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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그리고 슬픈 '베르테르 효과'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를 들어보셨나요. 19세기 독일의 문호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가 연인 로테와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자 권총으로 자살한데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당시 괴테의 소설에 빠져들었던 유럽의 젊은이들은 베르테르의 자살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지 자살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여기서 유명인의 자살 이후 모방 자살이 뒤따르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로 등장한게 베르테르 효과인데,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필립스가 처음으로 언급했다고 합니다.
23일 범죄 수사를 전문으로 하는 서울중앙지검이 학술서에서나 봐오던 ‘베르테르 효과’를 입증(?)한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지난달 22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영화배우 고(故) 이은주씨의 자살 이후 우리 나라에서도 베르테르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인데요, 검찰은 서울중앙지검이 관할하는 서울 종로·강남구 등 7개구의 사망 사건을 표본으로 조사에 나섰다고 합니다. 표본의 규모, 전년도와의 비교 부족 등 몇 가지 제한 때문에 본격적 학술 연구로 보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상당한 해외 문헌을 참고한데다 SPSS 프로그램을 활용해 통계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어서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돼 잠깐 소개할까 합니다.
검찰은 이은주씨 자살 사건 이후 베르테르 효과의 징후를 발견하게 됐다고 합니다. 실제 이달 1일 서울의 한 주택에서 빚에 쪼들리던 20대 여성이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한데 이 여성은 사고 전 주변 사람들에게 “이은주씨가 죽는 것을 보고 빚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씨 사건 후 꼭 일주일만이지요. 보고서를 낸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 석동현(石東炫) 부장검사는 “이씨 사건 발생 후 10일 정도가 흐르면서 베르테르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는 확연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 영화 '주홍글씨'에서 열연한 故이은주씨. | | 이래서 형사3부는 올들어 이달 17일까지의 기간을 이은주씨 사건이 발생한 2월22일을 기점으로 전후로 나눠 관내 사망 사건 중 자살사건을 추려내 분석했습니다. 이 기간(76일간) 자살자로 추정된 사람은 총 94명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유의미한 표본은 94건인 셈입니다.
분석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씨 사건 이후(2월23일~3월17일 23일간) 발생한 자살 사건은 49건으로 하루 평균 2.1명으로, 그 전(1월1일~2월22일 53일간)의 0.8명(총 45건)에 비해 2.5배가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일단 증가추세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요. 또 주목할 것이 사건 후 20대 자살자는 15명(전체 자살자의 30.6%)으로, 그전의 7명(15.5%)에 비해 배가 늘었다는 점입니다. 검찰은 이 부분을 자살 충동에 휩싸이기 쉬운 젊은층의 모방 자살의 징후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기간 60~70대 자살자는 24명(전체 자살자의 53.3%)에서 12명(24.5%)으로 급감했다는군요.
자살 방식의 변화도 나타났습니다. 이씨처럼 목을 맨 경우가 이씨 사건 이후 전체 자살 사건의 80%(종전 53%)에 달했습니다. 종전에도 절반이 넘었으니 이 방식은 자살의 전형적 방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때 자살한 20대 15명중 14명이 이런 방식을 택했다는 것은 그냥 넘기기 힘든 점 같습니다.
반면 우울증과 자살과의 상관성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특기할 만 합니다. 이씨의 자살로 우울증과 자살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높아졌는데, 이 기간 중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은 11건(전체의 16.3%)으로 종전의 5건(11.1%)에 비해 크게 높아지진 않았습니다. 검찰은 자살자들이 남긴 유서나 주변의 진술을 토대로 뚜렷한 우울증보단 충동적, 우발적 동기가 많았다는 점에서 우울증을 자살의 절대적 원인으로 삼을만한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자살예방학회 회장인 이홍식(李弘植,정신과 전문의) 연세대 의대 정신건강병원 원장도 "우울증만이 자살의 원인은 아니다"고 설명하더군요.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증이란 의학적 개념보다 넓은 범주에서 사용하는 점을 감안하면, 우울증과 자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실제 이번 조사에서도 자살 사건의 60% 이상이 원인이 명확치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는 점도 감안해야겠지요. 이외에도 몇 가지 분석이 더 있지만, 핵심적 내용은 이 정도입니다.
저는 오늘 검찰을 칭찬하고 싶어졌습니다. 이날 자문을 구하기 위해 전화통화를 한 이홍식 원장은 저에게 검찰의 조사 소식을 듣고 "만약 검찰이 그런 조사를 했다면 그건 학설로만 전해져오던 베르테르 효과를 실제 데이터를 가지고 조사한 국내 첫 사례"라고 흥분했습니다. 이 박사의 반응은 한마디로 '기특하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물론 자세한 보고서를 보기 전이어서, 조사 결과를 봤다면 학자로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겠지요.(그래서 제가 자료를 한부 보내드렸고, 검찰이 조사기간을 좀 더 넓혀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더라고 하자 이 박사는 "베르테르 효과는 비교 기준 시점을 전후한 두달간이 가장 적당하다"고 하더군요.)
