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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 – 133위 118° 김 마태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
133위 118° ‘하느님의 종’ 김 마태오
이름 : 김 마태오, ‘하느님의 종’ 김 마르티노 子
출생 : 1829년, 연풍
순교 : 1868년, 장사, 충주
김 마태오[1]는 충청도 연풍(延豊) 사람으로 일찍이 천주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했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였다. 그의 집안은 ‘하느님의 종’ 부친 김 마르티노와 아들 김 마티아까지 삼대가 모두 입교한 성가정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김 마태오의 가족은 다행히 박해자의 손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마침내 그의 가족에게도 박해가 몰아닥쳤다. 이때 그의 아들 김 마티아가 가장 먼저 체포되었는데, 피신해 있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순교를 결심하고 충주 진영에 자수하였다.[2]
김 마태오는 집을 떠나기 전에 부친 김 마르티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제가 관가에 들어가면 필경 포졸들이 나와서 아버님도 체포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님도 제 뒤를 따르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부친은 “오냐, 너나 관가에 가서도 마음을 변치 않도록 해라. 나는 이미 예순이 넘은 데다가 앉은뱅이니,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좋은 때를 놓치겠느냐?”라고 대답하면서 순교 의지를 확인해 주었다.[3]
진영에 자수한 김 마태오는 온몸이 쇠사슬로 묶인 채 먼저 체포된 아들 김 마티아와 함께 투옥되었다. 이때 그는 아들 김 마티아에게 “네가 나가야만 남은 식구들을 돌보고, 그들이 구령(救靈)에 힘쓰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러니 내 생각은 하지 말고 나가도록 해라.”고 당부하면서 옷을 벗어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쇠사슬 때문에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태오가 잠깐 기도를 하자 그의 몸을 감고 있던 쇠사슬이 저절로 풀려 옷을 벗어 줄 수 있었다고 한다.[4]
김 마태오가 자수하러 간 뒤, 부친 김 마르티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진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체포하러 오자, 태연하게 웃으면서 그들이 가져온 들것에 실려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러자 진영에서는 그의 손자 김 마티아를 석방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김 마태오는 부친 김 마르티노와 함께 옥에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언제나 이를 굳게 참아 냈다. 그뿐 아니라 함께 갇혀 있던 교우 12명이 형벌을 두려워해서 배교하고 나가려 하자, 큰 소리로 그들을 힘써 권면하여 신앙을 회복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부친과 함께 영장 앞으로 끌려 나가 치도곤을 두어 대 맞는 동안 하느님께 자신을 바쳤으니, 당시 부친 김 마르티노의 나이는 63세, 김 마태오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하던 날 김 마태오는 부친 김 마르티노와 함께 계응으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화답했는데, 그 소리가 노래 곡조같이 청아했고, 순교한 뒤의 안색은 생시와 같았다고 한다.[5][5.1]
[註]__________
[1] 김 마태오는 『공충도사학죄인성책』(동치 7년 6월)에 수록되어 있는 1868년 5월의 충주 진영 순교자 ‘김도현’(金道鉉)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2] 마태오의 가족이 체포되고 순교한 해는 『치명일기』(정리 번호 740.741번)와 『병인치명사적』(2권, 113-114.138-139면; 3권, 1-3면)에 모두 ‘정묘년(1867년) 또는 무진년(186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순교 행적에 “교우 12명이 함께 갇혔고, 함께 순교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점에서 볼 때, 정묘년이 아니라 무진년으로 추정된다. 정묘년에는 이처럼 많은 신자들이 같은 시기에 체포된 경우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공충도사학죄인성책』(동치 7년 6월)에 나오는 김도현을 마태오와 동일 인물로 추정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3] 『병인치명사적』, 2권, 138-139면; 3권, 2면.
[4] 『병인치명사적』, 2권, 113-114면; 3권, 1면, 김 마티아의 증언. 증언자 김 마티아는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김 마태오의 아들이었다.
[5] 『병인치명사적』, 2권, 113-114.138-139면; 3권, 1-3면.
