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佛經)
불경(佛經)이란 불교의 경전을 말한다.
'8만 4천 가르침'이라고 비유될 정도로 엄청나게 방대하며
그 내용 역시 상당히 철학적이고 심오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 가지 경전의 의미만 깨우치는 것도 굉장히 오래 걸린다.
좁은 의미의 불경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장(經藏, Sutra)만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경장뿐 아니라, 계율을 기록한 율장(律藏, Vinaya),
경전에 대한 주석서인 논장(論藏, Abhidharma)까지 포함한
삼장(三藏, Tripitaka)을 모두 불경의 범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삼장을 비롯한 불교 관련 문헌 전체를 집대성한 것을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가르침을 글로 남기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는 직접 말로써 가르침을 전했다.
사리불이여, 여래께서 설하셨을 때 그것을 믿도록 하여라.
위대한 성인(聖人)인 여래께서는 잘못된 것을 설하지 아니하시며
오랫동안 최고의 진리를 설하고 계신다.
이는 아함경 등 초기 경전에서부터 여러 차례 나오는 표현이다.
석가모니의 입멸(죽음) 이후,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생전의 가르침과 언행을 모으기로 결심하고
석가모니의 직계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언행을 '결집'한다.
이때 십대제자인 아난다와 우팔리가 서로 기억한 것을 암송해 정리했다.
이때 아난다와 우팔리가 암송한 내용을 듣고 '석가모니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아라한 500명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반박하면 석가모니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결집해 현재의 불경이 완성되었는데, 불경들 중에서도
석가모니의 직접적인 언행을 기록한 최초기의 경전은 팔리어로 기록된
니까야(Nikaya)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불교 내부의 전승이고
학술적으로는 최근 들어 팔리어 불경의 권위가 약화되고 있다.
어쨌든 이런 전승 때문에 대부분 불경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 하는 말로 시작한다.
이후 석가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같이 있었고 청중이 얼마나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나온 후 본 불경이 시작한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경전으로 인정받는 패엽경이 만들어진 이유를 생각하면
불제자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지키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설화적인 내용이 다수를 이루기는 하나, 고대 인도사에 대해서도
서술되어있기 때문에 인도사를 연구할때 주요 참고자료이기도 하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발견된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패엽경들.
성립 연대는 기원전 2세기로, 불교를 신앙하면서 인도 곳곳에 불경의 내용을 인용한
비문과 석주를 세운 아소카 대왕 시대와 거의 겹친다.
이 카로슈티 문자 불경이 발굴되면서 팔리어 불경은 독점적으로 누려오던 위상에 타격을 입었다.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경전 중에는 법구경과 코뿔소 경도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는 장아함경도 나왔다.
간다라 유적 다큐
스리랑카에 전해지는 상좌부 불교의 경전. 프라크리트어(중기 인도아리아어군) 중
팔리어(빨리어)로 기록되었다. 사실상 최초의 부처인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심인
최초의 불경이라고 알려진 숫타니파타가 팔리어 경전에 포함되어 있다.
과거에는 팔리어 경전이 성립시기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추측했기에 세계 불교학계,
특히 남방의 상좌부 불교를 중시하는 서구 중심으로 매우 권위가 높았다.
지금도 국내 남방불교 지지자들은 이 점을 자주 강조한다.
하지만 아소카 왕이 남긴 비문과 석주에 인용된 불경 내용과 팔리어를
문헌학에 기초해 비교하여 연구한 결과, 팔리어는 석가모니가 활동했던
인도 북동부 지역 방언보다는 중서부 방언의 요소가 강했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가 사용한 언어는 팔리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네팔과 인도 중남부 지역에 발견된 패엽경과 금석문 일부를 제외한
현존 팔리어 경전도 실제로는 기원후 5세기 스리랑카에서 마하위하라
부파와 마하위하라 소속 학승 붓다고사가 자파의 교설과 전승을 중심으로
기틀을 잡았고 17세기에 포르투갈과의 전쟁 및 강제개종, 사찰 약탈 과정에서
스리랑카 불경이 산실되자, 태국과 미얀마에 잔존하던 필사본을 옮겨 적어
정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제 불교학계에서는 그 위상이 많이 하락했다.
남방불교의 팔리어 경장과 북방불교의 아함경은 내용이 거의 일치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도 존재한다. 부파별로 분화하면서 경전들도 조금씩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팔리어 경전의 니까야는 모두 한 부파에서 전래되었으나, 한역 아함경의 4아함은
여러 부파(설일체유부, 법장부, 대중부)에서 전래된 경전이 각각 별도로 번역된 것이다.
그래서 팔리어 경전은 아함경보다 내용상 일관성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한역 4아함은 부파 간의 공통점과 차이 연구에 많이 이용된다.
