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58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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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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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어르신들에게는 무척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저도 이제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보다 자주 읽고 묵상하게 되는 성경이 있습니다. 잠언이 그렇고, 다른 무엇에 앞서 코헬렛이 그렇습니다.
코헬렛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됩니다. 형제들과 티격태격 아웅다웅하다가도 코헬렛 저자의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라는 구절을 접하는 즉시, 그래 별것 아닌 것에 내가 또 목숨을 걸었구나, 하면서 제 가슴을 크게 치게 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으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있어?’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은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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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먼지가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이 하느님께 되돌아가기 전에,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돈 좀 씁시다!>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 원이 예금된 통장과 1억 7천만 원가량의 주식이 숨겨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생동안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 쌀을 사다 먹고 남이 주는 야채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온 나뭇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만 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매일 입버릇처럼 자신은 200살까지 살 것이라고 말했지만 운명은 그 돈을 쓸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절약하는 것만 미덕일 때가 있었습니다. 아껴야 산다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쓸데없이 돈을 쓰면 낭비이고 그것도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끼는 것만을 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야우찌의 인생관은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행복인 것이었습니다. 굶어도 통장 액수만 보면 배가 부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 삶입니까?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재물이 쌓이는 것으로 기쁨을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저렇게 쓰지 못하고 남기는 돈은 나에겐 후회가 되고 가난한 이들에겐 서러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구나 성당, 혹은 본당 단체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지나치게 돈을 모으는 모습입니다.
이미 많은 돈이 있고 매년 규칙적으로 들어오는 돈도 있지만 다른 단체와 비교하여 더 큰 모습을 보이기 위해 저축하고 또 저축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인색한 단체라는 평을 받습니다.
세속적 마인드가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저는 그런 단체를 보면 입버릇처럼 “돈 좀 씁시다”라고 말합니다. 선임이 아껴가며 모아놓은 돈을 쓰게 만드는 못된 신부가 될 수는 있지만 왠지 돈을 모으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성당들도 돈을 써야 합니다. 건물을 비싸게 짓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주위에 돈을 뿌려야합니다. 그 혜택을 받은 이들이 차후에 새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뿌리는 씨가 없으면 나중에 추수할 것이 적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쓸 수 있고 또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다면 다 써버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고 말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주님은 당신 뜻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젊은이가 즐기는 것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저도 어렸을 때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하루를 정말 행복하게 산 날에는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죽음도 두려워합니다. 즐길 수 있을 때는 즐기는 것도 좋고 쓸 수 있을 때는 써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임플란트를 대대적으로 하고 계셨었습니다. 돈은 충분히 가지고 계셨었지만 임플란트를 하려는 결정은 하지 못하고 몇 년을 미뤄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돈이 아까워 고생만 하시다가 큰마음 먹고 돈을 쓰신 것입니다. 잇몸이 약하여 잇몸 안에다 인공 연골도 넣으셨습니다.
오랜 치료 기간이 마무리되어 가서 마지막 인플란트 치아를 넣는 약속을 잡고는 결국 그것을 끼우기 이틀 전에 입원하셔서 다시는 퇴원하지 못하셨습니다.
죽만 드시면 되는데 임플란트를 굳이 낄 이유도 없었습니다. 돈도 쓸 때가 있습니다. 저희가 더 일찍 임플란트를 하도록 종용해 드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습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돈 좀 씁시다. 돈을 안 쓰면 자신도 망하고 나라도 망합니다. 돈은 피와 같습니다. 돌아야 삽니다.
