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11-2편]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다.(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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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삶의 간단한 역사 -
세상 속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상태로 회귀하는 것 >
그러니까 현(나타날 현 現), 은(숨을 隱)할 때 나타났다가,
나타났다 이 말은 공즉시색, 또 돌아간다 이 말은 색즉시공,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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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장과 수축은 우주의 보편적인 두 가지 운동이다
우리는 그것을 밖으로 나감과 집으로 돌아옴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두 가지 운동은 심장의 끊임없는 팽창과 수축, 호흡의 들숨과 날숨처럼
우주 전체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되고 있다.
그 운동은 잠과 깨어남의 순환 속에서도 반영된다.
매일 밤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의 상태로 들어갈 때
당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지 않는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며 그런 후에 아침이 되면 기운을 보충해 다시 나타난다. >
그러니까 잠에 푹 들어버리면 본질로 돌아가 있다, 이 말이죠.
그때는 이제 소켓을 충전하는 것 같아서 발전기에 딱 이렇게 꼽아 가지고
충전해서 나온다. 아침에 다시 의식이 깨면 이렇게 돌아나온다.
그러면 만약에 요 충전하는 법을 밤에만 하지 않고 낮에도 하는 법을 안다면
항상 건전지가 만땅이겠죠. 그렇지 않나요?
대게 에너지 고갈 때문에 병도 들고 뭐 하는데 항상 접촉해 있는 법을 안다면
항상 접촉해 있는 법은 여러분, 지금 우리가 접촉해 있어요, 없어요?
이제는 말을 빨리 대답을 하셔야 해요. 여러분 항상 접촉해 있어요, 없어요?(있어요.)
그지요. 희한하지요? 이미 있지요.
우리가 접촉을 안 할 수가 없지요, 역설적으로.
그러니까 요거를 자각하면 이걸 자각하면 항상 있다 이거예요.
항상 접속해 있다, 항상 접속해 있다, 그럼 걱정할 거 없잖아요?
아, 이거 참 맞는 말인데 왜 이 반응이 뜻뜨미지근한지 모르겠네~.
"아, 정말 그렇네요." 해야죠.
항상 이러고 있어요, 접속해 있어요 여기에.
근데 여기다가 또 접속한다 이러면 옥상옥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거예요.
깨달아라 이거예요.
깨달아라, 깨달아라. 그래서 이거를 두고 다시 이거를 찾으러 가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의 절정인 거에요. 이거를 두고.
접속해 있는데, 여러분 지금 거기에 앉아 있어요, 딴데 가서 앉아 있어요?
거기에 앉아 있잖아요.
구원 됐네. 거기가 바로 에덴동산이고, 하늘나라고, 극락정토고 그렇잖아요.
이미 앉아 있잖아요. 근데 이거를 깨닫는 거다 이거예요.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 이미 되어 있으니까.
요거를 깨닫는 거다. 이걸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쉬워져요.
이걸 찾으러 다니던, 이것을 찾아 온 사방팔방 다니던 것이 그때부터 쉬워진다.
그래서 깨달아야 쉬워져요. 어떻게 깨닫는 건가?
이렇게 간단한 말 한마디 듣고도 깨닫는다.
이미 지금 접속해 있죠, 그렇지 않나요?
아무리 해도, 손오공이 아무리 날뛰어도, 근두운 타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우리가 이미 본질의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다.
그러면 할 일이 없지요. 쉬워진다.
쉴수록 힘은 붙는다. 힘을 뺄수록 힘은 더 붙는다.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다.
생력처, 힘을 빼는 것이 득력처, 힘을 얻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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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테니스, 수영, 골프, 운동해 본 사람들은 아시겠죠?
어깨 힘 빼는 것이 온 몸에 딱, 힘이 바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어깨 힘 뺄수록 더 유연하고 더 강한 힘이 나오죠.
언제, 언제 힘을 뺄 수 있는가?
여러분, 인간은 인간의 그리움은 언제 그쳐요?
인간의 그리움은, 그리움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다 지금 보세요.
그리움 석 자야. 두 자로 그리움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그리고 글을 만나게 돼.ㅎㅎ
그러면 여러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죠? 그리움이 사라지죠.
그러니까 여기에 지금 결국은 저는 그렇더라고요.
