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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1. 묵상글 (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 완성에로 이끄시는 믿음의 영도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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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완성에로 이끄시는 믿음의 영도자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오늘 히브리서는 주님을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믿음의 여인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며칠 전 믿음의 탄생과 완성에 대해 이미 얘기한 바 있지만
오늘도 믿음에 대해, 믿음의 길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
주님이 바로 우리 믿음의 길잡이이시라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길이라고 하셨는데 보통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는 뜻에서 얘기하지만
오늘은 믿음의 길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것입니다.
믿음의 영도자라고 하셨기 때문이고
믿음의 완성자라고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주님께서 영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우리 믿음이 완성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여인을 예로 들어 한 번 보겠습니다.
오늘 여인은 믿음이 훌륭하다고 칭찬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믿음이 처음부터 훌륭했을까요?
아마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은 결과일 것입니다.
병을 앓기 전에는 믿음이 없었을 것이고,
병을 앓기 시작한 후에도 한동안은 믿지 않았을 겁니다.
믿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을 원망했을 것이고,
주님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믿음이 미약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중물이셨습니다.
우리말에 믿음을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이야말로 믿음을 주시는 분이고 그래서 믿음의 마중물이셨습니다.
오늘도 그러셨지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고 주님은 늘 믿음을 북돋우시고,
겨자씨만한 믿음이어도 그것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며 믿음을 북돋우시잖아요?
물론 왜 이리 믿음이 없냐고 나무라실 때도 있지만,
그것은 거의 언제나 제자들을 향한 나무람이고
제자라면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아무튼, 주님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어서
불신자를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인간을 믿는 사람에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심판자로 하느님을 믿던 사람을 구원자로 믿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주시는 주님은 힘 또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셨다고 하잖아요?
이처럼 주님은 힘주시는 분이시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힘이 전달되지 않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만큼 그 힘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제 그 힘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어떤 죄를 지어도 절망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물론 주시는 힘을 받을 경우만 이겨낼 수 있고,
믿는 사람만이 그 힘을 받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듯 믿음은 개방이요,
믿는 사람이 주님께 자신을 개방할 것이고 힘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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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오늘 <복음>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었으니,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고생도 하였을 것이고, 가진 재산도 치료비로 모두 탕진하고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마르 5,27)
사실, 율법규정에 따르면, 그녀는 피 흘리는 부정한 여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도 없고, 더군다나 다른 사람을 만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만지게 되면 그 사람마저도 부정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감히 이러한 금기를 깨어버릴 만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곧 ‘군중에 섞여들’만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만큼 믿음이 굳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인의 믿음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신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불결한 것이 닿으면 같이 불결해지게 되는 법인데, 오히려 불결함이 깨끗하게 치유됨으로써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시리아의 에프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열하던 여인의 숨은 상처와 고통을 통하여 당신의 치유능력이 선포되었으니, 숨어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은 영광 받으소서. 눈에 보이는 한 여인을 통하여,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의 치유능력을 통하여 당신 아드님의 신성이 드러났고, 하혈하던 여인의 치유로써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여인은 주님을 선포하였고, 주님과 더불어 여인도 영예로워졌습니다. 여인은 신성의 증인이었고, 주님은 여인이 지닌 믿음의 증인이셨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단지 예수님을 쫓아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예수님의 ‘옷’에 믿음의 손을 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품위와 권능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말씀이신 분’이 ‘말씀이란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말씀’에 손을 대어 말씀의 권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만질 때, 우리 안에 그분의 힘이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옷을 통하여 흘러나왔듯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 예수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곧 말씀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갈라 3,27 참조)들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말씀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우리의 옷에 손을 대는 이들이게 말씀의 권능을 전달해야 할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 말씀의 전류가 흘러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사랑의 전등을 밝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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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손
어려서의 기억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는 놋쇠 밥그릇뚜껑을 따듯하게 하여 배에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내 손이 약손이다”하시며 배를 만져주시면 곧 통증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배를 차게 하면 탈이 나니까 밥그릇 뚜껑을 이용해 따뜻하게 해 줌으로써 그 원인을 치료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약손이었으니 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큰 고통이 그를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시련과 역경, 고통, 눈물을 거두어 주리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으로 승리하여라!
