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는 말씀
제가 12회에 걸쳐 연재한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글들을 모두 모아 보았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는 여기에 올린 글들을 모아 언젠가 인터넷판 책자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다음 번에는 제가 친구들을 소개한 글들을 한 곳에 모아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까지 옥희, 예순, 경애, 갑배, 대령, 용우, 명호, 경호, 숙희,순례, 순자 등의 관련 글들이 있습니다. 이런 글들을 모아 앨범 처럼 만들겠습니다. 많이 애용하여 주시고 참여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소설 '도중 10회,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를 시간이 되면 연재해 보려고 합니다. 순전히 우리 도중 10회 친구들이 주인공이 되어 가명 또는 실명으로 활동하겠습니다. 친구들의 많은 제보 기대합니다. 쑥스럽다고요? 이 나이에 뮈신... 잘살아 봅시다. 하하하~~~~~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①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7-28)
5년 간의 편지, 20여 년의 만남
인생 오십을 넘게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사연이 있을 법하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하나 있고 아직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 말을 해도 믿지 않기 때문에 굳이 알리고 싶지도 않고 내가 말한다고 해서 마치 소설 같은 이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인생 역사이기 때문에 이 카페에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또 나는 짝사랑도 여러번 해 보고 고백도 한 번 해 보았지만 그 것으로 끝나고 두 번 다시 마음을 준 적이 없다. 뭐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남자의 자존심, 별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 것 때문에 그랬다.
내 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전에 쓴 글 '인연'에도 나와 있지만 내 처에게도 단 한번의 기회를 주었다. "내가 너를 나의 배우자 감으로 생각하고 1년의 기회를 줄 테니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 달라. 나는 3남 5녀의 장남이어서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동생들을 보살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전라도 사람이다." 그 당시 처는 나이 22살에 대전 중구청 직원이었다. 그리고 내 나이 28살 때였다.
내가 쓰려는 여자와의 관계는 처와의 만남 보다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나이 22살, 군대생횔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내 쫄따구로 새로 전입 온 신병하사가 하나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3살 위였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대천(지금은 보령시)에 소재한 대천여중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늦게 입대했다.
군대는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같은 계급이면 누가 먼저 짠밥을 더 먹었느냐가 서열을 결정한다. 그도 나 보다 나이는 위이지만 나에게는 깍듯한 예의를 지켰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편지를 받았다. 고참들이 읽어보는 것은 당연지사. 그 편지는 여중생 단발머리 제자로 부터 온 편지였다.
그 여중생의 이름은 전인주(가명). 대천여중 2학년. 나이는 15세. 주소는 보령군(시) 주포면 관창리 2구. 나는 신참에게 사정하여 내가 답장을 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그 여자와의 첫 만남은 이루어 졌으며 이 후 5년간의 편지와 20여년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아니 지금도 만남은 진행 중인지 모른다.
이십대 초반에 만나 사십 대 중반 까지 이어져 온 그녀와의 만남, 내 인생을 설명할 때 이 여자와의 관계를 떼어 놓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길고도 깊은 인연은 20여 년간 계속 된다.
2010년 7월 28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②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7-30)
군인 아저씨가 여중생으로 부터 펜팔을 거절 당하다.
"최하사~! 일전에 니 제자한테 온 편지 몇 통 있잖아? 갸들 누구야?" " 옛! 하사 최명환, 세 통 있었습니다. 저랑은 열 살 차이납니다. 아직 애들입니다." "아니, 애들이고 아니고는 니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혹 그 편지 좀 볼 수 없겠나." "옛, 마음대로 보십시오."
최하사는 세살 어리지만 고참인 장총찬 하사의 말에는 거절이란 단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장총찬은 편지 세 통을 받아들었다. 학생들은 보령군 주포면이 거주지이고 대천여중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장총찬은 3남 5녀의 장남이었지만 고향에 있는 동생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들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왔다. 얼마 전에는 아버지로 부터 월급 타면 집에 보내라는 편지를 받은 터였다. 또 일년 반 전, 입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로 부터 전보가 왔었다.
'총찬아기뻐해라남동생보았다'. 전보는 기본 자수 13자를 꼬박 채워 보냈다. 8번째 자식이 아들이라 너무 기쁜 나머지 부랴부랴 장남에게 알린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아버지는 뭐가 저리 좋으실까. 아무리 군대지만 집안 생각만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 밖에 없었다.
속만 썩이는 여돈생들 보다는 다른 지방 여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 본 총찬은 몹시 궁금해 하던 터였다. 총찬은 3개의 편지 중에서 그래도 내용이 괜찮은 하나를 골라 최하사에게 부탁하였다.
"최하사!" "옛! 하사 최명환! 부르셨습니까?" " 응, 그래. 그리고 앞으로는 나랑 둘이 있을 때는 관등성명 붙이지마. 알았나?" "옛! 하사...." "하지마라니까. 그리고 이 편지 세 통 중에서 이 한 통은 내가 답장하면 안될까?" "물론 됩니다. 모두 마음대로 하십시오."
총찬은 편지 쓰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잡지에 올라 있는 펜팔란의 여학생들에게 수도 없이 편지를 썼고 그런 편지 내용을 인용하여 반 친구들이 자기들 여자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펜팔 답장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장총찬이 최하사 제자에게 편지를 쓴 후 며칠 뒤 답장이 왔다.
"국군장병 아저씨께~! ..... 저는 저희 담임선생님이 잘생기고 친절히 대해 줘서 선생님하고만 편지하고 싶습니다...나라를 지켜주시는 것은 고마우나 앞으로는 저에게 편지하지 마세요. 답장은 이번 한번 뿐입니다. 대천에서 전인주 올림."
2010년 7월 30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③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8-07)
펜팔 여중생과의 첫 만남
물구나무를 서도 돌아간다는 국방부 시계. 장총찬은 드디어 1982년 여름에 제대를 한다. 청량리역을 거쳐 목포로 다시 배를 타고 고향인 섬에 도착하였다. 불섬 선착장에 도착하니 입대할 때 잘 가라고 배웅하며 손을 흔들어 주시던 마을 어르신들이 떠올랐다.
