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8일 토요일(금요무박) 낙동정맥 5회 (윗삼승령 ~ 하삼의리)
S 산악회
낙동정맥 5 회차: 윗삼승령 – 굴바위봉 – 아랫삼승령 – 학산봉 - 쉰섬재 – 옷재 – 서낭당재 – 독경산 – 창수령 (자래목이) – 울치재 – 맹동산 상봉 - 하삼의리
산행거리 : 약 30 km (접속거리 2.3 km 포함) 산행시간 : 약 10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896955
거리 27.7 km
소요 시간 9h 29m 10s
이동 시간 9h 12m 6s
휴식 시간 17m 4s
평균 속도 3.0 km/h
최고점 800 m
총 획득고도 628 m
난이도 힘듦
낙동정맥 (洛東正脈) 05 – 독경산, 맹동산
바람개비
양산박
맹동산 능선길에 마술쇼가 펼쳐진다
동풍불면 빙글빙글 바람개비 돌아간다
내 어일적 수수깡 꺽어만든 바람개비
맹동산 능선길에 수도없이 돌아간다
바람개비 돌고 돌아 전기를 만든다고
맹동산 능선길에 마술쇼가 펼쳐진다
날 씨 : 맑음. 보름 하루전 달과 별, 영하 6~7도쯤. 능선에 바람이 차가움.
옷차림 : 세 겹옷
해돋이 : 저시재 부근을 지나면서 나무 사이로 일출을 봄
한주의 날씨: 늦추위가 이어진다.
프로로그
전에 친구와 산행중에 영혼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과연 인간의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가에 관한 얘기였다. 이는 누구와 얘기하더라도 정답이 없는 선문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의 의견이 궁금했다. 그는 영혼이라는 것은 없으며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불에 타든 땅에서 썩든 궁극적으로는 무기물로 변해서 흩어지는 것이라 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다. 그렇다면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무엇 때문에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떤 때는 핍박을 받기도 하고 신분에 따라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라도 고통을 벗어나 목숨을 유지하고 자연적인 수명을 다할때까지 살아남는 것을 제1의 삶의 목표로 삼는다. 만일 영혼이 없고 육체의 수명이 다할 때 정신적인 존재도 사라지는 것이라면 굳이 그런 고난을 격을 필요가 있을까?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훔치든 빼앗든 소유하고 먹고 싶은 것은 먹고 그렇게 살다가 고통이 임박하면 그냥 삶을 끝내면 되는 것이 아닐까? 친구는 그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쓸데없는 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영혼은 있는건가? 영혼은 육신이라는 껍질 속에 보호되어 있는 것인가? 만일 육체가 소멸하면 영혼은 자유로이 우주속에 떠돌다가 또 다른 생명체에 빙의하여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육체와 함께 영혼도 완전한 분자로 없어지는 것인가? 이쯤되면 SF 소설 수준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건 현실이다. 이 지구상에 매일 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간다. 또 태어나고 죽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동물과 식물이 타고 자라고 죽기를 반복한다. 우리는 식물과 동물의 생몰(生沒)을 에너지의 순환작용으로 설명한다. 즉, 식물은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태양에너지를 흡수하여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에너지를 만들어 축적한다. 스스로 땅에 쓰러져 거름이 되고 또 다른 식물들이 그 거름삼아 자라난다. 이를 초식동물이 먹고 에너지를 얻으며 그 에너지를 육식동물이 취한다. 이러한 생명의 순환을 설명함에 있어 식물이든 동물이든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영혼은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나고 자라고 병들거나 늙어서 죽는 인간에게만 영혼이 깃들어 있으며 사후에는 업보에 따라서 머물게 되는 상상속의 장소로서 천국과 지옥을 상정하였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아는 사람의 부고를 받으면 그 죽은 사람의 영혼이 꼭 천국으로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고 기대하며 또 그렇게 믿는다. 아무도 가보지 못했으며 또 알지도 못하는 그런 곳이다. 과연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 달리 죽으면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어 또 다른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한 번 해답이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사십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지금 천당이든 지옥이든 사후세계에서 사십년째 사시면서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실까? 이제 90세이신 엄마에게 아버지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겠냐고 물으니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하신다. 만일 그런 곳이 있다면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작은 조각배를 타고 망각의 강(스틱스)을 건너 저승의 길목을 지나가는 것일까? 아니면 납량특집 드라마에서처럼 얼음짱처럼 차갑게 생긴 저승사자의 안내를 받아 명부전에서 자신의 생전 업보에 따라 천당과 지옥으로 갈라서 가게 되는 것일까?
