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 장 험난한 협행(俠行)
1
세월여류(歲月如流).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 백리웅천이 남창을 떠난 지도 벌써 일 년하고도 몇 달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그 동안 무림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재작년 여름 검운총이 남창성에 있는 한 장원을 급습해 수십 명의 사람들을 잡아간 일이 시발이었다.
놀랍게도 그 장원은 적야성의 비밀분타였고 그날 검운총에 잡히지 않은 자는 적야성 당주 채운남 등 서너 명에 불과했다.
보름 후에는 적야성에 의한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호남성(湖南省) 최고의 갑부인 장사량(張史良) 가족이 적야성의 호남성 분타원들에게 끌려간 것이다.
검운총은 공식적인 분타는 별로 두지 않았다. 대신 각처에서 장사를 하는 제자들의 업소가 분타 역할을 했고 특히 장사량은 검운총의 자금줄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사파의 태양 적야성과 정파 서열 이 위 검운총.
이 두 방파가 서로 납치사건을 일으키며 무림에 풍파를 던진 것이다.
다행스런 것은 두 문파 모두 정사대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염려했는지 살생을 자제하며 산 채로 잡아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납치 후 밀사를 교환하며 협박과 해명의 서찰을 주고받았다. 하나 그러면서도 납치사건은 계속되었다.
일각에서는 평화롭던 강호에 대혈풍이 부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급기야 정파를 영도하는 건륭문이 중재를 하기 위해 개입했다.
하나 양측의 주장이 너무 엇갈려 밀사가 오고가며 중재하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건륭문의 제의에 따라 적야성과 검운총의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회합을 갖게 되었다.
무창(武昌).
무창은 호북성(湖北省)의 성도로 악주(鄂州), 강하(江夏)라고도 불렸다. 대륙 서쪽에서 흘러온 장강(長江)은 무창성의 서쪽을 접하여 흘러간다. 성 외곽의 강가에는 한 채의 유명한 누각이 있으니 바로 황학루(黃鶴樓)였다.
황학루에는 갖가지 전설이 어려 있다.
신선이 노란 학을 타고 놀러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공짜로 술을 먹은 노인이 보답으로 그려 준 학 그림이 날아올랐다는 전설도 있다.
많은 문인들이 황학루에 놀러와 시를 지었다. 이백(李白)이 친구 맹호연(孟浩然)을 전송하며 한 수의 멋진 시를 남긴 장소도 바로 이곳 황학루였다.
고인서사황학루(故人西辭黃鶴樓).
연화삼월하양주(烟花三月下揚州).
고범원영벽공진(孤帆遠影碧空盡).
유견장강천제류(惟見長江天際流).
나를 황학루에 남기고,
안개 낀 삼 월, 친구는 배에 올라 양주로 떠나고,
이윽고 돛대마저도 시야에서 사라져
뵈는 것은 아득히 하늘에 닿은 장강의 물뿐이어라.
휘리링.......
황학루 위로 강바람이 시원스럽게 불어대고 있었다.
산천은 경쟁이라도 하듯 푸르고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흘러가고 있었다. 시인이 아니라도 절로 시 한수가 나올 법한 날씨였다.
하나 오늘 황학루를 찾은 시인묵객들은 누각 근처에도 못 가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병장기를 든 수백 명의 무림인들이 황학루 주위를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오늘이 적야성과 건륭문, 그리고 검운총의 대표가 모여 회합을 갖는 날인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황학루였던 것이다.
황학루의 삼 층.
원탁이 마련되어 있고 세 인물이 빙 둘러 배석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다과류나 먹을 물 한 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피차간에 의심을 살만한 어떤 행동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배석자 중 깨끗한 용모에 팔자 수염을 멋지게 기른 사십대 중년인이 입을 열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무림계는 평화로웠습니다. 물론 작은 다툼은 빈발했지만 결코 큰 충돌은 없었지요. 이번 사태가 자칫하여 대혈겁으로 확대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중년인은 정파를 영도하는 건륭문의 총관 백종인(白種仁)이었다. 백종인은 칠 척 장신에 장대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 모두다 방금 소생의 말에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배석자 중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의인이 무뚝뚝하고 짧은 어조로 말을 받았다.
"동감이외다."
청의인은 백종인과는 반대로 다소 왜소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하나 냉막한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로 인해 그에 못지 않은 거구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특히 깊숙한 눈 속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은 날카로운 칼날에 햇빛이 반사된 것 같았다. 그는 사파를 이끄는 적야성의 외통령(外統領) 관세걸이었다.
적야성의 조직에는 다른 방파에 있는 총관이란 것이 없었다. 대신 외통령과 내통령이 각각 일을 분담하고 있었다. 외통령은 대외업무를 분장한 외팔당을 총괄하는 중책이었다.
관세걸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본성은 정사대전을 막아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엄청난 양보를 하고 있소. 백대협은 그 사실을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요?"
그때였다.
"양보라니... 그 무슨 가당치 않은 말씀이오? 온갖 수모를 참고 있는 쪽은 우리 검운총이란 말이오."
배석한 삼 인 중 마지막 인물이 소리친 것이다.