이걸 본질을 만나기 전에는 쉬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런데 알고봤더니 처음부터 만나져 있었더라.
그때부터 쉬워진다. 그를 만났다 이거예요.
그리움이 이루어져 가지고 그가 되어 가지고 함께 사는 거야.
늘 함께 사는 거야.
아침에 눈 떠서 확인하고 중간에 한 번 확인하고 잘 때 한 번 확인하고
아 이거 항상 항상 아니 이제 헤어지고 싶어도 헤어질 수가 없네.
여러분, 어떤 인간 관계가 이보다 진실된 영향력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참, 인간한테 많이 실망하지요?
자식이라고 놓아가지고 그렇게 길러봤자 속 썩이고
모든 인간관계는 변덕이에요. 현상의 법칙은 변덕이에요.
근데 영원히 진실된 것은 나의 본질과의 관계,
본질과의 관계, 지금도 같이 있지 않나요?
같이 있잖아요. 지금 같이 있잖아요.
영원히 같이 있어요. 이것이 구원의 소식이에요.
자, 그래서 확실히 돌아가서 하나가 되는 것은 잠에 푹 빠질 때
현상이 쉬워지니까 의식이 쉬니까, 의식이 쉬니까 본질로 돌아가서
만땅 채운 다음에 아침에 또 눈 떠서 활발하게 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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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걸 이제 그래서 대부분 보면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은
잠을 못 자는 거에요.
잠을 못 자는 거~, 혹시 이 중에 잠을 못 자 가지고 좀 컨디션이
안 좋다 하는 분은 운동하세요. 운동하면 바로 곯아 떨어지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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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개인의 삶 - 실제로는 모든 생명의 형태
개인의 삶 실제로 모든 생명의 형태는 우주가 그 자신을 경험하는
독특한 방식인 하나의 세계이다. >
이 말은 뭐냐면, 여러분 보세요.
지금 내가 나는 내가 산다 그러죠.
실제로는 우주 생명이 나를 통해서 사는 것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우주생명은 나를 통해서 인생이란 걸 경험하고 있어요. 오케이?
그래서 우주생명인 차원에서는 나는 아바타고 그리고
우주생명은 나를 통해서 게임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죽어도 걔는 안 죽으니까 마음대로 게임을 하는 거에요.
오 만 케이스를 다 만들어 놓고 오 만 가지 경험을 다 하고 있어.
맞나요? 자 그러면, 그 많은 우리 게임에서 여러분,
우리 이 게임이라면 인간의 인생이 게임이라면 실제로는 본질이
우리 게임 속에 있는 캐릭터, 그러니까 우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통해서 지금 본질이 게임을 하는 거라면
이 게임에 하나의 공통 법칙은 뭐냐면, 고통입니다.
이 인간이라고 하는 캐릭터의 공통 법칙은 고통이에요.
그러면 문제는 왜 고통이라고 하는 게임을 만들어 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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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왜 고통이라는 게임을 만들어 놨을까.
자기를 찾으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도 할 수 있어.
그런데 고통의 의미가 있다 이거예요.
고통의 의미는 많은 분들이 결론을 낼 때는 철들라고 고통이 있다.
근데 그 철들은 내용이 본질로 돌아오는 것.
철들은 내용이 본질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본질로 돌아오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
철드는 것이 또 다른 내용은, 정말로 우리들은 콧대가 높아서
인간 개인 개인은 콧대가 높아 가지고 정말 남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거에요.
돌아보면 그 말도 좀 맞는 말 같아요.
여러분 혹시 사랑할 줄 아세요?
아, 어렵지요. 갑자기 그냥 어렵지 않나요?
당신 사랑할 줄 아세요? 어렵지 않나요? 자기밖에 모르지 않나요?
거의 인생을 자기밖에 모르고 산다. 이 말도 실감나지 않나요?
얼마나 인생이 메마른가.
그러니까 이 지금 우리가 게임 속인데 이 게임의 법칙은 고통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왜 고통을 왜 고통을 겪게 할까. 왜 이 고통을 겪게 할까.
우리는 철들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 철들게 한다는, 철이 든다는 내용은 무엇일까.
우리가 커지는 거죠. 성숙하고 인간이 커지는 거죠.