2009년에 국내 불교학계에서 팔리어 삼장의 권위와 관련하여 논쟁이 벌어졌는데
팔리어 절대주의를 인정하는 측에서 마하위하라 부파의 주장만을 근거로 팔리어
불전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주장했다가 학계의 역풍을 맞은 전례가 있다.
대승불교의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써진 것이 많다.
초기 경전은 팔리어를 포함한 프라크리트어로 기록되었는데 차츰 고급 문어인
산스크리트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 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경전은 대부분 본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다.
산스크리트어는 한역하여 범어(梵語)라고도 한다.
이 외에도 불교를 다룬 고대 인도의 서사시인 '붓다차리타'가 높은 문학성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한역본인 불소행찬을 다시 한글로 번역한 버전이 보급되어 있긴 하지만,
번역이 매끄럽지는 않다. 전재성 교수가 산스크리트어 버전과 나름 차이가 있는데
번역이 괜찮은 편이지만, 도서관 등에서 찾기 힘들다.
불경의 한문 번역은 후한 대부터 개시되었는데 초기 번역가들은 주로 안세고와 같은
서역승들로서 구술로 번역한 것을 제자들이 베껴적는 형태로 번역됐다.
또한,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번역했다기보다는 산스크리트어가 속화한
프라크리트나 팔리어, 중앙아시아의 토하라어에 기초해 번역된 때도 있어
번역의 질은 중구난방이다. 초기 번역은 후대의 번역에 비해 그 내용이 대폭
생략됐거나 음역이 다른 등 차이점이 상당하다.
어쨌든 그 후에도 불경은 꾸준히 번역되다가 북조 서역승 구마라집이 엄격한
기준을 두고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해 번역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당 대에 들어서면 현장이 인도에 다녀와 불경을 당시 언어 상황에 맞게 재번역하여
그 후에는 현장역 불경이 많이 사용되었다. (대표로 반야심경은 현장역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현장역을 '신역', 그 전의 번역을 '구역'이라고 칭한다.
중국으로 유입된 외국인 승려 이른바 호승 상당수가 중앙아시아 출신이었으며
대표적인 번역가 중 한 명인 쿠마라지바는 신장의 쿠차 출신이고 현장 역시
중앙아시아와 북인도 일대를 주로 답사했던 사람이다.
즉 한문 경전은 중앙아시아의 불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 밖에 없었다.
송나라 대에 들어서면 거의 대부분의 경전이 이미 한문으로 번역된 상황이 되면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사업도 크게 축소되었고,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해오던
중앙아시아 불교계가 이슬람이나 마니교, 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 등에
자리를 내주며 쇠퇴하자, 새로 경전이 유입될 여지도 감소하였다.
번역 사업에 매진하는 승려들이 줄어든 결과 경전 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교종
불교의 교세가 참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 불교에게 점차 밀리기 시작한다.
일본의 불교학자로 티베트 불교에 다소 비판적인 입장이기도 한 미치하다 료오슈의 경우
명나라 때는 새로 불교 경전 번역이 없었고 청나라 때는 티베트 불교가 전통 중국
불교의 자리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는 이유로 명나라에서 청나라 후반기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대를 중국 불교의 암흑기로 평가하기도 한다.
동아시아에선 지역마다 불경을 대규모로 편찬하는 사업을 벌여
대규모 불교 경전 집성, 즉 대장경이 간행되었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송 대부터 대장경이 몇 차례에 걸쳐 발간됐고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시작으로 불경을 목판인쇄해 고려 대에 만들어진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이
유명하고 일본에서는 다이쇼 연간에 이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삼아 당시까지
존재하였던 한중일 불교 문헌을 집대성하여 <다이쇼신수대장경(대정신수대장경)>을
발간하여 현재까지 존재하는 불경 총집 중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남아 있다.
그 외에 동아시아의 옛 민족들이었던 거란의 요나라, 당항의 서하,
여진의 금나라도 대장경을 만들었다. 다만 이들은 한자뿐 아니라
자신들의 고유 문자들로 번역하여 쓰기도 했었다. 이들의 대장경들도
송이나 고려에 영향을 주기도 했었다.
티베트어로 번역된 경전이다. 티베트에서 주로 썼으며, 그 외에
티베트 불교를 믿거나 티베트 문화권과 가까웠던 몽골, 청나라, 인도 북부와
히말라야 인근의 나라들에서도 티베트어 경전을 썼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와 직접적인 교류를 거치면서 발전했고, 티베트어는
오로지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재정비하는 과정까지 거쳤으므로, 티베트어
경전은 사료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거기에 티베트 불교는 8세기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되기 직전의 불교가
유입되었기에 현재 한문/산스크리트 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경전이 많이 남아 있다.
