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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玄漢詩房(우현한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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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揭示板 스크랩 2014.9.5일 금요일 이야기가 있는곳 저녁걷기(남산)
溢空(재휘애비) 추천 0 조회 140 14.09.06 09:18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9/5일 금요일은 남산걷기다.

남산 백범김구선생님 과 안중근의사를 만나는 시간, 그리고 남산골 한옥마을의 옛정취를 느낀다.

 

코스는 서울역~숭례문~하얏트호텔(럭셔리엑스포)~공원(팔도소나무,야생화원)~남쪽소나무숲탐방로~남측순환도로~남측포드아일랜드~서울타워~팔각정~봉화대~산성길~잠두봉포토아일랜드~옛남산도서관(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안중근기념관~백범광장~호현당~조지훈시비~목면산방~와룡묘~중부공원녹지사업소~1호터널~남산골 한옥마을~충무로역

 

소요시간은 약4시간

 

 

 

복원된 숭례문

삼봉정도전선생의 주자학과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설계에 의해...

인의예지신을 동서남북으로 배치를 했으니, 8개의 대문이다.

 

정동()의 흥인지문() 곧 동대문(),

정서의 돈의문() 서대문(西), 형체는 없으지고, 돈의문터에 표시만 있다.

정남의 숭례문() 곧 남대문(),

정북의 홍지문(弘智門),  숙정문() 곧 북문(폐쇄), 아직은 형체가 남아있다.

동북()의 혜화문() 곧 동소문(),

동남()의 광희문() 곧 수구문(),

서남(西)의 소의문() 곧 서소문(西),

서북의 창의문() 곧 자하문() 등() 8개의 문.

, 4대문과 4소문을 합치어 이르는 말이다.

나머지 신은 보신각(普信閣)이다.

 

표지판을 새로 설치공사를 하고있다.

 

 

경찰 두분이 근무를 하고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에 바로적용하는듯...

 

걸어서 하얏트호텔을 가다가 버스가 길래 타고 바로 도착.

지인이 산삼보다 귀한 도라지 사업 전시회가 있다고 해서 잠시 방문

 

"2014 럭셔리엑스포"라 그런지 럭셔리 한것들만 전시하고 있다.

 가격은 물어볼수가 없다, 사지도 않을거면서 가격은 왜물어봐.

 

 

예쁜 정원도 꾸며 놓았다.

장충체육관에서 시작하는 서울한양도성둘례길 제3코스 남산코스....

팔도소나무숲길

회사이름은 잊었지만, 봉사활동중이라고 했다. 카지노운영하는 회사...외화를 많이 번다나...

숲속은 아이들 체험 장소로 활용한다고 한다.

 

 

나무숲속길을 지나서...

 

 

 

 

남측포토아일랜드에서 서울 남쪽정경을 한장 찍고...

날씨는 좋은데...사진이 영...시원찮다.

 

 

 

생태보존지역을 지정하여 자연생태계도 보호하고...

 

 

성곽길 공사도 진행중이고...

 

셔털버스를 운행하는데...이용객이 많다...

걸어서 체험하게 하면 좋을텐데...

서울타워 광장에 분수물을 약간 뿌려주니 시원함을 느낀다.

그곳을 배경으로 포토죤도 생기고...

거의 외국인이다.

봉수대

팔각정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는 사람들 100% 외국인이다.

서울이 방문객 10위권안에 들어가는것을 실감한다.

서울타워

올라가는데 2만원씩 받는다

사랑의 열쇠...

이곳이 명물이 된것 같다.

 

7시부터 무슨공연을 한다고 한다.

저 멀리 삼각산이 보인다.

청와대도 보인다.

내려와서 서울타워을 보니 그래도 높다.

성곽터을 유지하고 있는곳이 드문드문있고 복원을 많이 한것 같다.

장두봉포토아일랜드...

장두봉이란 이름도 이유가 있을것 같은데...

인왕산이 보이고...

 

발굴조사를 한다고 길을 막아놓았다.

 

 

 

 

 

 

 

 

옛날에는 남산도서관자리에 건물은 그대로인데, 주인이 바뀌었네요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태훈(泰勳, 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응칠(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다음 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契 :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 신자들과 함께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連後)·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언도 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定根)·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중근 [安重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자 지도자, 백범김구선생을 다시한번 알아보자.

