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풍 제3권 (전3권)
지은이: 서효원
- 차례 -
第一章 신비로운 불청객(不請客)
第二章 무너지는 백도의 영웅(英雄)들
第三章 무림일천왕(武林一千王)의 아들
第四章 칠 년 만에 치른 첫날밤
第五章 순진한 요녀(妖女)
第六章 중원대위기(中原大危機)… 몰려드는 혈겁(
第七章 운명(運命), 그리고 숙명(宿命)
第八章 아아, 꿈(夢)이여! 사랑(愛)이여!
第九章 대결전(大決戰)의 전주곡(前奏曲)
第十章 영웅은 죽어서 말한다
第一章 신비로운 불청객(不請客)
1
어둠이 짙게 천지(天地)를 감싼다. 하늘엔 달도 별도 없고 사위는 칠흑의 어둠에 잠겨 있다.
일섬(一閃)이 하얗게 허공을 양단하고 뒤따라 하늘의 한 점이 무너졌다.
쏴아아아……!
바가지로 쏟아 붓듯이 엄청나게 폭우가 쏟아졌다.
이날 밤, 비는 중원 십팔만 리를 뒤덮었다. 하늘도 통곡할 만행에 세상 곳곳이 신음하였기 때문이다.
태행산(太行山).
수많은 절봉(絶峯)이 손가락처럼 치솟은 준령은 고대로부터 험산의 하나로 이름이 높았다.
비는 이곳에도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폭풍방(暴風 )!
태행산 일대 삼백 리를 지배하는 중소문파(中小門派) 중의 하나이다.
방도( 徒)는 비록 식솔까지 포함하여 칠백에 불과하나, 개개인의 무공은 강호의 일류고수에 못지 않았다.
한데 폭풍방의 칠백 식솔이 하룻밤 사이에 몰살하고 말았다.
갈기갈기 옷이 찢겨진 여인(女人)는 능욕의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혀를 깨물어 자결했다. 빗줄기 아래 그녀의 차갑게 식은 육봉은 유난히도 푸르게 보였다.
그녀의 옆에는 세상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핏물 속에 잠긴 채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심장에 박힌 검(劍)을 두 손으로 움켜쥔 노인은 참담한 표정으로 세찬 비를 맞고 있었다.
그가 바로 폭풍방주였다.
그의 눈은 분노와 증오, 저주와 한(恨)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런 자세로 눈을 감지 못하고 죽어 있었다. 극에 달한 통한으로 그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의 주검 옆에는 한 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끈한 육체가 진창 속에 묻혀 있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육봉으로 미루어 열서너 살 난 소녀로 보였다.
폭풍방주의 금지옥엽이었다.
한창 분홍빛 꿈을 꾸어야 할 나이에 그녀는 엄청난 참극을 당했다. 수차례 걸쳐 추행을 당한 듯 그녀는 온몸이 찢긴 채 비원(悲怨)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대체 이 참상은 어떻게 된 것인가?
기련산은 그리 험하지 않은 작은 산이었지만 그 절경(絶景)만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곳엔 수많은 암자가 들어서 있었다.
유운암(流雲庵)은 기련산에 산재해 있는 백삼십이 개의 암자를 맡아서 운영한다.
유운암의 비구니들은 빼어난 무공을 지니고도 무림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만일 그 여승들이 강호로 나섰다면 구대문파에 하나가 더해졌을 것이다.
한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흐으윽……!"
"아아……!"
알몸의 여승들이 야릇한 신음성을 발하며 사내와 한몸이 되어 있었다.
비구니들은 이지를 상실한 듯 끊임없이 사내의 몸을 끌어당겼다.
이토록 추악한 일이 있는가?
마땅히 색을 멀리해야 할 수행자들이 집단으로 난교(亂交)를 벌이는 중이었다.
유운암주(流雲庵主)는 회갑을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구릿빛 동체의 젊은 사내와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
통탄스럽게도 비구니들은 하나같이 지독한 춘약(春藥)을 취해 참혹한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쏟아지는 빗속에 흥분이 최고조에 달해 자지러지는 듯한 여인의 교성이 메아리친다.
