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의 변
박무형
parkhyung7@daum.net
나는 지금 거실에서 혼자 뒹굴고 있다. 파킨슨이란 지병으로 집에서 와병 중이던 아내는 또 다른 질병에 휩싸여 병원에 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직장과 병원을 번갈아 다니면서 제 엄마 간병에 힘을 쏟고 있다.
거실 TV에서는 차이콥스키의 발레 곡<호두까기 인형>이 흘러나오고 있다. 화면에선 성탄절 이브에 소녀 클라라가 선물 받은 호두까기 인형을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그때 생쥐대왕이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 이에 대항하여 호두까기 인형이 왕자로 변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맞서 싸운다. 클라라의 집은 온통 이들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물러가는 각축장이 되어버린다. 클라라의 침실은 생쥐 떼에 점령당할 위기에 몰리고 있다.
지금 아내의 뱃속에서 저와 같은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 장내(腸內) 평화를 지키던 유익균(有益菌)이 유해균(有害菌)에게 쫒기고 있다. 그로 인해 심한 고열과 설사가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크로스컨트리 듐 디피실리’! 그 이름도 생소하고 고약한 급성장염 세균 때문에 지난 초봄부터 추석이 내일 모레인 지금까지 입원과 퇴원을 무려 여섯 번이나 되풀이 했다. 매번 급박하게 그 증세가 나타나 119 구급차를 불러 집 인근에 있는 K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야했다.
입원을 하면 보통 일주일쯤, 증세가 호전되면 퇴원 하게 된다. 입원할 때마다 간병은 백수인 내가 전담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애들은 내가 고령이어서 밤샘간호가 힘들 거라며 극구 만류했다. 아버지까지 쓰러지면 큰일 난다 싶었던지 저희들끼리 순번을 정해 간병을 해왔다. 아마도 그들로서는 평소 나의 케어가 자상하지 못하고, 어설퍼서 미덥지 못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하루 종일 가사와 아내를 돌보는 일에 어지간히 지쳐있던 참이었다. 아내가 입원하면 텅 빈 집안에서 맥없이 지낸다. 병원에서 연락이오면 간병에 필요한 기저귀와 휴지, 생수등,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나 혼자 먹고 자는 일이 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신이 더 괴롭고 피폐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밀쳐두었던 글쓰기도 하고 책을 많이 보려고 했다. 그동안 못 가던 동네공원 산책도 시도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어질러진 집구석에서 멍때리며 누워 있기 일쑤였다. 밥까지도 제때에 챙겨먹지 못했다.
생각지도 않던 코로나가 내게도 옮겨 붙었다. 어쩐지 턱없이 무기력해지고 목이 아프고 마른기침이 나온다 싶었다. 동네 이비인후과에서 코로나 양성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하면서 삼일분의 약 처방을 주었다. 코로나 기세가 잦아드는 때여서 병원 격리치료는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도 애들은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은 이상 종합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 있으면 엄마가 퇴원해서 올 텐데 집에 코로나 보균환자가 머물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집 인근에 있는 K성심병원에 찾아가 코로나 검사를 받고 격리병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실은 3인실이었다. 베드 칸막이 커텐속에 갇혀 지냈다. 잦은 수액주사와 약물치료를 받아서인지 며칠 만에 밥맛과 원기를 되찾고 찌뿌듯한 무기력증도 어느 정도 가시었다. 말로만 듣던 코로나19의 실체도 겪지 않고 닷새 만에 퇴원하였다.
K대학병원에서 아내가 퇴원할 것이라고 애들이 알려왔다. 그런데 전례로 보아 그 병이 다시 재발할 것이 보이는 듯 했다. 전화로 큰딸에게 그냥 퇴원할 것이 아니라 담당의사에게 근본적인 치료방안으로 <대변이식시술>추진을 의논하여 보라고 했다. 그 시술은 건강한 젊은 사람의 분변을 정제하여 환자의 장(腸)속에 주입시키는 방식으로서 완치율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처음엔 해괴하고 망측하다는 생각에 주저했으나 이제는 그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를 택하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병원에 대변이식 시술 전문의가 있어 그 교수에게 시술을 요청했다. 치료담당이 감염내과에서 소화기내과로 바뀌었다. 시술을 위한 검사와 준비가 있어 퇴원이 미뤄졌다. 우선 대변을 기증해줄 대상자 선정을 병원 측에 의뢰했다. 나의 귀가도 미뤄지게 되었다.
