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18 - 요한성당을 보고 구시가 광장을 지나 노벨상 수상자 퀴리부인 집에!
2022년 5월 11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시스키 공원을 거쳐 구시가지 짐코바(잠코비)
광장 Pl. Zamkowy 에 도착하는데 오래된 옛 건물들이 없는 것은 1944년 8월에 국내군
이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켰다가 도시가 나치 독일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 입니다.
바르샤바 구시가지의 입구인 짐코바(잠코비) 광장 Pl. Zamkowy 에서 왕궁으로 들어
가는데 입장료는 20즐로티이지만 오늘이 수요일이니 무료이고 오디오 대여료
를 10즐로티를 받는데 왕궁 Zamek Krolewski 은 13세기에 마조비아 공작의
요새로 건립 되었으며..... 그후 탑과 붉은벽돌로 고딕양식의 왕궁이 추가되었습니다.
지그문트 3세는 수도 크라쿠프의 바벨성에 불이 난 것을 계기로 1596년에 왕궁을 바르샤바로 옮겼고 1611년
부터 계속 바르샤바에 거주하니 정부기관들도 왕궁을 따라 바르샤바로 이전하여 실질적인
수도는 바르샤바이지만 왕의 대관, 장례식 등 각종 왕사(王事) 는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왕궁을 보고 나와 구시가지에 있는 성 요한성당 Katedry sw. Jana 을 구경하는데.... 뾰족뾰족한 삼각형이
인상적으로 1339년에 목조 건축물로 세워졌으며 15세기에 완공된 모조비아 고딕양식으로 1764년
부터 국왕의 대관식은 크라쿠프의 바벨성당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열렸으며 그후 국회에서 열리게 됩니다.
성 요한 대성당은 폴란드어로는 Bazylika archikatedralna św. Jana Chrzciciela
이라고 하는데.... 폴란드 바르샤바 스타레미아스토에 위치한 대성당이니
바르샤바에 위치한 3개의 대성당 중에 하나로 유일한 아치 대성당 이라고 합니다.
1944년 8월부터 2개월간 바르샤바 봉기 때는 저항 세력과 독일의 군대 사이의 투쟁의 장소였으니 이
시기에 거대한 폭발로 건물의 많은 부분을 파괴됐고 바르샤바 봉기 후 재건되었으며 2012년
부터 2015년까지 광범위하게 성당 내부가 수리되었는데 외관, 내관, 예배당, 동상, 묘비, 지하실 등입니다.
여기 구시가지 광장 Rynek Strego Mista 은 중세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유네스코 10대 문화재
에 속하며...... 16세기 바로크 르네상스 및 고딕양식 건축물들로 가득하니 고풍스러워 보입니다.
그러고는 계속 걸어서 바르비칸 Barbacan 에 도착했는데.... 어제 옛 수도인
크라크프에서 보니 이 건축물은 도시를 둘러싼 성문인 성 플로리안
문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붉은색 돌로 쌓은 둥근 원형의 요새 였습니다.
바르샤바에서 보는 바르비칸 barbican 도 크라쿠프와 별반 다를게 없으니 외성으로 주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떨어져 나와 주 성벽과 정문 공격을 어렵게 하는 요새로 중세말~근세 초 유럽의 요새화가 된 도시들은
바르비칸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형이 잘 보존 된 것은 크라쿠프가 유일하니 15세기 중반 개축됐다고 합니다.
한참 동안이나 붉은 색의 견고해 보이는 바르비칸을 구경하고는.... 11즐라티를
내고 근처에 자리한 퀴리부인 박물관 Muzeum Mari Curie 으로 들어갑니다.
방사능을 함유한 라듐을 발견하여 1903년 남편과 더불어 노벨 물리학상을, 그리고
1911년에는 노벨 화학상을 받은 퀴리부인 생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
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었으며..... 실험 기구 등이 전시되어 있고 영화도 상영한답니다.