나은 잠정적으로 그런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지구상의 인류는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에너지 순환의 한 고리일 뿐이다. 무슨 목적에서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생명체는 각자 고유한 자기보호 기능을 갖춘 유전자를 통해 보다 안정되고 효율적으로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지켜지기를 염원하며 그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종족을 번성시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인간은 다른 동식물에 비해 결코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다만, 인간은 어떤 계기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생각을 이어가는 방법을 깨우쳤다는 것이 좀 특별한 것 같다. 그를 통해 인간은 좀 더 오랜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기억 한 구석에 천당과 지옥을 만들어놓고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입주시켰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살기 좋은 천당에 모셔놓고 미워하는 사람은 지옥으로 보냈다. 고인의 거주지는 오직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뿐이다. 잊지 않을겁니다. You will not be forgotten. 하고 맹세하지만 고인의 살아 생전 쌓은 업보의 크기에 따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머무는 시간도 달라진다. 인류를 구원할 만큼 큰 기여를 한 성인들은 수없이 긴 세월동안 세계 곳곳 후손들의 기억속에서 편안하게 옷고 있지만 자신의 영욕을 좇아 일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면서 타인을 괴롭히다가 생을 마친 사람들은 후손들의 기억속에서도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천당이나 지옥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산행기
다시 고생길에 나선다. 짧은 시간에 긴 산길을 걸어야 하는 험한 산행인데도 한 번 발을 디뎠으니 달리 어찌할 수도 없고 매번 도전하는 기분이다. 그래도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자전거 타기를 하면서 다리힘을 길렀으니 이번에는 좀 나으리라 스스로 위안하면서 산행 신청을 했다.
36인승으로 개조한 버스라서 앞자리와의 간격이 널찍해서 편하다. 죽전을 거쳐 영동고속도로 그리고 다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단양팔경 휴게소에 들른다. 약 30여분의 시간동안 밤참을 먹는다. 나는 잠시 바깓바람을 쐬고 다시 들어와 베지밀 한 통으로 밤참을 대신한다. 버스는 풍기 나들목으로 빠져나간다. 더운 공기에 몸은 잠을 자려하는데 머리가 자꾸만 깬다. 로타리를 지나 국도에서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는지 버스가 신음을 토해내며 비틀거린다. 서울에서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기산리 산골마을로 찾아가는 것이 참 용하다. 요즘에는 네비가 있으니 그나마 수월하겠지만 옛날 지도 한 장 들고 이런 곳을 찾아가는 것은 정말 힘들었을것이라 생각한다.
천지사방 암흑 속에 겔겔거리는 버스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안에는 새벽 등산을 하려는 서른 명의 산꾼들이 선잠에 시달리면서 졸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목적지인 기산리에 거의 다 와간다는 말에 주서주섬 산행준비를 한다. 지난 번 산행 때 눈 때문에 고생한 것을 교훈삼아 이번에는 스패츠를 꺼내 다리에 두른다. 늘 배낭에 넣고 다니지만 이걸 착용해본지가 언젠지 까마득하다.
기산리 이장님이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나보다. 도착하자마자 미리 나눈 조대로 트럭에 탑승한다. 우선 지난번 윗삼승령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1조로 편성되어 윗삼승령까지 타고 가기로 했다. 나머지는 아랫삼승령에서 산행을 시작할 것이다.
지난 번 하산할 때와 마찬가지로 캐빈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밖의 날씨가 차가와 짧은 거리지만 차 안쪽에 앉아서 가는 것은 운이 좋은 것이다. 앞 캐빈쪽에 다섯 명 그리고 뒤에 댓 명 정도 이렇게 열명 정도가 1조로 윗삼승령에서 시작한다.
“이런 겨울에도 낙동정맥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하고 궁금해서 이장님에게 물었다.
“매주 한 두 팀씩 다닙니다.” 내 생각과 달리 낙동정맥을 타는 사람들이 꽤 많은가보다.
“낙동정맥은 나무가 우거져서 겨울에 산행하는 것이 훨씬 좋아요. 여름에는 표지기도 잘 안보여서 알바하기 딱 좋지요.”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부연하여 설명한다. 그는 낙동정맥을 이미 마쳤는데 이번에 또 하는 것이라 한다.
지난 번 트럭을 탔던 느트재를 지나 이번에는 윗삼승령까지 트럭이 올라갈 것이라 한다. 저시마을과 윗삼승령을 연결하는 임도가 차량통행에 불편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 사이 정비를 한 모양이다. 덜컹거리면서도 트럭은 별다른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고갯길을 잘도 달린다. 새벽 4시 30분 기산리 이장님은 이렇게 우리를 윗삼승령에 내려주고 안전산행을 당부하고 되돌아간다.
윗삼승령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따뜻한 트럭에서 내리니 바람이 시원하다. 하늘에는 정월 대보름을 하루 앞둔 보름달이 기울고 있고 별들이 검은 하늘에 촘촘히 빛난다. 윗삼승령 표지 앞에서 인증을 마친 사람들이 하나 둘 산길로 들어간다. 이제 산행 경주가 시작된다. 이번에는 인원도 얼마 안되는지라 뒤에 쳐지면 오늘 산행이 힘들어질 거라는 생각에 뒤에 몇 사람을 남겨두고 얼른 꼬리를 문다.
처음부터 오르막이다. 헤드랜턴에 비치는 산길이 제법 뚜렷하다.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보름달의 모습이 아름답다. 지난 번 석개재 ~ 답운치 구간에서 보았던 그런 모습인데 오늘은 그 때보다 조금 더 기운 것 같다.
