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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跡巡禮
史跡 32호 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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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史跡 121호 서울 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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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史跡 117호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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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史跡 122호 창덕궁 (비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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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史跡 123호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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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
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 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광해군 때 다시 지은 정문·정전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史跡 124호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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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
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
지면서,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史跡 125호 종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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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史跡 143호 서울 종로 문묘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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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란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다.
문묘는 크게 제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학문을 갈고 닦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정종 2년(1400)에 불에 타 없어졌고,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도 임진왜란 때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성전 서우(보물 제141호)
북쪽에는 제사 때 쓰는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잡다한 것을 두는 잡사가 있다
史跡 149호 서울 종로 육상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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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史跡 157호 서울중구 원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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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줄여서 원단이라고도 한다. 세조 2년(1456)에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원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원구제는 중단되었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에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부터이다.
현재 원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 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원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史跡 271호 서울 종로 경희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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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史跡 171호 서울종로 고종즉위 40년칭경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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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재위 1863∼1907)이 왕이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史跡 213호 서울종로 우정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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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우편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84년에 설치되어, 그해 10월에
처음으로 우편 업무를 시작한 곳이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은 폐쇄되었다.
이후 1893년에 전우총국이라는 이름으로 우편 업무는 다시 이어졌고,
공무아문 역체국, 농상공부 통신부, 통신원 등으로 이어나갔다
史跡 248호 서울 종로 대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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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대한의원 건물이다.
1907년 대한제국 정부가 임금의 명령에 의해 의정부 직속으로
창경궁의 바깥 정원인 함춘원의 언덕에 지었다
史跡 253호 서울 중구 구러시아 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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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7년(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이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2층만이 남아있었으나, 1973년에 복구되었다. 한쪽에 탑을 세웠으며,
정문은 개선문 양식이다. 일본군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세자와 함께 피신하여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을 했다.현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어 이곳에서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史跡 254호 서울 관악구 구벨기에 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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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짓기 시작해서 1905년에 완성한 대한제국시기의 벨기에 영사관 건물이다.
광복 후에는 해군헌병대에서 사용하였다. 1970년 상업은행이 사용하다가 은행측에서
그 자리에 건물을 짓기 위하여, 회현동에 있던 공사관 건물을 서울특별시 관악구의
남부순환도로변에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史跡 257호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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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는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
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으며, 궁궐과 운현궁 사이의 왕래를 쉽게 하기 위해 직통문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史跡 378호 서울성북구 성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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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1877∼1955) 공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 지형으로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눌 수 있다.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이 있다. 안뜰은 영벽지와 폭포가 있으며 바깥뜰은
송석과 연못이 있는 지역이다. 서쪽 아래 지역에 고여한 늪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더하여 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史跡 258호 명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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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은 코스트(Coste) 신부가 설계하였고 파리선교회의 재정지원을 얻어
건립되었다. 본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 블랑주교가 김 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사들였다. 그후 1887년 한국과 프랑스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98년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로 쌓은 교회이며,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지어졌다.평면은
십자형이며 본당의 높이는 23m, 탑의 높이는 45m이다.고딕양식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면서 그대로 본떴고, 공간의 고딕적 느낌은 외부보다 내부에서 더 강하게 주어졌다.
史跡 256호 서울중구 정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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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광무 2년(1898)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건물이다
본래는 십자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史跡 276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Underwood Hall)
지금의 연세대학교, 옛 연희전문학교의 건물로 학관(學館)이라 불러왔다. 1921년 짓기 시작해
1924년 완성된 돌로 지은 4층 건물로서 아펜젤러관과 함께 연세대학교에 두 번째로 세워졌다.
연희전문학교의 창설자인 언더우드(한국이름 원두우) 박사의 업적과 인격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형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지은 것이다.언더우드 목사의 장남인 원한경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당시 화학과 교수인 밀러가 공사를 감독하였다.
史跡 278호 구서울대학교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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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인 1931년에 준공된 옛 경성제국대학의 본관으로, 1945년 이후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서울대학교가 1972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문화예술진흥원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경성제국대학은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이상재 선생을 대표로 한 조선민립대학
기성회가 결성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경성제국대학령을 공포하고 예과(豫科)를
모집하여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개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본관은 벽돌로 쌓은 3층 건물로써 우리나라 건축계의 선구자인 박길룡씨가 설계했고,공사는
일본인 회사 미야까와구미가 맡았다. 평면은 장방형이며 지붕의 모습은 세련되고 우아하다.
史跡 279호 서울 종로구공업전습소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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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 융희 2년(1908)에 건립된 이 건물은 본래 기계시험소가 있던 터에다
1906년 공업전습소가 생김에 따라 그 본관으로 지은 것이다. 광복 후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이 되었고,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 본부로 쓰이고 있다.
2층의 목조건물로 벽은 독일식 비늘판을 붙였으며 외형은 르네상스 양식을 모방했다.