[5.1] 충주지역 교회와 박해(「정민, ‘가톨릭평화신문’ 2021.4.11., 1608호」 외 자료 편집)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종조부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학맥을 이은 실학자이다. 남인 정약용·이벽·권철신 등과 교류하였다. 천주교를 이단사상으로 취급하던 성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등과도 가까이 지내며 새로운 학문 발전에 노력하였다. 이가환은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의 외숙으로서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 주역인 이벽과 토론 후 천주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고 세례명이 없는 점으로 보아 정식으로 입교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가환의 종조부(從祖父)인 이잠(李潛, 1660∼1706)이 숙종 때 노론을 공격하다 처형당한 적이 있다. 그 후 이가환 가문은 노론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서인의 공격과 남인의 내분, 그리고 천주교와의 관계 등으로 정치적으로 궁지에 빠진다.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사건으로 정조는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홍주(청양)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 당시 충청도에서 천주교가 왕성해지고 있던 터라 정조는 이 지역으로 그들을 보내어 교세 확산을 막는 동시에 그들이 천주교에 연루된 과오를 속죄하고 지방좌천을 통해 노론 공격도 차단하려 했다. 특히 정조는 그러한 충주 목사로 이가환을 보내어 충주지역에 퍼져 있는 지식인들의 사학(천주교)을 정학으로 바로 잡아 더 이상 삼남 지방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죽자(1800) 노론들과 정순왕후가 공조하여 신유박해(1801)를 일으켜 남이 지도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때 채제공 이후 남인의 여수가 된 이가환과 권철신 같은 인물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인물이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받고 단식한 지 6~7일만인 1801년(순조 1년) 3월 24일에 옥사하였고, 그들 시신은 목이 잘려 거리에 버려졌다.
¶임진왜란으로 충주가 초토화하자 1602년(선조 35)에 충청 감영을 공주로 옮겼지만, 충주는 여전히 전국적인 규모의 큰 읍으로서 교통·조운·행정·경제·군사·문화·학문이 삼남 지방으로 흐르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충주는 한강 상류에 있으므로 물길로 왕래가 편리하므로 예부터 이곳에 사대부가 많이 살았다”라는 이중환(李重煥, 1691~1756)의 기록처럼 충주는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양근·광주 등의 지역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양근의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일가는 충주를 통혼권(通婚圈) 안에 포함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인척 관계를 통해 천주교가 충주로 자연스럽게 퍼져나갔다.
¶충주에 살던 권철신의 처남 남필용(南必容, ?~1801)과 권철신의 사위 이재섭(李載燮) 등이 충주 교회의 출범을 함께 도왔다. 충주의 ‘하느님의 종’ 이기연(李箕延, 1739~1802)은 권일신의 조카인 권상익(權相益)을 사위로 맞고 충주에 살며 천주교 전파에 가세하여 양반이 주축을 이룬 충주 교회가 설립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충주와 연고가 있는 23인이 유배를 갔다(『사학징의』 작배질[作配秩]). 그중 이기연 집안만을 따로 추려내면, 이기연의 아들 이중덕(李仲德)과 연풍(延)에 살던 둘째 형 이혜연의 아들 이항덕(李恒德), 셋째 형 이제연의 아들 이종덕(李宗德: 족보명은 種德)이 더 보인다. 명단에 들지 않은 이최연 부자도 포함해야 마땅하다. 여기에 여종 덕춘(德春)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집안 여성들까지 포함한다면 온 집안이 천주교 신자였던 것 같다. 이기연의 집안사람인 이관기(李寬基, 1771~1831)는 이기연의 큰형인 이세연의 장남 이문덕(李聞德, 1754~1827)의 맏아들이다. 그는 삼척공파 대종중의 종손인 이행덕(李行德)에게 입양되어 종가의 종손이 되었다. 그도 신유박해 때 사학 죄목으로 장흥에 귀양 갔다.
“서부(西部)에 사는 유학(幼學) 이관기(李寬基)는 흉적 이기연(李箕延)의 종손(從孫)인데, 사학을 전습하여 이미 지목된 바가 있다. 그의 아비 이문덕(李聞德)이 미혹되어 믿고 높이 받들어 세상이 지목하자 그의 늙은 조부(李世延)가 이를 금하였지만 안 되니, 밤낮으로 호곡하였다는 이야기가 경향 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사학징의』, 1801년 10월 11일 자 사헌부 이첩 공문)라고 쓴 것을 보면 이문덕 부자도 천주교 신자였다.
