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어느 날 화장실에서 전화벨이 울릴 때

[조 현]

어느 날 화장실에서 전화벨이 울릴 때 1.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황량한 24평 오피스텔의 문을 열 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보금자리 안에서 뜻밖의 손님이 날 맞이해 준다면....... 피곤에 지친 몸에 땀으로 달라붙은 나의 셔츠를 벗겨내어, 옷걸이에 걸어주며 따뜻한 말 한마디만 건네준다면, 어떤 행복을 느끼게 될까? 그 누군가는 우리 부모님이어도, 내가 담배 피우는 걸 유난히 싫어했던 예전 여자친구여도 안 된다. 어디서도 본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얼굴이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이름이 뭔지, 무슨 색깔의 외투를 좋아하는지, 어떤 담배를 즐겨 피우는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내가 그리는 뜻밖의 손님이란, 바로 이런 의미다.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8번의 회전을 했음에도 나의 헛된 망상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괜한 바람에 실망이라도 할세라, 발걸음 속도를 죽이고 시계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초침이 12를 막 지나고 있었다. 특히나 이번 달은 12시 이전에 퇴근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명색에 금요일인데- 오늘만큼은 그야말로 ‘오늘’ 이내에 도착하겠다던 계획도 덩달아 무산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번에는 접대를 핑계로 미꾸라지처럼 야근을 피해버린 황 과장의 얼굴에 침을 뱉는 생각을 하며, 남은 계단을 오르는 수고를 덜어보았다.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열쇠를 꺼냈지만, 현관문은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3년째 달려있는 502라는 숫자가, 오늘따라 붉은 색을 띠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무거운 동작으로 문손잡이를 돌리면서도, 난 한참동안이나 그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열렸다. 동시에 눈앞에는 나를 빨아들일 기세의 끝없는 암흑이 펼쳐졌다.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분명 어제와 같은 곳이었고, 오늘 아침에 내가 나선 곳이었지만, 난 마치 새로 발견한 동굴을 탐험하는 것 마냥 서서히 발걸음을 들여야만 했다. 냄새가 다르다....... 그 순간은 그런 느낌뿐이었다. 난 습관적으로 오른쪽에 붙어있는 거실 스위치를 올렸다.  형광등의 반복되는 반짝거림에 따라 내 눈도 따라 감겼다. 아침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속옷과 정리가 덜 된 책들이 그대로 바닥에 널려있었다. 역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식할 시선이 없었으므로, 난 본능적으로 옷을 전부 벗었다. 자동난방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다지 그런 일에 신경 쓰진 않았다. 현관에서 오른쪽으로 중간쯤 보이는 문은 분명 화장실의 것이다. 난 여전히 잊지 않았고, 살며시 걸어가 화장실 문을 잡아당겼다. 순간, 아침에 화장실 문을 열어둔 채 집을 나섰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미 문고리를 굳게 움켜 쥔 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잠겨있다. 가끔 환기구를 통해 들었다 나가는 통풍 때문에 쾅 하고 문이 닫히곤 했지만, 바람에 손이 달려있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 없다. 화장실 문의 잠금장치는 버튼식이 아니라, 돌림식이었다. 즉, 안에서 돌려 잠그던가, 바깥에서 열쇠를 이용해야만 문이 잠길 수 있는 것이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몇 년 전, 자물쇠가 잠기지 않아 애먹은 사건은 있었다지만, 스스로 잠기는 걸 기대하는 짓은 미친 일이다. 난 다시 한 번 손잡이를 세게 돌려보았다. 하지만 요지부동, 분명 안쪽으로 단단히 잠겨있다. 이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 경우뿐이다. 누군가가 화장실을 인위적으로 잠갔던가, 아니면....... 현재 사용 중이던가. 정신 나간 행동인 건 알았지만, 내 손은 이미 집주인을 부르듯 노크를 하기 시작했다. 똑! 똑! 천천히 두 번 힘주어 했다. 물론 반응은 없었다. 다시 한 번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눈이 먼저 열쇠를 찾아 헤맸다. 왼쪽 선반에 놓여있어야만 하는 열쇠는 어디에도 없었다. 헤어진 마지막 여자친구가 선물해 준 고래장난감이 달려있는 열쇠였다. 선반 위, 작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심장박동은 조금씩 빨라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극도의 공포가, 온몸에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밀려왔다. 난 뒷머리가 일어섬을 느끼고,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헉!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질 때까지만 해도, 나를 노려보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내가 넘어짐과 동시에 따라 넘어졌다. 그곳에 거울이 있었다는 걸,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나는 바닥을 짚고 몸을 반쯤 일으키며,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 살폈다. “누구세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구세요!” 이번엔 소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반응은 없었다. 적어도 현재 내 시야가 닿는 공간에 생명체라곤 나뿐이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억지로 입막음 해가며, 화장실로 다가가 손잡이를 매우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완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손잡이를 분해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에 신발장으로 달려가, 공구들을 꺼내왔다. 드라이버를 사용해 손잡이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박혀있던 4개를 전부 빼내었지만, 그것으론 한계가 있었다. 커다란 일자 드라이버로 여기저기를 쑤셔보아도, 손에 전해지는 느낌은  휘어질 것 같은 드라이버의 굴곡이 전부였다. 