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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12차시 자료 (4월 24일 월)
1. 오류에 대하여/이원규
1) ‘카더라. 카더라. 카더라. 팩트 체크 하셨습니까?’ TV에서 공익광고가 나온다. 살면서 경험한 다양한 오류와 오해가 생각나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해야 하는데 유투브를 필두로 수많은 사실 아닌 정보가 넘쳐나는 작금의 세태에 정신줄을 제대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2) 대학 시절에 노교수님의 오류에 대한 강의가 뇌리에 충격으로 박혔었다. “여러 사실의 공통점을 갖고 바르게 추론하면 가설이 되지만, 그릇되게 추론하면 오류가 된다.”고 하시며 지폐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세종대왕 이도, 퇴계 이황, 충무공 이순신이 지폐의 인물로 사용된 사실로 추론한 오류의 사례를 들었었다.(당시에는 오만원권이 없었다) “李字는 木子이니 지폐에는 李氏만 인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일견 말이 되는 것 같으나 명백한 오류다”라고 하시며 학문은 진지하게 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 같다.
3) 내가 경험한 오류도 더러 있다. 중학교 과학시간에 선생님께서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것은 육종학의 획기적인 쾌거다.”라고 하셨고, 당시 성주에는 참외와 더불어 수박 재배를 많이 하였기에 ‘씨없는 수박은 우장춘 박사’라는 내용이 뇌리에 콕 박혔다. 그런데 최근에 TV 프로그램 벌거벗은 한국사에서 ‘씨 없는 수박은 일본 교토대의 기하라 히토시 박사가 개발했고, 우장춘 박사는 우리나라 농업 정책가와 일반인에게 종자산업의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획기적 신품종인 씨 없는 수박을 활용했는데 이것을 언론사 기자들이 오보를 한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당시 과학 선생님은 언론 보도를 그대로 학생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나 또한 잘못된 사실을 여러번 말했었다.
4) 나는 대구시청에서 수질 관련 업무를 장기간 담당했는데 국가물산업클러스터를 대구에 조성해야 하는 타당성을 홍보하면서 페놀 등 낙동강 수질오염 사건 등 다양한 현재적 사실과 역사적 사건을 언론에 자료로 제공하였다. 그 중에는 ‘조선시대 신천이 자주 범람하여 대구 중심지에 홍수 피해가 많아 대구판관 이서가 사재를 털어 물길을 현재의 신천으로 돌려 홍수 피해가 없게 되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백성이 이공제비(李公堤碑)라는 송덕비를 방천둑에 세웠고, 하천 이름을 新川(신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자료도 있었다. 이 내용은 대구시사(大邱市史)에도 있는 내용이라 인터넷을 검색하면 그대로 인용되고 있었다. 특히 1977년 대구시에서 발행한 달구벌에는 이공제 건설로 새로 생긴 하천이라 신천으로 불렸다는 내용이 있고, 과거 신천은 건들바위, 반월당, 계산성당, 달성공원, 달서천으로 흐르는 수로를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5) 그러고 부서가 바뀌어 신천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전영권 교수의 자문으로 신천의 유로가 잘못 인식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신천에 대한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한국지역지리학회에 ‘신천과 소하천 유로 변천 조사 용역’을 맡겼었다. 대구교육대학교 송언근 교수가 연구 책임을 맡아, 각종 문헌과 고지도, 지형도, 지질도 토양도 등으로 조사 연구한 결과 ‘신천은 상동교와 중동교 부근에 쌓은 이공제로 인해 건들바위 등 대구부의 서쪽으로 흐르던 신천 분류 하천들의 흐름이 동쪽으로 바뀌어 본류에 합쳐졌다. 신천이라는 이름은 제방 축조(1778년)보다 300년 앞선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기술되어 있고, 조선지도(1750~1768년)에 지금의 유로와 이름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요약되어 신천의 지명과 물길은 이공제 축조 이전부터 지금과 같았는데, 분류되는 지류의 물길을 막아 홍수를 예방한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인사이동으로 인하여 이 오류를 검증하여 여러 문헌의 내용을 정정하지는 못하고 다른 부서로 전출되었다. 지금은 지리 전문가 분들의 노력으로 인터넷에서는 내용이 많이 바로잡혀 있어 다행이라 생각된다.
