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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좋은글.생활지혜 스크랩 십자군 전쟁, 초승달과 십자가의 충돌 1부.
조대변인 추천 0 조회 106 11.01.27 16: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충돌, 예루살렘!~

 

 

 

지난 천 년간 중동의 성지는 언제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세계 3대 종교가 이곳에서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켜 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것은

11세기에 시작되어 200년간 계속 되었던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것은

고작 수백 마일 거리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영토,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성스러운 전쟁.

하지만 그것을 목격한 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각각의 입장에서 서술한 역사 기록들은 위대한 영웅들의 무용담과 전투 기록들이 담겨 있다.

 

신의 이름으로 목숨을 바쳐 싸웠던 사람들.

두 위대한 신앙의 충돌.

그것이 바로 십자군전쟁이다.

 

 

세상에 모든 도시들 중 예루살렘만큼 험난한 과거와 미래를 지닌 곳은 없을 것이다.

 

유대교에선 헤롯왕솔로몬왕의 위대한 신전이 있는 곳.

 

이슬람교에선 마호메트가 천국으로 승천했던 곳.

 

기독교에선 그들의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

 

그후 4세기 동안 점차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시로써

기독교를 옹호하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7세기에 들어 예루살렘은 새로운 세력 이슬람교의 차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400년후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유럽 전역에서 6만여 명의 전사들이 모여들어 전쟁을 준비한다.

 

 

 

2. 신 중심의 중세사회, 교황과 황제의 엇갈린 욕망!~

 

 

 

지도자 중 한 명인 베테랑 장군, 고드프르와 드 뷔용 공작

다시 예루살렘을 하느님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3천 마일의 거리를 지나는 3년간의 십자군 원정길에 오른다.

 

고드프르와는 단순한 무사가 아니었다.

카톨릭 교회에 후원자이며 열렬한 신앙심의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만드는 방법은 단 한가지였죠.

그건 바로 십자군 전쟁이 영혼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현안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신앙이었습니다."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십자군 전사들을 대체적으로 아우르는 단어인 프랑크인들

이슬람 세계에선 이슬람 문명을 파괴하려고 침입한 야만인들이라고 인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십자군이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들 당시의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타라크 알리, '살라딘' 저자

 

십자군 전사들은 무엇을 위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험난한 길을 선택했던 것일까?

 

극심한 기아와 잦은 전쟁에 폐허가 되어버린 유럽은 저주받은 땅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찾을 기회가 필요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11세기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시끄러운 세상이었는지 보고 놀라실겁니다.

조직화된 중앙정부도 없고 프랑스나 대제국 스페인도 건설되기 전이죠. 

따라서 크고 작은 지방 성주들의 뺏고 빼앗기는 전쟁들이 끝없이 일어났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러웨이 런던 대학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한 학식있는 기독교인의 기록이 있다.

티레의 대주교이자 왕의 친구이자 기욤은 그가 목격한 십자군 원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거의 모든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져 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의는 이미 빛을 잃었으며 온 나라는 폭력에 물들고 있다.

모든 세상 일에는 사기와 음모와 배신이 서려 있다.

모든 미덕은 산산조각나고 쓸모없는 가치가 되었다.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한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이 무정부 상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조직은 단 하나, 교회뿐이었다.

11세기 서부 유럽은 기독교 신앙의 지배를 받았다.

 

 

"중세사회는 기독교와 매우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종교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세속적인 현대인은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죠."

                                                                                  - 폴 크로퍼드 교수, 알마대학 

 

"당시 사람들은 언제나 죄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인간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죄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숨쉬는 것 자체가 죄악이었던 것이죠."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그 죄악은 신앙으로 살 수 있었지만

교회는 유럽 사회 전반에 영향을 줄 정치적 힘이 부족했다.

 

유럽의 세속적 통치자들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교황은 정치권 밖으로 밀려났지만

1088년 로마에 입성한 새로운 교황 우르바노스 2세는 달랐다.