검운총의 총관 황관욱이었다. 황관욱은 관세걸의 얼굴에 시선을 맞추며 다시 소리쳤다.
"지금까지 적야성에서 납치해 가둔 검운총도의 숫자는 사백 명이 넘소. 우린 기껏해야 일백 명 정도의 적야성도만 잡아 왔단 말이오."
관세걸은 그의 눈을 태울 듯이 노려보며 답했다.
"검운총도 중 죽은 자는 아직 하나도 없소. 하나 우리 적야성도 중에는 두 명이 시체가 되었소. 그 사실을 잊어 먹었단 말이오?"
황관욱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들은 무림의 법도를 어기고 오매산에 들어왔소. 더구나 본파에 잠입해 삼부인을 겁탈하려던 흉수도 적야성도요."
관세걸은 눈꼬리를 성큼 세웠다.
"이보시오. 적야성도 중 검운총에 잠입한 자는 아무도 없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소."
황관욱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럼 야밤에 적야성도 한 무리가 오매산에 들어 온 이유가 뭐요? 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단 말이오?"
관세걸은 자신도 모르게 원탁을 쾅! 내리쳤다.
"그건 백리웅천이란 악동을 쫓아가다 그렇게 된 거라고 하지 않았소. 우리가 두 명의 사망자가 나오고도 참는 이유는 어찌됐든 검운총의 규칙을 어기고 오매산에 들어갔기 때문이오. 알겠소!"
황관욱은 바로 말을 받았다.
"귀성은 남창에 비밀분타를 설치하려는 시도까지 했소. 그러고도 많이 참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오?"
관세걸은 냉소를 발했다.
"남창은 검운총이 있는 오매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소. 분타 하나 두지 않고서 자기 영역이라 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오."
그는 차갑게 말을 하고는 입술을 비틀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황관욱과 백종인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이번 일은 아직 우리 성주님 귀에 들어가지 않았소. 검운총은 우리 성주님께서 폐관을 깨고 나오시기 전에 만족할 만한 보상과 정중한 사과를 해야 하오."
적야성주 육송악이 거론되자 백종인과 황관욱의 눈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관세걸의 말은 계속되었다.
"만일 성주님께서 출관하셨다가 적야성이 수모만 당한 줄 알면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 거요. 아마 나부터 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며 강호에는 엄청난 피바람이 불어닥칠 거요."
그 말에 백종인과 황관욱은 낯빛이 변하며 무겁게 침음했다.
"으음!"
관세걸은 음성을 더욱 진지하게 했다.
"난 내게 닥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소. 황총관! 당신은 왜 그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자꾸 억지를 부리는 거요."
황관욱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더니 말을 받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이오. 외적이 들어와 우리 삼부인을 겁탈하려 했는데 거꾸로 보상과 사과를 하라니....... 지금 본 검운총의 젊은 무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면전을 벌이자고 떠들고 있소."
관세걸의 검미가 불끈 치솟았다.
"뭣이! 전면전!"
이때 건륭문의 총관 백종인이 급히 끼어 들었다.
"두 분은 흥분하지 마시오. 태평성대를 누려왔던 강호가 이번 일로 풍파에 휘말려선 안 될 것이오. 지금까지의 정황을 알아본 결과 우선 오매산에서 사라진 백리웅천이란 소년을 찾는 게 급선무인 것 같소."
백종인은 말을 끊었다가 관세걸과 황관욱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백리웅천이란 소년이 그날 오매산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보면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소."
관세걸은 바로 말을 받았다.
"옳은 말씀이오. 하나 그 녀석은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기연을 찾는다고 정처 없이 떠났소. 그날 오매산을 지나 심산유곡으로 간 모양인데 어떻게 찾는단 말이오?"
황관욱도 한 마디 했다.
"그 사고뭉치가 무슨 도움이 되겠소?"
백종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양측이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그 소년을 찾아 내막을 알아봐야 하오. 특히 검운총도의 목격담에 따르면 흉수의 체격이 별로 크지 않아 축골공의 대가라고 짐작하지 않았소."
"......."
"그 정도면 바로 오매산에서 사라진 백리소년 또래의 체격 정도요."
황관욱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적야성도가 아니라 그 녀석이 몹쓸 짓을 한 흉수란 말이오?"
백종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소. 단지 그 소년이 이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 같다는 뜻이오."
그는 두 사람을 천천히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세 방파가 힘을 합해 찾으러 나서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거요. 아무렴 어린 소년이 맹수가 우글거리는 산 속을 얼마나 돌아다닐 수 있겠소?"
관세걸과 황관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관세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소. 본성은 그 악동 녀석을 찾아낼 때까지 다시는 납치사건을 일으키지 않겠소. 물론 검운총이 조용히 있을 때의 이야기요."
황관욱이 말했다.
"우리 역시 적야성이 가만히 있다면 납치사건을 일으키지 않겠소."
결론은 내려졌다. 백리웅천을 찾을 때까지는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될 모양이었다.
세 거파의 회합이 있은 다음 날부터 전국 각처에 방문이 걸렸다. 방문에는 아직 치기가 가지 않은 어린 소년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 밑에는 이러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름 백리웅천, 나이 십삼 세.