걸어서 집에 들어가니 동생들이 내 팔다리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나는 너희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너희들은 내가 그렇게도 좋으니? 마음 속으로만 생각했다. 부모님들과 마을 어른들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집에 간 첫 날 저녁에 아버님은 무거운 말씀을 하셨다. 내가 군대 가기 직전에 교통사고로 별세하신 할머님의 위로금조로 얼마를 받아 논을 사고 거기서 산출한 벼로는 생활이 어려우니 빨리 복직해서 월급을 모아 보내면 논도 더 사고 그남둥 동생들 고등학교에 진학은 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손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국영기업체 사무직으로 취직하자 그렇게 좋아 하시던 나의 할머니. 목포에서 손자 밥해 주면서 손자 몰래 뒷개에 나가셔서 파래와 게를 잡아 동부시장에 쪼그리고 앉아 생활비를 보태시던 할머니.
취직한 손자가 어쩌다 소주병이라도 한 병 사들고 가면 남겨 두셨다가 이웃집 할머니들에게 자랑하시던 할머니는 내가 군대 입대 하기 몇달 전에 별세하시며 교통사고 위로금을 남기셨다. 돌아가시면서 까지 자식들에게 몸 공양을 하신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본사에 전화하여 복직 절차를 문의하고 15일 후 복직이 가능하다는 것을 통보 받았다. 그런데 짧은 머리가 영 마음에 걸렸다. 빨리 자리기를 기원하는 수 박에 없었다. 저녁에는 여섯째 여동생 머리에 수 없이 난 곰발을 소독하고 약을 발라 주었다. 이가 드글드글하여 머리를 왕창 짤라 버리고 소독약을 발라 주니 얼마나 시원해 하던지. 소독한 솜에는 수 많은 이들이 묻혀 나왔다.
열흘 후에 본사 인사 담당자로 부터 연락이 왔다. 희망한 광주는 지원자가 너무 많아 안되고 충청남도 서천화력발전소로 가서 근무하라는 거였다.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로 부터 여비조로 15만원을 받아 빌령지인 충남 서천을 향해 떠났다.
1박 2일의 여정 끝에 도착하고 나니 40만평의 광활한 해안가에 발전소를 짓고 있었는데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일단 인사담당자에게 인사를 마치고 숙소를 문의 하였다. 직원들 숙소는 춘장대해수욕장 바로 옆에 사원용아파트와 합숙소가 있었다.
1인1실인 합숙소를 배정 받았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큰 식당과 탁구장, 테니스장 등의 부대시설이 있었고 인근 숲을 지나면 춘장대해수욕장과 검푸른 파도가 몰아치는 서해 바다가 넓게 펼쳐졌다. 마치 고향에 다시온 기분이었다.
가만. 일 년 전부터 나와 펜팔한 여중생의 고향이 이 근처란 생각이 들어 사원수첩에 있는 지도를 들여다 보았다. 아뿔싸~! 바로 옆 동네가 대천이잖아. 나는 그 날 편지를 썼다.
해수욕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춘장대해수욕장. 그래도 제법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날 나는 반바지를 입고 직원들하고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여자 분이 해수욕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리 크지 않는 키에 호리호리한 여자가 하늘거리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양산을 든 채 내가 다가가는 모습을 바라 보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열여섯살의 여중 3학년생 소녀.
장총찬은 이 첫 만남이 평생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2010년 8월 7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④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8-14)
도원결의, 앞 날을 설계하다.
1982년, 여름 춘장대 해수욕장에서의 첫 만남은 그렇게 핑크 빛이 아니었다. 그랬다. 장총찬과 전인주와의 관계는 항상 군인아저씨와 여중생 소녀와의 그런 사이였다. 장총찬은 이 간극을 영원히 좁히지 못한다. 일곱 동생들 중에서 다섯 번째 동생과 같은 나이였다. 25살과 16살...십년 차가 아닌게 다행이었다.
이들은 주로 서신을 교환했다. 일주일에 거의 한통씩이었다. 장총찬은 간혹 빼먹을 때가 있었지만 전인주는 거의 지극 정성이었다. 장총찬의 가정 형편도 어려웠지만 전인주도 아버지가 이북에서 월남하여 늦게 둔 딸인지라 어렵기는 매 한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신으로 도원결의를 한다. 기 죽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자고. 그리고 목표를 세웠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장총찬은 대학원을, 전인주는 대학교를 졸업하기로.그리고 다음해에 전인주는 천안에 소재한 충남방적에 입사를 하고 부설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장총찬은 어떻게든 대학을 가기 위해 야간대학 개설학과를 찾게 된다. 광주의 조선대학교, 대전의 숭전대학교, 강릉의 관동대학교가 물망에 올랐다. 한전은 전국에 걸쳐 사업장이 있기 때문에 직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합격이 문제였다. 장총찬은 대전에 있는 숭전대학교 야간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장총찬은 시골 아버지 등살에 못이겨 곗돈 200백만원을 타서 시골에 보낸다. 아버지는 할머니 교통사고 보상금을 합쳐 논과 밭 그리고 집을 새로 사 같은 동네에서 이사를 가게 된다. 이 논과 밭은 동생들이 대학 까지 다닐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인사 발령이 뜻대로 이루어지 않아 충남 서천에서 대전 까지 1년간 통학하게 되었다. 서천에서도 맨 끝 바닷가에 위치한 마량리에서 버스를 1시간 타고 서천시외스터미널에 내려 다시 1시간 반이 걸리는 대전행 버스를 타고 대전서 내려 택시를 타고 학교에 나가는 코스였다.
밤 열시 반에 수업이 끝나면 이번에는 교통편이 없어 서대전 역으로 가서 이리행 기차를 타고 이리 심야다방에서 아침 여섯시 까지 기다리다 다시 버스를 타고 군산에 도착, 도선장으로 가서 장항행 배를 20분 간 타고 나면 발전소행 회사 출근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세번, 고난의 행군이었다.
당시에는 회사에서 배려해 주는 분위기였지만 눈치 보여 조심스러웠고 상사들도 소문내지 말고 다니라고 했다. 대학 비용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학교 수업도 녹녹치 않았다. 다만, 강철 같은 체력만이 내 의지처가 되어 주었다. 테니스. 틈만 나면 테니스를 하면서 모든 스트레스를 땀과 함께 날려버렸다.
