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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게시판(마야 이동희) 스크랩 환경과 문학
이쁜이(나) 추천 0 조회 90 11.02.09 02:28 댓글 12
게시글 본문내용

 

환경과 문학

                                                                                                                                                            ─’생태시’의 흐름과 성격

                                                                                                                                                                                                         송용구 <시인·문학평론가>

 

1. 생태시의 발생과 전개

 

 

서유럽에서는 1950년대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을 인간의 생존과 결부시켜 현실적 사회문제로 쟁점화시킨 詩들이 지속적으로 발표되었다. 이러한 시의 유형을 ‘생태시(‥Okolyrik)’ 또는 ‘생태학적 시(‥okologische Lyrik)’라 한다. ‘생태시’라는 명칭은 19세기 말에 동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처음 제시한 개념인 ‘생태학(‥Okologie)’과 시(Lyrik)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으며, ‘생태학의 시(Lyrik der ‥Okologie)’를 줄인 낱말이기도 하다.

생태학이란 특정한 유기체와 주변 환경간의 연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동?식물과 물, 공기, 흙의 상호작용을 연구함으로써 생물체들간의 자연적 연관 시스템을 밝혀내고 種의 생존 조건들을 규명하는 학문인 것이다. 이러한 생태학적 인식구조와 생명존중의 철학, 인간중심주의를 지양하는 생명중심주의,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 환경보호 운동의 여러 이념이 ‘생태시’의 정신적 基底를 형성한다. ‘생태시’는 이같은 학문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에

근거하여 인간?동물?식물이 생태계에 변화에 대해 어떠한 반응과 어떠한 질적 변화를 나타내는가를 사실적인 언어로써 재생해내는 현대시의 한 장르이다.

 

 

자연에서 소재를 끌어온다는 점, 그리고 인간 대 자연의 관계를 언어화 한다는 점에서 ‘생태시’는 기존의 전통적 ‘자연시’를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생태시’는 기존의 ‘자연시’와 공유점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자연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 있어서 큰 변별점을 갖는다. 객관적 시각으로 자연의 실상을 인식하여 자연 대 인간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점과, 또한 전통적 ‘자연시’의 낙관적 자연인식과 자연친화적 세계관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생태시’는 비판적 ‘자연시’이자 새로운 ‘자연시’라 할 수 있다.

서유럽에서 이러한 유형의 詩가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던 지역은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의 독일어권 국가들이다. 특히 독일에서는 새로운 ‘자연시’의 유형이 1950?60년대의 태동기를 지나 1970년대에 들어 문단에서 뚜렷한 조류를 형성하게 된다. 1950년대 중반서부터 1960년대 중반에까지 약 10여 년 동안 다그마르 닉?한스 카퍼스?한스-위르겐 하이제?마르가레테 한스만?울리 하르트 등 소수의 시인들에 의해 환경오염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발표되었지만, 이 시기는 아직 ‘생태시’의 맹아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문단에서 ‘생태시’라는 명칭이 제기되지 않았고, 이 같은 시의 유형에 관한 개념 규정도 없었으며 이론화 작업이 부재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환경문제를 문학화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하여 작가들의 연대의식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생태시’는 아직 문학의 장르로 확립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도 없는 단계에 있었다.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학생들의 反戰 운동과 정치비판은 환경오염의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정당의 주도로 전개된 환경보호 운동에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하면서 부터 1970년대 독일의 환경정화 노력은 전국민적 차원에서 급속히 확산되어 나갔다. 이같은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1970년대의 ‘생태시’는 1950, 1960년대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작품들과 더욱 다양해진 주제의식을 보여줌으로써 질적?양적인 면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급격한 사회변화의 양상이 ‘생태시’의 활성화를 낳은 것이다. ‘생태시’의 활성화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로서, 1980년에 생태학자이자 문학 연구가인 페터 코르넬리우스 마이어-타쉬(P.C. Mayer-Tasch)는 자신의 논문 ?생태시는 정치적 문화에 관한 기록물?에서 처음으로 ‘생태시 ‥Okolyrik’와 ‘생태학적 시 ‥Okologische Lyrik’라는 명칭을 제기하였다. 그는 ‘생태시’의 개념에 관하여 명확히 규정하지는 못하였지만, ‘생태시’에서 나타나는 현실비판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진단함으로써 ‘생태시’의 정치적?사회참여적 속성을 가시화시키는 문학적 의의를 남겼다. 특히 1981년 뮌헨의 베크(C.H. Beck) 출판사에서 마이어-타쉬에 의해 편찬된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Im Gewitter der Geraden. Deutsche ‥Okolyrik 1950-1980?는 1970년대 독일 ‘생태시’의 부흥을 증명해주는 문학적 성과물이었다. 이 사화집은 독일어권 국가들의 유일한 생태사화집으로서 1950년 이후 1980년 에 이르는 약 30년 동안의 ‘생태시’의 성격과 생명주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는 귀중한 시집이다. 마이어-타쉬는 통독 이전의 동독 및 서독?스위스?오스트리아 출신 시인 92명의 ‘생태시’ 206편을 주제의식과 메시지에 따라 제1부에서 제8부까지 다양하게 분류해놓았다. 이 사화집에 실린 작품들 중 약 120여편의 시가 1970년 이후 1980년까지 약 10년 동안에 발표된 ‘생태시’라는 사실, 또한 이 시기에 발표된 ‘생태시’들이 70년대 이전의 ‘생태시’에 비하여 더욱 다양한 주제의식과 더욱 강렬한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1970년대는 독일을 포함한 서유럽 ‘생태시’의 활성화 시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1970년대에 들어 비로소 ‘생태시’는 작가들의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환경운동과의 相補的 관계를 형성하면서 하나의 문학운동으로 상승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생태시’의 형성은 서구에 비해 약 30년 정도 뒤늦게 이루어졌다. 서유럽에서 생태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1970년대까지도 한국의 ‘생태시’는 맹아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한국의 시단은 전통적 서정시풍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박두진 시인의 시집 ?인간밀림? 등 소수의 작품만이 생태의식과 문명비판 의식을 드러낸 바 있다. ?성북동 비둘기?는 도시개발로 인해 인간의 마을에서 자연이 분리되어가는 현상을 고발함으로써 한국문학사상 최초의 생태시 혹은 환경시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문명비판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 박두진 시인의 인간밀림은 자연과 문명의 괴리에 대한 현실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연의 원초적 생명감을 회복하려는 지향성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신경림, 이하석 등 소수의 시인들만이 환경오염의 문제를 작품의 소재로 수용하였을 뿐, 환경 및 생태문제에 대한 작가들의 연대의식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이 안고있었던 정치·경제의 특수한 조건과 모순된 사회구조에서 기인한다.