유운암의 오백 년 전통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2
그들은 신비혈문의 초절정(超絶頂) 고수(高手)들이다. 신비혈문 내에서도 이들은 특별 대우를 받았다. 이들의 수는 단지 삼백(三百)에 불과했다.
신비제일혈검대(神秘第一血劍隊)!
신비혈문에는 마공이 특출한 사 개 정예대가 있었다. 그중 제사혈검대는 신비혈문 제일지부에서 멸망했고, 제삼혈검대는 연비장에서 천추제일검에 의하여 몰살당했다.
하지만 신비제일혈검대는 그들과 천양지차가 있다.
그들은 최고의 전문살수(專門殺手)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절한 살식의 소유자들이었다. 정공과 마공은 물론 마도, 좌도의 잡기(雜奇)에도 능통했다.
그들이 어떤 인물을 추적하기 시작하면 한 마리 민첩한 사냥개가 된다. 또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삼천육백 가지의 암술(暗術)을 철저하게 구사할 수 있다.
그야말로 살인병기(殺人兵器)들이었다.
쏴아아아……!
비 내리는 어둠 속에 석상같이 버티고 서 있는 삼백 개의 혈의인들은 혈립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들의 허리에는 짧은 단검이 한 자루씩 달려 있었다. 단검을 사용하면 접근전에 능하다. 그들은 어딘가를 기습하기 위해 은신해 있는 중이었다.
전면에는 울울창창한 수림이 우거져 있는 사이로 대소전각(大小殿閣)이 보인다.
신비제일혈검대의 선두에 선 세 명의 혈의인들은 제일혈검대주(第一血劍隊主)와 좌우대주(左右隊主)였다.
가운데 선 혈검대주가 물었다.
"진령파(震靈派)의 인원 수는 어떻게 되는가?"
느닷없는 질문에 좌대주가 잠시 움찔했다.
"대략 천사오백 정도입니다, 대주."
"우리에게 대략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혈검대주의 냉막한 어투에 좌대주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주, 처벌하여 주십시오!"
"오늘은 큰 싸움이 있으니, 공(功)을 세워라."
혈검대는 우대주 쪽을 바라보았다. 우대주는 포권을 취하며 아뢰었다.
"초절정급이 백사십, 절정급 삼백칠십, 일류급과 나머지 하류급이 구백삼십 정도입니다."
혈검대주는 잠시 생각을 굴린 후 물었다.
"문제는 오백에 달하는 절정고수들이다. 우대주, 정면으로 그들을 상대한다면 얼마나 손실을 입겠는가?"
"우리 측의 손실은 일곱 사망, 열다섯 정도가 부상입니다."
"교란전을 편다면?"
"세 명 사망입니다. 진령파의 수뇌는 대주를 제외하고 아무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덟이 부상입니다."
우대주는 이미 상대의 세력과 자신들의 힘을 정확히 분석하고 있었다.
혈검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령파 따위를 상대하는 데 그렇게 큰 손실을 입을 순 없다. 교란전으로 나간다!"
제일혈검대주의 몸이 지면에서 한 자 가량 떠오르며 일직선으로 진령파를 향하여 유성같이 날아갔다. 그의 경공은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러 있었다.
좌우대주는 각기 수하들을 이끌었다.
"기습전이다. 신속하게 놈들을 멸절하라!"
신비제일혈검대들은 냉오한 기백(氣魄)을 발하며 제각기 신형을 날렸다.
기습은 아주 빠르고 독랄했다.
천팔여 명이 격돌했지만 병장기가 부딪치는 금속성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백의 고수들이 죽었지만, 비명 소리는 한둘에 불과했다.
제일혈검대는 그만큼 살법에 능했다.
그들의 단검은 정확히 상대의 숨통을 끊었다. 반격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감숙성의 대문파 진령파(震靈派)는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었다. 그 문파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는 백 년이 걸렸지만, 괴멸되는 데에는 한 시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같은 시각, 태백파(太白派) 역시 죽음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오백 혈의인들은 신비제이혈검대였다.