마리 퀴리는 물리학자이자 화학자로 방사능 연구의 선구자이며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해 노벨물리학상을
타고, 금속 라듐을 분리해 노벨화학상을 탔는데.... 여성들이 과학분야에 진출하지 못했던 시대임에도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며 또 두번 받은 최초의 인물이고, 다른 과학 분야에서 수상한건 유일
하며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으로 프랑스인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마리 퀴리는 발견한 원소에 폴란드를 뜻하는 “폴로늄” 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큼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가졌는
데.... 서양인의 전유물인 과학계에서 과학상 26명을 포함해 노벨상 수상자가 30명에 달하는 일본도
주기율표에 들어갈 새 원소를 발견해서는 일본(니혼) 을 뜻하는 “니혼니움” 이란 이름을 붙인 것과
비슷하며 아시아 국가 수상자는 일본 30명, 인도 11명, 중국과 대만등 중화권 10명에 한국 1명(평화상) 입니다.
예전에 그녀의 조국인 폴란드의 2만 즈워티 지폐와 프랑스의 500 프랑 지폐 모두에 마리 퀴리
의 얼굴이 찍혀 있었으며..... 조국 폴란드는 2011년, 마리 퀴리 노벨화학상 수상
100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20즈워티 지폐에 그의 초상을 다시 넣었으니 마리 퀴리는
프레데리크 쇼팽과 함께 폴란드와 프랑스 양국에서 대표적인 위인중 한명으로 존경받습니다.
1867년 11월일 러시아 제국 치하 폴란드 입헌왕국 바르샤바 태생으로 본명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이며
부모님은 모두 교사였는데, 교장이던 어머니는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집에서 요양했지만 부모님은
금슬이 좋았고 가정은 화목했으니 마리 퀴리가 학자로서 길을 가게 된데에는 가정환경의 영향이 컸습니다.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에서 아버지가 폴란드어로 쓴 학생의 답을 정답으로 처리했다는
것 때문에 교감 자리에서 쫓겨나 교사직을 박탈당하면서 가족들의 불행이
시작되는데 아버지는 애국심이 깊어 러시아어를 쓴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고 게다가 아버지가 큰돈을 사기당하면서 생활이 급격하게 어려워집니다.
결국 집을 하숙으로 바꾸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부업으로 생계를 꾸리던 어느날 하숙생 중
한명이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병이 마리 퀴리의 언니들에게 전염되었고,
둘째 언니는 회복했으나 첫째 언니 조피아가 12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마리아가 10살이 되던 해에 결핵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마리 퀴리는 공부는 대단히 잘 했지만 가난한데다가 바르샤바 대학교는 남녀공학이 아니어서 여학생의
입학을 허가하는 프랑스로 유학할 수밖에 없었지만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유학자금을 모으기
위해 부유한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하며 돈을 모으다가.... 23세가 되어서야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가정교사로 일하던 부잣집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가난한 집안 여성을 며느리로 받아들일수 없다는 남자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으니 이때 결혼에 성공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위인전에서 '퀴리 부인', '마리 퀴리'
란 책을 볼수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이때 소르본 대학교에서 합격통지서가 와서 애인과 눈물로 이별하게 됩니다.
마리 퀴리의 10대때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폴란드를 직할령으로 삼고 폴란드 학생들에게 러시아어와 러시아 역사를
배우게 했으니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해 성적이 좋다는 마리에게 러시아 위인들과
통치자, 주기도문에 대해 질문하자 마리는 러시아어로 유창하게 대답해 장학사를 만족시킵니다.
하지만 마리 퀴리는 마음속으로 폴란드인으로서 커다란 모멸감을 느끼고 장학사가 자리를 뜨자 담임을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고 하는데.... 새 원소 폴로늄의 이름을 러시아에서 독립도 안된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정도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후 마리 퀴리는 폴란드 동부 영토를
프리비슬린스키란 직할령으로 만든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에 내심 기뻐하기도 했답니다.
