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이는 좋은 습관 히브리서 10:25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오늘 설교는 필요에 의해서 지난 2015년에 한 설교를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회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고, 사람을 만드신 후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좋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만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짝으로 하와를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창 2:18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사람이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혼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신앙생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모임은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교회에 꼭 등록해야만 하는가? 꼭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해야만 하는가?” 물론 개인적으로도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산 속에 들어가서 기도생활을 하며 혼자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수도사가 되어 세상 등지고 혼자 깊은 산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공적인 예배는 개인적인 예배의 삶과 구별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성도들이 모이기를 원하시고 공동체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드리도록 하셨을까요? 제가 많은 답을 할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에서는 성막을 세우게 하셨고, 가나안에서는 성전을 세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적인 예배를 원하셨기 때문에 절기를 정해주셔서 성전에 모이게 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 교회를 세워주신 것과 주일성수를 명하신 것도 성도들이 모이는 것을 원하시고 공동체의 예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에 2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모이는 장소와 방법과 예배의식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없애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모여야 하는가? 왜 예배당에 모여서 공적인 예배드리기를 힘써야 하는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히브리어로 ‘카할’인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 모여 있는 회중’을 뜻합니다.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인데 ‘불러냄을 받은 거룩한 무리’를 말합니다. 즉, 교회란 어떤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리 즉 공동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조직과 체계를 갖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임은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모임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회는 자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마귀는 교회의 모임을 막는 것입니다. 지금 정부가 문제인 것은 다른 곳은 모여도 괜찮은데 교회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중에 장례식 때문에 벽제 화장장에 갔습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그날만 그랬겠습니까? 사람은 날마다 죽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바글바글할 것입니다. 거기도 교회처럼 인원제한을 해야죠. 그런데 거기는 그냥 둡니다. 지하철도 출퇴근 시간에는 바글바글합니다. 그런데 인원제한을 하지 않습니다. 코스트코에 갔습니다. 거기도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1만2천명이 들어가는 곳도 19명 만 모이라고 하더니 99명까지 된다는 것입니다. 제 지인 목사님이 프랑스에서 목회를 합니다. 이번에 한국에 왔는데 3천 명 교회에서 설교를 하셨답니다. 담임목사님과 찬양단 19명이 예배를 드렸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저는 교회에 혜택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형평성이 있어야지요. 저는 교회의 모임을 막으려는 마귀 역사라고 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머리를 중심으로 지체가 모여서 연결되고 결합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모임은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모임이 깨진다면 교회는 자멸합니다. 한 지체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 지체는 죽음이죠. 그런 의미로 생각하면 교회 공동체에서 분리되는 사람의 신앙은 절대 유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영적인 것들이 무너집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가 무너집니다.
1) 말세에는 믿음이 무너집니다.
눅 18:8에 보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환난과 유혹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믿음이 무너져서 믿는 자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노아의 때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육신적인 일들로는 바쁩니다. 그리고 그 바쁜 일들 때문에 주님에게서 관심이 멀어지고 믿음이 무너지며 그러다가 어느 날 주님이 오시면 가슴을 치며 후회할 것입니다.
2) 말세에는 사랑이 무너집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마 24:12에 보면 주님이 마지막 때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여기서 말세에 식어지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육신적이고 쾌락적인 사랑과 이기적인 자기 사랑은 더 많아지겠으나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은 무너지는 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3) 말세에는 영적인 모임이 무너집니다.
본문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관이 있는데 마지막 때에는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분문을 통해서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욱 모이는데 힘을 쓰라고 말씀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은 온통 영적으로 잠들어 있게 될 것입니다. 사 29:10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이 시대가 그런 시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무리 깊은 어두움 속에 있어도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남은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하는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열처녀의 비유에 보면 마지막 시대는 누구나 영적인 잠을 자는 시대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나 다 졸고 자는 시대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령한 공동체 모임인 예배에 잘 오지 않는 교인들입니다. 영적인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데 오히려 있는 기름도 까먹고 있는 교인들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예배에 잘 참석해서 기름을 준비한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시대는 미련한 자들도 졸고 자고 슬기로운 자들도 졸고 자는 시대입니다.
공적인 예배는 말세를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공급 받는 시간입니다. 자동차로 말하면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말세는 잠드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영적으로 잠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들은 모이기를 힘쓰고 영적인 능력을 공급 받아서 깨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3. 모이는 습관이 인생을 복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고 말합니다. 습관은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잘못된 습관은 인생을 망치고 좋은 습관은 인생을 복되게 만듭니다.