인간이 커지는 것의 핵심은 사실은 사랑이고 그리고 이렇게
본질을 깨달아서 본질처럼 커지는, 마하가 되는, 이제 그 대목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 하면 내가 커집니까?" 할 때도
그것도 사랑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많은 경전에서 자비나 또 사랑이나 이런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성숙해 지라는 것,
그러니까 성숙한 인간한테는 사랑이라는 것이 흘러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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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주생명의 본질은 사랑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주 본질의 어떤 그 특징이 사랑, 사랑이라는 거죠.
답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 본질이 이 세상에 나를 통해서 나온다.
여러분, 우주의 우주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나를 통해서 나온다.
신나는 일 아닌가요? 이걸 깨닫게 되면.
그리고 실천의 일이 남아 있죠.
그런데 그 사랑이 사랑의 이름으로 남을 괴롭히면 안 되고
제일 좋은 사랑은 역시 그 사람이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고통의 의미를, 그러니까 고통을 피할 게 아니고
고통을 수용을 해서 그 의미를 찾아야 돼요.
그러면 아, 나를 성숙하게 해주기 위해서 고통이 있구나.
그래서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만약에 사랑을 깨달을 때
우주생명이 박수 칠까요 안 칠까요? 박수 치겠지요.
예, 하여튼 그런 자각이 우리한테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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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개인의 삶 - 실제로는 모든 생명 형태는 우주가 그 자신을
경험하는 독특한 방식인 하나의 세계이다.
당신의 형상이 소멸될 때 셀 수 없이 많은 세계 중에 하나인
세계도 종말을 맞는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내가 있으면 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상이에요.
그러면 인구가 70억이 있으면 70억 인구의 세상이고,
또 개미한테는 개미 세상이고, 강아지한테는 강아지 세상이고
수없이 많은 세상이 중첩되어 있죠.
이 말, 이해되세요? 저는 그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참 이해가 안 됐는데
이 말 듣고 쉽게 이해됐어요.
여러분, 지금 이 공간이 있죠?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공간,
요거 지금 인간으로서는 인간으로서 이 공간을 느끼죠? 인식하지요? 그렇죠? 오케이.
자, 그런데 만약에 여기 그 인공 청소기, 자동 로봇 청소기 한 대를 넣어 가지고
한 번 스위치를 누르면 내가 다니면서 다 인식한다면서요, 공간을.
여기는 막혔구나. 여기서 몇 발자국 여기서 막혔다, 옆으로 가 가지고
해서 이 공간을 로봇 청소기가 인식하겠죠? 맞나요?
그러면 하나의 공간인데 인간이 인식하는 공간이 있고,
로봇 청소기라고 인식하는 공간이 있죠.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하는 공간 외에 로봇 청소기한테 인식되는
이 공간은 메타버스라고 한다는 거에요.
로봇 청소기의 공간, 로봇 청소기의 세계, 그러면 컴퓨터나 이런 기계를
만들어 가지고 노동 시키면 컴퓨터마다 다르겠죠.
그런 식으로 메타버스에 하나의 공간이지만 그 인식하는 기기에 따라서는
다양하게 이것이 인식되므로 달라진다, 이 말도 이해되세요?
그러면 우리한테는 인간마다 또 다르겠지만 강아지, 고양이, 벌레,
하여튼 모든 생명체가 인식하는 공간이 다르겠지요?
한 인간이 죽으면 그 수많은 공간 중에 하나가 죽는 거다,
이거예요.
그런데 또 뒤집어 말하면 내가 똑바로 깨어서 살면,
깨어서 인식하는 공간을 산다면 진정한 우주가 인식하는 공간이 나오겠죠.
우주랑 통하면,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매체는 참 좀 특별한 매체에요.
인간이라고 하는 이 미디어는, 이 매체는 좀 특별한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특별한가? 영성하고 통해 있어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신령스러워요.
호호법당(好好法堂)에 불무영험(佛無靈驗)하다.
좋고 좋은 법당에, 몸이 법당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간단한 이야기인데 어느 제자가 스승 밑에서 공부하다가,
경을 공부하다가 이 스승 밑에서 화엄경까지 다 뗐는데,
경은 다 읽었는데 깨달음이 안 와.
그래서 이제는 잠시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나가서
다른 스님한테, 선사한테 가서 깨닫고 돌아왔어요.
깨닫고 돌아오니까 자기 스승은 여전히 경을 이렇게 읽고 계신 거에요.
