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농고를 다니다
입학금과 지급품
내가 모교에 입학한 것은 1940년 4원 5일이다. 당시 입학금은 150원(圓)이었다. 150원이면 소 한 마리
값으로 기억되는데, 현재의 화폐 가치로 볼 때 4~500만원은 되리라고 생각된다.
150원의 입학금을 납부한데 대해 많은 물품이 지급 되었다. 먼저 의복은 교복에 운동복과 작업복이 지급
되었으며, 교복은 동복과 하복 두 가지로 국방색이고, 옷깃은 세웠으며 상의의 윗 주머니는 오른쪽 가슴
에도 있는데 단추로 끼우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일본군의 군복 그대로인 것이다. 왼쪽 옷깃에는 노란
금속으로 로마숫자 Ⅰ·Ⅱ·Ⅲ·Ⅳ·Ⅴ로 학년 표지를 했으며 국방색 각반도 지급되었다.
군복차림의 교복
모자는 두 백선이 그어진 교모와 전투모 그리고 작업모가 지급되고 신은 워커와 운동화가 지급되었다.
전시에 쇠가죽이 귀한 때여서 워커는 돼지가죽으로 된 것이었으며, 밴드도 가죽 밴드가 아닌 국방색
실로 짠 것이었다. 다음 교과서 일체와 등하교 때 짊어질 국방색 배낭도 지급되었다.
우리는 교복에 각반을 치고 워커에 밴드를 매고 배낭을 짊어지고 교모를 쓰고 다닌다.
농기구는 삽, 괭이, 호미, 무쇠낫, 왜낫 등 다섯 가지가 지급되었다. 우리는 그 농기구 손잡이에 각자
자기의 이름을 칼로 새겼다. 주머니 칼끝을 숫돌로 갈아서 이름을 새기는데, 호미 자루와 무쇠낫 자루는
소나무로 되어 있어서 그런대로 이름을 새겼으나, 삽 자루와 괭이 자루는 원낙 굳은 나무여서 손가락을
베기도 한다.
농기구는 학년별로 가지런히
지급된 물품 중 작업복과 작업모는 학년별로 된 갱의실(更衣室)에 각자 이름을 써 붙이고 걸어두고,
농기구도 학년별로 된 농기구실에 가지런히 걸어 둔다.
한창 성장기에 있는 우리는 2~3학년만 되어도 교복이 작아서 새로 사 입어야 하지만, 작업복만은
아무리 작아지고 떨어져도 새로 사 입지 않고 기워서 입는다. 우리는 매일 실습을 하고 때로는 험한
산에 올라 가서 퇴비용 풀도 베어 오기 때문에 실습복은 쉬이 떨어진다.
그러면 학교 앞 재봉틀집에 가서 기워 입는다. 그것도 두 번 세 번 계속 기워 입는다. 4학년, 5학년
선배들의 실습복은 누덕누덕 깁고 또 기워서 마치 거지의 옷 같다. 그것도 상거지 옷이다.
선배들은 깁고 기운 상거지의 누더기 실습복에 춘농 남아의 기개(氣槪)를 느끼는 모양이다.
다음에 신입생 전원을 본인의 의사를 물어 반반씩 검도부와 유도부로 나누어 검도복과 유도복을
나누어 준다.
이와 같이 많은 물품이 지급되지만, 150원이 워낙 큰돈이었던 모양으로 그 외에 동창회비와 수학
여행비까지 적립이 되었다.
병영(兵營) 같은 학교생활
우리는 등교할 때 군복과 같은 모양의 국방색(카키색) 교복에 각반을 치고, 상의 허리에 밴드를 매고
배낭을 짊어진 차림으로 교문을 들어선다.
교문에는 위병소가 있어서 상급생이 눈을 부릅뜨고 등교생들의 복장 상태를 일일이 점검한다.
이때 우리는 틀림없는 군인이다. 다른 게 있다면 군모 대신에 흰색 두 테의 교모와 계급장 대신에
로마숫자로 된 학년 표지를 상의 깃에 부착한 것뿐이다. 교실에 들어가서 교모 대신에 전투모로 갈아
쓰고, 배낭을 멘 채 무기고에 가서 목총(木銃)을 메고 운동장에 도열한다.
진짜 총인 99식 총은 100정뿐이므로 5학년생 몫이고 나머지는 전부 목총을 멘다.
사열(査閱)과 분열식
우리는 학년별로 4열 종대 2 개 소대씩 전부 10 개 소대가 운동장 가득히 도열한다.
5학년 상급생 중에서 교대로 대대장이 되어 지휘도를 차고 나와 전교생을 지휘한다. 전면에는 교장과
교유(敎諭=교사) 그리고 배석 장교가 늘어선다.
도열을 마치면 교장이 대대장의 안내로 1학년부터 5학년까지 순차적으로 사열을 하고 이어서 5학년
부터 분열식을 한다.