 

타락한 과거제도에 실망,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다

김구 이미지 1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7. 11(음)~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구(龜), 구(九),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의 가문은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의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서울 부근에 이사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고 어머니는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 없는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세 때에 당시 열에 아홉은 사망하였다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가난과 양반들의 속박 밑에서 국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는 길만이 양반들로부터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채를 서당으로 만들고 이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세(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느꼈다. 이후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섭렵했다. 이듬해(1893)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1894년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고 동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아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병사를 지휘하여 해주성을 공략,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결심

1895년 동학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규율을 잃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자 선생은 연소의 몸으로 이를 수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선생은 당시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하루는 고선생이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예로부터 흥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의(義)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또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망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궐내까지 침입하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保國)하는 길밖에 없다.”

 

이에 선생도 비분에 못이겨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고 선생은 “청국이 갑오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니 선생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고 청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하직 인사차 안진사에게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다다라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김이언 의병진의 소속으로 1895년 동짓달 초에 고산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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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다짐한 선생은 해서 거유 고능선 선생의 말을 듣고 청국을 조사하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인사차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에게 들른 선생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선생의 사진(왼쪽)과 임시정부 주석 시절에 선생이 서명한 태극기(오른쪽)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다

1895년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로 한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을미사변에 뒤이은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으로 의병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하고 안악으로 되돌아 오던 중에 1896년 2월에 치하포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후(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이 선생의 집에 난입하여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는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선생을 쇠사슬로 포박 후 해주옥에 가두었다. 선생은 동년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어 경무관 김윤정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방청을 감시하는 일인 경관 도변(渡邊)에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애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꾸짖자 도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김 경무관은 사건이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감리사 이재정으로 하여금 직접 심문케 하여 감리사가 심문을 개시코자 함에 선생은 먼저 그를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 김창수는 산촌의 일개 천생이나 국모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뜻)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귀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록(임금님의 총애와 봉급)을 도적질 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

1942년 중경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선생의 모습

 

그러자 감리사, 경무관,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때 감리사는 선생에게 하소연 하듯 “창수(昌洙)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비길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하고 경어를 쓰니 옥 사정들의 대우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에 눈을 떠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사형 직전 고종의 특사로 형집행이 정지되다

사형은 면하였지만 석방은 되지 않자, 선생은 탈옥을 감행한다. 그리고는 충남 공주의 마곡사에 들어가 법명 원종으로 출가하게 된다. 사진은 마곡사의 모습

선생은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이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난 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다. 법무대신이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황제의 칙재를 받았다. 황제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 때문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의 하나가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나아가 임금께 보인 즉 황제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가 인천에 가설되고 감리서에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늦게 되었던들 황제의 명령이 인천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일제의 눈치 때문에 석방이 되지 않자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년 3월 9일 밤 탈옥하여 수원, 목포를 거쳐 함평에 도착, 그곳에서 15일간 묵었다. 그리고 보성, 화순, 순창, 담양을 거쳐 올라와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모든 세상의 잡념이 식은 재와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출가(법명: 원종(圓宗)하게 되었던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예불법이며 천수경, 심경을 외우고 보각서장을 배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은신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므로 선생의 본색이 들어나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진력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900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龜)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 지었다. 1901년 12월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교육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힘썼다.

 

선생이 장연에서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국내사정은 서구 열강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야기시킨 후 ‘한일의정서’, ‘한일협정서’ 등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등 침략의도를 드러냈으며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자 선생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준, 이동녕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교편 생활 시절의 선생(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의 모습. 해서 교육총회 학무총감 재임 시 광진학교에서 촬영한 것이다

 