예배도 습관입니다. 본문에 보면 모이는 것도, 모이기를 폐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교인들을 관찰해보면 누구든지 예배의 습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 만나듯이 준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주일을 위하여 준비기도하고, 복장도 깨끗하게 준비하고, 헌금도 미리 준비하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나아옵니다. 좋은 습관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여름에 보면 교회를 수영장으로 알고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수영장에서나 입을만한 옷을 입고 교회에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복장을 하고 교회에 오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복장을 하고 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욕탕에 가는 사람의 옷차림을 하고 오기도합니다. 부모님에게 인사드리러 갈 때도 그런 차림으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예를 갖춰야 합니다. 적당한 옷 차람은 상대에 대한 예의입니다.
특정한 장소에서는 거기에 합당한 예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이 복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요즘 유럽에서 한국 사람들이 욕을 많이 먹고 있는데 이유는 옷차림 때문이랍니다. 한국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아웃도어 옷을 입는답니다. 관광지도 아웃도어, 식당도 아웃도어, 심지어 박물관이나 클래식 공연장에도 아웃도어 옷을 입고 들어가서 욕을 먹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대충 옷을 입고 오는 것은 합당한 예가 아닙니다.
예배의 습관을 고쳐보십시오. 예배 시간마다 자리를 지키고, 시간을 지키고, 하나님께 합당한 예를 갖추고, 준비된 예배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한 번의 예배로 전염병으로 7만 명이 죽었던 환난을 막았습니다. 엘리야는 한 번의 예배로 바알신앙으로 더러워진 이스라엘을 정화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예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4. 모임 중에 주님이 임재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 18:20을 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루터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면 교회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왜 하필이면 주일입니까? 왜 하필이면 교회입니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임을 원하시고 우리의 모임에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모이나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죠. 주님이 우리가 모여서 예배할 때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믿고 모이는 것입니다.
5. 성령 받은 사람들의 새로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행 2:46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셨던 초대교회 때는 교인들이 날마다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예배당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서도 모였고, 집에서도 모였고, 유대교의 회당에서도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교회를 가까이 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열심히 교회에 와서 적극적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봉사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면 그렇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새로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교인들이 공적예배에 결석한다고 해도 그것을 책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믿기 때문인데 성령께 사로잡힌 사람들이 공적인 예배를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기쁜 마음으로 성도들의 모임에 나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진짜 그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은 성령의 강권을 받으며 성령의 강권을 받기 때문에 영적 모임인 예배에 힘쓴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교회를 가는 것이 귀찮았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나니 날마다 교회를 가도 좋았습니다. 교회가 내 집보다 더 좋았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영적인 새로운 본성이 생긴 것입니다.
시 84:10을 보면 고라 자손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고라는 광야에서 모세를 대적하다가 죽음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라의 자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주의 종을 대적하면 망하는구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면 망하는구나’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자손손 하나님의 전에서 문지기를 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문지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세상에서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전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얼마나 좋은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천 배나 좋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고백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은혜 받지 못하면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사모하고 예배를 사모하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들의 새로운 본성입니다.
6. 믿음의 동역자를 얻기 때문이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인 한 사람이 교회를 열심히 출석했었는데, 어느 날부터 열심이 식어지고 교회를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그 교인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 교인이 벽난로를 쬐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기도한 후에 불을 물끄러미 보다가 집게로 벽난로에서 시뻘건 불덩어리를 하나 꺼내 놓았습니다. 그러자 곧 불이 꺼지더니 숯덩이가 되었습니다. 그 교인은 목사님의 이런 모습을 이상히 보고 있다가 깨닫고 고백하기를 “목사님, 아무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 삼일 밤 기도회 때부터 열심히 나가겠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아무리 시뻘건 숯덩이도 따로 떼어놓으면 꺼져 새까만 숯이 되고 맙니다.
믿음이 독실하던 신자라도 교회를 자꾸 빠지면 신앙의 불이 약해집니다. 마침내는 불이 꺼진 병든 신자가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자라도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면 믿음이 뜨거워지고 날로 성장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니 모임에 열심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모이기에 힘쓰는 사람은 믿음이 잘 자랐습니다. 모임은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3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성도의 교제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믿음의 동역자를 얻는 것입니다.
조상호 목사님은 전도서 4:9-12 말씀을 가지고 성도간의 접속을 말씀했고, 성도간의 접속을 통한 4가지 축복을 말씀했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
1) 협력 효과
성도들이 서로 접속하면 ‘협력 효과’가 있습니다. 전 4:9을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것은 두 사람이 연합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공식은 1+1=2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1+1=2가 아니라, 10도 될 수 있고, 100도 될 수 있고, 1,000도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일반 수학공식과 다릅니다. 신 32:30은 이 성경의 원리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세상의 원리로는 한 사람이 1,000명을 쫓을 수 있다고 한다면, 두 사람이 2,000명을 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원리는 다릅니다. 두 사람이 2,000명을 쫓는 것이 아니라, 10,000명도 쫓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연합을 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협력하면 엄청난 일들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2) 위로 효과
성도들이 서로 접속하면 ‘위로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고,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그 때 내 곁에서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려움 속에서도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곁에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좌절할 수 있습니다.