뒤에 쳐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걷는데도 앞사람과의 간격이 현격히 멀어진다. 사진 몇 장을 찍는 사이 뒤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두 명도 어느새 내 뒤에 바짝 붙어서 거침 숨소리를 내 밷는다. 마치 좁은 도로에서 서행하는 차에게 경적을 울리면서 비껴달라고 압박하는 모양과 흡사하다. 길을 비켜주자 바람소리를 내며 휙 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또 멀리 달아나고 나는 다시 홀로 남았다. 아직 산행 초반인데.
기산리 이장님이 운전하는 1톤 트럭을 타고 윗삼승령 고개마루에 닿는다.
오전 4시 30분 산행을 시작한다.
그래 내 페이스대로 가보자. 이제는 산행에 자신감이 든다. 첫 날에는 처음부터 너무 여유를 부린데다 이런 빠른 산행에 적응되어 있지 않아 민폐를 끼졌지만 그 뒤로는 늦은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삼승령 (748.5), 칠보지맥 분기점, 굴아우봉. 깜깜한 밤중 잡목으로 엉켜있는 봉우리 정상 나뭇가지에 준.희 님이 걸어둔 정상표지판이 빛난다. 허겁지겁 올라왔으나 주변은 적막강산이다. 굳이 볼 것도 없는데 오래 머물일도 없다.
세 명의 중(三僧)이 모여서 넘어야 했다는 것이 삼승령의 엉터리 같은 유래다. 고개가 너무 높아 가마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넘었다 해서 탈 승(乘)자를 써서 三乘領이라 했다는 말도 영 개운치가 않다. 이 곳에 도적이 들끌어 고개를 넘으려면 꼭 곡식 세 되(升)를 준비해야 했다고 하는 말도 억지로 만들어낸 유래라는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어쩌랴. 그 산이름을 지은이는 누군지도 모르고 또 무슨 의도로 그리 불렀는지 남겨놓은 기록도 없으니 말이다.
삼승령은 달리 굴아우봉이라고도 부르며 여기서 칠보지맥이 분기한다.
휘영청 보름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멀어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선두를 좇아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완만하던 산길이 짧게 끝나고 제법 급하게 내려간다. 어둠속에 맞은편 산봉우리에 불빛이 서너개 반짝이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느닷없이 눈 앞에 임도가 나타나 나를 반간다. 아랫삼승령이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길이 꽤 넓은 것 같다.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정자도 보이고 돌로 만들어 놓은 의자도 있다.
학산봉 (689 m)
선답자들이 줄에 걸어놓은 시그널을 표시삼아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모두 나에게서 멀어지니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페이스대로 걸어볼 참이다. 비탈이 제법 가파르다. 이마에서 땀이 흐른다. 윗삼승령을 출발한 지 처음으로 배낭을 벗고 물을 마신다. 그리고 사과 한쪽을 베어문다. 달콤한 물이 입안 가득 고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별들이 총총하다. 사방은 고요하고 이 큰 산중에 나 홀로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하다.
5시 30분 아랫삼승령에 도착한다.
이렇게 걷다보면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우리는 남쪽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착각하게 된다. 지난 1월 3일 태백시 매봉산을 출발한 이후 줄곧 남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러니까 왼쪽으로는 물줄기가 동해바다로 향하고 오른쪽은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의식을 나 자신에게 일깨우면서 산을 오른다.
윗삼승령을 출발한 지 한 시간만인 오전 5시 30분경 학산봉에 도착했다. 어둠속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준.희 님이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산 이름표만 인증하고 길을 서두른다.
학산봉을 지나고
이제 달도 저문다.
쉰섬재
조금은 찌그러진 정월 대보름달이 서쪽 숲속으로 기울고 왼편 동해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온다. 왼편으로 멀리 수 많은 빨간 전깃불이 반짝 반짝 점멸한다. 저 곳이 어쩌면 맹동산에 있다는 풍력발전기 단지일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저렇게 가까이 보일리가 없다는 생각과 어쩌면 이번에도 산길이 S자 모양으로 둘러 둘러 가기 때문에 지금 가까이 보이는 저 점멸등이 분명 풍력발전기일것이라고 생각한다.
산길은 의외로 편안하다.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는 곳은 스틱으로 단당히 디디면서 조심하고 평지나 완만한 오르막에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내가 늦어서 다른 이들이 기다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뇌리에 박혀있다.
조를 50섬이나 경작할 수 있는 밭이 있던 고개라 하여 쉰섬재라 부른다.
어둠속에 봉우리인지 고갯마루인지 분간이 안되는데 또 나뭇가지에 “여기는 쉰섬재입니다”라는 표식이 걸려있다. 역시 준.희 님의 정성이 담긴 이정표다. 길이 구부러져 애매한 곳마다 선답자들이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표지기(시그널)가 길을 안내해준다. 쉰섬재는 옛날 화전민들이 산에 밭을 일궈 농사지을 때 조를 50섬이나 생산할 수 있을 만큼 널찍한 밭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옷재에서 핸드폰을 분실하다.