난 쇠망치를 집었다. 그리고는 시침이 자정을 넘겼다는 걸 잊은 채, 큰 소리가 나도록 손잡이를 내리쳤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상관없다! 문을 열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이윽고 얼마 후, 바깥쪽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다. 망치 손잡이 부분으로 쑥 찌르자, 반대편도 빠져버렸다.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문은 힘 빠진 망아지 같았으나, 난 조심스레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봤다. 동시에 불을 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보이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백....... 그것뿐이었다. 그제야 난 한숨을 쉬며, 안심하고 화장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실은 완전히 들어선 것은 아니고, 문턱에 두발을 올린 것뿐이다. 동작은 딱 거기까지였다. 난 문 앞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눈에 비친 광경을 ‘아비규환’이라 표현해도 적당할 거다. 아니 조금은 미숙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은 타일바닥은, 내 두 발을 꽁꽁 묶어버렸다. 공포의 한계란 것은 이런 느낌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나에겐 이미 물러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서 화장실을 조금 묘사해 보려 한다. 문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좌측에 변기가 있다. 그 뒤로는 수건과 휴지를 놓는 여닫이 선반이 달려있다. 일단 변기를 지나치면, 다시 좌측으로 세면대가 보인다. 세면대 자투리는 변기 뒤편으로 이어져, 목욕도구를 놓는데 쓰인다. 그리고 화장실 끝에는 샤워기가 달려있다. 역시 좌측 윗부분에 있으며, 욕탕은 없다. 색은 온통 하얗다. 변기며, 샤워기며, 세면대며, 선반이며....... 온통 흰색뿐이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거의 붉게 변해있었다. 바닥은 전부 말라버린 핏자국으로 덮여있고, 세면대엔 이상한 분비물과 더불어, 아직 굳지 않은 피가 잔뜩 고여 있다. 피는 사방으로 불규칙하게 튀었나보다. 그 형태가 너무도 기이해, 공포심을 더욱 자극시켰다. 사람이 살해당한 현장을 본적은 없지만, 바로 이런 것일 거다. 쾌쾌한 냄새를 감지한 건, 이곳에 들어선 지 제법 지나서였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느꼈던 냄새에 대한 환각은, 단순한 헛것이 아니었단 게 증명된 셈이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시각이다. 이 피는 동물의 피가 아닐 거다. 색깔이며, 냄새며- 사람의 본능적 감각이, 이것은 사람의 것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허나 가장 재밌는 건, 샤워기 바로 밑 부분에 놓여있는 물체였다. 그것은 얼핏 봐도 사람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물론 마네킹도 아니다. 인간의 팔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손이다. 잘려진 손이다. 모양으로 봐선 오른손이다. 손목 약간 밑 부분부터만 존재한다. 잘린 면은 매우 거칠었다.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 낡은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난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그곳으로 옮겼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의 윤곽은 뚜렷해졌고, 잘려진 손은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게 됐다. 그 끝으로는 낯익은 노란색 고래장난감이 삐져나와 있다. 내가 찾던 화장실 열쇠는 누군가가 가져갔으리라는 추측은 사실로 드러났고, 실제로 바람에 손이 달려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 손은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 열쇠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체를 움켜쥔 손모양은 조금 더 커다란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역겨움을 무릅쓰고 다가가 몸을 숙였다. 반쯤 굳어버린 끈적끈적한 액체가 발바닥에 달라붙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잊은 채, 손을 천천히 움직여 누군가의 손 쪽으로 가져갔다. 아주 천천히....... 스윽, 스윽 하는 바람소리에 어깨가 들썩였다. 몸이 앞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엄지발가락에 생긴 못이 타일에 심하게 짓이겨졌다. 하지만 고통이 전해져 오진 않았다. 내 바람으로는 더욱 천천히 움직이고 싶었지만, 난 갑자기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삐요요요요요요옹.......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음악소리가 이 좁은 공간에 울려 퍼진 거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잘려진 손에서 나는 소리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손은 누군가의 핸드폰을 쥐고 있었으며, 화장실 열쇠는 핸드폰 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난....... 전례 없던 용기가 어디서부터인가 생겨났는지, 받지 말아야 했던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2. 잠에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여, 여보....... 세요?” “.......” 숨소리가 조금 거칠다. “여, 여보세요?” “훗.” 상대방이 웃는다. “여....... 여보세요?” 내 목소린 여전히 흐릿했다. “누구세요?” 난 계속 멍청한 질문만 하려나보다. “누구 같아요?” 처음 듣는 목소리다. 하지만 상대가 입을 열었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누구....... 시죠?” 상대의 목소리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사실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다음부터였으니까. “전 당신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현재 당신의 상황입니다.” 계속 모호한 말만 늘어놓는다. “그게 무슨 뜻이죠?” “시간이 없어요. 질문은 그만하고, 듣기만 해요.” 사실 난 소리를 낼 기운도 없었다. “당신은 아주 빈틈없이 짜여 진 음모에 발이 빠져있습니다. 