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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碑(한비:한유의 평회서비찬) - 李商隱(이상은)
당시삼백수 권1 칠언고시 73. 韓碑(한비) - 李商隱(이상은) <한유의 평회서비를 찬하다> |
韓碑(한비) - 李商隱(이상은)
韓碑(한비)는 한유(韓愈)가 지은 평회서비(平淮西碑:고문진보 후집 권3 30)를 가리킨다.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가 채주(蔡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당헌종 元和 12년(817)에 배도(裴度)가 총사령관이 되어 이를 토벌했다. 이때 한유(韓愈)는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종군했는데, 난(亂)이 평정된 후 황제가 한유에게 명하여 〈平淮西碑(평회서비)〉를 짓게 하였다.
이상은의 한비는 한유가 평화서비를 짓는 과정과 그 공을 극찬하며 평화서비가 참소에 의해 지워졌지만 후세에서 복구하여 남게 됨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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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회서비(平淮西碑)>
배도와 이소(李愬)가 회서 반란을 평정한 후 헌종은 승리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 배도 수하의 행군 사마였던 한유(韓愈)는 이름난 문장가인데다 배도를 따라 회서에 가본 적이 있어서 회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헌종은 한유에게 명해 「평회서비(平淮西碑)」 즉 회서를 평정한 공적을 기리는 비문을 작성하게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대 문장가 한유 [韓愈直諫]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주)신원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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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헌종(唐 憲宗) 회서 반란 평정
순종(順宗)이 재위 반년 만에 사망하고 뒤를 이은 헌종(憲宗)은 806년에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유벽(劉闢)이 세력을 넓히기 위해 동천(東川)을 공격하자 이를 토벌하여 유벽을 처형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하수은절도유후(夏綏銀節度留後) 양혜림(楊惠琳)과 절강서도(浙江西道)의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 이기(李錡) 토벌에 나섰다.
하북 삼진에 대한 토벌은 실패로 끝났지만, 회서의 오원제를 멸망시킴으로서 번진들은 각자 땅을 당조에 할양하며 공순할 뜻을 보였다. 성덕의 왕승종(王承宗)은 자신의 영지 일부를 반환했고 횡해군(横海軍)의 정권(程權)은 2주 전체를 당조에 반환하며 번진으로서의 역사를 스스로 끝냈지만, 평로의 이사도(李師道)는 처음에는 영지를 반환할 뜻을 보였으나 후에 그것을 철회하며 당조에 맞섰다. 결국 헌종은 절도사들을 모아 평로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하삭형 번진으로서 가장 오랜 기간을 버텼던 평로가 멸망하면서 위박의 전홍정(田弘正)은 번진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반환하고 조정에 입조하였다. 그러나 헌종도 820년에 환관(宦官)에게 살해되고, 성덕・노룡도 조정에 번진 수장의 직책을 반환하면서 하삭삼진으로서의 독자적인 번진 계승은 끝이 났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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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和天子神武姿(원화천자신무자) 원화 천자의 신성하고 씩씩한 자질 彼何人哉軒與羲(피하인재헌여희) 그분은 어떤 분인가! 헌원씨와 복희씨라네 誓將上雪列聖恥(서장상설렬성치) 장차 선황들이 받은 치욕을 씻고 坐法宮中朝四夷(좌법궁중조사이) 법궁 안에 앉아 사방 오랑캐가 조회를 받으리라 맹세했네 |
[通釋]
원화(元和) 연간의 천자(天子)인 당(唐) 헌종(憲宗), 그가 하늘로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질인 신성(神聖)과 위무(威武)는 상고(上古)시대 헌원씨(軒轅氏)와 복희씨(伏羲氏)에 비견될 만하다. 그는 이전의 선대(先代) 군왕(君王)들이 번진(藩鎭)으로부터 받은 치욕을 갚아 주고, 법궁에 앉아 사이(四夷)로부터 조회하러 온 하신(賀臣)들을 접견하리라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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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元和天子神武姿(원화천자신무자) : 元和天子(원화천자)는 당(唐) 헌종(憲宗) 이순(李純)을 가리킨다. 元和는 헌종의 연호이다. 신무(神武)는 영명(英明)한 위무(威武)를 말하는데 주로 제왕이나 장상(將相)을 칭할 때 쓰는 말이다. 자(姿)는 자질(資質)의 뜻이다.