한남대학교(숭전대가 서울의 숭실대와 한남대로 갈라짐). 장총찬은 그 곳에서 평생의 은인인 두 분의 교수님을 만나게 된다. 한 분은 현재 충남대 교수로 재직하는 분으로 내가 대학원을 다니게 이끌어 주신 분이고 또 한 분은 교수이자 목사님으로 교양필수 과목인 '구약성서'를 한 학기 가르치신 분으로 이 분과 졸업 후에도 수년 간 성경공부를 같이 하게 된다.
장총찬과 전인주의 편지는 계속되었다. 세월은 흘러 군인아저씨와 여고 3년생은 천안에서 한 밤중에 드라마틱한 재회를 하게 된다.
2010년 8월 14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⑤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8-15)
천안에서의 짧은 재회
소불근학노후회 (少不勤學老後悔)란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는 주자 [朱子, 1130.10. 18 ~1200 중국 송나라 유학자]의 10가지 후회할 일중에서 세번째 항목이다.
주자 10회(朱子十悔)
1.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에 후회 한다. (不孝父母, 死後悔 불효부모 사후회)
2. 가족에게 친절히 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후회 한다. (不親家族, 疎後悔 불친가족 소후회)
3. 젊을 때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 한다. (少不勤學, 老後悔 소불근학 노후회)
4.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후회한다. (安不思難, 敗後悔 안불사난 패후회)
5. 부유할 때 아껴쓰지 않으면, 가난하게 된 후 후회 한다. (富不儉用, 貧後悔 부불검용 빈후회)6 . 봄에 밭갈고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 한다. (春不耕種, 秋後悔 춘불경종 추후회)7. 담장을 미리 고치지 않으면, 도둑 맞은 후에 후회 한다. (不治垣墻, 盜後悔 불치원장 도후회)8. 이성을 삼가지 않으면, 병든 후에 후회한다. (色不謹愼, 病後悔 색불근신 병후회)9. 술 취해서 망언한 것은, 술 깨고 난 후에 후회한다. (醉中妄言, 醒後悔 취중망언 성후회)10. 손님을 잘 대접하지 않으면, 손님이 떠난 후에 후회한다. (不接賓客, 去後悔 부접빈객 거후회)
장총찬은 고등학교 다닐 때 항상 책상 위에 이 세번째 항목을 붙여 놓고 매일 암송하며 살았다. 뒷 동산에 오르는 날은 큰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그리고 방학 때면 태평양전쟁사 전집(5권) 일본 역사서로도 유명한 대야망 전집(21권), 팔만대장경번역본 등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 살 돈이 없어 친구들 집에 가면 서재에 무슨 책이 있는지 살펴보고 틈틈이 남의 책을 읽은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이런 류의 서적들을 탐닉했고 '성경공부' 동아리 활동을 하게된 배경이기도 했다. 기독교 사상은 서양의 중심 철학이자 역사이다. 성경동아리에서 장총찬은 '장장로'로 불렸다. 회사에 다니기 때문에 가끔 밥값이나 막걸리 값을 냈기 때문이다.
대전에 소재한 한남대학교는 미션스쿨이어서 전교생이 1학년 때는 '구약성서' 2학년 때는 '신약성서'를 교양필수 과목으로 이수해야 했고 3학년 까지는 의무적으로 대학 교회(채플)에 출석해야 했다. 장총찬은 다른 과목은 가끔 결석했지만 대학교회는 거의 빠진 적이 없었다. 전국의 유명한 목사님들이 초청되어 설교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를 가르치는 교수님께서는 목사이셨는데 그 분의 고향이 전주여서인지 장총찬을 잘 대해 주었다. 그리고 그 분의 남동생은 전두환 정권하에서 해직된 교사였다. 그 남동생은 '글천지'라는 책방을 운영하면서 복사본 책도 만들어 팔았다. 책은 주로 이념서적이었다. 장총찬은 이때 부터 칼맑스등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론을 깨우치게 된다.
또 주간에 데모 주동 학생들은 저녁이면 이 '글천지'에 모여들었다. 도로 건너편에 잔디 밭이 있었는데 여기서 막걸리에 삼겹살을 걸쳐 먹었다. 그리고 특별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데모할 때 맨 앞장서서 분위기를 잡는 북을 풀어 헤쳐서 막걸리를 먹인 후 새벽 이슬에 말리는 의식이 거행되곤 했다. 그러면 북이 더 구슬피 운다고 했다. 술값은 또 내 몫이었다.
전인주가 장총찬에게 쓴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었다. 중학교 때는 주로 친구들 이야기였고 고등학교 때에는 이성 교제와 장래 진로 등이었다. 장총찬이 쓴 답장은 주로 세상살아가는 이치이며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된다는 등 ' 삶의 가르침' 비슷한 내용이었다.
장총찬은 대전 인근으로 발령이 나지 않자 대학생활 1년 만에 1년 휴학을 하게 되고 논산으로 발령나자 다음 해에 2학년으로 복학하게 된다. 그리고 대전에서 에비군 교육을 받다 우연히 천안에서 온 추씨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
추운 겨울날 그 분의 초청으로 천안을 방문하게 된다. 같은 성받이라고 융숭한 저녁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전인주가 다니는 학교의 기숙사를 예고도 없이 밤 늦은 시간에 방문하였다. 그날 밤은 유난히도 함박 눈이 펑펑 쏟아졌다.
갑작스런 방문으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쪽지를 남겨 두고 천안 역으로 향했다. 혹시 이 쪽지를 받으면 밤 11시 이전에 천안역으로 나오도록 했다. 열차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인연이 없어 못 만나고 가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는데 함박 눈이 쏟아지는 전등불 아래에 두 여자가 나타났다.
"아저씨~! 저 인주예요. 보고 싶었어요. 야는 제 친구고요." 특유의 당차고 생글생글한 목소리였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인 인주는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졌다.
"응~! 나도. 근데 나 지금 열차 타야돼. 나중에 보자~!" 그렇게 짧게 만나고 헤어졌다.
2010년 8월 15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⑥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8-15)
대전에서의 세번째 만남, 첫번째 동침을 허락하다.
1986년 3월 초, 논산 하숙집으로 밤 열시에 전화가 왔다. 전인주가 장총찬을 급히 찾는 전화였다. 대전에 이삿짐을 가지고 왔는데 어디인지 몰라 길 거리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였다. 장총찬은 회사 근무지인 논산에서 대전으로 통학하고 있는 대학 3학년 진급반이었다.
