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상당기간 케이블TV로는 고화질(HD)TV를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KBS, MBC, SBS, EBS 등의 지상파TV 방송사가 주당 20시간 이상씩 송출하고 있는 HD프로그램은 볼 수 있습니다. UHF 실내 안테나를 수상기에 장착해 볼 수도 있고, 지상파TV 직접 수신이 곤란한 지역에서는 케이블TV망을 통해 볼 수도 있습니다. 케이블TV망을 통해 지상파의 HD프로그램을 본다면, “케이블로 보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습니다만, 케이블TV는 그저 지상파TV 신호를 그대로 전달하는 구실만 할 뿐, 케이블TV 자체가 HD를 지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얼마 전 전국의 주요 케이블TV사업자들은 2006년 6월까지 필요한 1년치 분량의 디지털 케이블TV 셋톱박스 100만대의 납품업체를 선정했습니다. 바로 삼성전자와 휴맥스입니다. 케이블TV방송사들은 공동구매 형식으로 이 두 업체에서 디지털 케이블TV를 시청하는데 필요한 수신기(셋톱박스)를 공급받기로 한 것입니다. 올해 주요 케이블TV사업자들이 디지털로 전환하면서 디지털 셋톱박스를 구매하는 것인 만큼 공공구매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각자 따로 구매하는 것 보다 함께 모여서 공동구매를 하면, 구매가를 크게 낮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번 공동구매에서 삼성전자와 휴맥스가 케이블TV방송사업자들에게 납품하는 가격은 대당 15만원 선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디지털케이블TV 셋톱박스가 20만원대 후반이었으니, 공동구매를 통한 납품가 하락의 목적은 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이 글의 주제로 삼으려는 내용은 이번에 케이블TV방송사들이 구매하는 셋톱박스가 HD(High Definition)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 디지털 방식의 셋톱박스입니다만, 고화질이 아니라 표준화질(SD: Standard Definition)에 맞춰진 저렴한 수신기입니다. 케이블TV가 디지털화되면, 케이블TV 채널의 영화와 스포츠 경기를 고화질로 웅장하게 시청할 것이란 기대는 앞으로 상당기간 갖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국 1300만 가입자를 자랑하는 케이블TV가 디지털로 전환되면 무엇이 달라질 까요. SD급 디지털 케이블TV는 오늘날의 아날로그 케이블TV와 비슷한 수준의 해상도에 좀더 깨끗한 수준의 디지털TV가 될 것입니다. 잡음이 줄어들어 깨끗한 것이지, 아날로그보다 화질 자체가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HD와 SD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HD는 화면비(화면의 가로와 세로비율)가 16대 9이며 화질은 35mm 영화 수준입니다. HD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은 DVD 보다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DVD보다 낮은 화질의 SD는 그저 지금의 아날로그TV 보다는 잡음이 없어 조금 선명해진 4대 3의 화면입니다. TV 1개 채널(6MHz)로는 1개 HD 채널을 담을 수 있는데, 똑같은 TV 1개 채널로 SD는 5~6개 정도 넣을 수 있다고 하니, HD와 SD의 화질차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케이블TV사업자들이 누가 봐도 확연하게 좋은 HD를 마다하고, SD로 가는 까닭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는 케이블TV에 HD콘텐츠를 공급할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가 없습니다.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의 자회사인 스카이HD가 위성방송에 24시간 HD채널을 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SD급 채널 5~6개를 포기하면서 HD급 채널 1개를 운영할 만큼 HD채널의 인기가 높지 않다고 케이블TV는 스스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 HD채널을 송출하느니, SD급의 여러 채널을 방송함으로써 광고수익을 기대하는 게 속편할 수도 있습니다. HD로 보여주건, SD로 보여주건 광고는 노출도가 중요하겠지요. 채널이 많을 수록, 광고수익도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케이블TV사업자들은 셋톱박스 공급가격을 높여 HD제품을 구매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HD셋톱을 구매하면 SD급보다 구매가가 높아지겠지요.
저는 여기서 앞뒤가 맞지 않는 우리나라 디지털 방송정책의 단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 4년간의 지루한 논쟁 끝에 지난해 7월 타결된 지상파디지털TV 전송방식 논쟁에서 정부(정보통신부)가 일관되게 견지한 주장의 근간은 '고화질(HD) TV의 멋진 세상’이었습니다. 고화질이어야 디지털 전환의 의미가 있고, 고화질이어야 아날로그와 분명하게 차별화되며, 고화질이어야 국내 디지털TV 수상기의 세계 시장 진출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미국식과 유럽식 논쟁에서 실내수신과 이동수신율 등 다양한 쟁점이 있었지만, 고화질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디지털 전환의 목표였고, 그래서 우리나라의 지상파 디지털TV 정책은 ‘온리 HD'(Only HD)를 실현하는 쪽으로 맞추어 졌습니다. 즉 TV 1개 채널에 할당된 6MHz를 쪼개지 않고, MPEG-2라는 비디오 압축규격을 적용해 19.39Mbps의 비트 레이트로 온전하게 가로 16, 세로 9의 영화 같은 TV서비스를 국민에게 안겨주자는 것이 국가 디지털TV 정책의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국민들은 이런 HD영상을 볼 수 있는 디지털TV를 사고 있습니다. 한때 1000만원이 넘었던 대형 LCD 디지털TV의 가격이 쑥쑥 떨어지면서 이제는 어지간한 중산층 가구에서도 16대 9의 디지털TV를 사고 있습니다. 앞으로 보급형 DTV가 널리 판매되면, 이제 많은 국민들이 16대 9의 HD 화면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케이블TV가 SD라고 해서, 앞서 말씀드린대로 케이블TV 가입자가 지상파TV의 HD프로그램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파TV 신호(MPEG-2)를 디지털 케이블TV 신호(QAM)로 바꾸지 않고, 지상파 신호 그대로 흘려보내는 ‘바이 패스’(By Pass)방식으로 케이블TV 가입자에게도 지상파TV의 HD신호가 들어갑니다. 그러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은 실내용 UHF안테나를 설치해도 디지털TV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 음영지역에서는 유료방송인 케이블TV에 가입해야 지상파TV의 HD방송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KBS 1TV의 HD프로를 보기 위해 KBS 수신료도 내고, 지역의 케이블TV 수신료도 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지역의 케이블TV는 지상파TV의 HD방송을 가입자 모집의 마케팅 수단(즉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반면, 공영방송인 KBS는 지역 케이블TV에 또다른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되는 셈입니다.
사실, 국가 디지털TV 정책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방향성 결핍’입니다.
디지털 방송의 3가지 형태, 즉 지상파 디지털 TV, 위성방송(처음부터 디지털방송이었습니다), 디지털 케이블TV는 기술방식과 화질이 제각각입니다. 지상파DTV는 ATSC-8VSB라는 미국방식으로 ‘HD온리’를 추구하고, 위성방송은 유럽기술(DVB-S)로 ‘SD와 HD의 혼합형’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고, 케이블TV는 ‘SD온리’로 향하고 있습니다. 양방향 서비스를 위한 데이터 방송도 지상파는 ACAP, 위성은 MHP, 케이블은 OCAP이라는 각기 다른 규격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방식이야 어떻게 됐든, "디지털TV라 함은 지금의 아날로그TV보다 5~6배 생생한 고화질 화면의 TV"라고 알고 있는 많은 국민들, 특히 디지털TV를 사면 HD가 나오는 줄 알고 있을 적지 않은 국민들을 혼돈스럽게 만든 책임은 누가 져야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