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희망이 주는 가능성
1864년 어떤 사람이 1마일을 4분 50초에 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단축해보려고 애를 썼다.
1945년에 4분 1초까지를 기록하고 그 이상의 좋은 기록은 낼 수가 없었다.
근 100여 년 동안 4분의 벽을 깨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인간은 절대로 1마일을
4분 이내에 뛸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던 1945년, 어느 외과 의사가 사람도
4분 이내에 1마일을 뛸 수 있다는 의학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근 100년 동안 한 명도 4분 이내에 뛴 사람이 없었는데
그 발표 후 2년 동안에 127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4분 이내로 뛰게 되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사람은 위대한 가능성을 갖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주신다.
새로운 삶에의 희망은 누구도 깰 수 없다고 믿었던
죽음의 벽을 깨고 영생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4월
1일
감사
루카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 받고 돌아갔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감사를 드렸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깨끗한 몸으로 회복된 것이 너무나 기뻤던 까닭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달려가서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얼마 후 그들이 감격이 가라앉게 되자
그제야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가 보니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였다고 한다.
감사는 감사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감사할 시기를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 매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자.
2일
그리스도인의 D-day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롬멜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1944년 6월 1일, 롬멜 장군은 독일 군대에게
프랑스 서부 해안의 경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왜냐하면 연합군에게 프랑스 상륙을 허용하게 되면
독일군이 한층 불리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기상이 악화되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프랑스 서부 해안을 덮고 있었다.
기상 상황을 본 롬멜 장군은 안개가 낀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롬멜 장군이 안심하고 자리를 비운
그 다음날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역사는 그날을 가리켜서 <디데이(D-day)>라고 부른다.
연합군이 독일을 패배시키고 세계 대전을 결정적인 승리로 바꿨던 날,
결정적인 승리가 확보된 날을 디데이라고 한다.
물론 디데이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한 뒤에도 독일은 최후의 저항을 계속했지만
마침내 독일이 패배하고 연합군이 최후로 승리했다.
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던 날은 디데이라고 안하고
<브이데이(V-day)>라고 한다.
바로 승리의 날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는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날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모든 계교를 물리치시고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새 시대를 활짝 열어놓으셨다.
그러나 아직도 사탄의 격렬한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사탄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완전히 패배하고,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바로 브이데이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디데이>와 <브이데이> 가운데 살고 있다.
우리는 성탄과 재림 사이의 긴장 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3일
기도
전 세계의 300만 어린이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있는 월드비전은
한 사람의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월드 비전을 만든 밥 피어스는 사업차 가난한 나라로 출장갔다.
거기서 어린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다
하나 둘씩 쓰러져 죽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기도했다.
그 안타까운 사정을 놓고 하느님께 매달렸다.
기도하던 중에 그는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아이들의 식량 마련을 위해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그 후 10년 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쳤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오리건 주에 한 마을 회관에서 집회를 열었다.
6.25 전쟁 때문에 생긴 한국의 고아들의 실상을 알리는
기록 영화를 보여 주고 사람들에게 도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집회에서 그 마을에 사는 한 부부가 감동을 받았다.
그 부부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은 혼자 한국에 가서 고아들을 데리고 왔다.
여덟 명의 아이들이었다.
이들의 이름은 홀트 부부다.
이들이 씨앗이 되어 시작한 고아 사업이
오늘날 세계적인 홀트 아동복지회가 된 것이다.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
창조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단순한 심리효과나 종교적 형식이 아니다.
기도는 단순히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실제적인 효용성이 있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능력의 통로다.
사람은 약하지만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일하신다.
기도는 은혜의 통로, 능력의 통로다.
4일
깨어진 거울의 비상
이란 테헤란 왕궁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은 벽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반사한다.
건축가는 이 왕궁을 처음 디자인할 때 벽에
큰 거울을 붙이려고 계획했다고 한다.
그래서 파리에 가서 큰 거울을 주문해 들여왔다.