쉽게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칠 거예요. 오늘 당신이 회사로 출근한 후, 그 곳-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발을 붙이고 있는 곳 서 믿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어요. 핏자국들 보이시죠? 누군가 그곳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범인은 시체를 토막 낸 후 사라졌죠. 자초지종은 말할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했다간 당신은 꼼짝없이 살인누명을 쓰게 될 거에요.” 상대가 잠시 숨을 고르자, 난 틈을 파고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살인누명이라뇨?” “당신 집에 있는 핏자국을 경찰에게 어떻게 설명할 거죠?” 생각해 본 적 없다. “그건.......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믿어주죠?” “지금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전화를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걸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당신 집주소를 대고, 그곳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신고할 거거든요. 당신이 신고할 틈도 없이, 경찰들에게 알릴 겁니다. 결국 당신은 꼼짝없이 누명을 뒤집어쓸 수밖에는 없어요.” “지금 경찰들이 몰려온단 말입니까?” “아뇨, 당신이 경찰에게 전화를 하려고 할 시에만, 그렇게 될 겁니다.” “누가 그렇게 하죠?” “제가 합니다.” “당신이.......” 순간 뱃속으로부터 점심에 먹었던 것들이 올라옴을 느꼈다. “말씀드렸잖아요. 당신은 잔인한 음모에 빠져버렸어요.” “결국 당신이 범인이군요.” “아뇨, 전 아닙니다. 그걸 알아내는 건 당신 몫이죠. 당신은 절대 경찰서로 가면 안 됩니다. 신고는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증거가 없기 때문이죠. 경찰들은 누가 살인범인지 모를 겁니다. 잡을 수 없을 겁니다. 결국 그들 눈앞에 보이는 당신만이 모든 걸 뒤집어쓰는 겁니다. 당신도 잘 알잖아요. 경찰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자신뿐이에요.”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제 말을 거스른다면, 더욱 큰일을 치르게 될 겁니다. 이건 확실하게 맹세할 수 있어요. 그러니 절 믿고, 제 말을 들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전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요.” 난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튼도 꼼꼼히 쳐있고, 창문도 닫혀있다. 하지만 상대의 허풍을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냥 무시하고 전화를 끊은 후, 신고를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상대의 말에는 자신감이라는 거대한 힘이 들어있었다. 난 마음을 추스른 후 말했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옷을 적당히 챙겨 입고, 집밖으로 나오세요. 아무것도 건드리면 안 됩니다. 만약 핏자국을 지운다거나, 기타 증거를 인멸하려고 한다면.......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지금 들고 있는 핸드폰, 그것만 들고 나오세요. 저하고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입니다. 물론 착신만 되는 거지요. 당신의 전화기는 놓고 나오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또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어서도 안 됩니다. 당신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기억하세요. 전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3. 작년 여름에 사놓은 검정색 오리털 파카만으로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날씨는 겨울밤 치고는 제법 따스했지만, 놀란 가슴은 도무지 진정이 되지가 않았다. 심장박동보다도 바삐 움직이고 있는 허벅지는 가슴의 요동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다리 근육이 1초에 10번은 흔들거리고 있음을 느끼며, 걷고 또 걸었다. 목적지는 생각나지 않았으나, 시간이 얼마 없다. 전화를 건 상대는 나에게 유예기간을 주었다. 지금으로부터 48시간! 그 안에 범인을 잡아야 한다. 놈의 목을 끌고 경찰서로 달려가, 내 집에 있는 핏자국들을 설명해줘야 한다. 이런 막연한 문제를 내놓고는, 나를 무방비상태로 만든 후, 전화를 끊어버린 무책임한 놈은 누구일까? 그자는 정말 범인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도대체 누가 죽은 걸까? 내 집에서 살해당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시체는 범인이 철저하게 숨겨놨을 테니 찾기도 힘들겠지만, 설령 찾는다 해도 조각 난 시체의 신원을 알아내기란 힘들 것이다. 하여간 일단 피해자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내는 게 급선무다. 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한다거나, 전화를 걸 수도 없다. 시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테니, 신문에 날 리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아는 사람들 집을 죄다 찾아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전부 확인할 수도 없다. 적어도 누가 죽었는지 만 알 수 있다면, 용의의 초점은 좁혀지겠지만.......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 전화를 건 놈은 뭘 바라는 걸까? 내가 어떻게 움직여주길 원하는 걸까? 적어도 그 힌트는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너무도 불공정한 싸움이다.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야 한다. 나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격은 있다. 내가 먼저 그자에게 전화를 걸 순 없지만, 오게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목적은, 그자의 말이 사실인가를 밝혀내는 데에 있지만....... 난 곧바로 근처 시내로 나갔다. 택시를 이용해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에 몇몇 사람들은 보였으나,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있던 자들뿐이었다. 