6) 또한 지식의 부족으로 인한 오해도 잘못 전달되면 오류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어려서 김상진의 노래 ‘고향이 좋아’ 중에서 ‘향수를 달래려고 술이 취해 하는 말이야’를 들으면서 향수가 고향에서 데리고 온 어린 동생이나 조카의 이름인 줄 알았었는데, 한참 커서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향수인 줄을 알았었다.
7) 이해력이 부족하여 생기는 오류도 있다. 가수 남진이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을 하고 흉내를 내며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퍼포먼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유명한 가수라서 따라 한다고 싫어하기도 했다. 풋풋한 시절에 당시 좋아하던 노래인 ‘백지로 보낸 편지’를 가수 김태정이 빨간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표정없이 부르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순진한 마음에 “노래는 좋은데 가수가 싫다.”라고 내뱉기도 했다. 그러고는 나이가 들어 남진과 김태정은 좋아하는 가수가 되었다. 김태정의 갑작스런 사망에 ”젊어서 잘 몰라 짙은 립스틱 한 걸 텐데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은 노래 많이 들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하고 너무 일찍 떠난 것을 슬퍼했었다.
8) 30대 후반에 해를 쳐다보면 눈이 좋아진다는 글을 읽고는 따라 한 적이 있었다. 글빨이 얼마나 좋은지 상식을 무시하고 혹했었나 보다. 그래서 50대에 백내장이 온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9) 요즘 유투브에는 시선을 끌기 위해 쇼킹한 문구로 유혹하는 조작된 영상이 아주 많다. 멀쩡한 연예인을 ’이혼했네, 병났네, 사고 쳤네‘라며 호객행위를 한다. 그래서 팩트체크라는 공익광고를 하는 것이겠지.
10) 현상이든 소문이든 제대로 알도록 깨어있어야겠다. 남의 말을 쉽게 옮기지 말고 사실만을 전하도록 애써야겠다.
2. 머리를 삭발하다 /김화자
1) 머리를 삭발을 하다시피 짧게 잘랐다. 거울속의 내 얼굴이 낯설어 모자를 써 보았다. 2월 첫 월요일 회장단 회의에 참석 했더니 회의가 끝 날 무렵 등 뒤에서 “선생님 오늘 모자 쓰셨네예 ?” 한다. 뒤 돌아보며 “어때요? 보여드릴까?”모자를 들어 올리자 모두들 놀란 얼굴로 “엄마야 ! 쌤 머리 삭발 했네, 와~ 예 ?” 그러자 주위의 여러 회장들 시선이 내게 쏠린다.
2) 나이가 드니 머리는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지 염색하고 2주 만 지나면 머리 밑이 하얗게 길 을 낸다. 흰머리가 올라오면 적은 머리숱이 더 적어 보이고, 머리 밑이 훤 해보여 스트레스 받는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머리가 일찍 희어 지시어 염색 하시며, 늘 귀찮아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3)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30대 후반부터 염색을 하였으니, 이제 그만하고 싶다. 머리 염색을 하지 않으면 흰머리만 있어 숱이 많아 보이지 않을까~ 일 년 전부터, “이 머리를 어쩔까나!” 고민을 하다가. 2월초 용기를 단골 미용실에 들러 원장에게 “원장님 내 머리 흰 머리만 남기고 삭발 하듯 잘라 주이소”“엄마야~ 선생님, 와 예? ”“이유는 묻지 말고, 염색하는 것도 귀찮고 이 연식이면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가위 질 하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4) 지난주 토요일, 딸 아이 집에 가게 되었다. 현관 앞에 나와 있던 외손자와 외손녀가 눈이 동그래졌다. “할머니 머리 왜 그래요?”“느 그들 한태 예뻐 보일라꼬 머리 깍았다”손자 놈은 싱글 벙글 웃기만하고 손녀가 빠안히 쳐다보더니 “예쁘기는 한데요~ 할아부지 같에요”
5) 아이들 마음은 거울과 같아 보이는 데로 느끼는 데로 표현한다. 다시 한 번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낯선 얼굴이 웃고 있다.
