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없는 請牒狀
남이 들으면 곰상스럽다고 비웃을는지 모르지만 요즘 같아서는 우편함 속을 들여다보기도 겁이 난다. 겉봉에 발신인의 이름도 없는 “알리는 말씀”이 그야말로 늦가을의 낙엽처럼 연달아서 날아 들어오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기는 요즘의 청첩장 공세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이 적합할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중학교 4학년 때던가 우리 교지(校誌)에 이모(李某)라는 친구가 글을 하나 실은 일이 있었는데, 그 글이 시정(詩情)이 넘쳐서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황성(荒城)의 담쟁이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가을이 온 것까……‘ 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그때는 일제 말기의 우리 어문말살정책(語文抹殺政策)이 한창이던 때여서 그 글도 물론 일어(日語)로 적은 것이었는데, 같은 반의 C군은 그 서두의 구절이 마음에 든다고 몇 번이나 흥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 당시 ‘황성(荒城)’이란 어휘는 나라 잃은 설음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었는데, C군도 그런데서 어떤 감회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는 뒷날 시단(詩壇)에 올라서 이름을 날린 사람인데 요즘같이 정서가 메마른 물질만능의 세태에서도 과연 그런 감상적(感傷的)인 글을 멋있다고 흥얼거릴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의심스럽다. 그보다는 아마 ‘우편함에 청첩장이 쌓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가을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이 더 실감이 날는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시정(詩情) 속에서 가을을 느꼈었는데 이제는 청첩장 속에서 가을을 느낀다고나 할까?
요즘은 ‘좌우간(左右間) 내고 보자’는 속셈인지 청첩장을 너무 헤프게 내돌리는 느낌이 없지도 않다. 이제는 웬만한 청첩장은 중로 네거리에서 한인들에게 뿌리는 양복 할인권처럼 덤덤한 터이지만, 일단 받고 나면 떠름한 것이 청첩장의 속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발신인은 그 속성을 노리는지 모르지만 청첩장이 확실히 하나의 공해물질(公害物質)(?)로 등장한 느낌이 든다.
가까운 집안이나 친구 사이에서 애경사에 상부상조하는 풍습을 책망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어떤 속담처럼 ‘베푸는 일에는 마음이 없고 받는 일에 만 마음이 있다’는 투로 염치없이 연거푸 청첩장 공세를 취할 때는 입맛이 씁쓸하다. 체면을 차릴만한 사람까지도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 식으로 ‘알리는 말씀’을 남발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흥부 형님 심사를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give and take’를 ‘take and take’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청첩장 남발이 원인이겠지만 요즘의 결혼식장은 대개 장마당을 방불케 할 정도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개탄할 일인지 아니면 감탄할 일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언젠가는 예식장의 좌석을 50석 이내로 제한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동안 대형 예식장들이 속속 불어난 것을 보면 그 제한도 다시 ‘도로무익’이 된 듯하다. ‘이식위천(以食爲天)이라서일까? 한 때 금지되었던 하객에 대한 음식 접대도 단속이 느슨해졌는지 예식장 주변의 식당들은 톡톡히 재미를 보는 것 같다. 대개 ‘탕’을 한 그릇씩 안겨 주는데 지난날 결혼식하면 국수, 국수하면 결혼식으로 새겨듣던 시절은 이제는 옛이야기가 된 듯하다. 그건 그렇고 요즘의 잔치는 말이 피로연(披露宴)이지 밀고 밀치는 황망한 분위기에서는 식곤증이 아니더라도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피로연(披露宴)보다는 피로연(疲勞宴)이 더 적절한 표현일는지도 모른다. 식장이나 식당이나 소란에서 시작해서 소란으로 끝나는 것이 요즘의 결혼식 풍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날의 애경사가 조촐하고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치루어졌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묵은 기록을 보면 혼례나 수연(壽筵)같은 경사의 축의에는 백면(白麵), 색병(色餠), 청주(淸酒), 두채(豆菜 콩나물) 등을 부조했고, 부의는 백지(白紙), 황촉(黃燭), 탁주(濁酒), 팥죽(豆粥) 등인데, 그 품목들을 보면 축, 부의가 모두 순수한 정표(情表)임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 청첩장이 고지서라는 달갑지 않은 누명을 쓰게 되었고 하레차 결혼식에 참례하는 것을 숫제 ‘봉투 내러 간다’느니 심지어는 ‘세금 내러 간다’ 는 삭막한 말로 표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혼잡한 예식장에서는 실상 봉투를 올바르게 내는 일조차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축의와 부의 봉투를 함께 넣고 다니다가 헷갈려서 바꿔 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임기 중에 자세(藉勢)가 지나쳤던 상사가 재임명에서 탈락하자 어떤 험구가(險口家)가 ‘축 탈락’ 이라는 축전(祝電)(?)