나는 코로나 병실에서 벗어난 후 곧장 집으로 가지 못했다. 막내가 예약해 주는 대로 구로 디지털 단지역 부근에 있는 ‘호텔신라 더 스테이’라는 곳에서 1주일간 유숙하게 되었다. 완전히 에트란제나 노숙자가 된 것처럼 기분이 묘했으나 싫지는 않았다. 그곳 스테이 룸은 객실규모가 원룸 원베드 식으로 다소 작았으나 호텔로서 기본 부대시설은 다 갖추고 있어서 호캉스 삼아 며칠 지낼 만 하였다.
기왕에 자유로운 일상을 되찾았으니 잠시나마 시름없이 지내고 싶었다. 아이들도 이번 기회에 집에 올 때까지 시내 여기저기 마음 놓고 다니라고 했다. 참으로 사려 깊은 효녀들이라 생각했다. 아침은 2층 뷔페에서 다채로운 식단에 따라 여느 호텔처럼 격조 있게 식시를 할 수 있어 흐뭇했다.
첫날은 코로나 병실에서 입었던 러닝 셔츠 등 빨랫감을 근처 코인 빨래방에서 세탁하고 건조기를 거쳐 비닐 백에 담아 호텔에 가져왔다. 부근에 BYC 본사 직매점이 있어 파자마와 팬티, 바지, 양말 등을 여분까지 새로 샀다. 여기저기 쇼핑백에 들었던 옷가지와 소지품을 여행용 트렁크를 하나 구입해서 담았다. 호텔 주변 커피숍과 식당, 편의점을 쏘다니며 유유자적하게 소일하였다.
둘째 날부터 시내 미술관과 고궁, 영화관 맛집 등을 두루 찾아 다녔다. 하루 2만보 정도 걸어도 피곤한 줄 몰랐다. 혼자라도 마냥 좋았다. 온종일 같은 영화를 3번이나 보기도 했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음악의 대가 엔리오 모리꼬네의 일대기였다. 영상음악 효과의 극치를 위해 다각적으로 무수히 실험을 거듭했던 그의 예술혼에 박수를 보냈다. 그의 음악은 그 어느 장르의 창작곡보다 발랄하였고, 고매하고도 깊은 페이소스를 자아냈다.
나의 절친 두 사람이 모처럼 전화를 걸어와 근황을 듣더니 호텔로 찾아왔다. 그들은 환호하며 그동안 찌들었던 나의 심신과 영혼을 치유해 준답시고 온종일 나를 유흥가로 끌고 다녔다. 저녁에는 인사동 방석집에서 술도 마시고 노래방에도 가고 안마시술도 받고 하며 거하게 놀았다. 그들과는 이튿날 헤어졌다. 너무 과한 대접은 사양했으나 K라는 친구, 자기에게 남아 있는 건 돈밖에 없다며 내게 과도한 일탈을 선사하고 떠나갔다.
까뮈의 <이방인>, 그 주인공 뫼르소가 요양원에 가 있던 어머니의 장례식에 건성으로 다녀 온 후, 옛 직장 동료였던 여인과 영화보고 해수욕 즐기고 사랑을 나누는 무심한 행각이 떠올랐다. ‘내가 그 뫼르소, 시러배 같은 놈과 다를 게 뭐람’하는 자조가 내 입가에 맴돌았다.
‘호텔신라 더 스테이’에서 3일간 더 묵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대변 이식 받을 준비로 여러 검사를 마치고 퇴원하여 집에 있었다. 다음 외래 진료일에 대장내시경으로 이식시술에 들어 갈 예정이라 했다. 그동안 늘어난 짐이 가득 찬 여행용 트렁크를 이끌고 집에 도착하니 마치 집 나갔던 탕자가 돌아오는 듯 묘한 감상이 일었다.
그 전보다 더 수척해진 아내를 대하니 미안한 마음과 측은지심이 들어 울컥했다. 그래도 가장이라고 온 가족이 반겨주니 감회가 컷다. 머리가 희끗한 아내의 나른한 모습이 3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초상과 어쩌면 그렇게 닮아 있는지, 가슴이 찡했다. 앞으로 내가 더 오래 살아서 저 아내를 끝까지 잘 돌봐야지, 정성껏 모셔야지 하며 나는 몇 번이나 변명처럼 되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