1960년대 한국 사회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주도하에 경제개발계획이 무리하게 추진됨으로써 산업발전의 템포가 급속히 빨라졌고, 이에 비례하여 대량의 산업 폐기물들을 무제한으로 강물과 흙 속에 배출하는 행위들이 속출하여 환경오염의 속도는 가속을 얻게 되었다. 그 당시에 군사정권의 지배이데올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개발’·‘발전’·‘풍요’의 환상에 도취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난의 극복에만 전력했던 까닭에 한국 사회는 환경문제에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1970, 80년대에도 환경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될 수 없었다.

 

 

1970년 이후의 시대는 관행처럼 이어져온 정경유착·관치금융·독점자본 육성·임금착취·수입개방 등으로 인해 경제의 불평등구조가 고착된 시대였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원천봉쇄되고 고문과 탄압이 끊이지 않는 인권유린의 시대였다. 이러한 현실상황 속에서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가열되고,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국민들의 관심은 정치적 이념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에 전폭적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70년대엔 유신독재체제에 맞서서, 그리고 80년대엔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민중의 생존권을 사수하려는 투쟁이 한국의 현대사를 피로 물들였던 시대였다. 진보적 지식인들과 하층민중에만 국한되었던 저항이 80년대 이후엔 중산층까지 끌어안게 되는 국민적 저항의 힘으로 분출되나 보니, 대중은 물론 문인들까지도 환경파괴의 문제로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한국 문학도 민중·민주주의 운동과 맥락을 함께하였던 까닭에 독자의 눈길을 환경오염의 현장으로 인도하지 못하였다. 많은 작가들이 민중의 옹호자 역할을 감당하면서 정치적 이념 및 사회구조와 관련된 언어의 투쟁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와 민중의 생존권이 소중하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러한 문제들만큼이나 중요한 생태적 생명의 문제를 도외시하였다는 점에서 민중문학의 한계를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와 민중 생존권 등의 현안은 너무도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였으므로 자연환경의 퇴락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을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환경오염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립과 반목의 시대로 돌리기에는 한국 작가들의 행보가 너무도 큰 맹점을 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환경오염은 인간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라는 범인류적 공감대에 굳이 호소하지 않더라도 ‘민중문학’의 맹점은 자명해진다. 환경오염을 낳는 기형적 母體는 다름아니라 부패한 정치현실과 모순적 사회구조였으며 따라서 1970·80년대 폭압적 정치현실은 환경문제로부터 결코 분리하여 바라볼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경제적 수익에만 치중하여 노동자의 기본적 생존권과 자연의 生命權을 침탈하는 대기업의 횡포·특혜 위주의 개발 정책·정경유착 등이 자연환경과 인간의 생명을 함께 위협하는 중대한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이를 비판해나갈 때, 이러한 저항행위는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에 대한 전면 부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 록 ‘민중문학’작가들이 보여주었던 저항의 진정성과 치열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1970·80년대에 한국 문학의 주류였던 그들이 정치현실의 부패와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환경문제의 연원을 찾지 못했다는 점, 무수한 사회적 갈등의 양상들과 환경문제를 분리하거나 이원화시켜왔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저항의 노선이 획일적이었다는 것과 저항의 범주 또한 협소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문인들조차도 정치적 이념문제와 생존권 수호를 위한 투쟁에 골몰하게 된 상황하에서 ‘생태시’가 문단의 한 조류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1970, 80년대는 한국에서 ‘생태시’의 유형이 입지를 형성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한 것이다.

