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대추가 대세라기에 묘목 열다섯 그루를 들여놓곤 서둘러 구덩이를 팠다.
“형님, 골병만 남는 농사는 무슨... 손 털고 바람이나 쐬러 다니시죠”
면사무소에 거름 신청하러 들렀더니 신수 훤한 후배가 기를 꺾는다.
요즘 시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과수 묘목은 거의 모두 접붙인 것이다. 접목법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깎기접(절접)은, 대목(臺木)의 몸통을 조금 남기고 잘라서 내리 짜갠 다음 미리 준비해 둔 접수(椄穗)를 끼워 넣어 서로의 형성층을 잘 맞춰서 바람이 들지 않도록 비닐 끈으로 단단히 잡매는 방법이다. 몸뚱이를 잃은 대목은 두 번 다시 바깥세상을 볼 수 없다. 대목은 지하에서 나무를 키운 보람을 간직할 수 있겠지만 억울하기도 하겠다.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데 죽자 살자 양육하니 말이다. 대목은 침묵의 희생양이다. 신세 한탄은 고사하고 한 마디 불평도 없다. 접붙인 나무의 이름조차 접수의 품종이다. 대목은 땅속에서 온 힘을 다하여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줄기와 가지를 양육하지만 그대로 잊힌 존재가 되고 만다.
묏대추나무는 알이 굵고 많이 열리는 우량 대추나무의 대목이다. 개복숭아나무는 맛 좋고 수확량이 많은 복숭아, 자두, 살구나무 따위의 대목으로 쓰인다. 돌배나무는 배나무의 대목으로, 고욤나무는 감나무의 대목으로 이용된다. 탱자나무 뿌리는 유자나무의 뿌리가 되고 찔레나무 뿌리는 장미의 뿌리가 된다. 수박은 호박이나 박의 뿌리에 붙어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
대목으로 생을 마치는 고욤나무, 묏대추나무, 돌복숭아나무, 돌배나무, 찔레나무, 탱자나무는 우리 아버지들의 이름이다. 묏대추나무는 내 아버지의 이름이다. 내가 가시 많은 대추나무인 까닭이다. 대목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들의 희생이다. 사람들은 나무가 보여주는 탐스러운 열매만 바라보며 희희낙락한다. 야생종은 억세서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가뭄이나 장마에도 잘 견디며 병해충에도 강하다. 열매나 꽃이 인간의 탐욕에 차지 않는다. 남귤북지(南橘北枳)가 아니라 희생은 땅속의 대목이 하고 사랑은 누가 받는다.
의학이 고도로 발전하면 어떤 사람의 목을 떼어 다른 사람에게 붙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가령 회복 불능의 뇌사상태 식물인간의 목에, 뇌는 말짱하나 오장육부가 망가져 오늘내일하는 사람의 머리를 이식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몸은 건강하나 선천적인 무뇌아의 머리 대신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천재의 머리를 이식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있을까. 십중팔구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라며 펄쩍펄쩍 뛸 터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수확을 위해, 더 예쁜 꽃을 보기 위해 대목의 머리를 단칼에 잘라내고 접을 붙인다. 깎기접(절접)이다.
아버지는 농사철이 다가오면 양쪽 발에 영락없이 찾아오는 악성 습진 때문에 무논에 들어가지 못하셨다. 그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부터 무논에 들어가 농약을 치고 피를 뽑았다. “욕 봤다”라는 한 마디. 아버지의 그 짧은 말 속에는 미안함과 함께 잔잔한 슬픔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배우지 못한 시절을 한탄하셨다. 야학에서조차 공부를 할 수 없어 담장 너머에서 귀동냥으로 겨우 가갸글을 익혔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먹을 갈아 작은 붓으로 창호지에 가갸글을 써서 큰방 바람벽에 붙여놓으셨다. 우리 형제는 그 무학의 아버지한테서 밤마다 가갸글을 배웠다. 내 학업의 첫 스승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두 자짜리 대자로 가갸거겨를 차례로 짚어나가시면 형과 나는 입을 맞춰 읽었다. 아버지는 “잘한다, 잘한다” 칭찬하면서도 늘 겸연쩍어하셨다.
아버지는 근동에서 소문난 문어조(文魚條)의 달인인데다 알아주는 상쇠였지만 나는 아버지가 누구에게 자랑하는 걸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아버지가 만든 봉황은 정교하고 아름다워 초례상의 꽃이었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사례비를 받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배코칼로 문어를 오리고 다듬을 때마다 잠을 쫓으며 지켜보았다. 혹시 문어 부스러기라도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 기대는 번번이 빗나갔다. 아버지는 어쩌다가 한 번씩 그야말로 약으로 쓸 만큼 조그마한 조각을 베어내 건네주셨다. 문어 다리 한 뼘 잘라낸다고 표가 날 것도 아니련만 아버지는 융통성이라곤 모르는 분이었다.
두 번째 풍을 맞은 아버지에게 닥친 불행은 실어증이었다. 그나마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다는 것이 내게는 작은 위안이었다. 오늘 대추나무 묘목의 접목 부위를 잡맨 비닐 끈을 풀어내면서 자꾸 아버지 생각이 떠오른 까닭은 아무래도 뿌리로만 남은 대목 때문일 것이다. 이제 땅에 묻히면 땅 위의 줄기와 가지를 위해 묵묵히 희생하면서 결코 자신의 면목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 않을 대추나무 대목을 바라본다.
(‘한국수필’ 2023년 2월호)
첫댓글 수필이 물의익고 있습니다.
접붙이기를 통하여 대목으로 남은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수확을 위해 대목의 목을 쳐서 접붙이를 하는 건 식물이지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고보면 사람만큼 잔인한 동물도 없는것 같습니다.
사과대추나무 접 붙인 부위를 잡아맨 비닐테이프를 조심스럽게 풀어내면서 뿌리로만 붙어있는 대목을 보고 있자니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어요
저의 아버지가 생각나게 합니다.
불콰하게 취하셔서 들어오면 자식들을
차례로 앉혀눟고 당신이 소중하다고 여긴 단어나 말을 우리에게 해주시고 말해보게 하시곤 했는데 아버지의 마음은 따뜻함 그 자체셨던거 같아요.
요즘사람들은 이쁘고 좋은것에 길들여지고
그런 소비자들의 탐욕을 위해 방법에는 상관없이 생산과 소비에 과잉경쟁의 이상현상을 만들어 내는것 같습니다.
열매나 꽃이 인간의 탐욕을 채울려면 얼마나 많이 아프고 희생을 치러야 할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멋진 하루를 응원합니다.
나무의 우수한 형질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접목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씨를 받아 심으면 점점 퇴화된다고 해요.
인간의 탐욕은 끝을 모르는데 가령 과일 생산자나 소비자나 한 가지 아닌가 싶어요. 제주 감귤 농부는 자기 가족이 먹을 나무에는 농약도 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상품성이야 형편없지만 맛은 훨씬 좋다더군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는 유전자변형 농산물 앞에서 멋적은 구호일 뿐이지요. 따뜻한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