역주> 軒與羲(헌여희) : ‘軒(헌)’은 上古時代 전설상의 黃帝 軒轅氏(황제 헌원씨)를 말하고, ‘羲(희)’는 太昊帝(태호제)로 伏羲氏(복희씨)를 말한다. 헌원씨와 복희씨는 전설 속의 성군(聖君)인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대표하며, 여기서는 헌종(憲宗)을 비유한다.
**삼황오제: 삼황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을 말하며, 십팔사략에서 오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뜻하며,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제요 도당, 제순 유우의 다섯 명이다. 뒤의 두 명을 따로 떼어 '성군'을 칭송할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요순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주> 誓將上雪列聖恥(서장상설열성치) : 당(唐)나라는 현종(玄宗) 때 안사(安史)의 난 이후 번진(藩鎭)들이 할거(割據)하여 이희열(李希烈), 朱滔(주도), 田悅(전열), 李納(이납), 王武俊(왕무준), 李錡(이기), 吳元濟(오원제) 같은 여러 節度使(절도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헌종이 일찍이 여러 강한 번진들을 평정하였다. 列聖(열성)은 당(唐) 숙종(肅宗), 대종(代宗), 덕종(德宗), 순종(順宗) 네 황제를 가리킨다.
**절도사(節度使)는, 중국 당(唐) 왕조에서 북송(北宋) 왕조에 걸쳐 존재했던 지방 조직인 번진(藩鎭)을 통솔했던 수장을 말한다. 관찰사(觀察使) 등을 겸하는 수도 있었으며, 지방의 군사와 재정을 통괄하였다.
**번진:중국 당나라 때에, 변방에 설치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그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 또는 그 으뜸 벼슬. [비슷한 말] 절도사.
역주> 法宮(법궁) : 황제의 正殿(정전)으로 임금이 정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역주> 四夷(사이) : 원래는 중국 주변의 東夷(동이), 西戎(서융), 南蠻(남만), 北狄(북적) 등의 소수 민족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四方의 먼 변방 지역을 범칭한다. 한유(韓愈)의 〈平淮西碑평회서비)〉 銘文(명문)에, “이미 淮西(회서)의 蔡州(채주) 땅을 평정하고 나니 四夷가 모두 來朝했다. 마침내 明堂을 열어 앉아서 그들을 다스렸다.[旣定淮蔡 四夷畢來 遂開明堂 坐以治之]”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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淮西有賊五十載(회서유적오십재) 회서에 도적들 있은 지 오십 년이라 封狼生貙貙生羆(봉랑생추추생비) 큰 이리가 추호를 낳고 추호가 큰곰을 낳은 꼴일세 不據山河據平地(부거산하거평지) 산하에 있지않고 평지를 차지한 채 長戈利矛日可麾(장과리모일가휘) 길고 예리한 창들은 태양도 불러 세울 만했다. |
[통역]
회서(淮西)에 반군(叛軍)들이 주둔한 지 벌써 50년이 지났으니, 마치 큰 이리가 추호(貙虎)를 낳고 추호가 다시 큰곰을 낳은 모습이며 대를 이어 생겨난 그들은 너무나도 흉포하다. 그들은 산하의 험고한 곳에 자리 잡지 않고 도리어 평지에서 난을 일으키며, 길고 예리한 창들을 휘두르며 제멋대로 날뛰니 그 위세는 태양도 불러 세울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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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淮西有賊五十載(회서유적오십재) : 李希烈ㆍ陳仙奇ㆍ吳少誠ㆍ吳少陽ㆍ吳元濟 등이 淮西(회서)를 차지한 채, 당조(唐朝)의 명을 듣지 않은 것이 모두 50여 년이었다는 뜻이다.