3. 첫 번째 선택 /신은선
1. 나의 삶은 내가 결정한다. 어느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무엇을 결정하는 순간에 사람들은 흔히 말하곤 한다. “나는 선택 장애가 있어 결정을 못 하겠어”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어쩌면 나도 그 중 한사람일지도 모른다. 결정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한 후 돌아오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한 그 무엇이 모든 이에게 만족감을 준다거나 잘 했다는 칭찬을 받을 때보다 비난이 날아 올 때를 미리 짐작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선택을 하며 그 결정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결정하기까지 수많은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는 것도 있지만 순간에 빠른 결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 순발력과 결정력에 감탄을 하곤 한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다면 많은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심을 가질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일까? 돌이켜 생각 해 보면 때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것을 발판삼아 나 스스로 성장하려고 애써왔다는 생각이 든다.
2. 나의 성장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까?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일까? 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나의 성장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능력이 부족하지만 오히려 전문가보다는 미숙하지만 더 진솔함이 묻어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어느 라디오방송에서 나오는 멘트에 나를 키운 8할은 무엇인지 질문을 하면서 대답을 하는 것을 들었다. “바람”이니 “가난” 이니...하는 대답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럼 나를 키운 8할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이제까지 나를 이 순간에 이르게 한 것은 바로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라지만 자존심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나는 언제부터 자존감이 낮은 아이가 된 것일까?
3. 나는 시골이라지만 면소재지 버스정류장 근처 과수원안 이층집 여자아이였다. 봄이면 과수원 울타리가 분홍빛 줄 장미 향기로 오고가는 사람들의 눈과 코를 즐겁게 만들었다. 48여 년 전에 빨간 구두와 에나멜 가방을 메고 왼쪽 가슴에 흰 손수건을 달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여하는 아이는 아마도 나 혼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아이들이 부러워했다. 멀게는 이십 여리를 검정 고무신을 신고 보자기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은 대의원(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집으로 통했고 없는 게 없는 이층집으로 아이들이 다투어 우리 집에 와서 놀기를 소망했다. 2층 소파에서 소꿉놀이를 했고 동화책을 읽고 사과 꽃이 피면 그 향기에 가슴이 들뜨곤 했다.
학교에서 가정조사를 할 때 가장 신났다. 냉장고 , 텔레비전, 전화기 없는 게 없는 부잣집이여서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다.
오빠가 결혼을 하면서 첫 교편생활을 풍기고등학교에서 하게 되어 초등 4학년 때 새언니가 해 온 피아노까지 있는 집으로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장날이면 대의원집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에 보따리를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나에게 자신감과 당당함을 선사했다. 많은 것을 누렸던 어린 시절은 나의 선택으로 비롯되었다.
4.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봄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작은 보자기에 이것저것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건을 싸서 이고 먼지가 폴폴 나는 시오리 되는 신작로를 걸어 읍내 큰집에 도착했다. 할머니, 큰아버지, 큰엄마 모두 깜짝 놀라서 뛰어 나오셨다. 나는 당돌하게 큰집에 살러 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큰집에 외동딸이 되었다. 큰집에는 외아들인 대학생 오빠가 있었지만 학교에 다닌다고 서울에 살고 있었기에 모든 것들이 나의 것이었다. 이것이 나의 인생에 첫 번째 선택이었다. 그 선택을 지금도 후회 하지 않지만 언니와 동생들과의 어린 시절 느껴야 하는 정서적인 교류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엄마와의 관계도 다른 남매들과는 사뭇 달랐다.
