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월 24일 2021년 2월 15일 향년 89세 새로운 세상으로 가시다
장례위원회는 백기완 선생의 발인인 2월19일 영결식 등에 대해 아래와 같은 계획을 발표했다.
◊ 발인제 : 오전 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 노제(1) : 오전 8시30분 통일문제연구소
◊ 노제(2) : 오전 9시 대학로 소나무길
사회 – 박래군 상임집행위원장
조사1 – 김세균 상임장례위원장
조사2 – 박석운 상임장례위원장
조사3 – 이형숙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사4 - 김수억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조무 - 한국민족춤협회 집단무
◊ 운구행렬 : 오전 9시30분
대학로 노제 장소 – 이화사거리 – 종로5가 – 종각역 사거리 (거리굿) - 세종로 사거리 – 서울광장
◊ 영결식 : 오전 11시 서울광장
사 회 – 김소연 상임집행위원장
초밝히기 - 신철영 상임장례위원장, 신학철 상임장례위원장
민중의례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 (416합창단. 이소선합창단. 평화의나무합창단)
약력보고 – 양기환 (대변인)
조 사1 - 문정현 신부 장례위원회 고문
진 혼 무 – 한국민족춤협회 서정숙
조 사2 - 양경수 상임장례위원장
조 시 - 송경동 시인
조 사3 - 김미숙 김용균 재단이사장
조 사4 - 명진 장례위원회 고문
조 가 – 정태춘
추모영상
유족인사 – 백인순 (동생)
호상인사 – 양규헌 호상
민중의 노래 합창 ('백선생님을 추모하는' 민중가수들)
헌 화
◊ 하관식 : 오후 2시 마석 모란공원
사회 : 신학림 홍보위원장
추모사1 : 코레일고객센터 지부장 조지현
추모사2 : 전태일재단 이사장 이수호
추모가 : 문화노동자 박준
◊ 평토제
사회 : 박종부 치산위원장
소리굿 : 한국민예총 풍물굿위원회
유족인사 : 장남 백일
호상인사 : 임진택 호상
조 사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백기완 선생님.
선생님께서 각종 거악에 대해 포효하며 호통치시던 그 늠름한 기상과 쩌렁쩌렁한 목소리, 또 담대하고도 맛깔나는 수많은 시와 노래들과 그 호방한 웃음과 따뜻한 목소리, 그리고 핍박받아 울고 있는 노동자·민중과 함께 흘리는 절대적 연대와 따뜻한 공감의 눈물, 이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돈없고 빽없는 이 땅의 민초들은 민중권리의 옹호자, 노동자·민중의 호민관, 백기완 선생님을 잃은 슬픔으로 목이 메이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저희들이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백범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일하시면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파쇼적 만행에 대해 선생님께서 앞장서 저항하고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조직하실 때였습니다. 특히 1973년12월에는 유신독재 체제를 끝장내기 위해 선생님께서 장준하 선생님과 함께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셨었지요. 그러자 박정희 독재정권은 화들짝 놀라 “듣보잡” 수준의 폭거인, 개헌논의 자체를 금지시키는 내용으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를 발령하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지요. 선생님께서는 장준하선생님과 함께 첫 번째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구속자가 되셨지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께서 장준하선생님과 함께 군법회의에서 재판받는 모습이 도하 각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던 사진을요. 저들은 두분 선생님께서 군법회의에서 재판받는 사진을 크게 실어 대학생들과 국민들에게 고도의 공포심을 조장하려 의도하였지만, 도리어 대학생들과 국민들은 더욱 거센 저항의 길로 나섰지요. 두분 선생님의 저항으로부터 촉발된 대통령긴급조치는 이후 민주화투쟁세력과 유신독재세력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쟁투가 벌어지면서 각종 무리수와 파행을 거듭한 끝에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결국 6년뒤 1979년 부마민중항쟁으로 발전되고 난 뒤 독재자 박정희는 심복의 총에 암살당하게 되면서, 유신독재체제는 그 종말을 고하게 되었지요.