반면 분발도 촉구하고 싶습니다. 자살예방학회 회장으로도 활동하는 이 원장은 이런 분야에 대한 연구 열망이 대단할텐데요, 그는 "경찰이 데이터를 가지고 있으니..."라며 아쉬워했습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작년 교도소 취재를 위해 자료를 조사하면서 교도소 내 수용자들의 행태를 경험적으로 분석한 국내 자료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라면서 또 실망했습니다. 그때 접촉한 학자들마다 '데이터 접근 용이성 부족'을 이유로 꼽았습니다. 데이터에 독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법무부 교정국도 인력부족 등으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실태 조사는 엄두도 못내고 있음을 시인했습니다. 결국 정보를 독점적으로 관리하는 정부가 학자들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행정기관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연구에 나서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범죄사회학 전공자거나 형사정책학 연구자라면 꿈에서도 아쉬워할 자료들을 공무원들은 썩히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때문에 이번처럼 검찰이 단순 수사에 그치지 않고 뭔가 의미있는 분석을 내놨다는 점에서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베르테르 효과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지지와 반대로 다양한데, 베르테르 효과를 지지하는 입장은 -'케나다의 유명한 리포터의 자살 후 자살, 특히 목을 매 자살하는 경우가 증가했다'는 2005년 보고(The impact of media coverage of the suicide of s well known Quebec reporter: the case of Gaeta GGirouard. Soc Sci Med. 2005 May;60(9):1919-26), -'미디어와 자살에 대한 연관에 대한 42개의 연구를 분석하였을 때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자살보도는 14.3배의 모방 효과 유발, 허구의 이야기에 의한 경우에는 4.03배의 모방효과를 유발'한다는 보고(Media coverage as a risk factor in suicide. J Epidemiol Community Health. 2003 Apr;57(4):238-240), -'자살에 미치는 미디어의 영향(Influence of the media on suicide. BMJ.2002 Dec14;325(7377):1374-5)', '비허구적인 미디어인 신문, TV, 책에서 묘사된 자살은 실제 자살과 연관성이 있다'는 보고(Suicide and the Media. Part1 : Reportage in nonfictional media. Crisis. 2001;22(4):146-54), -'열차 기관사의 스트레스와 자살 심경에 대한 TV 프로그램이 나간 후 철도에서의 자살 시도와 자살이 증가했다'는 보고(Railroad suicides and attempted suicide Austria 1990-1994. Extending hypothesis mass medis transmission of suicide behavior. Nervenarzt.1997 Jan;68(1):67-73),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였을 때, 일본인 자살자에 대한 보도인 경우에만 모방 자살에 영향을 미쳤다'는 보고(the sffect of media on suicide:evidence from Japan. 1955-1985. Suicide Life Threat Behav. 1996 Summer;26(2):132-142), -'1981년에서 1990년 사이에 호주에서 신문에 자살 보도가 나간 후 일일 평균 자살이 유의하게 증가했다'는 보고(Effect of newspaper storis on the incidence of suicide in Australia: a research note. Aust N Z J Psychiatry. 1995 Sep;29(3):480-3) 등이 있습니다.
반대 입장은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이동식 박사가 지적한 자살 위험 징후 등 자살예방 가이드 입니다.
◆자살위험 징후
①한동안 만나지 않던 동창이나 은사 등을 찾는다. ②아끼는 물건을 특별한 이유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③청소년의 경우 성적이 떨어져도 걱정하지 않는 등 자신의 일에 초연해졌다. ④교회나 사찰 등에서 성직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갑자기 한다. ⑤죽음과 관련된 책이나 영화 등에 집착한다. ⑥사후 세계에 갑자기 관심을 갖는다. ⑦가족과 주말 나들이를 피하는 등 가족을 피한다. ⑧평소 우울하던 사람이 갑자기 밝아진다.
◆자살 예방 대책
①자살 징후를 보이는 사람들의 가족,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②혼자 두지 않는다. 자살 충동은 지속적인 경우보다 순간적인 경우가 많아 그때만 잘 넘기면 피할 수 있다. ③자살은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갑작스런 사회·경제적 신분의 추락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실직이나 이혼, 실연 등을 당한 사람을 주의깊게 살핀다 ④주변에 알리라. 자살 징후는 혼자 어려운 사람들에게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 친구 등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⑤자살을 미화하거나 낭만적으로 바라봐서는 안되며, 미디어도 이런 식의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 ⑥정부도 자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중보건의 문제로 인식하고 정신건강 서비스 기구를 확충해야 한다.
◆자살에 대한 잘못된 편견
①자살한 사람은 유언을 남긴다-->유언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②자살시도는 주위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다.-->절대 그렇지 않다. ③자살은 유전이거나 정신병이다.-->사회적 요인도 크다. ④우울하기 때문에 자살한다.-->우발적·충동적 자살도 많다. ⑤성공한 사람은 자살하지 않는다--> 성공 여부 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자살의 원인이 된다. ⑥자살에 실패한 사람은 다시 자살하지 않는다.-->반복적으로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⑦자살은 겨울에 많다.-->오히려 4~5월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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