 

 

"우르바노스 2세는 정치, 사회, 종교적 실효를 읽을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을 이용해 유용한 결과를 배출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러웨이 런던 대학   

                

교황은 카톨릭 교회를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세우기를 원했다.

 

그 기도에 대한 답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오랜 종교적 라이벌로부터 날아들었다.

1095년. 지원을 요청하는 급한 전갈이 교황 우르바노스 2세에게 전해졌다.

 

교회에 오랜 종교적 라이벌이자 그리스정교회 수장인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콘스탄티노플 황궁으로부터 보내온 전갈이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은 셀주크투르크족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생겨나 영토를 찾아 중동 지역까지 밀려온 종족이다.

 

 

 

 

 

수만 명을 헤아리는 투르크족은 두려움을 몰랐다.

그들은 페르시아, 시리아,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마침내 예루살렘까지 손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북쪽으로 돌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문앞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지금껏 유지되던 권력 균형에 큰변화가 일고 있었습니다.

비잔틴 지역은 징세와 징병을 할 수 있는 지역을 잃고 쇠망해갔습니다."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1095년 황제 알렉시우스는 반격을 계획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황제는

종교적 동지인 교황에게

투르크족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소수 정예 기사들을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교황은

이것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기회로 삼을 생각이었다. 

 

"당시의 교황들은 정치적 성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지금의 교황들도 정치에 관여하고 있지만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황들은 음모, 저작, 책동 등 각종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가들이었습니다.

교회의 정치가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교황은 비잔틴 제국의 위기를 기회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십자군을 모집해 

이슬람과의 성전을 통해

교황권을 강화하고

로마를 세계 권력의 중심지로 회복시킬 생각이었다. 

 

"교황이 십자군을 일으킨 데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선 서유럽의 세속인 통치자에게 넘어갔던 기사단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 기사단의 무력이 교회를 노릴 위험을 없애는 것입니다.

또한 이단자들을 몰아내고 성지를 회복하는 것이었지요."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3. 부와 권력, 그리고 속죄와 천국행, 자군의 진군!~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가슴을 울리는 교황의 연설이 울러퍼진다. 

 

교황은

왕자, 기사, 성직자, 일반인 모두

카톨릭 깃발 아래 모여

성지를 회복할 것을 호소했다.

 

"교황 우르바노스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마치 미국의 빌리그린 목사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처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연설장에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지요."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그의 연설엔 교묘한 종교적 선동이 숨어 있었다.

 

성지순례자들에게

이슬람 세력이 가한 잔혹 행위를 과장해 들려주면서

투르크족을 악마로 규정하며

십자군전쟁이 두 신앙간에 최후의 전쟁이 될거라고 호소했다.

 

"그의 연설은 마치 하느님의 말씀처럼 들렸고

청중은 모두 신의 계시에 귀를 기우렸다.

우리 신앙의 요람이며 주님의 고향이자 구원의 원천인 그곳이 주님을 받들지 않는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오랜 세월 그 사악한 믿음을 계승한 이슬람교도들이 우리 그리스도가 몸을 누이신 그곳에서 폭정을 일삼고 있다. 

우리 성지를 짐승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성직자들은 성소에서 살해되고, 처녀들은 매춘과 죽음 중 선택을 강요받았다. "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모두가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였습니다. 

 

우르바노스가 성전 참전강조하자

사람들은 십자가를 받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어 만든 십자가를 가슴에 붙여

그들의 기독교 형제들을 구하러 동방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던 것입니다."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드높은 영광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로 

수만 명의 남자와 여자, 온가족, 혹은 마을 전체가 교황 우르바노스의 십자군에 동참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생생히 기록한 한 십자군 병사가 말했듯이

그들에겐 부를 얻을 수 있다는 또 다른 희망이 있었다. 

 

"교황은 말씀하셨다.

구원을 원하는 자는 망설이지 말고 성전에 기대어 울어라.

부유하지 않은 자에게도 성스러운 자비가 내릴 것이다.