일반적으로 회당장처럼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근심 걱정거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내면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그 고통을 통하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만약에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슬픔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위도 있고 부러워할 것 없는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남모르는 근심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못할 고민이나 근심 앞에서 회당장처럼 무릎을 꿇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9) 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인 제자들의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어둠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4). 오늘은 믿음의 손이 그리운 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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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8년 5월 4일 군에서 제대한 후에 교구 성소국장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복학하기까지는 10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어디에서 봉사하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저는 청소년들이 있는 곳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돈보스코 센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저는 수녀님들은 본당에서 보았지만 수사님들을 직접 본 적은 없었습니다. 돈보스코 센터는 살레시오 수도회 수사님들이 운영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훈련원’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낮에는 기술을 배웠고, 밤에는 방송통신 고등학교 과정을 배웠습니다. 전원 기숙사에서 지냈고, 매일 아침에 미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미사 전례를 도와 드리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 자습 시간에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님들께서 늘 강조하는 것은 학생들과 함께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님들은 학생들과 함께 농구를 하였고, 학생들은 수사님들을 가족처럼 따랐습니다. 스페인에서 오신 모 신부님, 이태리에서 오신 공수사님, 임수사님, 폴란드에서 오신 현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요한 보스코 사제가 설립한 수도회입니다. 10개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20년 후인 2008년 저는 본당에서 그때 함께 일하던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두 분은 인연이 닿아 결혼하였고 아들을 3명 낳아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형제님은 청소년 분과장으로 봉사하였고, 자매님은 구역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혈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2년 동안 온갖 방법을 찾았지만 하혈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다는 이야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 중풍병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 듣지 못하는 사람의 귀를 열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자신의 병을 차마 이야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고 싶은 간절함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12년 동안 멈추지 않았던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소경처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중풍병자처럼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나병환자처럼 깨끗하게 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간절한 손짓은 비록 말은 없었지만 여인의 몸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저도 여인과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03위 시성식을 위해서 방한하셨고, 서울 신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중앙 통로 쪽에 있던 저는 교황님께서 제 옆을 지나가실 때 발을 살짝 내밀었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제가 된지 32년이 지났으니 그때의 간절함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한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살면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욥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의지하며 걸어간다면 병이 나았던 여인처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던 소녀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할까요? 재물, 명예,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욕망, 욕심, 시기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2023년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탈리따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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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조폭 아줌마가 운영하는 시장’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태국의 공익광고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폭처럼 무서워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임대료를 받기 위해 시장에 갑니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한 장사꾼에게 임대료를 내라고 호통치고, 고기 파는 상인에게 가서는 정육점 저울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칩니다. 이어서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하며 어떤 노점상의 물건을 전부 가져가라고 명령합니다. 분명 갑질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누군가가 영상에 담아 인터넷에 올렸고, 사흘도 되지 않아 이 영상을 조회한 수가 자그마치 백만 회를 넘겼습니다.
이 영상을 본 네티즌들은 어떤 댓글을 남겼을까요? 분노로 가득 찬 댓글이었고, 아주머니의 심보를 지적하면서 이 사장으로 장을 보러 가지 말자고 호소하는 댓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장 상인들이 나서서 아주머니에 대한 진실을 설명했습니다. 임대료를 내라고 호통친 상인은 이미 열 번이나 임대료를 연체하고 있었던 것을 봐주고 있는 것이고, 정육점의 저울을 집어던진 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무게를 속여 팔았기 때문이며, 노점상의 물건을 가져가라고 한 것은 처지 딱한 상인이 노점을 계속 운영할 수 있게 자신이 직접 물건을 구매한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사건의 표면만 보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따뜻하고 잘 배려하며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실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추측성 기사만 내보내며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못 된 사람으로 만드는, 그래서 제일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또 하나의 죄, 그것도 가장 크고 무거운 죄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는 있지만, 다른 이에게 돌을 던질 권리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회당장이 자기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고 손을 얹어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데, 도중에 그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습니다. 그들의 말에 상관없이 집에 가서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에 대한 반응은 냉랭합니다. “예수님을 비웃었다.”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죽음만을 보고서는 섣부르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죽음까지도 지배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하고 있기에 그들은 감히 주님을 향해 비웃음을 던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를 향해 “탈리타 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지금도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불신의 늪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온갖 비웃음과 잘못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를 향해 그 모든 것을 뒤집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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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운명은 당신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갑니다(랄프 왈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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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전사
-믿음도 보고 배운다-
“탈리타 쿰!”