동해쪽으로 아침 해돋이의 서광이 비친다. 실제로 해가 떠오르기 전 이렇게 불그스레한 기운이 길게 퍼져있는 모습이 신비스럽다. 나는 나무가 가리지 않는 탁 트인 곳에서 해돋이를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이렇게 정맥길에 나서면 그런 기대가 실현되는 것은 아주 드물다. 나뭇가지 사이로나마 이렇게 해돋이를 볼 수 있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동쪽하늘 아랫쪽에 붉은 빛이 띠처럼 이어진다. 그 붉은 기운을 받아 주변이 서서이 밝아지고 머리위에 매달린 헤드랜턴의 불빛이 점점 옅어진다. 이제서야 왼쪽 능선아래가 아주 가파른 낭떨어지라는 것을 알게딘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작은 마을들이 성기게 흩어져 있다.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 고요함속에 아침 해가 떠오른다.
해가 올라오기 전 여명이 밝을 때의 풍경이 아름답다.
저시마을로 내려가는 고개라서 저시재라 부른다.
구름 위로 올라오는 아침해를 맞이한다.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았으니 이런 풍경을 담을 수 있다.
나무에 저시재 푯말이 달려있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 기산리 이장님의 트럭을 타고 윗삼승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느트재 안쪽 마을이 저시마을이다. 주변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마을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저시재는 옛날 영해에서 영양의 기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듯하다.
길이 왼쪽으로 굽어지는 곳에 많은 시그널이 나뭇가지에 흩날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크로스백을 더듬는데 핸드폰이 없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아 사물을 분명하게 구별하기 힘든데 땅에 떨어져 낙엽속에 묻혀 있다면 핸드폰을 찾기가 매우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전 저녁 어스름에 나와 동행하던 어느 산님이 눈길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려 1 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되돌아가서 핸드폰을 찾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나 혼자 뿐이다. 해돋이 사진을 찍고 나서 크로스백에 넣으려다가 땅에 떨어뜨린 것이 분명하다. 대충 짐작으로 사진을 찍었던 장소를 기억해 내면서 바닥을 주시하며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길가에 다소곳이 놓여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떨어질 때 작은 돌에 맞았는지 작은 상처를 입었지만 기능상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서 기특한 얼굴을 내비친다.
이럴 때 나는 핸드폰을 찾았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삼십분이라는 귀한 시간을 허비한데다 핸드폰이 깨졌으니 재수없는 일이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요즘 내가 즐겨 듣는 유튜버 법정스님이라면 어떻게 말할 것인지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이런 어수선함 속에 옷재(烏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친다. 영양과 영해를 연결하는 고개는 울재(蔚峙)와 옷재가 있었는데 울재는 고개가 낮지만 긴 반면 옷재는 높지만 짧아 힘있는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였다. 산길이 옷재에서 급경사를 이루며 한참 내려가는데 거꾸로 이 고개를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고개’ 라는 뜻에서 까마귀 오(烏)자를 써서 옷재(烏峴)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들렸을 것 같다. 까마득한 고개 -> 까마귀 고개 -> 옷재(烏峴) 라는 이름 변천 과정을 유추하면서 우리민족의 한스러운 역사만큼이나 복잡함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았다. 붉은 구름띠 위로 밤알만한 해가 고개를 뾰족하게 내밀더니 마치 물위에 풍선이 떠오르듯 몇 번 꿈틀거리니 오늘 새벽에 져버린 보름달만큼 커진 해가 완전히 올라온다. 내가 배운 과학지식에 의하면 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자전 때문에 생겨나는 자연현상이라 하니 지구가 얼마나 빨리 회전하는가를 새삼 실감할 수 있겠다. 시속 1667 km로 돈다고 한다.
옷재에서 급경사길을 내려서니 잠시 완만한 오르막이다. 왼쪽 울진방향으로는 천길 낭떨어지고 그 너머로는 시야가 탁 트인 허공이다. 울진군 창수면 인천리 마을 너머로는 이름모를 산줄기가 이리저리 엉켜있고 그 왼쪽 끝에는 지난주에 지나왔던 백암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날이 밝으니 주변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산에도 소나무가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나무 사이로 살짝 트인 조망을 잡는다. 지나온 길이다.
지경은 경계를 이루는 고개라는 뜻이 아닐까?
꽤 넓은 평지에는 낙엽송과 소나무 신갈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가 섞여 자란다.
“여기가 지경입니다.” 다시 준.희 님이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이정표가 눈에 띈다. 주변은 과거 꽤 큰 화전(火田)이 있었을 만큼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일본잎갈나무가 주요 나무로서 일부러 가꾸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무 사이 소나무 등이 많이 잘려져 있다.
독경산 (獨經山 683.2 )
지경에서 다시 산길은 급하게 아래로 떨어진다. 내려가는 길 끄트머리에서 오른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꽤 높은 산이 서 있는데 지도를 보니 독경산이다. 가로질러 간다면 금방 오를 수 있을만큼 가까워보이지만 애석하게도 산길은 그 반대편인 왼쪽으로 달린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산길은 큰 S자 형태로 이어지나보다.