구한말 탁지부가 설계한 몇 안되는 현존건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史跡 280호 한국은행 본관
본 건물은 1910년대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건물이다. 일본의 제일은행 경성지점
이었으나 옛 조선은행이 설립되기까지 중앙은행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행 본관이 되었다.
지하1층 지상3층의 철골 콘크리트 구조로 외벽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붙였다.
일본사람이 설계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내부가 불에 타서 1956년에 보수하였다.
그 후 1987년 신관을 건물의 뒤쪽에 건립하고, 이 건물은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시대 성 건축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정교하고 우아한 건물이다.
史跡 283호 중앙고등학교 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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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0월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에 탄 옛 본관의 왼쪽에 지어
서관과 쌍을 이루고 있다. 건물구조는 T자형으로 서관과 동일하며 1920년대의 순수 민간인이
세운 사립학교 건물로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건물이다.우리나라 20세기 전기 건축양식의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3·1운동 이후 조선 소년군 창설, 6·10만세운동,광주학생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史跡 284호 서울역사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empas.com%2Froks821%2F3266028_750x598.jpg)
1922∼192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재가 혼합된 벽돌식 역 건물이다.
1층은 르네상스 궁전건축 기법으로 처리하고, 1층 윗부분과 2층은 붉은 벽돌로 쌓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장식하여 마감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여객전용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史跡 285호 고려대학교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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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경영을 맡았던 김성수가 1933년 공사를 시작하여
1934년에 완성한 본관건물로 박동진이 설계하였다. 3층(중앙탑은 6층)이며 화강석을
주재료로 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되어 있다.평면 H자형이며, 중앙에는 넓은 홀이
있다. 건물 현관의 두 돌기둥에는 학교의 기상을 상징하는 호랑이 상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 후문의 돌기둥에는 무궁화가 조각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는 내·외부가 호화스럽고
웅장하여, 국내의 학교 건축물로서는 유례가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
史跡 286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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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도서관 건물이다.
1935년에 공사를 시작, 1937년에 완성한 5층건물로 설계는 본관을 설계한 박동진이 하였다.
史跡 230호 유관순열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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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으로,
생가와 매봉교회,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가문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시위에 참가하였고,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이에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시위
운동을 벌여 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유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 10월에 순국하였다.
시신은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무덤을 잃어버렸다.
史跡 303호 남원 광한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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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각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한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史跡 272호 남원 만인 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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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왜군은 임진왜란때 전라도지방을 차지하지 못해서 결국 패했다고 생각
하여,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7월말 왜군 11만명이 황석산성과 남원을 공격하였다.남원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국가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남원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만 여명의 관리와 군사, 백성이 사망했다.
임진왜란이후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곳에 합장하였으며 광해군 4년(1612)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 하였다.처음 이 무덤은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어
1964년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다
史跡 158호 문무대왕 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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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史跡 134호 제주 삼성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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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은 제주도의 고씨·양씨·부씨의 시조가 솟아났다는 3개의 구멍을 말한다
3시조들은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사냥해 먹고 살다가,다섯 곡식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구멍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만 바다와 통하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중종 21년(1526)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과 비석을 세우고, 주위에 울타리를 쌓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史跡 380호 제주 목관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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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란 벼슬을 가진 사람들이 일을 보던 건물로서 제주목 관아터는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였다. 관아터 남서쪽에는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세종
30년(1448)에 세운 관덕정(보물 제322호)이 있다
史跡 135호 부여 궁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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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史跡 383호 논산 돈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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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1년(1633)에 건립한 서원이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史跡 139호 김포 문수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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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순조 12년(1812)에 고쳐 쌓았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史跡 147호 문경 관문 (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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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이곳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로 자리잡았다. 조선 선조 2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시의 군사와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에 맞서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개의 관문을 완성했다.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현재의 시설은 페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史跡 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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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지금의 현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史跡 170호 안동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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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
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史跡 172호 신라 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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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史跡 182호 신라 선덕여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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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아들이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황룡사 9층탑등을 세웠으며, 김유신,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史跡 191호 고려 공양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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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재위 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史跡 229호 매헌윤봉길의사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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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저韓堂)이라 한다.
史跡 231호 홍성 홍주성(조양문,아문,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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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史跡 232호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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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도망가는 왜적들을 무찌르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이에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해안에는 이락사가 있다
그 후 순조 32년(1832)에 왕명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단과 비, 비각을 세웠다. 1965년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인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락사’라는 액자를 경내에 걸었다.
史跡 244호 연천 신라 경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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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史跡 264호 단양 온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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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
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史跡 293호 전봉준선생 고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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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인 30세 때 동학에 몸을 담아,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
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史跡 302호 순천시 낙안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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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史跡 308호 완도 청해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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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전라남도 완도
앞바다의 작은섬인 장도에 있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당,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장보고(?∼846)는 평민 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장군이 되었으나 해적들이 신라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분개하여 신라에 돌아와 왕의 허락을 받고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을 누리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장보고는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에 휘말려 자객 염장에 의해 846년
암살당하였고, 문성왕 13년(851)에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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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 공부 한 번 잘 했재.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