상소투쟁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장기적인 구국운동은 청소년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황해도로 내려와 문화권 초리면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원을 지냈으며 최광옥이 세운 면학회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여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몰두하였다. 또한 1908년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미천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호를 삼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신민회의 황해도 간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안태국등과 함께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다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워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도 대표를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황해도에 선생을 선정하였다. 대표들은 각각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약으로 돌아온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년 1월 5일 일제는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됨에 따라 선생도 일경에 피체되어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어 2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수감 중에 안명근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 형이 병과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고 백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삼은 것으로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선생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망명길에 올라 본격적으로 뛰어든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월 1일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되찾기 위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선생은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에 도착하여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에 몸을 싣고 4일만에(1919. 4. 13) 상해 포동나루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자 마자 신익희, 윤현진, 서병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나이를 고려하여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경무국장은 농공상국, 지방국, 비서국 등과 함께 내무총장의 보좌기구로써 소관업무는 경찰업무와 도서출판, 저작권 그리고 위생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왜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업무도 병행하였다. 같은 해 선생은 서병호, 안정근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이사에 피선되어 활약하였으며 1920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상해임시정부 경부국장 시절의 가족사진(1919~1922) 가운데가 맏아들 김인이며, 오른쪽이 부인 최준례 여사이다

 

1922년 7월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주비회의 알력과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자금 횡령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선생은 안창호, 김덕진, 신익희, 차이석 등 여러 지사들과 동년 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최선의 방책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의 위기를 타개코자 노력하였다. 또한 1922년 10월에는 조상섭, 김인전, 손정도, 양기하 등과 회합하여 조국독립에 필요한 실력준비로 군인양성 및 전비조성을 목적으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발기인이 되어 동월 28일 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열어 이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한국노병회는 한국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전쟁비용을 조성하여 독립군과 전쟁비용이 목적한 수준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하되, 그 전이라도 국가 또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개시한 때에는 이에 참가하여 출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1923년 5월 국민대표회의 윤해, 신숙 등 소수인이 대표회의 이름을 팔아 임시의정원의 직권과 체면을 손상케 하니 동년 6월 6일 선생은 내무총장으로부터 내무부령 제1호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 내용은 “소위 만민대표회에서 6월 2일 연호 및 국호를 정한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다. 2, 3차 귀순을 권유하였으나 일향 고집하여 이와 같이 헌법을 제정함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함이다.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유업의 신기를 보유할 직권으로서 소수인의 집회 등 6월 2일 이래 일체의 불법행위를 엄금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시 해산을 명한다”라 하였다.

 

동년 12월 26일에는 상해교민단 의용대의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24년 4월 9일 국무총리 노백린이 사임하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였다가 동월 24일 이동녕이 국무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동년 6월 2일에는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6년 3월 20일 한국노병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고 동년 12월 14일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자 윤기섭, 오영선, 이규홍으로 신 내각을 조직한 후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임시 정부는 일본의 극심한 탄압, 젊은층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의 심취, 자금난 등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의사 등을 파견하다

1928년 3월 25일 선생은 이동녕, 안창호,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조소앙, 엄항섭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으며 1929년 8월 9일 상해교민단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침체에 빠져 있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계의 활성화를 위해,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는 날로 팽창되어가고 있는 일제에 대항해서 싸울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인물난과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임시정부로써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특무공작이라고 결정하였다. 이에 한 몸을 나라에 바칠 애국투사를 선정하여 적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거나 중요기관을 파괴하고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으며 특무공작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국무위원으로서 재무장의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선생(앞 중앙)과 한인애국단원 사진(1932년으로 추정)

 

그리하여 1932년 1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의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동경 앵전문 밖에서 일왕을 저격하게 하여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으며 동년 4월 29일에는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의거를 일으켜 일군 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 대장 등 다수의 장성 및 고관들을 폭살케 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장개석 총통을 만나 한인 무관양성소 특설을 협의하다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미국인 피치의 집에 은신해 있던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가흥의 저보성 집으로 피신하여 광동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던 중 1933년에 장개석주석의 면회요청을 받고 안공근, 엄항섭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가서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공관에서 장개석을 면회하였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①한국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할 것 ②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지원 및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③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사관을 양성할 것 등의 조약을 맺고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무관양성소를 특설하여 한인교관으로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역전의 명장들을 교관으로 초빙, 한인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도 중, 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제1기생 2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민족주의와 공산주의 합작)이란 단체가 구성되어 국무위원 7인 중 5인이 이에 참가하게 되자 임시정부 운영은 매우 곤란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1935년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6인이 강소성 가흥에서 의정원 비상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을 보선하니, 선생은 다시 국무위원에 피선되어 임시정부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이듬해(1936)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일군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를 진강(鎭江)으로 옮겼다가 1937년에 다시 장사로 이동하였다. 1938년 5월 장사 남목청에서 민족주의 3당 통일회를 개최하고 3당 대표자가 회의를 하던 중 간소배의 사주를 받은 흉한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은 즉사하고 선생은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하였으나 1개월 동안 입원하여 천우신조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1939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으로 옮긴 뒤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임시정부가 피난 중이던 시기 가흥에서 촬영한 사진. 중앙의 선생을 중심으로 송병조,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엄항섭, 조완구, 차리석 등과 그 부인들이 보이고, 맨 앞줄의 어린이들은 엄항섭의 자녀들이다