남창 진미객점에서 점소이 생활을 하던 고아소년임. 나이에 비해서는 체구가 큼. 힘이 세고 특히 동작이 아주 민첩함.
상종하기 힘든 고약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기연을 찾는다는 황당한 꿈에 사로잡혀 심산유곡을 헤매고 있음.
이 소년의 소재를 아는 자에게는 거금 만 냥을 줌. 만일 찾아서 데려오면 거금 십만 냥을 희사함.
단, 반드시 생포(生捕)하여 대령하여야 함.>
방문이 걸린 지 며칠 후 적야성과 건륭문, 검운총에서 차출한 수색대가 중원의 심산을 향해 출발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강호인들이 십만 냥이란 거금을 노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백리웅천은 강호인들의 최대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다.
하나 그의 종적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다. 아니 발견될 수 없었다. 그가 어린 소년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험한 오지 대신 화전민들이 있는 얕은 산을 주로 수색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은 또 흘러 일 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공포의 악동 백리웅천!
그는 무림에 커다란 불씨를 던져 놓고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2
동정호의 동쪽 물가에 있는 어느 한적한 촌락이었다.
푸른 산줄기를 뒤로 두고 호숫가에 자리한 마을 풍광은 실로 그린 듯 아름다웠다.
겨우 삼십여 호에 불과한 인가가 호수 가까운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어업이 주 생계수단임을 쉬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촌민 수십 명이 물이 가슴에 닿는 곳까지 나가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고깃배들은 모래사장에 누운 채 여기저기 이끼가 슬고 구멍마저 나 있었다. 출어를 한 지 꽤 오래된 폐선이 분명했다.
"왜 이렇게 고기가 안 올라오는 거야? 겨우 일각에 한 마리 정도니, 원......."
"얕은 곳의 고기는 거의 씨가 말라 가는 모양이야."
그들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쉴새없이 툴툴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한 청년이 목운동을 하느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무엇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저게 뭐야?"
청년의 외침에 촌민들은 하나 둘 고개를 돌려 청년의 시선을 쫓았다. 마을 좌측의 동산에서 한 괴이한 행렬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흑마가 한 흑의소년을 태운 채 터벅터벅 걷고 있고 그 뒤에 노새 두 마리와 늑대 이십여 마리가 등에 짐을 가득 실은 채 따라 오고 있었다.
촌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놀람의 소리를 터뜨렸다.
"늑대가 짐을 실었다."
"야! 늑대를 노새처럼 부리다니, 개도 등에 짐을 실으면 싫어하는데......."
그들의 관심은 일단 짐을 싣고 오는 늑대 무리에게 집중되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늑대 무리의 목과 턱에 묶인 가죽끈이 생생히 보였다. 가죽끈은 흑마의 말안장에서 이어져 나온 굵은 동아줄에 일일이 연결되어 있었다.
촌민들은 한 동안 늑대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흑마를 타고 오는 소년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년은 바로 백리웅천이고 흑마는 그의 애마 마존이었다.
백리웅천은 지난 이 년 수 개월 동안 구궁산맥의 줄기를 따라 서진하며 절벽이 보이면 이를 잡듯 꼼꼼히 수색했다. 그러다 산이 점점 낮아지더니 드디어 오늘 동정호에 다다른 것이다.
그는 호숫가의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한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하하하!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는 호탕하게 웃고는 말의 속도를 높여 물가로 다가갔다.
그는 그 사이에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키는 거의 한 자 가까이 자랐고 체격도 떡 벌어진 장정을 연상케 했다. 게다가 수염까지 나기 시작해 코밑과 턱이 거뭇거뭇해져 있어 실제 나이보다 훨씬 위로 보였다.
겉모습은 이십대 장정 중 키는 좀 작아도 단단한 체구를 가진 사람 같았다. 하나 눈빛과 표정에 치기가 머물러 있어 언뜻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촌민들은 그의 어깨에 쌍검이 달려 있고 말등 곳곳에 여러 병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수군거렸다.
"무림의 호걸인가봐."
"늑대까지 길들여 끌고 다니는 걸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닌 모양이야."
백리웅천은 호수로 들어서자 말에서 내렸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촌민들은 흥미가 이는지 그의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 중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대표로 답했다.
"뭘 알고 싶은 게요?"
"동정호에 있는 섬 중 가장 쓸만한 무인도가 어디인지 알고 싶소만......."
노인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쓸만한 무인도?"
백리웅천은 껄껄 웃으며 다시 말했다.
"하하하, 인적이 닿기 힘든 그런 곳 말이오. 예를 들면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되어 있다든지 아니면 괴수가 살고 있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든지... 뭐 그런 섬 말이오."
노인은 미간을 좁히며 그의 얼굴을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런 곳을 왜 찾는 거요?"
"말 못할 사정이 있으니 그냥 대답이나 해주시구려."
노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인도야 널려 있소. 근년에 늘어난 것까지 합치면 수적들이 있는 섬을 제외한 대부분의 섬이 무인도일 거요."
백리웅천은 최근 무인도가 늘었다는 말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자세히 좀 이야기해 주시오."
노인은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백사장에 뒹구는 폐선들을 가리켰다.