높낮이가 크지 않은 구릉 같은 산길을 걷는다. 아무리 가도 앞서 간 사람들의 흔적조차 안보인다. 내리막이나 평지성 산길에서는 뛰다시피 걸어야한다. 오른쪽으로 멀리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그렇게 얼마간 가다보니 꽤 넓은 임도가 나오는데 지도상에는 별다른 표시가 없다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인 듯 누군가가 의자도 한 개 갖다 놓았고 텐트를 치고 야영한 흔적도 보인다. 이곳은 낙동정맥을 타는 산꾼들이나 자전거를 타고 임도를 달리는 바이킹족이나 쉬어가기에 적당한 장소다. 나도 바위 위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서서 빵과 사과로 요기를 했다.
이곳에서 쉬어가라고 누군가 의자를 갖다 놓았다.
저 바위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간식을 먹으며 쉬어간다.
마음은 임도를 따라가고 싶지만 낙동정맥 산길은 저 왼쪽 숲으로 들어간다.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 독경산으로 오른다. 산으로 오르기 전 고개가 있는 곳까지는 편한 능선길이다. 이름 모를 고개를 지나고 나서부터 짧은 암릉길일 지나 아주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헬기장이 있는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는 산불예방을 위한 기상관측탑이 세워져 있다.
독경산을 올려다보면서 걷는다.
경사도 급해지고 작은 바위도 나타난다.
9시 40분 마침내 독경산 정상에 도착했다. 윗삼승령을 출발한지 5시간 걸렸다.
정상에는 헬기장과 무인 산불감시탑이 있다.
독경산은 이 주변에 성왕사(成王寺)와 오현사(烏峴寺) 등 절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여 독경산(讀經山)이라 부르며 호로 우뚝 솟아 있는 산이라서 獨經山이라 쓰기도 한다. 산이름이야 어떻든 이 산의 봉우리까지 오르는 것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창수령 (자래목이)
변변한 정상석 하나 서 있지 않은 독경산에 오래 머물 일이 없다. 주변을 둘러보고 또 준.희 님이 걸어놓은 정상 팻말을 인증하고 서둘러 하산한다. 시간은 벌써 9시 30분 지나 10시를 향해 달린다. 출발지인 윗삼승령에서 걸어온 거리가 약 14 km 이니 오늘 걸어야 할 전체 거리 30 km 의 반쯤 지나왔다. 산행 마감시간인 오후 3시 30분까지는 5시간 30분쯤 남았으니 얼추 시간이 맞는다. 잘 하면 조금 일찍 도착할 수도 있겠고 지금까지 걸어온 속도대로 걷는다면 늦어도 마감시간 전에 도착하는 것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독경산을 내려가면서 바라본 GS E&R 풍력발전단지. 산길은 창수령을 지나 왼쪽 능선으로 이어진다.
창수령은 달리 자래목이라고도 부른다.
풍력발전단지로 들어가는 길. 낙동정맥길은 여기서 왼편에 있는 능선으로 오른다.
급한 내리막 경사를 내려가면서 멀리 GS E&R에서 경영하는 풍력발전단지를 본다. 마치 들판에 선 거인처럼 하얀 탑들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도 장관이다. GS E&R는 2014년부터 2024년까지 10년간 이 곳에 총 300 MW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풍력발전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며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하고자 250억원의 발전기금을 출연한다고 한다.
독경산에서 급경사를 내려와 또 작은 봉우리를 넘어 내려오다 보니 왼쪽으로 급이굽이 흐르는 도로가 보이고 자동차가 힘겹게 고개를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곧 이어 산길은 창수령에 이르러 도로를 만난다.
창수령은 동해쪽에 있는 영덕군 창수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고개이름이며 고개 모양이 자라목처럼 생겼다 하여 자래목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영양이 고향인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 중 제 3 부 <그 해 겨울>에서 주인공 영훈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바다에 몸을 던지기 위해 이 창수령을 넘는다. 고갯마루를 오르면서 펼쳐진 아름다운 설경에 도취된다.
<창수령, 해발 칠백 미터 ㅡ.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오, 그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그 눈 덮인 봉우리의 장려함, 푸르스름하게 그림자진 골짜기의 신비를 나는 잊지 못한다. 무겁게 쌓인 눈 때문에 가지가 찢겨버린 적송, 그 처절한 아름다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눈 녹은 물로 햇살에 번쩍이던 참나무 줄기의 억세고 당당한 모습, 섬세한 가지 위에 핀 설화로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서 있던 낙엽송의 우아한 자태도 나는 잊지 못한다. 도전적이고 오만하던 노가주나무조차도 얼마나 자그마하고 겸손하게 서 있던가.
수줍은 물푸레 줄기며 떡갈 등걸을 검은 망사 가리개처럼 덮고 있던 계곡의 칡넝쿨, 다래넝쿨,그리고 연약한 줄기 끝만 겨우 눈 밖으로 나외 있던 진달래와 하얀 속새꽃의 가련한 아름다움.