차 안에서도 미행당하진 않은 것 같았다. 난 지하철 승강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뒤편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는 공중전화박스로 몸을 넣었다. 호흡을 좀 거른 후 전화기를 집어 들기까지는 5초도 걸리지 않았으나, 버튼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주머니에서 낯익은 벨소리가 울려 퍼졌음으로. “여보세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당신은 다른 전화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걸 잊으신 것 같아서 연락드린 겁니다.” “잠깐!” 그냥 끊어버릴 것만 같았으나, 상대도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다. 상대보다 무언가를 좀 더 알고 있는 것....... 그게 바로 우월주의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때에 따라 위험요소로 변모할 수도 있다. 난 강자가 가진 약점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다. “무슨 용건이라도?” 마치 놀리는 것 같은 말투였고, 바라던 바다. “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죽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아니, 적어도 전화는 쓸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나요? 경찰서에 전화 안하겠습니다. 맹세하죠. 못 믿겠으면 당신이 대신 걸어주던가요. 그건 괜찮겠죠?” 난 최대한 어눌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내가 완전히 그를 의지하고 있고, 이미 그의 손아귀에 걸려들었다고 믿게 만들고 싶었다. 약발이 먹혔는지, 상대는 조금 구체적인 말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모든 일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겁니다. 어떤 인간이든 누구나 죄 하나쯤 가지고 있으며, 비밀도 있는 겁니다. 전 당신이 솔직해지길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걸 간직하지 말고, 드러내 보세요. 그럼 광명이 비칠 겁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뭐지요?” 난 여전히 상대가 갑작스레 전화를 끊을까 두려웠으나, 그자는 내 뜻대로 행동해주었다. “글쎄요. 설명하기 애매하지만....... 딱 한 가지 원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죠?” “그 핸드폰. 제겁니다. 제법 비싸게 주고 산거예요. 돌려받아야죠. 전 그것만 돌려받으면 됩니다. 당신이 모든 걸 해결하게 되면, 그 핸드폰을 저에게 돌려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자는 여전히 나를 놀리고 있다. 하지만 난 그가 계속 그래주길 바랄 뿐이다. “나에게도 기회를, 아니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방법을 알려주십쇼. 어떻게 해야 하죠? 전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요?” 난 마지막 마디에서 내 스스로를 최대한 낮췄고, 상대가 더욱 우월감에 취해주길 바랬다. “가야할 곳은 범인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시체가 있는 곳은 더더욱 아니죠. 바로 동기가 있는 곳입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렸다시피, 이 모든 일의 목적은 당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데에 있습니다. 아까 말한 48시간은 제가 드린 게 아니에요. 범인이 당신에게 준 거죠. 아니, 엄밀히 말하면 범인은 48시간 후에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당신은 그걸 막아야 합니다. 아니면, 완벽히 누명을 쓰고 말거에요. 그걸 제가 알려드린 것뿐이에요. 결국....... 제가 드린 건가요? 후후.” 그자는 잠시 말을 끊었으나, 난 머릿속이 복잡해 쉬이 대응하지 못했다. “48시간. 이건 제 의도가 아닙니다. 시간을 더 드리고 싶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하네요. 하지만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에요. 좀 더 현명하게 군다면, 충분히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겁니다. 하여튼 분명한 건 이겁니다. 첫째, 당신은 48시간 내에는 경찰에 신고할 수 없다. 이건 제가 막을 겁니다. 제 역할은 이것뿐이에요. 이유는 묻지 마세요. 만약 어기게 된다면, 제 신고로 인해, 당신은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되겠죠. 그러나 더 무서운 건 48시간 후부터 입니다. 범인에 의해 그야말로 완벽한 증거들이 경찰에 제출됨으로써, 당신을 꼼짝 못하게 만들 겁니다. 범인을 막지 못한 당신은, 제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예요. 분명히 말하지만 범인에게는 확실한 대응책이 준비돼 있습니다. 이건 절대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유예기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끔찍한 현장을 빠져나오듯- 어디론가 도망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당신으로서는 무조건 막아야 하는 겁니다. 둘째, 그러니 당신은 48시간 안에 범인을 잡아야 한다.”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한 후, 힘주어 말했다. “셋째....... 당신을 항상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 4. 난 모 아파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계를 내려다보니 오전 11시가 좀 넘었다. 밤새도록 걸었더니, 속옷이 흠뻑 젖어버린 것 같다. 좀 전에 먹은 빵 조각이 허기를 잠시 달래줬지만, 담배 한대를 피웠더니 다시 공복의 느낌이 전해져 온다. 물론 내가 이곳에 온 건, 우연이 아니다. 확실한 목적지였고, 종착지이길 바랐다. 난 기다림에 익숙했지만, 그래서는 안 될 상황에 직면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제발 그녀가 빨리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로- 잠시 접어두었던 어떤 생각이 다시금 그려지고 있었다. 제법 정직하게 살았다고 자부해왔다. 간디보다 더 위대한 비폭력주의자이기도 했다. 비폭력을 위해서라면 사람도 죽일 수 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신념이자, 자긍심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 내가 그릇된 행동을 했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단 한 번이었지만, 난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동기 또한 대단히 이기적인 것이어서, 내 신념으로도 자위할 수 없었다. 