또한 사악한 종족으로부터 성묘를 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손수 지배하라."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순수한 종교와 사상만으로는 동기 부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중동은 세계의 모든 상인들이 통과하는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들은 그 돈을 노리고 참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부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보다 더 큰보상이 그들에게 주어진다.

 

교황 우르바노스가

십자군에 영혼을 바친 자들에게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형제와 친척을 상대로 싸웠던 자들에게

야만인과 싸울 성스러운 기회를 주겠다.

 

세속적인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

기독교를 구할 목적으로 십자군 원정에 오르는 자는

누구나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교황 우르바노스의 계략은 적중했습니다.

서유럽 기사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은 거죠.

그는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속죄받지 못하면 지옥에 가리라고 말했습니다.

 

교황은 전쟁에 나가면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십자군에 지원하면 죄를 사면받고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설교를 통해

기독교의 교리조차 변경했다.

 

그는 성전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여섯 번째 계율은

이번 이단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이번 전쟁이 하느님의 뜻이며 그가 전사들의 영혼을 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르는 위험한 발언이었지요.

어쩌든 이교도에 대한 분노가 서유럽 전체에서 끓어올랐습니다.

또한 로마카톨릭 이외의 모든 비기독교 신자들을 적대하기 시작했지요."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기도 전에

교황의 설교에 자극받은 광신도들은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광신도들은 자신들과 신앙이 다른 기독교들을 모두 이단자라 생각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순례자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독교에 반하는 적이라며 유대인들을 마구 학살했다.

 

그들은 많은 유대인들의 목을 베었다.

또한 유대인들의 집과 교회당을 파괴하고 그곳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나눠 가졌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유럽 전역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

하느님의 이름으로 학살되었다.

 

결국 죄 없는 자들의 억울한 죽음이

제 1차 원정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4. 비잔틴제국을 너머 예루살렘으로!~

                               그러나 황제 알렉시우스의 배신!~

 

 

1096년 가을, 교황의 연설이 있은 지 1년만에

프랑스와 독일, 이탈이아의 군대가 그들의 기독교 형제의 나라들을 구하고

이슬람으로부터 성지를 되찾기 위한 3천 마일의 원정에 나섰다.

 

 

북부 유럽 대부분의 지도자는 고드프르와 드 뷔용이었다. 

 

"1차 원정의 지도자 중 한 명인 고드프르와는 원정때 성직자를 대동할 정도로 신앙이 깊었지요.

또한 십자군 원정 이전에도 명성을 얻은 유능한 장군이었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리웨이 런던대학 

 

고드프르와 옆에는 그의 동생 보댕 드 블로뉴 백작이 있었다.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보댕은 한때 성직자의 길을 걸었지만 여색과 전쟁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했다. 

 

"보댕은 욕망과 육체의 쾌락에 사로잡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성격 중 일부였을 뿐이었습니다. 

고댕은 자신을 거스르는 자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실리주의자였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리웨이 런던대학 

 

군역사학자인 존 프랑스 교수11세기 역사 기록을 토대로 고드프르와와 고댕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이 자료들은 십자군의 행군길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은 개인적으로 땅을 팔거나 저당 잡힌 돈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원정에 필요한 돈은 대략 6년 정도의 수입에 해당되었지요.

부유한 귀족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해 하졸 모두를 데리고 원정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들의 아내들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대부분 남편을 따라 나섰습니다.

말하자면 한 도시나 마을 전체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거죠.

 

그 많은 사람들의 식량을 어떻게 조달했을지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일부는 식량을 약탈하기도 했겠지만

원칙적으로는 지나가는 길에 농민들에게 비싼 값을 지불하고 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존 프랑스 교수

 

6개월 동안 고드프르와의 군대는 동부 유럽의 강과 산맥을 넘어 천 마일을 진군했다.

그들은 마침내 다른 십자군 원정 병력군과의 합류 지점인 동방 정교회의 심장 콘스탄티노플에 다달았다. 

 

이스탄불의 옛이름인 콘스탄티노플

현재 터어키 최고의 공업도시이자 대표적인 이슬람 도시다.  