군사독재의 형태가 국민의 저항에 부딪히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러 비로소 한국 사회는 환경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군사정권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민주화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언론통제와 여론 조작도 다소 완화되어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사례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사실 그대로 보도되는 빈도수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국민들도 환경오염을 중요한 사회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군사정권의 철권 통치하에서 은폐되어 왔던 환경오염의 현상들이 속속 드러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한국 문단에서도 자연환경과 인간 생명의 연관성 및 생존의 위기의식을 테마로 다루는 작품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 ‘생태시’의 창작과 이에 관련된 문학적 논의는 하나의 문학운동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나타내진 못하였다. 그러나 생명의 중요성 혹은 생명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생태시’의 기풍이 진작되어 창작과 평론 양 분야에서 생태문제에 관한 문인들의 연대의식을 형성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일어나기 시작한 생태시의 기풍을 반영하듯, 1991년에 시인 고진하와 평론가 이경호가 엮은 생태사화집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다산글방)의 출간은 한국문단에서 ‘생태시’ 혹은 환경시가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는데 큰 기폭제가 되었다. 이 사화집의 출간이 자극제가 되어 지금까지 환경오염의 문제를 소재로 다룬 시집들이 지속적으로 문단에 반향을 일으켜왔다.

 

자연과 인간의 생태학적 연관성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種들 사이에 얽혀있는 생명의 연결고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김지하의 ?중심의 괴로움·고진하의 우주배꼽 같은 시집들, 자연파괴로 인한 인간 생존의 위기의식과 환경보호의식을 일깨우는 고형렬의 ?울은 안녕한가·이승하의 생명에서 물건으로·강남주의 흐르지 못하는강 등의 출간은 환경문제의 문학화에 대한 당위성을 확증하기에 충분한 성과물이었다. 특히 비평가들의 활동과 외국 생태시의 수용 작업은 ‘생태시’ 창작에 활력소를 불어 넣는 정신적 원천이 되었다. 중진 평론가 도정일, 김욱동, 이남호를 비롯하여 비교적 신진 계열에 속하는 남송우, 송희복, 신덕룡 등의 소장 평론가들이 각종 시전문지와 문예 계간지에 한국 생태시의 현주소와 문제점들을 진단하는 평론들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들에게 생명주의의 대중화를 위한 문학의 소명을 일깨우고, 독자들에게는 자연환경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였다.

 

특히 1990년 이후 각종 시전문지에서 ‘생태시’에 관한 창작과 평론을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는 현상은 90년대 이전의 시에서 나타나던 사회참여와 저항의 성격이 변화되었음을 암시한다. 인간의 자유와 생존권을 유린하는 지배세력에 맞서 싸우던 1970, 80년대의 참여문학이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함께 짓밟는 사회적 요인들에 대해 저항해야만 하는 새로운 참여문학의 유형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개발 위주의 정책, 정치적 이념의 대립, 경제적 현실 문제 등으로 인해 방치되었던 환경문제가 90년대에 들어와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회문제로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망가진 자연환경을 되살려냄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공멸을 막아야 한다는 문인들의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도 참여문학의 성격을 변화시킨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생명체들에게 구원의 탈출구를 열어주기 위해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어떻게 투쟁해나갈 것인가의 문제가 21세기 한국 문단의 중심적 화두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견된다. 1990년대 이후 ‘생태시’ 및 환경문학을 특집으로 다룬 문예지들의 행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생태시’가 감당할 참여문학으로서의 역할이 21세기 한국 문학의 화두가 되리라는 전망은 더욱 가능해진다.

