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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음악과 관련한 여러 가지 용어 정리
1) 찬양
'찬양'은 높이어 기리다, 칭찬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음악이나 노래와는 다른 범주의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찬양'이 일반 음악과 구별되는 기독교 음악을 가리키는 말로 인식되고 있다. 찬양은 형식이 아니라 그 내용을 가리킨다. 우리가 쓰고 있는 찬송가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 바로 '찬양(praise)'이다. 기독교 음악에는 찬양이 아닌 내용도 많기 때문에 기독교와 관련된 노래를 모두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찬양은 음악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문학, 미술, 무용 등 다른 예술적 형태로도 찬양할 수 있고, 그 무엇으로도 찬양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교회에서 쓰고 있는 '찬양합시다'라는 말은 '노래로 찬양합시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2) 가스펠 송/복음성가
복음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앙고백을 하며 자기 간증을 담은 노래가 주류를 이룬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수직적인 내용보다는 인간들에게 권면하고 설득하는 수평적인 내용의 주관적 음악이다. 형식에 있어서 전통 찬송은 위엄있고 균형과 절제를 갖추었고 화성이 다양하다면, 가스펠 송은 보통 경쾌한 리듬과 단순한 화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음성가는 '가스펠 송'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실 그대로 번역한다면 '복음가'가 맞으나 구별키위해 '성가'로 번역해 써 왔다.
3) 블랙 가스펠(가스펠)
흑인 영가에 뿌리를 두고 내려온 흑인 음악으로 흑인 특유의 형식을 지닌 장르로 분류된다. 대표적인 흑인음악의 흐름을 블루스-재즈-가스펠-소울-리듬 앤 블루스… 이런 식으로 잡아나가는 것처럼, 블랙 가스펠은 흑인음악의 주요 흐름중의 하나이다. 내용적인 가스펠 음악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블랙'을 빼고 그냥 '가스펠'이라고도 한다.
4) 팝 가스펠/록 가스펠
일반 음악계에서 기독교 관련 음악을 다 가스펠 음악으로 분류하다가, 일반 팝이나 록과 음악적으로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가스펠 음악이 등장하자 팝 가스펠이니 록 가스펠이니 하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이제는 CCM으로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5) 은혜찬양
우리나라에서 쓰는 독특한 용어인데 주로 8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한 컨템퍼러리한 스타일의 음악과 대비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의 내용도 간증집회와 어울리게 구원의 기쁨, 은혜에 대한 감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보자면 이는 음악 용어가 아니다.
6) 생활성가
카톨릭에서 쓰는 용어로 기독교의 '복음성가'와 맥락이 같은 말이라고 보면 된다.
가스펠 뮤직의 간단한 역사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가스펠 음악은 19세기말 미국에서 발전하였다. 가스펠 송이란 말은 19세기말 미국에서 처음 쓰였는데, 1974년 당시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휘틀(D.W.Whittle 1840!1901)의 집회에서 찬송 인도자로 활동하던 블리스(Phlip Bliss)가 출판한 노래모음집 『가스펠 송』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r가스펠 송은 당시의 대중적인 부흥집회나 산과 들에서 열린 캠프 집회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거나 구원의 기쁨을 간증하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개인적,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음악적으로는 명랑하고 민요적인 요소를 담은 세속적인 스타일이었다. 당시에 불리던 가스펠 송을 보면 "하나님의 진리 등대",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저 죽어 가는 자",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주 예수 내 맘에 오신 후",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저기 갈보리 산 험한 십자가는",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등 필립 블리스, 아이러 생키(Ira D. Sankey), 윌리엄 커크패트릭(William J. Kirkpatrick), 패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등 당시의 유명한 가스펠 송 작사ㆍ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1920년 경 가스펠 송은 흑인 영가와 재즈의 요소를 혼합하여 더욱 생기 있고 힘찬 곡으로 변해갔다. 이런 음악은 후에 미국 북동부 흑인들 위주로 발전해 나가면서 리듬 앤 블루스, 소울(Soul)등의 요소를 가미하여 오늘날 좁은 뜻의 가스펠 음악이 되었다. 이를 밝혀 블랙 가스펠이라고 부른다.
한편 백인들 사이에서는 영국의 발라드나 민요를 바탕으로 컨추리 풍의 가스펠 송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 음악은 남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므로 서던 가스펠이라 불렀다. 백인들의 가스펠인 서던 가스펠은 1959, 60년대의 주된 가스펠 음악이었다. 백인들의 전통 가스펠이 록 음악의 요소를 혼합하고 새로운 현대적인 다양한 음악 요소를 받아들여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은 1960년대 말, 1970대 초에 태동했다. 로큰롤이 등장한 이후 일반 대중음악계가 흥성하여 대중음악이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후에 태어난 것이다. 그 이전의 대중적인 기독교 음악은 가스펠 음악으로 통칭되었다. 그러한 가스펠 음악의 역사는 대략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 음악학자인 오즈벡 교수는 넓은 의미로서의 가스펠 음악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1. 초장기 가스펠 음악(1870~1910)
이 시가는 유명한 부흥사 무디(Dwight L. Moody)와 그와 함께 다니던 음악인이자 출판인이었던 생키 그리고 시각장애인 작사가 크로스비가 이끈 시기였다. 무디는 1886년 시카고에 무디성경연구원을 설립하고 젊은이들에게 가스펠 음악을 가르칠 계획을 세웠다. 1893년 무디는 이 학교의 음악 지도자로 다니엘 타우너(Daniel Towner, 1850~1919)를 임명했다. 타우너는 "At Calvary", "Trust and Obey", "Grace Greater Than Our Sin", "Saved by Blood", "Nor Silver nor Gold", "My An-Chor Holds", "Anywhere With Jesus", "Only a Sinner" 등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는 또 알렉산더(Charles M. Alexander), 슐러(George Schuler)등 유명한 음악 지도자를 길러 냈다.
아이러 생키는 근 30년 동안 무디와 함께 노래 인도자로, 또 독창자로 활동했다. 그는 "가스펠 송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생키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전도자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가스펠 음악을 널리 알리고 출판하는 데 있어서도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영국에서 출판한 『Scared Songs and Solos』라는 노래집은 800만 부 이상이나 팔렸다. 그는 다른 가스펠 음악인인 블리스 등과 함께 『Gospel Hymns and Sacred Songs, 1875』, 『Gospel Hymns No.2, 1876』, 『-No.3, 1878』, 『_No.4, 1883』, 『_No.5, 1887』, 『_No.6 1892』 그리고 발췌곡집인 『Gospel Hymns, No.1~6, 1894』등을 출판했다. 그 책들의 판매수익금은 무디의 전도집회에 재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처음엔 이 새로운 세속음악 스타일에 대해 반발이 일어났다. 그 반발은 특히 영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집회가 계속되면서 이 음악은 점차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생키의 찬송은 아직도 불리워진다. "양 아흔아홉 마리는", "A Shelter in the Time of Storm", "어려운 일 당할 때", "Hiding in Thee",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주 믿는 사람 일어나"등.
패니 크로스비는 약을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생후 6주 후 실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8,000~9,000곡의 가스펠 송을 작사하였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노랫말을 만들었다. 생키는 그녀의 가사로 그토록 유명한 가스펠 송을 작곡했다. 크로스비가 작사한 노래도 여전히 불리고 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My Savior First of All", "나의 갈길 다가도록",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고" 등.
2. 1910~1920
부흥사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그와 함께 노래 인도자로 활약한 호머 로드히버(Hommer Rodeheaver)가 이끈 시기였다. 로드히버는 기독교인들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생기 있는 가스펠 송을 만들어 냈다. 당시에 자주 불리운 가스펠 송은 "Brighten the Corner Where You Are", "Sweeter as the Years Go By", "If Your Heart Keeps Right"등이 있다.
3. 1920~1945
이 시기엔 전국적인 부흥 인도자가 없었다. 이 무렵 가스펠을 방송하는 라디오 방송이 생계났다. 라디오 전도방송 설교자는 마이어(Walter Maier), 풀러(Charles Fuller), 드한(M. R. Dehaan), 레이다(Paul Radar),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러블리스(Wendell P. Loveless), 던롭(Merrill Dunlop)등의 가스펠 송이 나왔다.
4. 1945~1960년대 중반
이 시기는 십대선교회(Youth for Christ)나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등에 의해 인도된 단체가 등장했다. 가스펠 음악은 이러한 선교단체가 청중을 동원하고 개인적 신앙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 했다. 존 피터슨(John M. Perterson), 랄프 카마이클(Ralph Carmichael)과 같은 뛰어난 가스펠 음악인이 나타났다. 단순하면서도 흡인력이 강한 가스펠 합창곡과 영적이면서도 쉬운 합창 칸타타가 이 시기에 발달했다,
5. 1960년 중반 이후부터 현대까지
이 시기엔 가스펠 음악의 폭발적인 성장이 일어났다. 포크, 컨추리, 웨스턴, 서던, 하드록, 소프트록, 메탈, 랩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이 가스펠 음악에 원용되면서 '지저스 뮤직', '지저스 록',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이란 말을 탄생시켰다. 카리스마 운동(예수운동)은 가스펠 음악의 양적, 질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컨츄리 음악의 본고장인 내휘빌에는 1964년 가스펠 음악협회가 생겨났고, 인디애나 폴리스에서는 가장 큰 가스펠 집회가 열렸다. 콜로라도 에스테스 파크에서는 연례 크리스천 아티스트 뮤직 세미나가 열렸다. 이러한 모든 움직임은 가스펠 음악을 크게 발전시켰다. 1990년대에 들어서 드디어 가스펠 음악은 일반 음악계에까지 그 영역을 넓힘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CCM의 역사 개관
교회는 오랜 세월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노래를 각 나라와 지역의 특성에 따라, 그리고 문화의 특성에 따라 만들고, 또 지역마다 고유의 악기를 사용해서 내용은 같으나 스타일은 독특한 음악이 세계 곳곳에서 발전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전자악기가 출현하고 이 악기를 사용한 음악이 전 세계에 일반화되자 그 차이는 거의 없어져 버렸다. 그에 따라 교회안에서 크리스천 음악도 새로운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전통적인 교회음악을 컨템퍼러리한 음악으로 변화시킨 시도는 1964년 미국의 레이 렙(Ray Repp)이 카톨릭 교회에 포크 미사 "미국의 젊은이를 위한 미사(Mass For Young Americans)"를 선보임으로써 시작됐다. 장엄하고 웅장한 미사곡만을 연상하던 사람들에게 포크 미사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 이듬해인 1965년 랄프 카마이클(Ralph Carmicaael)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선교영화 "The Restless Ones)"에 음악을 붙이면서 싱커페이션(보통 당김음)이 가미된 음악을 썼다. 그 해에 미국 남부 침례교회에서는 'Good News'라는 이름의 청소년 수련회를 시작했는데, 이 수련회는 빌리 레이 헌(Billy Ray Hearn)이 이끌었다. 그는 나중에 3대 크리스천 레코드사로 성장한 Sparrow 레크드를 설립했다. CCM의 역사를 이끌어 온 사람 중의 하나인 빌리 레이 헌이 인도한 그 수련회에서 컨펨퍼러리한 음악이 싹텄다.
