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별명 / 정선례
해마다 학기가 시작되는 봄이면 문학관에서 가방을 나눠 준다. 면 100% 친환경 소재 에코백(eco bag)이다. 나는 진한 회색 가방을 받았다. 3년째 문학반 수업을 함께 받아 친해진 해남 사는 친구가 받은 가방은 진한 감색이다. 이것도 내가 좋아하는 색상이다. 욕심을 냈더니 가지란다. 어깨에 매보니 끈이 부드럽고 흘러내리지 않는다. 나눠 주고도 몇 개 남은 게 보인다. “아야, 너 저 직원하고 친하던데 지인 찬스 써 봐라.”며 등 떠밀었더니 나를 좋아하고 착한 연주는 두말않고 일어선다. 개나리꽃보다도 더 노랑 색깔의 가방을 받아와 건네준다. 미안해서 다시 건네니 집에 있다며 그 가방을 가로세로 접더니 내 가방에 넣어준다. 산 허리 흐드러지게 피어난 진달래 꽃인양 화사하게 웃는 연주의 미소가 소담하다.
“고마워, 항상 네 옆에 앉아야겠어.”
“그래라 그래.”
내가 좋아하는 에코백은 천으로 만든 친환경 가방이다. 이 가방을 언제부터 좋아했더라? 그것은 아마도 공간이 넓어서 물건이 많이 들어가는 아이들 기저귀 가방으로 사용할 때부터였을것이다. 이 가방은 안의 크기가 넓어 활용도가 높다. 도서관에서 책을 여러 권 빌려 넣을 수 있고 우산이나 보온 보랭이 가능한 물병도 냉장고 속의 김치처럼 항상 담겨 있다. 단점은 칸이 나눠져 있지 않아 물건이 섞이고 가운데 똑딱이나 지퍼가 없어 소지품이 자칫 쏟아지기까지 한다.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려왔다. 상견례 날짜를 잡았다. 친구와 그날 입고 갈 옷차림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방은 어떤 걸 들고 갈 거냐고 내게 묻는다.
“가방?”, “그래, 아들 얼굴 체면이 있는데 설마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가방 들고 나가지는 않을 거지?”
벽에 걸린 가방을 보니 전부 에코백이다. 그날 하루 쓰려고 가방을 새로 장만하기도 뭣하고. 이를 어쩐다? 며칠 후 친구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아직 사지 않았으면 자기 가방 가지고 나가란다. 감자 심느라 바쁜 데다 거리가 있어 미처 못 갔더니 오지랖 넓은 내 친구 기어이 자신이 아끼던 검은색 구찌백을 갖고 왔다. 어떤 옷차림에도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고급스러운 가방이다. “머리도 미용실에서 만지고 불편해도 운동화 말고 구두 신고 나가라.” 미덥지 않은지 한마디 덧붙인다. “그래, 그래 알았어. 다녀와서 보고하마.”
21세기는 친환경 시대라고 흔히 말한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어떤 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 자연스레 친환경적인 주부가 되었다. 농사도 수확이 덜 나고 품질이 떨어져도 가능한 농약이나 비료를 덜 치고 생산한다. 자급자족이라서 가능한 농사법이다. 그 밖에도 집에 새로운 물건을 들일 때는 친환경으로 만든 제품인지 살펴본다. 얼마 전에도 딸이 에어프라이어 사 준다고 회사별로 추천한 상품을 보여 주며 고르란다.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 물건이 없어도 크게 불편 없이 살아왔는데 좀 더 편리해지려고 또 산다는 건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게 친환경 여인이란 별명이 붙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물건을 집에 쌓아 두고 산다. 가방도 종류별로 예닐곱은 갖고 있다. 정해진 공간을 물건으로 꽉 채운 집을 방문하게 되면 부럽다기보다 답답하게 보인다. 어떤 이들은 고가의 신상 가방이 나오면 사야 직성이 풀린다고도 들었다. 그네들의 경제적인 여유가 부럽다. 그렇지만 명품 가방에 향수가 아닌 에코백에 책을 넣고 다니는 지금의 내 모습도 그리 나쁘지 않다. 부족함 속의 충만이랄까. 이 글을 읽은 이들은 내게 천 가방이 여러 개 있어 번갈아가며 맬 거라 생각하겠지만 실은 두서너 개밖에 없다. 누가 집에 와서 가방을 가리키며 이쁘다고 하면 망설임 없이 건네서 들어온 만큼 금세 나간다. 예전의 나도 그렇게 받아오기도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