하여간 고아였던 그녀를 측은하게 생각해 사랑하게 된 것이, 또한 그녀가 결국에 가선 날 버린 것이 실수였다. 그것이 방아쇠였다는 걸- 그녀는 지금도 모를지 모른다. 난 바로 그것이 알고 싶어서 온 거다. 그녀가 나의 죄를 벌하려 하는지, 아니면 용서를 아니, 이해를 해주었는지....... 그녀가 날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려 한 건 잘못이었다. 허나, 난 그것을 꾸짖는 게 아니었다. 분명 나를 저버렸다는 건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속이는 짓은, 절대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거다.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면- 그것이 순전히 그녀 때문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실은 나 스스로 느끼는 자괴감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다. 하여간 그녀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은- 글자 그대로보다 더 큰 죄였다. 죄인은 그 누가 될 수도 있는 죄.  그래서 난 그 남자를 죽였다. 사고로 위장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해 의심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난 용의자 축에도 들지 않았으니까. 경찰들은 모두 바보였으니까. 그 날부터 경찰에 대한 신뢰감은 바닥으로 꺼져버렸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로 판명이 나고, 그녀는 자취를 감췄다. 그 후에도 난 그녀를 잊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간에 나에게도 불행한 일이 몇 가지 발생했는데, 내 얼굴 절반이 찢어져 나갈 만큼의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는가 하면, 여동생이 화재로 사망했다. 죽음 같은 절망의 시간이었으나, 모든 것은 내 죄 값이라고 생각하며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더욱더 그녀를 잊을 수 없더라. 그리고 2년 후,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이었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됐다. 물론 우연히 지나친 것에 불과했고,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난 그녀 뒤를 미행했다. 집도 알아냈다. 그래서 그 근처로 이사까지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바로 그 곳이다. 난 당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지만, 가끔 그녀가 그리워질 때면 몰래 그녀 집 주위를 배회했다. 물론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그녀가 나를 보게 된다면, 또다시 자취를 감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난 그녀의 모든 걸 알고 싶었고, 그녀의 삶을 닮고 싶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차츰 발을 끊기 시작한 것이, 그 후로 3년 동안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까지 온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된다는 것이 조건에 껴있긴 했지만, 나에게도 그것은 불필요한 조건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난 경찰을 믿지 못했다. 조건이 없었더라도 난 내 혼자 힘으로 해결을 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전화를 건 자는- 경찰에 대한 내 불신감을 알고 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췄다. 비단 그 말 뿐이 아니었다. 그는 내 죄를 확실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뉘앙스가 그랬다. 만약 내가 경찰에 신고를 한다거나 그자의 말을 거스른다면, 5년 전의 죄를 모두 까발릴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날 꽁꽁 묶어둘 수 있었던 그자의 힘이었나. 어쨌든 난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자는 나에게 동기가 있는 곳을 찾으라고 했으며, 날 증오할 수 있는 대상으로는 그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살인범일수도 있고, 전화를 건 자있을 수도 있으며....... 이미 토막 난 시체일 수도 있다. 아니라면, 적어도 이 세 사람과 어떤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하여간 그녀가 해결의 열쇠인 것이다. 가장 희망적인 건, 그녀가 살인범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난 그녀를 설득시키면 그뿐이다. 그게 안 된다면, 죽이면 된다. 한때 그녀를 사랑했지만, 내 목숨을 바칠 순 없으니까. 하지만....... 분명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녀가 시체라면....... 난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하지만 그럴 걱정은 없을 것 같다. 상황적으로 봐도 그녀가 피해자라면, 나에 대한 동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를 증오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은, 그녀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로, 그녀가 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난 생생히 살아있는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비교적 가까운 위치였으나,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난 교통사고 후, 성형수술로 인해 얼굴이 조금 변해 있었고, 시간이 날 늙게 만들었다. 난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변함없는 그녀의 피부를 관찰하면서도, 손으로는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물론 외투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고, 난 조그마한 쪽지를 접어 그녀 옆을 지나침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토끼 같이 놀란 그녀의 얼굴을 뒤로한 채,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5. “몇 년 전....... 