"저걸 좀 보시오. 오죽하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멀리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겠소. 그 놈의 수룡천(水龍天)이란 수적(水賊)들이 배에 고기가 찰 것 같으면 쫓아와서 약탈해 버렸소."
백리웅천은 의아한 듯 물었다.
"수룡천은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의 왕자인데 그런 치졸한 짓을 한단 말이오?"
그는 남창의 점소이 시절에 들은 지식을 통해 장강에 있는 열여덟 도적 집단에 관해서도 환히 알고 있었다.
속칭 장강수로십팔채로 불리는 도적들 중 수룡천이 가장 강성하여 강북으로 넘어가는 물자를 약탈하는 명수라는 것이었다.
하나 가난한 어민들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강수로십팔인지 뭔지는 모르오. 우리가 아는 것은 동정호의 군산(君山)에 위치한 수적 집단이 수룡천이라는 것뿐이오."
백리웅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들은 군산에 요새가 있소."
"그 수룡천이라는 놈들이 작년 가을에 느닷없이 이쪽 연안의 무인도로 내려오더니 불쌍한 어민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소. 처음에는 멀리 나가 잡는 고기만 약탈하더니 물가 근처라도 배만 보이면 쫓아와 고기를 뺏어 가는 거요."
"저런... 완전히 저질 도적이 되어 버렸군."
노인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바람에 동정호 남쪽의 여러 섬에 사는 어민들이 섬을 버리고 뭍으로 들어왔소. 원래 호숫가에 살던 어민들은 배를 몰고 나가 조업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소."
"저런... 쯧쯧!"
백리웅천은 분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강한 책임감이 혈관을 뜨겁게 달구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운명이군. 협행을 해야 할 때가 다시 한번 도래한 거야.'
그는 우렁찬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 나쁜 놈들이 있다니... 부호들의 재산은 놔두고 가난한 어민들을 털다니... 대체 어느 섬이오? 그들의 총 인원은 몇 명이나 되오?"
노인은 고개를 돌려 촌민 중 덩치가 커다란 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말해주게."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입에서 침을 튀겼다.
"제가 작년에 그 놈들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난 적이 있습니다. 허드렛일을 할 사람이 부족했는지 배에 탄 사람 중 젊고 체격 좋은 절 골라서 잡아가더군요. 하지만 만삭의 아내와 반신불수의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통사정을 하니 풀어주더라고요."
백리웅천은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놈들이군."
"두목의 외동딸이라는 소녀가 풀어줬지요. 남자들과는 달리 참 착한 소녀였어요."
"음, 소녀라......!"
백리웅천은 호기심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치해야 할 대상의 딸이 마음 착한 소녀라니 왠지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물었다.
"총인원이 몇 명이냐고 묻지 않았소?"
청년은 눈매를 좁히고 한참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답했다.
"일일이 세어보지 않았지만 한 백 명 가까이 되지 않았나 싶군요."
백리웅천의 눈에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겨우 백 명 정도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절대로 백 명은 넘지 않을 겁니다."
백리웅천은 미간을 좁히며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수룡천은 인원이 천 명은 훨씬 넘는 집단이었다. 결국 수룡천은 다른 세력에게 패망하고 잔당만 남아 무인도로 내려온 것 같았다.
그는 생각을 마친 후 허리를 약간 젖히며 호방하게 말했다.
"좋소. 그 소녀를 제외한 모든 악당들을 황천으로 보내드리겠소. 여러분들은 이제 마음놓고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거요."
그는 자신이 백 명 정도의 수적들은 능히 해치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가 알기에 수적들은 삼류 무림인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파 서열 이 위인 검운총을 농락한 적도 있고 적야성 호천벽력대의 고수 왕융과 싸운 적도 있는 것이다.
또한 호랑이를 잡고 늑대 무리를 물리쳐 길들이기도 한 놀라운 인물이 아닌가?
더구나 하루도 빠짐없이 운공조식을 하며 내공을 키워 왔던 것이다. 게다가 험지를 오르내리며 기연을 찾아 헤맨 것은 지옥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어 창공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심 중얼거렸다.
'비록 기연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의 여정은 어떤 문파에서도 시키기 힘든 훈련이었다. 내겐 백 명 정도의 수적들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져 있어.'
백리웅천의 자신감은 불탈 수밖에 없었다. 하나 바로 그런 자신만만함 때문에 곤경에 빠지게 됨은 꿈에도 알 수 없었다.
촌민들은 그의 일신에 어린 장엄한 기도를 느끼고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눈에는 신뢰의 빛이 물씬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인이 감격 어린 어조로 외쳤다.
"협사께서 도와주신다니 백골이 난망입니다만 혼자서 백 명 가까운 악도들과 싸우다가 만일 잘못되면......?"
백리웅천은 표정을 굳히고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염려할 것 없소. 어찌 하룻강아지 백 마리가 산중의 왕인 대호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소? 본래 우리 무림계의 최하수들이 바로 도적들이라오."
그는 청년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어디 있는 섬이오? 당장 건너가 놈들을 도륙내고 말겠소."
청년은 호수를 보며 좌측 한 지점을 가리켰다.