그래서 이제 역할을 맡은 게 뭐냐면 목욕탕 따라 들어가서 시좌를 맡았는데
목욕탕 따라 들어가서 등을 밀어드리는 일을 이제 제자가 하는 거에요.
그런데 제자는 깨달았고 나가서 백장스님한테서 깨닫고 와가지고 자기 스승,
여러분 깨닫고 온 제자가 자기 스승이 아직 못 깨달았으면 이 스승을
깨닫게 해주고 싶겠어요, 아니면 내버려둘 것 같아요? 깨닫게 해주고 싶겠지요.
그래 가지고 기회를 노리다가 목욕탕에서 이제 등을 미는데 이분이
덩치가 좋았나 봐 스승이, 그래서 등을 밀어드리면서 뒤에서 하는 소리가
호호 법당에, 좋고 좋은 법당에 몸은 좋아 가지고 호호법당에 불무영험하도다.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ㅎㅎ
법당은 좋은데 법당에 앉아 있는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경을 가르치는 스승이니까 무슨 말인가를 알아듣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무슨 소리 하고 있지?' 하고 돌아봐요.
그랬더니 또 하는 소리가 "영험 없는 부처가 야능방광(也能放光)을 하는구나."
또 반응은 잘 한다 이거예요. 유명한 이야기에요.
호호법당에 불무영험이라. 돌아보니까 영험 없는 부처가 방광을 하는구나.
방광할 줄 아는구나. 이제 그렇게 한 거에요.
그래서 이제 그분이 뭔가 느낀 바가 있어.
그래서 그 다음에 또 이 분이 경을 읽고 있는데 문풍지 사이로,
열린 문풍지 사이로 벌이 들어와 가지고 빙 돌다가 나가려고 하면
문풍지에 부닥치면 소리가 부르르 나지요.
그렇죠. 부르르 부르르 나니까 그걸 보고, 스승은 앉아서 경을 보고 있고
벌은 종이를 뚫고 있고, 그래서 하는 소리가
저 벌이 들어온 대로 나가면 그만일 것을 애꿎게 종이만 뚫고 앉아 있구나.
이게 뭐예요?
경을 읽고 있는 스승이 마치 벌이 문풍지만 부르릉 부르릉 하는 것처럼,
경이 같은 재료잖아요. 문풍지나 종이나 같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경을 읽는 거나 그걸 못 뚫는 거나,
이 벌이 저것을 못 뚫는 것이 같다 이거예요.
근데 그 시에서 뭐라고 했냐면 공문출(空門出), 비어 있는 문으로 나가면
그만인 거에요. 그 벌이 못 나가면 죽어요.
이 벌이 나가면 자기 또 나머지 인생을 다 살 텐데
비어 있는 문으로 나가면 될 것을. 이때 비어 있는 문이 뭐예요?
이거잖아요. 지금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리 나가면 금방 자기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이것을 못 나가서 괜히 애꿎은 옛 종이만 뚫고 앉았구나.
그 말 신랄하지 않나요?
그래 가지고 거기서 이제 스승이 알아차린 거에요.
그래서 제자한테 "너 어디서 무엇을 배웠길래 이런 소리를 하느냐?"
"제가 백장 선생님한테 가서 이렇게 공부를 하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종을 치게 해 가지고 전 대중을 다 모이게 하고, 자기가 제일 앞에
딱 앉고 이 제자를 법상에 올려 가지고 그래서 설법을 들었다는 거에요.
그 설법 듣고 깨달았다는 거에요. 유명한 이야기에요.
계현(戒賢)법사라고 해요. 계현법사가 깨달은 그 인연이 자기 스승한테서~.
그래서 여러분 만약에 한국의 절에 비구니나 비구나 할 것 없어요.
자기가 아직 못 깨달았어. 근데 자기 제자가 선방에 지금 안거 들어간다 그래요.
그러면 얼른 가서, "얼른 돌아와서 내 등을 밀어다오."
그래요, 스승이, 아시겠어요?
스승 입장에서는 '아, 내가 못 깨닫는 것을 네가 가서 깨닫고 와서 나를 깨닫게 해달라.'
그 말을 "얼른 돌아와서 내 등을 밀어다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참 아름다운 이야기죠.
21:15
그러니까 지금 다 이제 이런 말, 소화가 되지 않나요? 이거예요, 이거.
