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의 전근 발령에 따라 고향인 홍천으로 다시 오게 된 때는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친
후였다
. 4학년 남학생이 열한 명, 여학생은 다섯 명, 그것도 3, 4학년이 한 교실에서 같이 배우는 아주 조그마한 시골학교였다.
겨울에는 할아버지께서 품앗이로 해 주시는 장작불 난로로 따뜻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장작으로
난로를 피우는 교실바닥은
그냥 흙 바닥이었고, 난로 덮개
위에는 김치와 참기름을 깔아 올려놓은 도시락 굽는 냄새가 교실 안에 진동하였다.
특히 설이 지나면 연통에다가 가래떡을 문대어 과자처럼 밀려 일어나는 재미로 많이 흔적을 남겼는데 연통이 너무 뜨거워 가래떡이 늘어 붙어
타게 되면 나중에는 보기가 안 좋았다.
동네 앞 개울은 개구쟁이들의 최상의 놀이터였다. 물고기도
잡고 수영도 하고, 얼음도
지치고, 소꿉장난도
하고, 정말 새까맣게 온몸을 그을러 검둥이를 만들곤 하였고 풍요로운 가을엔 논두렁에서
메뚜기도 잡고 산에 있는 머루와 다래 그리고 가래도 주어다가 까먹곤 하였다.
한 번은 뽕나무에 달린 오디를 따 먹다가 뽕나무 가지가 부러지면서 정강이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방과 후
집으로 가는 길은 부지런히 걸어도 삼사십 분은 걸렸는데 가는 길목에는 나의 호기심과 친구들 그리고 친척 집들의
유혹이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의 이모할머니께서 사시던 집이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 할머니는
외아들과 단둘이 사셨는데 딸들이 모두 출가하셨고 한 번은 아침에 학교로 등교하기 전에 할머니께서 나더러 오늘 저녁에 그 댁 할아버지 제사니 놀다가
제사를 지내고 오라고
당부하시기도 했다.
이모할머니
댁은 특히 된장 맛이 최고였다. 우리 집
것보다 색깔도 시커멓고 그랬지만 맛이 정말 할머니의 구수한 말투와 같았다.
고향에서의 초등학교 4학년 1년간의 생활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었다.
내가 살던 고향은 홍천에서 인제 방향으로 약 35킬로미터 정도 되었다. 20킬로미터쯤 가다가 구성포 사거리에서 서석 방면으로 우회전 하면 외삼포리가 나오고 좌우로 군 운전 교육대를 지나면 2백여 미터 폭의 다리(대진교)가 나오며 그 다리를 지나면 내삼포리가 나온다.
조그마한
초가집들이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고, 왼쪽에는
화촌중학교가 있다.
다시 언덕길을 따라 1킬로미터 정도 달리면 오른쪽 강 건너 멀리 산 넘어 노내고을이라는 곳이 있다는데 태어나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살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곳은 할아버지께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라고 했다.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다시 왼쪽에
삼포 초등학교가 있고, 학교를
지나면 30여 미터 되는 다리를 건넌다. 이름 하여 내가 세 살 때 유괴되어 끌려가다가 장맛비로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건너지 못하고 주변
친척들의 도움으로 다시 돌아온 그곳 검금리 다리가 있던 곳이었다.
옛날에는 연례행사로 소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다리가 하나씩 세워지고 한여름 장마에 다리가 떠내려가면 그 이듬해 또다시 동네 어르신네들이
다리를 놓곤 하였다. 물이 많아
다리를 놓지 못하면 우회로 강폭이 좁은 곳을 건너던지 강물이 줄어들면 우마차를 통해 건너다녔다.
다리는 산에 있는 소나무를 잘라 다릿발을 하고 그 위에 솔가지를 덮고 진흙을 덮어 사람이 둘이 겨우 피할 정도의 폭으로 만들었다. 난간도 없고 폭도 좁아 어린 나는 혼자서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어머니나
어르신이 손을 꼭 잡아야 건널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너면 왼쪽으로는 병풍 같은 기암절벽이 드리워져 있고 오른쪽으로 멀리 공작산 아래 넓은 논과 비탈에는 밭이 있고 길을 따라 왼쪽
강 건너는 볕이 많이 드는 곳이라 하여 양지마을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다.
