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 왕의 개혁과 신앙의 변질(대하 15:1-19)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는지가 오래되었으나 그들이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께로 돌아가서 찾으매 그가 그들과 만나게 되셨나니”(대하 15:3-4).
하나님은 우리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셨고 우리들의 자유의지를 인정해 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 모두가 전인격적으
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신다.
아사(재위 기원전 911년경-870년경)는 분열 유다 왕국의 3대 왕으로 그의 재위 기간 내내에도 역시 전왕 아비야 때처럼 전쟁 중이
었으나 모두 승리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사
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대하 14:2-5).
“아사가 일찍이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
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그들이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는 자가 삼십만 명이요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이십팔만 명이라 그들은 다 큰 용사였더라 구스 사람 세라가 그들을 치려 하여 군사 백만 명
과 병거 삼백 대를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아사가 마주 나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전열을 갖추고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
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들을 아사와 유다 사람들 앞에서 치시니 구스 사람들
이 도망하는지라 아사와 그와 함께 한 백성이 구스 사람들을 추격하여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들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 의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매우 많았더라”(대하 14:7-13).
아사 왕의 일대기를 통해 신앙의 교훈을 받자.
1.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
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대하 15:1-2).
2. 하나님을 버린 결과는 고난의 연속이다.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는지가 오래되었으나 그들이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께로 돌아가서 찾으매 그가 그들과 만나게 되셨나니 그때에 온 땅의 모든 주민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하지 못하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 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고난으로 요란
하게 하셨음이라”(대하 15:3-6).
3.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신다.
“아사 왕 제 십오 년 셋째 달에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 마리와 양 칠천 마리로 여호와
께 제사를 지내고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
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소리로 외치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
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 15:10-15).
4. 하나님을 찾아 만난 결과는 전쟁이 없었다.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의 태후의 자리를 폐하고 그의 우상을 찍고 빻아 기
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그가 또 그의 아
버지가 구별한 물건과 자기가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그릇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이때부터 아사 왕 제 삼십오 년까지 다
시는 전쟁이 없으니라”(대하 15:16-19).
5. 불행하게도 아사는 말년에 망령되게 자만하여 하나님의 벌을 받아 병들어 죽었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
하였더라 아사가 왕위에 있은 지 사십일 년 후에 죽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대하 16:12-13).
아사의 재위 36년이 되는 해 이스라엘 왕국의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 라마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사는 성전과 왕궁
창고의 은과 금을 꺼내 아람 왕 벤 하닷에게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벤 하닷은 아사가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 온 이스라엘
을 쳐 이욘, 단, 아벨마임, 납달리의 모든 양곡 저장 성읍들을 쳐부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아사가 공격을 중지하고 돌아갔다. 그
러자 아사는 유다 백성들을 보내 바아사가 라마를 세우려고 남기고 간 쓰던 돌과 목재를 옮겨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다.
“그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
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
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
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
다 하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
대하였더라”(대하 16:7-10).
선견자 하나니가 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고 아사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나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아사는 재위 39년째에 병이
들었고 하나님이 아닌 의원들을 찾아 결국 죽고 말았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
하였더라 아사가 왕위에 있은 지 사십일 년 후에 죽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대하 16:12-13).
6. 결론: 하나님을 믿으려면 끝까지 잘 믿어야 한다.
“다윗 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의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 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그것을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대하 16:14).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1)
1. 들어가면서
성령의 이적적인 은사 가운데 방언의 은사가 있다. 이 은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히 매력있는 은사이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이 신기한 현상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한다. 어떤 교단은 방언의 은사를 받아야 비로소 참된 신자라고 말할 정도이다.
1900년대 들어서 미국의 교회들에 소위 ‘방언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창시자는 찰스 파렘(1873-1927)이라는 사람
이었다. 물론 어떤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것은 단지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복합적으로 맞물려
서 일어나는 것이다.