수평선 부근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의 윤곽이 어스름하게 보였다. 워낙 넓은 호수라 그런지 마치 바다를 보는 느낌이었다.
"저 맨 앞에 보이는 섬이 있지요. 그 섬의 좌측으로 돌아서 서북 방향으로 가면 조그만 섬 세 개가 있고 네 번째에 제법 큰 섬이 나옵니다. 그 섬이 바로 수적들의 요새입니다."
"그럼 그 전의 섬들은 모두 무인도이겠구려?"
"그렇습니다."
"음!"
백리웅천은 침음성을 발하며 저 먼 수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는 무인도를 탐색하며 지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마음을 바꾸었다. 먼저 협행을 한 후 탐색을 하는 게 옳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노인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혹시 도와드릴 일은 없는지......."
백리웅천은 서슴없이 답했다.
"원래는 일행이 많아 큰 뗏목을 만들 생각이었소.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구려. 내가 놈들을 처치하고 돌아올 때까지 내 동물들을 보살펴 주시오."
노인은 흘낏 늑대들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백리웅천은 의중을 알아채고 바로 말했다.
"염려할 것 없소. 쓸데없이 괴롭히지 않고 먹이만 제 때 주면 되는 거요. 수일 내로 돌아올 거니까 큰 부담이 되진 않을 거요."
촌민들 중 누군가가 다급히 외쳤다.
"그 정도를 어찌 아까워하겠습니까? 저희들은 오로지 협사님께서 성공하기를 빌 뿐이지요."
그 말을 시발로 하여 촌민들 모두가 아무 염려 말라는 말을 하며 그를 격려해 주었다. 백리웅천은 늑대 무리를 몰아 인가가 밀집한 곳의 커다란 나무에 맸다. 말과 노새도 옮긴 후 마음에 드는 병기를 골라 무장했다.
3
촌민들은 구멍이 나지 않은 작은 배 한 척을 골라 이끼를 닦고 배를 띄우느라 수선을 피웠다.
배가 물 위로 뜨자 백리웅천은 의기양양하게 올라탔다.
촌민 중 장정 두 명이 같이 배에 타고 노를 저었다.
촌민들은 물이 목에 닿을 때까지 따라 나오며 젊은 협객의 출정을 배웅했다.
백리웅천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배는 호수 북쪽으로 거침없이 미끄러져 갔다.
가을햇살이 수면 위에서 황홀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저어... 이 물살을 타고 그냥 흘러가면 그 섬 앞을 지나갑니다. 그때 노를 좀 저어주시면 섬에 오를 수 있지요. 저희들은 이제 돌아가야......."
두 장정은 미안한 표정을 하며 머리를 긁었다.
백리웅천은 선상에 우뚝 선 채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꽤 멀리 온 것 같은데 헤엄쳐서 돌아갈 수 있겠소?"
"이 정도 거리는 괜찮습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협사님께서 성공하시기를 빕니다."
"그럼 가보시오."
두 장정은 정중히 절을 하고는 물로 뛰어들었다.
백리웅천은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거의 물귀신 수준이군. 수영하는 재주의 십분지 일 정도의 무공만 알았어도 수적들이 두렵지 않을 텐데... 쯧쯧!"
그는 자신의 나이도 잊은 듯 장년인의 말투나 다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음성보다 더한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그의 눈빛, 표정 그 어디에도 자신만만한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발 앞에는 오로지 승리만 있을 뿐 패배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었다.
백리웅천은 수적들의 요새인 섬이 가까워지자 직접 노를 젓기 시작했다. 노를 저으며 섬의 연안을 살폈으나 경계를 서는 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수적들을 공격하는 세력이 없어 경계를 세울 필요가 없는 모양이었다.
백리웅천은 내심 조소를 날렸다.
'완전히 무사태평이군. 그나저나 그 놈들을 어떤 식으로 공략하지?'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본채에 용감히 쳐들어가 일백 명과 한꺼번에 대결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몰래 잠입하여 수뇌부만 제압하여 쉽게 상황을 끝낼 것인가?
그는 잠시 생각한 후 인명의 피해를 수뇌부로 최소화하는 게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그들만 죽인 후 부하들은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라고 점잖게 꾸짖어줘야겠군.'
백리웅천은 협사다운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자 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섬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백리웅천은 물가에 커다란 바위가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배를 저어갔다.
잠시 후 배는 섬에 닿았다. 물가의 모래사장은 얼마 없었고 바로 울창한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백리웅천은 배를 끌어 당겨 바위가 모여 있는 틈바구니에 숨겼다.
그는 준비해 온 병기 중 용형검을 어깨에 걸고 단검 열 자루를 허리에 찼다. 철퇴 등 나머지는 배에 그냥 남겨둔 채 물가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일단 섬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 뒤 작전을 개시할 심산인 것이다. 그는 청력을 바싹 높이며 걷는 속도를 점점 빨리 했다.
섬을 반쯤 돌았다 싶을 때였다. 물가 반대편 숲 속에서 두런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우리가 언제나 군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런 후진 섬에서 언제까지 참고 지내야 한단 말인가?"
"그러게 말이야."
