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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 19. 우리는 어찌하여 20.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21. 없음
마 17: 19. 우리는 어찌하여 - 이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제자들은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제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많은데서 물어보기가 부끄러우니까 조용히 예수님을 따로 만나서 '우리는 왜 안 됩니까?'라고 질문을 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귀신을 못 쫓았다는 문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1] 이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말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2]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우리는 왜 안 됩니까? 능력이 있고, 병도 고치고 기적도 일으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안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도전 정신을 배워야 한다. 신앙생활은 도전정신이 있어야 산을 옮길 수 있다.
이 질문에서 우리의 신앙의 태도를 점검해 보는 기회를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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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의 사람은 열등의식을 버려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나는 너무 늙었어, 아직 나는 젊어서 경험이 없어, 나는 높은 사람을 아는 사람이 없어, 나는 자본이 없어, 나는 건강이 딸려' 등등 많은 이유와 변명이 있다.
그러나 인생은 빈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 뱃속에서 무엇인가 가지고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삼성의 이 회장도, 현대 가의 정 회장도 빈 손들고 나왔다. 안 그렇습니까?
인생길에 가장 위대한 것들은 모두 공짜다. 우리가 집도 사고, 옷도 사고, 모든 일용할 물품들을 분명히 값을 치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귀중한 것이 아니다. 가장 귀중한 우리의 생명, 공기, 자연, 시간, 건강 이런 것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다 공짜로 주셨다.
우리의 눈도, 귀도, 손도, 발도 공짜다. 믿음을 갖는 것도 비용이 필요 없다. 모든 위대한 일은 믿음과 함께 시작된다. 믿음의 큰 재산을 가지시기를 바란다.
(2)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이라도 내 영혼에 비타민으로 공급해야 한다.
육신이 허약하고 병약한 사람은 의사가 비타민을 권한다. 우리 영혼의 믿음이 허약한 사람도, 영혼의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
기도는 내 영혼의 비타민이다. 찬양도 내 영혼의 비타민이다. 간증도, 하나님의 말씀도, 설교를 듣는 것도, 네 영혼에 비타민을 먹는 일이다.
(3) 믿음을 금이나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별로 가치 없는 것들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낭비하는 습관이 있다. 믿음은 낭비할 수도 있고, 투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계산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내 믿음이 얼마나 될까?' 믿음의 계산을 통해서 우리의 자고한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활력소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깨닫는 자가 복된 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믿음을 측량해야 승리할 수 있다. 믿음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왜 나에게 축복을 안겨줍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뭔가 풀린다고 말하더니 나는 예수 믿고 더 어려움을 당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여러분! 진심으로 네가 하나님께 얼마만큼 '믿음을 보였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여러분! 죄 때문에 통곡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일이 있습니까? 주님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해 보셨습니까?
그 영혼이 음부에 떨어질 것을 바라보고 얼마나 가슴을 조였습니까? 정말 모든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얼마만큼 매달렸습니까? 우리는 진지하게 이 문제들을 한 번 반성해야 한다.
한번은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갈릴리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예수님을 깨웠다. 그러자 주님이 일어나서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하셨다.
여러분!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만큼 축복하시고 역사를 일으키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시간 진실하게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내 믿음을 달아보아야 한다. 자기 믿음에 늘 도전해야 한다. 믿음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 싱싱한 믿음을 사모해야 한다. 어느 곳인가 나를 도울 믿음의 사람이 있다고 하는 기적을 알아야 한다.
산 아래 내려오신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라고 꾸짖으셨다.
마 17: 20.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도 없음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기적주의를 가르치신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기적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이나 어떤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서든지 믿음을 가지고 명령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 구하면 얻을 수 있고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일반적 교훈에 맞다.
1]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믿음이 작은'은 사본들에 따라 '아피스토스'(*, 믿음이 없음, unfaith) '올리고피스토스'(*, 믿음이 부족함, little-faith, poor-faith)로 표기하고 있다.
17절에 제시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는 책망과의 조화를 위해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좋다.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해도 본문은 믿음이 작음보다 결핍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Bonnard).
작은 믿음은 아무리 하찮더라도 겨자씨와 같이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게 마련이지만 불신앙은 어떠한 결과도 산출해 낼 수 없다. 마가는 본문과 기도의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다.
* 막 9: 29 –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권위와 섭리를 믿고 인정하는 자의 특권이요 의무라는 점에서 마가의 보고는 적절하다 하겠다.
