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험의 의미와 목적
[3:1-4]
여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그들이 여호와의 길을 쫓아 행하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 시험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가르쳐 알게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단번에 구원하지 않으시고, 모든 대적 세력으로부터 일시에 구원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남겨두신 것은 그들을 시험하려 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 시험의 내용이라는 것은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가? 그것을 아시기 위해서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시험이라는 말이 나올 때 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과 그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 드는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데, 즉 우리가 얼만큼 견딜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또 우리의 연약함과 악함과 부패함을 다 아시는데 무엇을 또 구태여 알아 보시려고 시험하시는가? 특히 신명기 같은 곳을 보면 내가 너의 체질을 안다고 하셨다. 그 체질이라고 하는 것은 의학에서 사용하는 그런 체질이 아니고 영적인 체질을 뜻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들이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인지 아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타락과 부패성을 다 아시는데, 어떻게 될 것인지 다 아시는데 또 시험하시겠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의아스러울 수 밖에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시겠다고 할 때 그것은 대개 긍정적인 의도를 내포한 시험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체질, 믿음의 성격을 모르셔서 알아 보시기 위해 시험하신다는 뜻보다 아시기 때문에 시험하신다는 뜻으로 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실 때는 연단의 의미를 갖는다. 그와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 연단을 받게 하시는 그러한 의미의 시험인 것을 광야시대의 역사를 통해서나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일시에 멸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남겨 두셨다. 남겨두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계속 전쟁을 하도록 하셨다는 이야기다.
가나안 정복, 정착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또 역사라고 하는 것, 곧 성경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땅에 견고하게 뿌리를 박는 삶이다. 그것이 성경의 역사다. 가나안 땅이 우리에게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복된 영역이다. 그래서 신약에 오면 바로 이 땅이라고 하는 것이 성도가 받을 기업(구약에서 이 땅을 기업이라고 했다) 즉, 믿는 자가 받을 축복, 구원과 동일시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의 복된 다스림 속에 사는 삶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구약에서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나안 정복, 정착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약속의 땅, 약속하신 축복 속에 삶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그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약속의 땅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이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대적 세력을 남겨 두셔서 계속 싸우게 하심으로서 끊임없는 긴장 속에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그들을 남겨 두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로 하여금 전쟁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도 이해하기 곤란하다. 전쟁이 뭐가 좋은 것이라고 그냥 차라리 편안하게 지내게 하시면 오히려 나을 것인데 왜 전쟁이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하시는가?
그러나 전쟁을 반드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붙잡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전쟁인 것이다. 이 전쟁이 독특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무엇을 경험하게 되어 있는가 하면 교회 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있는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니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믿음이 성숙하게 되고 믿음이 더욱 확실해져 간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전쟁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훈련해 가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시험의 긍정적인 목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전쟁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들과 끓임없는 전투를 통해 악을 제거함으로써 성결한 백성의 모습을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의 표명이요, 이와 같은 과업을 교회에 맡기셨고, 교회는 이와 같은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그들 가운데서 친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어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니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견고해져 간다고 말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외적인 전쟁인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영적전쟁의 차원을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고 또한 이것은 신약의 교회가 겪을 그것을 예표, 상징하는 의미도 있겠다. 마치 이스라엘이 정복, 정착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축복 속에 더욱 뿌리를 내리는 그런 과정이었듯이 신자들도 죄와 끊임없이 싸움으로서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 축복 속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는 영적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롬 5장에서 이것을 표현하기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말씀으로 표현한다. 환난 자체가 어떻게 보면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신자를 낙담하고 절망케 하는 것이 아니고 매우 긍정적인 기능을 갖는다는 것이다. 지상교회가 편안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끊임없는 마귀의 도전과 파괴공작이 연이어 교회 안팎에서 있을 것인데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대처하면 그들과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또한 이런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연단받고 더욱 확실해져가고 믿음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렇다면 시험이 우리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긍정적인 데로 더 나은 상태로 인도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다 멸하지 않으시고 남겨 두셨다고 하는 것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그러셨다는 것은 이와 같은 뜻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대적 세력인 가나안 족속이라는 구체적인 세력들과 싸움의 방식도 칼과 창으로 싸웠으니 오늘 우리하고는 사정이 다르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물론 외형적인 차이는 분명히 있으나 그 본질은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비록 외형의 모습은 다르지만 그러한 외형적인 전쟁은 우리와 동일한 영적인 차원의 전쟁이며, 시련과 연단의 측면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믿음 없이 싸움을 할 수 없다. 그것이 외적인 전쟁이든 내적인 전쟁이든.
