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장 평온(平溫)
아직 완전하게 기억을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는 지수에게 아이의 존재는 모든면에서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어떠한 기록에도 지수처럼 1차 발현이 있은 후 8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폭발하지 않고 자신을 이겨냈다는 내용은 없다 시며 어쩌면 영원히 마지막 단계까지 가지 않을 지고 모른다고 했다.
그 이야기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두사람에게 할머니가 제안한 게 아이를 지수곁에 두자는 것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오기로 한 날.
지수는 아침부터 몸단장에, 아이방 꾸밈에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아이를 낳은 후 기억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를 아직 방치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신도 너무나 놀랐다.
“지수야, 나 성북동 다와 가. 지금 나오면 될 것 같아.”
“... 알았어요. 조심해요”
아이와 처음 대하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 것인지.....
처음 선우를 봤을 때처럼 온몸의 피가 뛰어 나올 것만 같았다. 거울에 옷매무새를 한번 보고는 바삐 대문으로 향했다.
봄날 저녁의 따스한 기운에 지수는 멀리 보이는 골목길 모퉁이를 바라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차가 자신 앞에 설때까지도 지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이의 존재도 그렇거니와 이렇게 자신과 선우가 부모가 된 사실도 믿을 수 없었다.
아직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선우가 걱정스러워하는 발현의 순간도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고, 특히나 처음으로 지수를 안은날 자신이 너무나 큰 잘못을 해서 지수를 아프게 했단 얘기를 하는 선우을 보고 지수는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그날 아이가 생긴 것으로 모든 것을 용서 한다고 했지만 아직은 실감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선우가 뒷자석 베이비시트에 자고 있는 아이를 안아 자신에게 넘겨주는 그 순간 지수는 아이의 온기로 자신의 가슴이 따뜻해져 왔을때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벌써 6개월이다된 아이는 이제 제법 똘망똘망해서 커다란 검은 눈동자로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엄마를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오똑한 콧날에 하얀 피부까지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빼다박은 작은 아이는 엄마의 모습이 들었는지 두손을 내저으며 까르르 웃었다.
지수는 아이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갖다 대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너무나 부드러웠다.
어느새 지수의 두눈에서 따뜻한 눈물이 흘어 내렸다.
“지수야... 그만 들어가자. 아이 않고 이렇게 밤 샐것 아니잖아?”
“그래요... 들어가요....”
지수가 나간지 한참 후에야 집안으로 들어서는 지수와 선우 그리고 서진을 바라보며 정원에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할머니는 나즈막히 달을 올려다 보며 기도했다.
“저 아이들은 부디 저모습 그대로 행복하게 그냥 두세요. 보이시죠?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시고도 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실양이면 저도 더 이상 시조님을 봉양하지 않을 겁니다. 도와주세요.”
아이들이 들어오자 할머니는 얼른 아이의 머리에 깨끗한 정안수로 씻어냈다.
귀한 아이를 위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란게 이런 작은 것들뿐임을 안타까워하며 노인은 다시한번 기도했다.
“달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자손 달에게 비오니 부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소서.....”
“도와주소서...”
지수도 선우도 처음으로 기도란 것을 했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
세상에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에게 완전한 사랑을 쏟아 붙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랑이야말로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이라고 한다.
지수도 그런 부모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아이 방에 가서 하루종일 아이와 놀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씻기고..
모든 일을 힘들다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했다.
선우가 자신은 잊어버린 것 가타며 투정을 부려도 아무소용이 없었다.
아직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지도 않은 지수가 너무 아이에게 몰입하자 선우는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선우가 투정을 할 때마다 할머니는 항상 타이르듯 말하곤 했다.
‘자식사랑은 모든 병의 치료약이며, 모든 병의 예방약이다’라고
그도 그럴것이 서진이 오고 난후 지수의 감정상태가 많이 안정되었고 기억도 많이 회복되어 선우에게 프로포즈도 하지 않고 그렇게 조건부로 결혼을 하자 한 걸로 며칠을 놀려대기도 했다. 그렇게 걱정했던 일들이 하나 둘 아무렇지도 않게 풀려 가는 것 같아 선우의 마음도 한결 편안했다.
그룹의 작은 사건으로 급히 불려나가며 지수에게 너무 오랫동안 정원에서 놀지 말라며 잔소리를 하고 나가는 선우를 배웅하고 나서 지수는 서진과 같이 정원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드러누워 버렸다.