1965년, 미국의 유명한 팝아티스트인 베리 맥가이어(Barry McGuire)는 록 음악세계의 반항물결을 떠나는 신호로 <Eve of Destruction>이라는 앨범을 냈다. 이 앨범은 당시 유행하던 팝 음악 스타일에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1967년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운동과 '자유연애', '평화의 상징', '마약', 그리고 '로큰롤'을 성스러운 것으로 삼는 반문화운동이 일어났다. 반문화 운동이 내세운 자유스러운 사랑에의 약속과 진정한 자아실현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환멸에 빠졌던 이들은 상당수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과 평안을 발견했다. 이 젊은이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1969년 래리 노먼이라는 이름의 젊은 아티스트가 <Upon This Rock>이라는 앨범을 냈다. 이 앨범은 정통 록 음악에 신앙을 담은 혁명적인 것이었고 크리스천 록의 선구적인 신호탄과도 같으며 이 노래는 바로 젊은 크리스천이 얘기하고 싶어하던 것이었다. 이해에 첫 CCM 앨범으로 여겨지는 Mylon Lefever and Holy Smoke의<Mylon>, 래리 노먼의 <Upon This Rock>, John Fescher의 <The Cold Cathedra>이 나왔다.
캘리포니아의 갈보리 교회(Calvary Chapel)는 히피들을 위해 대규모 침례식을 거행했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 신앙이 음악의 소리나 겉모습보다는 그 마음의 조건과 더 관련이 있다는 시실을 일찍 깨달었으며 그 교회의 처 스미스(Chuck Smith)목사는 주변의 음악인들을 북돋아 음악 스타일에 상관없이 주님을 위한 음악을 만들도록 했다. 이 음악들도 새로운 크리스천 문화의 한 부분을 형성해 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새로운 물결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예수운동(Jesus Movement)'과 중첩되어 《타임》지를 비롯한 일반 매체까지도 이 운동을 다룰 만큼 확산되었다.
음악은 1960년대 새로운 세대의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표현방법 중의 하나였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기독교적 성향을 띤 노래가 25곡이나 《빌보드》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혹 오페라 "Jesus Christ Superstar"는 브로드웨이에서 빅히트했으며, 내용이 좀더 정통적인 뮤지컬 "Godspell"도 히트했다,
비록 음악적 수준은 낮았지만 그 순수성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돋보인 시기였다. 그들은 전혀 상업적인 면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1년 갈보리 교회는 'Maranatha! Music"이라는 음악선교단체를 설립해 앨범을 내기 시작했다. 그 첫 앨범이 <The Everlastin' Living Jesus Music Concert>였다. 당시엔 CCM이 '예수 음악(Jesus Music)', 또는 '지저스-록(Jesus-rock)'이라고 불리웠다. 그 선구자들은 Children of the Day, Bessed Hope, Gentle Faith, Country Faith, The Way, Selah 그리고 LoveSong과 같은 그룹이었다.
LoveSong의 척 지라드(CHuck Girad), 톰 쿰스(Tom Coomes)등은 자신들만의 앨범을 발표해서 그 앨범은 CCM의 고전이 됐다.
Maranata' Music은 프레이즈 송도 보급했다. 시편이나 복음서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생동감있고 단순하면서도 선율이 풍부한 노래를 썼다. 이런 프레이즈 송은 기존의 찬송과 함께 예배에 수용되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Seek Ye First", "Father, I Adore You", "Our God Reigns", "I Love You Lord", "He Has Made Me Glad", "The Peace That Passes All Understanding"같은 프레이즈는 사람들의 예배 방식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1972년 여름 달라스의 카트보울에서는 '엑스폴로 '72'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전 세계에서 모인 젊은이 8만 명 앞에서 매일 새로운 CCM이 선보였고, 그 결과 연인원 20만명이나 되는 젊은 크리스천들이 새로운 CCM에 접하게 되었다.
그 무렵 워드 레코드사(Wrod Records)는 '예수 음악'전문 레이블을 설립하였다. 당시 빌리 레이 헌은 머(Myrrh) 레이블을 설립해서 초창기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지션들의 앨범을 내기 시작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CCM은 기성교회의 강한 거부감과 매체로 거의 방송되지 않는 악조건속에서도 성장했다. 1974년 사도행전 2장이 낸 앨범 ,With Footnotes>와 마이클 오마티안이 낸 앨범 <White Horse>는 CCM계의 제작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그에 따라 라디오 방송에서도 점차 CCM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1976년 직전 배리 맥가이어는 팝계를 떠나 크리스천 뮤직계로 은신한 대표적인 팝스타로 알려지게 되었다. 리치 퍼레이(Richie Furay)와 팝스타 비제이 토마스(B. J. Tomas)등이 크리스천 음악계로 전향함으로써 팝스타들이 크리스천 음악계로 넘어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을 거쳐 많은 팝스타들이 크리스천 음악계로 발을 옮겨왔다. 또 밥 딜런(Bob Dylan), 도나 서머(Donna Summer) 등 수많은 유명 팝 아티스트들이 크리스천이 되거나 크리스천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크리스천 음악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1976년엔 CCM에 지대한 공헌을 한 스패로우 레크드를 설립한 빌리 레이 헌은 선교사명이 강한 레코드사를 세워 배리 맥가이어, 애니 허링, 존 마이클 탈보트, 사도행전 2장과 키쓰 그린을 소속 가수로 영입했다.
1978년에는 CCM계에 CCM을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CCM)》가 창간되고 에이미 그랜트(Amy Grant)가 등장하는 두가지 큰 영향을 준 일이 일어났다.
《CCM》매거진의 등장과 함께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이란 말이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첫째로 기존의 가스펠 음악과는 확실히 다른 흐름을 인정했다는 것, 둘째, 컨템퍼러리한 상황을 반영하고 그 의미를 구현하는 음악을 표현하는 용어가 필요했고, 셋째, 산업적인 측면으로 가스펠 음반산업이 산업구조에 편입되어 여러 문화 시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자 '복음을 담고 있는 음악'이라는 영역을 넘어 일반대중음악에서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1975년 15세때 레코딩 계약을 한 에이미 그랜트는 1977년 데뷔 앨범을 내며 크리스천 뮤직계의 스타로 등장했다. 이로서 크리스천 뮤직 산업이 한 걸음 더 성장하게 되었고 에이미는 일반 팝계가 크리스천 뮤직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큰 의미를 지닌 아티스트였다.
78년부터 83년까지 크리스천 뮤직산업은 꽃을 피었다. 레즈(Rez) 밴드는 첫 크리스천 메탈 그룹으로 소개되었고, 예수운동 시대의 사람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되자 캔들 같은 그룹은 어린이 음악을 만들었다. 《CCM》매거진 1980년 12월호는 캔들이 100만장 이상 판매고를 올린 유일한 CCM 그룹이라고 보고했다.
이 시기에는 CCM에 여러 가지 음악 스타일이 시도되면서 앞으로의 CCM의 음악적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런 새로운 방향에 대해서 논란도 일어났다.
낸시 허니츄리(Nancy Honmeytree)는 보사노바 비트의 노래를, 도니 맥가이어(Dony McGuire)는 8분짜리 연주곡을, 제임스 빈센트는 복발적인 재즈 사운드를, 쉴라 월쉬(Shiela Walsh)는 영국 뉴 웨이브 사운드를, 록 그룹 77s(Seventy sevens)는 소란스러운 기타와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로 <Ping Pong Over the Abyss>라는 앨범을 내므로 비판을 받았지만 1978년 크리스천 아티스트 뮤직 세미나에서 돈 프란시스코(Don Francisco)는 주님이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고 말했다.
1979년, 밥 라슨은 세속 록 음악에서 보았던 위험성이 크리스천 록에도 존재할 위험이 있다고 해서 크리스천 록을 반대해왔으나, CCM을 자세히 접하고 그 아티스트들의 믿음과 삶을 체험하면서부터 크리스천 록에 대한 관점을 바꾸고 옹호하는 입장이 되었다.
음악과 선교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꿋꿋한 예언자 키쓰 그린은 1980년 자신의 새앨범을 자유가격제로 판매하겠다고 발표해서 크리스천 음악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는 구매자가 원하는 가격대로 앨범을 우편 판매함으로 돈이 없는 사람도 그의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부인인 멜로디 그린은 키쓰 그린이 설립했던 라스트 데이 미니스트리(Last Day Ministry)를 통해 수많은 선교 사역자를 길러냈다.
1981년, CCM이 양적으로 성장하자 일반 레코드사에서도 크리스천 음악을 보급함에 따라 일반 시장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노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음악 영역의 전환에 따르는 문제가 발생하여 이른바 '크로스오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크리스천 음악계에서 크로스오버라는 말은 처음엔 일반 팝계에서 크리스천 음악으로 넘어오는 것을 뜻했다. 당시에 이런 크로스오버는 세가지로 대별되었다. 첫째는 배리 맥가이어처럼 일반 마켓을 등지고 완전히 크리스천 음악 선교쪽으로 오는 경우였다. 두 번째는 브루스 코번(Bruce Cockburn)처럼 일반 마켓에서 활동하면서 분명하게 기독교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고 세 번째 그룹은 양쪽을 다 하는 경우로 팻 분이나 클리프 리처드가 그랬다.