백리웅천은 급히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숲 입구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는 그대로 몸을 날려 떡갈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숲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방주님은 여전히 술에 절어 지내고 아가씨는 아직 어리니 지도자로는 부족하고......."
"우리도 그냥 삼존회(三尊會)의 부하가 될 걸 그랬나봐. 그랬음 군산에 남아 그럴싸한 노략질을 하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의리 없이 달아날 순 없지 않은가? 수룡천의 깃발 아래 목숨을 걸기로 한 우리들인데......."
"그건 그래."
이때 백리웅천은 떡갈나무 위에 올라가 나뭇잎 사이로 눈만 내민 채 소리난 방향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덤불 사이를 헤치고 두 사람이 걸어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두 청년으로 모두 흑의를 입었는데 용모가 특이했다.
한 명은 코가 들창코에 안면 한쪽이 찌그러져 있었다. 다른 청년은 주걱턱에 코가 납작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둘 모두 험상궂기보다는 우스꽝스럽게 못생긴 얼굴이었다.
백리웅천은 그들의 얼굴을 보며 내심 실소를 지었다.
'못생긴 자들이 의리가 있고 인물 좋은 놈들은 믿기 힘들다더니... 별로 틀린 소리는 아니군.'
청년들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백리웅천이 숨어 있는 나무 밑을 지나갔다.
"아무도 쳐들어오지 않는데 뭐 때문에 한 시진에 한 번씩 섬 주위를 순찰해야 하지? 요즘은 하는 일마다 짜증이 나서 죽겠다니까......."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지 않나? 너무 툴툴거리지 말게."
그들은 숲 입구에 나란히 서서 푸른 물결을 보며 기지개를 늘어지게 켰다.
"아! 정말 좋은 경치야. 심심해서 그렇지 경치는 군산보다 차라리 나은 것 같아."
"동감이네."
그들은 하품을 한 후 천천히 호숫가 양쪽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한 순간 그들의 귀에 한 줄기 묵직한 음성이 내리 꽂혔다.
"심심하지 않게 해줄까?"
"엇!"
그들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허리에 찬 호두구(虎頭鉤)를 빼들었다. 바로 그 순간 쇄액! 하는 파공음이 일며 그들의 눈앞에 족영(足影)이 어른거렸다.
백리웅천이었다. 그는 나무에서 그대로 몸을 날려 떨어지며 두 청년의 턱을 두 발로 가격한 것이다.
빠박!
"끅!"
두 청년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턱이 두 조각 난 채 혼절해버렸다.
백리웅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길, 힘 조절 실패로군. 턱을 박살낼 생각은 없었는데......."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물을 손에 떠와 그들의 얼굴에 뿌렸다. 그리고는 세차게 흔들어댔다. 청년들은 끙!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가 백리웅천의 얼굴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누구요?"
그들은 소리를 질렀다가 이내 안면을 찌푸리며 신음을 질렀다.
턱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백리웅천은 준비했던 단검 두 자루를 그들의 목에 들이댔다.
"묻는 말에 순순히 답하면 죽이지 않겠다. 하나 거짓말을 할 시에는 이 단검이 그대로 너희들의 목을 찌를 것이다. 알아서 해라."
청년들은 사색이 되었다. 두 청년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 물어보십시오."
백리웅천의 시선은 먼저 들창코 청년을 향했다.
"좋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저... 저는 소덕상(蘇德象)입니다."
"덕스런 상이라... 좋군. 주걱턱은......?"
"전 화... 화자헌(華雌憲)입니다."
"이름들은 좋군."
백리웅천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너희들은 수룡천이란 수적집단의 무리들이렷다."
소덕상과 화자헌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수룡천은 군산에 터를 잡고 장강수로십팔채의 왕초 구실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조그만 무인도로 밀려났지?"
소덕상과 화자헌의 눈에 회한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한숨을 푹 쉬더니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수룡천이 다른 수적 집단을 누르고 최고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두령 조운평(趙雲平)의 무공 덕분이었다.
조운평은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적 괴수들을 통털어 가장 무공이 강했던 것이다. 그는 출정 시에 항상 무리를 선두에서 이끌며 용맹을 떨쳐왔다. 그런데 작년 봄부터 웬일인지 부하들만 시키고 노략질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 가지 더 달라진 점은 그가 항상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본래 조운평은 애주가였다. 하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는 술을 마시지 않던 사람이 이상하게 변한 것이다.
그에 관한 소문은 점점 퍼져 다른 수적집단에도 흘러 들어갔다.
작년 가을의 어느 날 밤이었다.
장강수로십팔채 중 세 방파가 수룡천을 기습했다. 흉수들은 연화문(蓮花門)과 수신단(水神團), 흑룡방(黑龍幇)의 세 곳이었다. 그들은 연합하여 삼존회(三尊會)란 조직을 만들고 야음을 틈 타 불시에 기습을 단행한 것이다.
수룡천은 용감히 싸웠으나 많은 방도의 목숨을 잃은 후 항복하고 말았다. 조운평은 술에 대취한 상태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붙들렸다.
삼존회는 조운평을 죽이지 않고 그의 경맥 몇 곳을 끊어 버렸다. 그런 연후 수룡천의 생존자들에게 삼존회의 부하가 될 것인지 아니면 조운평의 부하로 남을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
대부분은 삼존회의 부하가 되겠다고 했다. 하나 일부는 조운평을 계속 따르는 것을 택했다.