만약 읍내에서 떨어진 시골 작은 집에서 오남매가 북적북적 대며 혼자만의 방도 없이 공부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제는 그리 크지 않는 빨간 밍크이불 때문에 싸울 일도, 비오는 날 우산 가지고 다투는 일도, 호롱불 켜진 작은 책상을 가지고 싸울 일도 이제는 없었다. 어린 마음에 이 모든 것들 때문에 큰집이 좋아 보였을 것이다. 면소재지에 하나밖에 없는 이층집에는 때가 되면 예쁜 원피스를 손수 만들어 공주처럼 입혀주셨던 큰어머니의 사랑이 나만의 독차지였으니 말이다.
나의 친구들은 무섭다고 다들 말을 했지만 할머니는 나의 친구이자 룸메이트였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던 그해부터 조금씩 할머니께서는 이상해 지셨다. 그 당시 표현으로는 노망이 났다고 했다. 할머니와의 좋았던 기억들이 하나 둘 빛바래 갈쯤에 할머니께서는 건너지 못할 곳으로 여행을 떠나셨다. 그렇게 어린시절의 기억도 함께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나의 어린 시절은 중학교까지 이어졌다. 무엇을 해도 자신만만했다. 반공웅변대회 나가서 최우수상을 받고 학교대표로 큰 대회 나가서 상을 받기까지 했다. 공부도 남에게 뒤쳐지지 않아 고등학교 진학을 영주에 있는 영주여고로 진학하기로 했다. 시험을 치고 합격하여 드디어 학교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즈음 큰아버지께서 지병인 고혈압 합병증인 뇌출혈로 돌아가시고 큰엄마는 오빠가 교편생활을 하고 계신 대구로 가셔서 조카들을 봐 주시게 되었다. 난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이 된 기분이었다. 핑계 같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난 혼란스러웠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첫 시험을 쳤는데 성적이 뒤에서 맴돌았다. 시 지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골 읍내와는 달랐다. 벌써 과외를 받거나 학원을 다니며 선행 학습을 받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출발선부터 다르니 따라 갈 재간이 없었다. 밀려드는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꾸만 자꾸만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새벽 별을 보고 학교에 가서 밤 별을 보며 하교했던 고3 야간자습 시간도 어쩌면 내면의 치열했던 전쟁의 시간이었다.
여고 3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자존감 높은 아이를 자존심 높은 아이로 만든 시간으로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은 시절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의 삶은 또 다른 자아로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첫 번째 선택을 후회 하지 않는다.
4. 흉터/한만수
#1
태어나 삼칠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왼쪽 목에 혹이 생겼다. 혹은 점점 커져서 어른 주먹보다도 더 커졌다. 어머니는 혼비백산한 심정으로 안절부절 하셨다.
내 위의 형을 어머니 가슴속에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머니의 속은 타들어만 갔다. 읍네 의원에서도, 한약방에서도, 용하다는 할머니를 찾았지만,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조고약을 바르며 정성을 드릴 때였다. 어머니 몰래, 할머니가 담뱃대의 진이 좋다며 발랐다. 죽는다고 울다가 목이 메여 울기조차 못하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입으로 모두 핥아 냈다. 차도가 없다는 소식에 외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은 단자를 들고 외할머니가 왔다. 어머니가 농사일을 나가면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그렇게 시일이 지나 혹이 곪아 터지면서 피고름이 났다. 어머니는 손으로 짜내지 못하고,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피고름을 빨아냈다. 어머니의 지독지정의 묘약으로 혹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커다란 흔적만을 남겼다.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가 유독 그리워지는 때가 잦아진다. 절기에 따라서도, 맛있게 드시던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머니와의 흔적을 가득 담은 고방에서 하나를 불러낸(꺼집어 낸) 날에는 나도 모르게 흉터를 만지작거린다.
유격훈련에 이어 야간 매복훈련까지 하루 종일 구르고, 귀대하는 때였다.
“군가는 악으로, 군가 일발 장전, 어머니 은혜”
짓궂은 조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리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또 구르고, 몇 번이고 반복했던 적이 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라 뉘시며’
오늘은 잘 부를 수 있을 것 같아 불러보지만, 여전히 기어들어간다. 또 구르라고 할 것 같다.