다급한 전화에 장총찬은 일명 '총알택시'를 타고 대전에 도착하였다. 도착해보니 이삿짐도 없이 혼자 도로변에 서성이고 있었다.
"아저씨~! 저 맥주 한잔 사 주실래요?" "아니, 이삿짐은?" "크크크, 나중에 말씀 드릴께요. 일단 저기 맥주집으로 가요."
전인주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에 대학생들이 주로 다니는 것으로 보이는 맥주집이 있었다.
"아저씨~! 저 팔짱 끼어도 돼죠?" "그야 물론이지."
장총찬이 전인주를 만난지도 편지 쓴 인연 까지 게산해 보면 벌써 6년째로 접어들고 있었고 세번째 만남이었다. 맥주집에 들어가서 마주 앉았다. 장총찬의 눈에 보이는 전인주의 모습은 몸짓만 커진 여중생 소녀로 보였다.
"인주야~! 아까 이사한다고 하지 않았니?" "크크크. 그건 거짓말이고요. 그냥 아저씨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크크크. 저 여기 대전에 있는 대학교에 이번에 입학했거든요. 입학 기념 겸 성인이 된 기분으으로 아저씨하고 술 마실려고요." "그래? 야~! 축하한다. 우리 건배 한번 멋지게 할까? 장총찬과 전인주의 무궁한 대학생활과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정말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장총찬도 이제는 학교 인근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더욱 기분 좋은 일은 전인주가 중학생 소녀에서 씩씩하게 자라 여대생의 모습으로 눈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 얼마나 동경하던 모습이었던가. 이성이 아닌 훌륭한 여성과 친구 처럼 지내는게 장총찬의 바램이었었다. 그것이 이제 실제의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다니 가슴이 벅차 올랐다.
시간을 보니 벌써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장총찬은 너무 늦었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전인주에게 집이 어느 방향이냐고 물었다.
"야~! 나 택시 타고 논산 가야 하는데 방향이 같으면 합승할까?" "벌써 가시려고요? 기왕 오신김에 자고 가세요. 내일 일요일이잖아요. 저도 이삿짐을 집에 막 들여 놓아서 마땅히 잘 곳도 없어요. 아저씨가 책임지세요.ㅋㅋㅋ" "야~! 너 맥주 세잔 밖에 먹지 않았는데 벌써 취했어?" "그래요. 저 취하지 않았어요. 그냥 맨 정신으로 아저씨 가까이서 보고 싶어요.ㅋㅋㅋ" "그래 하는수 없지. 나가자."
두 사람은 바깥으로 나와 팔짱을 끼고 말 없이 한 참을 걸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지난 인연들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저 멀리 여관 간판들이 알룩달룩 네온 불빛을 켜고 있었다.
2010년 8월 15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⑦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8-16)
첫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다.
장총찬은 논산행 아침 첫 버스에 올랐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여관을 급히 빠져 나온것이다. 어제 대전으로 이사온 전인주에게는 푹 자고 나중에 나오도록 하였다.
버스 밖은 푸른 나뭇잎들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전인주가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여관방 한 침대에서 밤을 지새웠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그리고 젊은 혈기를 억제하고 그녀를 고이 자도록 지켜준 뿌듯함이 뇌리에 꽉 차 있었다.
중국의 왕양명이 말한 '혈기의 분노는 있어서는 안되지만 의기의 분노는 없어서는 안된다." 란 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또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하늘에는 별 빛, 내 가슴에는 도덕률"을 실천한 자신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그렇다. 장총찬은 이성에 관해서는 정신적인 플라토닉 사랑을 꿈꾸고 있었고 사회적 통념의 때가 덜 묻어 있었다. 한 번은 술집에서 자정 무렵 까지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옆 좌석에는 젊은 연인 두 명도 와 있었다. 장총찬은 남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여자에게 빨리 집에 가도록 충고하엿다.
용변을 마치고 나오던 남자에게 이 광경을 들켜 큰 봉변을 당할뻔 한 적이 있었다. 이런 행동들의 배경에는 평소 다섯 명의 여동생들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가슴 언저리에 늘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술집에서 서빙하는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따르는 여성도 하나의 인격체이고 이 인격을 지켜주는 것이 남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행한 사람들이 여자들 신체를 희롱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러니 나중에는 여자들이 장총찬의 매너에 빠져 오히려 더 유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장총찬에게 있어서 전인주는 제 2의 생명이자 분신 같은 존재였다. 5년 간 보름에 한 번 꼴로 편지를 주고 받았으니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의 나쁜 감정이 이입될 어떤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장총찬은 이런 관계를 희망하고 있었고 여관에서의 동침은 이런 감정을 실습하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만, 젊은 혈기를 억누르기 위해 잠을 자지 못했을 뿐이다.
몇 달 뒤 장총찬은 전인주가 대학을 다니는 대전으로 발령이 나서 대전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전인주로 부터 장총찬에게 회사로 전화가 왔다.
"아저씨~! 저 인주예요." "응~! 나야. 무슨 일 있어?" "네. 있어요. 글쎄 학교 직원 중의 한 남자가 계속 저에게 집적거려요. 어떡하죠?" " 너는 어떤데?" "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니 감정은 어떻냐고?" "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저는 싫어요." " 그럼, 안보면 될거 아니야~!" "그게 안되요. 계속 제가 다니는 길목에서 기다린다니까요? 이따 퇴근 후 저 좀 뵐 수 없을까요? 아저씨~!" "알았어. 이따 역전 앞 에펠 커피숍으로 나와." "고마와요.이따 봐요."
2010년 8월 16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⑧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8-16)
마음을 준 여인
에펠 커피숍은 대전에서도 유명한 빵집 겸 커피 전문점이었다. 역전 근처여서 간혹 뜨내기 손님들도 있었지만 주 단골은 청춘 남녀들이었다. 근처에 큰 영화관이 두 곳이나 있었기 때문에 영화 관람 전 허기 진 배를 채우기로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장총찬과 대학 1학년생인 전인주는 자주 그 곳에서 만나곤 했다. 그 곳은 지금도 '으능정이'거리로 지정되어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장총찬이 오후 2시쯤 나가보니 전인주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가끔 전화는 했었는데 마주 앉아보니 참 반가웠다.
