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1-19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KyNaNSE78nM
기독교 역사에 남은 설교자 중에 스펄전이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에 인생의 깊은 회의감에 빠졌습니다. 그는 갈 길을 잃고 방황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는 시골 길을 가다가 작은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었습니다. 예배 인원이 대여섯 명인 작은 교회였습니다. 목사님도 없어서 구두 수선공인 교인이 설교했습니다. 그는 설교 중에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라는 소리만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스펄전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거기 청년, 방황하고 있습니까? 길을 모르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에 스펄전은 ‘아, 나는 길을 잃은 사람이구나! 예수님 바라보자.’라고 결단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격과 운명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을 늘 깊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게 되어 마음과 인격과 삶이 온유하고 겸손해지고 충성스러워집니다.
사랑하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생각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생각도 더 많아집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자꾸 그 사람이 생각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입니다.
1.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히브리서 3장에서 말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우리가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1)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다(1절).
1절에 보니 예수님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고백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믿음의 고백을 할 때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가 부딪히고 있는 사조 중에 하나가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일한 길이 아니라 많은 길 중에 한 길이고, 많은 길 중에 탁월한 길이라는 주장입니다. 복음적인 기독교는 이 시대의 사상적 경향인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고백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성막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문이라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믿음의 도리의 사도이십니다.
2)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1절).
1절에 보니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해서 속죄 사역을 담당했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의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의 사역은 불완전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우리의 진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을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히 4:16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기서 그러므로는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므로라는 의미입니다.
시간관계상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고 핵심적인 것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①자기 피로 이루신 속죄 사역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히 9:12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속죄 사역을 위하여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속죄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친히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자신의 피료 이루신 사역입니다.
②영원한 속죄 사역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의 속죄 사역은 불완전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같은 제사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히 9:12을 다시 보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얼마나 오랫동안 효력이 있습니까? 영원한 효력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효력이 떨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③단번에 이룬 속죄 사역
히 9:12을 다시 보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은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완전한 사역이기 때문에 반복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단번에 끝내신 사역입니다.
엡 3:12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감사하게도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을 통해서 담대함과 확신을 하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3) 만물의 창주자이시다(3-4절)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모세보다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집들이 있는데 집마다 지은 이가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는 문맥상 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시는 분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모으고 싶습니다. 자동차 왕인 헨리 포드가 하루는 길을 가다가 고장난 자동차 때문에 씨름하고 있는 한 사람을 도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었기 그 자동차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울 국제 무용 콩쿠르’의 심사 위원장이었던 영국 국립 발레단 예술감독 웨인 이글링(W. Eagling, 61세)이 한 번은 오디션 심사 위원을 했습니다. 그때 탈락한 한 발레리노가 이글링 씨에게 “고작 10분 봐놓고 어떻게 무용수를 평가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불평하는 발레리노에게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0분도 길다. 1분만 봐도 안다.” 그는 전문가였기에 1분만 봐도 재능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아십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실만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사람이 견고해집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능력으로 나를 붙들고 계시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문제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 신실하신 분이시다(2-6절).
2-6절에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신실하셨습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믿을만한, 신실한, 신뢰하는, 신임하는, 믿는’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아버지께 신실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실신했고 예수님은 아들로서 신실하셨습니다. 6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가 주님의 집입니다. 주님은 주의 집을 위하여 신실하셨는데 우리가 주의 집이니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신 것입니다.