제 애인이었어요.” 수정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여성이, 다짜고짜 연지민에게 쪽지를 내밀며 말했다. 지민은 쪽지를 살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강정민이라는 예전에 사귀던 애인이, 느닷없이 나타나 이 쪽지를 주고는 사라졌다는 말씀이죠?” “네.” “그런데 이것을 저에게 가지고 온 이유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지민의 상처 난 왼뺨을 보며 말했다. “그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에요.” 지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물었다. 때문에 사무실 안에는 먼지가 일었다. “사라져요? 어디로요?” “그건.......” 수정은 좀 전의 지민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형사님이 찾아주셨으면 해서요.” “사람 찾는 건, 제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지민의 발언이 무책임하게 들렸는지, 순간 발끈했다. “쪽지를 읽어보셨나요? 전 무언가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아달라고 하는 말이에요. 단순히 집 잃은 아이가 아니라고요!”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연지민은 다시 한 번 쪽지를 살폈다. [ 나, 기억하지? 정민이야. 내 모습이 좀 변했어도, 당신이 나를 잊지 않았기를 바라는 수밖에. 하여간 난 지금 위험에 처해있어. 누구와 이야기를 할 수도, 전화도 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 부탁해. 일단, 나와 의사소통을 하려면, 쪽지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어. 쪽지는 서로 모른 척 지나치며 건네는 거야. 알았지? 절대로 티를 내선 안 돼. 정말 위급한 상황이니까, 묻지 말고 도와줘. 알아들었으면, 날 쫓아와. 하지만 조심해야 돼. 누군가 봤을 때, 네가 나를 쫓고 있다는 걸 들켜선 안 되는 거야. 난 지금 백화점 쪽으로 걸을 생각이야. 백화점은 사람이 붐비니까, 작전을 짜는 데는 적격이거든. 그러니까 따라와 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해주는 것 명심하고. ] 지민은 그녀의 뺨을 오늘만 열세 번째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 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그녀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뺨을 붉히며,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엔 무척 당황스러웠어요.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죠.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조금 머뭇거렸죠. 무엇보다 정민 씨를 바로 알아보지도 못했거든요. 얼굴이 많이 변해있더라고요. 하여간....... 조금 지나니 제정신이 들었죠. 그리곤 빠른 걸음으로 백화점으로 향했어요. 하지만.......” 지민은 이제야 깊은 관심을 들어내며, 몸을 앞쪽으로 숙이며 물었다. “하지만?” “그를 찾지 못했어요. 4시간동안 백화점을 헤맸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사라져 버렸다고요.” 연지민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단지 그것뿐?”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러자 지민은 그녀의 어깨에 대담하게 손을 올리며,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분은....... 집으로 가셨나보네요. 아니면 갑자기 다른 약속이 생각났다던가. 뭐, 아무튼.......” 아! 하며 그녀는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걸 설명 안 드렸군요. 그래서 며칠 후, 그의 직장에 전화를 걸어봤어요. 다행히 옮기진 않았더라고요. 뭐, 평생직장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여간 그런데....... 그는 일주일 째 출근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연락도 없더랍니까?” “네.” 그녀는 침을 꼴딱 삼키며 말했다. “그는 완벽히....... 사라진 거예요.” 지민을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참으로 괴상한 이야기군요.” 6. “강정민은 최근에 헤어진 애인 성지현 씨를 토막 살해한 후, 사체의 손 한쪽만 화장실에 남겨둔 채, 완전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 형사는 연지민 반장에게 자신이 하루 동안 조사한 사실을 기계처럼 설명했다. 굳게 다문 입을 자랑으로 여기는 그의 목소리에선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참으로 희한한 사건이야. 왜 팔 한쪽을 남겨뒀을까? 자네 의견은 어떤가?” 그가 웃을 때면 얼굴이 뒤틀려지는데, 그것이 싫어서인지 이 형사는 잘 웃질 않았다. 하지만 그도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지금 같은 곤란한 상황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멋쩍은 웃음이 얼굴에 그려지곤 했다. “아니야, 됐어. 자네는 조사나 열심히 해. 생각은 내가 할 테니까.” 지민은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 “동기는 알아봤나?” 이 형사는 또다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알아 봤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헤어진 지는 6개월이 넘었고, 서로간의 왕래는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럼 왜 죽였을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나?” “물론 그것도 알아봤습니다만....... 정신병원에 다녔던 기록은 전혀 없었습니다.” 지민은 두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그래, 그건 그렇다고 해. 뭐,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었겠지. 그런데 피해자 신원은 어떻게 알아냈지?” “그녀의 핸드백이 그 집에 있었습니다. 유전자 감식을 통해, 이틀 만에 확인할 수 있었죠.” “그런데 말이야. 시체가 토막이 났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었지? 그리고 확실하게 죽었을까? 팔만 잘리고 살아난 사람은 역사상 숱하게 많았을 텐데.” 이 형사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멸의 눈으로 연지민을 쳐다봤다. 아니, 적어도 연지민으로서는 그렇게 느꼈다. “현장 여기저기 널려있던, 각 부위의 살점들이 그것을 말해주더군요. 