광복군의 국내정진 작전 중 일왕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여 직할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국사특파단을 섬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으로 옮긴 뒤 다시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에 중국정부는 한국광복군의 일체 활동을 승인하고 무기와 일체 경비 등을 지원해 주기로 하는 대신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을 체결하고, 이어 12월 9일에는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본격적으로 대일항전에 진력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한, 미 간 군사의 합의를 이끌어 이른바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을 위한 곤명 주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군전략 특수공작대) 본부와 ‘한미군사합작 합의사항’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는 한편 미국의 원조로서 본토상륙을 위한 군사기술훈련소를 강소성 정부가 있는 입황(立煌)에 설치하고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이 피나는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고 있다. 자력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동년 11월 23일 선생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자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년 1월에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5월 제2차 미, 소 공위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안을 지지하였다.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의거 서거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1945.11.3, 맨 앞줄 가운데가 선생)과 선생의 영결식 장면(1949.7.5, 서울운동장)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 1908년 신민회 가입 활동
    1919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5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 역임
    1930년 한인 애국단 조직, 의열 활동 지원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서울 출신. 아버지는 이조판서 유승(裕承)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첫 부인은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딸이며, 둘째부인은 반남박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 서간도(西間島)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였고, 합니하의 교사는 분교역할을 하는 등 1910년대 서간도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항일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하였다.

 

1913년 9월 북경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정부와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도모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중단되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고종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북경에서 이동녕·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이회영 등과 국내 3·1운동에 호응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상해(上海)로부터 북경에 온 여운형(呂運亨)·현순(玄楯)과 논의하고, 이회영·이동녕·이광 등과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초대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재무총장을 거쳐 1926년 무렵까지 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재임하였다.

 

그 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거 때에는 미리 항저우(抗州)로 가서 임시정부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1933년 중엽 자싱(嘉興)에서 김구(金九)·이동녕·송병조(宋秉祚)·차리석(車利錫)·조완구(趙琬九)·김붕준(金朋濬) 등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34년 『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하여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1935년 10월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이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활동에 진력하여 사교교질(司敎敎秩)·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한편, 1947년 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정부를 떠났다.

 

이어 1952년 8월 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국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가 죽었다.

상훈과 추모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 현 묘소로 이장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시영 [李始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이 시원찮아서 다른곳에서 모셔왔다.

 

 

와룡선생사당이 여기에 있는줄은 처음 알았다.

매월 세째주 일요일 한국일보에서 주관하는 거북이 마라톤을 가끔 참석해서 토끼처럼 뛰곤했는데

뛸때에는 않보이던것이 걸으니까 보이네요.

 

뛸때에는 옆에 실개천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예쁘게 흐르고 있었네요

 

 

 

 

남산골 한옥마을 정취가 옛스럽다.

 

 

 

 

 

 

 

 

 

 

 

 

 

 

 

 

 

 

 

 

 

 

 

 

 

한옥마을을 벗어난지 일분도 않되에 현실도 돌아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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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9.07 00:08

    첫댓글 투어하셨나요?
    담달에 서울 놀러갈건데 장소물색중 아주 좋네요..
    걷기로 4시간소요인가요?

  • 작성자 14.09.07 11:19

    걸어서 다녔습니다.
    4시간이면 충분 할것 같습니다.

  • 14.09.07 12:22

    @溢空(재휘애비) 아~~좋네요..걸는다는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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