마리 퀴리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프랑스로 가 있던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
스크워도프스카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브로니스와바는 내과의사로 사업가인
카지미에시 드우스키와 결혼해 경제적으로 여유로웠으니 극진히 대접했으나,
마리 퀴리는 부담스럽게 여겨 하숙집을 구한후 독립했는데 돈이 넉넉하지 못해 고생합니다.
마리 퀴리는 추위에 시달리고 음식조차 제대로 못 먹어 고생했으니 물리를 공부하다 너무 힘들면 대수학을
공부하여 머리를 식혔다고 하며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으니 하루에 빵 한조각과 당근 하나만
먹으며 공부했다고 묘사할 정도이며.... 하숙집 주인이 빨리 의사를 불러 응급조치를 받아 목숨을 구합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언니와 형부는 경악했고, 마리 퀴리는 언니 집으로 끌려가서 강제로 스테이크를
실컷 먹어야 했는데 언니는 울면서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냐고 슬퍼했는데,
어머니와 언니 조피아가 병으로 요절하는 것을 보았으니 마리 퀴리도 죽을까봐 걱정했던 것입니다.
마리 퀴리도 진심으로 사과했고 다만 폐를 끼치기 싫다며 언니 집에 지내지 않고....
다시 하숙집에서 지냈는데, 대신 이전과는 달리 언니와 형부가 지원해준
돈으로 좋은 하숙집을 구하고 전보다 여유롭게 지내면서 공부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 석사학위를 취득한후 35세 노총각이었던 피에르 퀴리를 만나
1895년에 결혼식을 올린뒤 방사능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니 자녀는 딸 두 명(이렌, 에브) 이 있었습니다.
언니 브로니스와바는 내과의사로 병원을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았지만, 사업가인 형부를 설득하여
마리의 연구에 많은 돈을 연구비로 보태줬기에 마리와 피에르의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고,
폴란드 독립후 브로니스와바 드우스카와 카지미에시 드우스키도 폴란드 정부에
라듐 발견 공로자로 인정받아 치하장도 받고 폴란드 각종 국영사업권도 받아 번영을 누렸습니다.
프랑스에서 마리 퀴리 라듐 연구소가 열린 뒤로 언니와 형부는 1925년에 바르샤바에 마리 퀴리
바르샤바 라듐 연구소를 설립했고 남편이 병으로 죽자 언니가 연구소장을 맡았는데
그녀는 자식을 모두 잃었기에 마리의 딸인 이렌과 에브를 친딸 같이 여기며 지냈다고 합니다.
라듐은 방사선이 나오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사용하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알게 되어서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자연의 비밀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을만큼 인간은 성숙한가요? ㅡ 피에르 퀴리, 노벨상 수상식 연설
마리의 연구를 지켜보던 피에르는 부인의 연구를 도와주었고, 결국 두 사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898년 방사능 물질인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해 두 사람은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는데.... 당시 방사능 현상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 에 위배되는 현상이라
물리분야로 여겼는데..... E=MC2 으로 유명한 질량 - 에너지 동등성은 한참 뒤에야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폴로늄은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첫번째 원소인데, 이때는 폴란드가 독립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이런 이름을 좋게 볼수가 없었으니, 원래 마리는 자기가 시작한 연구
임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받지 못할 예정이었고, 피에르와 베크렐만 노벨상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마리는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아니었기에 논란이 일었던 것이며 게다가 형광 유리 제작에 필요한
우라늄을 빼낸 피치블렌드 10톤에서 라듐과 폴로늄을 분리해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단순 작업 노동이니 피치블렌드 원석 10톤을 아궁이에서 계속 가열해서 폴로늄 10g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 잘 만난 덕에 노벨상을 받았다' 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래도 마리의 업적을 인정
하는 사람도 많았고, 남편인 피에르가 마리와 더불어 공동 수상하게 해달라고 죽어라 탄원서를 올린
까닭에 부부 공동수상이 겨우 가능했으며 그리고 마리와 피에르는 단숨에 세계적인 천재로 유명해집니다.