#2
오른쪽 손목에 면도칼로 베인 듯 길게 난 흉터가 있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였다. 집 뒤편의 논밭으로 나가는 삽짝이 있었다. 리어카 한 대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좁은 함석 문에 베인 자국이다.
그 날, 먼 장을 다녀오신 아버지는 무슨 불편함이 있으셨던지 약주가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셨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 혼자 하는 농사일을 도우려고 리어카를 끌고 나섰다. 추수한 콩을 가득 싣고 들어오다가 휘청거리면서 문짝의 날카로운 함석에 벤 것이다.
금방 피가 줄줄 흐르고, 아렸다. 먼저 어머니의 안색을 살피면서 아프다는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술에 취해 주무시는 아버지가 알까 두려웠다. 손이 재바른 누나가 오징어 뼈 가루를 갈아 뿌리고는 헝겊으로 질끈 싸맨 것이 전부였다. 아물면서 베인 부분이 벌어져 면도칼에 날 먹은 모양으로 길게 흉터가 생겼다.
어른이 되면서 털이 가려주고 있어, 지금은 흉터가 덜 드러나 보인다. 대구의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자, 도회지의 친구들이 ‘시골 촌놈이 좀 놀았나?’며 놀리는 듯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었다.
흉터를 보면, 가끔씩 어머니와 누나를 소환해주기도 하는 나에겐 좋은 상처였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사연을 알지도 못하면서 외양만 보고 흠집을 내려고 달려들었다. 싸움꾼 이였다는 둥 갖은 상소리를 해댔다. 심지어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까지 만들기도 했다.
남의 상처를 보면 어루 만져주며 함께 아파하지는 못할지언정 ‘사정이 있었구나.’까지만 진도가 나갔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이곳저곳의 악다구니하는 모습 대신에 함께하는 행복을 그려나갈 수 있게 말이다.
#3
옆구리에 얼룩 흉터가 있다. 흔히 개구리복이라고 하는 군복의 얼룩무늬를 닮았다.
대구시에서 체육진흥과장으로 일을 하던 때였다. 7박8일 간의 짧은 일정으로, 3개 국가 5개 도시의 실내육상경기장(Multi Task Indoor Stadium) 시설을 견학을 하던 중에 탈이 낫다. 처음에는 배가 아프고 두통으로 시작하였는데, 점차 근육통까지 심해졌다. 몸살이거니 하고 소화제와 두통약만 먹었다. 헝가리에서 승용차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도중에 오른쪽 옆구리에 물집이 생기고 주위가 붉은 반점이 생겼다. 오스트리아에서 현지 컨설턴트의 안내로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귀국하여 대상포진 진단을 받고, 20일 이상 치료를 받았다. 지금도 그 휴유증이 있다. 조금 무리하거나, 많이 피곤하면 팔이 저려오는 증상이 남아있다. 하지만, 몸을 관리하라는 신호로 작동하는 증상이라 여기니 다행스럽기도 하다.
흉터는 내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삶의 흔적이다. 힘들게 일을 하면서 남은 자국이지만,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한다. 흔적이 남기까지의 과정과 내면의 아픔은 그저 깡그리 무시당하기 일쑤다. 사람들은 그저 ‘일 잘하는 사람,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사람’으로만 말한다. 때론 자신의 안경을 덧씌워 제대로 보지도 않고, 억지로 상처를 만들어 주려고도 한다.
#4
“머리가 허연 학생, 공부시키느라 욕 봤니더”
박사학위를 받는 날에 지인들이 학위수여식에 찾아왔다. 예술인들과 장애인체육회의 식구들도. 학위모를 아내에게 씌우기도 하고 하늘로 높이 날리며 사진을 찍었다. 한바탕 소동을 치른 후 동생네 가족들과 늦은 점심을 위해 자리를 잡았다.