자기 지갑 속은 물론이고 교회 단체나 본당들도 돈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며 빨리 털어버리고 쓸 수 있을 때 삶도 즐거워지고 교회도 젊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아봐야 썩습니다. 뿌려야 잘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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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코로나가 심각하게 번져나갈 때입니다. 병원마다 중환자가 가득했습니다. 사망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미사도 중단되었고, 식당도 문을 닫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피해도 컸지만, 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캄캄한 동굴을 불 없이 걸어가는 것 같은 공포였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두려움과 공포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백신이 나왔고, 치료제도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납니다. “코로나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두렵다고 운전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안전운전하면 자동차는 쉽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널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누워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거세졌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놀랐고,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의 소리에 눈을 뜨신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당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더러는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함께 있을 겁니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세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러분에게 평화를 줍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면, 굳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이렇습니다. ‘기도하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논리와 이성을 넘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단순히 본능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헛되고 헛된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야 하는지 식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 차를 살 때, 집을 살 때 우리는 꼼꼼히 따져보고, 신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잘못 판단을 하면 커다란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하느님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입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한번 써보고, 살아봐야 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식별의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고, 결실이 있으면 영적식별을 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고,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악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위로와 고독’이 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결과는 늘 기쁨과 평화입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도 ‘위로와 고독’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 결과는 늘 불평과 불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영적식별을 잘 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적식별을 잘 하는 사람은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도 충분히 듣습니다. 누군가 영적 식별을 잘 했는데, 교만하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둘째는 진중함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과 탓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때, 교회를 비판하고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영적식별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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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44-4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다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 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경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알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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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헤로데의 의문으로 제기된 예수님의 신원 문제는 오늘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드린 답변은, 안타깝게도 헤로데가 전해 들은 소문(루카 9,7-9 참조)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되살아난 옛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 임금으로 삼으려고나 하였을 뿐(요한 6,15 참조), ‘수난을 겪는 메시아’ 곧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돌아가심으로써 그들 모두를 구원하실 구세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이러한 몰이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살리는 그 길을 방해 없이 끝까지 가시고자 베드로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코헬렛의 저자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의 군중처럼 가끔은 우리도 하느님의 계획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장의 변화만 바라다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군중의 몰이해와 외면을 이겨 내는 세월 끝에 성부께서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셨고, 성 비오 사제도 오십년이 넘게 오상(五傷)의 고통을 참아 내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면, 우리라고 어찌 그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뛸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위한 최선의 때와 방식을 마련해 두셨음을 확신하며 언제나 희망 안에서 이 구원의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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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제자들이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두려워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신들이 바란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 사이의 깊고 깊은 간극 때문이었지요. 그 간극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일종의 비겁함입니다. 대개 비겁함은 제 잇속 계산과 상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은 아닐 테지요. 당시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멋진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른바 묵시적 열광의 시대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살아갔습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내일의 달콤한 인생을 향한 묵시적 환상은 활개를 칩니다. 그런 열망을 단번에 꺾어 버리신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제자들은 허탈과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뚜벅뚜벅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루카 복음은 19장까지 열한 개의 장(9,51―19,48)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수난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얼마간의 비겁함과 얼마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그야말로 제자들이 복잡한 감정의 다발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다가갈수록 점차 다듬어진 신앙의 정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여 버린 삶의 방향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신앙이란 알아듣고 깨닫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라서 무모하게 내맡기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수난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일상 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지만 이 몸짓이 앎의 또 다른 조각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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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인생의 젊음과 아름다운 시절을 기쁘게 즐기되, 하느님의 심판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만족과 기쁨에 빠져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노년과 죽음 그리고 심판의 때가 올 것을 알고 늘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기쁘고 모든 일이 잘될 때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찾는 이라야 시련과 불행이 닥칠 때도 그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첫 번째 수난 예고(루카 9,22)에 이어,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일을 전합니다. 사실 이때는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9,28-36)과 더러운 영을 권능으로 쫓아내신 일(9,37-43) 바로 다음으로, 모든 이가 예수님을 매우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루카 18,32; 24,7.20 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으로 어깨가 으쓱하며 한껏 우쭐해졌던 탓인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선뜻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에 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아직은 불길하고 굴욕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시련과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곤혹스럽고 피하고 싶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을 더 열심히 찾게 되고, 그분의 도움과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니 그 또한 감사드릴 일입니다.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일상일수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 시련과 단련의 시기를 만날 때도 한결같은 믿음과 평화 속에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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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님]
희망은 언제나 기대와 불안이라는 양날의 칼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은 현재를 긍정하고 살게 하지만,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희망을 기다림의 고문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의 기적과 권위 있는 가르침은, 기다렸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며 제자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제였을까요? 제자들의 희망과 다른 결과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속마음을 미리 읽으신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성취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려고 예수님의 말씀에 관해 묻는 것도 두려워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두려움으로 도망친 제자들의 절망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통해 희망이 되었습니다.