이기연의 부친 이지계(李之啓, 1703~1778)의 다섯 아들 중 장남 이세연과 일찍 죽은 차남 이혜연(1732~1775), 3남 이제연(1736~1767)을 제외하고는, 이기연 이최연 형제 및 5형제의 자식들 대부분 천주교에 입교한 상태였고, 이들 집안을 중심으로 충주 교회가 터전을 닦아 나간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충주 교회는 초기부터 이기연 집안 외에 양반층 신자 그룹의 존재가 확인되는 안정적인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1791년 12월 11일 충청감사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의 「수기」에 이름을 올린 홍장보(洪章輔, 1744~?), 홍계영(洪桂榮, 1746~1826), 최종국(崔宗國, ?~?) 등도 초기부터 이기연 형제와 서학서를 읽으며 함께 공부한 양반층 신자들이었다.
먼저 홍장보와 홍계영 두 사람이 당시 관아에 자수하며 바친 책자는 「성년광익(聖年廣益)」 제1책, 「문답(問答)」 1책, 「칠요(七堯)」 1책, 「석판진본연해(石板眞本演解)」 한글본 1책, 「일과(日課)」 한글본 1책, 「구은축문(九恩祝文)」 1책, 「여미사규정(與彌撒規程)」 한글본 1책, 「천주십계(天主十誡)」 한글본 1책, 「성사문답(聖事問答)」 1책, 「이십오언(二十五言)」 1책, 「점성수경(點聖水經)」 2책, 「만물진원(萬物眞原)」 1책, 「칠극(七克)」 2책, 「성모괴고경(聖母魁告經)」 1책, 「인진주(認眞主)」 1책 등 무려 15종 17책에 달해 눈길을 끈다.
1791년에 지방의 개인이 이 정도의 서학서를 보유했다는 것이 우선 놀랍고, 언해본이 다수 포함된 것은 집안에 여성 신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특별히 미사 전례와 기도문, 예비 신자 교육에 필요한 서책들이 대부분이어서, 1791년 당시 충주 교회가 이미 첨례와 교리 교육이 대단히 활성화된 상태였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최종국은 「성교일과」 1책, 「천주십계」 한글본 1책을 바쳤고, 이기연은 「이십오언」 1책과 「성세추요」 1책을 더 바쳤다. 기본 교리서 공부에도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홍장보는 「수기」에 직위가 참봉으로 나온다. 그는 풍산 홍씨로 충청도의 사학을 이끌던 홍낙민(洪樂敏, 1751~1801)과 한집안이었다. 홍장보는 1790년 선릉참봉을 지냈고, 1795년에 감역(監役), 1799년 아산현감, 1800년 옥천군수를 지낸 인물이었다. 또 같은 집안인 홍계영(洪桂榮, 1746~1826)은 홍낙증(洪樂曾)의 아들로, 족보에는 홍정모(洪鼎謨)란 이름으로 올라 있다. 자는 주빈(周賓), 호는 월도(月島)다. 최종덕은 따로 알려진 사실이 없다.
족보의 기록이나 이후 홍장보의 벼슬 이력으로 볼 때 두 사람은 1791년 서학책을 바치고 배교를 선언한 뒤에 천주교와는 발을 끊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충주 교회는 1785년 출범 당시부터 이기연 형제를 정점에 두고, 남필용, 이재섭, 권상익, 홍장보, 홍계영, 최종국 등 충주지역 유력 가문의 자제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서학서를 깊이 연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1775년 홍유한이 순흥으로 이사 가자 그와 좀 더 가까운 곳에 살겠다며 1776년 여사울에서 충주로 이주했던 홍낙민 집안도 초창기 교회 형성에 가세했을 것이다. 홍장보, 홍계영이 다 그의 집안인 점에서 그렇다.
이 중 최종국의 경우는 신유박해 당시 그의 아들 최길증(崔吉曾)이 이기연에게 사학을 배운 죄로 언양(彦陽)에 도배(徒配)되었고, 이기연과 종유(從遊)한 죄로 신천(信川)으로 귀양 간 최종해(崔宗海) 또한 아마도 최종국과 형제간이거나 사촌 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 중 익산(益山)으로 도배된 최조이(崔召史) 또한 최종국 집안의 여인이었을 것이다.