"그래~! 누가 쫓아다닌다고?" " 마음에 별로 들지 않은 남자가요." " 흠, 좋은 현상이지. 남자가 따르지 않는 여자는 별 매력없는 여자니까." "에이~! 아저씨도. 전 심각하다니까요." "그럼, 친구하고 같이 가서 그렇게 따라다니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해. 말도 예의가 있어야 하거든. 먼저 관심 가져 줘서 고맙습니다만..요렇게 말하고." "그러면 되겠네. 아저씨~!" "그건 그렇고 학교 생활은 어때?" "저는 사회복지 쪽을 공부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요." "좋은 생각이네. 아참~! 뭘 먹을까?" " 아저씨 좋아하시는걸로요. 그냥 아저씨가 좋아하는 것은 다 좋아요." "그럼 이 집은 빵도 맛 있다고 하니 같이 가서 골라볼까?" "네. 좋아요." "그리고 오랫만에 만났으니 영화도 같이 보러갈까?" "네. 좋아요."
장총찬과 전인주는 차와 빵을 먹고 길 건너 편에 있는 대전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관을 나서니 벌써 어둠이 깔리고 가로등과 차 불 빛이 어우러져 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장총찬은 전인주를 집 까지 바래다 주기 위해 버스를 탔다.
전인주의 집은 산성동 주택가에 있었다. 집에 도착해 보니 문이 잠겨져 있었다. 열쇠도 같이 자취하는 친구가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근처 국수집에서 국수를 먹고 하천변을 걸었다.
그리고 서부터미널 옆에 있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저번 처럼 여관이 낯설지도 않았다.
"아저씨~!" "왜?" "저 샤워 좀 해도 돼요?" "물론이지. 저기 샤워장 있잖아."
장총찬은 침대 위에 누워 텔레비젼을 보면서 전인주를 기다렸다. 샤워를 마친 전인주는 하얀 타월로 몸을 감싼 채 나타났다. 그런데 여자라기 보다는 가슴도 작아 보이는 여중생의 모습으로 크로즈업 되었다.
"아저씨~! 미안한데 불 좀 꺼주실래요?" "알았어."
전인주는 장총찬의 옆에 누웠다. 장총찬이 팔베개를 해주었다. 전인주의 물에 젖은 긴 머리카락이 장총찬의 가슴에 와 닿았다.
"아저씨~!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거예요?" "그냥 지금 처럼 착하게 살면 되지뭐." "그래도..." "영국의 스펜서란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혼자 살기가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했지. 인간은 원래 외롭고 쓸쓸한 동물이야." "아저씨 또 그런다. 그런말 말고 피부에 와 닿는 말씀 좀 해주세요." "음~! 남 한테 피해 안 끼치고, 남을 도우면서... 참 너처럼 사회복지 활동하면서 그렇게 살면 좋겠네 뭐." "어저씨~! 참 애인 있으시다고 했죠? 옛날 편지에요." "그렇지." "지금도 사귀세요?" "헤어졌지." "왜요? 착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 착했지." "이뻣어요? "근데, 왜 헤어졌어요?" "양 쪽 집에서 다 반대하셨어." "저런. 근다고 헤어져요?" "꼭 그렇지만 않았지. 그런데 서로 입장이 있는 것 같아. 사귀는 기간도 너무 길었고." "얼마나요?" "한 8년 된거 같아." '지금도 생각나겠네요.?" "생각나지. 가끔." "마음이 아프시겠네." "처음에는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지. 근데 차츰 좋은 추억만 생각나 덜하지." "아저씨 불쌍하다." "그래, 이만 자자." "네. 그래요."
2010년 8월 16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⑨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8-16)
전인주의 사랑 고백과 장총찬의 결혼
장총찬은 장남으로 나이가 서른이 가까워 오자 집에서 결혼 독촉을 받게 된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한다. 당연히 떠오른 얼굴이 전인주였다. 그러나 여러가지 여건상 결혼상대로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전인주와 첫 만남이었던 군인아저씨와 여중생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8~9년 차이나고 여자가 5년 이상 수명이 더 길다고 하니 장총찬이 자연사하더라도 15년 이상은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과 거의 상하관계가 되어버린 인연이 큰 걸림돌이었다.
좀 더 솔직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였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마치 앞날에 바위 처럼 걸림돌이 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전인주도 이제 대학 1년생인데 본인이 아르바이트하여 언제 졸업할 것이며 또 결혼하면 학업이 문제가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전인주 만큼은 결혼과 관계 없이 허물없는 남매 정도로 살고 싶었다. 그만큼 장총찬에게 있어서 전인주는 배우자감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두 번이나 여관에서 육체 관계가 없었던 것도 그녀의 장래를 책임질 수 없다는 장총찬의 뜻이었다.
그래서 장총찬은 최근에 연애 감정이 생긴 대전 중구청 공무원과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그리고 그 진행 과정은 아래 '인연(因緣)'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장총찬은 이런 마음을 전인주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음 해 봄 다시 에펠커피숍에서 만난다. 마침그 날은 전인주의 생일 날이었다. 전인주는 학교 동창 김미숙과 함게 나왔다. 차와 빵으로 즐겁게 생일 파티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김미숙이 할 말이 있다 하였다.
"저 총찬씨~! 제가 나서기는 좀 뭐하지만 한 말씀 드려도 괜찮겠어요?" "그럼요. 하세요." "사실 제 친구 인주가요. 총찬씨 무지 사랑하거든요. 제가 대신 고백해 드립니다. 받아주세요. 네! 꼭이요." "서로 사랑하는게 나쁩니까? 저도 인주 무지무지 사랑합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지금 총찬씨께서 다른 여성 분과 추진하는 결혼을 취소하면 안되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나 장총찬은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어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찐한 아쉬움이 베어 나왔다.
"인주야. 미안하다. 니 생일 선물로 내가 만년필을 준비했어. 지금 이대로 영원히 지내는게 좋을 것 같다. 아저씨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니가 학교를 졸업하면 나보다 훨씬 조건이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될거야. 좀만 기다려봐. 응~! 아저씨는 너에게 흠이 많은 사람이야.나중에 다 알게 될거야."
세월이 흘러 나중의 일이지만 전인주의 친구인 김미숙은 장총찬의 영원한 자동차보험설계사가 된다.