선생님께서는 전두환 일당의 신군부세력에 대해서도 최초의 저항을 조직하셨었지요. 박정희 암살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79년11월24일 비상계엄하에서 서울명동 소재 YWCA강당에서 결혼식을 치른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모은 후,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감행하셨지요. 이 시위로 선생님께서는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로 끌려가 실로 잔인무도한 고문을 당하시고, 평소 82kg이던 몸무게가 38kg으로 줄어들 정도로 몸이 만신창이가 되셨지요. 선생님께서 옥중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소식을 듣고 만드신 절창인 묏비나리는 바로 절실한 민중의 노래, 투쟁의 노래가 되어,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 각 지역의 절실한 저항의 노래, 투쟁의 노래로 확산되고 있지요.
1987년 6월민주항쟁과 7·8월노동자대투쟁 이후 열린 대선 공간에서, 그리고 1992년 대선 공간에서 선생님께서는 독자적 민중후보로 나서 노동자·민중 중심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셨지요. 당시 선거공보에 표시되었던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라는 핵심 구호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IMF 외환위기 이후 해일처럼 밀어닥치던 신자유주의세계화 광풍앞에 풍전등화같은 처지에 내몰린 이땅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을 지지·엄호하는 활동에 누구보다 앞장서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힘없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리고 농민과 도시빈민 등 기층 민중들의 삶에 깊은 애정을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님께서는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에 앞장서셨습니다. 통일문제연구소의 이름판을 내걸고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그리고 핍박받는 민중들의 투쟁에, 실로 든든하고 품이 너른 크나큰 ‘기댈 언덕’으로 역할하셨지요.
재벌 앞잡이 이명박과 독재자 박정희의 후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민중들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자, 선생님께서는 분연히 떨쳐 일어 나서 마지막 투쟁의 불꽃을 불사르셨지요.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저지 투쟁, 용산참사 규탄투쟁, 쌍용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한미FTA 비준저지 투쟁, 국정원 등 국가기관에 의한 부정선거 규탄투쟁,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투쟁, 백남기농민 물대포살인 규탄투쟁, 그리고 박근혜퇴진 민중총궐기 투쟁과 범국민 촛불대항쟁 등 숨가쁘게 진행되던 민주화 투쟁과 민중대항쟁이라는 큰 전선의 맨 앞줄에서, 선생님께서는 투쟁의 상징으로 우뚝 서셨지요. 선생님께서 병상에 눕기 전의 마지막 활동들이 아니셨나 생각됩니다.
민중총궐기 투쟁과 촛불항쟁으로 저 무도한 박근혜 일당의 국정농단과 헌정유린을 끝장내는 거대한 승리를 쟁취하고서도, 민중정치, 진보정치의 미욱함으로 말미암아 투쟁의 성과는 유실되고, 지금 이땅의 민초들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평등하지만, 감염병 피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주변부 사회계층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자산불평등, 소득불평등, 교육불평등, 직업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불평등 상황은 거의 폭발직전의 상황에 이르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그 해결의 고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선생님께서 병상에서도 간절히 기원하셨던 온전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김진숙 힘내라, 노나메기” 세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겨레의 큰 어른이신 백기완선생님께서는 이 땅의 민주화와 노동자·민중의 해방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하셨습니다. 함석헌, 장준하, 문익환, 계훈제, 백기완으로 호명되는 "재야어른"의 마지막 어른이셨지요. 백선생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이제 한 시대가 저물어 간 셈입니다.
이제 저희들 후진들이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사회의 적폐청산과 진정한 민주화, 그리고 사회불평등 혁파와 노동자·민중 해방의 길로 전진해 나가야 할 과제가 남겨졌습니다.
선생님,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며,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함께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 평등·평화·통일 세상, 민중세상에서 부활하셔서 저희들에게 힘과 용기와 지혜를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고단하셨던 온갖 헌신 모두 내려 놓으시고, 이제는 부디 편안히 지내시길 기원드립니다.
저희들이 좀 더 힘을 합쳐 간절하게 노력하겠습니다.
박석운(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민중공동행동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