이것이 하루의 시작이고, 교장의 일장 훈시가 끝나면 비로소 총과 목총을 무기고에 격납하고 학습에
들어간다. 일본은 한국 내 중등학교에 대한 군사 훈련을 매우 중요시해서 학교마다 현역장교를 배속
해서 군사 훈련을 강화했다. 우리 모교에는 하므로(葉室) 대좌와 오노테라(小野寺) 대위 그리고 세라
(世良) 준위 등 세 명이나 배치되었다.
대좌는 우리나라 대령에 해당되는 장교인데 우리 모교에는 이처럼 대좌도 배속 되었으니, 일제가 중등
학교의 군사 훈련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가위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는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사격 연습과 야간 행군 심지어 글라이더 훈련까지 받았다.
글라이더는 ‘춘농기 제2호’로 명명된 것으로, 우리는 그걸 타고 고도 10m까지 오르는 활공(滑空) 연습
을 했다.
금강산 수학여행
우리는 입학할 때부터 매월 수학 여행비를 적립했다.
그런데 우리가 다닐 무렵은 세계 2차대전 막바지여서, 미국 잠수함이 부산 근해에까지 출범하여 부산
에서 일본까지의 관부 연락선이 취항을 하지 못해 일본에 대한 수학여행은 중단되고 금강산에만 갔었다.
말이 금강산 수학여행이지 이것도 군사훈련의 연장이었다.
우리는 총을 메고 서울 용산에 있는 일본군 25부대에 입소하여 1주일간 훈련을 받고, 기차 편으로 내금강
(內金剛)으로 가서 1박한 다음 금강산으로 오른다.
금강산은 세계 제1의 명산이지만 경치를 관상하기보다는, 중무장을 하고 급한 경사면을 오르니 땀이 비
오듯 하고 숨이 확확 찬다. 그래도 옥류담이나 보덕굴 같은 절경을 보며 정오 무렵 비로봉 정상에 오른다.
여기서 땀을 식히며 1만 2천의 영봉(靈峰)을 굽어보며 산정에 있는 구메산장(久米山莊)에서 도시락을 먹고
산을 내려간다. 여기서부터는 외금강이다. 내려갈 때에는 힘이 덜 들으므로 절경을 감상하며 내려간다.
금강굴을 지나 구룡연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저녁때가 다 되어 온정리에 도착하여 반류가꾸(萬龍閣)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우리는 호텔 지하에 있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했다. 말로만 듣던 온천에서 처음으로 목욕을 한 것이다.
다음날엔 만물상까지 가서 괴면암과 삼선암 등 금강산의 절경에 탄성을 올렸다. 이때만큼은 무장을 하지
않은 채여서,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금강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온정리 반류가꾸 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고, 3박 4일 간의 금강산 수학여행을 마치고 기차 편으로
경원선의 안변과 서울의 성동역을 거쳐 돌아왔다.
기숙사 생활
나는 하숙 생활을 하다가 3학년 되던 해 가을에 기숙사에 입사를 했다.
그때까지는 입사 여부를 학생들의 자율에 맡겼었는데, 웬 일인지 자택에서 다니는 학생 외는 전원을 입사
시켰다.
기숙사에 들어가던 날, 나는 지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들어갔다. 그러자 저녁때가 다 되어서 늦게 입사
한 학생은 전부 기숙사 광장에 집합하라는 전갈이 왔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나가보니, 나처럼 늦게
입사한 학생은 10여명이나 되었다. 전부 모이자 요장(療長)인 고갑진(高甲鎭) 선배가 검도용 죽도(竹刀)
를 들고 나오더니 양팔 간격 일렬횡대로 서도록 한 다음, 등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도록 하고, 죽도로
등허리를 한 대씩 힘껏 내리친다. 한동안 허리를 못 쓸 정도로 매우 아팠다.
당시 하급생들은 상급생들로부터 기합 받는 게 다반사였으나, 나는 몸이 왜소한데다 상급생에게 고분
고분하게 굴었으므로 야단맞는 일이 없었는데, 입사 시간을 어겨 처음으로 기합을 받은 것이다.
기숙사는 한 방에 다섯씩 합숙하게 되어 있고, 이런 방이 10 개가 한 동을 이루고 전부 5 동이므로 수용
인원은 모두 합해 250 명이었다. 방마다 상급생이 실장이고, 전체에 요장 한 사람을 두었는데, 이미 기술
한대로 5학년 고갑진이 요장으로 있었고, 그 위에 사감 선생이 기숙사생을 지도감독하고 있었다.
콩깻묵 밥을 씹으며
내가 입사하던 해는 1942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일제는 인적 물적 자원을 전쟁을 위하여 동원했으므로, 식량을 비롯한 모든 생활필수품은 배급제였고,
배급 물량이 적어서 물자가 매우 귀한 실정이었다.