그 해 여름 장총찬은 지금의 처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한 전인주는 장총찬에게 성남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리고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게 된다. 장총찬도 가정이 생겨 전인주가 먼저 연락해 오지 않으면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인연의 끝이 아니었다.
2010년 8월 16일 용봉산
인 연(因緣)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4-14)
내 처를 처음 만난 해가 1986년도이다. 대전역 앞 지하상가에 "대전시 합동 민원센터" 가 개설 되었는데 처는 관할 중구청 공무원으로 차출 되었고 나는 한전을 대표하여 민원상담을 하다 1년 쯤 지나 눈이 맞아 결혼한 케이스이다.
우리 회장 춘배는 그 보다 1년 빨리 결혼하여 신혼여행지로 대전 인근으로 왔느데 다른 친구 결혼식이 서울에 있어서, 춘배 내외를 대전 지하상가에서 만나고 바로 헤어져 서울로 올라갔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춘배 내외에게 너무 미안하다.
내 처는 주민등록상으로 나와 8년 차이가 나나 실제로는 6살 차이라느게 내 처의 주장이다. 더구나 나는 늙어 보이고 처는 엣되어 보이니 대령이가 내 처 볼 때마다 제수씨라고 부르는 것도 크게 도리를 벗어난 일은 아닐터.
나는 늘 3남5녀의 장남임을 큰 짐으로 생각하여 왔다. 그래도 30 넘어 결혼하기는 싫고 하여 한 여성에게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겨울은 참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민원업무가 끝나고 중구청 여직원과 둘이서 큰 뜻 없이 포장마차에 들렸다. 술 기운과 함박 눈에 의지하여 한마디 건넸다.
" 혹시 저랑 결혼할 의향이 없으세요? 제가 28세거들랑요. 내년에는 결혼을 해야 돼요. 근데 저는 아가씨 한테 마음이 있거든요. 지금 당장 대답하지 마시고 저랑 더 만나 보신 다음 1년 후 오늘, 대답을 주시겠어요? 그리고 저에 대해 고려하실 다음 몇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1년 동안 참고하세요."
그런 다음 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였다. 내 고향은 전라도 섬 도초도이고, 3남5녀의 장남이며, 내 앞날은 첫째 내가 벌어 동생들 결혼시켜야 한다. 둘째는 나는 장남이니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 세째는 나는 대학원 까지 내가 벌어 공부를 더 해야 한다. 또 나는 현재 돈이 없으니 결혼해도 단칸방 삭월세로 살아야 된다. 그대신 당신 부모님한테 신세 지지 않을테니 빈 몸으로 와도 좋다. 등등 여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약한 사항만 나열하였다.
그리고 1년 후 그 여자 공무원은 내 처가 되었다. 내 말대로 그렇게 이행되었고 25년이 된 지금까지 불만은 많겠지만서도 이혼하잔 소리는 안한다. 그 때 충분한 말미를 주었으니깐두루.
...............
엄마의 고향은 비금도 가산이다. 가산에 사실 때 동네 오빠뻘 되시는 분이 본 처에게서 애들이 없자 동네 처녀하고 눈이 맞아 육지로 사라져 버렸다. 아뭏든 엄마의 얘기는 스쳐 지나가는듯 들었다.
결혼 10년 후 장모님이 고혈압으로 별세하셨다. 처 고향이 대전 인근 옥천군 동이면 두메산골이었는데 그 곳에서 발인을 하고 장지에 안장할 즈음 도초에서 부모님이 도착하셨다. 부모님과 장인어른이 인사를 하는 동안 뜻 밖의 일이 발생하였다.
"오빠!" "아니 너 거시기 아니냐?" "오빠가 여기 왠 일이셔요?" "거식아 너는 여기 왠 일이냐?" 그 오빠 되는 분과 엄마의 대화였다. 그러니까 엄마는 30년 전에 동네에서 사라진 오빠를 충북 옥천 산골 마을에서 그것도 안사돈 장지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나에게는 외삼촌 되시는 분이 육지로 도망쳐 대전에서 기차를 내렸다. 혹시 고향 분들에게 눈에 띌까봐 더 깊이 숨은 곳이 바로 옥천의 내 처가 동네였다. 그리고 내 처가집에서 종살이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처가는 종가여서 대청댐으로 수몰 되기 전 까지는 전답이 많아 머슴을 3~4명 두고 경작하였는데 머슴들은 집 바깥채에 기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처가 아주 어렸을때 내 외삼촌 내외분이 머슴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내 처는 종가집 장손녀였기 때문에 할아버지 사랑도 많이 받았고 새로 들어온 머슴을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많이 따랐다고 한다. 세월이 한참 흘러 내 처가 23살이 되던 해에, 나는 내 외삼촌 되시는 분을 거둬 준 집안의 장손녀와 대전에서 결혼하게 된다.
연속극에서나 있을 법한 인연이 나와 내 처간에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한 번 결혼한 인연도 불가에서는 오백생 인연이라고 하는데 , 이런 인연(因緣)이 또 있을까.
2010년 4월 14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⑩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8-17)
전인주의 '결혼의 비밀', 장총찬에게 일격을 가하다.
장총찬이 전인주를 마지막 만난지 10년 후인 1998년 겨울. 전인주로 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저 인주여요. 오늘 시간 있으세요? 제 아들과 함께 친정에 와 있는데 저녁 식사 어때요?" "좋지. 그동안 보고 싶었는데..." "저도요." " 음~! 그럼 이따 동대사거리에서 만나면 어떨까? 내가 차를 가지고 갈께."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전인주는 장총찬이 결혼하고 나서도 장총찬이 근무하는 회사로 가끔씩 놀러 왔다. 어떤 때에는 장총찬이 야근을 하면 저녁도 같이 먹고 밤 늦게 까지 장총찬이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곤 했다. 그리고 1988년 학교 졸업과 함께 성남으로 직장을 얻어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잊을만 하면 3년 터울로 전화 연락이 왔다. 총찬이 다니는 회사는 자체 전용 통신선을 이용하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 근무하는지 금방 확인이 가능하고 개인별 전화가 따로 있어 연결도 바로 가능했다. 인주는 그렇게 총찬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전인주가 만나자고 한 그 해에 장총찬은 전인주의 친정이 있는 보령(구. 대천)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해는 매우 바빴다. 한남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교수님이 충남대학교 정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같이 대학원에서 연구를 하자고 하여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장총찬이 작년에 발령 받아 온 이 곳은 하필 전인주가 태어난 동네였고 그녀가 중학교 까지 다닌 곳이었다. 그래서 전인주가 편지를 보내곤 했던 동네인 '보령군 주교면 관창리"도 가보고 대천여중도 가끔 들려보곤 했었다. 10년의 세월은 지났지만 전인주는 아직도 장총찬의 분신 같은 존재였다. 5년 이상 한달에 두 번의 편지. 그 편지들에는 장총찬의 전인주에 대한 바램이 빼곡히 차 있었었다.