 

2. ‘생태시’의 개념과 성격

 

‘생태시’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사실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시이며, 환경파괴의 사회적 원인들을 고발함으로써 독자의 비판의식과 개혁의지를 일깨우려는 목적성을 지향한다.

 

'생태시’가 독자의 자연인식과 사회의식을 새롭게 변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생명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며, 풀 한 가닥이나 벌레 한 마리일지라도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하게 보살피는 사랑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독일의 여류 시인 엘케 외르트겐이 자신의 시 ?대지?(1980)에서 “대지의 말을 알아들었던/聖 프란체스코는/대지를 형제라 불렀답니다”고 고백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형제의식을 강조하였듯이, 자연을 사람보다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세태를 비판할 뿐 아니라 자연을 사람처럼 받드는 사랑의 정신을 진작시키는 것이 ‘생태시’가 견지하는 궁극의 목적이다.

 

자연의 質을 통하여 사회를 진단하고 인간사회의 내부에서 자연파괴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생태시’의 현실인식임을 감안한다면, ‘생태시’에서 시인의 사회의식과 생태의식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생태시’는 이러한 통합적 인식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자연과 인간의 공생을 파괴하는 사회현실에 대해 격렬히 저항하며, 죽어가는 생명을 되살려내려는 보편적 생명의식을 대중의 생활철학으로 끌어올리고자 한다. 따라서 ‘생태시’가 감당하는 사회참여의 범주는매우 넓다고 볼 수 있다.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현실인식에서부터 공동의 생명의식으로 나아가는 ‘생태시’의 발걸음을 주의깊게 지켜본다면, 1990년대 말부터 국내의 평론계 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생태시’에 대한 근시안적 비평은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신진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생태시’ 비평에 따르면, ‘생태시’는 고발과 비판의 계몽 행위에만 머무르고 있는 시이며, 아직 생명의식의 중요성을 진작시키는 단계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시의 유형이라는 것이다. ‘생태시’의 정신적 밑바탕에 생명의식이 부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생태시’는 오염된 자연환경과 인간실존의 위기를 문제 삼는 생태의식에만 치우쳐 있을 뿐이며 이러한 생태의식이 자연과 인간의 생명을 똑같이 존중하는 생명의식의 단계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그들은 비판한다. 따라서 그들은 ‘생태시’가 생명의식 혹은 생명중심주의를 끌어안고서 도약해야할 새로운 차원의 시이자 새로운 대안의 시로서 ‘생명시’라는 이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생태시’의 성격에 대한 매우 근시안적인 비평이 아닐 수 없다.

 

나무들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우리는 그들 곁에 있을 때마다

친구로서 그들을 따뜻이 맞아 주었었지.

그 동안 나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는 일이 되어 버렸어.

나무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평화,나무들에게 깃드는 새들과 바람,나무들의 뿌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

 

―발터 헬무트 프리츠의 ?나무?(1976)중에서.

 

195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서유럽 지역에서 처음 형성되어 지금까지 발표되어왔던 ‘생태시’들의 유형을 살펴보면, 카메라 렌즈로 사진을 찍듯이 자연파괴의 현장을 실제 그대로 재생·고발하는 르뽀르따즈 형식의 詩와 환경오염에 대한 고발행위를 통해 대중의 비판의식을 선동하는 프로파간다 형식의 ‘생태시’만이 주류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나무들 곁에 있을 때마다 친구로서 그들을 따뜻이 맞아주었다”라는 발터 헬무트 프리츠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 속에서 넘쳐 흐르는 생명감을 예찬하는 ‘생태시’들이 1950년대 이후에 매우 다채롭게 발표되어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서유럽에서 처음 태동되어 1990년대 우리의 시단에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생태 시’는 현장감을 재생하는 언어로써 생명파괴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아울러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공생 및 조화를 회복하고자 투쟁하며, 형제의식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함께 나누는 생명의 호흡을 예찬하는 시이다. 이처럼 다양한 ‘생태시’의 유형을 근거로 삼을 때, ‘생태시’는 리얼리즘 문학의 성향을 지닌 정치시 및 저항시의 일종이요, 더 나아가 국내의 문단에서 논의되고 있는 ‘생명시’로도 명명될 수 있는 정당성을 갖춘 詩임엔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3. 전통적 자연관에서 현대적 자연관으로

 