자를 때 떨어져 나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피의 양인데요. 너무 많았습니다. 그 정도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죽기 직전일 겁니다.” “확실하군. 확실해....... 너무나 명확해. 좋아, 이쯤에서 수배령을 내리자고.” 연지민의 말이 떨어지고 정확히 149시간 후, 썩을 때로 썩은 시체가 외딴 해변에서 발견되었는데, 삼일 후 강정민의 것으로 판명 났다. 7. 장마의 여름이 시작되고, 더운 날씨가 한풀 꺾이는 가 싶더니- 다시 늦더위가 시작된 모양 이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수정 씨.” 내 이름을 부르는 연지민 반장을 앞에 두고, 난 비 오듯 내리는 땀을 닦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상하게 내 몸은 더위에 익숙하지 못하다. 강정민의 시체가 발견된 후부터, 몇 개월간 가끔씩 찾아오던 형사들이 이제는 거의 뜸해졌다. 살인사건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걸리나보다. 수정이라는 이름을 바꿔버리고 잠적해버릴까도 생각했건만, 참고 또 참아내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건, 단순한 의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연지민이라는 형사가 나에게 호감을 내비췄기 때문이었다. 나도 실은 그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고, 그건 ‘이용’이라는 단어로도 표현될 수 있었다. “이제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 되었어요. 의심스러웠던 부분들도 전부 정리했고요. 이제 앞으로 이런 일로는 찾아뵈는 일 없을 겁니다.” 이런 일로는? 난 웃음을 참으며,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럼 이제....... 이별인가요?” 연지민의 가슴에 송곳을 박는 말인 건 알았지만 의도된 것이다. “그게....... 이별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죠.” 스스로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나보다. 하지만 나에겐 유치하게 들렸다. 그래도 그런 그가 좋다. “그건 무슨 의미죠?” 연지민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점점 마음에 든다. “말 그대롭니다. 전....... 당신을....... 당신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완전히 숙여버렸다. “그렇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와 내가 거의 동시에 같은 단어를 내뱉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게 됐습니다. 전....... 전 그게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전.......” 그는 서서히 고개를 들며, 내게 충격적인 한마디를 전했다. “전 당신을 살인죄로 체포해야만 합니다.” 난 멍한 눈만 치켜뜬 채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전 형사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난 그의 말을 재빨리 끊었다. “도대체 제가 누굴 죽였다는 거죠? 누굴 죽인 죄로 체포되는 건가요?” 연지민은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당신은 조수정 씨 살해혐의로 체포됩니다. 강정민 씨.” 8. 강정민. 이 여성과 나의 인연은 정말이지 질기고 질겼다. 겨우 끊어내는가 싶었는데....... 난 내 자신인 강정민을 버리고, 조수정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생을 살려고 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조수정이 쳐 놓은 함정에 완전히 걸려들었기 때문에,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던 거다. 그건 인과응보였다. 내가 사람을 죽여 놓고 무사히 빠져나왔던 것처럼, 죽이지도 않은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교수형을 당해야만 했던 거다. 조수정은 그걸 원했던 거다. 그녀는 함정을 파놓고, 내게 전화를 걸었으며, 나를 미행했다. 그리곤 내가 자신을 찾게끔 만들었다. 그것도 모른 체, 자신에게 쪽지를 건넨 내가 얼마나 한심스러웠을까. 하지만 그녀는 나를 쫓아왔고, 나와 만났으며, 대화도 나누었다. 내가 그녀를 3년 간 지켜봤던 것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가 나를 지켜보며, 살의를 키웠다고 했다. 날 가지고 논 것이다. 그녀는 내 지문이 묻어있는 피 묻은 칼을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죽은 피해자와 조수정을 이을 수 있는 연결고리는 없었기에, 모든 걸 밝힌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아니, 이 모든 걸 밝힐 자신이 없었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는 살인 때문에, 잊혀진  내 죄를 들춰내긴 싫었던 거다. 나는 아직 핏자국이 남아있는 핸드폰을 재미있다는 듯이 만지작거리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왜 그냥 신고하지 않았니? 그랬으면....... 더 쉬웠잖아.” 그러자 그녀는 좀 머뭇거리며 이렇게 말하더라. “글쎄....... 난 그냥....... 그냥 이 상황을 즐기고 싶었던 것뿐이야. 재밌잖아. 네가 했던 것처럼, 나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곤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난 그 모습이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만약 네가 곧바로 신고를 했다면....... 넌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지. 그렇지만 넌 경찰을 못 믿잖아. 난 그걸 이용한 거야. 넌 이미 현장을 놔두고 도망친 꼴이 됐지. 이젠 늦어버렸어. 넌 계속 도망쳐야 해. 평생을 그렇게....... 그렇게 살아야 해. 48시간이 지나면, 네 지문이 찍힌, 피 묻은 칼을 너희 집 근처에 잘 보이게끔 놔두고는, 경찰에 전화할 거야. 그 안에....... 넌 멀리 달아나면 돼. 이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야.” 그녀가 나에게 부여해 준, 48시간이라는 의미를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범인, 피해자, 동기 나부랭이 따위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거다. 아니,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예정된 일이었으니까. 내가 너무 맘 편히 살았었던 것뿐. 난 죄인이었고, 그걸 인지한 채 살았어야 했는데. 난 화장실의 핏자국을 보는 순간....... 미친 듯이 도망쳤어야 했다. 단지 내 이기심이, 범인을 쫓았던 것뿐이다. 