찰스 파렘은 성령세례를 받으면 자연히 방언을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언을 받아야만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
고 믿게 되어서 열심히 방언을 구했다. 당시 미국전체가 이 운동으로 들썩거렸는데, 미국의 언론들은 이 운동을 가리켜 신교와 구
교를 넘어선 제3의 세력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운동은 이후 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여 전세계의 교회들에 영향을 미쳤다. 이
때 우리 한국교회도 영향을 받아서 한때 성도들 가운데 방언을 사모하는 열기가 매우 높았다.
오늘날 방언 운동은 많이 시들어졌지만 이 은사에 대한 신비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이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
확히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방언에 대해 기록한 신약성경의 본문을 검토해야 한다. 사람들의 체험담은 뒤로 미루고
일단 모든 신약의 본문을 검토하자. 그런 후에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고로 듣는 것이 좋겠다.
2. 방언을 기록한 신약성경 본문
1) 막 16:17 :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서 방언을 언급한다.
2) 행 2:1-13 :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 때 사람들의 입에서 방언이 나왔다.
3) 행 10:44-48 :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하자 방언이 나왔다.
4) 행 19:1-7 :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방언이 나왔다.
5) 고전 12장 :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서 방언을 언급한다.
6) 고전 14장 : 방언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여기서 일단 마가복음의 기록은 예언이지 현실이 아니므로 제외하자. 그러면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만 남는다. 그런데 이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 전서의 방언이 다르다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은
사람들간의 언어 일치현상이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의 방언은 사람에 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전혀 다른 차원의 말이다.
이에 대해 조용기 목사는 사도행전의 방언은 ‘표적의 방언’으로서 성령세례를 받을 때 따라오는 것이고, 고린도 전서의 방언은 ‘은
사의 방언’으로서 성령충만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는 표적의 방언은 단회적인 것이나 은사의 방언은 반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표적의 방언을 보유한 사람이 은사의 방언을 같이 가지게 된다고 한다.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모든 신자가 방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성령 강림 사건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행전의 기록을 볼 때 성령을 받으면 반드시 방언을 했다는 것을 근거로 방언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세례라는
것 자체가 중생과 같은 시점에 일어나는 것이며,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은 역사상 단 한번의 사건이지 반복되는 사건이 아니라
는 개혁주의 전통을 따를 때 사도행전의 언어일치 현상은 오늘날 우리가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3. 사도행전의 방언
이제 사도행전의 방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2장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언어가 일치하는 이적이 일어났다. 사람
들은 이 일로 대단히 흥분했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언어일치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지 신기해했
다. 그들의 놀라는 모습이 2:1-13에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왜 오순절 성령강림 때 언어가 일치하는 현상이 일어났는가? 그것을 우리는 바벨탑 사건과 관련지어서 이해해야 한다. 창세기 11
장에는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탑을 쌓아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였다. 이때
하나님은 인간들을 심판하셨다. 그의 심판의 도구는 언어의 혼잡이었다. 주님은 인간들의 언어를 나누셔서 그들을 흩으셨다. 언어
가 다르면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다. 그래서 인간들은 나누이게 되었다.
오순절에 언어가 일치되어서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 대화가 일시적으로 통했던 것은 바벨탑의 심판이 회복되었음을 의미하
는 것이다. 사실 성령님의 오심은 회복의 사건이다. 주님은 과거에 인간들로부터 떠나시겠다고 하셨으나 이제 인간들 속에 거하겠
다고 하신다. 바벨탑 사건으로 심판을 받은 인간은 성령님의 오심으로 회복되었다. 이때의 표적이 언어의 일치였다. 말이란 인간
사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말이 안 통하면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이 없다. 천국의 공동체는 서로 말이 통하는 공동체이다. 계시록 7장
과 14장에는 그들이 한 자리에서 같은 언어로 주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에 언어의 일치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이방인을
서로 굉장히 적대시했으나 이제는 모두가 한 형제요 한 자매라는 생각이 싹트게 되었다. 그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우리는 10장과 19장의 방언을 이해할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
인 구분 짓는 선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언어일치는 예수님의 재림 이전까지는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 때
로 한번도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
은 또다른 이적일 뿐이지 사도행전의 방언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의 방언, 즉 언어일치 현상은 어떤 특정한 나라의 말이라기 보다는 그냥 언어가 서로 일치한 기적이며, 또한 일시적이었
지 지속적이지 않았다. 계시록 7장과 14장에는 많은 민족들이 동시에 한 자리에 모여 주님을 찬송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천
국에 가면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나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의 언어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언어의 일치를 회복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며, 천국의 그림자로 이해해야 한다.