을 쳤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지만, 결혼 축하에 ‘근조(謹弔)’는 본의 아니게 그보다 더 지독한 험구를 한 셈이다. 이 멍청한 실수가 사실인지 아니면 혼잡한 결혼식장을 풍자하기 위해서 누가 그럴 듯하게 꾸며낸 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신랑 측과 신부 측을 혼동 하거나 아니면 남의 다리 긁는 격으로 전연 엉뚱하게 다른 접수처에 봉투를 들이 밀어서 빛을 못 보는 축의금도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지난여름에 나의 안사람은 서울의 어떤 번화한 예식장에서 야바위꾼에게 축의를 모조리 털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의 ‘봉투'’까지 여러 장 맡아 가지고 올라간 터였는데 접수처를 찾느라고 기웃거리는 촌아줌마가 만만하게 보인 듯하다. 그보다 앞서서 나는 축의 대신 빈 봉투만 보내는 실수를 저지른 일이 있어서 이 아줌마에게 별로 큰소리를 칠 입장이 못 되었었다.
두 경우가 다 혼주 측에서 조심스럽게 귀띔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일을 까마득하게 모를 뻔 했다. 나의 경우는 한 봉투에 두 장의 수표를 넣고 하나는 빈 봉투만 보낸 사환의 어이없는 실수로 밝혀졌지만, 잠시나마 우체국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속단 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 내외가 겪은 두 번의 경험에 비추어서 부좃돈을 낼 때는 언제나 나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불조심 표어’를 회상하면서 봉투 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접수처에서도 되도록 자신이 낸 축의금의 향방을 확인하고 자리를 뜬다.
계절탓이라고는 하지만 요즘 같아서는 주말은 숫제 예식장 순례로 고역을 치르기가 일쑤다. 더구나 다른 지방까지 출장하례라도 나가는 날은 일요일 하루를 송두리째 빼앗겨서 그야말로(失曜日)이 되는 셈인데, 토요일은 고요일(苦曜日), 일요일은 혼요일(婚曜日)이라고 체념을 해 버린다. 결혼식이 아니더라도 가을에는 유독 청첩장을 받을 일들이 많이 생긴다. 회갑을 비롯해서 전시회, 발표회, 개업식, 집들이, 동창회, 친목회, 제막식, 시상식 등에 이르기까지 종목도 다양한데 전화나 인편의 기별까지 합치면 우리는 마치 유형무형의 청첩장 속에 묻혀 사는 느낌이다. 이글이 그동안 나에게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적지 않게 부담을 준 사람들에게 다소나마 푸념이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고소름하다. 하여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청첩장 투정까지 하면서 살고 있는 내가 우습기만 한데 아무래도 빼놓고 넘어갈 수없는 청첩장이 또 한 장 남아있다. 하나님의 청첩장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누구나 다 날짜 없는 하나님의 청첩장을 한 장씩 받아놓고 있으면서도 저 세상으로 떠나는 일을 까맣게 잊고 불공평(不公平)한 세상을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있다. 그 불공평을 어떤 성직자는 이렇게 말한다. “현세는 내세를 위한 준비기간이며 인간의 선, 악에 대한 보상은 두 세계에 걸쳐서 지공무사(至公無私)하게 베풀어진다” 라고.
오랜 냉담(冷淡) 속에서 헤매고 있는 주제에 내가 그 깊은 교리의 뜻을 안다고 장담할 자신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보상도한 해의 추위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해 볼 뿐이다. 초겨울에 따뜻하면 다음해 늦겨울이 더 춥고, 초겨울에 일찍 추위가 오면 다음해는 일찍 추위가 풀리는 것과 같은.
정말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지극히 간단한 것인지 아니면 지극히 복잡한 것인지 생각할수록 어려워지는 ‘날짜 없는 청첩장‘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가을은 회귀(回歸)의 계절(季節)이라고 하는데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만추(晩秋)의 소슬한 풍경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고 있다. 봄이 오면 움이 트는 나무처럼 사람도 정말 내세(來世)를 잉태(孕胎)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하고.
(오늘의 文學,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