥농 사람으로서 고려 때에 우리나라에 와서 문하시랑과 신호위상장군을 역임하였다.

11세손 연주가 고려 때 검교 한성부윤을 지내다가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여러차례 벼슬 할것을 원했으나 응하지 않자 후에 곡산군에 추봉되자 후손들이 본관을 곡산이라고 했다.

 

[13]

한산이씨는 같은 뿌리이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한산이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장공계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호족으로서 권지호장직(權知戶長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그러나 시조라 할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 이동(易東),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권지공계(權知公系)의 시조 이윤우(李允佑)는 고려시대에 문과에 올라 왕의 신임을 얻어 동생 이윤경과 함께

각각 한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장공계의 족보에는 두사람이 형제였다는 내용이없다.

권지공계는 여러대를 독자로 자손을 이어 왔으므로 아는 사람이 드믈고 현달한 사람도 없다.

 

[14]

시조 : 신성용(申成用)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했다.

신성용의 선조는 신라의 선비로 대대로 고령에 살면서 호장을 지내왔으므로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8세손 신숙주가 익재좌리공신으로 고령 부원군에 봉해졌다.

 

[15]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후삼국 통일 전쟁 당시 유주(儒州)[문화의 옛 이름]의 호족이었다.

유차달의 5대조인 유색(柳穡)이 신라 헌덕왕 때 유주 구월산(九月山)에 은거한 이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살다가 고려 개국 이후 개성에서 세거해 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을 정벌할 때 군량 보급에 문제가 생기자

유차달이 수레 1,000량을 만들어 군량을 조달하였고, 그 공으로 대승(大丞)에 오르고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해졌다.

유차달의 원래 이름은 유해(柳海)였으나 태조가 이차위달(以車爲達)하였다고 하여 유차달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16]

시조 : 최억(崔億)
시조 최억(崔億, 시호는 문경)은 학문과 덕행이 높아 태사에 천거되고 1353년(고려 공만왕 2년)에 호부상서로 양주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양주로 하였다.

 

[17]

시조 : 박응주(朴應珠)

시조 박응주(朴應珠)는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선조를 알수가 없으나 반남현(나주)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선비집안의 후손으로

호장을 지냈고 그의 6세손 박은이 조선초기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익재동덕좌명공신 으로 좌의정에 이르렀고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박응주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반남으로 하였다.

박은, 박숭질(崇質), 박세채(世采), 박종악(宗岳), 박종훈(宗薰), 박회수(晦壽) 등의 상신,박태상(泰尙), 박규수(珪壽) 등의

대제학, 박세당(世堂), 박지원(趾源) 등의 뛰어난 학자가 있으며, 박소(紹), 박응남(應男), 박응복(應福), 박태보(泰輔) 등의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에 상신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과 조선 후기에 판서급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박씨중 순천박씨와 함께

벼슬이 화려하다.

 

[18]

시조 : 유정(柳挺)

시조 유정은 원래 진주에 대를이어 살아온 선비집안의 후예로 고려 시대에 벼슬이 좌우위상장군에 이르고 진강(진주) 부원군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문화 유씨에서 분파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문헌상 고증이 없으며, 문화유씨계 진주유씨는 별도로 있다.

 

[19]

시조 윤군정(君正)은 고려 고종, 원종 때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좌복야, 공부판사(工部判事)를 지냈다.

그의 손자 윤석이 고려 충숙왕 때 충근절의 동덕찬화 보정공신, 벽상삼중대광, 도첨의사, 우의정, 판전리사사로 해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해평을 본관으로 하였다.

 

[20]

시조 신숭겸(申崇謙)의 원래이름은 삼능산(三能山)이며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궁예가 세운 나라인 태봉의 기장으로 있다가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이었던 복지겸, 배현경,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추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한 개국원훈대장군으로

고려사에 고려 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루는 왕건이 장군들과 평주(평산)에 사냥을 나가는 도중에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서 맞힐 수있는가?" 하고 물으니 신숭겸이 자신이 맞추겠다고 하며 "몇번째 기러기를 맞출까요?"

하며 물어보자 세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추라고 하자 날아가는 세번째 기러기의 왼쪽날개를 맞추어서 떨어뜨렸다.

태조가 탄복하고 근처 땅 300결을 하사하고 함께 본관을 평산으로 삼게했다.

 

927년(태조 10년) 대구 공산동 전투에서 견훤에게 포위되어 전세가 위급하자 태조와 용모가 비슷한 그는 태조를

피신케하고 대신 어차를 타고 출전하여 전사 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그의 유해를 춘천에 예를 올려 장사지내고 공신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장절이라고 했다.

1120년(고려 예종 15년)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여 '도이장가'를 지었다.

 

[21]

시조 정보천(鄭普天)은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 호부상서(銀靑光祿大夫 戶部尙書)를 지냈고 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없어서

고증할 수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탕정군(湯井. 온양의 옛이름)은 백제지역으로 고려 태조가 유금필(臾黔弼)과 함께

이곳 탕정군에 왔을 때 고을 관리에 공이 있음을 보고 정씨에게 관을 제수(除授)하고 그 후손들은

그 군의 향직(鄕職)인 호장(戶長)이 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온양을 본관으로 했다.

 

[22]

시조 엄임의(嚴林義)는 원래 중국의 당나라 사람으로 신시랑(영산신씨)과 함께 사신으로 신라 35대 경덕왕때

우리나라에 파락사(波樂使)라는 사신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엄씨와는 서로 종씨라 부르며

혼인도 하지 않고 의좋게 살았었다고 한다.

 

[23]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시대에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상호군(神虎衛 上護軍)에 추봉되었다.

시조 이전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흥년(순흥)현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순흥으로 하였다.

안자미의 아들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를 기준으로 1, 2, 3파로 구분된다.

시조 자미의 묘는 경북 영주군 순흥면에 있었으나 없어지고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24]

경주손씨(慶州孫氏)에 대한 자료가 없습니다.

 

[25]

시조 유영은 원래 신라의 선비로 신라말에 정치가 혼란하자 흥양(고흥)으로 이사 하여 고려 개국후 호장을 지냈다.

그리고 그의 7세손 유청신이 고려 충선왕 때 도첨의 정승을 지내고 고흥 부원군에 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이 본관을 고흥으로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개풍군 미륵산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10월이다.

 

[26]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본래의 성은 김씨이다.

신라말 경애왕 때 신라가 극도로 부패하고 잇단 민란으로 국운이 기울어가자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입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한다.

이에 격분한 권행은 930년(경순왕 3년) 겨울 후백제의 견훤이 대군을 몰아 이 고을에 침입하여 고려 태조와 대치했을 때

이 고을 성주 김선평(신 안동김씨 시조), 그리고 이 곳 지도급 인사 장정필(안동장씨 시조)과 의논, 함께 향병을 모으고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에서 견훤의 8천 대병을 함몰시키고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고창은 후삼국의 전략상 중요지역이었으며, 병산에서 이들 세사람의 도움으로 승리함으로서 열세에 있던

태조 왕건이 우세해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병산전투의 승리는 후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항복 등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이었다.

김행의 공을 가상히 여긴 고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했다.

(能炳機達權)"라며 권씨 성을 내리고 벼슬을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로 제수한 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안동을 본관으로 하였다.

 

노산./이선승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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