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채널e]파락호의 비밀
EBS 역사채널e에서 방송된 파락호,여러분은 파락호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파락호는 조선시대때 재산과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입니다.파락이라는 뜻 자체가 파괴나 몰락,털어내어 없애다 등을 뜻하는 말이죠.그런데 일제시대때 명문가집안에서 파락호로 이름을 날렸던 그분. 김용환선생님의 비밀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요?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라고 불렸던 학봉 김성일의 집안은 웬만한 사람들도 다 알고있는 명문가집안으로 알려져 있었죠.일제시대 당시,혼란스러운 분위기로도 모자라 이집안에서도 노름꾼이 나왔다며 발칵 뒤집어졌는데요.그의 이름은 바로 김용환.당시 안동의 있는 노름판의 노름판에는 모두 참여해 판돈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하는데요.
판돈만 유유히 가져갔던게 아니죠.집안에서 가지고 있었던 당시 200억 상당의 논과 밭 18만평을 팔아버리고,사당까지 팔아버리려던 것을 사람들이 말리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의 다섯손가락 안에 꼽혔던 파락호 김용환은 급기야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집을가서 농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돈마저 노름돈으로 탕진하고, 헌 농짝을 보내는 둥 아내와 외동딸을 상심에 잠기게 하는 비정한 아비였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윤학준은 <양반동네 소동기>란 책에서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형평사운동 투사였던 김남수, 그리고 김용환을 꼽을 정도였습니다.
평생을 아버지를 원망하고 살았던 딸 김후웅은 파락호였던 김용환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는데요. ".. 그럭저럭 나이차서 십육세에 청송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사정.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끝내는 귀신 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이 모든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대려고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그것마저 다 바쳤구나.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우리 아배 참봉나으리 .."
김용환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떠난 후 여러증언과 집안재산이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들어간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서 탕진한줄 알았던 노름돈이 아니였다는것을 알게되죠.김용환이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얻고서라도 비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제의 눈을 피해서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김용환이 노름꾼이 되어서라도 전 재산을 몽땅 털어 독립운동을 지원하게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용환이 어렸을적,할아버지 김흥락이 사촌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줬다가 왜경들에게 발칵되는 장면을 보게됩니다. 흉악한 왜경들앞에서 종가마당에서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 김용환은 그 이후로부터 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하게 되고,식구들이 고초를 당하지않으려면 은밀히 진행되어야된다는 사실을 깨닫지요. 김용환이 숨을 거두기직전에 오랜동료가 이제는 말할때도 되지않았느냐하고 권유했지만, 김용환은 선비로써 마땅히 해야할일을 했을뿐이다. 아무말도 하지말아라 하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반세기가 지난 1995년,정부는 김용환에게 건군훈장 애족장을 추서합니다.김용환이 파락호라는 누명을 얻으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이 나라. 우리가 편하게 살고있기에 그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