삶은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상적인 나와 다른 현실의 나를 만나고, 확신 속에서 배신과 의심을 품게 되며, 실패와 좌절 속에서 새로운 꿈과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십자가 수난의 역설은 믿음이 성장하는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 역설을 딛고 진리의 맛을 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희망입니다.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듯, 역경과 고통 속에서 지혜가 자라나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날마다 초대받고 있음을 기억하고 언제나 기뻐하고, 늘 감사하며, 깨어 기도하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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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길을 가다>
루카 9,43ㄴ-45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사람의 길을 가다>
사람들의
추켜세움에
들뜨지 않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움츠리지 않고
다만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사람의 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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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을 귀담아들어라>
학창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는데 제자들은 아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불완전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손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될 때 하느님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를 일깨우는 날 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 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 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 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 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말씀 안에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119,97) 미룰 수 없는 사람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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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플라세보 효과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 효과가 없는데도 사람의 신념에 의해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말기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의 몸에는 야구공만 한 종양이 자라고 있었지요. 마침 신약이 나왔고, 주치의는 획기적인 신약이 나왔다며 이 약의 효능을 설명하고 환자에게 주사했습니다. 주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환자의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종양도 절반도 줄었고, 10일 후에는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퇴원한 지 두 달 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신약의 효과로 점점 좋아졌던 환자가 왜 이렇게 안 좋아졌는지를 보니, 자신에게 사용된 신약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신문 기사를 봤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에 절망한 그는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졌고 이틀 만에 사망했습니다.
대만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스님께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스님은 자기 스승을 찾아가 이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빨리 가느냐, 좀 늦게 가느냐의 차이뿐이다.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니 사는 동안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 ‘시한부 환자’라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현재 20년이 지났음에도 열정적으로 살고 계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가져야 할까요?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저 열심히, 열정적으로 후회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의 스승이 수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을까요? 걱정하고 두려움 속에서 힘든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을 사는 제대로 된 마음이 필요함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영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욕심보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지금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영광만을 추구하다가는 커다란 실망 속에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광을 바라보며, 지금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열정적으로 후회 남기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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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창조주를, 심판을 기억하라>
- 나무처럼, 시詩처럼, 한결같은 삶 -
어제 금요강론 대목중 잊혀지지 않는 대목과 설명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마지막 50절중 ‘주님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란 대목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결같음과 머뭄은 정적靜的인 어떤 상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는 것을 뜻한다. 뿌리를 내리면서 나무는 가지들을 뻗는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해 서두르는데 한결같음을 뜻한다. 에우치리우스는 “우리는 부르심과 진보의 자리에 서있으면서 한결같음과 인내로서 경주에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변하는 역동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뿌리를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한결같은 위치로서의 어떤 자리와 함께 하는 정체성을 지닌 사람은 내적 안정과 함께 유연하고 온세상에 열려있다. 나무처럼!’
여기 요셉 수도원의 배경인 한결같은 불암산과 곳곳에 산재한 무수한 나무들은 정주의 표상으로 안정과 평화, 위로와 치유를 줍니다. 세계 2차 대전중 젊은 나이 32세로 전사한, 평생 32편의 시만 남겼다는 미국 뉴저지주 출신 조이스 킬머(1886-1918)라는 시인의 ‘나무들’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나는 생각한다. 나무들처럼 사랑스런
시詩를 결코 볼 수 없으리라고.
대지의 단물 흐르는 젖가슴에
굶주린 입술을 대고 있는 나무.
온 종일 신神을 우러러보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여름엔 머리칼에다
붉은 방울새의 둥지를 치는 나무.