태블릿에 사진을 옮겨 담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끼어들지 못했다. 용변을 핑계로 혼자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정년을 앞두고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모든 네트워크와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의 문화지도를 그리는 일에 아낌없이 쏟고 싶었다. 당치도 않는 이런저런 이유로 여의치 않으면서 상심이 컸다.
아픈 가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 몸이 건질건질했다.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 발전에 힘을 보태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수업은 쉽지 않았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원우들과 공부하며 즐겁기도 하였지만, 발표와 토론 때에는 까칠하다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다. 결국 나는 드물게 다섯 학기 만에 학위를 취득하는 희귀한 존재로 기네스에 올랐다.
아픔을 밑거름으로 학위를 취득하고, 인생 3막을 그려낼 생각에 벅차오르는 가슴을 앞세워 조용히 내 자리에 앉는다. 박사모를 쓴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마음의 흉터를 보듬기 위해.
지금, 크고 작은 흉터를 몸과 마음에 가지고 살아간다. 부끄럽게만 생각은 않는다. 그 흔적은 내 삶의 역사이고, 좋고 나쁜 경험의 상처였던 간에 내 삶이기에 나의 나침반으로 쓰련다. 아름다운 내일의 흉터를 가지려고.
5. 장님들이 그리는 코끼리 정물화 /이정열
1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에 나는 태어났다. 신생아실에 누운 날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 날과 같다. 병원에서 나와 들어간 집은 젊은 시절의 할머니가 이건희 회장의 누이에게서 산 한옥이었다. 전 집주인의 재산이 얼마쯤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키가 다 자란 후에도 대문 위쪽 끄트머리는 뒤꿈치를 들어도 닿지 못할 만큼 높았다. 이 집의 나무는 모조리 춘양목이라며 자랑하던 할머니 말처럼 대문은 거대한 만큼이나 튼튼했다. 좋은 나무로 만들었다지만, 아무런 빛이 새어 나오지 않는 아파트의 강철 문에 비하면 빈틈이 많았다. 아래쪽 틈으로는 접힌 신문이 충분히 들어올 정도였다.
2 그래서 우리 집 개 하니는 평일 새벽에 세 번 짖었고 수요일에는 네 번 짖었다. 조중동에 주간 조선까지 도합 네 번이다. 하니는 신문 배달 오토바이가 골목 초입 턱을 넘을 때부터 난리다. 이 신호로 아버지가 일어나고 아침을 먹기 전까지 신문을 펼쳐놓는다. 텔레비전으로는 아침 뉴스를 틀어놓고 신문 읽는 모습을 볼 때는 우리 동네 실비집 아저씨가 겹쳐 보였다. 몇 인분의 식사가 놓인 커다란 쟁반을 한 손에 쥔 채 자전거로 배달 다니는 아저씨를 우리 아버지에게서 발견했다.
3 하루는 그 묘기의 하나만이라도 흉내 내보려고 신문을 모조리 바닥에 펼쳤다.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굵은 글씨는 별다를 바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건 미취학 아동에게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못다 읽은 신문을 잡고 있었다. 계속해서 돌아가는 자전거 바큇살처럼 앵커가 전하는 일곱시 아홉시 뉴스도 함께 였다. 아버지 옆에 앉아 나도 신문을 봤다며 말을 걸었다. 비슷해 보이는 신문을 왜 여러 번 보는지 물었다. 아버지는 셋 다 다르다고 답했다.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시간이 지나 어떤 뜻인지 알게 되었고 머지않아 아버지의 목적에는 매체 선택이 맞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4 한 푼이 아쉬운 대학생 때는 신문을 여러 부 받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군인일 때 기회가 왔다. 부대로 들어오는 모든 인쇄 출판물은 인사과를 통했다. 대표 일간지를 모두 받아보는 줄 알게 된 날에 친한 인사과 선임에게 부탁했다. 조선, 중앙, 한겨레, 경향을 갖다 달라고 했다. 이등병이 상병에게 일을 시키냐고 면박을 줬지만 그는 월, 수, 금요일에 퇴근하며 내가 일러준 대로 꼬박 네 부를 챙겨다 줬다.