역주> 封狼生貙貙生羆(봉랑생추추생비) : ‘封狼(봉랑)’은 큰 이리이다. ‘貙(추)’는 삵과 비슷하지만 더 크다. ‘羆(비)’는 곰과 비슷한데 몸집이 크다. 이들은 모두 맹수인데, 여기서는 회서(淮西)의 여러 장수들이 사사로이 자리를 서로 이어가면서 조정의 명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음을 비유하였다.
역주> 日可麾(일가휘) : 《淮南子(회남자)》에, “魯(노) 陽公(양공)이 楚(초)나라 장수였는데, 韓(한)나라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한창 전쟁하고 있을 때 해가 지려 하자 창을 쥐고서 해를 부르니, 해가 이 때문에 三舍(삼사)의 거리를 되돌아왔다.[魯陽公 楚將也 與韓遘難 戰酣 日暮援戈而麾之 日爲之反三舍]”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는 그들이 발호(跋扈)하였음을 형용하였다. 1舍(사)는 30리이다.
帝得聖相相曰度(제득성상상왈도) 황제가 훌륭한 재상 얻으니 이름하여 배도(裵度)인데 賊斫不死神扶持(적작불사신부지) 도적들이 베었느나 죽지 않음은 신명의 도우심이었다. 腰懸相印作都統(요현상인작도통) 허리엔 상인(相印)을 차고서 도통(都統)이 되어 陰風慘澹天王旗(음풍참담천왕기) 음산한 바람 부는 참담한 속에 천자의 깃발 휘날렸다. |
[통역]
현종황제가 마침내 배도(裴度)라고 하는 훌륭한 재상을 얻으니, 그는 도적들의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명(神明)의 도움을 입어 죽지 않았다. 그는 허리에 재상의 印을 차고서 친히 병사들을 통솔하고, 도통(都統)이 되어 음산한 바람이 부는 암담(暗淡)한 날에 천자의 깃발을 휘날리며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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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帝得聖相相曰度(제득성상상왈도) : 聖相(성상)은 곧 賢相(현상)이고, 度(도)는 배도(裴度)이다. 배도의 字는 中立이고, 河東(하동) 聞喜人(문희인)이다. 《舊唐書(구당서)》 〈裴度傳(배도전)〉에, “元和 10년 6월에 조서(詔書)를 내려 배도(裴度)를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다.[元和十年六月 詔以度爲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고 하였다.
역주> 賊斫不死神扶持(적작불사신부지) : 왕승종(王承宗)ㆍ이사도(李師道)가 채(蔡) 땅 정벌을 지연시키기로 모의하고, 자객을 시켜 경사(京師)의 大臣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는 재상(宰相) 무원형(武元衡)을 죽인 후 배도(裴度)를 습격하여 머리를 상하게 하고 도랑 속에 버렸는데, 배도의 전모(氈帽)가 두꺼웠던 탓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황제가 노하여 “배도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天運이다.[度得全 天也]”라 하고, 곧 그에게 중서시랑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를 제수하였다. 이때가 원화 10년(815) 6월이었다.