새로운 밀레니엄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지금, 세계는 각종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겪고 있다. 이것은 환경오염의 여파로 생태계의 자연법칙과 순환적 질서가 교란되어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살고 싶어도 더 이상 그 욕구를 실현할 수 없는 시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엔 자연의 고결함과 아름다움만을 예찬하는 시인들이 아직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이른바 전통적 서정시의 양식에 머물러있는 시인들이다. 그들의 自然觀은 가히 낙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 양상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인간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詩 속에서 자연은 언제나 인간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순수무구한 아름다움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새여 오너라,푸르른 새여,저 높은 별을 떠나

나뭇잎 덮인 나의 지붕으로 내려오너라, 새여

우리 함께 이야기 하자꾸나

 

숨결을 살랑이는 강물과 그 강변을,칠흑 같은 숲 속의 땅을,神들의 집을 이야기 하자꾸나

그곳은 사람이 처음 태어나

스스로 빛을 알게 된 곳,다른 사람의 눈 속에서

빛을 발견하여, 노래를 배운 곳이란다.

 

새여,푸르른 새여,나뭇잎 덮인 지붕으로 내려 오너라

그곳을 함께 이야기 하자꾸나.

 

―요하네스 보브롭스키의 ?밤의 노래/Nachtlied? 全文

 

전통적 서정시인들은 자연이 병들기 이전의 時點으로 돌아가서 원초적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는 자연에게 말을 건다. 그들은 자연 속의 동·식물을 향해 이름을 부르거나 자신의 주관적 정서를 고백하는 언어행위를 통해서 과거의 자연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불러낸다. 이때 자연은 시인의 무의식 혹은 꿈 속으로 들어와서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詩的 自我와 재합일을 이루게 된다. 비록 현실 속에서는 퇴색되어버린 自然일지라도, 그 자연은 시인의 마술적 언어에 의해 과거의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부활하여 현실 속의 독자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독자는 시간의식을 상실한 채, 詩 속의 자연을 현실 속의 자연으로 오인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통적 서정시의 맹점은 동시대의 사회현

실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켜 바라본다는 점이다. 자연은 시인의 주관적 상상에 의해 얼마든지 가공되고 변형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체험의 대상이기 때문에, 전통적 서정시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독자의 시각은 사회현실로부터 차단되고 만다.

전통적 서정시에서 나타나는 낙관론적 自然觀은 생태시에 의해 철저히 부정된다. 이른바 생태시를 쓰는 시인들은 자연을 더 이상 아름다움의 精髓로 보지않는다. 그들의 시각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예찬을 받을만한 존재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두려움과 탄식을 자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생태시의 렌즈에 포착된 자연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혜택을 부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보호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개발행위에 의해 서서히 죽어가는 존재이다. 자연은 그동안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왔던 은혜를 거두어가면서 인간과의 共生을 단념하고 곳곳에서 不和를 일으키고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아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빛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쳐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굽은 물고기를 건져 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주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고기를 싸고 있다.

한낮인데도 사방은 저녁 어스름처럼 어둡고

골목에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없다

바람 속에서도 화약냄새가 난다

종소리에도 가스냄새가 난다

─신경림의 「이제 이 땅은 썩어가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에서

자연은 존재근원으로서의 힘을 갈수록 잃어갈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가차없이 앙갚음을 가하는 복수자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건져낸 “등굽은 물고기”를 먹고, “화약냄새가 나는 바람”을 마셔야하는 것은 자연의 보복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버린 인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증거하고 있다. “농약으로 얼룩진” 채소를 먹고 인간의 몸이 병들어가고, 페놀과 수은이 섞인 물을 마신 탓에 기형아를 낳으며, 각종 이상기후 현상으로 집단참사를 겪는 것 등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 행위의 대가로 자연에게서 당하는 보복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자원들을 베풀어주던 대지의 女神 가이아(Gaia)는 이제 복수의 女神 네메시스(Nemesis)로 탈바꿈한 것이다.

 

4. 새로운 주제 의식과 언술 방식의 혁신

 

생태문제에 천착하는 시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自然觀에 근거하여 서정시의 고답적 주제를 극복하게 되었다. 자연의 質이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詩의 주제로서 고수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同時代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처사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의 질적 변화에 부합되는 새로운 詩의 주제를 다양하게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생태시가 표방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집약될 수 있다.

 

1. 자연과 인간의 不和를 증언해줌으로서 자연에 대한 낙관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2. 자연파괴의 실상과 생태계 오염의 실태를 사실적으로 재생하여 고발한다.

3. 오염된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인간이 겪는 피해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서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을 일깨운다.

4. 자연의 파괴를 가속화시키는 사회적 원인들을 규명하여 이를 비판하고 개혁을 호소한다.

5. 생명존중 및 자연보호의 의식을 보편화시킨다.

6. 잃어버린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것을 바탕으로 自然美의 회복을 호소한다.