비가 내리던 1906년 4월 19일, 피에르가 마차 바퀴에 깔리는 교통사고로 즉사, 만 46세로 사망하는
참변이 일어났으니.... 딸 에브 퀴리 가 쓴 전기에는 바퀴에 머리가 깔려 사망했다고
적혀 있으니 어린이 위인전에 조차 '부서진 머리뼈에 붕대를 감았다' 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입니다.
피에르는 대학에 출근하던 길이었으나 비가 와서 앞이 잘 안 보였고, 화물마차를 운전하던 마부는 술이 덜깬
상태였으니 마부는 횡설수설하여 미친 놈이 자살했다는둥 헛소리를 했지만, 사고현장에서 어느 사람이
신문에서 본 노벨상 수상자와 닮았다고 증언하자 경찰이 와서 소지품을 보고 피에르 퀴리임을 확인합니다.
이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마부를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팼다고 하는데.... 마부는 프랑스의 위대한 과학자를
죽인 살인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명백한 음주운전에 해당되기 때문에 자업자득이지만. 피에르
의 죽음을 경찰에게 연락받은 대학 측 관계자들은 이 소식을 부인에게 어찌 전해야하느냐며 난감해했습니다.
피에르가 죽은후 소르본 대학교에서는 마리에게 어떤 대우를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는데 마침 피에르가
죽으면서 교수 자리도 비었기에, 후임으로 방사능을 연구할 사람도 결정해야 했으니 고민하던 소르본
대학교는 마리에게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정했고, 프랑스 고등교육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가 됩니다.
교수직 인수후 들어간 첫 수업에서 인사만 간단히 한후 정확히 남편의 마지막 강의 이후의 진도를
나갔다고 하는데..... 보통 교사가 바뀌면 새로 온 교사는 자기 나름의 커리큘럼대로 다시
수업을 진행하는데, 마리의 남편에 대한 존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수업에는 첫 여교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학생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마리가 죽은 남편에 대한 감상적인 이야기를 할거라고 기대했다가 강의만 하는 걸
보고서 당황하고 실망했다는데.... 당연히 위대한 업적을 쌓은 교수로서 강의만을 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당시 사람들이 여성에 대해 가진 편견이 나타난 일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인물도 생전에 사생활 문제로 구설에 휘말린 적이 있었으니 바로, 동료
과학자 폴 랑주뱅과의 불륜 의혹인데.... 다만 영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허접한
기자에 의한 오보라는 주장도 있는데, 마리야 남편이 사망한 뒤라 새 사랑을 시작
해도 문제될게 없었지만 문제는 폴 랑주뱅으로 당시 폴은 유부남이었고 아이 까지 있었습니다.
폴 랑주뱅은 부인의 처가 장모 및 처제와 불화해 장모가 집어던진 철제의자에 얻어맞아
부상을 당하기도 했으니... 이후 퀴리 부부로 부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하며
그러다 남편이 죽은 슬픔을 서로 위로해 주다 보니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친애하는 폴, 어제 저녁과 밤은 당신과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며 보냈어요. 지금도
당신의 선량하고 부드러운 눈과 매력적인 미소를 떠올립니다. 당신 존재의 모든
감미로움을 다시 발견할 순간만을 생각하고 있어요.” - 마리 퀴리가 랑주뱅에게 보낸 편지 일부
“그는 떨리는 가냘픈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마그리트, 랑주뱅을 그 자신으로
부터 구해줘야 해요. 당신이나 나는 강한 사람들이지만 그는 연약해요. 그는 이해와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 제노바로 가는 도중 마리 퀴리를 회상하는 마그리트-
스웨덴에선 이 일로 소란이 있었지만 무사히 노벨상을 받게 되지만 프랑스에선 이 일을 여러 신문사에서
떠드는 상황인지라 여론은 결코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편지와 함께 독설로 인해 결투 까지 벌어
졌지만 다행히 죽은 사람은 생기지 않았고 결국 스웨덴은 노벨상을 거절하라는 편지를 주기에 이릅니다.
