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거처 [김선향]
너는 고산지대에 핀 말나리꽃의 줄기다
빈집 절구독에 고인 빗물에 비치는 낮달이다
붙박이별을 이정표 삼아 비탈길을 가는 나귀 걸음 걸이다
너는 무명천에 물들인 쪽빛이다
노인정 앞 평상에 내려앉은 후박나무 잎사귀다
- 여자의 정면, 실천문학사, 2016
여름의 끝 - 장석남
여름의 끝에서 물소리가 수척해진다
초록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내려간다
나리꽃과 다알리아를 어깨에 꽂고 다녀간 먹구름도 이제
어느 집 내전內殿의 자개장에서나 보리라
노예와 같이
땀을 쏟아가며, 진땀을 닦아가며
타고난 손금을 파내던 일을 이젠 좀 쉬리라, 여울목
여울물 소리가 수척해진다
- 뺨에서 서쪽을 빛내다, 창비, 2010
회귀 -비망록 [김경미]
누가 또 어디쯤서 나를 저버리나 보다
마음 속 햇빛 많은 나뭇잎들 폭설처럼
떨어져 내리더니
수박향내 애틋하던 저녁 산책길이 돌변했다
이번엔 남의 집 대문앞이 아니다
누드화 같은 이 바다로 바다로 누가 또 날 버리나 보다
잡을 것 오직 은박지 같은 물뿐이다
소리치는 것도 부끄럽다 망망대해 혼자뿐인데
누군가 나타나도 원수가 될 것이다 기다림 간절했으므로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이렇게는 아니었다 이렇게는 아니었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하라고
현생의 나를 만난 내 생에 사과라도 남기고 싶었으나
물천장 위 비바람에 섞여 내리는 주황빛 저녁이
성당의 색유리 가득한 성가 같아
붉은 점박이 나리꽃처럼 걸핏하면 끼얹어지는 이 침수
이 상실감을,
하긴 나는 사랑하던가 떠나고 없는 고요할 물 속
묵묵함을 내심 더 바랬던가 늘 그런 식이었던가
- 쉬잇, 나의 세컨드는, 문학동네, 2006
데레사氏 꽃가게 [정두리]
마르면서 붉어지는 분홍 장미는
물구나무로 매달린 채
벌써 한 달째다
한 웅큼 잽싸게 따라와 뿌려진 바람과
알맞게 고루 배인 햇살로 피어난 꽃도
여기서는 가끔 기가 죽는다
시들어빠진 마른 꽃이 팔려나가는 곳도
이곳이다
반쯤 피다 만 나리꽃
하루에 두세 번 피고 지는 알라딘 꽃
꽃들은 절대로 소리내며 웃지 않는다
근시인 데레사氏
꽃말 따위로 부질없는 야담을 만들지 말라고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요즘은
제 냄새 풍기며 사는 법을 배우노라고
피는 꽃은 다르지만
지는 꽃은 닮았더라고
꽃들이 못 알아듣게시리
가만가만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의 노래는 [신석정]
나의 노래는
라일락꽃과 그 꽃잎에 사운대는
바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너의 타는 눈망울과
그 뜨거운 가슴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저어 빨간 장미의 산호빛 웃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항상 별같이 살고파하는 네 마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흰 나리꽃이 가쁘도록 내쉬는 짙은 향기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꽃잎이 서로 부딪치며 이뤄지는 죄 없는 입맞춤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소쩍새 미치게 우는 어둔 밤엘랑 아예 찾지 말라.
나의 노래는
太陽의 꽃가루 쏟아지는 七月 바다의 푸르른 水平線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