어느 성탄절, 우체국에서 한 할머니가 길게 늘어선 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우체국 직원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슨 도움이 필요하세요?”, “네, 우표 두 장 살 거예요.”, “할머니, 우표는 저기 스탬프 기계에 돈을 넣으면 나오는데요.”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아요. 그런데 저 기계는 아가씨처럼 저에게 잘 지내셨느냐, 요새 허리 아프신 것 어떠시냐, 손자들 잘 있느냐고 묻지를 않아요.” 바로 이것이 성도의 교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들은 교제하기 원하고 위로받기 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은혜를 받아 위로를 얻고,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교제를 나누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전 4:10을 보겠습니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주위에 자신을 일으켜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 주위에 자기를 일으켜 줄 사람이 없으면 화가 임하게 되지만, 주위에 자기를 일으켜 줄 사람이 있으면 많은 위로를 받고 다시 한 번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넘어질 때 여러분들을 일으켜주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을 만나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풀지 마시고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을 위로할 수 있는 믿음의 친구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3) 의지 효과
성도들이 서로 접속하면 ‘의지 효과’가 있습니다. 전 4:11을 보겠습니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이스라엘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합니다. 낮에는 불볕더위로 뜨겁지만, 밤에는 기온이 매우 낮게 떨어집니다. 그 때 서로의 체온으로 따뜻한 밤을 보낼 수 있다면 굉장한 힘이 되겠죠. 반대로 옆에 아무도 없으면 추운 밤을 떨면서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주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큰 의지가 됩니다.
열왕기상 17장부터 19장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서 기근이 끝날 때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또 여인의 아들이 죽었지만, 다시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또 갈멜산 꼭대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또 그가 기도하자 3년 6개월 동안 오지 않던 비가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곁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의지할 만한 사람이 그 곁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승리를 거둔 그는 오히려 영적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일으켰던 엘리야였지만, 그를 도와줄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여러분들은 주위에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친구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처럼 나 홀로 신앙 생활하다가 어려움을 당하지 말고, 더불어 신앙 생활함으로 힘들 때마다 위로를 받기 바랍니다.
4) 보호 효과
성도들이 서로 접속하면 ‘보호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도 있고, 어려움을 만날 때도 있는데 서로 힘을 모은다면, 서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전 4:12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 사람이 가게를 오픈하면 주변에 있는 현지인들의 가게에서는 ‘이제 망했다’라고 한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와 게임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가게에 비해 일찍 문을 열고 늦게 문을 닫고 더군다나 친절하기까지 합니다. 가격을 내리거나 사은품을 주는 등, 다양한 이벤트와 새로운 아이템으로 고객 유치에 정성을 다하기 때문에 주변 가게의 손님들이 한국사람 가게로 몰려든답니다. 그런데 더욱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는 그 다음입니다. 한국 사람의 가게 옆에 다른 한국 사람이 같은 업종의 가게를 열면 현지인들은 ‘이제 살았다’고 한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의 두 가게가 각자 많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서 과도한 경쟁을 하다가 둘 다 망하거나, 아니면 다른 업종으로 변경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서로 경쟁만하면 망합니다. 서로 경쟁도 해야 하지만 또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상생철학‘입니다.
성경은 상생의 원리를 말씀합니다. 시 133:1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서로 연합하는 것이 선한 일이고, 연합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오늘은 잘 모이는 좋은 습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회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람은 모여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교회를 중심으로 모임에 힘써야 합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모임을 파괴하는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역사를 거슬러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교회에 모여야 할까요?
1.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영적인 것들이 무너집니다.
1) 말세에는 믿음이 무너집니다.
2) 말세에는 사랑이 무너집니다.
3) 말세에는 영적인 모임이 무너집니다.
3. 모이는 습관이 인생을 복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배도 습관입니다. 모이는 것도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은 복된 인생을 만듭니다.
4. 모임 중에 주님이 임재 하시기 때문입니다.
5. 성령 받은 사람들의 새로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였습니다.
6. 믿음의 동역자를 얻기 때문이다. 성도간의 믿음의 동역을 통해서 얻게 되는 효가가 있습니다.
1) 협력 효과
2) 위로 효과
3) 의지 효과
4) 보호 효과
성경을 들고 믿음의 고백을 하겠습니다. “나는 말세에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겠습니다. 나는 교회의 모임을 통해서 복된 인생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모임 중에 주님이 임재하심을 믿습니다. 나는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강권대로 모이기를 힘쓰겠습니다. 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믿음의 동역자를 얻습니다. 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협력 효과를 얻습니다. 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위로 효과를 얻습니다. 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의지 효과를 얻습니다. 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보호 효과를 얻습니다.”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