그러나 이후의 크로스오버 문제는 크리스천 음악계에서 일반 팝계로 넘어가는 크로스오버로 전환되었다. 1982년 앨범<Age to Age>로 크리스천 솔로 아티스트로서는 처음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에이미는 1984년 <Straight Ahead>로 두 번째 그래미 상을 받았는데, 시상식에서 노래를 함으로써 일반 음악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5년 에이미 그랜트의 "Find a Way"가 CCM으로 빌보드 톱 40 차트에 올랐다. 이를 본 크리스천 레코드사는 여러부분에 더 투자하였다.
1982년 CCM계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백워드 매스킹(Backward Masking)' 논쟁이 일어났다. 이는 레코드를 거꾸로 돌려 보면 사탄의 메시지가 들린다는 것으로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레코드를 거꾸로 돌려 보는 일이 유행했다.
1984년 스트라이퍼(Stryper)가 데뷔했다. 노란 줄과 까만 줄의 스판덱스 옷, 찢어지는 기타와 드럼 소리로 파격적인 크리스천 메탈 그룹을 표방했다. "Loud' N'Clear"와 "You Know Waht to Do"에서 명확한 복음의 메시지를 노래했다. 그들의 노래는 충격적이었고 그들의 무대 모습과 기이한 행동은 앤티크리스천 록커들에게 좋은 비판거리를 제공했다.
1985년, 워드 레코드사는 일반 메이저 팝 레코드사인 A&M사와 계약해서 에이미 그랜트의 앨범을 일반 시장에 보급하였다. 그녀의 앨범<Unguarded>가 나오자 크리스천 음악 가수의 크로스 오버가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다. 이 앨범의 "Find a Way"는 빌보드 톱 40에 진입해서 크리스천 레이블 소속 가수로는 처음으로 일반 차트에 등장하는 기록을 남겼다. 에이미에 대해서는 세상과 타협했다는 비판과 일반 팝시장에 크리스천 음악을 전파함으로 세상에 복음을 들려주었다는 상반된 비평이 나왔다. 1986년 에이미는 <Unguarded>로 백만장 이상 팔린 음반을 지칭하는 플래티넘 앨범을 기록하는 인기를 누렸다. 그녀는 쟈니 카슨의 '투나잇 쇼' 토크쇼 출연과 당시 대통형이었던 레이건 부처와 함께 '워싱턴의 크리스마스'라든가 에이미 그랜트 특별 크리스마스 쇼에 등장하는 등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샌디 패티(Sandi Patti)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1979년 히트 차트에 오른 이후 인스피레이셔널 분야의 최고봉이 되었다. 샌디 패티와 에이미 그랜트는 전체 크리스천 판매고의 10퍼센트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크리스천 음악계의 슈퍼스타였다.
1984년 가스펠 음악협회(GMA)가 주최하는 도브(Dove)상 시상식이 텔레비전으로 미국 전역에 중계되면서 CCM은 뚜렷한 음악 분야로 더욱 인식되었다. 아티스트들은 사회복지 단제와 협력하여 일하기 시작했으며 1985년 4월, 90명 이상의 아티스트들이 "Do Something Now"라는 노래를 했다.
80년대 중반, 잠잠하던 크리스천 록에 대한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1980년대 중반부터 CCM은 일반 팝의 흐름과 거의 대등한 흐름을 이어 나갔다. 스티브 테일러(Steve Taylor)가 뉴 웨이브 스타일의 크리스천 음악을 선보인 이래로 CCM은 크리스천 랩이 있는가 하면 묵상을 위한 연주음악등 여러 종류의 음악이 나왔다.
1985년 CCM계에서도 CD를 제작해서 이제는 음질을 비롯한 제작기술면에서도 일반 팝계와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으며 일반 팝계의 뮤직 비디오가 크게 성장하면서 CCM 뮤직 비디오도 함께 등장했다. 크리스천 MTV도 등장했다. 1986년 출범한 가스펠 뮤직 네트워크(Gospel Music Network)는 크리스천 음악 비디오만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1988년 드디어 CCM은 대학에서 정식학과로 등장했다. 미국 그린빌 칼리지(Greevill College)는 CCM을 정규학과로 세워서 그 커리큘럼에 CCM의 여러 분야(스튜디오 레코딩 테크닉, 팝 이론과 작곡 코스, 실기 코스, 무대 효과, 프로그래밍, 프로모션, 업계 활동 등)를 포함시켰다.
한편 마라나타!뮤직이 성장시켜온 컨템퍼러리 프레이즈 송들은 호산나 인테그리티 뮤직(Hosanna Integrity Music)의 프레이즈 앤 워십 시리즈로 더욱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1990년대에는 내쉬빌(Nashville)이 CCM의 본고장으로 정착됐다. 90년대에는 임페리얼스가 25주년을, 랜디 스톤힐과 레즈밴드, 사도행전 2장과 마라나타!뮤직 레이블이 20주년을 넘겼고 코너스톤과 크리에이션이 15주년을 넘겼다. 《빌보드》는 가스펠과 CCM차트를 시작했다.
미국의 CCM은 유럽에도 흘러갔다. 1989년 8월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탈린(Tallinn)에서 열렸던 "에스토니아'89"는 2,000명 이상의 결신자를 낳았다. 소련 공산화 이래 CCM 공연은 처음이었다.
1990년대는 CCM이 본격적으로 일반 팝뮤직계로 뛰어드는 시기가 됐다. 크리스천 음악업계는 성장하여 일반 팝뮤직계의 수준에 완전히 도달했으며, 내용적으로는 일반 팝을 앞서갈 정도로 향상 되었다. 마이클 W.스미스, 에이미 그랜트, 비비 앤시시 와이넌스, 스티븐 커티스 채프먼, 페트라, 웨인 왓슨, 트와일라 패리스등은 앨범마다 수십만 장의 판매고를 올릴 만큼 시장이 커졌다. 디씨 토크, 뉴스보이스, 마가렛베커, 레이첼 레이철등이 등장하자 음악적인 뚜렷한 구분이 어렵게 되었고 성/속의 이분법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천 음악업계의 매출액은 급성장했고 일반 레코드업계에서는 산업으로서의 CCM에 관심을 보였고 크리스천 레이블을 인수, 합병하기 시작했다. 1991년 소니/에픽(Sony/Epic) 레코드는 워드의 레코드를 일반 팝시장에 보급하기로 계약했다. 그 결과 CCM이 상당수 일반 시장에 보급될 수 있게 되었다. EMI는 스패로우를, BMG는 리유니언을 사들였다.
1991년 CCM 출신의 아티스트로는 처음으로 에이미 그랜트가 "Baby Baby"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이어서 미이클 W. 스미스가 "Place In This World"로 팝 차트 상위에 진출했고 두 번째로 팝시장에 내놓은 "I Will Be Here For You"는 어덜트 차트 1위에 올랐다. 수십 년동안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지션들이 품어왔던 "일반 시장에도 크리스천 음악을!"이라는 슬로건이 실현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1995년 음악 차트 전문지 《빌보드》는 CCM도 일반 팝과 함께 집계해서 차트를 내기 시작했다. 예상을 깨고 CCM 앨범들은 톱200 앨범 차트에 자주 올랐고 상위권에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고린도후서에서 이름을 딴 자스 오브 클레이(Fars of Clay)는 1995년 데뷔 앨범을 200만 장 이상 판매해서 크리스천 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을 기록했다. 1997년 6월 밥 카알라일(Bob Carlisle)의 앨범 <Shade of Grace>는 CCM 앨범으로는 처음으로 빌보드 톱200 앨범에 1위로 등장했다. 커크 프랭클린(Kirk Franklin)과 싱잉그룹인 갓즈 프로퍼티(God's Property)는 힙합 힘(hip-hop hymn)을 가지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99년 얼터너티브 록 그룹인 식스펜스 난 더 리처(Sixpence None the Richer)는 "Kiss Me"로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 올랐고 세계적인 러브송이 되었다. 에이미 그랜트, 마이클 W, 스미스, 디씨 토크, 자스 오브 클레이의 앨범은 차트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CCM은 명실상부하게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잡은 것이다.
일반 레코드사들이 크리스천 레이블을 소유함으로써 크리스천 레이블들의 음악은 일반 라디오와 소매상에 공급되었다. 크리스천 서점 연합회(CBA)의 매출이 크게 성장했고 1997년 크리스천 음반의 매출은 크리스천 시장과 일반 시장 양쪽이 거의 반반을 차지했다.
프레이즈 뮤직도 르네상스를 맞았다. 워십 리더인 돈 모엔(Don Moen), 론 케놀리(Ron Kenoly)등의 앨범은 웬만한 스타의 앨범보다 더 많은 호응을 얻었다. 미국의 인테그리티나 비니어드 뿐만 아니라 호주의 힐송, 영국의 킹스웨이 프레이즈 앨범도 널리 확산되었다.
여러 아트스트가 참여하는 <Young Messiah>, <My Utmost For His Highest>, <Emmanuel>, <Our Family>, <Our Christmas>, <Sisters>등 의 앨범도 나왔다. CCM의 선구자 래리 노먼을 위한 헌정앨범 <One Way:The Songs of Larry Norman(1995)>을 필두로 많은 헌정앨범이 나왔다.
CCM은 일반 주류 음악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엄청난 성장을 했다. 그러나 CCM의 목적, 가사 내용, 아티스트의 명성, 세속성 등에 대한 이슈들은 70년대와 마찬가지로 제기되었다. 일반 팝계에 진출한 크리스천 아티스트들의 앨범 내용을 두고 그것이 과연 크리스천음악이냐 아니냐의 논란도 야기되었다. 그런 앨범들을 과연 도브 상 후보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그래서 가스펠 음악협회는 가스펠 음악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기도 했다.