그들은 무자비했다. 어린아이든, 힘없는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살상했다. 피에 굶주린 악귀(惡鬼)처럼 그들은 지칠 줄 모르고 죽음의 향연을 벌였다.
쏴아아아……!
중원이 폭우로 뒤덮이는 날 수천의 기라성(綺羅星) 같은 절정고수(絶頂高手)들이 죽었고, 삼십 개의 대소문파(大小門派)가 멸문(滅門)의 길을 걸었다.
정녕 어마어마한 피(血)의 소용돌이였으니, 전 무림은 이 엄청난 사실 앞에 기이할 정도로 숨을 죽였다.
3
욕실(浴室)은 뽀오얀 물안개로 가득했다.
여인은 지독히도 요염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증기 속에 보이기에 신비롭기까지 했다. 유난히 붉은 입술이 돋보였다.
욕탕 속에서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그녀는 바로 신비혈문의 절대자 화빙혼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너무도 엄청난 야망을 추진하여서인지 피곤한 빛이 역력했다.
"강 오빠, 당신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수십 번이나 씻어 냈어요. 이제 나는 당신을 증오해요!"
화빙혼은 다시 씻고 또 씻었다.
애증(愛憎)의 기로에서 사마강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기에 그녀는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백도로 돌아서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녀는 너무도 마성(魔性)과 요성(妖性)을 지닌 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화빙혼은 세차게 자신의 육봉을 씻어 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마강, 다음에 만나면 내 손으로… 기필코 너를 죽이겠다!"
물방울이 촤르륵… 몸에서 굴러 내리고, 그녀는 욕탕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부신 나신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차라리 눈을 감고 보지 말아야 할 여인의 나체였다. 그녀의 몸은 사내의 혼(魂)을 빨아들이는 마력의 덩어리였다.
천염화정골의 요물(妖物)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악마의 저주였다.
화빙혼은 눈빛을 강렬하게 발했다.
'신비혈문은 무림사 이래 전무후무한 세력을 지녔다. 하지만 천추제일문은 더 강하다.'
그녀는 속살이 훤히 비치는 잠옷을 몸에 걸쳤다.
'일단은 천사마궁와 힘을 합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커다란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요사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신비제일혈검대주와 관계를 가져야겠군. 이번에 그의 공은 너무도 컸어.'
그녀는 벌써부터 몸이 달아올랐다.
사마강에 의해 몸이 열린 그녀는 지독한 색녀가 되었다. 하루에도 열 사내를 상대했다. 사내를 접할수록 그녀의 색기는 더욱 짙어졌다.
이제 그녀를 정복할 수 있는 사내는 없을 것이다.
4
천추제일전(千秋第一殿)!
이번에 새로이 신축한 건물로 천추제일문주를 위한 거처였다.
사마강은 우울한 얼굴로 태사의 깊숙이 몸을 묻었다. 넓은 대전에서 그는 홀로 앉아 있었다. 요 며칠 동안 그는 사람들과 접촉을 피해 왔다.
사마강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삼 일이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는 대륙전역에 펼쳐진 대살겁의 소문을 들었다. 참극의 흉수가 신비혈문임이 확인되었다.
'빙혼, 이제는 완전히 드러내 놓고 살육을 자행하다니… 도저히 너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이때 흑야마군이 들어섰다.
"문주, 내외대총관 흑야마군이외다."
사마강은 비로소 눈을 뜨고 흑야마군을 응시했다.
흑야마군은 두 손으로 은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은쟁반에는 구파일방의 장문영부들이 놓여 있었다.
"속하들이 다행히도 문주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소."
사마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았소. 이리 가져오시오."
흑야마군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허… 사흘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여셨다.'
그는 은쟁반을 사마강의 앞에 놓았다.
"이 일로 인하여 구파일방은 강호로 대거 출현했소. 만약에 본문에서 그들의 영부를 훔쳤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무림의 공적으로 몰려 멸문(滅門)당할 수밖에 없소."
그는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문주께선 대체 영부를 어찌하시려는 겁니까?"
사마강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것들은 천하(天下)를 구하는 데 사용될 것이오."
그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총관, 냉 소저를 불러 주시오."