역주> 都統(도통) : 번진(藩鎭)토벌군의 총사령관이다. 《新唐書(신당서)》 〈裴度傳(배도전)〉에 의하면, 元和 12년(817)에 배도가 자신이 직접 가서 吳元濟(오원제)를 토벌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배도를 회서선위초토처치사(淮西宣慰招討處置使)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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愬武古通作牙爪(소무고통작아조)네 무장인 이삭, 한공무, 이도고, 이문통을 선봉으로 삼고 儀曹外郎載筆隨(의조외랑재필수)의조외랑은 붓을 싣고 뒤따랐으며 行軍司馬智且勇(항군사마지차용)행군사마는 지혜롭고 용감하였고 十四萬衆猶虎貔(십사만중유호비)십 사만 군사들은 호랑이와 큰곰같이 용맹하다 |
그의 수하에는 이삭(李愬), 한공무(韓公武), 이도고(李道古), 이문통(李文通)과 같은 몇 명의 용맹한 장수들이 있어 선봉이 되었고, 또 儀曹員外郞(의조원외랑)이 隨軍書記(수군서기)가 되었다. 또 行軍司馬(행군사마)인 韓愈(한유)가 있었으니, 그는 총명하고도 용감하였고 이에 14만 대군은 맹수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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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愬武古通作牙爪(소무고통작아조) : ‘愬武古通(소무고통)’은 네 명의 무장(武將)을 가리키니, 곧 이삭(李愬), 한공무(韓公武), 이도고(李道古), 이문통(李文通)이다. ‘牙爪(아조)’는 어금니와 발톱으로 본래는 새와 짐승의 공격과 방어수단을 말하지만 인신하여 용사 또는 용맹함을 비유한다. 《漢書(한서)》 〈李廣傳(이광전)〉에, “장군은 나라의 爪牙이다.[將軍者 國之爪牙也]”라고 하였다.
역주> 儀曹外郞載筆隨(의조외랑재필수) : ‘儀曹外郞(의조외랑)’은 곧 禮部員外郞(예부원외랑)으로 당시에 이들은 대부분 군대를 따라다니며 서기(書記)의 일을 맡았다. 여기서는 이종민(李宗閔)을 가리킨다.
역주> 行軍司馬(행군사마) : 한유(韓愈)를 가리키니, 그는 당시 태자우서자겸어사중승(太子右庶子兼御史中丞)으로 창의군행군사마(彰義軍行軍司馬)에 충원되었다.
入蔡縛賊獻太廟(입채박적헌태묘)채 땅에 들어가 도적을 포박하여 태묘에 바치니 功無與讓恩不訾(공무여양은부자)그 공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성은은 한량 없었다. 帝曰汝度功第一(제왈여도공제일)황제께서 말씀하시길 “너 배도의 공이 제일크니 汝從事愈宜爲辭(여종사유의위사)너의 종사관 한유가 글을 지어야 할 것이다“고 하신다 |
채주(蔡州)를 평정한 후 반적(叛賊)인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아 조정에 바쳐 태묘(太廟)에 제사드렸다. 이러한 공적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고, 황제의 은사(恩賜) 또한 한량이 없었다.
당시에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배도의 공로가 가장 크니, 너의 속관(屬官)인 한유는 응당 그것을 글로 적어 남겨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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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入蔡縛賊獻太廟(입채박적헌태묘) : 元和 12년 10월 唐의 장수 이삭(李愬)이 회서(淮西)의 반장(叛將) 오원제(吳元濟)를 잡아 長安으로 移送하였다. 황제는 흥안문(興安門)에서 사로잡힌 오원제를 넘겨받아 묘사(廟社)에 바치고, 그 후 저자에서 목 베었다.
역주> 恩不訾(은부자) : ‘不訾(부자)’는 ‘限量이 없다.’는 뜻이다. 왕찬(王粲)의 영사시(咏史詩)에, “상투 틀고 明君을 섬기매, 받은 은혜 참으로 한량없도다.[結髮事明君 受恩良不訾]”라는 구절이 있다.
역주> 汝從事愈宜爲辭(여종사유의위사) : 《舊唐書(구당서)》 〈韓愈傳(한유전)〉에, “淮西(회서) 蔡州(채주)가 평정되고 12월에 裴度(배도)를 따라 조정으로 돌아오니, 그 功勳(공훈)으로써 刑部侍郞(형부시랑)을 제수하고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平淮西碑(평회서비)〉를 짓도록 하였다.[淮蔡平 十二月 隨度還朝 以功授刑部侍郞 仍詔撰平淮西碑]”라고 하였다.