CCM에 대한 평가는 21세기의 기독교 문화와 대중음악계가 해 줄 것이다.
"음악은 오늘의 음악, 그러나 그 메시지는 영원한 것으로."
CCM 탄생의 배경
<컨템퍼러리 음악 수용의 역사>
교회음악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대에 따라 음악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한때는 죄악시되던 악기나 음악 형식이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의 대표적인 음악으로 자리잡은 일도 많았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영원불변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화는 계속 변해왔던 것이다.
교회음악은 겉으로 보면 교회에서의 용도에 따라 사용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말씀에 부응하는 음악이다. 주님의 말씀에 부응하는 음악은 교회의 목적에 부합된다. 이것이 제도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참모습이 예배당 건물이 아니듯 교회음악의 참모습도 그 양식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음악의 역사는 기독교 문화의 변화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컨템퍼러리한 문화와 음악을 수용한 교회음악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CCM의 탄생도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1세기 무렵 교회음악은 세속적 음악 형태를 빌려 왔다. 대부분의 교회선법은 이교도인 그리스 문명에 뿌리를 두었던 것이다.
- 그레고리안 찬트가 집대성되기까지 교회음악은 큰 발전이 없었다. 유니즌으로, 무반주로, 남자만이 예배에서 노래가 허락되었다. 일단 그레고리안 찬트가 교회에 뿌리내리자 '성스런' 스타일은 제한, 고착되었다. 결국 교회음악은 세상의 유행 음악과 격리되었고, 평신도들은 예배음악에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 13세기가 돼서야 카톨릭 교회에 오르간이 겨우 수용되었다. 오르간은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초대 기독교인들이 학살될 때 연주되기도 했었다.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 교회에서는 오르간이 보편적으로 쓰였다.
- 중세 교회음악인들은 증4 화음(augmented fourth chord)을 악마의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이후론 교회에서 이 화음이 광범위하게 쓰였다. 또 다른 시기엔 36화음(chord of the thirds and sixths)이 선정적이라고 해서 금지되었다. 나중엔 싱커페이션 박자가 거부되었다. 랙타임 시대와의 연관성때문이었다. 그러나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Since Jesus Came into My Heart)"같은 찬송은 당시 사람들에겐 충격적인 노래였으나 오늘날엔 전통찬송 여겨진다.
- 루터는 음악을 신학 다음으로 놓았다. 교회예배를 개혁했다. 교회에서 음악을 한 차원 높였다. 그는 또 루트, 플루트 연주자였고 작곡도 했다.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노래가 단순하고 쉬운 언어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가사 모델로 당시 유행했던 발라드를 들었다. 곡조는 독일 민요, 대중의 노래, 메리 여왕 찬가도 빌렸다. 그는 곡의 독창성보다는 진리를 전하는 능력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는 젊은이들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그 무엇이든지 소리나게 할 수 있는 만큼 다 소리나게 하겠다고 했다. "The devil has no need of all the good tunes for himself."
- 그런가 하면 쯔빙글리는 카톨릭과 연관된 악기를 반대했다.
- 칼빈은 예배에서 악기를 쓰는 것과 성부로 나뉘어 노래하는 것을 반대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가사도 금지했다. 많은 교회에서 오르간이 파괴됐고, 운율시편가(Metrical Psalms)가 100년 이상 지배했다.
- 1952년 칼빈의 요청으로 제네마 시편가가 출판되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루이 부르조아(Louis Bougeois)는 허락 없이 시편 곡조를 바꿨다고 해서 투옥되었다.
- 찬송(hymn)을 예배에 쓰느냐의 문제도 17세기의 중요한 이슈였다. 17세기 말에야 매주 찬송을 부르게 됐지만 아직도 저항이 있었다.
- 18세기 아이작 와츠(Issac Watts)는 찬송을 많이 만들어 유표했다. 와츠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경험과 사상과 감정에 기초한 노래를 만들어 냈다. 영국에서는 19세기 초까지 여전히 시편가가 주도했다.
- 찰스 웨슬리(Charls Wesley)는 대중적 오페라와 영국 민요에서 차용한 새로운 멜로디를 썼다. 존 웨슬리는 찬송이 모든 사람이 부를 수 있는 평이한 곡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미국의 가스펠 송도 미국의 포크 힘과 캠프 미팅 송에 그 뿌리를 두고 내려왔고, 그 모태는 영국의 세속 발라드와 춤곡 리듬의 피들 곡조, 행진곡, 혼파이프 곡조 등이었다. 생키의 노래는 파풀러 포크 찬송으로 평가된다.
생키가 썼던 리드 오르간도 파이프마다 악마가 있는 악기로 묘사된 적이 있었다.
-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의 구세군도 여러 가지 악기를 수용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구세군 밴드도 당시엔 혁명적이었다.
- 피아노의 경우에도 19세기에는 이 '세속 악기'를 쓰려했던 교회는 거의 없었다. 18세기 모라비안 교회는 바이올린을 '악마의 피들'이라며 거부했다. 성례전 회복운동이 일어나면서(1930~1960)교회는 역사적인 예배 형태에 새로운 관심을 보였는데, 솔로 싱어가 영광을 받을 까봐 솔로이스트 쓰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예전엔 합창을 로마교회와 연관이 있다고 해서 거부하기도 했었다.
- 새로운 형태의 음악은 언제나 영적 부흥의 시기에 나타나곤 했다. 웨슬리 형제의 부흥, 미국 대각성기간의 부흥운동에서 찬송과 가스펠 음악이 나왔듯이 1960년대 말, 1970대 초 미국의 예수운동(Jesus Movement)시기에 CCM이 태동되었다.
<CCM 탄생의 사회적 배경>
1960년대말, 미국의 젊은이들은 저항과 반항으로 불타올랐다. 그들은 세계 제2차 대전 직후 태어난 세대로서 전후세대로 일컬어졌다. 이 시기는 미국의 역사상 가장 급속한 사회 혼란과 변동의 시기로 견주어지고 있다. 월남전에 휘말린 미군, 전쟁을 반대하는 학생운동, 급속히 일어난 히피족들.... 당시의 젊은이들은 멸망해 가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영혼 없는 물질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신격화'가 빚어낸 사회의 결과이기도 했다.
급진적인 젊은이들은 기성사회를 파괴하려 했으며, 좀 덜 과격한 히피들은 술과 마약의 세계로 도피했다. 이들은 평화 속에서 사랑과 이해로 살아가는 세계를 꿈꾸었고 원초적인 삶의 세계, 자연의 세계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상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정신적인 흐름을 추종하려는 노력이 생겨났다. 옛 철학자, 신 철학자, 신비종교, 명상 등의 가르침을 찾아 헤맸다.
진리의 의미,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해 온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미국식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인 그들의 부모가 저지른 실책을 보고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믿음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기성교회의 부정적인 면만을 크게 보았던 것이다. 사실, 당시의 기성교회는 커져만 가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간의 격차에 대해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기성세대의 가치관만을 강요하고 안주해 있었다.
몇몇 지도자들은 멀지 않아 젊은이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rl)은 "우리는 젊은이들 사이에 점차 늘어가는 정신적 진공현상을 지켜보았다. 그러한 징후는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 만족하지 못하고, 낡아버린 예배 형식을 참지 못한 나머지 자기만족에 대한 모색으로 처음엔 록 뮤직에 빠지고, 다음엔 신비주의에, 마지막엔 마약에 빠져 버린다. 교회가 교회를 지성화하는 데 힘써옴으로 교회는 젊은이들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지성화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를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라고 얘기하면서 당시의 기성교회와 젊은 세대간의 괴리현상을 설명했다.
더구나 당대를 휩쓸고 있었던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 그리고 밥 딜런의 로큰롤은 그들의 불안정하고 반항적인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평화를 찾기 위해 대중음악의 우상을 섬겼고, 화학 물질인 마약에서 평안을 찾았다. 이방 신들에게 절하고 프리섹스를 부르짖고 부모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기독교의 참다운 가르침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혁명이란 기성세대를 파괴하거나 도피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갱생에 있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생활양식을 따르면서 교회 밖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예전의 카타콤과 '지하교회'가 생겨났다. 이들은 세대간의 격차 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했고, 기존의 교회에 환멸을 느낀 이들에게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기쁨과 흥미를 주었다.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는 '기독교 세계 해방전선(CHristian World Liberation Front)'이라는 독립결사 같은 모임이 생겨났다. 샌프란시스코의 하이트-애쉬베리라는 거리는 각양각생의 반체제적인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집합장소였다. 그 곳에서 린지(Lindsey)라는 목사가 반체제적인 젊은이들과 사회에서 소외된 젊은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65년 약 15,000명의 학생 폭력집회가 있었던 버클리에서 2년 뒤에는 폭력집회가 사라졌다.
1968년 또 다른 거리의 선교자인 아서 블레싯(Arthur Blessitt)은 할리우드 고고클럽에서 출입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결국 그는 그 클럽에서 매주 화요일 정기 집회를 갖게 되었다. 이처럼 거리에서 직접 반항하는 젊은이들에게 혁명이 아닌 부흥을 전달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7년, 미국에서는 '예수운동( Jesus Movement)'이라 불리는 하나의 혁명이 싹트게 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L.A. 근교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조그만 교회인 갈보리 교회에는 캘리포니아의 젊은 기독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교인들이 급속히 늘어나자 갈보리 교회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텐트를 쳐야 했고 젊은 목사인 척 스미스(Chuck Smith)는 특별히 젊은이들을 위한 목회를 하였다.
1969년, 기성교회의 권위와 퇴락에 대항해 지하로 스며든 젊은이들은 예수운동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예수신문(Jesus Paper)'을 찍어 거리와 고등학교와 대학 캠퍼스에 배포하였다. 이는 마치 한국에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의 기독교단체가 활동하는 것과 같았다.