중국 제나라에 도둑이 있었는데 대낮에 금방에서 금을 훔치다 붙잡혔습니다. 관원이 “사람이 많은데 왜 금을 훔쳤느냐?”라고 묻자 도둑이 대답했습니다. “금덩어리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이 도둑은 금에 현혹되어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집중력이 뛰어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집중력은 놀랍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오직 우리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그 일을 위하여 낮아지셨고. 그 일을 위하여 고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우리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만 바라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신실하심 때문에 구원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에 신실하셨습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1) 신앙의 공동체성을 지키라(1절)
믿는 도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ὁμολογία(호몰로기아 homologia)라는 말로서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혼자 믿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믿고, 함께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공동체적 생활이 중요합니다. 절대 혼자 신앙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여기 보면 신앙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해서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인하여 완고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거룩함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공동체성을 상실한 신앙은 가짜 아니면 크게 병든 신앙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머리는 주님이시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몸에 붙어 있는 지체입니다. 그러니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몸으로 비유하면 몸에서 떨어졌던지 아니면 다른 지체와 교통이 안 되는 병든 지체입니다. 그러니 가짜든지 아니면 심각하게 영적인 병에 걸린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교인이 이사를 가서 새로운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사람과 잠시 대화를 나눴습니다. “새 교회 생활은 어떻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뭐가 그리 좋습니까?”, “제가 교회에 나가든 나가지 않든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어 좋습니다.” 그 교인은 전에는 목사님 눈치 때문에라도 주일에 빠질 수 없었는데, 큰 교회에 가니까. 놀러가고 싶을 때 놀러가고, 교회에 가고 싶을 때 교회에 가면 되니까 좋았다는 것입니다. 몸의 지체는 다른 지체와 상호작용을 해야 건강한 것인데, 그분은 다른 지체와 단절된 것을 좋다고 생각하니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한 10여명 모이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막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열을 내는지 침까지 튀기며 말했습니다. 그 중에 어떤 분이 열을 내며 말하던 그분에게 식사기도를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하신 분이 정말 깜짝 놀라셨답니다. 조금 전까지 얼굴 빨개지며 열을 내던 그 분이 “자비하신 하나님~”하며 엄숙하게 기도하는데, 놀래서 눈을 뜨고 그 분의 얼굴을 보셨답니다. 인간관계가 깨진 기도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건강한 신앙은 인간관계가 바로 된 신앙입니다. 공동체성이 있어야 건강한 신앙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인들의 신앙은 공동체성을 무시하는 나홀로 신앙이 많습니다. 성경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교회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힘써 모이고 함께 교제해야 합니다. 히 10:25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마지막 시대의 징조 중에 하나가 모이기를 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힘써서 모이고 힘써서 예배하고 힘써 교제해야 합니다.
2) 주의 음성을 들으라(7절).
7절에 보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으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전지전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의 말은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과신해서는 안 됩니다. 군대에서는 종종 독도훈련을 실시합니다. 지도 한 장을 주고 정해진 장소를 찾아서 모이게 하는 훈련입니다. 어느 날 독도훈련이 시작되었는데 마침 임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소대장이 오랫동안 군생활을 하던 고참들의 조언을 뿌리치고 자기만 믿고 따르라면서 소대원들을 데리고 출발했습니다. 온 밤이 다 새도록 헤매다가 드디어 어느 산에 도달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고참들이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다고 몇 번씩 이의를 제기했지만 신참 소대장은 끝까지 자기 말이 옳으니 자기만을 믿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병사들이 거의 기진맥진하여 지쳐갈 때쯤 한 산의 봉우리에 도착했습니다. 소대장은 거기가 모이는 장소라고 확신했는데 가서 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참 사면을 돌아보던 신참 소대장이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아닌가벼~”
우리는 사람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답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은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것은 성경대로, 성경에 없는 것은 성령의 인도대로’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며 모르는 길을 갈 때, 조수석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길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상대와 대화를 하다가 내비게이션의 소리를 듣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하나님의 음성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것은 성경대로, 성경에 없는 것은 성령의 음성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복된 삶이 됩니다.
3)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8-11, 13절).