지금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이리로 나가면 그만인 것을.
이리로 나가면 되는데 저리로 나가 헤매느라고 지금 애꿎은 문풍지만,
문만 종이만 뚫고 있다, 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21:49
< 깨어남과 회귀 운동 - 한 개인의 삶에서 회귀 운동이 일어날 때는
즉 늙음과 질병, 심신의 장애 상실 개인적인 비극 등을 통해 형상이 약해진다. >
형상은 외부의 목적이죠.
그 외부의 목적은 나이 들수록 약해져요.
그리고 < 소멸될 때는 영적인 깨어남의 기회가 찾아온다.>
영적인 깨어남은 내면의 목적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외부의 목적이 약해질수록 내면의 목적이
깨어날 확률이 높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실제로 여러분, 귀신 같이 안다,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귀신은 우리의 지금 깨어 있는 이 영혼이 몸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귀신이잖아요.
몸을 벗어나면 더 예민해져 가지고 몸을 가졌을 때보다 9배 더 잘 안 대요.
영리해진 대요. 귀신이 귀신같이 안다, 이 말은 몸을 벗어나는 순간
9배로 그 알아채는 힘이 강해진다는 거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그 순간에 소위 말하는 49제,
설법 연가 설법이라는 게 있잖아요.
연가 설법을 귀신은 몸을 가질 때보다 훨씬 더 잘 알아듣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연가설법이 모든 설법 중에서 가장 엑기스를 모아 놓은 거에요.
그래서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23:22
자 그러면, 우리는 영가 아닌가요? 몸 가진 영가야.
그분들은 몸을 벗어난 영가, 귀신은 몸 벗은 영가고 우리는 지금 몸을 가진 영가죠.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 공부를 통해서 한 번 깨어나게 되면
귀신보다도 더 똑똑해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그런 우리가 찬스에 와 있는 거에요.
그래서 < 영적인 깨어남의 기회가 찾아온다.
의식이 형상과의 동일하에서 벗어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형상과 동일화한다. 집나간 상태에서 살다가 집으로 돌아갈 찬스다.
근데 요 찬스를 못 살리면 어떻게 되느냐?
이제 그냥 전통에서는 다시 또 다른 몸을 또 자기인 줄 알고 또 다른 몸으로 붙어 버린다.
그게 이제 환생해 가지고 또 윤회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하여튼 요 죽은 그 순간에 중요하게 여긴다.
그 순간에 훨씬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25:12
< 일어나서는 안되는 시점에 외부로 향하는 운동이 방해 받으면 >
다시 말하면, 이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든지 어떤 극심한 암에 걸려 가지고
갑자기 뭐 큰 병에 걸렸던지 이렇게 자기 현상이 갑자기 위축 당할 때,
근데 이상하게도 그때가 본질이 또 깨어날 찬스라는 거에요.
보통 사람은 현상이 위축 당할 때 그냥 완전히 넋을 놓아버리는데
드물게도 어떤 사람은 그때 깨어난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 아는 톨레가 지금 그런 사람이에요.
톨레나 바이런 케이트 같은 사람은 형상이 위축될 때 오히려 본질이
깨어나는 찬스를 맞은 사람들이다.
< 그것이 잠재적으로 일찍 영적인 깨어남을 가져올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데도 일어나는 일은 없다. >
모든 것이 다 이유가 있어서 톱니바퀴처럼 되어 있어요. 말하자면
< 더 큰 전체의 일부가 아닌 것, 그 목적의 일부가 아닌 것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 신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에요. 절대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무를 수 없어요.
< 일어나는 것은 일어날만 하니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목적에 파괴와 중단, >
다시 말하면 역할 노릇으로서의 그 어떤 뜻이 있잖아요?
존재의 목적, 내가 사람 노릇하는 존재 목적, 그것의 중단은
< 내면적인 목적의 발견으로 이어지며 그 후에 내면적인 목적에 일치하는
그 심오한 외부적인 목적에 나타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기존의 그 자기 삶의 외부적인 삶의 목적이 좌절당하면서
내면의 존재의 목적이 뛰어나고 그러면 그 사람이 회복할 때 역설적으로
이제 깨어난 그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나머지 생을 살게 된다.