5 그걸 가지고 한 주제의 기사를 각각 오려내 사실과 주장을 나누어 비교했다. 국제, 사회, 정치, 경제 분야에 서로 영향을 끼친 기사들을 묶어 스크랩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말한 대로 신문사들은 한 사건에 근거로 드는 사실이 달랐고 단어 선택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스크랩은 아버지의 방식에 더해 이건희 회장을 모방했다.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두 명의 스승으로 부친과 장인을 꼽았다. 중앙일보 회장이던 장인에게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배웠다. 신문을 1면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는 게 아니라 한 가지 사건과 관련된 여러 사건을 연결하는 법을 익혔다고 회고했다.
6 독일의 재통일에 갑론을박이 많았고 여전히 볼멘소리가 나온다. 그렇다 해도 독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유럽연합의 변함없는 맹주이며, 세계에서 끊임없이 성장할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인천상륙 작전은 시행 전까지 지난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두 자릿수가 되지 않는 성공 확률로 한국전의 결정적인 반환점을 만들었다. 세상은 결코 교과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내가 생각하는 만큼 단순한 인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의 말은 오히려 더 들을 필요가 없다. 그건 케케묵은 복습이다. 수많은 다른 의견을 새겨들어야 온전해진다. 장님 혼자서는 코끼리를 제대로 그려내기가 어렵다.
6. 한순이의 진달래 /최미숙
1. 차장을 파고드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무심히 접어든 길에 벚꽃과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이르게 다투어 핀 꽃들에 눈이 호사한다. 건너 산비탈에도 품었던 연정을 풀어놓은 듯 진달래가 아름 피어있다. 봄기운에 따끈해진 이마를 짚으며 진달래 한 다발을 안겨 주던 친구를 생각한다.
2. 일곱 살 때 큰 집이 있는 제천에서 가족과 떨어져 산 적이 있다. 한순이는 일곱 살의 모든 순간 속에 함께하던 친구이다. 엄마를 떠나 살아야 하는 가라앉지 않던 슬픔과, 나이보다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던 더부살이의 설움과, 도시에서 온 작은 계집아이에게 쏟아지던 눈총들을 그까짓 것쯤으로 대신해 주던 친구였다.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살던 우리는 기차가 지날 즈음이면 고물상에서 주워 온 쇠못을 기찻길 위에 얹어 놓곤 했다. 들키기라도 할까 헛간에 꽁꽁 숨어 기차 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렸다. 납작하게 눌린 못을 찾느라 침목을 디디며 위험한 장난의 동반자임을 확인하고 그조차 까르륵 거리며 심심한 일상을 채웠다. 햇빛 쨍쨍한 개울에서 고무신을 접어 띄우고 목청껏 응원전을 펼치며 오후의 긴 해를 보내기도 했다. 그녀네 밭에 갈아둔 채소들을 익숙하게 훑어 소꿉놀이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녀의 엄마는 부지깽이를 드셨다. 친구의 고함 소리와 울음은 내게도 미안함과 두려움이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는 똑같은 반복을 하며 소꿉놀이를 즐겼다. 일 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엄마의 곁으로 돌아왔다.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느라 그녀와는 이별의 인사조차 못했다. 아마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친구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유년의 한 편은 그렇게 친구와 함께 잊혀 갔다.
3. 중학교 1학년의 이른 봄날, 다시 제천을 가게 되었다. 큰집 행사에 맞춰 엄마와 밤기차를 탔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천이라는 도시를 오고 가는 기차는 밤 시간에 유일하게 한 대뿐이었다. 그녀를 만났다. 여전히 그녀의 집은 기찻길 건너 그곳이었고, 그간의 시간탓인지 기억하던 것 보다 더 허술해 보였다. 시골의 봄날은 새차웠다. 햇살이 정면으로 비치는 마루 끝에 앉았지만 서먹함을 이내 털어내지 못했다. 마침, 집 앞 골목길을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너, 쟤 알겠어?"