愈拜稽首蹈且舞(유배계수도차무)한유는 고개 숙여 절하고 춤추며 金石刻畫臣能爲(금석각화신능위)“금석에 새길 글은 신이 할 수 있습니다. 古者世稱大手筆(고자세칭대수필)옛날에는 “대수필”이라 하는데 此事不系于職司(차사부계우직사)이 일은 직책과 상관없습니다. 當仁自古有不讓(당인자고유부양)인에 이르러는 예부터 양보함이 없다합니다.“ 言訖屢頷天子頤(언흘누함천자이)말이 끝나자 황제님은 몇 번이나 끄덕끄덕 하시었네 |
[通釋]
한유가 듣고 곧 황제를 향하여 절하고 아뢰었다. “金石에 새길 문장을 제가 쓸 수 있으니, 종전까지 이런 사람을 ‘大手筆(대수필)’ ‘大文章(대문장)’이라 했습니다.
이 일이 비록 저의 소관은 아니지만 자고로 ‘當仁不讓(당인불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유가 말을 마치자 황제께서는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시며 허락의 뜻을 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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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蹈且舞(도차무) : 蹈舞(도무)는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조견(朝見)하고 경하(慶賀)할 때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의 한 가지이다.
역주> 大手筆(대수필) : 문장을 잘 쓰는 사람 또는 大著作(대저작)을 뜻한다. 《晉書》 〈王珣傳(왕순전)〉에, “꿈에 어떤 사람이 서까래와 같은 큰 붓을 주었다. 꿈에서 깨어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큰 붓으로 글 쓸 일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는데, 이윽고 황제가 죽자 哀冊(애책)과 諡號(시호)를 모두 王珣(왕순)이 기초했다.[夢人以大筆如椽與之 旣覺 語人曰 此當有大手筆事矣 俄而帝崩 哀冊諡號 皆珣所草]”는 기록이 있다.
역주> 當仁自古有不讓(당인자고유부양) : 《論語》 〈衛靈公(위령공)〉에, “仁을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當仁 不讓於師]”라고 보이는데, 여기서는 직임을 맡는 데 있어서 사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주> 言訖屢頷天子頤(언흘누함천자이) : ‘頷(함)’은 아래턱인데, 여기서는 동사로 쓰여 고개를 끄덕인다는 뜻이다. 頤(이)는 뺨이다. 한유의 말이 끝나자 헌종 황제가 즉시 고개를 연달아 끄덕이며 칭찬과 허락을 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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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退齋戒坐小閣(공퇴재계좌소각)한공이 물러나 목욕재계 하신 후 작은 전각에 자리 잡고 濡染大筆何淋漓(유염대필하림리)!큰 붓에 덤뿍 적시니 어찌 그리 힘이 넘치는지! 點竄堯典舜典字(점찬요전순전자)요전 순전의 글자도 하나하나 고쳐야하고 涂改淸廟生民詩(도개청묘생민시)청묘와 생민의 시를 모방하였다. 文成破體書在紙(문성파체서재지)파격적인 문장 이루어 종이 위에 쓰고는 淸晨再拜鋪丹墀.(청신재배포단지)맑은 새벽 두 번 절하고 섬돌 위에 붉은 종이 펼쳐놓는다 |
[通釋]
한유는 곧장 退朝하여 목욕재계하고 작은 書閣 안에 앉아 《書經》의 〈堯典〉ㆍ〈舜典〉의 체제에 비추어보고 《詩經》의 〈淸廟〉ㆍ〈生民〉의 문장을 모방하여, 그것을 조금씩 고치고 가다듬어 하나의 새로운 체제의 문장을 창조하여 종이 위에 그것을 썼다
새벽이 되자 그는 입조하여 황제께 두 번 절하고 大殿 앞 돌계단 위에 자신이 쓴 글을 펼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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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淋漓(림리) : 풍부하고 생동감 넘치는 모양이다. 여기서는 한유가 쓴 碑文 속에 담겨 있는 뜻이 막힘없이 자유롭고 지극히 상세함을 가리킨다.