그후 버클리에서도 젊은 기독인들이 예수운동 신문《Right On!》을 발간했으며, 1969년엔 《The Hollywood Free Paper》와 《Truth》지가 발행되었다. 이 밖에도 뉴욕에서는 스캇 로스(Scott Ross)라는 디제이가 5개 라디오 방송에서 복음을 전하는 쇼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Love Inn'이라는 크리스천 공동체를 성립했다. 플로리다에서도 '웨스트 팜 비치 록 페스티벌'에 대항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집회(제일침례교회의 후원)가 열렀다. 아서 블레싯은 특별히 조직된 연주팀을 이끌고 웨스트 팜 비치에 가서 집회를 열었다. 그 집회에선 약 3,000명의 젊은이들이 예수를 영접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렇듯 1960년대 말부터 영적 운동이 다시 불타올랐다. 예수운동을 통해 다른 어느 때보다도 예수에 대해 생생하게 연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야말로 20세기의 젊은이들이 갈구하는 사실임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기성교회가 도와 준 것이 아니라 젊고 활기찬 젊은 지도자들 그리고 열정에 찬 젊은이들 자신이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어지러운 세대, 기성의 권위가 무너진 세대, 무엇이 진리인지를 발견할 수 없는 세대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이러한 운동은 1971년까지 더욱 커져 갔다. 예수운동은 《Time》,《Life》,《Look》, CBS-TV,NBC-TV등 대중매체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반 기성세대를 외치는 언더그라운드의 젊은이들을 대변해온 《Rolling Stone》지까지도 "새로운 스타일의 급진주의자들이 급속도로 부흥하고 있다. 대부분 긴머리를 한 젊은 아메리카 자녀들은 '날마다 예수와 함께 하는 것이 더욱 즐겁다'라고 얘기한다. 이들은 도시 근교의 중산층 십대들과 마약, 환각제 중독자들이었던 이들, 그리고 도시빈민굴의 흑인들 그리고 월남전에 참전했던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거듭난 크리스천들이다."라고 보도하였다. 이 기사가 나간 것은 1971년 6월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계속 이어져 수년 후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지미 카터(Jimmy Carter) 는 전 세계에 '거듭남'이란 말을 퍼뜨렸다.
예수운동은 젊은이 문화의 모든 분야에까지 퍼져 나갔다. 하나님은 그 세대에 새로운 준비를 하셨다. 그분은 천천히 갱 리더, 록 스타, 마약중독자 그리고 어린 청소년들을 부르시고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하시고 비전과 짐을 함께 주셨다. 그 짐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이제 '예수운동'이라는 말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을 전파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오래 묵은 방식이었다. 메시지는 주로 거리에서 전파되었고 손에서 손으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음악이라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하였다. 예수운동이 모든 부분에 이른 것처럼 음악에도 이르렀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사명을 이뤄나갔다. 예수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 음악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현대적인 기독교 대중음악,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의 씨가 뿌려진 것이었다.
<CCM 탄생의 음악적 배경(1)>
(1) 흑인음악-블랙 가스펠의 발전
블랙 가스펠은 영국, 유럽의 포크송이 미국으로 건너가 흑인들의 정서와 체험이 더해져 생겨났다.
1800년대 초 백인들은 흑인들을 캠프미팅에 데려갔고, 흑인들은 시편송과 캠프미팅송을 들었다. 그 노래를 다시 부를 때 흑인들은 언어와 어휘력의 문제 때문에 다른 방식과 리듬에다 다른 가사로 불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가 나타났다.
첫 흑인 영가가 기록으로 남은 것은 남북전쟁 직후였다.
19세기 흑인 게토 지역의 Holiness Church는 오순절 계통으로 예배시 노래와 춤을 도입했고, 발을 구르고 외치고 뛰기도 했다. 악기도 사용했다. 노래는 아주 리드미컬했고 감정 분출을 일으켰다. 이 블랙 가스펠 전통은 20세기 초 흑인들의 음악이 출판되면서 블랙 가스펠의 형태를 갖추었다.
토마스 도어시는 컨템퍼러리 블랙 가스펠 뮤직을 정착시켰다. 1930년대 말 그의 빅 히트송 "Peace In the Valley", "Precious Lord, Take My Hand"는 백인 시장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도어시는 재즈 리듬과 블루스 창법을 교회에 도입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마할리아 잭슨과 샘 쿡 두 거장이 블랙 가스펠을 이끌었다. 1911년에 태어난 마할리아 잭슨은 풍부하고 파워풀한 목소리를 인정받아 1937년 첫 녹음을 했고 곧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40년대 초에는 토마스 도어시 팀에 합류하여 도어시의 노래를 불렀다. 1952년 TV쇼에 출연하여 재즈풍의 노래 스타일을 소개하면서 마할리아 잭슨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가스펠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마할리아는 마르틴 루터 킹을 도왔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에서도 노래하는 등 최고의 스타로 활동했다.
샘 쿡은 팝계로 크로스오버한 최초의 가스펠 아티스트였다. 그는 가스펠과 팝계 양쪽에서 톱 클래스의 작곡가가 되었고 샤우팅 창법으로 소녀들에게 인기를 크게 얻었다.
한편 블랙 가스펠은 미국의 민권운동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흑인 여성 패니 루 헤이머는 반석과 같이 힘찬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경찰의 협박과 위협을 무릅쓰고 힘있고 사랑이 있는 가스펠을 불렀다. 노동자들과 함께 투옥되고, 투옥때 구타로 인해 왼쪽 눈을 실명했음에도 하나님은 흑백인을 평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노래했다. 제임스 클리블랜드는 "Where Everybody Is Somebody"라는 슬로건을 주창하면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누구나 다 중요한 인물이라는 평등사상을 전파했다.
(2) 로큰롤의 등장
록 음악은 흑인교회의 리듬에서 그 기원이 나왔다. 오랫동안 흑인들은 자유에의 강렬한 열망을 교회 영가에서 표출해 왔다. 이런 강렬한 무드의 멜로디가 불루스를 비롯하여 소울 뮤직을 만들어 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링 샤우트(ring shout)'라는 열광적인 부름과 화답의 형식을 가지고 힘과 열정으로 표현되는 방식이 가스펠 뮤직으로 정착되었다. 1930년대와 40년대 교회에서 자라난 흑인 음악인들은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하기 시작했고 가스펠의 리듬, 열정, 에너지를 세속적인 가사와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었다. 이러한 조합이 재즈, 부기우기, 리듬 앤 블루스 그리고 나중엔 로큰롤로 진화해갔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기, 흑인 세속음악으로 전이해 가던 흑인 교회음악은 틴에이저들의 록 음악으로 변화했다. 이들은 R&B와 팝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레코딩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던 샘 필립스는 흑인가수같은 에너지와 열정으로 노래할 수 있는 백인가수를 찾아 내면 젊은 백인들을 많이 끌어모을 수 있으리라 깨달았다. 그가 찾은 사람이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엘비스가 로큰롤을 판도라의 상자에서 해방시켰다면, 제리 리 루이스는 이를 확산시켰다. 이들 모두가 오순절 교회에서 자라났으며 그들이 붙였던 로큰롤의 불길은 그들 교회의 종교적 열정으로 처음 불붙었던 것이다.
이 당시의 부모들의 주된 관심은 음악의 광란적인 빠르기와 그에 반응하는 젊은이들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도덕과 반항에 대한 관심은 인종적인 문제로 전환되었다. 당시에는 '팝 뮤직'과 '레이스 뮤직(흑인음악을 에둘러 표현한 이름)'이 있었다. 레이스 뮤직을 소개하려 하면 백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흑인 연주자들은 가사에서 성적인 문제를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들이 레이스 뮤직에 대해서 부정적인 관심을 갖자 음악산업계에서는 가사를 정화하고 긍정적이고 단정한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음악을 '위생처리'하기로 결심했다. 백인 그룹들이 레이스 뮤직 히트곡을 더 많이 부르게 되자 백인 청소년들은 레이스 뮤직에 더 접근하였다. 당시의 도덕 지도자들은 흑인들의 노래를 커버한 백인 싱어들에게는 오리지널 흑인 싱어들에 했던 만큼의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에 아무도 로큰롤을 악마의 음악으로 여기진 않았지만, 반항과 섹스에 대한 경향이 있어서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런 음악 형태는 사실 신실한 신자들이 종교적인 열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었다. 바로 가스펠 음악이었다. 그러나 결국엔 그 음악 형태를 틴에이저들의 자유,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향한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세상이 채택했던 것이다.
1964년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로큰롤은 새 전기를 맞았다. 미국에서는 여러 영국 출신 밴드가 등장했고 이 그룹들은 리비풀의 부드러운 머시 비트(Mersey Beat) 사운드를 시작했으나 점차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의 사운드를 흡수했다. 비평가들은 이 시기부터 로큰롤이 록(rock)으로 불려졌다고 말한다.
이 시기의 인베이전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은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였다. 독특한 외모와 영국 토박이의 건방진 말투가 이전의 프랭크 시나트라나 엘비스에게서 받았던 흥분을 훨씬 넘어서 소녀들은 졸도하게 만들었다. 포크 뮤직도 나른한 리듬과 날카로운 도전을 혼합했다. 전기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포크 록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점차 고고클럽에 자리를 내주었다.
자기심취, 자동차 판타지, 속 합(신을 벗고 추는 춤), 감상적인 영원한 사랑 추구등에 빠져 있던 10대들은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 암살, 히피 그리고 마약의 혼돈에 빠져들었다.
동시에 음악은 다른 사운드를 띠기 시작했다. 전자악기가 등장해서 아티스트들은 몽환적인 마약 효과를 흐릿하게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피아노와 색소폰은 키보드와 전기기타에게 리드악기 자리를 내주었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는 전기적인 피드백과 전자 소음으로 예술을 만들어 냈다. 기타의 신이 태어났고 록 음악은 완전히 변했다.