처음에는 쌀 배급도 해주더니 전쟁 말기에는 쌀이나 보리는 구경도 못하고 깡수수 밥을 해주었으며,
일요일 점심은 멀건 좁쌀죽을 쑤어 주었다. 나중에는 수수도 없었는지 콩깻묵 밥을 해주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만주에서 생산된 콩으로 기름을 짜서 군용으로 쓰고, 거기서 나온 깻묵을 들여다가 한국사람
식량으로 배급해 주었는데, 기숙사에서도 이것으로 밥을 해주었던 것이다.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은
영양가가 있을 리 없고, 게다가 먼 만주에서 실어오느라 많은 시일이 걸려 변질되어 있어서 밥맛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영양가나 맛이 문제가 아니었다. 많이만 먹어서 포만감(飽滿感)만 있으면 좋겠는데 워낙
적게 주기 때문에 배는 항상 쪼록쪼록 하였다.
근로 봉사
당시 학과 공부는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논밭에서 실습을 했다. 학교실습지에서의 실습은 그것이
학습의 연장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4~5 학년 무렵에는 전쟁
말기여서 그랬는지, 오전의 학과 수업도 아예 제쳐두고 아침부터 외부에 나가서 일을 하기가 일쑤였다.
학교에서는 그것을 근로봉사(勤勞奉仕)라고 했는데, 주로 우두에 있는 산림묘포 또는 중도에 있는
뽕나무 묘포나 대마(大麻) 밭에서 일을 하고, 때로는 학교 옆에 있는 형석선광장(螢石選鑛場)에서
작업을 했다.
영양가 없는 콩깻묵 밥을 먹고 고된 근로봉사를 하니 몸은 천근만근이요 기진맥진해 진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 10리 20리 길을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기숙사로 돌아와 콩깻묵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방으로 들어가면 저녁 점호를 받기 전에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다. 영양실조에 걸린 나는 아침에
일어나 세면을 할 때는 으레 코피를 쏟았다.
지금도 귀에 익은 스승의 이 한 마디
한창 성장기에 있던 모교 재학 5개년은 우리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크나큰 영향을 미친 시기
였다고 생각된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이어서, 당시 선생님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우리의 삶에 많은
교훈을 주었다.
일본 북해도대학 교수로 있던 미국인 클라크 교수가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불후(不朽)의 명언
‘소년이어 큰 뜻을 품어라’만은 못하더라도, 60 여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는 말이 있다.
비로봉에 떨어진 빗방울
교련 교관에 세라 후사타로(世良 房太郞) 준위가 있었다. 이분은 나이가 비교적 많은 분이었는데, 고된
훈련을 하다 쉬는 참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 정상에 비가 내리는 것을 상상해 보아라. 빗방울이 비로봉 동쪽에 떨어지면
동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갈 것이고, 서쪽에 떨어지면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갈 것이다.
그 떨어지는 지점은 불과 몇 Cm도 되지 않겠지만, 그 종착 지점은 동해와 황해 수백 리나 멀어질 것이다.
그 빗방울은 약한 바람에도 영향을 받고, 하다못해 날으는 새의 날갯짓 영향으로도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제군들의 운명도 이와 같다. 지금 제군들의 마음가짐 또는 사귀는 친구의 여하가 제군들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니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물도 씹어서 마셔라
한여름에 목이 마르면 냉수를 벌떡벌떡 들이킨다. 당시 생리위생 담임에 나카무라(中村)라는 선생이 있었
는데 이분이 우리의 물 마시는 것을 보고 ‘물을 그렇게 마시지 말고 잘 씹어서 마시면 배탈이 나지 않아서
좋다.’라고 한다.
우리 옛 설화에도 급히 달려온 나그네가 물을 달라고 하면, 우물가의 아낙네가 바가지에 물을 따른 후
버들잎 두세 잎을 띄워서 준다. 나그네는 버들잎을 후후 불면서 물을 마시게 된다. 물을 씹어서 마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근자에는 유아에게 모유 대신에 우유를 먹여 키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른들은 우유를 먹으면 대개
설사를 하기 때문에 어른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우유를 잘 먹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물을 씹어서 마시는 습관이 배여서 우유도 씹어서 마시기 때문에 배탈이 나질 않는다.
제분기(製糞機)가 되지 마라
교무주임으로 있던 후지타 요시오(藤田 好男) 선생이 한 말이다.
이 말은 분(粉)자와 분(糞)자의 음이 같은 것을 이용해서 재분기(製糞機)를 제분기(製粉機)로 착각을 하도록
반 웃음 소리로 흘린 말이지만, 여기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심오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속된 말로 ‘밥만 먹고 똥만 싼다’와 같은 말로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나의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보람된 삶을 위해 노력해 왔다.
클라크 교수의 Boys, be ambitious만은 못하지만, 대학 진학도 못한 내가 나름대로 덜 후회스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제분기(製糞機)가 되지 마라.’라는 교훈이, 부단히 나를 채찍질 한 게 원동력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감사 합니다.
카페지기
첫댓글 종욱친구 아벗님의 글을 읽으며 글솜씨는 없지만 나도 예전부터 어려운 시기의 상황을 글로 써둘걸
그랫다는 생각이 듭니다.글로 읽으면 사진보다 훨씬 더 상상력이 생기고 현실감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