이 말 이해되세요? 저는 제가 아는 하여튼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이셨던
김호 선생님께서 늘 하는 이야기가 당신이 어느 날 당신 스승인
다석 유형모 선생님한테 "나 다음 주 내가 죽으니까 장례 치르러 오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거에요. 얼마나 황당했는지 몰랐다는 거에요.
"내가 하여튼 다음 주에 내가 죽으니까 와서 내 장례를 치러 주게."
그런 말 들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제 눈앞이 깜깜하더래요.
선생님 없는 삶은, 여러분 그런 거 있잖아요. 선생님 있으면 뭐가 좋으냐면
내가 무슨 일을 해도 그때 배운 거 가지고 써먹을 수가 있어.
아마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이 수업 듣는 여러분은 일주일마다 오시는 이유가
한 번 들어 놓으면 이걸 가지고 일주일 동안 양식으로 삼아서 다 쓰다가
또 떨어질 때 쯤 되면 오셔서 강의 듣고 그렇죠? 그죠. 저도 그래요.
저도 옛날에 강의할 때는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강의 듣고 그거 가지고
내 식으로 풀어 가지고 강의하고 그랬어요.
그런 게 오랫동안 쌓여 가지고 지금 오늘날에 선생님은 돌아가셔도 지금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누구나 그런 과정이 있지요, 그죠?
그래 가지고 그 선생님이 돌아가신다, 이러면 덜컥 겁이 나는 거에요.
이제 나는 어쩌라고?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일용할 양식이 사라지니까.
그래서 이 선생님이 그렇게 덜컥 했대요. 그래서 그날 그날 되어 가지고
스승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서 정말 실망감만 가득한 상태로,
선생님이 거짓말 할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올라가다가 보니까 내려오는
사람하고 딱 만났대요. 여기 부암동 고개에서.
다석 유형모 선생님이 구기동에 살았거든요.
일요일마다 여기 YMCA 종로 2가에, YMCA에서 그 강의했어요
다석 유형모가 강의할 때는 얼마나 사람이 안 왔으면 어느 날은 한 사람,
어느 날은 반 사람, 얼굴만 비치고 가면 반사람, 그러니까 한 두 사람밖에 없어 가지고.
그런 위인이 그렇게 강의를 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그렇게 안 갔어요.
그래서 김호 선생님 이야기가 할 수 없이 함석헌 선생님하고 자기 하고 두 사람이
약속을 해 가지고 둘 중 한 명은 꼭 가자, 날을 정해놓고 교대로 꼭 참석했다고.
아니 선생님이 일주일 내내 준비해서 왔는데 아무도 없다 이거에요.
그래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 가는 날도 있었다. 참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가까운 우리 시대에.
아무튼 그래서 그랬는데 스승이 내려오는 거에요, 안 죽고.
그래 가지고 "아니 선생님, 안 돌아가셨습니까."
"내가 죽는다는 것은 에고가 죽는 거지
내 몸이 죽는 걸 말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그때부터 이제 죽고 사는 사람이 됐대요, 다석은.
다석은 당겨서 죽은 사람, 다석의 필명 중에 하나가 당겨서 죽은 사람.
여러분, 당겨서 죽었다 이 말은 지금 여기 처음 태어났을 때의 외부적인 목적,
아버지 노릇, 무슨 노릇, 뭐 사회인으로서 무슨 직장에서 과장 노릇 이런 걸 하다가
당겨서 죽었다 이 말은 이제 외부적인 목적은 내려놓았다.
그리고 당겨서 죽어서 이제 내부적인 목적의 사람으로 부활해서,
부활해서 그때부터는 부활한 인격체가 살아가는 것,
이것은 이제 충실하게 내면의 목적을, 내면의 목적으로 일치시켜 가지고
드러내는 삶을 산 사람, 별난 사람이긴 해요.
그래서 그때 뭐예요, 장례식도 치렀고요. 자기 부인하고 해혼식도 했어요.
결혼했으니까 해혼하자 해 가지고 그것도 각방 썼대요.
각방 쓰면서 해혼식을 했다는 거에요. 좀 특이한 분은 특이한 분이에요.
어쨌든 간에 이런 말들이 무슨 말인가 이해되잖아요.
그러니까 이분도 워낙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아예 선포를 하고 했다는 거에요.
선포를 하면 실천을 잘 하겠죠, 그죠? 그것도 이해되잖아요.