수십년생의 싸리나무가 밀생한 등성이를 지날 때의 감격은 그대로 전율이었다. 희디흰 눈을 바탕으로 선 잎진 싸리 줄기의 검은 선, 누가 하양과 검정만으로 그 화려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고고함녀서도 삭막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그 해 겨울처럼 눈이 내리지 않은 창수령에 도착했다. 영양군 무창리와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를 잇는 고개다. 고갯마루에서 GS E&R 이 조성한 풍력발전단지로 이어지는 도로가 갈라져 나 있다. 내가 고개에 내려서자 풍력단지쪽에서 차 한 대가 미끌어져 내려와 영양쪽으로 내달린다. 고갯마루의 풍경은 이문열의 소설에서 묘사한 것처럼 아름답다거나 몽환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춥지는 않지만 겨울의 스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게다가 난 몸도 지쳐가고 시간에 쫒겨 이 곳에서 도로를 따라 걸으면 좋겠다는 유혹을 느낀다.
울재 (蔚峙 485 m)
창수령에서 끊어진 정맥길은 GS E&R 풍력단지로 가는 도로 왼쪽으로 조금 올라서면 다시 이어진다. 높낮이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린다. 낙동정맥 산줄기는 강줄기만큼이나 구불구불 이어진다. 왼편에 멀리 오늘의 목적지인 맹동산 풍력발전단지가 보이는데도 산길은 오른쪽으로 굽어 달린다. 풀섶 우거진 곳에서 제대로 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울 때는 어김없이 선답자들이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시그널이 바른 길로 인도한다.
그리고 GS E&R 풍력발전단지 경계에서 다시 왼쪽으로 돌아 서서히 고도를 낮춘다. 백두대간 길과 마찬가지로 낙동정맥에도 무덤이 많이 보인다. 누구나 후손들이 영화를 누리며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명당자리를 찾다보니 대간길이나 정맥길의 능선 끝자리에 조상을 모시는 것이다.
돌무더기가 길 양편으로 가지런히 치워져 있어 마치 누군가 일부러 정리해 놓은 느낌이 든다.
낙동정맥은 GS E&R 풍력발전단지 바람개비 바로 앞에서 왼편으로 꺽인다.
울치로 내려서기 전 맹동산쪽 풍력발전단지( Acciona )를 조망한다.
울치 - 고개가 너무 높아 울면서 넘었다 하여 울치라 불렀단다.
이름이 참 정겹다. 울면서 넘은 고개 울치
어제 저녁 이후로 변변한 식사를 하지 않은 탓에 시장기가 몰려온다. 왼쪽 멀리 보이는 바람개비가 오늘 내가 가야할 목적지인가본데 실제 거리는 얼마인지 모르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까마득하다. 오른쪽 발목에 통증이 느껴진다. 신발끈이 헐거워진 채로 오래 걸으면서 나도 모르는 새 무릎과 발목에 부담이 간 모양이다. 허기도 달래고 발목 근육도 풀어줄 겸 잠시 양지쪽에 배낭을 내려놓고 낙엽 위에 앉았다. 앞으로 평생 쓸 무릎인데 산행할 때 조심하라던 친구들의 충고가 생각난다. 나는 그런 충고에 대해 무릎은 쓰면 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며 내 나름의 이론을 내세우곤 했다. 산을 오르내리다보면 허벅지든 장단지든 근육이 늘어나서 관절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여줄 것이라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런데 매번 30 km 넘는 거리를 걸으면서 이렇게 발목과 무릎에 통증을 느낄 때면 나의 이론을 지탱하던 지지대가 무너지고 허무감을 느끼게 된다. 아직 수 십 년은 더 써야 하는데. 나는 무얼 위해 이렇게 무리한 산행을 이어나가는 거지? 이건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백두대간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까지는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야생화를 보고 단풍과 겨울 눈 덮인 풍경에 매료되곤 했는데 그런 것도 좋지만 백두대간을 걸으면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는 말에 선뜻 동참했었다. 정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지리산에서 금강산 진부령까지 걸으면서 크고 작은 감흥을 받았고 이제까지 몰랐던 우리나라 지역의 풍물이나 지리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되었으며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상당히 큰 성취감을 얻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그 다음 목표로서 낙동정맥을 택했고 지금 다섯 번째 산행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빵과 사과를 먹고 소염진통제 한 알을 삼켰다. 아직 남은 거리가 상당한데 통증이 더 심해지기 전에 취할 수 있는 조치다. 신발끈을 단단히 조이고 다시 길을 걷는다. 한결 편해진 느낌이다.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자칫하면 왼편 낭떨어지로 구를 수도 있다. 스틱에 힘을 줘가며 걸으니 발목 통증이 조금 완화된 느낌이다.