 

하지만 900년 전엔 유럽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마지막 기독교 도시로

십자군은 이곳 보스포러스 해역을 넘어 이슬람 영토로 진군할 예정이었다.   

 

바로 이곳에 동방 정교회의 본거지 성소피아 성당이 자릴 잡고 있다. 

 

번쩍이는 황금모자이크로 장식된 성당은 콘스탄티노플의 번영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십자군 전사들은 성당을 가까이서 볼 수가 없었다.

9미터 높이의 두꺼운 돌벽이 도시를 따라 10마일 이상 도시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동지가 도시를 방문하면 황제가 성문을 열어 그를 도시안으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십자군 부대 앞에서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여기는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는 열 개의 금문 중 하나가 있던 곳입니다.

마치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문입니다. 

꼭대기엔 네 개의 청동 코끼리상이 있고, 그 주변의 벽은 역사적인 영웅들의 무용담으로 장식했습니다.

십자군은 이 웅대한 개선문에 놀랐겠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였죠."

 

황제 알렉시우스는 문을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교황 우르바노스에게 정예군의 파병을 요청했던 황제는 6만의 십자군 대군을 보고 격분했다.

 

 

"황제는 원래 300여 명의 정예 기사부대를 지원받아 위험 지역에 배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황제에겐 떠들썩한 수만의 대군

한 역사가가 적었듯이 마치 메뚜기의 재앙처럼 보였을 것이다라는 것이죠.

군사들은 끝도 없이 황제의 도시로 밀려들어왔습니다."

 

황제의 종교적 라이벌이 보낸 대군이 도시 밖에 캠프를 차리자 황제는 큰위협을 느꼈다.

그에겐 그들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알렉시우스는 위기를 극복할 묘안을 생각해냈다.

 

"황제 알렉시우스는 간악하고 교활한 인물이었다.

 그는 마치 전갈처럼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는 악의를 보이지 않지만

 꼬리에는 강한 독을 품고 있는 상종하지 못할 인물이었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황제는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들을 황궁안에 있는 자신의 방에 불러들였다.

알렉시우스는 고드프르와 형제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 했다.

 

하지만 그들 이외에 다른 한 명의 지도자가 문제였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던 노르만 용병 대장의 장자 보이몽 드 프랑크가 그 주인공이었다.

 

" 보이몽은 훌륭한 외모와 풍채를 지닌 것으로 아주 유명한 인물입니다.

십자군 원정에서도 빛나는 전공을 세우면서 양떼를 쫓는 성난 사자란 찬사를 받았습니다."

 

보이몽의 무공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시칠리아에서 이슬람 세력과 격돌해 승리했고

지난 몇 년간 비잔틴 제국과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보이몽도 정치가가 아닌 군인으로서 황제의 술책에 넘어가고 말았다. 

 

"황제는 위대한 장군 보이몽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예를 다해 그를 접대하라고 명령했다.

보이몽이 고드프르와와 보댕과 캠프를 틀자, 황제는 그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황제는 간교한 계략으로 그들의 발목을 묶어두고자 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알렉시우스는 많은 영토를 잃고 있었다.

그는 잃었던 땅을 되찾아 십자군이 아닌 자신의 영토로 삼고자 했다.

황제는 비장의 카드를 숨기고 있었다.

 

"십자군은 준비된 군대가 아니어서 식량문제가 가장 심각했죠.

현대의 군대처럼 보급책이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식량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알렉시우스는 그 점을 이용해 그들과 협상을 했습니다.

그들이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황제는 식량공급을 중지해버립니다.

 

굶주림에 지친 군대들은 제국을 공격할 수도 있지만

결국 식량을 쥐고 있는 황제 뜻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식량을 보급해주는 댓가로 세 명의 십자군 지도자들은 황제로부터 충성서약을 강요받는다.

서약의 내용은 원정대의 최고통수권이 황제에게 있으며  

투르크족으로부터 탈환한 영토는 모두 비잔틴제국과 동방 정교회에 귀속된다는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대는 새로운 동맹 비잔틴제국의 도움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넌다. 

