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살아내며, 12월의 일기, 결코 잊힐 수 없는 날
내 인생에 있어, 결코 잊힐 수 없는 날들이 있다.
내 태어난 날인 생일이 그렇고, 내 검찰수사관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날이 그렇고, 내 결혼한 날이 그렇다.
그러한 날들이 있어, 내 늘 행복하다 하는 오늘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도 참 많다.
내가 기뻐했던 날들도 있고, 노한 날들도 있고, 슬픈 날들도 있고, 즐거운 날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잊힐 수 없는 날이 하루 있다.
아내에게 있어 소중한 추억의 날이기 때문이다.
45년 전으로 거슬러, 1978년 6월 4일 그날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 나이 서른하나이고, 아내 나이 스물다섯으로, 우리 결혼한 날 바로 그 다음날이 곧 그날이다.
낮 12시에 서울 도심의 서울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난 뒤에, 나도 신혼여행이랍시고 아내와 함께 부산 영도 태종대로 떠났었다.
그때의 신혼부부들이 다들 그랬듯이, 우리도 처음에는 일주일 내내 여행을 한 작정이었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야야, 신혼여행은 하룻밤만 자도 되는 거다. 내일 올라 온나. 우리도 신부하고 좀 놀아보게. 다들 바쁘게 사는 세상에 언제 또 보겠냔 말이다.”
대구 둘째 고모님이 이제 막 신혼여행을 떠나려고 예식장을 나서는 내게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속삭인 그 말씀을 거스르기가 어려웠다.
그 고모님에게 빌린 돈으로 결혼식을 치른 참이었기 때문이다.
신부인 아내를 설득시키고 또 설득시키고 해야 했다.
결국 아내가 수긍을 했다.
그래서 부산 영도 태종대를 둘러보고 부산시내 호텔에서 딱 하룻밤을 묵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끝내고, 집안어른들이 모여 있다는 내 고향땅 문경점촌 우리 집으로 되돌아오고야 말았다.
아내는 섭섭했겠지만, 집안어른들은 기쁨의 도가니에 빠져버렸다.
결혼식이 있었던 전날에 이어 한낮부터 또 한 번의 잔치판이 벌어졌고, 집안어른들이 그 잔치판에서 어울리고 있을 때, 나는 아내를 데리고 점촌 그 앞들을 지나 영강 자갈밭으로 향하는 녹슨 철길로 나가, 그 철길도 걸어보기도 하고, 보리밭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보리밭 그 들판에서 마을 뒷산 돈달산도 올려다보면서, 내 다닌 점촌국민학교는 저기고 중학교는 여기라는 등, 아내에게 내 고향 풍경을 실컷 선보였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어둑해지는 들판 길을 아내와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왔더니, 잔치판은 그때까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우리들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집안어른들 다들 반색이 가득했다.
특히 취기로 불콰해진 얼굴인 아버지의 반색이 더 유별났다.
“야야, 이리 좀 와봐라. 내 노래 한 곡 부를 테니, 함 들어봐라.”
아내를 향한 아버지의 청이 그랬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노래가 시작됐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며느리가 보고 싶어 발길을 돌릴 수 없네.’
그 즈음에 히트를 치고 있던 젊은 가수 최병걸의 ‘난 진정 몰랐었네’라는 노래를 패러디해서 노래 한 곡을 부르셨다.
아내로서는 생전 처음 듣는 시아버지의 노래였다.
그렇게도 며느리 사랑이 깊었던 우리 아버지시었으니, 아내는 그날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바로 엊그제인 2023년 12월 24일 일요일로 성탄 전야의 날이었다.
소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 2층의 단골집인 ‘일번지 식당’에서 모처럼 저녁을 같이 했다.
바로 그 소중한 자리에, 내 중학교 동기동창인 이강국 친구도 함께 자리를 했다.
전주 이(李)씨 같은 집안으로, 아내가 평소 ‘오라버니’라고 존칭을 하면서 가까이 지내온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이날의 저녁 끝에 우리를 또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버스를 타고 두 코스를 달려가야 했는데, 바로 봉천동 어딘가의 ‘동작 스탠드바’라는 주점이었다.
열린 공간에서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하는 곳이었는데, 막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 순간에 들려오는 노래가 귀에 익었다.
‘난 진정 몰랐었네’라는 그 노래였다.
자리에 앉으면서 아내가 내게 귀띔으로 하는 말이 이랬다.
“아버님 생각이 나네요. 저를 그렇게도 좋아하시고 챙겨주셨는데, 그때가 참 그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