11시 30분 한낮의 태양볕으로 포근해진 기온 속에 울재(蔚峙 485 )에 도착했다. 영양읍 양구리와 영덕군 창수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고개가 높아 울면서 넘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 고개는 웃으면서 넘는 곳이 없는가보다. 고개를 넘으면 반가운 님이 기다리는게 아니라 님과 헤어져 울면서 넘어가는 고개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고개가 아니라 먹고 살 수 없어 고향을 떠날 때 고갯마루에서 뒤돌아보며 눈물을 훔치는 고개다. 장에 가서 물건을 팔아 선물을 사 들고 기쁨에 찬 가족의 얼굴을 그리며 넘는 고개가 아니라 힘들여 농사지은 물품을 공물이라는 이름으로 관리에게 수탈당해 억울해서 울고 넘는 고개다. 이처럼 우리나라 고개에는 한이 쌓여 있어 넘을 때 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고개인가보다.
맹동산 (762 m)
나는 이 고개를 지나면서 숨을 몰아쉰다. 작은 버스 한 대가 구불구불 고갯길을 내려간다. 왼편으로 멀리 산마루 위에 풍차가 돌아간다. 그 전에 넘어야할 봉우리가 하나 둘 셋…. 정말 저 봉우리를 다 넘어가야 하는 건가? 산줄기의 모양도 선명하지 않다.
울재에서 다시 왼편으로 굽어지는 산길을 따라 봉우리 (527봉) 하나를 넘으니 한옥식으로 단아하게 지어진 사당이 하나 나타난다. 단청 채색도 되어 있지 않고 사당 이름이 적힌 편액(扁額)도 없다. 아마 지어진지 오래 되지 않은 신축 건물인듯한데 건물 모양은 전통 한옥 양식으로 멋지고 주변에 느티나무도 수령이 꽤 오래된 것이 원래 사당이 있던 자리에 건물만 새로 지은 느낌이다.
저 많은 봉우리를 다 너어야 한다.
527 벙을 넘으니
한옥으로 단아하게 지어진 당집이 나타난다.
예전 당집의 모습 ( 사니조은 님의 블로그에서 펌)
소나무 사이로 창수령쪽 GS E&R 풍력발전단지가 보인다.
산길은 계속 동쪽으로 벋는다.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그 앞에 더 큰 봉우리가 떡 버티고 있고 그 봉우리에 올라서면 더 높은 산이 서 있다. 지난 번 1회차때 면산을 오를 때 힘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다행히 이번에는 산이 그리 크지 않은 덕에 그런 악몽이 떠오르려 할 때쯤 눈앞에 첫번째 커다란 풍력발전기가 나타났다. 풍력발전단지에 들어서면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걷게 될 테니 걸음도 훨씬 빨라지리라.
12시 30분 마침내 맹동산 풍력발전단지에 도착했다. 울치재를 떠난지 한 시간만이다. 이제는 제시간 안에 목적지인 삼의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점점 확신으로 다가온다. 콘크리트 길에 올라서니 주변에 나무가 없어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여기저기 우뚝우뚝 서 있는 풍차가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12:30분 맹동산 풍력발전단지에 도착한다. 이 발전단지는 스페인의 Acciona 사에서 투자한 설비다.
저 앞에 있는 봉우리가 맹동산인줄 착각했다. 실제로는 여기서 약 6 km 임도를 따라 걸어야 한다.
여기는 스페인의 악시오나(Acciona) 에너지 코리아사가 투자하여 조성한 풍력발전단지다. 각 1.5 MWh 의 전기를 생산하는 벌전기 41기를 맹동산 일대에 건설하여 매년 180,000 MWh의 전기를 생산하는데 이는 5만 가구가 연간 사용할 수 있는 용량이라고 한다.
풍력발전기는 낙동정맥 능선길을 따라 세워졌다. 쉼없이 돌아가는 프로펠러 소리가 웅웅거린다. 오랜만에 터진 조망에 이국적인 풍경을 만나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다음 목적지는 맹동산이다. 이렇게 포장도로를 따라서 걷다보면 느닷없이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OK 목장을 지나면서 문득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버스에서 산대장이 설명한대로 J 40이라 써 있는 발전기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착각을 나만 한게 아닌가보다. 조금 더 진행하다 보니 맞은편에서 산님 한 명이 터덜터덜 내려온다. 얼핏 생각에 저 분은 맹동산에 올라갔다가 하산지점을 찾아 다시 내려오는 줄 알았다.
산님 : 마지막이에요? 제일 후미인가요?
나 : 네
산님 : 뒤에 몇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거에요? 저 아래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야 하는거 아닌가요?
나 : 아닐겁니다. 아직 맹동산에도 못왔는데요.
그 분은 오늘 처음 참가하였는데 다른 산악회보다 훨씬 힘들다고 한다. 콘크리트 길을 걸으니 무릎이 아프다며 절뚝거린다. 콘크리트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는 의구심에 산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길 따라 계속 가세요. 맹동산 정상석은 임도 옆에 깍여진 절벽 위에 있어요. “
저 곳은 Acciona 사에서 투자한 2차 풍력발전단지인것 같다.
발전단지는 낙동정맥 능선을 완전하게 파헤쳤다. 그 위에 임도를 건설하고 발전기를 세웠다.