허나 마리 퀴리는,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어지는 것” 이라는
말과 함께 시상식에 참석하고 노벨상을 다시 한 번 받게 되는데.....
이러한 사건은 랑주뱅과 잔, 그리고 마리 퀴리 까지 모두 헤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여전히 나에 대한 애정과 내 슬픔에 대한 동정을 보여준다”,
“그의 애정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1915년 랑주뱅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11년 마리 퀴리를 벨기에 브뤼셀 솔베이 회의에서 처음 만난 후 이런 소란을 이해
하지 못하겠다며 '그녀는 똑똑하고 열정적이지만, 누구에게나 치명적일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
라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언론의 입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으며 마리는 자살까지도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마리는 기자들을 기피하게 되며, 이 태도는 1920년대에 멜로니라는 미국 기자와 만날
때 까지 유지되는데..... 마리를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라듐 1g을 선물한 인물이 이 사람.
이때 마리는 하도 시달린 나머지 알프스로 딸들과 도망쳤고 거기서 아인슈타인을 만나 교류했다고
하는데, 아인슈타인이 마리와 산책을 하다가 문득 던진 한마디가 "엘리베이터가 허공에서
떨어지면 거기 탄 사람들은 어찌될까?" 였는데 이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단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의 손녀 엘렌의 남편, 즉 손녀 사위의 이름은 바로 미셸 랑주뱅, 즉 폴 랑주뱅
의 손자이니..... 폴 랑주뱅은 이후에도 장녀 이렌 퀴리의 지도교수를 맡았고, 마리를
비롯한 퀴리 가문과의 친분도 계속 이어갔기 때문에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다는 평이 많습니다.
여러 시련을 이겨내며 1910년 금속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1911년 노벨화학상을 타면서 최초의 노벨상 2회
수상자가 되었는데, 2회 수상자는 4명으로 늘어났지만 다른 세 명은 분야가 같거나 2회 중 하나가 과학
부문이 아닌 경우고, 과학과 관련된 서로 다른 분야(물리학, 화학) 에서 수상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유일합니다.
프랑스의 방해 공작도 모자라 보수적인 과학계의 성차별로 고생을 많이 했으니 1911년 1월에 마리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후보가 되지만 2표 차이로 떨어지는데, 이민자이고 여자인 마리를 과학 아카데미 같은
곳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높으신 분들의 주장과, 위에서 소개한 스캔들이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여성은 영원히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니.....
이 결의안은 1962년 까지 유지되었고, 결국 퀴리 부부의 제자이자 퀴리 연구소 소속
으로 1939년 프랑슘을 발견한 마르게리테 프레이가 처음으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여성 회원이 되며 또한 여성은 교수가 될 수 없다는 관행에 따라 연구실 주임 밖에 못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마리는 스스로 개발한 '리틀 퀴리' 라는 자동차로 전선을 누비게 되는데... 차에는
X-ray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치가 붙어 있었으며, 20대 정도가 만들어져서 부상병들을
진단하는데 큰 활약을 했고 이때 마리에게 도움을 받은 부상병은 100만명이 넘는다는데
그러나 훗날에 밝혀진 바로는 마리가 X 선에 과다하게 노출된 것이 건강에 큰 무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전쟁 당시 마리는 자신이 받은 노벨상 메달 까지 팔아서 프랑스의 전쟁 수행에 기부
하려고 했지만, 프랑스 중앙은행에서 사양하는 덕분(?) 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신 자신이 받은 노벨상 상금으로 전쟁 채권을 사는 방식으로 동참했습니다.