원정대는 곧 적의 영토에 진입하고 그들의 불안한 동맹은 첫번째 실험대에 오른다.

 

콘스탄티노플의 지원을 받고 있는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까지 천 마일 이상을 남겨놓고 있었다.

출정 몇 주 후인 1097년 10월, 원정대는 처음으로 적의 도시에 도착한다.

 

  

니케아는 한때 비잔틴제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20년 전 투르크족이 점령한 후 지금은 술탄, 크르츠아르슬러의 요새로 사용되고 있었다. 

 

"저기 북쪽의 언덕을 넘어서 십자군이 내려왔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해 저기 언덕을 넘어 들어와 온 도시를 둘러싸고 강력한 포위망을 형성했습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자 군사들은 적을 섬멸할 생각에 신이 났습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 존 프랑스 교수, 스완지대학 

 

3마일의 두꺼운 장벽이 둘러싸여 있는 니케아를 침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튼튼한 장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공격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대충 봐도 높이가 10미터를 넘고, 여기 보이는 탑은 30미터가 넘습니다.

적이 어느 방향에서 침입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 존 프랑스 교수, 스완지대학 

 

십자군은 6주 동안 니케아를 포위했다.

전투는 격렬했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렸다. 

이제 첫번째 승리가 눈앞에 와 있었다.

 

비록 빼앗은 영토는 황제 알렉시우스에게 넘겨주기로 했지만

그들은 니케아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잔틴 동맹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도시의 서쪽 측면을 따라 흐르는 아스카니아 호수.

1097년 6월 18일.

도시와 전리품을 모두 차지하기 위한 비잔틴제국의 밀사가 이곳에 도착한다.

 

"비잔틴제국은 십자군을 돕기 위해 호수에 배를 댔습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지요.

그들은 도시에 갇힌 투르크족과 비밀리에 접촉했습니다.

그들은 피에 굶주린 십자군에 도륙 당하느니 비잔틴에게 항복하길 택했습니다.

그날 아침 성벽에는 항복을 뜻하는 황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비잔틴 황제의 항복의 깃발을 목격한 십자군 병사들은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기독교 형제인 황제 알렉시우스가 이들을 배신한 것이다.

 

"알렉시우스가 투르크족과 내통해 도시를 손에 넣자 십자군은 분노에 떨었습니다.

그들이 동맹국이라고 믿었던 황제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길의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십자군 원정 계획에도 크나큰 차질이 생기게 된 겁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리웨이 런던대학

 

니케아의 전리품을 빼앗긴 십자군은 캠프를 철수한 뒤, 예루살렘을 향해 적진 깊숙히 진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투르크의 술탄 크르츠아르스란이 언덕위에서 그들의 행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략요충지를 잃은 술탄은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십자군에게 중요한 도시 니케아를 빼앗긴 술탄 크르츠아르스란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적군에게 기습하기 위해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술탄은 5만이 넘는 군사를 모두 동원할 생각이었다.

십자군보다 먼저 정찰병을 보낸 그는 기습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내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또렐라융전투라는 이름으로 십자군 역사의 한획을 긋고 있다.

 

오랜 연구 끝에도 정확한 전투 장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존 프랑스 교수는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정확한 장소를 찾았다고 주장한다.

 

"전투에 대한 기록으로 남지만 전투 장소를 찾기란 어렵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곳이 두 계곡 사이였고 늪이 하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 계곡 사이의 지점은 매우 넓은 장소였을 겁니다.

양쪽 군사를 총동원하려면 넓은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죠."

                                       

프랑스 교수는 1097년 십자군이 걸었던 길을 지나고 있다.

 

 

당시에는 다섯 명 정도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6만 대군이 이 길을 건너는데만 해도 사흘이 걸린 정도였다.

 

그 결과 보이몽이 이끄는 선발대가 본군에서 떨어져 나오고 말았다.