포크 예언자인 존 바에즈( Joan Baez), 밥 딜런은 사고와 평가를 요구하는 정교한 시를 써냈다. 도발적인 노랫말과 힘있는 음악이 합쳐지자 아이들은 연기 자욱한 몽상에서 깨어나 호전적인 집요함과 능동적인 참여로 생존을 찾았다. 록음악도 중요한 사회적 힘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3) 서던 가스펠(Southern Gospel)의 뿌리
17세기 아메리카 대륙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초창기 미국 이민들은 시편을 노래했다. 그러다가 18세기가 되자 목회자들이 노래 부르는 방식을 변화시켜서 유럽에서 전해져온 방식과 다른 방식을 시작했다. 이런 방식을 구세대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남부지역은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장로교 순으로 교세가 컸다. 이 지역은 독립적이었고 부흥집회가 많이 열렸다. 농업을 주요산업으로 하는 남부지역은 신앙도 보수적이고 근본적이었다. 한편 미국의 중남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음악은 유럽에서 전해진 민요가 발전한 것이었다. 그 음악이 오늘날의 컨츄리 뮤직의 근간이 됐는데, 초창기엔 남부의 보수적인 신앙이 그런 음악과 결부되어 음악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서던 가스펠의 사작이었다.
1872년 경부터 이 지역에는 노래학교가 설립되었다. 문맹률이 높던 시절, 악보를 보고 교회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래학교에서 노래 인도자를 양성하여 이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노래를 지도하도록 했다. 이 노래학교에서부터 본젹적인 서던 가스펠이 움트기 시작했다.
서던 가스펠은 보통 4인조 남성 하모니로 불리워졌다. 보통 교회에서 부르던 합창이 4성부였기 때문에 이를 간단하게 줄인 쿼르텟(Quartet)이 많았던 것이다. 1920년대 초 도형음표 악보집을 만들어낸 이들은 새 노래를 보급하기 위해 쿼르텟을 조직하고 전국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쿼르텟은 성공이었고 프로페셔널한 가스펠 음악으로 발전했다. 가스펠 쿼르텟이 전국에서 모임을 열고 새로운 가스펠들을 보급하면서 가스펠은 양적으로 성장했다.
1960년대에는 'All Night Sing'이라는 밤샘 가스펠 공연이 인기를 끌었다. 이것은 일종의 가스펠 그룹 싱잉 콘세스트였는데 가스펠 그룹의 등용문도 되었다. 하지만 60년대 말에는 시들어졌다. 이것은 가스펠이 싱얼롱, 회중과 함께 부르는 문화에서 콰이어와 콘서트의 개념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뜻했다. 싱어들은 겉모습에서도 프로페셔널하게 되었고 청중은 함께 따라하는 입장에서 감상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지저스 뮤직, 지저스 록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서던 가스펠의 사운드가 대중적인 기독교 음악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CCM 탄생의 음악적 배경(2)>
(4) 포크송과 뮤지컬이 뿌린 씨앗
1960년대 초, 미국에는 포크송이 가장 유행했다. 미국에서는 우디 거스리가 어번 포크 음악을 시작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노래와 정치를 다루는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이 음악은 잭 엘리엇, 존 바에즈, 밥 딜런으로 이어지고 도시 한가운데와 해변에서 열린 포크음악 모임에서 포크가 크게 일어났다. 이들의 노래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저항의 포크송이었다. 포크송은 기성세대로부터 배척받기 시작했다. 기성세대가 보기엔 반전과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 등을 내용으로 한 포크송은 비트세대나 히키의 주장을 담은 것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배척하였다.
미국 교회는 그때까지 장중한 찬송가만을 써 왔다. "Do Lord", "내 등에 기름을 채우소서(Give Me Oil in My Lamp)",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I've Got the Joy Joy Joy Joy Down in My Heart)"같은 성도간의 친교를 위한 노래가 당시 크리스천 음악중에선 가장 대중적인 것이었다. 이런 노래는 주일밤 예배의 친교시간이나 수련회같은데에서 불려졌으나 예배당안에서는 거의 불려지지 않았다. 주일 예배시간의 노래는 1,000년에서 300년 전에 만들어진 음악중에서 선택되었다. 그리고 '특송'시간엔 주로 컨추리 가스펠이나 오페라 종류의 음악 쓰여졌다.
현대의 포크를 가장 먼저 정식 예배에 쓰기 시작한 것은 가톨릭 교회였다. 1964년 레이 렙은 완전히 새로운 '포크 미사'를 만들어 냈다. 렙이 만든 "젊은 미국인들을 위한 미사"는 포크 미사의 선구로서 이우 미국 카톨릭 교회에서는 포크 미사가 자주 공연되었다.
10대 청소년들의 기독교 조직인 YFC(Youth For Christ)도 1960년대 초반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의 싹을 틔웠다. 덜로우 스퍼(Thurlow Spurr)라는 사람이 스펄로우스(the Spurrlows)라는 그룹을 조직해 YFC 지역 집회에서 찬양을 했다.
스펄로우스는 관현악 반주를 바탕으로 한 부드러운 하모니로 애창 찬송, 전통가요, 현대음악을 새롭게 편곡해 불렀다. 스펄로우스는 컨템퍼러리 음악을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록 음악도 섞기 시작했다.
자동차 회사인 크라이슬러사가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스펄로우스 단원들은 낮에는 크라이슬러의 자동차 안전교욱에 협조해 주고 밤에는 지역교회나 회당에서 일반 음악과 컨템퍼러리한 스타일의 크리스천 음악을 공연했다.
포틀랜드 지역의 YFC에서 일하고 있던 켐 플로리아(Cam Floria)는 그룹 컨티넨탈스(Continentals)라는 그룹을 조직하고 1970년대 초반에는 컨템퍼러리한 크리스천 음악을 가지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공연을 가졌다.
컨티넨탈스와 스펄로우스는 실제로는 여러 팀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기 다른 지역을 동시에 여행하면서 공연을 가졌다.
컨티넨탈스는 생활 교육과 선교 교육도 시키면서 수준 높은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을 교회에 내어놓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현대 크리스천 뮤직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랄프 카마이클(Ralph Carmichael)은 덜로우스퍼와 캠 플로리아를 도와주었고 1940년대부터 크리스천 음악을 현대화하기 시작했다. 교회음악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보통 교회음악 연주가 피아노나 오르간 등 건반악기만을 사용한 데 비하여 그는 구약 시대에 나오는 악기, 즉 북, 징, 삼현금, 나팔등으로 연주했다. 18세때부터 이런 작업을 실천하기 시작했고, 21세 때 밴드를 조직해 공연을 다녔다. 그는 트럼펫, 트롬본, 색소폰, 리듬악기 그리고 남자 싱어로 이루어진 그룹을 이끌었다. 거기에 현악을 덧붙이고 나아가 적당한 비트도 가미시켰다. 사람들이 그런 소리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그가 성공을 거둘 무렵, 일반 팝계에서는 로큰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랄프 카마이클은 처음엔 록 음악을 싫어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명한 작곡가이며 영화음악 제작자인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가 그에게 록 음악 작곡을 의뢰하자 그는 거기에 응했다. 윌리엄스와 카마이클는 온건한 비트의 로큰롤 레코드를 제작했다. 그 노래가 바로 "Born Free"였는데 대성공이었다. 카마이클은 거기서 록 음악 앞에서 난처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련하게 되었다.
1965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영와 "불안한 사람들(The Restless Ones)"을 만들면서 카마이클에게 영화음악을 부탁했다. 그 영화 음악은 당시엔 그 대중성과 현대성 때문에 보수적인 교인들 사이에서 파문을 일으켰으나 빌리 그레이엄이 그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런 염려를 씻어 주었으므로 그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교회와 청소년들사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He's Everything To Me"는 아직도 교회에서 불리우고 있다.
1965년, 밥 올덴버그(Bob Oldenburg), 빌리 레이 헌(Billy Ray Hearn), 세실 맥기(Cecil McGee)등이 기독교 포크 뮤지컬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작품은 "복음(Good News)'이라는 뮤지컬이었다. 이들은 청소년을 모집하여 흑인 영가와 찬송가, 포크송들을 노래했고 이를 토대로 1967년 뮤지컬 "Good News"를 완성했다. 1968년 1,300명의 젊은이들과 50명의 관현악단에 의해 공연되었으며, 그로부터 "Good News"의 열풍이 불었다.
워드 레코드사에서 일하던 작곡가 커트 카이저(Kurt Kaiser)는 이 뮤지컬을 보고 빌리 레이 헌과 랄프 카마이클을 만나서 더 많은 뮤지컬을 만들기를 결정했으며 그들은 "가서 그대로 말하라(Tell It Like It Is)"를 작곡하였다. 이 악보는 당시 50만 부이상 팔릴 만큼 젊은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후에도 그들은 많은 뮤지컬을 만들었고 음악스타일은 초창기의 포크 음악 범주에 벗어나 보다 현대적이고, 록 음악과 유사한 형태로 변해갔다.
"가르쳐주세요(How Me)"를 작곡한 지미 오웬스(Jimmy Owen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북 전쟁 이후 최초로 우리는 현대음악을 교회에서 쓸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역사를 통해 보면 교회가 당대 사람들의 언어를 노래로 말하는 때가 있었는데, 그 음악은 곧바로 결정처럼 굳어져서 교회는 그 음악을 한동안 고수했다. 교회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성스런 음악을 고수하고 있는 동안 세상은 끊임없이 변했다. 그 동안 교회는 '우리 할아버지에게도 좋았다면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다. 아무도 그걸 바꿀 수 없다'라는 태도로 현대음악을 대했다.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부 합창을 시도했던 사람은 파문당했고, 교회는 그를 지옥으로 내몰았다. 당시에는 단선율만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성령께 마음을 열지 못하여 일어났다. 구세군 악단이 좋은 예이다. 구세군의 부스(Booth) 사령관이 창설했는데 그 당시 관악 음악은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었다. 그 때엔 거리에 브라스 밴드만 세우면 군중을 모을 수가 있었기에 구세군은 브라스 밴드를 조직했다. 그러나 부스 사령관이 세상을 떠나자 음악의 발전은 멈추고 말았다. 부스 사령관 시대의 관악으로 이뤄진 '성스런 전통'으로 굳어져 버렸다. 구세군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부라스 밴드를 유지했던 것이다. 1970년대에 구세군에는 드디어 변화를 모색하는 노력이 나타났다. 부스 사령관이 살아 있었다면 구세군의 음악은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
실제로 1973년 무렵 구세군의 후원을 받는 소수의 록 그룹이 미주 지역에 나타났다. 구세군의 새로운 록 그룹은 구세군 내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람들과 잘 조화를 이뤄나갔다. 그들은 록 음악으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따름이었다. 그 록 그룹은 기타리스트, 로르가니스트, 드러머와 함께 다섯 명의 싱어와 큰 관악기 부문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구세군의 한 소령은 "우리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야말로 선교의 가장 효과 있는 방법이며, 청소년과 가장 가깝게 가는 길은 바로 그들의 음악을 통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다른 구세군 장교는 구세군의 창설자 부스 사령관의 말 떠올렸다. "나는 어둠 속에서 영혼을 빠져 나오게 할 수 있다면 악마의 선율이라도 사용할 것이다."