마리의 딸인 이렌도 어머니와 함께 이동식 X-선 장치 운영에 참가함으로써 무공훈장을
받지만, 막상 마리에게는 어떠한 포상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게다가 마리는
이때 국가에 전 재산을 바쳤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동전 한푼 없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는 연구소로 돌아가지만, 연구소에는 라듐이 1g 밖에 없었던 데다가 여기저기서 의학용
으로 라듐을 빌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기에 연구에 어려움을 겪는데, 다행히 미국에서 마리를 인터뷰
하러 온 저널리스트 멜로니가 그 사연을 듣고 모금 운동을 해서 라듐 1g 을 구입할 돈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때 멜로니는 마리에게서 자기 소유의 라듐은 1g 도 없고 라듐이 너무 비싸서 구입할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부인께선 라듐에 대해 특허권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마리는 없다고 하고서는 "라듐은 하나의 원소이며, 모든 사람들의 것"
이라고 말했는데 마음만 먹으면 백만장자가 될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인류를 위해 포기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정부는 그제서야 자신들이 그동안 마리를 너무 박대했다는 사실을 자각
하게 되니, 그런 상황에서 마리가 미국으로 라듐을 받으러 가면 "어째서 프랑스
정부는 저렇게 훌륭하신 분을 박대하는가?" 라는 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재빨리 마리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사양합니다.
미국에 간 마리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비로소 업적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되는데, 이전까지는 두 딸
들과 주변 사람들도 '마리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나 이날 이후로는
차마 그럴 수 없게 되었으며..... 훗날 마리의 차녀 에브는 어머니의 전기를 쓰면서 이 사실을 기록합니다.
이후 마리는 미국 대통령으로 부터 직접 라듐을 받았는데, 실제로는 수여식 때는 상자만 받았을 뿐이고 진짜
라듐은 귀국할 때 안전요원과 함께 배에 실렸는데.... 이는 라듐이 위험한 물질이므로 그만큼 주의깊게
관리되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냥 주면 공개살인에 가까운 위험한 행위를 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마리가 귀국한후 프랑스 정부는 마리에게 국가상을 수여하면서, 또 거부 소리가 나올까봐 수여식장
에서 수여 거부권을 박탈하는 기행을 저질렀으니..... 어쨌든 이 상에 딸려온 종신 연금
덕분에 마리도 가난으로 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고, 세계 각국을 방문하며 수많은 상을 받게됩니다.
1923년에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는 마리를 회원으로 받아들이는데 마리 본인은 입후보한 적이 없었지만
의학 아카데미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추천했으며, 다른 후보들도 마리의 입후보 소식을
듣고 모두 자발적으로 사퇴했기에 경쟁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며 세계 각국에서 개최된 강연,
회의에 참석하였고 1925년에는 1차대전후 독립한 모국 폴란드를 방문하는 기쁨을 갖기도 했습니다.
말년에 마리는 계속된 방사능 연구 탓에 건강이 악화되어 방사선 피폭에 의한 재생불량성 빈혈등으로
고생하며 요양원을 전전하다가, 1934년 7월 4일 향년 66세로 사망하는데 죽기 직전에는 생리
기능이 완전히 망가져서, 인체의 발열 기능마저 정지할 정도였는데... 하지만 라듐을 주머니
에 넣고 다녔던 사람이니 당시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방사선 피폭자 치고는 더더욱 오래 산 셈입니다.
훗날 마리가 팡테옹에 안장될 때 시신에 대한 방사능 측정이 이뤄진 결과, 잔류 방사능이 거의
남지 않았기에 라듐에 의한 피폭 보다는 1차대전 당시 부상병들을 진단
하는 과정에서 X 선에 과다하게 노출되었기에 병을 얻었다는 설에 무게가 실리게 되었습니다.
장녀 이렌 졸리오 퀴리는 부모의 뒤를 이어 과학자가 되어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고, 차녀 에브 퀴리는 당대 찬사받던 미인이었으며 피아니스트 겸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활동하였는데 남편 헨리 라부아스 주니어는 유니세프 활동으로
인한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니..... 퀴리 부부 까지 합치면 한 집안에 노벨상 수상자만 5명입니다?