2]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1)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는 예수께서 새롭고 중요한 교훈을 말씀하실 때,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하신 표현이다(5: 18).
겨자씨는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팔레스타인 지방이나 지중해 연안에 많이 자라며 성장하면 3-4.5m의 큰 나무로 자란다. 이것은 '니코티아나 그라우카'(Nicotianaglauca) 혹은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 등으로 알려져 있다.
겨자나무는 원줄기와 몇 개의 곁줄기로 자라는데 원줄기는 새가 앉아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믿음이 지닌 생명력과 감추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믿음은 무한한 자생력을 지녔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양의 많고 작음이 아니라 있고 없음이 문제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그 뜻을 믿는 것으로서(Wyciffe) 자기 신뢰나 신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겨자씨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가시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믿음일 때에만 가능하다. 공관복음에서는 겨자씨에 대한 언급이 다섯 번 나온다(13: 31. 17: 20. 막 4: 31. 눅 13: 19. 17: 6).
3] 이 산을 명하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겨자씨'와 '산'은 표면적으로는 큰 대조를 이루며 '옮기는 것'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온전히 보존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지속하면 그 믿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주권적인 방법에 의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이뤄내고야 만다.
겨자씨 믿음은 그 소유자로 하여금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을 이 땅에 실현하게 한다.
여기에서 '산'이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난제(難題) 등을 함축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 마 21: 21-22 –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 사 40: 4 -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사 49: 11 -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 사 54: 10 -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 막 11: 23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 눅 17: 6 -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 고전 13: 2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4]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카이 우덴 아뒤나테세이 휘민)
문자적으로 '그리고 너희에게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and noting shall be impossible to you)이다. 이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전능성에 대한 약속으로서 그 효력은 지금도 유효(有效)하다.
* 마 19: 26 -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빌 4: 13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히 11: 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요한복음 14: 12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셨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이나, 주님을 믿는 자가 주께서 하시는 일을 하며 그보다 큰일도 할 것이라는 말씀은, 기적주의를 가르치신 말씀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이나 어떤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서든지 믿음을 가지고 명령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 구하면 얻을 수 있고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일반적 교훈에 맞다. 그렇다. 우리 신앙생황에 궁극적인 문제는 믿음의 문제다. 성경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것이 지식으로 끝나면 안 된다. 믿음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 주님은 '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못하는 것이 없다.'고 했다.
겨자씨는 살아있는 씨앗이다. 작은 씨지만 땅에 심어 싹을 틔우고 잎을 피우면 나무가 자라서 새들이 깃들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쉬기도 한다.
살아있는 믿음이 귀하다. 우리의 문제는 형식적이고 흉내내는 믿음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교회는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얻는 곳이다.
* 시 121: 1-2 –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기서 산은 고난과 역경일 수도 있고, 낙심과 절망일 수도 있고, 좌절과 패배일 수도 있고, 인생의 문제, 즉 요약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의미한다.
우리말에도 '절망이다, 갈수록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성숙은 인생의 산에서 만날 수 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인생은 성숙해 지고 신앙도 뜨겁게 된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교회는 주님 앞에 나와 도움을 청하는 곳이다. 시편 기자는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 '도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에제르'의 '지원하다, 구조하다, 구원하다'는 뜻인데, '어려움이나 위험한 순간에서 구해주거나, 일을 해결해 주는 것'을 말한다.
도움의 종류는 '적군의 손에서 구해주는 군사적인 도움과 고아나 과부, 질병에 걸리거나 개인적인 곤경에서 구해주는 비군사적인 도움'이 있다.