7. 자연과 인간의 상호 의존성이 실현되는 새로운 대체사회, 에코토피아(Ecotopia)의 구현을 희망한다.

 

이러한 다양한 주제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시인의 자연인식이 현실의 밑바탕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시인의 성찰도 현실의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이점에서 생태시는 리얼리즘의 양식에 부합되는 詩장르라 할 수 있다.

생태시의 주제의식이 전통적 서정시의 주제의식과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언술 방식의 혁신을 통해 독자와 대중의 시각을 현실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서정시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최고조로 고양시킬 수 있는 언어들을 詩語로 사용하고 있다. 자연의 外觀과 印象을 형상화하기 위해 메타포·상징·알레고리·리듬·운율 등의 미학적 장치를 동원하며, 형용사와 부사를 위주로 수사적 장치를 풍부하게 사용함으로써 자연을 실제의 모습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공하고 변형시킨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고전적 주제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언술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생태시에서는 자연파괴 및 환경오염의 실상을 가장 객관적으로 실증해줄 수 있는 낱말들을 詩語로써 선택하고 있다.

 

한강은 거대한 하수구이다

저 팔당 아래에서부터

저 아래 성산다리 행주다리까지는

드넓은 쓰레기의 강이다

 

한강은 강이 아니다

그저 우리들의 오물을 실어 나르는

콘베이어 벨트다

잠실에서 난지도까지는

 

한강은 죽었다

그것은 내장이다 죽어서도 우리들의

삶을 옮겨다주는 물체다

눈먼 마음이다

 

복개하지 않은 거대한 하수구

한강은 흐르고

한강은 멈추지 않아도

서울에 와서 죽는다.

 

─고형렬의 「한강 下水(하수)」 전문

 

비록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있어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강물의 가사 상태를 시인은 아무런 여과 없이 독자의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자연이 겪는 고통과 폐해를 미학적 장치의 개입 없이 독자에게 직접 재생해주는 언어만이 생태시의 주제의식을 확연히 드러내줄 수 있다. 생태시에서 미학적 장치 및 수사적 장치의 사용을 가급적 억제하는 것은 자연의 실상이 은폐되거나 미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생태시인들은 同時代의 자연을 통해서 사회현실의 부조리를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기 때문에, 자연의 실상을 은폐하거나 미화한다는 것은 곧 同時代의 사회현실을 호도하고 왜곡할 위험성을 낳게 된다. 이 같은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 생태시인들은 주로 명사와 동사를 사용하거나 간단명료한 서술형의 문장을 사용하여 자연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진술해나간다. 자연파괴를 야기하는 사회적 원인들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킴으로 이러한 원인들에 대한 독자의 비판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생태시의 참여적 목적이라 한다면,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선결과제로서 詩語는 자연의 실상을 숨김없이 고백해주는 증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5. 저항문학으로서의 생태시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의 서문(序文)에서 편자인 페터 코르넬리우스 마이어-타쉬는 디이터 쉴레자크(Dieter Schlesak)의 말을 빌어 “생태시는 ‘저항의 언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1950년대 이후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서유럽에서 발표된 생태시들이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이어-타쉬가 언급한 ‘저항’은 생태시의 핵심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낱말이다. 이 ‘저항’은 자연과 인간의 불화를 야기하는 근본적 원인들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생태시의 ‘저항’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깨뜨리고 생태계의 순환질서를 교란시키는 사회적 요인들을 낱낱이 파헤쳐 그 病因들을 격렬히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생태학적 낙원을 향해 탈출구를 찾아나가는 투쟁적 언어행위를 의미한다.

 

생태사화집에서 시인들은 자연파괴를 야기하는 요인들을 정치적 이념과 경제 구조, 인간중심주의적 집단의식에서 찾아내고 있다. 시인들은 인간의 소유욕과 물신주의·대량생산과 과소비 풍조·서구세계의 시장경제체제·이윤 극대화 추구 및 구매심리 조장·과학기술 만능주의·인구의 폭발적 팽창·개발과 발전만을 가속화하는 성장 제일주의·정부의 개발정책과 건설사업·경제논리·산업재해·전쟁·핵 개발 및 핵 실험·생명경시 풍조·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무관심·지적낙관주의 및 자연과학적 사고방식·낙관적 進步史觀·인간중심주의 등, 환경파괴적 病因들을 고발하면서 독자와 함께 비판의 연대의식을 강화하고 있다. 이렇듯 ‘생태시’는 사회비판을 바탕으로 구체적 현실개혁을 지향하는 저항적 성격을 지닌 까닭에 정치시 또는 참여문학의 한 유형으로 규정될 수 있다.