유일하게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차녀 에브가 "일부러 과학 안 하는 남편이랑 결혼했더니 평화상을
받아 와서 본인만 가문의 수치가 됐다" 며 투덜거렸다는데.... 하지만 그녀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가, 유니세프 활동가로서 여러 업적을 쌓고 수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으며 100세 이상 장수했습니다.
여자라고 차별을 받은 마리 퀴리를 생각하니 문득 프랑스의 시몬 베이유가 떠오르는데, 파리 팡테옹에는
男(남) 76명에 비해 女(여) 5명이 묻혔고 파리역 303개 중에 여성이름 7개뿐이라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당신은 여성과 정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프랑스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은 파리의 팡테옹 앞에서 ‘여성 인권의 대모’ 로 통하는 '시몬 베유' 를 향한 추도사를 읽어 나갔다.
파리 중심에 있는 팡테옹 은 프랑스를 빛낸 국가적 영웅들이 안장된 곳으로 프랑스 국립묘지 에 해당한다"
“시몬 베유 는 1944년 17세의 나이로 나치 수용소에 끌려가 부모와 오빠를 잃은 아픔을
딛고 1974년 보건장관 자리에 올라 낙태 합법화 법안 을 제출하는 등 여성 인권
을 위해 힘쓴 정치인이다. 1979년 유럽 의회 초대 의장 을 맡아 유럽 통합에도 기여했다.”
“시몬 베유 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 정치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가
숨졌을 때 마크롱 대통령 이 유해를 팡테옹에 안치 하기로 결정하자
의외의 결정이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만큼 여성들에게는 팡테옹의 문턱이 높았다.”
“베유보다 앞서 팡테옹에 묻힌 여성은 4명으로 팡테옹에 묻힌 최초 여성 소피 베르틀로 는
자신의 생전 업적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화학자인 남편 마르슬랭 베르틀로와의
‘각별한 부부애’로 남편과 함께 팡테옹에 안장됐다. 남성은 무려 76명 이 안치되어 있다”
“지난해 탄생 150주년을 맞아 팡테옹에서 특별전이 마련됐던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마리 퀴리는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팡테옹에 묻힌 유일한 여성 이었다. 하지만
마리 퀴리도 사후 61년이 지난 1995년에야..... 남편과 함께 팡테옹에 묻힐 수 있었다”
“다른 두명 여성은 2015년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 영웅 4명 을 팡테옹에 안장하면서 포함된 인물들이다.
사망후 팡테옹에 안치되기 까지 수십년이 걸린 관례를 깨고 마크롱 대통령이 사후
1년 만에 베유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옮겨 안치토록 결정한 것은 프랑스에선 이례적인 일!”
“팡테옹에 묻히 여성은 과학자 소피 베르틀로, 노벨 물리학상 마리 퀴리, 17세기 수녀 제르멘
티용, 레지스탕스 준비에브 드골망토니오즈, 여성 인권운동가 시멘 베유등 5명!”
“지하철역 여성 이름 은 작가로 파리 코뮌 지도자 루이즈 미셸, 노벨 물리학상 마리 퀴리,
17세기 수녀 마르그리트 드 로슈슈아르, 여성 인권운동가 시멘 베유, 미국
인권 운동가 로자 파크스, 프랑스 가수 바르바라, 레지스탕스 뤼시 오브라크 7명 이다."
첫댓글 즐거운 시간되세요
근대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동서양이 똑 같았다는게 놀랍습니다!
재생 불량성 빈혈로 죽었
죠. 남편도 방사선 물질을
맨 손으로해서 눈이 멀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
차가 안 보였죠.
아? 교통사고가 난게......
달려오는 마차가 안보여서?
그렇군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이칼3 방사능이 얼마나 위험한데요
@삼광빌라 하아..... 그러니까 당시에는.....
그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했나 봅니다?
@바이칼3 그 따님인 이렌씨도 방사능으로
인해 백혈병에 걸려 죽었어요
@삼광빌라 과학의 연구에 앞장선 선구자들의 겪은
희생덕분에 오늘의 과학이 있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