저녁에는 매세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장총찬은 퇴근 후 전인주를 태워 20분 거리인 무창포해수욕장을 데리고 갔다. 한겨울에 바다에서 물아치는 겨울 바람. 둘은 바닷가에서 서로 어깨를 기댄채 한참을 서 있었다. 10년의 세월은 숫자에 불과하고 둘에게는 광풍 같이 짧은 세월이었다.
둘은 불켜진 횟집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그 들 밖에 없었다. 장총찬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 있잖아. 너 처음 나에게 편지 쓰던 관창리 동네, 니 다니던 중학교에 갔었다. 너 많이 생각나더라." "그러셨어요. 저도 가끔 아저씨 한테 전화했지만 하루도 생각 안한 적이 없었어요. 이리도 못 생긴 사람, 뭐가 잘났다고. 크크크... "
전인주의 성격은 활달하고 잘 웃는 성격이었다. 장총찬은 전인주가 어떤 사람과 결혼을 했는지 궁금하였다.
"아들 데리고 왔다매?" "네, 6살 됐어요." "그래? 아빠는 뭐하는 사람이야." "대전 사람이고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나와 사회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저랑 세상 사는 방향이 같다고나 할까요? 크크크.." "요즘 어떻게 지내?" "저야 뭐 재밌죠. 일 다 마치고 잠 잘 때에는 옷 다 벗고 남편하고 거꾸로 누워 발 맛사지 해주면서 자죠.크크크.." "낮에는?" "으음~! 사회 봉사 활동도 하고 사물놀이도 배우러 다니고요. 참 재밌게 살아요." "근데, 남편은 어떻게 만났어?"
"제가 성남에 가서 어느날 밤 늦게 귀가하게 되었어요.근데 골목길에서 깡패 세명에게 쫓기게 되었죠." "아니 너 태권도 3단이잖아?" "그게 여자에게나 통하지 건장한 남자들에게 통하나요 뭐. 무조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죠." "그리고?" "거리는 좁혀져 오고 대문이 열려 있는 집으로 무조건 뛰어 들어 갔죠?" "그리고?" "어떤 잘생긴 청년이 저를 보호해 줘서 위기를 모면했죠." "휴~!"
장총찬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전인주가 잘 되기를 얼마나 기원했는데, 큰 일을 모면했다 싶었다.
"근데, 아저씨 있잖아요. 그 남자가 제 남편이어요. ㅋㅋㅋ" "아니 어떻게?" "저는 강도를 막아 준 그 남자가 너무 고마웠어요. 그리고 깡패들이 밖에 서성거리는거 같아 집에 갈 엄두도 못내고 그 청년이 하숙하는 방에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자게 되었죠." "그리고는?" "근데 그 정의롭고 점잖던 청년이 새벽에 그만.. 짐승으로 돌변하지 않았겠어요. 크크크.."
장총찬은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간신히 죽지 않을 만큼의 숨만 몰아 쉬었다.
2010년 8월 17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⑪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8-17)
전인주의 '결혼의 비밀', 장총찬에게 일격을 가하다.
장총찬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전인주는 재미있다는듯 말을 이어갔다.
"무방비 상태에서 남자라는 짐승이 덤비니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발버둥 치고 고함을 질러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 날 따라 억센 비가 내리고 있었거든요. 결국 당하고 말았지요.크크크..."
"그래도 조심하지 그랬어." 장총찬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근데, 저는 남자는 다 아저씨 같은줄 알았어요. 제 아버지도 나이 들어서 겨우 자식이라고는 저 하나 뿐이었고 중학교 때 부터 사귄 사람이 못난 아저씨잖아요. 아저씨는 제 모든 인생에서 하나 밖에 없는 남자였어요. 그날 사고가 나기 전만해도요." "........" "그렇게 당하고 나서 하루 종일 슬피 울었죠." "......." "근데 그 나쁜 짓한 젊은이가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거예요. 몇시간을 그렇게 빌었죠." "......." "겨우 정신을 차리고 택시 타고 집에 돌아 왔어요." "......." "그런데 며칠 후 그 청년이 제 집을 어찌 알고 찾아 왔어요.그리고 그날 부터 매일 자기 잘못을 빌고 가곤 했어요." "......." "그렇게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을 즈음 한 달 지났나? 저 보고 대뜸 결혼하자는 거예요.크크크..." "......." "이유가 너무 웃겼어요. 제가 처녀였다는 거죠. 제가 당하고 나오던 날, 처녀막이 파손되어 이불에 피가 묻었던가 봐요. 자기는 그런 걸 처음 경험했다면서 꼭 결혼을 해서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 "아저씨는 저에게 병 주고 약준 셈이된거죠." "병 주고 약 주다니?" "전에 여관에서 잘 때 아저씨가 그냥 자지 않고 저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면 제가 남자들을 더 경계했을 것 아니어요. 저를 그냥 둔건 지금 생각해보니 저에게는 독이 된거죠. 크크크.." "그럼 약을 준건 또 뭐야?" "제 처녀의 성을 고이 보존시켜 주셔서 그 남자, 아니 제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으니까요.ㅋㅋㅋ" "........." "제 남편은 얼굴도 준수하고 어려운 이웃도 살필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어요. 더군다나 고향도 같고 대학교도 서울서 나오고. 아저씨 보단 모든 면에서 나아요.ㅋㅋㅋ" "........" "오늘 제가 친정에 데리고 온 아들 있잖아요? 걔가 그 때 생겨난 아이어요. 참 귀엽게 잘 생겼어요. 내 아들~!.ㅋㅋㅋ"
2010년 8월 17일 용봉산
장총찬의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⑫
(도초중학교 10회 / 용봉산 / 2010-08-17)
장총찬씨~! 당신은 영원한 돌부처시군요.