아이와 같이 누워 파라솥 밑에 편안히 몸을 펴고 누우니 잠이 몰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서진과 하루 종일 노느라 몸이 피곤한데다 가끔씩 아이가 밤에 깨어 울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날밤을 새는 일이 허다했다.
선우가 걱정스러워 해서 선우 앞에서는 피곤하다 말 한마디 못하고 보낸 터라 긴장이 풀리자 더 견딜 수 가 없었다.
잠든 서진의 작은 몸을 꼭 끌어않고 따스한 서진의 등에 얼굴을 기대며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자신에게 이런 행복이 찾아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얼굴 가득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지수는 단잠에 빠져 들었다.
어름어름 잠이 들었던지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파와서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키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좀전까지 자신이 누워 있던 정원이 아니었다.
순간 서진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서진은 언제부터인가 벌써 일어나 방 한가운데 있는 새로운 장난감에 빠져 있었다.
옷도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고 우유도 먹었는지 한손에 먹다 만 우유병을 들고 있었다.
아이의 안전이 확인되자 긴장감이 풀리고 다리에 힘이 없어 풀썩 주저않고 말았다.
일단 이곳이 어디인지, 누구의 집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되어 지수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거실에 낯선 아주머니가 자신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제제도 하지 않았다.
거실 현관을 열자 앞에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작은 그네가 매달린 정원수와 잘 다듬어진 잔디밭, 그리고 하얗고 낮은 울타리...
한때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작은 연못까지 모든 것이 그녀가 바라던 집 그대로였다.
당황스럽기까지 해서 넋을 놓고 바라다 보고 있는 지수의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잤나요? 그동안 많이 지쳤나봐요. 꽤 깊이 자더군요.”
한명훈이었다.
편한 차림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수에게 가디건을 걸쳐주며 말을 건넸다.
정신을 가다듬은 지수가 명훈을 쳐다보자 명훈은 다 안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여기 있는지, 여기가 어딘지, 왜 여기로 데려왔는지.... 그런것들을 물어보고 싶겠죠?”
“.......”
당황스러워 대답을 하지 못하는 지수를 보며 명훈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고는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 마련된 티 테이블로 데려갔다
“차나 한잔 하면서 우리 얘기해요. 괜찮죠?”
그가 건네는 차를 마시며 마음을 안정시킨 지수가 명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끊듯 물었다.
“ 왜. 우리 서진이와 제가 여기 있죠? 무슨 짓을 한 거죠?”
“지수씨 우리사이가 이렇게 내집에 초대할 수도 없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이런것을 두고 초대라고 하진 않잖아요? 이것은...”
“그럼 뭐죠? 납치인가요? 그래요 납치라도 좋아요. 난 당신이 원하던 것들을 이뤄주고 싶었었요. 지수씨가 원하던 집, 원하던 풍경 아닌가요?”
“그래요... 내가 원하던 모든 것들이 있군요. 집도 풍경도... 그렇지만 난 이곳에 내발로 오진 않았어요. 이 모든 것은 내가 원해서 왔을 때 아름다운 것인지 이렇게 내 의지를 무시한 방문은 .... 그래요 범죄예요”
“지수씨 범죄라고 하는 것은 좀 듣기 거북하군요.... ”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이제 우리 둘을 자시 집에 데려다 줘요. 그사람이 기다리고 있을거예요”
“그사람이라.... 지수씨가 말한 그사람이 혹 강선우를 말하는 건가요?”
“예.. 선우씨가 놀랐을 거예요.”
“하. 이상하군요. 강선우를 피해 도망다닌 사람이 왜 갑자기 그사람을 걱정하는거죠? 지수씨가 강선우에게 붙잡히지 않게 해 주기위해 내가 마련한 집인데 오히려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요?”
“이러지 말아요. 명훈씨 그건 그때 잠시 내가 선우씨를 오해해서 그런거라는 것 이제 알잖아요? 빨리 집에 데려다 주세요. 아님 선우씨 한테 연락 좀 해줘요.”
“지수씨. 잘 들어요. 난 지수씨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이곳에 지수씨를 위한 집을 지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이제 강선우와 살고 싶으니 나에게 모든 것들을 잊고 보내달라고 하는 거군요. 훗.. 그런데 어쩌지요? 난 그렇게 쉽게 당신을 놔 줄 수가 없는데.....”
“명훈씨... 제발...”
“자. 이제 우리 세식구가 처음으로 같이하는 저녁식사를 축하하러 들어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