4
백리웅천은 두 청년이 교대로 쏟는 말을 잘랐다.
"왜 조운평을 따르겠다고 한 거야? 삼존회의 부하가 되는 것이 훨씬 나을 텐데......."
그는 눈을 잔뜩 부라리며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내심은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의리 있는 사나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덕상이 답했다.
"조운평 어르신은 우리에겐 은인과 같습니다. 수룡천 인원 중 상당수는 주인에게 두들겨 맞고 버려진 노비 출신이지요. 어르신은 그런 우리들을 살려내고 음식을 주었지요."
"음!"
백리웅천은 낮게 침음하며 양미간을 찌푸렸다. 목을 자르려 작정했던 조운평이 예상보다는 덜 나쁘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하나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원래 도적들은 그런 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런 신세가 아니면 누가 이런 곳에 모여 도적질을 하며 살겠는가?'
그는 마음을 굳히고 더욱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네 이놈, 그 따위 소리를 하면 내 마음이 약해질 줄 아느냐? 네놈의 말은 허점이 너무 많다. 수룡천을 친 삼존회가 무엇 때문에 조운평을 살려준단 말이냐? 난 그것부터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는 말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소덕상과 화자헌의 목에서 가는 실피가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소덕상은 말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대... 대인! 고정하십시오. 저... 희들은 오로지 진실을 아뢴 것입니다."
화자헌도 울먹이며 외쳤다.
"자... 잘은 모르나 삼존회의 수뇌들도 과거에 저희 영수 어른에게 은공을 입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래서 죽이지는 못하고......."
백리웅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을 약간 헐겁게 쥐었다.
"좋아. 일단은 믿어주지."
그 말에 소덕상과 화자헌의 낯빛이 다소 풀렸다. 하나 백리웅천의 다음 말에 그들의 안색은 금세 무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가난한 어민들을 노략질한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너희들은 마땅히 죽음으로 속죄해야 해."
"아이고, 대인! 우리들 대부분은 무공이 폐지되고 손발이 잘려 호위무사가 있는 배에는 노략질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치사한 짓까지 하게 된 것이지요."
"닥쳐라!"
백리웅천은 싸늘하게 내뱉었다. 하나 내심에는 약간 불쌍한 마음도 들고 허탈한 기분도 느껴졌다.
'제길, 너무 싱겁게 됐군.'
그는 차츰 경계심이 무디어지고 있었다. 본래 약간 오만한 구석이 있는 그가 아닌가? 그런 차에 수적들 대부분이 무공이 폐지되었거나 불구라는 말을 들으니 김이 빠지는 것 같았다.
"좋다. 말만 잘 들으면 너희들의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다. 이제 본채로 안내해라."
백리웅천은 그들을 붙잡아 일으켰다. 소덕상과 화자헌은 주춤주춤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걸어 온 숲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물가를 따라 걸어갔다.
백리웅천은 의아심이 들었다.
"왜 너희들이 나온 숲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리로 가는 거야?"
소덕상과 화자헌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이렇게 가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게다가 아까 그 길에는 짐승 똥이 가득해서 초행인 분은 발을 더럽히기 십상이지요."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백리웅천은 별 의심하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단검 두 자루를 그들의 등에 대고 갔으나 형식적으로 등 근처에 들고 있을 뿐이었다.
소덕상과 화자헌은 자신의 등에 검이 닿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부상이 심한 듯 다리를 후들거리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걸어갔다.
그들은 반다경 정도 물가를 따라서 걷다가 잡목덤불 속에 한 커다란 전나무가 있는 곳이 나오자 숲 속으로 들어갔다.
호르륵!
숲에서 두견새 울음 같은 새소리가 급박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먼 곳에서 마치 새끼리 호응하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좁은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새 울음소리는 간헐적으로 계속 울려 퍼졌다.
백리웅천은 그들을 뒤따라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무인도에 정착했으면 숲에 길이라도 내놔야지 이게 뭐야? 똑바로 가지 못하고 계속 삐뚤삐뚤 걷고 있으니......."
소덕상은 송구스러운 듯 답했다.
"죄송합니다. 전부 병들고 힘이 없다보니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어민들이 힘들여 낚은 고기를 털어먹고 살았겠습니까?"
화자헌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흘낏 보며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조금만 더 가시면 숲 속에 공터가 있습니다. 바로 그곳입니다."
백리웅천은 그의 등을 살짝 떠밀며 말을 받았다.
"알았으니 뒤돌아보지 말고 가기나 해."
"네. 알겠습니다."
두 청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걸음을 옮겨 놓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세 사람은 커다란 전나무가 밀집한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두견새와 휘파람새가 사는지 다른 곳보다 유달리 새 소리가 많이 들렸다. 앞만 보고 걷던 소덕상과 화자헌이 돌연 아차!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대인! 참! 아까 그것이......?"
백리웅천은 별 의심 없이 물었다.
"아까 뭐야?"