지금은 아스팔트 길이지만 예전에 신작로 길이었는데,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길옆 코스모스 사이로 구석기시대 유물인 고인돌이 이 지방의 유래를 말하듯 누워
있다. 버스가
머무는 정류장 구역을 버덩 마을이라고 하였고 벼를 찧는 방앗간과 주막이 있었다. 주막거리
앞에 몇 발자국 안가 내가 다니던 조그마한 학교가 오른쪽에 있다.
학교 옆엔 계속 우리를 따라온 강물이 흐르고 그 강을 건너면 말 고을이라고
하는데 그 말고개를 넘어가면 서석과 내면 그리고 구룡령을 넘어 양양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강물을 따라 오른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내가 태어나 자란 안 마을이 나오고 서낭당이 가운데 있는 강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넛마을 사람들과
오순도순 지내왔다.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빠지면 내가 살던 집으로 가는 오솔길이 나오는데 오솔길을 따라 폭 일 미터도 안 되는 논두렁 길과 도랑이 나온다. 그 도랑 옆으로 가옥들이 하나둘씩 나오는데 모두가 이웃이고 친척이고 아주
오래전부터 일가친척으로 연을 맺고 살아오던 이웃이 살고 있다.
오른쪽 산100 여 미터
정도 높이의 소나무 숲 속으로 열녀이셨던 증조할머니의 비각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가 있고, 안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벌써 다리가 놓이고 콘크리트로 포장이 되어 옛날 검정고무신이 발에서 나는 땀에 미끄러지며 걸어 다니던 시절은 아련하기만 하다.
귀새박이라는 절벽에 단지 논에 물을 대는 도랑만이 굽이도는 곳을 지나면 그곳부터 나의 마음은 진짜 고향 집에 온 듯 공기도 포근하고
향기롭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아무나 말을 건네고 싶고 웃고 싶은 마음이 든다. 거문 고을과
삼박 고을을 지나 예전에 장승과 신문이 없을 때는 각종 방공구호나 표어가 붙어 바람에 나풀거리던 게시판이 있던 자리도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 밤을 주어 오시던 주인 없는
늙은 밤나무도 이젠 세월에 지쳐버린 듯 우두커니
서 있고, 왼쪽 오른쪽
참깨밭에 가득하던 징그러운 깨 망아지 때문에
학교 길을 제대로 못 가던 일을 생각하면 나도 어렸을 땐 굉장한 겁쟁이였던 것 같다.
강가에 소 장사네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기훈이가 살았는데 그 집에 위로 누나가 많아서 늘 재미있게 지내는 것이 부러웠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고추 따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하며 부르던 모습이
눈에 아직도 아른거리는 듯하다.
내가 살던 고향 집 옆에는 큰댁이 살았는데, 우리 집은
초가집이고 큰댁은 기와집이었다. 담장도
우리 집은 일 년에 한 번씩 할아버지께서 갈아치우는
참나무와 싸리나무로 엮은 울타리이고, 큰댁은
돌과 진흙으로 만든 보수할 필요가 없는 울타리였다.
할아버지께서 만든 울타리 밑으로는 닭과 강아지가 늘 자유롭게 빠져 다녀 구멍, 즉 개구멍이 나 있었다. 나도 가끔
이용했지만, 할아버지한테 걸리는 날이면 사람이 어찌 동물과 같이 행동하느냐고 군밤을 주시곤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같이 어린이나 사람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욕을 하지 않으셨다. 개나 동물에게나
욕을 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배우셨다. 기껏해야 “뭐 이따위가 있어“ 정도였다.
내가 태어난 이곳에서의 추억이라고는 고향을 떠난 다섯 살 이전의 추억은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양양에서 초등학교 삼 학년까지 보내고 사 학년 일 년간 이곳 고향에서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와 넷이 보낸
날들이 너무나도 기억 속에 생생히 그려져 있어 내 일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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