4. 고린도 전서의 방언
우리가 이제 주의 깊게 살펴보려는 것은 고린도 전서의 방언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은사로 받는 방언은 고린도 전서의 방언이다.
이 방언의 은사는 인간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고린도 전서 14장을 통해 방언에 대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1)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2절 상).
이로 보아서 이것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분명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2)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2절 하).
이 부분은 조금 난해하면서도 중요하므로 14절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자.
3)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3-5절).
고린도 전서 14장은 예언과 방언을 대조하면서 예언의 우월성을 말한다. 이는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둘은 모
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동일한 은사이다. 다만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차원에서 볼 때 예언이 방언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한편, 여
기서 예언이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다.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므로 개인에게
매우 유익하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익한지를 말하기는 성경 자체로 볼 때 어려우나 방언을 말하는 것은 분명 유익하
다. 그러나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
신다. 바울도 모든 사람이 다 방언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따라서 억지로 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
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이다. 빌리 그래함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으나 현재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전도자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4) 방언은 통역이 필요하다(6-13절).
만일 방언통역이 있다면 예언과 같이 교회의 덕을 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기능상 같다는 차원이 아니라 중요도에서 같다는 것이
다. 즉, 방언 자체가 신비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역하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 덕을 세운다는
의미이다.
5) 방언은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14절).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2절에서도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14절에서 방언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의 구조를 3개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방언을 3분설과 연결시킨다. 그들은 인간이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방언은 혼을 거치지 않고 영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여기서의 영은 인간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다. 물론 “나의 영”이라는 표현 때문에 약간 혼동이 되겠지만, 이는 성령을 내가 모셨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다. 14장 전체에서 영이란 대체로 성령을 가리킨다. 영어 성경(N.E.B.)은 이를 잘 번역했다. 거기에는 “내 속에 있는 성령께서는 기도하시나 내 지성은 쉬고 있다.”로 번역되어 있다.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결국 성령의 말씀이 입으로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입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방언을 하는 것은 사람
이 통제할 수 있으나 방언의 내용은 사람이 통제할 수 없다. 자신도 무엇을 말했는지 전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15절). 15절의 강조점은 오히려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즉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가지
고 기도하는 것이다.
6)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된다(22-33절).
방언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하지만 방언은 개인적으로 조심해서 해야지 온 성도가 전 교회적으로 해서
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23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미쳤다고 오해할 것이다. 우리는 건전하고 깨끗한 신앙생
활을 해야 한다. 방언은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 해야 한다(통성기도를 할땐 예외). 그것이 방언 받은 자들이
가장 주의할 점이다.
5. 방언의 유익점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1)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 없으나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신다(고전 14:2).
2) 방언을 통해서 비밀을 말함으로 마귀의 생각(요 13:2)과 세상 생각(고후 4:4)을 소멸할 수 있다.
3) 눌린 영이 놓임을 받는다(눅 21:34-36).
4) 방언(성령의 교제)을 통해서 사람의 교제에서 벗어나게 한다(고전 14:2, 사 2:22).
5)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영감을 유지시키며, 자신을 채우도록 하신다(고전 14:3-4).
6) 영으로 예배하고 영으로 기도하게 만든다(요 4:24, 고전 14:26,28).
결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 뿐 아니라 성도 전부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했다(고전 14:5). 따라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라
는 성경말씀처럼 이왕이면 방언 은사도 받아 개인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