역주> 點竄堯典舜典字(점찬요전훈전자) 塗改淸廟生民詩(도개청묘생민시) : 〈堯典〉과 〈舜典〉은 모두 《書經》의 편명이다. 文字를 고치거나 바꾸어 글을 짓는 방식을 ‘點竄(점찬)’이라 한다. 〈淸廟〉와 〈生民〉은 모두 《詩經》의 편명이다. 塗改(도개) 역시 點竄(첨찬)과 유사한 방식의 문장 작성법을 뜻한다. 〈堯典〉, 〈舜典〉, 〈淸廟〉, 〈生民〉은 모두 古代 帝王의 功業을 칭송한 문장과 시이다. 이 두 句는 한유가 쓴 〈평회서비〉의 序文과 명문이 《서경》과 《시경》의 문체를 운용한 것임을 말한다.
역주> 文成破體(문성파체) : 별도의 한 체재를 갖추었음을 지칭한다. ‘破體’는 行書의 變體이다. 唐나라 張懷瓘의 《書斷》에, “王獻之가 王羲之의 行書를 변용하였는데, 그것을 破體書라고 부른다.[王獻之變右軍行書 號曰破體書]”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서법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 한유의 비문이 舊體를 잘 변화시켜 創新하였음을 가리킨다.
역주> 丹墀(단지) : 궁궐 안의 붉게 칠한 계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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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曰臣愈昧死上(표왈신유매사상)표에 이르길 “신 유가 불민하니 죽어 마땅합니다” 詠神聖功書之碑(영신성공서지비)신성한 공훈 노래한 이 글 비석에 새겨졌네. 碑高三丈字如斗(비고삼장자여두)비의 높이는 삼 장이며 글자의 크기는 북두 같아 負以靈鰲蟠以螭(부이령오반이리)신령스런 거북에 업히어서 교룡이 비석 위에 서려 있다. |
[通釋]
表에서는 “臣 한유 죽음을 무릅쓰고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신성한 功業을 노래한 이 글은 곧 石碑에 새겨졌다.
석비의 높이는 세 길이고, 글자의 크기는 말[斗]만 한데, 아래쪽에는 돌로 조각한 영귀(靈龜)가 그것을 받치고 양쪽 옆으로는 비석을 감은 교룡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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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負以靈鼇蟠以螭(부이령오반이리) : ‘靈鼇(령오)’는 石碑를 등에 지고 있는 영귀(靈龜)를 가리킨다. ‘螭(리)’는 석비 양쪽에 새겨진 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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句奇語重喩者少(구기어중유자소)비문의 구절은 기특하고 용어는 심오하여 깨닫는 이 적어 讒之天子言其私(참지천자언기사)이를 천자께 사사롭다고 참소하니 長繩百尺拽碑倒(장승백척예비도)백 척 긴 밧줄로 비를 당겨 넘어뜨리고 粗沙大石相磨治(조사대석상마치)거친 모래와 큰 돌로 갈아버렸네 |
석비의 구절은 기굴하고 말의 뜻이 심오하여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이 황제께 참소하여 이 글 속에 한유의 사사로운 뜻이 들어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백 자 되는 긴 밧줄로 그 석비를 넘어뜨렸고 거친 모래와 큰 돌로 석비 위의 글자들을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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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讒之天子言其私(참지천자언기사) : 《全唐詩》 注에, “비문의 내용은 대부분 裴度의 일을 서술하였다. 당시 蔡州에 들어가 吳元濟를 잡는 데 李愬의 功이 첫 번째였으므로 이소는 그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다. 이소의 아내는 唐安公主의 딸이었으므로 궁중에 출입하면서 비문의 내용이 不實함을 호소하니, 이에 황제는 詔書를 내려 한유의 문장을 갈아 없애고 翰林學士 段文昌으로 하여금 글을 다시 지어 돌에 새기게 하였다.[碑辭多敘裴度事 時入蔡擒吳元濟 李愬功第一 愬不平之 愬妻 唐安公主女也 出入禁中 因訴碑辭不實 詔令磨去愈文 命翰林學士段文昌重撰文勒石]”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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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之斯文若元氣(공지사문야원기)그러나 한공의 이 문장이 원기가 있는 듯 先時已入人肝脾(선시이입인간비)앞서 이미 사람들의 폐부로 들어갔네 湯盤孔鼎有述作(탕반공정유술작)성당왕의 반과 공씨의 정에 새긴 글이 있어 今無其器存其辭(금무기기존기사)이제 그 그릇은 없어져도 그 글은 남아있다네 |