 

자연시 및 생태시 연구가인 발터 겝하르트(Walter Gebhard)는 ‘생태시’를 기존의 자연시 내부에서 주제의식이 변화되어 나타난 새로운 시의 유형으로 보면서, ‘자연시’의 전통적 서정성과 ‘생태시’의 비판적 自然觀을 대립적으로 고찰한 바 있다. 그는 자연파괴를 야기하는 집단이기주의 및 인간중심주의적 행위들을 여과없이 비판하는 생태시의 언어적 특징을 근거로 하여 ‘항의문학(Protestdichtung)’이라는 이름을 ‘생태시’에 부여하였다. 또한 마이어-타쉬도 ‘생태시’의 현실비판적 성격에 따른 사회참여의 기능을 부각시키면서 생태시를 ‘정치적 문화에 관한 기록물(Dokument der politischen Kultur)’이라 명명하였다.

 

마이어-타쉬가 규정한 것처럼 ‘생태시’는 자연파괴를 가속화하는 ‘정치적 문화’의 속성을 가장 객관적으로 기록한 장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생태시의 기능은 기록문이 갖고 있는 보고와 고발의 기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생태시는 자연파괴의 원인을 제공하는 정치적 문화 전반에 대해 시민들의 비판의식을 결집시켜 대중의 ‘항위시위(Protestdemonstration)’를 유발하고자 한다. ‘항의시위’는 마이어-타쉬가 제시한 생태시의 사회적 기능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정치 및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현실개혁을 적극적으로 호소하는 집단적 저항행위이다. 따라서 생태시는 재현과 고발의 기능을 토대로 하여 생명에 대한 대중의 의식을 선도하고 계몽하는 교술적 기능을 갖출 뿐 아니라 독자 및 대중과 함께 연대투쟁을 전개하는 사회참여의 기능까지 갖추고 있는 장르라 할 수 있다. ‘생태시’는 포괄적인 앙가쥬망의 속성을 갖춘 문학인 것이다. 또한 마이어-타쉬는 학자, 철학자, 정치가, 성직자, 시민이 환경보호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각각 학술 강연회·철학적 논문·정견 발표·교회의 설교·가두시위 등을 통하여 현실개혁을 촉구하는 일종의 선언문으로 ‘생태시’를 轉用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점에서 우리는 ‘생태시’가 생명파괴의 원인을 유발하는 정치적 문화 전반에 대하여 대중의 ‘항위 시위(Protestdenonstration)’를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항의 시위’의 투쟁력을 증폭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항의 시위’의 도화선이 될 뿐만 아니라 ‘항의 시위’의 현장에서 정부의 개발정책과 건설사업을 규탄하는 선언문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생태시’는 문학의 참여적 기능을 사회 운동의 차원으로 상승시킨 장르라 할 수 있다. 랄프 슈넬(Ralf Schnell)이 1970년대 이후의 현대시를 ‘손상된 세계를 표현하는 시’라고 명명하였듯이, ‘생태시’는 예술지상주의에만 묶여있던 언어의 미학을 ‘손상된 세계’로 끌어내려 새롭게 ‘미학의 저항’을 요구한 현대시의 대표적 유형이라 할 수 있다.

 

6. ‘생태시’의 문제점과 과제

 