그들은 하는 수없이 크르츠아르스란이 잠복하고 있는 그 계곡에 캠프를 차렸다.

 

"이곳은 매우 평평하고 광활합니다.

계곡이 만나는 지점이죠. 아마도 이 지점이 확실한 거 같습니다."

 

존 프랑스 교수는 니케아로부터 35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십자군의 첫전투지역인 또렐라융을 찾아냈다.

 

 

"바로 여깁니다.

모든 현대적인 건축물을 치워놓고 보면 이곳이 바로 두 계곡이 만나는 평원입니다.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죠. 또한 땅도 습지처럼 매우 축축하죠.

우리는 지금 십자군 전쟁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그 장소에 서 있는 겁니다."

 

1097년 7월 1일 새벽.

단독으로 캠프를 치고 있는 보이몽의 군대를 향해 수만 명의 투르크군이 공격해왔다.

 

프랑스 교수는 당시 전쟁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정확히 묘사한다.

 

"십자군의 최후 방어선은 저기 지프차가 있는 곳까지였을 것입니다.

투르크군은 저기 언덕에서부터 내려와 십자군을 기습했겠지요."

 

전투에 참가했던 한 십자군 병사는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보이몽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용맹한 전사들이여!~힘겨운 전투가 눈앞에 놓여 있다!~

모든 전사들은 나아가 적에 맞서 싸우라!~"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끊임없이 밀려오는 투르크군의 공격에 십자군은 꼼짝없이 포위되었다.

아무리 많이 죽여도 투르크군의 공격은 끝이 없었다.

 

투르크 기병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십자군 병사들은 그들의 새로운 전술에 대응할 힘을 잃었다.

그들은 단순한 기병이 아니라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궁수들이었다.

 

 

"셀주크투르크족은 매우 용감하고 민첩하며 매우 뛰어난 궁수들이었습니다.

서유럽 기사들과는 달리 무장이 가벼워 기동력이 있었지요.

그들은 빠른 속도로 달리며 정확하게 활을 쏠 수 있었습니다."

                                                                 -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 카이로 헬완대학

 

투르크군은 놀라운 전술로 보이몽의 2만 병사들을 섬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놀라운 능력은 기마, 궁술 뿐만이 아니었다.

 

"투르크군은 우리를 사방에서 포위하고 화살과 창을 던졌고 먼 거리에서 활을 쏘아댔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먼 거리에서 활을 쏘아댈 수 있었는지 확인되지는 않았다.

 

타에프 엘 박사는 최근 아랍어로 쓰여진 한 이슬람 문서에서

비밀을 풀어줄지도 모르는 녹키야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녹키야투르크군에 소속된 족궁수부대였습니다.

 

부대원들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뒤

다리 사이에 거대한 활을 넣고 수백 미터까지 날려보냈습니다.

 

어떤 기록에 보면 그들이 활을 쏠 때 그 수가 엄청나서 잠시 동안 햇빛을 가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미 군사 4천을 잃은 보이몽의 진영으로 투르크군이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그는 군사들에게 진영의 사선을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바로 그때 계곡 넘어에서 구원의 소리가 들려왔다.

 

"위대하고도 위대한 장군 고드프르와와 그의 동생 보댕이 이끄는 신의 전사들이 

위기에 빠진 그들의 형제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고드프르와와 보댕의 지원 부대가 합세한 십자군은 이제 5만 대군을 헤아렸다.

지원군의 합류로 십자군의 수는 투르크군의 수를 압도했다.

 

"투르크족은 더 이상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훗날을 기약하며 재빨리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투르크군의 전략전술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한 십자군 병사는 이렇게 말했지요.

 

'그들의 전술은 뛰어나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만 제외하고, 그들은 뛰어난 전사들이다.'"

 

십자군 전사들은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자신했다.

 

한 전사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5주후면 예루살렘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빚나갔다.

 

한 달이 지났지만

예루살렘까지는 아직 수백 마일이 남아 있었고

 

수백 명의 병사들이

전투가 아닌 고된 행군으로 목숨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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