그러니까 좀 별난 분은 별난 분인데 그만큼 의지를, 강직한 의지를 한 번 드러낸 거지요.
그런 말을 저는 이제 기억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쉽게 이해돼요.
처음 타고난 외부적인 목적만 가지고 살다가 내면의 목적을 발견할 때는
외부적인 목적을 가진 인간은 한 번 죽는다.
그리고 내부적인 내면의 목적을 가진 인간이 부활을 해서 그때부터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서 본질이 드러나게 하는 삶을 산다.
그게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이 일치하는 삶을 사는 거다.
이 말 이해되지요? 우리들도 뭐 당장 못하더라도 참고 삼아서
이런 일이 있구나 하고 알면 좋습니다.
32:59
< 큰 고통을 경험한 아이들은 종종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젊은이로 성장한다.
형상 차원에서의 잃음은 본질 차원에서는 얻음이다. >
이 말도 참 좋네요, 그죠?
생력처가 능력처다.
형상 차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은 본질 차원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 고대 문명과 전설에 등장하는 눈 먼 예언자와 상처 입은 치료사 같은
전통적인 인물을 보면 형상 차원에서의 크나큰 상실이나 장애가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눈 먼 예언자는 서양에서 굉장히 중요한 상징이에요.
모든 예언자는 눈이 멀었다는 거에요.
눈이 멀었다는 것이 뭐에요?
형상으로부터 벗어나서 본질을 본다.
그것을 상징하는 거에요, 눈 먼 예언자.
제가 문학에서 전공했던 보르헤스가 눈이 멀었거든요.
근데 정말로 예지력이 넘치는 말을, 오래된 소설은,
보르헤스 시는 굉장히 짜릿짜릿해요.
그래 가지고 사람들이 눈먼 예언자라고 불렀어요.
실제로 보르헤스가 컴퓨터나 이런 사이버 세계를 예언해 놨거든요, 문학에서.
그러니까 보르헤스는 체험한 거야. 돈오를 체험한 거에요. 29살에.
뭐라고 표현하냐면, 돈오의 순간을 뭐라고 했냐면
"어, 어떻게 된 것인가. 1929년, 28년이라고 합시다.
1928년이면 29살 먹었으면 1899년쯤 태어났죠, 그죠.
자기가 29살의 어느 날 산책하다가 정신 차리니까 19세기로 돌아가 있는 거에요.
이 말은 30년 전을 거슬러서 자기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갔다 하는 거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냐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이런 말이 자기한테서 흘러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살면서 문득 시간이 끊어져 버리고
시간이 없는 어떤 공간의 세계, 시간이 흐르지 않는 시간이 끊어진
공간의 세계를 체험한다는 거죠.
그때 자기 느낌을 뭐라고 했냐면 덧없는 이 세상에 대한 관찰자가 되어서
그리고 죽음을 목격하고 덧없는 관찰자가 되어서 이 세상을 보는 느낌,
그걸 가지고 문학을 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뜻밖에 모든 이런 상식이 깨지는
그런 소설을 써서 굉장히 유명해요.
그래서 보르헤스를 눈 먼 예언자라고 불러요. 그래서 참
그런 이런 경험한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많이 비유를 해서 말을 합니다.
36:15
< 모든 형상의 불안정한 본성을 직접 경험하면 다시는 형상을
과대평가하지 않게 되고 맹목적으로 형상을 추구하거나 형상에 집착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
요 대목이 여러분, 요 대목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을까.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을 빼앗는 것이, 여러분 우리 마음을 빼앗는 것이
본질이 빼앗아요, 형상이 빼앗아요? 형상이 빼앗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을 빼앗는 그 형상이, 우리 마음 빼앗는 것은 간단해요.
돈, 남녀, 명예, 요 세 가지예요.
근데 요 세 가지가 현상에 속하잖아요, 다.
요것이 정말로 현상에 속하고 모든 형상은, 현상은 그대로 형상이니까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은 생겼다가 사라지는 이런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정말로 한 번 실감한다면 그러면 거기에 대한 집착이
저절로 떨어진다 이거예요.
집착이 떨어진다 이 말은 우리 마음이 더 이상 뺏기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참 그런 거 있잖아요.
멀쩡히 걸어가다가 옆에 같이 걸어가던 친구가 벼락을 맞고 죽었어요.