우선 오늘 강론을 읽기전 또는 읽은후 성가480장 "믿음으로" 4절까지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믿음’이 주제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믿음의 전사입니다. 저는 병사兵士나 군사軍士라는 말마디보다 전사戰士란 말을 좋아합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참 많이 사용해온 ‘주님의 전사’란 말마디입니다.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죽어야 제대라고 자주 말하곤 합니다. 영적전쟁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고 죽어야 비로소 끝날 것입니다.
전사에게,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에게 평생 훈련은 필수입니다. 믿음의 훈련입니다. 사고사事故死나 객사客死, 병사病死가 아닌 싸우다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라고 말하곤 하며 그렇게 되길 소원합니다. 일하다 공부하다 기도하다 죽는 다면 말 그대로 영적전사이겠습니다.
전사들에게 훈장처럼 달려 있는 부상이요 병들입니다. 저 또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반듯하게 살아왔지만 아픈 곳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 또한 주님을 섬기다가 믿음의 전투중 입은 영적상처의 상징으로, 또 영적전쟁의 승리의 표징인 훈장으로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또 제 자신의 죄에 대한 보속補贖으로, 세상 죄에 대한 대속代贖으로 여기며 위로를 받습니다.
참 많은 이들의 저에 대한 관심사가 건강입니다. 속으로는 아프고 불편해도 안 그런척 건강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 또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실 좀 불편하고 아파도 영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에게 우선적인 것은, 한결같은 것은 영적 전의의 열정입니다. 영적 사기의 충천입니다. 아무리 무기가 좋고 전략이 뛰어나도 영적 전의의 열정이 식어버리면 영적승리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말 한결같은 전의와 열정, 훈련이 필수입니다. 아주 오래 전 고백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왜관수도원에서 파견받아 떠나기 전날 밤
밤새 수도원 성전에서
주님께 3천배 절하였다
전날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4시까지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다짐하며,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성철 스님의 종신불퇴終身不退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왔다
지금까지 오늘 하루만 살았다.
나에게 하루하루가 영원이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동안 유효한 고백이겠습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불암산은 정주의 표상이자 한결같은 인내와 믿음의 표상입니다.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인내의 정주, 믿음의 정주를 새롭게 확인합니다.
이어 또 둘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용수철의 비유를 들며 주님의 전사는 영적탄력, 믿음의 탄력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마음의 탄력, 정신의 탄력, 영혼의 탄력은 떨어져선 안된다면 분투의 치열한 노력을 통해 신망애信望愛의 탄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좀 저속하다 생각되지만 팬티끈과 팬티천의 비유도 잊지 못합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요, 팬티끈만 탄력이 좋아 튼튼하다면 팬티천은 낡고 떨어져도 이리저리 기워입으면 끝까지 입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팬티끈의 탄력이 떨어져 느슨하거나 끊어지면 좋고 새로운 팬티천도 무용지물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영혼이 튼튼하고 탄력이 좋아 육신을 끌고 가야지 육신한테 영혼이 끌려가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상시 영혼 건강을 위한 믿음의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 실천하라고 여러번 강론에도 인용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주님의 전사는 믿음의 전사입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도 믿음입니다. 제가 수도형제 도반들에게 가장 많이 보고 배우는 것도 믿음입니다. 공동전례기도 바칠 때면 그 간절한 믿음의 고백을 감지하곤 합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에서 참 좋은 믿음의 격려를 받습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영적전쟁은 단거리 100m 경주가 아니라 평생 한결같이 끝까지 달려야 할 장거리 마라톤 경주같습니다. 아무리 잘 달려도 도중 하차 하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지금까지가 아니라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어야 합니다. 불퇴전의 자세로 초발심의 자세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일일시호일의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영적 마라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친히 은총을 주시기에 이렇게 영적전쟁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는 믿음의 증인들, 성인들이 이웃 믿음의 형제들이 큰 도움이 됩니다. 혼자의 믿음은 약하지만 믿음의 성인들과 형제들로 이뤄진 교회공동체의 믿음의 힘은 무궁무진, 그대로 하느님의 힘을 반영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요한 보스코 참 놀라운 성인입니다. 살레시오 수도회의 창립자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머니의 믿음을 그대로 보고 배워 믿음의 성인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기적, 사랑의 기적입니다.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많은 기적으로 성인으로 인정된 돈 보스꼬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수단의 돈 보스코’ 라고 불린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도 생각납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지내는 저의 왜관수도원에서 수련시 수련장이셨던 사랑하는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님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의 대가인 성염 요한 보스코 교수님도 떠오릅니다. 