흑야마군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갔다.
이내 냉운려가 들어섰다. 그녀는 몹시 수척한 모습이었다. 사마강이 수심에 싸여 식음을 전폐하자 자신도 물 한 모금, 음식 한 조각 먹지 않은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그녀만이라도 생기(生氣)를 찾아야 한다고 충고를 해도 그녀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사마강은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소려, 흑삼을 한 벌 마련해 주시오."
냉운려는 눈물을 글썽이며 반색을 표했다.
'아, 강랑이 이제 크나큰 상심에서 벗어나셨다.'
사마강은 냉운려의 여인다운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운려, 그 동안 미안했소."
냉운려는 이 한 마디 말에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강랑!"
그녀는 사마강의 품안으로 허물어졌다.
사마강은 그녀의 나긋한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달콤한 타액이 두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흐르고 시간은 꿈결같이 흘러갔다.
얼마 후, 냉운려는 한 벌의 흑삼을 들고 화사하게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어쩐 일로 흑삼을 입으려 하시죠?"
"훗훗… 운려를 위해서요."
"소녀를 위해서라고요?"
냉운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일어서는 그를 따랐다.
사마강은 나들이를 가는 사람처럼 말했다.
"잠깐 숭산(崇山)을 다녀오겠소."
5
숭산 소림사는 지극히 삼엄한 경계로 물샐틈없는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었다.
소림의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을 위시하여,
공동( )의 대주천복마검진(大宙天復魔劍陣),
점창(點蒼)의 사일변환무로진(射日變幻無路陣),
청성(淸城)의 사자능천진(獅子陵天陣),
무당파(武當派)의 육합칠성검진(六合七星劍陣).
그야말로 통천가공이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기세가 아닐 수 없었다.
백도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정파수호대회(正派守護大會)가 개최하고 있었다.
마땅히 천하에 알려 경하(慶賀)를 받아야 할 집회였지만 기이하게도 극비리에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규모의 거대함은 실로 엄청났다.
칠 파의 장문인과 세 명의 장로가 각기 오백 명의 정예들을 이끌고 왔다. 무려 오천의 대무단이 형성된 것이다.
대법당에는 단촐한 회의석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의 모임은 백도무림맹(白道武林盟)을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법당에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위시하여 무림에 혁혁한 명성을 날렸던 기인이사(奇人異士)들도 자리를 같이했다. 그들은 명성 하나만으로도 구파일방을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여간해서는 무림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는 동해삼선(凍海三仙)의 출현은 진정 놀라운 일이었다.
동해공(東海公)!
한 자루의 긴 낚시를 무기로 삼으며 무림의 한 시대를 장식했다.
천도자(天刀子)!
그는 동해의 한 절해고도에서 아직까지 무림에 나온 적이 없었다. 이번이 그에겐 중원이 초출이다. 동해의 해적 집단 혈해군도(血海群島)를 단신으로 괴멸시킨 공적으로 유명하다.
벽천부인(壁天夫人)!
그녀는 한때 동해 최고의 성녀라 추앙을 받았었다. 무공(武功) 또한 강호의 일절로 불리울 정도였다.
또한 악인(惡人)을 원수같이 미워하여 손속이 독랄하기로 유명한 파중일협(巴中一俠)이 참석했다.
사천성(四川城)의 최대 문파인 천비난파(天飛亂破) 당종기(唐宗奇)의 출현은 군웅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사천당문(四川唐門)의 가주(家主)로서 이 시대 최고의 암기술(暗器術)을 지니고 있다.
운남성(雲南城)의 패자(覇者) 금무신곡주(金武神谷主)!
그는 젊은 시절부터 운남성의 패권을 지배하기 위하여 분골쇄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일대효웅(一代梟雄)이었다.
군산(君山)의 선녀유정궁(仙女有情宮)!
동정호(洞庭湖)를 배경으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수상 집단이다.
대부분이 여인들로만 구성된 방파로 선녀유정궁주(仙女有情宮主)의 미소는 일월(日月)이 빛을 잃게 만든다 하였다.