그녀의 물음에 열심히 페달을 밟아가는 또래의 뒤 꼭지를 바라보았다. 알 리가 없다. 잠시 머문 이곳에서 기억하는 유일한 친구는 그녀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시 만나기 전, 그녀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했다고도 할 수 없다. 여럿이 어울려 아카시아 꽃잎을 묶어 목걸이를 만들었던 기억이나, 개울가에서 물놀이를 하던 기억은 있지만 그 누구도 이름이나 얼굴이 연관되지 않았다. 사실,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었던 일곱 살 때의 기억은 어린 내겐 이해할 수 없는 상처였다. 아마 그 기억에 자물쇠를 채우고 들여다보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방금 자전거를 실룩대며 타고 가던 남자아이는 나로부터 상처를 입은 피해자라고 했다. 돌을 던져 아이의 머리통에 피를 내버렸단다. 내가? 도대체 왜? 그것도 그런 험악한 행동까지 했다고? 이런 엄청난 가해를 했다지만 이 또한 전혀 기억에 없었다. 그 아이 때문에 우리는 어색함을 수습했고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까맣게 그을린 손을 오그리며 애꿎게 치맛단을 훑어내던 친구의 시선이 나의 하얀 교복 칼라에 머물러 있을 때도 나는 몰랐다. 그녀의 그리움이 도시를 향한 간절함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을 나눈 친구에 대한 기다림이 오랫동안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4. 만남의 시간도 잠시였고 그리움도 궁금함도 잠시였다. 버스를 타기 위해 동네 어귀에 있는 오르막을 오를 때 등 뒤를 잡아채는 거친 부름이 있었다. 뒤돌아보니 진달래꽃 한 아름이 뛰어오고 있었다. 꽃 아름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였다. 헐떡대며 뛰어와 들고 온 꽃다발을 내게 안겼다. 잘 가라는, 아니 편지하라는 인사도 없이 고무신이 벗겨지도록 뒤돌아 뛰어갔다. 엉거주춤 받아들었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난감했던 진달래꽃 한 다발이었다.
5. 스무 살이 가까워 그녀는 꿈꾸던 도시로 떠나왔다. 부산의 한 신발 공장에 근무하며 주경야독의 삶을 꾸렸고 그때부터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와 일상을 나눴다. 도시로 가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나눠줄게 없어 속상했었다고 했다. 뒷산 자락에 물들던 진달래가 나처럼 예뻤다며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날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과 공부에 쫓기는 그녀와 공유되지 못하는 시간들은 조금씩 틈이 나기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우리는 유년의 그날처럼 이별했다. 서로의 안부를 전하던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6. 결혼을 하고, 내 삶의 어느 부분도 상관되지 않던 그녀를 다시 기억 속에서 불러낸 건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였다. 이른 봄날, 운문사 길에서 만난 진달래꽃더미 속에서 그녀, 내 친구 한순이를 만났다. 어디선가 나처럼 엄마로 아내로 잘 살고 있을 그녀가 자물쇠를 채웠던 일곱 살의 추억을 풀어내며 다시 내게로 왔다. 상처라고 닫아두었던 추억은 차마 열어보지 못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그제사 알게 되었다. 그 봄의 기억이 애틋해 진다. 진달래꽃에 가려졌던 한순이의 마음이 꽃잎처럼 붉었지만 그리움조차 헤아리지 못한 미련한 친구였다. 이제는 어떠한 통로로도 한순이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다. 무심한 어느 날, 운명처럼 지나친다고 해도 서로에 대한 익숙함조차 모를 일이다. 보고 싶다 내 친구 한순이. 이젠 초로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그 봄처럼 진달래는 여전히 곱게도 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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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 주에 시간이 모자라 충분히 다루지 못한
- 장님들이 그리는 코끼리 정물화 /이정열
- 한순이의 진달래 /최미숙
두 작품을 이번 주에 먼저 합평합니다.
문우님들, 지난 주 프린트물 지참해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