서구의 ‘생태시’와 비교해볼 때 국내의 ‘생태시’에서는 주제의식의 다양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독일 유일의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를 살펴보면, 195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약 30년 동안 발표된 서유럽의 대표적 생태시들이 제1부에서 8부까지 나뉘어져 있다. 이러한 구성은 환경파괴를 야기시키는 사회적 원인들에 대한 인식과 진단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에 참여한 90여명의 생태시인들은 인간의 물욕, 성장 제일주의, 과소비 풍조, 개발 정책, 전쟁, 핵 개발 및 핵 실험, 집단이기주의, 이성만을 맹신하는 인간중심주의 등을 다양하게 비판하면서 이러한 저항행위를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자연파괴적 원인들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체사회를 모색하려는 지향성이 ‘생태시’의 다양한 테마를 낳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표되어왔던 ‘생태시’에서는 자연파괴를 야기하는 사회적 원인들에 대한 인식과 해부 작업이 부족하기 때문에 서구의 ‘생태시’에 비하여 저항적 성격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주제의식의 빈곤과 단순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의 ‘생태시’들을 살펴보면, 생태시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 서 있는 작품과 생태시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작품만이 있을 뿐, ‘생태시’의 참여적 기능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중간 단계의 작품들이 매우 부족하다. 자연파괴의 실상을 마치 사진 찍듯이 模寫하는 詩,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어울림을 예찬하여 마치 에코토피아가 현실화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詩로 국내의 ‘생태시’는 양극화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생명을 함께 파괴하는 원인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바탕으로 그와 같은 환경파괴적 원인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개혁을 성토하는 詩들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강렬한 저항의식과 함께 생명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일깨우는 詩들도 아직까지는표현하는 작품들이 국내 문단에서 두터운 층위를 형성해야만 한다. 환경오염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 및 사회구조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투쟁과 생명사랑을 함께 이야기하는 생태시들이 주류를 이루어야만 비로소 자연과 인간의 순수무구한 합일을 예찬하는 類의 작품도 독자에게 미래의 에코토피아를 비추어주는 희망의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에코토피아에 대한 전망이 한낱 백일몽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문인들이 환경문제에 대한 연대의식을 더욱 강화하여 자연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좀더 철저히 연구하고 분석하는 작 공백의 상태로 남아 있다.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 및 공생이 실현되는 낙원, 즉 에코토피아를 향해 독자와 대중의 눈길을 돌려놓기 위해선 현실의 모순들에 대한 극복의지와 생명사랑을 업이 필요하다. 아울러 자연과 인간의 공생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사회현실에 대항하여 독자와 함께 공동의 현실투쟁을 전개해나가며 생명을 향한 사랑을 보편화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생태시’의 문학적 수준을 한 차원 더 도약시키려면 언술방식에 있어서도 르뽀르따즈와 다큐멘타리를 위주로 하는 고발적 언술에만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생태시’뿐만 아니라 서구의 생태시에서도 미학적 장치 혹은 예술적 기교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같은 현상은 자연파괴의 실상이 은폐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인들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유, 상징, 리듬, 운율, 修辭 등을 가미할 경우에 환경오염의 실태를 독자에게 사실 그대로 알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생태시’가 지향하는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고발적 언술방식을 사용하여 생명파괴의 실상을 숨김없이 알리는 행위만으로는 대중의 저항의식을 형성할 수는 있어도 그 저항의식을 강화하기엔 부족하며 생명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이끌어내기에도 무리가 따를 것이다. 대중으로 하여금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현실에 대해 좀더 강렬한 저항의식을 갖게 하고, 자연과 인간의 생명을 보듬는 사랑의 파수꾼이 되게 하려면 그들의 정서적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언술방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생태시’에서 도외시되었던 비유, 상징, 리듬, 운율 등의 미학적 장치와 예술적 기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비유, 상징, 절제된 수사는 대중의 정서적 감동을 이끌어낼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시인들은 자연의 실상을 왜곡하지 않는 범주를 엄격히 유지함과 동시에 메시지의 전달에 있어서 예술성을 살려내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대중의 정서적 감동을 현실변혁의 의지와 생명사랑의 정신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모든 생태시인들에게 요구되고 있다.

 

 

 

이 글은 한국현대시인협회 2000년 여름 세미나 주제 발표문을 보완한 것임.

[출처] 환경과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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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2.09 03:12

    첫댓글 인구는 늘어가고, 오염은 심해서~ 공기도 강물도~
    끝내는 가축에게로~ 우리들도 서서히..

  • 작성자 11.02.09 11:29

    맞아요. 고운빛님 ~
    상생의 관계지요.

  • 11.02.12 21:41

    이쁜이 님 생태시 이론 올려주셔서 잘 보았 읍니다 우리나라 에도 이제 자연을 사랑 하고 아낄줄 아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읍니다
    님의 큰 발자취를 보고 싶군요 감사 합니다

  • 작성자 11.02.09 11:30

    파파님 같은 선량한 분만 계시면 걱정이 없겠지요.

  • 11.02.09 09:17

    자연을 보호하지 않고서는 인간도 살 수가 없지요
    문학을 논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자연과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 작성자 11.02.09 11:31

    동감입니다.

  • 11.02.09 11:07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지요.

  • 작성자 11.02.09 11:32

    맞습니다.서로 아끼고 사랑 해야 겠지요.

  • 11.02.09 19:37

    아따메~
    먼 글씨가 이렇게 많디야
    나 눈 아프니, 이쁘니 누이가 읽어 주시구랴

  • 작성자 11.02.10 04:02

    ㅎㅎㅎ JEM 있따.

  • 11.02.09 21:46

    이쁜이님 긴 글 수고하셨어요
    먼 나라에서 이곳까지 들리시고 감사합니다

  • 작성자 11.02.10 05:00

    동백꽃님이 주신 표고버섯 을 시카고에 가져와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지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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