그 가슴에 눈이 쌓이고
또 비와 함께 다정히 사는 나무.
시詩는 나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것은 오직 신神일뿐.”
하느님만을 찾는 정주 수도승의 특징은 나무를 사랑한다는 것이며 나무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무처럼’, ‘하느님의 시詩처럼’ 살아가는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정주의 수도승들입니다. 문득 25년전 써놓은 ‘나무’라는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날아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결같은 하느님의 나무처럼, 하느님의 시처럼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로서 코헬렛은 끝나지만 내용이 참 풍요롭고 공감 충만입니다. ‘젊음을 즐겨라’, ‘늙음과 죽음’, ‘맺음말’로 끝나며 아쉽게도 마지막 ‘발문’은 생략되고 있습니다. 일부 대목을 인용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 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수시로 후렴처럼 강조되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마디입니다. 창조주와 더불어 우리의 ‘죽음’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 코헬렛의 맺음말은 처음과 똑같이 인생 허무에 대한 고백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마지막 임종어가 이 말마디라면 얼마나 허전하겠는지요!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 심판, 죽음, 허무에 대한 묵상이 우리 모두 분발하여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중심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 향해 가지들 뻗은 나무들처럼 한결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생략된 코헬렛의 마지막 부분도 나누고 싶습니다.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그러니 결국 허무로 시작해서 하느님 경외로 끝나는 코헬렛이요, 결국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늘 삶의 허무와 죽음, 하느님을 기억할 때 일희일비함이 없는 한결같은 삶, 담담한 내적 열정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이점이 부족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의 변모 체험후 어떤 아이에게 더러운 영을 내쫓아 내신 주님의 일에 몹시 놀라 한없이 고무된 제자들에게 주님은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니 청천벽력같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스승이신 주님을 모르는 미숙함을, 한결같지 못함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으니,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며, 이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몹시 불안해 보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요, 주님의 수난에 이어 부활 체험후에야, 한결같은 파스카의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때의 주님 제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이미 파스카의 삶을 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영원한 삶이 가능합니다. 이에 더하여 삶의 허무, 죽음, 심판에 대한 생각이 더욱 우리를 깨어 한결같이 나무처럼, 시처럼 살게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은 이 거룩한 파스카 잔치 미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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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제자들의 무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이를 확인시키고 또 확인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나 기적사화를 통해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날 때, 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도, 예수님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맨 마지막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라고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배척과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 안에서 보면, '이 둘은 하나'입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어야만 부활한다는 진리를, '하나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라고 말한 수석 제자인 베드로의 말을 보니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예고 앞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무지가 우리의(나의) 무지이지 않나요?
하나인 십자가와 부활을 자꾸 분리시키려고 하면서, 죽음 없는 부활만을, 고통 없는 기쁨만을 얻으려고 하지 않나요?
한번 성모님처럼 곰곰이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자꾸 바라보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이유는,
그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부활 때문입니다. 그 진리를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입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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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S87a4Vt5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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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4)
넘겨지고
내어맡기는
곡식과 열매의
여정이 우리를
살게하는 생명의
선물이 됩니다.
생명의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생명의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됩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넘겨지심으로
사람을
보게하시고
사람을
도우십니다.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넘겨지시는
십자가의 수난으로
참된 사랑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넘겨지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넘겨지시며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주면 줄수록
커지는
사랑의
기쁨입니다.
사랑하기에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넘겨진다는 것은
내려놓는 의미이며
이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넘겨지는
사랑으로
십자가를
껴안는 것입니다.
배신하고
절망하고
아파하는
십자가가
하느님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넘겨지심으로
우리 또한
십자가에 참여할
은총을 얻었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십자가의 수난은
하느님의 약함과
무능이 아닌
우리를 향한
끝없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은
넘겨지시는
내어드림같이
이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내어맡기는
믿음의 여정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들과 함께
믿음으로
이 일을
시작하십니다.
넘겨지시고
내어드리시는
새로운 방식이
참된 관계이며
참된 믿음이
되었습니다.
내어드리는
오늘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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