그리고 지략(知略)의 대가인 십만대산(十萬大山)의 귀문진인(鬼門眞人)을 위시하여 검주신군(劍主神君) 등등… 그야말로 정도무림을 대표하는 불가일세(不可一世)의 대영웅들이 제각기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한데 제일 상석엔 아직 임자가 없었다. 이 정파수호대회를 주도할 인물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듯했다.
각 파의 종사(宗師)들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오늘의 회합을 별로 즐겨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전대의 은거 기인들은 이런 분위기에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이러니 정파가 어찌 하나로 뭉칠 수 있겠는가?'
'장문영부까지 잃은 주제에 아직도 자존심은 대단하군.'
좌중을 암울하게 감돌던 침묵이 깨졌다.
"성녀(聖女)께서 듭십니다!"
시리도록 하얀 소복(素服)을 입은 여인이 법당에 모습을 나타냈다.
갑자기 무겁던 좌중의 분위기가 대변했다. 어둠 속을 햇살이 비추듯 좌중이 밝게 느껴졌다.
소복여인의 몸에선 감히 마주 볼 수 없는 성결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얼굴을 하얀 천으로 가리우고 있었다.
소림사의 현진선사가 먼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예의를 취했다.
"소림의 현진이 성녀를 배견하오. 아미타불……!"
뒤이어 좌중의 명숙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각기 일배를 올렸다.
파중일협의 얼굴은 격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무림의 정의를 위하여 전생을 다 바쳐 온 그였기에, 무림정기의 상징적 존재인 그녀를 직접 대하자 자신도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오, 소문으로만 듣던 태극성녀(太極聖女)를 직접 보게 되다니… 정말 감격스럽소."
태극성녀가 백도무림의 맹주로 추대된 경위는 오로지 전대명숙들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풍전등화(風前燈火) 지경에 이른 무림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천하맹주가 필요했지만 구파일방은 위신이 깎이는 것을 우려해 극력 반대해 왔었다.
하지만 그들은 장문영부를 잃어버린 수모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결국 정의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천왕태극궁의 유일한 후계자인 태극성녀를 백도맹주로 추대하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
태극성녀는 파중일협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본녀(本女)도 대협을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요. 대협의 의(義)를 지키려는 협행을 늘 존경해 왔습니다."
"와하핫… 과찬이시오. 보잘것없는 늙은이가 어찌 성녀의 숭고한 의기에 비하겠소?"
좌중의 수뇌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태극성녀의 위치가 견고할수록 그들의 위치는 낮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극성녀는 손수 파중일협의 거친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모든 분들이 대협의 마음만 같다면, 백도는 사마악도로부터 지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태극성녀는 단상에 마련된 맹주의 권좌를 보았다. 그녀는 막연한 두려움에 젖었다.
'나약한 아녀자의 몸이지만 어쩔 수 없다. 천왕태극궁의 명예와 전통을 지키는 것이 나의 운명이 아닌가?'
그녀는 기품 있게 옥보를 옮겨 태사의로 향했다.
유난히 질투에 불타는 한 쌍의 눈은 군산 선녀유정궁의 궁주였다.
'무공이라곤 전혀 모르는 어린 계집이 어떻게 백도무림을 이끌어 갈 수 있단 말인가?'
단상에 오른 태극성녀는 태사의 뒤에 드리어진 검은 휘장 앞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현진선사가 불호와 함께 말을 꺼냈다.
"아미타불… 성녀께서는 제(祭)를 시작하시오."
태극성녀는 조심스럽게 검은 휘장을 걷어 냈다. 검은 장막이 걷히자 이천오백 개의 신위(神位)가 나타났다.
여기에 모셔진 이천오백(二千五百) 신위(神位)는 천사지존을 물리치려다 장렬히 산화한 인물들이다.
신위의 가장 중앙에는 두 개의 금빛 찬란한 신위가 유난히 빛을 발했다.
<무림일천왕사마대협지신위(武林一千王司馬大俠之神位)>
<천왕대부인옥라선자지신위(天王大夫人玉羅仙子之神位)>
무림일천왕 사마검한은 천사마궁(天邪魔宮)의 절대자인 천사지존과 함께 자폭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불사지체를 연성한 천사지존은 두 다리만 잘렸다. 그는 이미 목숨을 잃은 사마검한을 천사무상인(天邪無上印)으로 소멸시켜 버렸다.