그러나 그 귀중한 韓公의 문장은 천지를 가득 채운 大氣와 같아서 그때는 그것이 이미 사람들의 폐부로 스며들어간 뒤였다. 商湯(상탕)의 세숫대야, 정고부(正考父)의 솥처럼 지금 기물은 사라졌지만, 그 문장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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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湯盤孔鼎有述作(탕반공정유술작) 今無其器存其辭(금무기기존기사) : 성탕(成湯)의 대야와 공씨(孔氏) 정고부(正考父)의 솥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그곳에 새겨진 글귀는 여전히 세간(世間)에 전송(傳誦)된다. ‘湯盤(탕반)’은 商(상)나라의 湯(탕)임금이 사용했다는 세숫대야인데 그 위에 자경(自警)의 뜻을 담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禮記》 〈大學〉에, “湯王의 盤銘에 이르기를 ‘진실로 어느 날,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하였다.”고 적혀 있다. ‘孔鼎(공정)’은 孔子의 선조인 공부가(孔父嘉)가 그의 父親 정고부(正考父)를 위하여 만든 鼎(정)인데, 그 위에 부친이 지은 銘文(명문)을 새겼다.
嗚呼聖皇及聖相(오호성황급성상)아! 옛 성스런 황제와 어진 재상들 相與烜赫流淳熙(상여훤혁류순희)서로 더불어 그 밝음이 흘러 후세를 밝히네 公之斯文不示后(공지사문부시후)한공의 이 문장을 후세에 보이지 못한다면 曷與三五相攀追(갈여삼오상반추)어찌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비겼으리오. |
아아, 그 옛날 聖王과 賢相이 모두 함께 커다란 빛을 발하고 있도다.
만일 韓公의 문장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면 어찌 헌종이 三皇五帝와 같은 功業을 이룬 줄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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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相與烜赫流淳熙(상여훤혁류순희) : ‘烜赫(훤혁)’은 불이 盛한 모양이고, ‘淳熙(순희)’는 크게 빛나는 모양이다. 憲宗과 裴度가 藩鎭(번진)을 평정한 빛나는 공훈과 업적이 장차 세대를 거치며 전해내려 오리라는 것을 말한다.
역주> 攀追(반추) : 헌종이 三皇五帝를 뒤따라 그 위업을 이어 본받는다는 뜻이다.
愿書萬本誦萬過(원서만본송만과)원컨대 이 문장 만 번을 베껴 쓰고 일만 번을 읽어서 口角流沫右手胝(구각류말우수지)입가에는 거품이 나고 오른손에는 굳은 살 생기고 傳之七十有二代(전지칠십유이대)칠십 하고도 이 대에 걸쳐 그것을 전하여 以爲封禪玉檢明堂基(이위봉선옥검명당기)봉선시의 옥검과 명당의 기석이 되게 하소서. |
한공의 문장을 만 번 외우고 베껴서 내 입가에는 거품이 고이고 오른손에는 굳은살이 박히며, 72대가 지난 후에라도 천지에 제사하는 玉檢(옥검)과 조정을 세우는 주춧돌로 쓰이기를 나는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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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遍(편) : ‘週’로 되어 있는 本도 있다.
역주> 七十有二代(칠빗유이대) : 《史記》 〈封禪書(봉선서)〉에서 太史公은 《管子》를 인용하여, “옛날에 泰山(태산)에서 제사를 행하고 梁父山(양부산)에서 제사를 행한 자가 72家였다.[古者封泰山 禪梁父者七十二家]”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만세토록 後代에 전해진다는 뜻이다.