이때 놀랍게도 그의 좌측에 있는 전나무 가지가 스륵! 움직이고 있었다. 백리웅천은 그들의 느닷없는 말에 의혹을 느꼈다. 하나 자신의 뒤통수를 향해 굵직한 나뭇가지가 빠르게 접근하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은연중 방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빡!
백리웅천의 뒤통수에서 강렬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눈앞에 별이 왔다갔다하더니 하늘이 시커매지는 것을 느꼈다.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의 의식은 아득한 수렁으로 떨어졌다.
그는 풀썩! 소리를 내며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쓰러지자 요란하게 울어대던 새소리가 뚝 멎어 버렸다.
마치 그의 정신을 산란하게 하려고 울어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때 그를 때린 나무의 일정 부분이 흐릿해지더니 한 인영이 스르르! 빠져 나왔다. 인영은 나무와 똑같은 색의 옷을 입은 묘령의 소녀였다.
알고 보니 전나무는 반이 허물어져 나간 죽은 나무였다.
소녀는 절묘하게 그 속에 몸을 숨겨 한 그루의 나무로 위장했던 것이다.
그녀의 손에는 역시 같은 색을 칠한 굽은 철봉(鐵棒)이 들려 있었다. 나뭇가지로 오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멍청한 녀석 같으니......!"
소녀는 쓰러진 백리웅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죽거렸다.
그녀는 얼굴과 손의 피부에도 나무 색의 유약이 발라져 있었다. 색깔 때문에 묘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소녀의 얼굴은 미녀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얼굴형은 갸름했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고 가지런했다. 코는 마늘쪽 같이 귀여웠고 입술은 딱 알맞게 도톰했다.
그녀는 바로 수룡천 두령인 조운평의 외동딸 조연하(趙蓮荷)였다. 그녀는 올해 나이 십육 세의 꽃다운 나이로 수룡천 수적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존재였다.
소덕상은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정말 멍청한 녀석입니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안내해 주리라고 믿었다니......."
화자헌도 조소를 지었다.
"이런 녀석이 뭐하러......."
그의 말을 조연하가 차갑게 가로챘다.
"멍청하기는 당신들도 마찬가지야. 이까짓 녀석한테 붙잡혀서 끌려오다니......."
두 청년은 이마를 긁었다. 그때 우측 숲 속에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났다. 동시에 숲 속 여기저기에서 부스럭!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숫자 다섯을 셀 시간이 지나기도 전이었다.
우측 숲에서 조연하와 똑같은 색의 옷을 입은 한 중년인이 걸어나왔다. 넓적한 얼굴에 누리끼리한 피부를 가진 지극히 흔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입술을 기묘하게 오므릴 때마다 새소리가 나고 있었다.
중년인은 새소리를 멈추고는 소덕상과 화자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덕상과 자헌의 몸놀림은 민첩하지. 이들을 쉽게 때려눕힌 걸 보면 보통 놈이 아니란 뜻이야."
중년인은 수룡천의 부두령 조운풍(趙雲風)이었다. 그는 두령 조운평의 아우이자 조연하의 숙부였다.
그의 입이 닫히기 무섭게 사방에서 부스럭! 소리가 커지더니 여덟 인물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조연하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각 자랑이라도 하듯 각양각색의 새소리를 한 번씩 냈다. 그리고는 그들 중 키가 크고 깡마른 한 명이 말했다.
"덕상과 자헌은 길을 정확히 택해 제가 경계를 서는 나무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제가 어떻게 비상신호를 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조운풍과 조연하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숲을 이리저리 빙빙 돌며 아가씨와 부두령님이 몸을 숨길 시간을 끌었지요. 덕상과 자헌은 할 만큼 한 것이지요."
조연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봐. 그럼 왜 당신들이 애초에 저 녀석을 발견하지 못한 거야? 이 조그만 섬의 여덟 방위를 살피는 사람들이 대낮에 한 명이 상륙하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야?"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 나이 많은 자들에게도 서슴없이 반말을 하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외모는 고운데 표정이나 행동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말에 팔 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말도 못했다. 조연하는 눈을 사납게 흘기며 코웃음쳤다.
"흥! 보나마나 졸았던지 공상에 빠져서 시간만 헛되이 보내고 있었겠지."
처음 답했던 깡마른 청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우리들 잘못이 아닙니다. 어젯밤 두령님께서 강제로 먹인 술 때문에 정신이 아직도 몽롱해요. 게다가 취한 상태에서 운공조식까지 의무적으로 해야 하니 죽을 맛이라고요."
조연하는 미간을 좁히며 말을 받았다.
"알았으니까 어서 이 놈이나 꽁꽁 묶어서 끌고 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덕상과 화자헌을 보며 명했다.
"당신들은 섬 주위를 둘러봐. 녀석이 타고 온 배가 있을지도 몰라."
"존명!"
소덕상과 화자헌은 등을 돌려 물가를 향해 달려갔다.
새소리를 냈던 여덟 청년은 품에서 굵은 밧줄을 꺼내 백리웅천을 묶기 시작했다. 기고만장하게 섬으로 들어왔던 백리웅천은 무림의 최하수라는 수적들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조연하 등은 백리웅천을 묶은 다음 커다란 나무 작대기에 매달아 들고 자리를 떴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