천왕대부인 옥라선자는 사마검한의 부인으로, 뛰어난 미색과 절개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핏덩이만을 남긴 채 죽음을 택했다.
이에 무림인들은 그들의 혼백(魂魄)을 위로하기 위하여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려 왔다.
태극성녀는 경건한 몸가짐으로 향로에 향을 꽂고 불을 밝혔다.
은은하게 향내가 실내를 감돌자 중인들은 숙연하게 제단을 응시했다.
태극성녀는 제단을 향하여 이배(二拜)를 올린 뒤 나직한 음성으로 제가(第歌)를 불렀다.
영령(英靈)들이시여!
한 자루 검(劍)을 잡았던 무림의 수호신들이시여!
무림은 당신들의 고귀한 희생(犧牲)을 잊지 못합니다.
가슴엔 화탄(火彈)을, 마음 속엔 의혈(義血)의 충혼(忠魂)을 안고 저 능선을 넘어선 영웅들시여!
다시는 이 땅에 만악(萬惡)의 손길을 펼치지 못하게, 영령께서 치켜들었던 의검(義劍)의 기치를 우리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영령들이시여! 우리는 또다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충혼의 심금과 정의의 기치로 중원(中原)의 땅에서 사마외도(邪魔外道)를 처단할 것을 맹세하노니!
구천(九泉)의 영령들이시여! 부디 우리에게 힘을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독려하시고, 저마다 소리(小理)에 치우려 발버둥치는 모든 마음을 거두소서!
너무도 간절한 바람이 실려 있는 음성이었다.
구구절절이 천하를 위한 그녀의 제가에 군웅들은 가슴 저 밑에서 솟구치는 의기를 느꼈다.
그들은 엄숙했고, 눈빛은 뜨거웠다. 이 순간만은 각 파의 권위와 이권을 생각지 않았다. 그만큼 태극성녀의 음성과 행동은 호소력이 있었다.
이 순간 너무도 엄청난 상황이 전개되었다.
"흥! 신위에 대고 아무리 절을 해도 없는 힘이 생기겠느냐?"
천하인 모두가 존경하는 대의혼(大義魂)을 완전히 무시하는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또한 이 자리에 운집해 있는 명숙들을 비웃는 조롱이기도 했다.
"누… 누구냐?"
"어서 썩 나서지 못할까?"
법당에 모여 있던 각 파의 지존과 기인이사들은 분노로 이글거리며 음성의 출처를 찾았다.
신위를 모신 제단 옆으로 한 인영이 유령처럼 내려섰다.
얼마나 출중한 신법인지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흑의를 입은 청년이었다.
용모는 아주 평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전신에서는 가히 일대종사(一大宗師)의 풍도가 느껴졌다.
'아니, 저자가 어떻게 철벽같이 펼쳐진 진법(陣法)을 뚫고 왔단 말인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더욱이 우리 모두의 이목을 속이고 들어올 정도의 무공이란 말인가?'
강호명숙들은 제각기 염두를 굴리며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파중일협이 자리에서 퉁기듯 일어나며 소리쳤다.
"어떤 놈이냐? 출신 내력과 정체를 밝혀라!"
흑의인은 싸늘하게 조소를 머금었다.
"파중일협! 입만 가지고 떠들지 말고 실력으로 행사하시지?"
"뭣이?"
흑의인의 안하무인 격인 행동에 곤륜파의 장문인, 벽천부인, 개방 장문인 백결신개가 섬전같이 신형을 폭사시키며 협공을 펼쳤다.
"훗… 한심한 위인들!"
흑의인은 좌우로 두 손을 벌리며 빙글 신형을 회전시켰다.
콰류류류-!
세찬 파공음과 함께 그의 쌍수(雙手)에서 무형의 기류가 선회하며 쏟아져 나왔다.
삼 인의 초고수들은 안색이 대변했다.
"허억! 저… 저것은……?"
"크으윽……!"