우리는 이 곳에서 또 한 번 발전과 보존이라는 상호 대립의 개념을 반추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밋밋한 구릉이다. 그 중 멀찍이 주변 능선보다 조금 솟아 있는 곳이 보인다. 길 가에는 선답자들이 팬스나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시그널이 아직 내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슴을 알려준다. 졸지에 나의 일행이 된 산님은 그 사이 내 뒤에 쳐진 채 힘들게 따라온다.
대장 말대로 맹동산 (762 m)은 임도 옆 절개지 끝에 있었다. 낙동정맥 산줄기 위에 주변 산 중의 맹주(盟主)로서의 위엄은 고사하고 비라도 세차게 퍼부으면 언제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것이 마치 위태롭게 자리는 보전하지만 겨우 체면만 유지하는 퇴락한 양반 같은 모양이다. 원래 맹동산은 지대가 높고 사철 거센 바람이 몰아쳐 나무가 크게 자랄 수 없으므로 민둥산이라 부르다가 명동산이 되었고 경상도 사투리식으로 변하여 지금처럼 맹동산이 되었다 한다.
온전하게 반이 잘려나간 맹동산 정상 봉우리
정상에는 작은 돌 정상석이 묵묵히 바람개비 돌아가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태산명동서일필 (泰山鳴動鼠一匹) 이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독경산과 더불어 이번 구간의 대표적인 산인데다 새벽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힘들게 달려와 마주한 산의 초라한 모습이 마치 새앙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기업의 목적은 이윤을 내는 것이라지만 번듯한 산줄기를 갈기갈기 찢어 그 위에 발전단지를 건설했으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산줄기 모양이라도 그럴 듯하게 갖춰놓아야 하지 않을까? 백보 양보하여 전체 산줄기를 복원하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맹동산의 정상 주변이라도 위험하지 않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장치를 해놓아야 할 것이다.
하삼의리(下 三宜里)에서 산행을 마치다.
길따라 나 있는 풍력발전기의 번호를 유심히 살피면서 진행한다. 산행 안내문에 I 36번에서 우틀하고 다시 J 40번에서 임도 따라 내려가라 했다. 길 가에는 얼마전까지 쌓여있던 눈이 아직 조금 남아 있어 우리가 겨울 끝자락에 서 있슴을 일깨워준다. 기분상으로는 봄이 불쑥 찾아올 것 같다. 길 오른쪽으로 빈 밭이 풍성했던 계절을 추억하며 다가올 봄을 기다린다.
오후 2시 그 많던 바람개비가 듬성듬성해지더니 마침내 마지막 바람개비까지 왔다. J 40 이라 써 있는 풍력발전기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좁은 소로를 따라 내려간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길 위에 얼음으로 남아있다.
J40 발전기 앞에서 오른쪽 임도를 따라 하삼의리로 내려간다.
맹동산 비탈밭에서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농장으로 가는 임도가 약 2.3 km 이어진다.
“아직 멀었나요? “ 함께 걷던 산님이 힘이 드는지 조바심을 낸다.
“조금만 가면 돼요. 거의 다 왔어요” 산꾼들이 흔히 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종착지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길 왼쪽으로 난 개울에는 두터운 얼음짱 밑으로 봄이 흐른다. 약 2 km 되는 임도를 천천히 걸어 30분 걸려 내려왔다. 마감시간 30분 전에 여유있게 도착했으나 다른 이들은 벌써 내려와 라면과 소주로 요기하고 따뜻한 햇볕을 쪼이고 있다. 어떤 이는 개울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족탕을 즐긴다. 모두 무척 한가로운 모습이다. 나도 잠시 개울에 내려가 찬물에 손을 씻었다.
길가 계곡에는 얼음짱 밑으로 봄이 흐르고 있다.
오후 2시 30분 하삼의리에서 산행을 마친다.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하여 10시간 걸렸다.
하삼의리 –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지명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어떻게 읽을까? ‘하싸므리’라고 발음할 듯하다. 삼의리는 상 중 하로 구분되어 있다. 원래 ‘산밑골’이라고 불렀다는데 산 아래 있는 골짜기라는 말이다 이를 한자로 삼의리(三宜里)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마을 이름에 맞게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4대 독자 김씨 집안에 참한 규수가 시집을 와 떡두꺼비 같은 아들 셋을 낳았다. 귀한 아들을 얻어 이를 의남(宜男)이라 불렀다. 마땅하다 또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이렇게 아들 셋을 두어 삼의(三宜)라 하고 각각 윗마을 중간마을 그리고 아랫마을에 제급냈다.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을 상삼의리, 중삼의리 그리고 하삼의리라 불렀다.
버스는 금방 출발하지 않았다. 발이 빠른 선두팀에서 몇 명은 봉의곡으로 하산하지 않고 다음 구간인 포도산까지 진행하였는데 두 사람이 제 시간에 하산하지 못했다. 하릴없이 4시까지 기다리다가 그들이 박점고개쪽에서 내려오고 있다 하여 버스로 내려가 그들을 태우고 서울로 향했다.
다시 한 번 긴 산행으로 지친 몸을 버스 의자에 눞이고 청송휴게소를 거쳐 오후 8시 30분 서울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