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참새구이
서리가 내리기 전에 부랴부랴 밭에서 뽑아낸 김장배추를 트럭 한가득 싣고
‘다녀오마.’하고 서울로 떠나신 아버지는 눈이 몇 번 내리고 나서야
새그물 몇 개를 들고 돌아오셨습니다.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와 대전에서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린 아버지는
노름을 좋아 하셔서 가진 직장과 재상을 모두 탕진하고 나서 야반도주 하다시피
대전에서 양구로 가셨다고 합니다.
아무 연고도 재산도 없는 그곳에서 남의 밭을 빌려 농사를 시작하였으나
약간의 돈만 생기면 여지없이 노름병이 도져 몇 날 동안 집을 비우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배추를 팔면 어느 정도 빚잔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던 어머니의 바램과
새 옷 한 벌 입을 수 있을 것이라는 우리들의 기대는 검정 새그물 몇 개에
무참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참새를 잡아 팔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더라. 서울에서는 포장마차 술안주로
참새가 없어서 못 판다더구나.”
그날부터 아버지를 따라 논 한가운데의 눈을 치우고 나뭇가지를 길게 꽂은 후
바닥에 지푸라기를 깔고 새그물을 치고서 새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새까맣게 하늘을 날던 참새 떼가 한꺼번에 십여 마리씩 그물에 걸릴 때면
정말 신이 나서 추운 줄도 모르고 새를 그물에서 떼어내곤 했습니다.
추위에 달달 떨면서 하루 종일 잡은 새들은 참새, 멧새, 종달새 등등
종류도 다양하게 수십 마리, 아니 백여 마리씩 되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화롯가에 둘러 앉아 모두 새 털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벌건 화롯불에 참새를 구워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호랑이 같은 아버지가 무서워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털만 뜯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읽으셨던지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시며
“참새란 놈이 소 등짝에 앉아 이렇게 말했단다. ‘네 고기 열점보다
내 고기 한 점이 더 맛있다.’ 그렇게 참새고기가 맛있단다.”
그러시면서 참새 몇 마리를 석쇠에 얹어 화롯불에 올려놓으십니다.
이내 참새는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우리는 모두
화롯불 위의 참새가 익기를 기다리며 꼴깍꼴깍 침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참새가 노랗게 잘 익으면 아버지는 큰형님부터 한 마리씩 나누어 주시고
우리는 작은 참새를 가슴부터 조심스럽게 발라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약간의 소금을 찍어 먹는 그 참새구이의 맛은 지금까지 맛 본 그 어느 고기보다도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참새구이도 ‘내다팔아 돈을 만들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엄명에
배불리 먹지 못하고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작은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서
뒤뜰의 무릎까지 차는 눈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의 유일한 보관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인 당시에 시골에서 참새고기를 돈을 주고 사먹는 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참새고기의 판로를 찾지 못하였고
겨우내 눈 속의 항아리만 자꾸 늘어갔습니다.
이윽고 겨울이 지나 눈이 녹으며 참새 항아리가 몸뚱이를 드러내자 아버지는 할 수 없이
항아리를 꺼내 자식들과 화롯불에 둘러 앉아 참새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참새구이는 며칠 저녁 우리들의 영양 많고 맛있는 간식거리가 되었습니다만
참새고기로 노름에서 날린 배추 값을 복구하리라던 아버지의 꿈은 화롯불위에서
타오르는 참새구이의 연기와 함께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던 시절에 시골에서 너무 시대를 앞질러 가셨던 아버지.
이듬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은 평생 아쉬움과 한이었을 것 같은 안타까움으로
자식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2012년 12월 18일. 갑규니
첫댓글 아 그래서 울친구 갑균 이가 글을 잘쓰는구나
참새고기를 몇항아리 먹은탓으로 ^**
이북아버지에 대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하곤 반대넹 난 경남아버지에 이북엄마인뎅
남남북녀사이에서 태어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