"회선천성강(回旋天星 )이다!"
폭음과 함께 공격을 펼친 삼 인은 제각기 퉁겨 나갔다.
흑의인은 오만하게 군웅들을 쓸어 보았다.
"훗훗… 겨우 사 성의 회선천성강(回旋天星 )조차도 막아 내지 못하면서 거들먹거린단 말인가?"
군웅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회선천성강이라면 이미 실전된 지 삼백 년이나 지난 백도삼대패도지학 중의 하나였다.
백도삼대패도지학(白道三大覇道之學)이란 이러했다.
소림의 조사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남긴 대반야능력(大般若 能力),
무당의 대조종(大祖宗)인 삼풍진인(三風眞人)이 남긴 육합어기비행강(六合御氣飛行 ),
그리고 전설상의 기인(奇人) 천기무황제(天奇武皇帝)가 노년에 창시했다는 회선천성강(回旋天星 ).
세 가지 중 하나만 익혀도 능히 백도무림의 절대영웅으로 군림할 수 있는 최강의 무공이건만, 당금에까지 삼대패도지학을 칠 성 이상 익힌 인물은 없었다.
'회선천성강의 구결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선 익힐 수 없는 것이었다.'
소림의 장문인 현진선사는 하얀 백미를 심하게 꿈틀거렸다.
'회선천성강의 구결이 강호인 모두에게 공개된 지 삼백 년이 흘렀건만, 그것을 단 일 성이라도 익혔다는 인물은 없었다. 한데 저 사람이 진정 사 성이나 연성했단 말인가?'
그는 흑의인을 응시하며 왠지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결신개와 무당의 장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의인의 시선이 소림의 현진선사에게 머물렀다.
"현진(玄眞), 귀하는 불가의 승인(僧人)으로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워 후진들의 성장을 가로막았소."
군웅들은 노기가 충천했다.
대소림사(大少林寺) 장문인의 명호를 함부로 입에 담고 이토록 면박을 줄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저… 저런 오만무도한 놈!"
"미친놈! 알량한 무공만 믿고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정작 당사자인 현진선사는 그다지 노여워하지 않았다. 과연 대소림의 방장답게 그는 수양이 깊었다.
"아미타불… 시주의 말뜻을 노납은 이해할 수 없소. 대체 노납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훈시해 주시오."
흑의인은 어깨에 멘 커다란 행낭 속에서 광휘를 발하는 불장(佛杖)을 꺼내 들었다.
군웅들의 안색이 삽시간에 경악(驚愕)에 젖었다.
"허억!"
"저것이 어떻게 저자의 수중에……?"
현진선사는 몸을 떨며 흑의인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림의 제자 현진(玄眞)이 조사령(祖師令)을 친견합니다."
그렇다. 흑의인의 손에 쳐들린 영부는 바로 녹옥불장이었다. 개파조사인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신물(神物)이기에 달마대사가 직접 왕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진선사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 정체도 알 수 없는 자에 의하여 소림이 치욕을 당하다니… 조사의 영령을 어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상대가 어떤 방법으로 녹옥불장을 손에 넣었든 간에 소림의 제자들은 조사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느닷없이 폭갈이 터졌다.
"이 도둑놈아!"
개방의 백결신개가 섬전같이 신형을 날려 흑의인의 손에 들린 녹옥불장을 탈취하려 하였다. 그의 무형괴천성이라는 무림제일의 경공이었다.
흑의인은 냉소를 치며 녹옥불장을 슬쩍 흔들었다.
'흐억!'
백결신개의 몸은 허공에 뜬 채 움직이지를 못했다.
"가공한 격공섭물(隔空攝物)이다!"
동해삼선 중 하나인 동해공은 자신도 모르게 경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개방의 백결신개라면 내공 이 갑자 수위의 초상승 고수이다. 한데도 흑의인은 그를 가벼운 물건 다루듯 했다.
군웅들은 점점 공포를 느꼈다. 과거 천사지존도 이 정도의 내공은 지니지 못했다.
'흑 저자는 혈천사자가 아닐까? 당금 무림에서는 혈천사자만이 저런 능력을 지녔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