(5) 팝 음악에 나타난 예수 이름
1960년대 후반에는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팝송에서 예수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오직 하나님만을 '그(He)' 또는 '주님(the Lord)'으로 지칭하는 정도였다. 1968년 사이먼 앤 가펑클의 유명한 곡 "Mrs. Robinson"의 가사중 "Here's to you, Mrs. Robinson;Jesus loves you more than you will know"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노래는 기독교를 비꼬는 내용이지만 록 음악 시대의 팝송 중에선 처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등장시킨 노래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풍자적인 노래가 예수 음악의 물꼬를 트는 구실을 하게 됬다.
1960년 후반에 나온 "Oh Happy Day"는 "오 행복한 날, 예수가 내 죄를 다 씻은 날"이란 메시지가 팝송에 실려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이러니컬한 것은 처음으로 '예수 음악의 히트'를 만들어 낸 그 레코드 회사의 이름이 '부처 레코드사(Buddah Records)'였다는 것이다.
컨추리 가스펠인 "Jesus Is a Soul Man"이란 노래는 빌보드 차트의 상위에 올랐다.
노만 그린바움(Norman Greenbaum)이란 가수는 "Spirit in the Sky"라는 록 음악을 발표했는데, 사람들은 제목만 보고 순수한 지저스 록송으로 여겼다. 나중에 그린바움은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한 노래라고 밝혔고 예수가 인기 있는 종교적 인물이었으므로 노래에 등장시킨 것뿐이라고 말했으며 그는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독교적인 주제를 가진 노래로 인식되어 1970년 2월 전국 차트 3위까지 올랐다.
1969년과 1970년 초에 예수의 이름이 등장하는 노래가 나온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당시엔 '예수운동'이 어느 정도 전기를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주제로 한 노래가 전보다 잘 받아들여졌다. 둘째로 세대간의 격차속에 있는 젊은이들은 종교에 대해 개방적이 되었다. 그들은 정신적인 완성을 갈망하면서 서로 어떤 진리가 있는지 알아보고 각자의 믿음을 깊이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는 또 다른 종교적 가능성의 표상이었다. 비록 그들은 자기들의 부모가 믿던 예수, 즉 전통적 신앙의 가치관에 입각한 예수를 믿기는 거부했지만 그들은 긴머리와 수염을 가진 그들과 일체감을 느끼게 해 주는 '새로운' 예수를 발견한 것이다. 셋째로 팝송이 많이 나오면서 새롭고 신선한 가사가 필요했다.
예수음악의 가사가 대중들에게 호감을 준다는 사실이 "Oh Happy Day"에서 증명되자 예수를 주제로 팝송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각각 다른 해에 두 번씩이나 히트 대열에 오른 예수 히트곡은 영블러드(Youngblood)의 "Get Together", 빌리 프레스턴(Billy Preston)의 "That's the Way God Planned It", 그리고 완전한 예수 음악이라고 하기엔 의문이 있지만 "슈퍼스타(Superstar)"등 세 곡이 있다.
지저스-록 음악의 고전이라고 할 앨범 <Mylon>이 1970년에 발표되었다. 마일런은 이미 엘비스 프레슬리, 멀 해가드, 쟈니 캐시(Johnny Cash_, 돈 깁슨(Don Gibson), 포터 와고너(Porter Wagoner) 그리고 마할리아 잭슨 등에게 가스펠 곡을 써 줄 정도로 뛰어난 작곡가였다. 이들 중 몇 곡은 가스펠 부문에서 상을 받을 만큼 사랑받는 곡이었다. 그러나 서던 가스펠 음악을 하던 마일런은 록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는 서던 가스펠 음악만들기를 그만두면서 "나는 내가 믿고 있는 사실, 즉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젊은이들에게 전달해 주고 싶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마일런의 첫 록앨범은 거의 모두 예수 음악으로 이뤄졌다. 그의 첫 레코드는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된다.
1970년은 예수 음악이 아닌 '영적'인 노래가 큰 성공을 거둔 해였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팝계의 찬송가처럼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처음에 이 노래를 종교적인 노래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예수 음악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사에서 마약을 지칭하는 구절이 있니 않느냐는 강한 의혹도 받았다.
잭슨 파이브(Jackson Five)는 사람들이 버림받았을 때 "너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함께 하겠다"고 확신하는 노래인 "I'll Be There"로 큰 히트를 기록했다. 1980년대의 최대 히트 가수 마이클 잭슨이 바로 그 노래를 사춘기 시절에 불렀던 것이다.
1970년 주디 콜린스(Judy Collins)가 부른 "Amazing Grace"는 훨씬 더 분명한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놀라운 히트를 기록했다. 이 찬송가는 18세기 후반 회심한 노예무역업자 존 뉴튼(Jonh Newton)이 쓴 곡이었다.
1971년에는 미국 전역에 걸쳐서 록 라디오 방송을 통해 최소한 한 곡이라도 '예수 노래'가 나가지 않은 주간이 없었다. 비 제이 토마스의 "Mighty Clouds of Joy",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와 퍼스트 에디션(the First Edition)의 "Take My Hand"등도 히트 차트 100위 안에 진입했다. 케니 로저스는 침례교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자신의 곡은 침례교회에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몇 년 후 그는 "Love Lifted Me"라는 찬송가를 컨츄리 음악으로 불러서 히트시켰다. 탸니 리버스는 "Think His Name"을 불렀다.
1971년에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예수 노래는 캐나다 그룹인 오션(Ocean)이 불러 2위를 기록한 "Put Your Hand in the Hand"이다. 이 곡은 다른 수많은 아티스트들도 레코딩했지만 오션의 것만이 히트해서 차트에 올랐다.
노엘 폴 스투키(Noel Paul Stookey)는 결혼식을 위해 만든 "Wedding Song(There Is Love)"라는 노래가사를 주님이 주셨음을 감사하면서 이 음반 인세의 대부분을 어린이 재단(The Children Foundation)에 보냈다. 노엘 폴 스투키는 "그 곡은 사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느껴져서 그렇게 했다. 나는 피터의 결혼식을 위해서 노래 하나를 쓰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다. 그 곡을 쓰는 데 이삼 일 밖에 안 걸렸으니 결국은 예수님이 만든 것이다. 나는 주님이 주시길래 그저 받아 적은 것뿐이다."라고 그 노래를 쓰게 된 동기를 얘기했다.
"Wedding Song"이나 "Amazing Grace"는 예수 노래의 경향을 띤 많은 곡 중에서도 진실된 기독교 노래였다. 때로는 그런 곡을 구분하기가 힘들었지만 일반적으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예수 노래들은 당시의 화제를 바탕을 한 팝송에 지나지 않았다. 1971년까지 예수를 언급한 팝송이 굉장히 많이 나왔다. 어떤 이들은 이런 현상을 즐거운 예술 현상의 하나로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현상으로 굉장한 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어쨌든 이 시기에 록 음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려는 탐구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 음악'의 탄생
[CCM의 선구자 래리 노먼]
1970년대 초 예수를 주제로 삼은 대중음악이 인기를 얻어가자 초창기 예수 음악인들도 히트 레코드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 듯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을 넣어 히트한 노래들은 거의가 일반 레코드 회사가 세태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기독교 레코드 회사가 만든 예수 음악을 선곡하는 라디오 방송을 거의 없었다. 일반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기독교 전문 레코드사에서 만든 레코드가 종교적이라고 방송을 꺼려 했고, 또 기독교 라디오 방송의 종교담당 제작자들은 너무 세속적이라고 방송을 하지 않았다. 결국 예수 음악인들의 레코드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기성세대들 사이에는 '지저스-록'을 반대하였으나 젊은이들은 목회자들이 경고하는 것처럼 나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의 부모를 설득했다.
이런 젊은이들의 생각을 대표하듯이 기독교 대중음악의 선구자인 래리 노먼(Larry Norman)은 예수 음악 팬들을 위해서 "왜 좋은 음악은 모두 악마가 가져야만 하는가?(Why Should the Devil Have All the Good Music?)"하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 노래를 통해 예수를 로큰롤과 연관시키며 이 노래를 하고 난 뒤 박수를 받을 땐 검지 손가락을 세워서 '나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표시했다. 이 사인(One Way)은 곧 예수 운동의 깃발처럼 되었다.
래리 노먼 노래의 가사와 대담한 록 선율은 기성세대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젊은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매개체를 통해서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그는 십대에 밴드 피플(People)를 결성해서 미국 히트 차트 14위까지 올라 성공을 보장받은 아티스트였으나 예수 음악에 욕망을 막을 수가 없어서 피플을 탈퇴했다. 1968년에 만든 뮤지컬 "Alison", "Birthday" for Shakespeare"가 성공하자 래리의 예수 음악이 상업성이 없다고 했다는 키피틀 레코드사는 그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며 그를 다시 영입했다. 1969년 초창기 지저스 록의 대표적인 앨범 <Upon This Rock>이었다. 이 앨범을 통해 그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동안 크리스천이 되려면 전형적인 크리스천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에게 활기차고 자유스러운 음악을 도입하므로 많은 젊은이들에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Upon This Rock>은 대부분 기독교 서점에서 2년동안 판매금지를 당했고 그뒤 만든 <Only Visiting This Planet>은 6년 이상 찾기가 힘들었다.
