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잘해줬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어떻게 지느냐가 왜 중요한지, 팬들을 보니까 알겠지 않나?”
한층 밝은 표정으로 선수들에게 핼포드가 말을 꺼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다.
전반전이 끝나고는 집에 돌아 가버린 팬들도 상당수이건만, 후반전이 끝나고 난 후엔 다들 남아서 패배에 상관없이 박수를 보내주는 모습에 선수들도 상당히 코끝이 시큰한 상태였다.
하긴, 항상 2군에 틀어박혀 있다보니 팬들과의 소통 자체가 용이하지 않았던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관중 속에서 경기 했다는 사실도,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사실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감상적인 기분이 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특히나 감수성이 사춘기 소녀 같은 필립은 벌써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다.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눈물이 와르르 쏟아지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옆에 앉은 세바스찬이 자신의 오른손을 꼼지락거린다.
찔러보고 싶다.
세바스찬이 묘한 충동에 사로잡혀 실행을 고심할 때 쯤, 핼포드가 말을 이었다.
“다들 수고했다. 내일부턴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유벤투스가 될 것이다. 자신 있나?”
“네-!!”
선수들의 힘찬 대답을 뒤로 하고, 핼포드가 이제 돌아가자며 손을 내젓는다.
문 옆에 서서 하나하나 빠져나가는 선수들의 어깨를 한번씩 툭 쳐주던 그가 한스의 차례가 되자 갑자기 그의 어깨를 부여잡는다.
지은 죄가 있다보니 한스가 눈에 띄게 움찔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딱 30분전쯤에 소매를 걷어 올리며 경기장으로 걸어 들어오려던 감독의 사악한 미소가 다시 떠올라 식은땀이 다 흐를 정도다.
왼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핼포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고맙다. 다 네 덕분이다.”
“..............에?”
엉뚱한 소리에 한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핼포드를 쳐다보니 아까 보였던 그 미소를 그대로 짓고 있다. 이건 절대 정말 고마워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꿀꺽-
얼마나 긴장했는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다 들린다.
그런 한스의 어깨를 여전히 양손으로 움켜쥐고 마주보던 핼포드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덕분에..........아마도 내일 아침 조간신문에는 ‘유벤투스의 대패’가 아닌 ‘너의 기행’이 헤드라인을 장식할 듯하니까 말이야. 아주 묻히진 않겠지만 아~주 조금쯤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 한다 이 말이지.”
“아........아하하......그.....그게.....”
결국 그런 얘기였나.
한스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어색하게 웃는데 핼포드가 그의 어깨를 더욱 꽉 움켜쥔다.
“그러니까, 다음에 또 해. 알았지? 꼭 또 해야 된다. 응?”
어깨가 으스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붙잡고 흔들며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던 핼포드가 한스를 풀어준 것은 그가 완전히 울상을 짓고 살려달라고 빌기 직전이었다.
정말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그의 어깨를 한번 툭 쳐주곤 돌아서던 핼포드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흘깃 돌린다.
흠칫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선 한스를 보며 씩 웃던 그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뭐.....그래도 제법 멋진 선방들이긴 했어. 멋진 데뷔전 축하한다. 한스.”
2.
찰칵 찰칵-!! 펑!! 펑!!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맞이하는 엄청난 카메라의 기음과, 플래시 터지는 소리에 핼포드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핼포드는 이게 싫어서 관중들과 인사한다는 명목으로 어떻게든 빠져 나가보려고 한 것이었지만, 인터뷰 또한 중요하다는 델피에로의 설득에 못 이겨 이곳으로 뒤늦게 들어온 것이었다.
굳이 언론에 노출되길 꺼려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성격상 이 어수선한 분위기가 싫은 것일 뿐.
한편 옆에 서있는 델피에로는 익숙하게 손을 흔들며 기자들을 맞이하긴 했지만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핼포드가 인터뷰에 응하겠다며 내건 단 하나의 조건.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핼포드를 설득하기 위해, 아주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이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인 사실이 뒤늦게 생각난 것이다.
각자가 가진 질문들을 던져대느라, 사진을 찍느라 시장 통 마냥 어수선해진 장내를 한번 쓱 훑어보던 핼포드가 입가를 비틀며 웃음을 걸었다.
뭔가 불안하다는 느낌에 일단 진정시켜야 되겠다는 델피에로의 생각을 산산이 깨부수며, 핼포드가 인터뷰를 위해 마련된 책상을 손바닥으로 아주 시원하게 후려쳤다.
쾅, 쾅, 쾅-!!!
그것도 세 번이나.
의외의 행동에 기자들이 조용해져서 눈을 끔뻑이며 핼포드를 멍하니 바라본다.
“흠....이제 좀 조용하구만.”
오른쪽 귀를 열심히 새끼손가락으로 후비며 핼포드가 씩 웃는다.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기자들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 이번엔 그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더니 책상위에 다리를 턱하니 올려놓는다.
도대체 이 감독이라는 작자는 생각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기자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직전, 핼포드의 오른손이 들렸다.
엄지로 새끼손가락을 누르고 가운데의 세손가락을 쭉 펼쳐서 이리저리 돌려 보인 그가 입을 열었다.
“세 개. 딱 질문 세 개만 받겠소.”
“그.......그런 게 어디 있어!!!!”
맨 앞줄에서 그의 하는 냥을 지켜보던 한 기자가 분노어린 일성을 터뜨렸다.
다른 기자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분위기다. 당연한 일이다. 인터뷰 장에서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란 말인가!!!