난 순간 그녀가 쳐 놓은 덫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한 그것이 나의 잠자던 살기를 눈 뜨게 했다. 교통사고 후 얼굴이 심하게 망가졌을 때, 난 조금 큰 수술을 받게 됐는데, 얼굴을 완전히 뜯어고칠 수밖에 없었다. 난 조수정의 얼굴을 택했다. 완전히 똑같진 않았지만, 비슷하게 닮긴 닮았다. 난 그 모습에 만족했다. 3년간 그녀를 지켜보며, 그녀의 모든 걸 알게 됐다. 난 그녀로써,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더구나 고아인 그녀를 완벽히 구분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또한 그것은 아주 효과적인 선택이었다. 난 조수정을 죽이고, 바닷가에 버렸다. 그리고 경찰을 찾아 나섰다. 이건 심리적으로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다시 생각해 봐도 가히 천재적이었다. 가짜 강정민의 시체가 발각되고 나면, 경찰은 조수정이라는 사람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혹시라도 내가 가짜라는 것이 들통 날 우려가 있으니까. 그래서 미리 경찰들에게 선입견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시체가 발견되기 전이기에, 굳이 세밀한 신분확인은 하지 않을 것이고,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그 결과 시체발견 후에도, 그들은 나를 의심하지 못했다. 아니, 적어도 내가 진짜 조수정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 못했을 거다. 그냥 내 얼굴만으로, 그들은 그렇게 믿어버렸으니까. 연지민은 그런 나의 이용가치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된 건,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었지만. 하여간 내 바람대로 조수정의 시체는 심하게 부패된 채 발견됐고, 내 옷과 신분증을 지니고 있었음으로, 세상의 눈을 다시 한 번 간단히 속일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경찰을 믿지 못하게 된,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세 번째는 결국 오지 않았다. 하여간 모든 건 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조수정이 여자로써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결국 그녀는 나를 경멸한 꼴밖에는 되지 않았으니까. 하여간 이젠 전부 끝이 나버렸으니, 후련하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남아있다. 그녀는 어떻게 화장실 문을 잠글 수 있었을까? 열쇠는 분명 하나였고, 그것은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의 손에 꽉 쥐어져 있었다. 난 문을 열기 위해, 온갖 도구를 가져다 뜯어내야만 했고 말이다. 과연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 화장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무슨 마술을 부린 걸까? 9.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연지민은, 여전히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쓸쓸히 입을 열었다. “그건 일종의 보험이었습니다.” 조수정 아니, 강정민은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험....... 이라뇨?” “그건 당신이 경찰에 신고했을 시에만 발효되는 일종의 보험입니다. 분명 당신은 그녀를 만난 후, 그 문제의 핸드폰을 건네주었을 거예요.” 강정민은 조수정이 피가 묻어있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던 장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어차피 그녀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돌려받았을 겁니다.” “돌려받았다기보다는 그냥 놓고 가던데요.” “그게 그겁니다. 결국 당신 손에 다시 들어왔으니까요. 그건 증거품입니다. 그녀의 죄를 막아주는 증거품. 그것도 강력한 용의자 스스로가 내놓는 만큼, 더욱 확신을 갖게 해주죠.” 강정민의 멍청한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러자 연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대단히 위험한 범죄였습니다. 당신이 경찰에 신고할 가능성은 너무 높았고, 그랬다면 분명 조수정은 의심을 받았을 테니까요. 당신과 조수정은 서로 상대가 범인이라며 혈전을 벌였겠죠. 하지만 그 화장실을 밀실로 만들어버리면 그뿐입니다. 조수정은 불가피한 상황이 온다면 그 화장실을 완벽한 밀실로 만들어서, 아예 살해불가판정을 받으려 했던 겁니다. 즉, 그 핸드폰은 미끼였고, 사건의 마무리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조수정을 살인범이라고 주장하는 당신 손에서 나온 것이라, 신빙성도 대단히 높았을 테고 말이죠.” “그럼 밀실은 어떻게 만든 건가요?” “물론 생각하신 그대로죠. 밖에서 열쇠로 잠근 겁니다.” “하지만 열쇠는.......” “그건 열쇠고리였죠. 당신은 열쇠고리를 열쇠 자체라고 믿어버린 것뿐입니다. 그게 조수정이 원했던 바였고 말이죠. 당신을 얼른 그 집에서 나오게 한 후, 자신을 찾아오게 만든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단지 당신과 만날 때, 진짜 열쇠로 살짝 바꿔치기만 해놓으면 되는 거니까요. 또 재밌는 건.......” 연지민은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당신이 발각된 것도, 그 열쇠 때문입니다. 사실 가짜 강정민의 시체에서 열쇠 하나가 발견됐을 때도,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몇 주 후,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확인 차 현장에 들렸건만....... 화장실 열쇠가 아니더군요.” “그럼요?” ....... 대화는 영원히 계속 될 것만 같았다. - The End - 창작추리소설클럽 mystter.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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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대화는영원히 계속될것만 같앗다 .. ㅋㅋㅋ 끝맺음 좋고, 음.. 흥미로운 소재이군요, 잘읽엇습니다 ^

[조 현]

러빙님 감사합니다 ^^ 며칠간 흐린 것 빼곤 봄기운이 완연한데, 건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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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넴 ! 소설이나좀 써주세염 !! 기다리고잇담니당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