역주> 以爲封禪玉檢明堂基(이위봉선옥검명당기) : ‘封禪(봉선)’은 帝王이 天地에 제사지내는 큰 의식을 말한다. 封(봉)은 泰山(태산) 위에 제단을 쌓고 제사지내어 하늘의 功에 보답하는 것이고, 禪은 태산 아래의 梁父山(양부산)에 터를 닦고 제사지내어 땅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뜻한다. ‘玉檢(옥검)’은 祭文(제문)이 적힌 玉牒(옥첩)을 넣는 書函(서함)의 뚜껑이다. ‘明堂’은 天子가 政令을 반포하고 제후들을 조회하며 제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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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題] 이 시는 한비(韓碑)를 노래한 것으로 영사시(詠史詩)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상은이 이 시를 정확히 언제 썼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장채전(張采田)의 말을 따르면 젊은 시절의 作인 듯하다.
唐나라의 시는 李商隱ㆍ杜牧 때에 이르러 점점 섬려(纖麗)하고 유미(柔媚)한 詩風으로 변하였다. 더욱이 이상은의 시는 詩語의 조탁(彫琢)과 내용의 염려(艶麗)함에 가장 많이 치중하였다. 그러나 〈한비〉는 그의 작품 가운데서도 독특한 격조(格調)를 보여준다.
〈한비〉는 이상은이 한유의 시를 배워 쓴 습작인 듯하다. 나중에 이상은이 쓴 유미향염(唯美香艶)의 시들은 풍격이 이 시와 매우 거리가 있지만, 기교에 치중하고 시어를 까다롭게 고르며 기벽(奇僻)한 전고(典故) 쓰기를 즐겨한 것을 보면, 그가 초기에 한유를 배워 쓴 시들과 대체로 성격을 같이한다.
한유의 〈平淮西碑〉는 裴度가 淮西의 逆徒들을 討伐하여 平定한 과정과 功業을 기록한 것으로, 東漢 班固의 〈燕然山銘〉과 서로 필적한다. 그러나 李愬의 아내가 憲宗의 사촌 누이동생이어서 궁중에 출입하며 그녀의 남편을 대신하여 功을 다투었고, 헌종은 결국 사사로운 人情에 얽매여 판단이 흐려졌다. 이에 명을 내려 碑文을 바꾸게 하였고 결국 段文昌의 비문으로 바꾸어 이소가 적을 토벌한 공로를 더 드러나게 하였다. 지금 〈平淮西碑〉에는 韓碑와 段碑 두 편이 있어 회서를 평정한 功業은 역사의 논쟁거리가 되고 말았다. 후대에 韓碑의 훌륭함을 찬미하면서 배도의 속장(屬將)이었던 이소가 공을 다툰 것을 비난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일이다. 이에 이상은은 한유를 대신하여 不平한 마음을 가지고 한유의 〈평회서비〉가 天地의 元氣와 같다고 극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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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李商隱, 원화 7년(812년) 또는 원화 8년(813년)~대중 12년(858년))은, 중국 당나라의 관료 정치가로 두목(杜牧)과 함께 만당(晩唐)을 대표하는 한시인이다. 자는 의산(義山), 호는 옥계생(玉谿生) 또는 달제어(獺祭魚)이다.
이상은의 시는 화려하고 때로는 관능적이며, 때로는 상징적이다. 특히 연애시에서 이상은 시의 특색이 발휘된다. 그는 애정시 방면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고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읽어냈다는 평을 받는다.[1] 무제(無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을 포함해 이상은은 아예 제목을 짓지 않거나 혹은 간단히 시구에서 빌리는 정도로 제목을 붙였는데, 만당시의 경향인 유미주의를 보다 더 추구하여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을 구사하고, 몽롱하며 환상적이고 관능적인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 주제는 대개 '파국'으로 끝나버린 '불륜'의 연애의 회상, 감미로운 꿈 같은 청춘의 기억의 서술이다. 당연히 그 내용은 몹시 애수를 띠지만 그것을 우아한 시구나 댓구, 고전의 인용으로 장식하여 탐미주의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아름답고도 슬픈, 몹시 사적인 기억과 감회를 시로 승화시키는 것이 이상은의 시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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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碑(한비:한유의 평회서비찬) - 李商隱(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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