2002년도도 서서히 기울어 가는 11월이 되었다. 여름 학기에 어렵사리 석사 학위를 취득한 장총찬은 이제야 비로소 학교 공부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대전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배움에도 다 때가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장총찬은 20대에 해야할 학업을 40대 초반에 마쳤다.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오늘은 장총찬이 전인주를 특별히 초청한 날이었다. 그동안 전인주는 중국에 2년 정도 유학을 다녀와서 중국인을 상대로한 관광안내통역원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간다는 전갈이 핸드폰으로 왔다. 그래서 대전을 경유하여 올라가도록 말했더니 그렇게 한다고 했다.
장총찬은 전인주의 사랑을 장총찬에게 대신 고백해준 전인주의 대학 동창 김미숙씨 내외도 저녁 식사에 함께 초대했다. 오는 길에 친구도 만나고 가도록 장총찬이 배려해준 것이었다. 네 사람은 그 때 유행하던 '해물 철판구이'를 함께 먹었다.
전인주는 당당한 30대 중반의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태권도 유단자로 언제나 당당해 보였지만 항상 여중생 같았던 전인주! 장총찬의 눈에도 이제는 성숙한 여인으로 보였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모두들 노래방으로 갔다. 전인주는 노래도 잘하고 율동도 멋있었다. 장총찬만 항상 어린애로 보아서 그렇지 남들 처럼 할 것 다하고 사는 평범한 여자였던 것이다.
노래도 끝나고 밤 열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전인주의 시댁은 마침 대전이어서 시댁으로 들어 가면 되었다. 전인주의 친구 김미숙이 장총찬에게 다가와 귀속말로 속삭였다.
"우리 전인주 잘 좀 부탁해요. 총찬씨." "그럼요. 미숙씨.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둘씩 헤어졌다.
장총찬과 전인주는 쌀쌀한 날씨여서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걸었다. 그러다 너무 추워서 택시를 탔다.전인주의 시댁이 장총찬의 집 근처라고 하여 합승하고 전인주 시댁 근처에서 전인주 더러 내리라고 말하였다.
"아저씨~! 아직 저 시간 많은데요." "그래도 여자가 늦으면 안되지. 나중에 보자."
그렇게 떼밀듯이 내려주고 장총찬은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회사 컴퓨터에 이메일이 와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총찬'씨라고 불러봅니다. 제가 한 발 다가서면 한 발 물러서는 당신, 당신은 제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돌부처군요."
아뿔싸! 항상 장총찬에게 편하게 말해주던 전인주. 시댁도 대전이 아닌데 장총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는 생각이 장총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장총찬은 초청한 여자를 늦은 밤 추운 날씨에 도시 한 복판에 홀로 남겨두고 귀가한 셈이었다.
그 뒤 2010년이 지난 지금 까지 장총찬은 물론 대학 친구에게 까지 전화번호와 이메일을 모두 끊어버리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리고 늦어도 3년, 5년 터울로 연락이 오는 것도 없었다. 금년이 8년째, 과연 장총찬에게 전인주는 누구였으며, 전인주에게 장총찬은 누구였을까.
2010년 8월 17일 용봉산
에필로그⑬
그동안 제 장문의 글에 끝 까지 성원해 주신 친구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특히 모든 글에 성의껏 답글을 달아주신 풀향기님과 빅마마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글의 진위 여부는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맏기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일수도 허구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남다르게 산다고 자부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십 중반을 향해 달리는 지금, 살아온 발자취를 반추해 보면 각자의 인생살이가 제각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50보 100보 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결국 조그만 생각의 차이가 큰 변화를 가져 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갈릴레오, 발명왕 에디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피타고라스, 신대륙을 개척한 콜럼버스 등등.
저도 여러분들과 별반 차이 없는 사람 중의 한 명이지만 우리 카페에서 만큼은 조금은 별나고 독특한 사람이고자 합니다.이러한 생각이 우리 카페에 생명을 불어 넣고 날개를 달아주는데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생로병사~!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업보입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더 늙기 전에, 더 시간이 가기 전에 우리들 끼리만이라도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며 재미 있게 살아 갑시다. 시간은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8월 18일 용봉산 올림
장총찬은 전인주의 영원한 군인아저씨입니다. 제가 입 밖에 내뱉는 순간 멀어질까 두려워 가슴 속에 꼭꼭 숨기고 있었던 한마디. 전인주씨~! 영원히 사랑해요~!
|
첫댓글 처음처럼님은 좋컷다...ㅎㅎㅎ 한방에 복사할수 있어서.....ㅎㅎㅎ
뭐든지 한방이여 고것만 빼고 ㅎㅎㅎ
전체적으로 책 잡힐 글 아닌것 같은데.ㅋㅋㅋ
대단한 친구여......... 다읽을라니 돋보기끼고......... 읽은줄 또읽고......수고하셨슈......잘읽었었습니다.
개미 여사도 맛갓어유 ㅎㅎㅎㅎㅎ
고마워. 바쁜 가운데 완독해 줘서. 더위 마무리 잘 하시게.
제 글을 완독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 글은 그동안 여러분들이 제 글에 아낌 없이 성원해 주셔서 가능했습니다. 그 동안 제 글에 관심과 격려 답글을 달아 주시고 읽어 주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사람이 글을 잘 쓴다는것도 타고 난 재주여 .......용봉산도 한가지 재주더 부여받았구먼
나는 별로여. 더 좀 간결해야 되고 교정도 해야 하는데 시간 제약이 많네그려. 칭찬해줘서 고마워.
쓴글들을 모아..활자로 된 책을 내 보시우..독자1인 확보니..
무슨. 더 좀 열심히 쓰라는 격려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감사혀~!
휴~~~~~~~~~~~우...돋보기쓰고 한시간을 들여다봤더니 눈알이 아프다---장총찬의 사랑이야기!!! 헌데 바본지? 멍청한건지는? 아직도 난 몰것다- 뒷탈이 두려워서인지를??? 숭고한 사랑앞에 초쳐서 미안...ㅎㅎㅎ
제목에 바보라고 했잖우~! 고생했네.ㅋㅋㅋ
대단한 글이었어. 재미있게 읽었고 고맙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네. 동감하고.
꿈은 이루어지니 현직에 있을 때 등단하시길...
과찬의 말씀...이러다 열정이 쉬이 식을을까 걱정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