이미 성인의 경지에 이른 이분들의 믿음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 사제의 한생이 주님의 전사로서 참 치열했던 영적승리의 삶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청소년들을 참으로 사랑했던 성인의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마지막 임종시 유언도 감동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은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87세 고령에도 영원한 현역의 백전노장百戰老將입니다. 오늘 1월31일부터 2월5일까지 제40차 사목여정중 그 불편한 노구에도 아프리카의 콩고와 남수단을 방문합니다.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는 믿음의 증인들이 성인들이요 믿음 좋은 이웃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믿음의 영도자이자 완성자인 예수님과 더불어 참 좋은 믿음의 사람, 회당장 형제와 하혈병 치유를 받은 자매를 만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감동시킨 이들의 믿음은 그대로 주님께 응답받습니다. 하혈병을 앓던 자매에 대한 주님의 치유선언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딸대신 여러분 자신의 세례명을 넣어 나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오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어진 회당장 딸의 치유도 참으로 통쾌합니다. 둘 다 믿음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감동시켜 응답을 받아낸 이들의 믿음입니다. 회당장 아버지의 믿음 덕분에 주님의 도움으로 부활의 삶을 살게 된 그의 외동딸입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도 힘들고 어려우면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탈리타 쿰!”하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믿음의 탄력, 영적 탄력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요 이런 경우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그대로 히브리서의 묘사와 일치합니다. 우리가 늘 시선을 두어야 할 분은, 할 곳은 믿음이 영도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눈길을 늘 이런 예수님께 두고 살게 하십니다. 히브리서의 가르침의 권고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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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에 관하여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선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받겠지.’라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바로 응답받습니다. 그녀의 하혈이 멈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주님 시대에 있었던 일로, 지금은 일어나지 않을 일로 치부할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을 우리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에게도 치유의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인들은 야이로의 딸이 이미 죽었다고 전합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그 믿음은 죽었다고 이야기한 야이로의 딸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성경 안에서 또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무덤에서 살아나온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어있는 라자로에게 소리치십니다. “나오너라.”라고
무덤은 열리고 라자로는 걸어 나옵니다. 이 또한 믿음에서 시작된 기적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경 속 인물들의 믿음과 같아지기를 바랍니다. 늘 모자란 믿음이지만 우리 믿음이 하루하루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신부님 엄청 빠르시네요.
저는 덩치가 큽니다. 웬만한 여성의 두 배는 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저도 태어났을 때가 가장 날씬했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쭉 성장해 왔습니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지면 운동합니다. 특히 탁구장 가서 탁구를 합니다.
탁구장에서 운동하던 어느 날입니다. 한 분께서 제게 이렇게 인사를 하셨습니다.
‘신부님이시라면서요? 저는 신부님을 처음 만나봅니다. 시간이 되시면 저와 탁구를 치실수 있을까요?’
저는 기꺼이 그분과 탁구를 쳤습니다. 시합도 했습니다.
운동이 다 끝나고 그분은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보기와 다르게 엄청 빠르시네요. 하하하.’
인정합니다. 보기에는 안 빨라 보이는 것을….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빠르지 못하다는 것을….
그런데 탁구 칠 때는 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빠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아마도 어릴 적부터 탁구라는 운동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복적인 동작은 수천 번은 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공을 치는 순간 공이 어디로 올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으면 방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적인 기도와 영적인 수련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우리 영의 흐름을 알게 될 것이고, 어떤 것이 영적인 유혹이고, 지금 무엇이 내 기도를 방해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알면 방어하기 쉬워집니다.
그래서 반복은 중요합니다. 기도도 영적인 수련도 반복해야 합니다. 그 반복이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섬세하고 빠르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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