¶중인 신분인 아전 이부춘 부자와 아전의 처 권아기련의 충주지역 교회 전파에 힘썼다. 신유박해 때 충주 신자로서 처형된 사람은 이기연, 이부춘, 이석중, 권아기련 등 네 사람이다. 작배질(作配秩, 유배자 명단)에 이름을 오른 충주 신자만 23명이다. 양반 이기연과 더불어 이부춘(李富春, 1734~1801) 이석중(李石中, 1773~1801) 부자가 충주 복음 전파에 노력하였다. 이부춘은 이기연보다 다섯 살 위로, 충주 감영 아전에 이어 비장 노릇을 했다. 그는 이기연에게 사학을 배웠다. 『사학징의』 결안초(結案招)의 최후 진술에서 이부춘은 “이기연과 뒤얽혀 사설에 미혹되어 믿었고, 십계(十戒)와 오배(五拜)를 그치지 않고 강습하였습니다. 주일의 모임에 어지러이 함께 참여하면서 먼저 집안에서부터 이웃 마을의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더러움에 물들게 하지 않음이 없어, 문득 와주(窩主)가 되었습니다. 집안 제사에 참여하지 않아 윤리와 기강을 없애 끊어버렸습니다”라고 자백하고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십계와 오배를 쉬지 않고 강습했다.”라는 것은 ‘이 두 가지를 신자 생활의 기본으로 삼았다’라는 말과 같다. ‘오배’는 천주교 신자들이 날마다 행하는 조과경(早課經)의 제1양식 중 오배례(五拜禮)를 말한다. 아침마다 다섯 가지를 다짐하며 절을 올리는 의식이다. 첫째는 “천주를 믿어, 일체의 삿되고 망령된 일을 모두 끊어 버리나이다(信天主, 一邪妄之事俱棄絶)”이고, 둘째는 “천주께서 보우하사 나의 모든 죄를 온전히 사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望天主保佑全赦我諸罪)”이다. 셋째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선하신 주님을 만유의 위에 사랑하고 공경하나이다(愛敬至尊至善之主于萬有之上)”이고, 넷째는 “한마음으로 제가 지은 죄와 허물을 통회하고, 다시는 감히 천주께 죄를 얻지 않을 것을 다짐하나이다(一心痛悔我之罪過, 定心再不敢得罪于天主)”이며, 다섯째는 “성모께서 천주께 전구하사, 내게 항상되이 마치는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비나이다(懇祈聖母轉求天主, 賜我恒終恩佑)”이다. 여기에 ‘십계’와 ‘오배’의 각 조목 마다에는 구체적인 생활지침들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그 내용과 방식은 최해두의 『자책』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는 당시 충주 교회의 신자 교육이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실천적이고 체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충주 아전 집안 출신이고 또 아전의 처였던 과부 ‘하느님의 종’ 권아기련(權阿只蓮, ?~1801)의 역할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녀는 이부춘의 처 이조이(李召史)와 이부춘의 사돈댁 황조이(黃召史), 이부춘의 며느리인 이조이(李召史), 정조이(鄭召史)와 함께 충주 여성들을 교회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신유박해 때 한꺼번에 귀양 가서 흩어졌다.
¶이상에서 충주 교회의 특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이기연을 정점으로, 깊은 교리 지식을 갖춘 양반 지도자층이 중심에 존재했다. 둘째, 이기연, 최종국, 이부춘 등 부자간 또는 며느리로 대를 이은 교우 가정이 여럿 있어 가족 신앙의 모범적 형태를 갖추었다. 셋째, 양민과 신분이 낮은 백성을 이끈 아전 출신 이부춘 부자에게 카리스카가 있었다. 이들은 십계와 오배례 같은 실천적 신앙 지침을 교리 교육의 근간으로 삼아 포교에 매진하였다. 넷째, 권아기련을 중심으로 여성 조직의 일사불란한 활동 체계가 작동되고 있었다.
충주 교회는 신분별, 직능별, 성별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졌고, 교리뿐 아니라 신앙 활동에도 대단히 활성화된 안정적인 교회였음이 확인된다. 이들은 똘똘 뭉쳐 하나 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하지만 신유박해의 충격파로 충주 교회의 기간 조직은 한동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와해하고 말았다.
¶충주지역에 대한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신자들은 오히려 늘어나면서 공고해졌다. 그 이유는, ①충주가 박해를 피해 영남으로 가는 길이 이어져 있면서도 산간 지역이라 숨어들기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②양반·중인·천민이 혼연일체 하여 철저히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을 목숨 바쳐 실천했기 때문이다.
현재 청주교구 교현동성당이 자리한 야현(冶爐) 풀무고개(쇠를 달궈 연장을 만드는 풀무간[대장간]이 있었던 곳)에서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있는 마즈막재가 순교터이다. 이곳으로 충주, 경상도 북부, 강원도 등지에서 잡혀 온 천주교도들은 마즈막재를 넘어와 숲거리에서 위주치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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