티베트 대장경을 통해 소실된 한문 경전이 재발견되기도 한다.
한국과 관련해선 티베트 불교권으로 흘러들어간 신라 출신 승려
원측의 논서 '해심밀경소'를 예로 들 수 있다.
북경판 서장대장경(西藏大藏經) 영인본을 동국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고, 동국대학교는 달라이 라마로부터
기증받은 라사판도 소장하고 있다.
SuttaCentral: 초기 불교의 삼장(경, 율, 논)에 대해서 ID, 볼륨/페이지,
타 경전의 동일본에 대한 ID를 수록하고 있다.
팔리어 경전, 한문 경전, 산스크리트어 경전, 티베트어 경전, 프라크리트어 경전,
간다라어 경전 등을 대상으로 분류했다.
가령, MN 151은 탁발음식의 청정 경(Piṇḍapātapārisuddhi)으로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Vol 3의 293쪽에 해당되고
잡아함(SA 236)과 증일아함(EA 45.6)에 유사한 내용이 있다는 의미이다.
한글 대장경: 동국역경원에서 번역한 한글 대장경으로 운허, 탄허, 법정 등
당대의 학승들이 참여하였다. 고려대장경을 기반으로 번역하고 출처와 번역자를 명시했다.
웬만한 한문 경전은 다 있지만 팔리어 경전은 없다.
불경에도 위경, 즉 저작자가 석가모니나 그의 직계제자가 아닌
자가 후대에 지어 내려오는 경전이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굳이
석가모니의 말을 그대로 편찬한 것이 아니라도, 깨달음을 얻은 자는
모두 부처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철학적 요지만 동일하다면
위경이라도 진경과 동등하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웬만하면 위경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다만 저자가 불제자가 아니라서 다른 사상과 섞인다든가 종파에 따라
중시하는 요소가 달라 이견이 발생한다면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위경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나왔다.
경전도 짝퉁 아래는 그중 대표적인 것들.
물론 상좌부 불교에서는 이런 대승불교 측의 관점을 단호히 거부한다.
정말로 그런 주장대로라면 왜 저자가 자기 이름을 숨기고 석가모니의
친설인 양 위장하느냐는 것.
위경은 어디까지나 위경으로 석가모니의 친설과 동등하게 볼 수 없으며,
아무리 좋게 평해도 논서(論書)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은중경>: 부모님의 은혜가 깊으니 효도하라는 내용이다.
지극히 유교적 효도 논리가 강해서 중국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한중일 삼국에서는 엄청나게 유행했다.
현대에는 그 사상적 배경이 이전부터 존재하기에 위경이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는 한다.
하지만 부모은중경이라는 경전 자체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게 맞다.
범어/팔리어 원전(원본)이 없으나 후한(後漢)시대에 안세고가 번역한
'불설부모은난보경'이 남아있는데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부모은중경'을 만든 듯하다.
'불설부모은난보경'은 팔만대장경에도 수록되었다.
<노자화호경>: 도교가 불교를 까내리기 위해 만든 위경이다.
줄거리는 "우리 노자님의 만년이 쪼∼까 애매모호 하신데
그 이유는 아무리 진리를 말해도 중국인들이 못 알아먹으니까
서역(천축)에 가서 진리를 설하시고 번성한 게 불교임!!
즉 석가모니는 사실 노자임!!
그러니까 불교는 오리지날 도교보다 한 수 아래다!!"라는 내용이다.
이에 불교에서는 공자, 안회, 노자가 석가의 제자인 유동보살ㆍ광정보살ㆍ
마하가섭이라는 삼성화현설(三聖化現說)을 내밀었다.
그러나 노자화호경의 근간인 노자화호설 자체가 초기 불교에서 포교를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불교의 중국 정복>(에릭 쥐르허 저)에서는
노자화호설 자체가 불교 쪽 문헌에 먼저 나온다는 점을 근거로 이쪽을 긍정한다.
<불설천지팔양신주경>: 도교풍으로 만들어진 책이며 중국의 당나라때
번역되어 당시 조선에 넘어온 떄는 1650년대 후반 쯤으로 알려져있다.
이 경을 빌미로 한 경이 비교적 많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18세기 일본의 학자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는 대승경전은
모두 석가모니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주장하였다.
<불설상법멸의경>: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위경.
영조 11년(1735)에 창령 화왕산에 있는 관룡사라는 절에서 만든 위경이다.
당시의 한국 불교계를 더럽히던 파계승들의 타락한 모습과 조선 조정의 지나친
승병 동원을 비판하면서도, 왕실의 안정을 바라는 모습과 참선/염불/
시주를 중시하면서 불교계의 정화를 주장하여 당시 사회상 연구에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