이런 목적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을 다 멸하지 않으시고 남겨 두시어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계속 영적인 전쟁을 수행케 하심으로 그 전쟁을 통해 연단받게 하시려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전쟁의 긴장을 견뎌내지 못하고 전쟁의사를 포기 해 버리고 그저 적당히 타협해서 공존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악을 제거하시고 교회의 영역으로 지정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의로운 나라로 거룩한 나라로 세우시려고 하는 근본적인 뜻이 좌절되게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이상 교회로서의 존재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전쟁을 포기할진대 나도 더 이상 너희의 대적을 너희 목전에서 축출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3) 첫 사사 옷니엘의 출현
이런 하나님의 선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 역사적 실례들을, 사사시대를 통해 가장 두드러진 실례들을 3:7이하에서 기술하고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타락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람 나하라임 지역(지금의 시리아북부 옛날의 하란지역,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 상류 북쪽의 하란지역) 구산 리사다임이란 왕의 손에 붙여서 18년간 압제를 받게 하신다. 그럴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일으키셔서 그들 손에서 구원하게 하시고 40년간 나라(교회)가 평안하였다고 되어있다.
그 후 옷니엘이 죽고 나니 또 이스라엘이 타락하였고 타락하니 하나님께서 진노 하셨고 그래서 이번에는 모압왕 에글론에게 붙이셨고 그럴 때 이스라엘이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에훗을 일으켜서 그들 손에서 구원하시고 80년간 교회가 평안했다.
(4) 여선지자 드보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에게 붙이셨다. 갈릴리 북쪽에 있는 강대한 나라 하솔에서 통치하는 야빈 왕에게 붙이셨고 특별히 군대장관 시스라가 하로셋에 진치고 상주하면서 이스라엘을 심히 괴롭혔고 그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어서 도저히 대적치 못할 강대한 세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즘은 철병거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당시에는 요즘의 보병들한테 탱크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때 드보라라는 여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다스리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바락이라고 하는 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하솔 왕의 손에서 특히 군대장관 시스라의 손에서 구원하도록 요청한다. 그럴때 바락이 혼자가지 못하고 드보라에게, 함께 가야만 내가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하자, “당신이 이번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고 대신 여인이 그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이 크게 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시스라가 패하고 도망하여 겐 족속 야엘이라는 여자가 있는 곳에 들어 갔는데 여자가 그를 잠들게 한 다음에 머리를 쳐서 죽이게 된다.
* 드보라의 노래
그런데 이 드보라의 사건은, 드보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케 하는 것들이 있다. 얼핏 보면 별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여선지자의 출현 그녀가 또한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던 것, 그런데 단순히 여사사가 다스렸다고 끝나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는데 남자 사사라고 할 수 있는 바락을 일으키셨는데 바락은 또 하나님께서 사명을 부여하셨다는 말씀을 듣고도 달갑게 순종하지 않는 비겁한 모습들 등 대개 이 정도만 눈에 띄는데 그러나 자세히 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뭔가 있다고 하는 느낌을 주게된다. 즉 이런 간단한 서술이 무엇을 배경으로 하는가? 이 간단한 서술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드보라의 노래라는 것이다. 노래라고 하면 대개 별내용은 없고 그냥 노래다 싶어서 슬쩍 지나가는데 그러나 그 속에는 드보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그것이 어떤 시대적 영적상황을 배경으로 되어진 일인가를 우리에게 알게 해 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