그런데 상자를 열어 보니 거울이 온통 산산조각 나 있었다.
파리에서 테헤란까지 수송을 담당한 책임자는 왕궁의 건축가에게 사과했다. 그런데 화를 낼 줄 알았던 건축가는 뜻밖에도
깨어진 거울 조각을 모두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거울 조각을 아주 작게 부수어 일일이 벽에 붙였다.
그러자 거울 조각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자이크로 되살아났다.
그렇게 해서 깨진 거울 조각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최고의 예술가이신 하느님께서는 깨진 조각들을 모아
반짝이는 별들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당신은 가망이 없는 상태라고 말할지 몰라도,
하느님께서는 산산조각 난 당신 삶의 파편들을 사용하시어
놀랍도록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실수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결점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좌절이나 절망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다.
5일
지구 끝까지 갖고 가는 것
1907년,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E.H.Shackleton)은
남극 탐험을 목표로 첫 탐험대를 구성했다.
섀클턴에게 탐험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영국 상선 함대의 견습생 시절이던 열여섯 살 때부터
세계 여행을 시작한 노력파 탐험가였다.
그가 이번 여행에 임하는 기세는 남달랐지만,
여행이 진행될수록 상황은 비참하게 전개되었다.
영하의 날씨에 찬바람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육체는 누적된 피로로 고통스러웠고
한 걸음 한 걸음이 엄청난 노력과 집중력을 요구했다.
게다가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섀클턴과 동료들은 남극을 불과 97마일 남겨 둔 채 돌아서야 했다.
육체적 고통 위에 엄청난 심적 고통이 더해졌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귀환이나마 안전하게 하려면 짐을 줄여야 했다.
그들은 가진 것들 중에 상당 부분을 버렸다.
섀클턴은 우연히 동료들이 어떤 것들을 지니고 또 버리는지 지켜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돈이었다.
그 다음은 부족한 상황에서도 음식물이었다.
그들이 최후까지 소중하게 간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과 그들이 보낸 편지였다.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
그들을 끝까지 붙잡아 주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6일
자비
피에르 반 파센의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보우그라는 마을에 우고린이란 착한 꼽추가 살고 있었다.
우고린의 어머니는 주정뱅이여서 소랑케라는
누이의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살았다.
그의 누이 소랑케가 어느 날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석방되었으나 직장을 얻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불구인 동생이 병석에 눕게 되자
그녀는 몸을 팔아 동생의 약값을 대었다.
어느 날, 우고린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조롱을 당하게 되었다.
우고린을 넘어뜨린 그들은 춤을 추면서,
“네 누이의 연인들이 네 약값으로 각각 한 프랑씩 지불했다.”라고
조소하며 외쳤다.
그때, 그 동네의 나이 많은 신부가 와서
그들을 물러가게 하고 우고린을 구해주었다.
그 다음 날, 꼽추는 모멸감과 치욕을 참을 수 없어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그리고 그의 누이 소랑케도 동생을 뒤따르듯 총으로 자살했다.
그 늙은 신부는 “이 어린것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자비가 없는 사회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비통하게 말했다.
그들 남매의 장례식 때 많은 사람들로 성당이 꽉 찼다.
신부는 강론대에서 강론하면서 통곡했다.
“신자들이여!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심판 날
나에게 ‘네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나는 하느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두 번째로 ‘네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셔도,
나는 하느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네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들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리떼였습니다!’”
자비란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마음이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헬라어로는 엘레에모네스로서
“인자, 자비, 사랑, 불쌍히 여긴다, 가엾이 여긴다.” 등으로 번역된다.
왓슨(T.Watson)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세 가지는 하느님 품 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의좋은 세 자매이다.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은 것이라면,
자비는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은 것이다.
은혜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애정이라면,
자비는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다.”
자비는 저주받을 죄인을 저주하지 않는 것이다.
무시받을만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버림받아야 할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