8-11절을 보면 히브리서기자는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들면서 수신자들에게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광야에서 마음이 완고했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3절에서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인하여 마음이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도자요 보호자요 공급자가 되셨지만 육신을 입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길과 먹는 것 때문에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광야 생활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아픕니다. 하나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시고, 참된 안식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마침내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과정을 고통으로만 받아드려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안식도 누리지 못했고, 결국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비유로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한 여행자가 나무로 개의 모형을 멋지게 조각하는 예술가를 만났습니다. 여행자는 예술가가 조각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리 개들을 잘 조각할 수 있소?” 예술가가 대답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개가 아닌 부분은 다 깎아주는 거죠”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깎아내야 할 부분을 깎아내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으로 받아드렸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루심이라는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 중에도 완악하게 반응하지 않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져야 진짜 안식을 맛보고 진짜 성경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성공과 만족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성공이 목적이 되면 진정한 안식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의 허무함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커비 퍽켓 이라는 메이저리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야구 중에서 최고의 야구는 미국의 메이저리그입니다. 메이저리거가 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박찬호, 추신수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는데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기를 꿈꿉니다. 매년 30개 팀이 우승을 놓고 경쟁하는 메이저리그는 우승팀을 ‘World Champion’이라 부릅니다. 그들에게는 메이저리그에서의 최고가 곧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최고의 리그에서 우승을 경험하는 것은 최고의 선수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1987년 메이저리그 우승은 미네소타 트윈스가 차지했습니다. 당시 미네소타 팀에는 커비 퍽켓(Kirby Puckett)이라는 외야수가 있었습니다. 미네소타가 우승을 차지했던 날은 커비 퍽켓도 어린 시절부터의 꿈을 이루었던 순간이었습니다. 후에 어느 기자가 미네소타의 유격수 그렉 가니에게 우승했던 날 라커룸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기자의 질문을 받은 가니에는 선수들이 서로 껴안고, 소리 지르고, 서로에게 샴페인을 끼얹으며 트로피를 쳐들었던 우승 당일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특별한 기억을 말해주었습니다. 평상시 열정이 넘치던 커비 퍽켓이 단 10분 정도 축하 분위기에 합류했다가 아무도 없는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가니는 퍽켓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퍽켓은 슬픈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전부라면, 인생은 너무도 허무해…”
인생의 참된 안식은 세상적인 성공으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안식은 주님 품 안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드러워야 안식을 누립니다.
4) 오직 믿음으로 살라(12, 14-19절).
12절에 보면 믿지 않는 마음이 악한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집니다. 14절부터 보면 우리는 믿음을 확실하게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가나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안식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이론적으로 어떻게 하면 노래를 잘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악보대로 음을 내고 악보대로 박자를 맞추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 노래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악보대로 음이 안 나온다는 것이고, 악보대로 박자를 못 맞춘다는 것이고, 아름다운 소리가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악보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주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범사를 주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 멸망하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자기중심적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시골에 믿음 생활을 하는 집사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분들이 송아지 두 마리를 얻어 잘 키웠는데 송아지가 너무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이 부부는 그것이 감사해서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기로 맘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마리 송아지 중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어 버렸어.”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우리가 어느 것을 하나님 것으로 정한 일이 없는데 당신이 그것이 하나님의 송아지인지 어떻게 알아요.”, “척보면 알 수 있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어. 우리 송아지는 괜찮아.” 세상 사람들은 범사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 자신이 좋아하는 쪽으로 해석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자기 지향이 아닙니다. 하나님 지향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예수님을 늘 깊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게 되며 온유하고 겸손해지고 충성스러워집니다.
1.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다(1절).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고백을 하도록 보내주신 분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2)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 번에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3) 만물의 창주자이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맞게 안배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 신실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신앙의 공동체성을 지키라. 교회는 유기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2) 주의 음성을 들으라.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도 성경과 성령의 음성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3)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은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늘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시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4) 오직 믿음으로 살라. 믿지 않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집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들고 믿음의 고백을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사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 번에 이루신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께 죽도록 신실하셨습니다. 나는 함께 예배하며 함께 교제하며 신앙의 공동체성을 지키겠습니다. 나는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따르겠습니다. 나는 언제나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겠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