도움을 얻는 비결은 바로 기도다. 마 21: 21-22에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5] 제자들의 실패와 원인
예수께서 귀신 들린 간질 병자를 고치시고 난 후 산 아래에 있었던 아홉 제자가 예수께 조용히 여쭈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들은 그들이 간질 병자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며, 제자들다운 진지함이 거기에 있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 믿음이 작은 연고니라'였다. 이 말씀은 곧이어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이라고 하신 말씀과 연관시켜 볼 때 그것은 '믿음이 작다' 혹은 '믿음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이처럼 제자들의 실패 원인은 믿음이 없었거나 작았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그러면 제자들의 실패 원인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1) 믿음이 작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과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은 다를 수가 있다. '믿음이 작은 연고니라'는 말씀은 믿음이 약하다는 뜻이며,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이라고 하신 말씀은 겨자씨가 아주 작은 것이고 보면 믿음이 없다는 뜻으로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모순되는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산 아래에 있었던 아홉 제자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고 다만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런 믿음은 '작은 믿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없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뜻은 이미 열두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낼 능력을 주었음에도 (마 10: 8), 제자들이 그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렌스키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카리스마적 신앙은 구원의 신앙과 별개의 신앙으로서 카리스마적 신앙은 구원의 신앙 없이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구원의 신앙이 있으면서도 카리스마적 신앙은 없을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카리스마적 신앙(능력)을 장려하긴 했으나(마 10: 8. 막 16: 17) 그것이 구원을 얻는 신앙의 절대적 요건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복음 전파의 한 방편으로 필요했다. (마 10: 7. 막 16: 15)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신앙은 물론, 이 카리스마적 신앙(능력)도 함께 갖기를 소망할 것이지만, 설사 카리스마적 신앙을 갖지 못했다 할지라도 낙심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합당한 은사를 주시기 때문이다.
* 고전 12: 11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2)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의 기록인 마가복음 9: 2-29에서는 제자들이 간질병자를 고치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 29)'였다. 산 아래 있었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금식하여 기도하고 있을 때, 산 아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 숭배에 열중했던 것처럼, 예수님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산에 가서 기도하는 동안 그 외의 아홉 제자는 산 아래에 있으면서 기도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귀신을 이길 수가 없었다.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게 될 때도 기도해야 할 장소(유대인들은 '지붕'을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했음)에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지 않고 땅을 내려다보다가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므로 쉬어서는 안 된다.
* 살전 5: 17 - 쉬지 말고 기도하라.
성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하여 있지 아니하고 땅을 향해 있으면 마귀를 이길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카리스마적인 신앙의 능력은 오로지 기도로서만 내 것이 될 수 있다.
(3) 예수와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①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실패한 더욱 중요한 원인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제자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할 때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때 모든 제자가 다(요한은 제외) 도망간 것과, 부활하신 후에 저들이 다시 어부로 돌아갔던 일로서 증명될 수 있다.
* 요 15: 5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②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는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즉 은사가 주어져 있었다. (마 10: 8)
그리고 그들은 그 은사대로 역사하여 많은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이 본문에서와 같이 이 은사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사를 통하여 건설되는 것이므로 은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입증한 좋은 예이다.
마 17: 21. 없음
전통적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나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는 구절이 있다.이 구절은 원본의 본문이 확실하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9: 29의 전통 본문에도 나온다. 주께서는 기도와 금식을 강조하셨다. 금식은 간절한 기도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곳들에서 강청의 기도, 간절한 기도를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 8에서 그는 기도에 대해 교훈하실 때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하시며,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끈질김]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탄원한 과부의 비유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간절한 기도에 대해 교훈하셨다.
* 눅 18: 1-8 –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는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의 부르짖는 간구를 외면하시겠는가, 그가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특히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왔다. 본문의 이 사람은 자기 아들의 질병 문제를 가지고 주 앞에 엎드렸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 경제적 어려움의 문제, 자녀의 문제 등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진 분들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자.
주 앞에 엎드려 겸손히, 간절히 구하자.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심을 알자. 주께서는 간질병을 꾸짖으셨다. 귀신을 복종시키셨다. 불치의 병들도 고치셨다. 그것은, 오늘날도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든가 병의 고침을 받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의학적 방편을 감사히 사용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 단지 하나님의 뜻은 오늘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가 허락지 않으시면 의학적 방편도 효험이 없을 것이다. 그가 허락하셔야 모든 것이 유익하다.
그가 허락하셔야 우리가 건강도, 경제적 안정도, 우리 자녀들의 평안도, 우리 사회의 평안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심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자.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뢰자.
* 마 7: 7-11 –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요 14: 13-14 –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는 비상한 경우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기도와 금식으로 아뢰자. 주께서는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전통적 헬라어 본문과 옛날 영어 성경(KJV)에 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확실히 성경 원문에 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인간적 해결책이 없어 보일 때 우리가 끈질긴 기도, 강청의 기도, 결사적 기도를 올려야 함을 가르치신 말씀이다.
그것이 믿음의 기도이다. 우리가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기도와 금식으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우리는 낙심치 말고 간절히 기도하고, 또 비상한 때에는 금식하며 우리의 소원을 아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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