그때 핼포드의 입이 열렸고, 다들 또다시 멍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소. 자, 다음질문. 이제 두개 남았소.”
“..............!!!!!!”
“뭐야.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기자가 아니라 어디 뒷골목에서 힘 좀 쓰면서 살았다고 해도 당장 믿음이 갈만큼 우락부락한 덩치와 얼굴을 가진 한 사내가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하지만 핼포드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하다.
“아니, 굉장히. 엄청~나게 진지하오. 이것이 정말 진실 된 나의 대답이오. 자, 이제 하나 남았소.”
“아니 뭐 이런.........흡!!”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던 어떤 기자의 입을 옆에 있던 다른 기자들이 틀어막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마지막 질문은 그래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이다.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시는 핼포드를 뒤로하고, 다들 하나 남은 질문을 뭐로 할 것인가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상황 자체의 이상함은 뒷전이고, 서로 질문 기회를 얻기 위해 눈치를 슬슬 살피는 기묘한 대치상황이 연출되어버렸다.
숫자게임을 할 때의 긴장감이 대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여하튼 잠시 조용해져있던 장내에서 드디어 한사람이 용기 있게 말을 꺼냈다.
“세바스....”
“오늘 경기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안타깝게도 말을 자르고 들어와 빠르게 내뱉은 어느 여기자의 질문에 그 용기는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먼저 입을 연 기자가 눈을 흘기지만 그녀는 꿈쩍도 안한다.
한편, 질문한 여기자를 바라보는 핼포드의 눈이 이채를 띈다.
검은 머리를 웨이브지게 늘어트린 늘씬한 미인의 전형.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아.......일전에 리퍼의 .......머신 얘기할 때 곁에 있던 그분이신가? 버밍엄의 그 바에서 말이야.”
눈을 치켜뜨던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친다.
“저는 질문 안받는데요? 제 질문에 대답이나 해주시죠?”
허리에 양손을 얹고는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며 입술을 씰룩이는 모습이 핼포드의 이상한 기자 다루기(?)에 제법 많이 상했던 기분을 그대로 드러낸다.
다만 그걸 보고 무서워하기에는 이 여기자가 너무 예쁜 편이다.
여하튼 한방 먹은 핼포드가 씩 웃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 경기에 대해 한마디라........”
그러곤 의자를 밀어젖히고 문으로 걸어 나가며 기자단을 한번 쓱 훑어보곤 대답한다.
“다들 보지 않았소? 정말 멋지게 졌지. 아주 멋지게 말이야. 하하핫-!!”
또다시 소란스러워진 기자들을 일별하고 냉큼 나가버리는 핼포드였다.
아름다운 외모랑 어울리지 않게 우아함은 고사하고, 선머슴처럼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벅벅 긁던 여기자가 웅얼거린다.
“아, 이거 참. 골치 아프네........뭐, 멋지게 지긴 했지만 확실히....... 쓸거리가 얼마 안나오잖아 이 양반아.........”
기자들 입장에선 물어볼게 너무나 많았다.
오늘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세바스찬의 정체, 한스의 기행, 거기에 얼굴만큼은 카카를 위협할만한 꽃 미남 선수인 리퍼의 정체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인터뷰가 더 중요하거늘, 저 이상한 감독이 다 깨부숴 버렸다.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리퍼를 떠올리며, 예의 고양이 같은 미소를 살짝 짓는 그녀를 뒤로하고 몇몇 기자들이 불타오르는 눈길로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펜이 칼보다 무서운 이유를 몸소 보여줘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사로잡힌 채.
3.
“허........”
버스에 오른 핼포드가 내뱉은 첫 감탄사였다.
버스 기사를 제외한 모두가 단 한명 예외 없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도롱도롱 코를 고는 필립부터, 침을 질질 흘리는 데이빗에, 움찔 움찔 몸을 떨며 손을 휘젓는 한스까지.
좌석 가운데의 통로를 통해 이동하며, 선수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웃음 짓던 그가 맨 앞의 자리로 다시 돌아와 델피에로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피곤 할만도 하죠? 후후...”
“그렇지. 자 이제 우리도 한숨 자자고.”
델피에로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답한 핼포드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의 진동에 몸을 맡기며, 의자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간다.
“이 녀석들.......이제 시작일 뿐이라구.......”
그의 혼잣말을 버스의 엔진 음이 집어삼키며 달려 나간다.
여전히 짙은 미소를 매단 채였다.
“사......살려주세요....!!! 흠냐.......”
한스의 절박한 잠꼬대(?)가 그 틈에 살짝 들리는 듯 하다.
-2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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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했던건 아닌데 어떻게 20화에 맞춰서 한 챕터 비스무리한게 끝이 났네요 -0-;;
조금 가볍게 읽으시라고 괜한 기자분들이 핼포드한테 혼이났네요 ㅡㅡ;;
실제로야 불가능한 일이라는거 다들 아시죠? ^^;;
21화로 다시 뵐께요~
좋은 한주 되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러게요 ㅎㅎ 열심히 쓸게요. 감사합니다 ^^
와우 정말 재밌네요!
감사합니다~^^
화이팅 하세염 !!
넵 ㅎㅎ 감사합니다~^^
미녀기자분...ㅋㅋㅋ 기대만빵임니당~ 요즘 정말 미녀라면 눈이 동그래진다는..ㅋㅋㅋ
워...19금 딱지 하나 더 붙여서 조금 '흥미롭게'(?)만들어드릴까요? ㅎㅎ
솔깃..
정말 디테일이 살아있는 감자전...^^ 꾸준히 잘 보고있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쓸게요 ^^
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