저 벼락이 만약에 나한테 떨어질 수도 있었는데 그 친구는 그냥 죽어버리는 거야.
그러면 그 인생이 뭐냐는 거에요?
지금까지 뭐 울고 웃고 온갖 걸 했는데 어느 순간 그냥 벼락 맞고
그냥 걸어가다가 죽어버렸어.
걸어가다가 안 죽어도 여러분,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시는 걸 보고 나면
굉장히 허무한 그런 게 있지 않나요? 그때 좀 일찍 철들잖아요, 사실은.
그러니까 이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 언젠가는 가는 것이고
모든 인간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집행유예 상태다.
그러니까 이것을 자각할 때는 아이고, 나는 사형선고, 이거 피할 수 없는데
집행유예는 언제 끝날지 모르고.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그 집착이
저절로 이제 좀 무뎌지고 떨어진다 이거죠.
요것이 극적으로 일어난 사람들도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톨레나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또, 아니타 무르자니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타 무르자니, 홍콩에 살던 인도 여지인데 이 사람이 암에 걸려서
림프선 암에 걸렸어. 여러분, 그걸 뭐라고 그러나, 이렇게 뾰족뾰족한 과일 종류의
노란색이고 뾰족뾰족한 거 있죠.
하여튼 그런 그거 하여튼 뭐냐면 림프암에 걸리면 림프가 그렇게 변한대요.
몸 안에 그런 것이 수십 개가 생겨서 완전히 말기가 되어서 꼴까닥 임사 체험을 하는,
임사 체험에서 죽었는데 아버지가 아직 안 죽어도 된다 돌아갈 수 있으니까
너 선택해라 그랬대요.
그래서 그냥 죽든지 돌아가든지, 그래서 자기가 생각해 보니까 하고 싶은 일이
좀 있어 가지고 "돌아갈래요.' 하고 돌아왔대요.
돌아오니까 낫더래요, 이제 그때부터.
그래서 이 사람이 이제 임사 체험을 한 것을 책을 적었어요.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던가 그 체험을 통해서.
그러니까 그 이전에 알던 세계는 완전히 꿈의 세계고 죽어 보니까
이게 꿈의 세계라는 것이 너무나 확연해져서,
그 메시지를 이제 아니타 무르자니가, 유튜브 쳐보면 바로 나와요.
아니타 무르자니 이 사람이 임사 체험을 하고 이제 그런 자기 경험을 썼는데
이 세상이 환인 거예요.
자기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자기 죽었다고 다들 숨이 안 뛴다고 맥박이 정지됐다고
다들 그러는데 자기는 그런 걸 보는게 그렇게 우습더라나.
그리고 병원 안에만 보이는 게 아니고 밖에서 다 보이고, 뭐 하여튼
그런 이제 체험을 하면서 메시지가 있어요.
아니타 무르자니 메시지는 뭐냐면 여러분, 죽어 보니까
너무 좋더라는 거에요. 그 사람은
"난 내가 보장한다. 난 죽어 보니까 너무 편하니까 걱정할 것 조금도 없다.
나는 오히려 뭔가 미진해서 나온 거지 너무 좋아서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는데
그냥 할 수 없이 나왔는데 기왕 나왔으니까 메시지 전하는데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죽으면 너무 너무 편해요.
세상에 모든 고통은 몸에서 나오는데 이 몸이 사라지면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하면서 적어 놨어요. 그런 거 보면 저도 이제 그런 거 보면 우리 모친 보내면서
"엄마,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얼마나 좋은지, 그 세계가." 대화했다니까요.
41:34
이게 하여튼 그래요. 걱정할 것 없어요. 게임이에요, 게임.
게임에서 여러분 캐릭터 죽는다고 게임하는 사람이 죽어요?
아무리 게임을 뭐 반복해도 죽으면 다시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게임 같은 것이라서 캐릭터만 죽는 거지.
자체가 환희인데 환희에 나오는 캐릭터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정말로 이걸 게임하는 사람이 없는 이에 있어서 그 품 안은
그렇게 따뜻하다는 거에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거에요.
하여튼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자, 하여튼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잘 가네.
여러분 우리들은 수업할 때 왜 이렇게 시간이 잘 가요?
이제 좀 시작했다 하는데 감사합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