누가복음 17장 34-36절의 재림에 관한 말씀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지저스-록 세대의 대표곡인 "I Wish We'd All Been Ready"는 그의 노래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이 되었다. 청소년들은 이 슬픔에 찬 발라드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들 부모에게까지 이 노래가 전파되었다.
[마라나타! 뮤직]
캘리포니아 코스타 메사에서는 예수 운동의 종말론적 열풍이 강했다. 척 스미스 목사(갈보리 교회)는 '마라나타! 뮤직(Maranatha! Music)'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선교 창구를 만들었다. 마라나타의 뜻은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갈보리 교회에는 록 음악을 듣고 자란 히피들이 회심하여 그 음악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변화시켰다.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젊은이들은 나중에 '프레이즈 앤 워십' 음악으로 알려지게 되는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음악을 수용하기 위해 마라나타! 뮤직이 설립된 것이었다.
마라나타! 뮤직은 1971년에 <영원히 살아 있는 예수 음악 콘서트(The Everlastin' Living Jesus Music Concert)>라는 첫 앨범을 냈는데 캘리포니아의 크리스천 사이에 매진이 되었고, 미국 동부 지역까지 퍼져 나갔으며 16만 장이나 팔려 나갔다. 이 앨범의 커버에는 시편 150편의 말씀이 실려있었다.
예수운동이 일어나는 해 동안 ,전쟁과 폭동과 소요 사태 속에서 자라난 젊은이들 속에 주님의 성령이 나타나 기쁨과 환희로 찼으며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특수한 언어로된 컨템퍼러리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레코드를 통해 예수의 사랑과 평화를 제공받았다.
초창기에 제작된 예수 음악의 앨범들은 홍보가 되지 않으면 창고 속으로 사라져야 할 운명에 놓였다. 이런 어려움을 알고 도와 준 사람이 밥 코테럴(Bob Cotterell)이었다. 그는 레코드 보급회사인 크리에이티브 사운드(Breative Sound)사를 설립하고 이들을 보급했다.
마라나타! 뮤직에서 첫 앨범을 낸 뮤직 그룹은 러브송(LoveSong)이었다. 이 멤버들은 여러 다른 음악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들 중 몇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이들은 갈보리 교회의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갈보리 교회의 저녁 집회에서 감동을 받고 새롭게 거듭난 척 지라드, 제이 트루억스, 톰 쿰스, 프레드 필드 네 명은 그들의 믿음을 노래로 표현했다. 이들은 러브송이라는 이름으로 갈보리 교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들의 인기는 급상승했고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Little Country Church", "Two Hands", "Front Seat, Back Seat", "Maranatha"같은 노래는 계속해서 연주되었다.
러브송은 1972년 첫 앨범<Love Song>을 냈다. 이 앨범은 예수 음악이 없던 곳까지 퍼져나가지 시작했다. 필리핀에서는 "Love Song"이 싱글로 커팅되어서 필리핀 차트 1위로 등장했다. 그런데도 필리핀 사람들은 러브송이 기독교 그룹인지 몰랐다. 1973년 러브송은 그 해의 종교 레코드중에서 최고를 기록하고 1974년 2집 앨범 <Final Touch>를 출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앨범순회공연을 마치고 해산했다.
1970년대 갈보리 교회에서는 러브송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젊은 뮤지션들이 커 나갔고 토요일밤에 젊은이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었으며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참여했다. 이 집회에서 불려진 록이나 포크 그리고 컨츄리 스타일의 예수 음악은 거의가 '프레이즈 송'이거나 '스크립쳐 송(성구송)'이었다. 이 음악의 내용은 예수에 관한 것이거나 예수 자신을 노래한 것이었다. "먼저 그 나라와(Seek Ye First)", "주님의 사랑(Thy Loving Kindness)", "하늘에 계신 아버지(Heavenly Father)", "거룩 거룩 거룩(Holy Holy Holy)"등이 있다.
기성세대는 지저스-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런 프레이즈 송이나 스크립쳐 송은 받아들였고 같이 부르기도 했다. 젊은이들은 쉽게 배울 수 있는 즐거운 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고전 노래에도 저항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사실 스크립쳐 송은 1950, 60년대의 성구송을 본뜬 단순한 노래에 포크 음악을 가미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기성세대도 큰 저항감을 가지지 않고 젊은이들과 함께 팔을 들고 찬양함으로 기성세대와 젊은이들에게 수직적인 음악으로 찬양하는 공통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초창기 예수 음악 아티스트들]
* 배리 맥가이어(Barry McGuire)
1965년 "Eve of Destruction"으로 미국을 흔들었으며 후에 크리스천이 되어 1973년 첫 크리스천 앨범을 냈다.
*안드레이 크라우치(Andrae Crouch)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큰 영향을 준 음악인이었다. 제자들(Disciples)과 함께 11년 동안 활동했으며 흑인 아티스트로 백인 시장을 함께 장악한 팝 계열의 아티스트이며 많이 알려진 곡으로 "My Tribute"가 있다.
*존 피셔(John Fischer)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크리스천 뮤직을 만들었다. 그의 음악은 컨츄리, 포크, 록, 가스펠이 적절히 가미되었다.
*아가페(Agape)
최초의 크리스천 하드록 앨범을 낸 밴드로 평가받고 있는 6인조 그룹이다.
*마일런 르페브르(Mylon LeFevre)
엘비스 프레슬리가 마일런이 작곡한 노래 "Without Him"을 불렀다. 그는 가스펠 앨범 <Mylon>을 냈다. 그는 록으로 크리스천 음악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브로큰 하트라는 밴드를 조직해서 크리스천 록 그룹의 대표적인 그룹으로 활동했다.
*사도행전 2장(2nd Canpter of Acts)
이들의 첫 히트곡은 CCM의 고전인 "Easter Song"이다.
*랜디 매튜스(Randy Matthews)
1964년 록 그룹을 결성해 활동하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1973년 처음으로 크리스천 아티스트로서 레코딩과 공연을 시작했으며 거리의 사람들, 히피들에게 음악과 복음을 나누며 일했다.
* 마이크 존슨(Mike Jonson)
1968년 첫 크리스천 재즈록 밴드인 익스커전스(Exkursions)를 결성했다.
*임페리얼스(Imperials)
1964년에 결성된 그룹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컨템퍼러리 스타일을 시작했고 점점 록사운드로까지 스타일을 변화시켜왔다.
*컨티넨탈스(Continentals)
컨티넨탈스는 싱어즈와 오케스트라로 구성되었다. 1967년 그룹을 조직해 세계로 여행했고 지역별로 여러 팀을 만들었다.
작은 불꽃 하나가
1. 가스펠 콘서트를 통한 CCM 확산
1951년 빌 브라이트(Bill Bright)가 창설한 CCC는 복음 전파 운동의 하나로 '엑스플로'72(Explo'72)' 행사를 열었다. CCC는 예수운동이 일어날 당시 이미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을 조직적으로 이끌로 전도를 해 왔었다. 엑스플로'72는 미국 50개 주와 100개국에 달하는 세계각국 대표가 참석한 세계학생전도집회였다. 주요 행사장인 카튼 보울(Cotton Bowl)에는 매일 밤 8만명 정도가 모여서 설교와 음악을 들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비롯한 유명 연사들이 설교했으며, 많은 크리스천 음악인들이 음악을 담당했다. 이 행사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지막 날 밤의 촛불예배였다. 8만명이 운집해서 촛불을 밝히자 그 경기장은 아름다운 불빛으로 반짝였다. 사람들은 1970년 커트 카이저(Kurt Kaiser)가 뮤지컬 "Tell It Like It Is"에 썼던 "작은 불꽃 하나가(Pass It On)"를 불렀다.
엑스플로'72는 수많은 청소년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모으고 그들의 정열을 새롭게 불태웠다. 그래서 교회는 기성교회 체제로부터 자유로운 예수운동보다 CCC를 신뢰하게 되었다. 대회가 열렸던 매일 밤마다 수많은 가스펠 콘서트가 열렸다. 여기에 참여한 음악인들 중 안드레이 크라우치와 제자들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스펠 그룹이었다. 그들은 그해 봄에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카네기홀에 너무 많은 청중이 몰려서 길 건너편 침례교회에까지 넘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그는 1965년 '제자들(the Disciples)'이라는 그룹을 조직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팝 음악도 했으나 70년부터 그들은 온전히 선교사역에만 종사하게 되었다. 이들은 "Christian People" 이란 싱글 레코드를 냈는데 이 곡은 지방 차트에 진입하는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안드레이와 제자들은 쟈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도 출연할 만큼 대단한 반응을 얻었다. 1972년쯤에는 안드레이의 노래가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의 크리스천들에게도 받아들여졌다. 안드레이와 제자들이 엑스플로'72에 출연하자 기성세대는 그들의 노래를 더욱 받아들이게 되었다.
2. 연주여행을 통한 CCM 전파 - 선구자들의 고난과 역경
예수 음악인들을 지탱해 온 것은 순회공연이었다. 예수 음악의 초창기에는 컨템퍼러리 라디오 방송도 없었고 전국적인 레코드 보급망도 없었다. 더구나 교회에서도 그들을 배척했기 때문에 그들이 설 자리는 지역의 거리나 학교의 공연무대와 마당이었다. 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들어 따로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대부분은 최저생활 수준으로 겨우 견뎌 나갔다.
초창기 예수 음악인들은 이렇게 악조건하에서 공연을 다녔기 때문에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았다. 공연 주최측에서는 저녁식사와 숙식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음악인들을 초청한 이들은 홍보에 거의 신경쓰지않아서 제대로 틀을 갖추지 못한 공연이 많았다.
이들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 가족들도 같이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들의 부인이나 가족들은 그들이 연주 여행으로 집을 비울 때에 서로 모여 외로움을 견뎌내고 재정적으로 서로 도움을 주었으며 영적인 교제도 나누었다. 어느 음악인의 아내는 수많은 어려움과 배고픔을 참으면서 남편과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 앨범을 갖지 못한 예수 음악인들이 상당수였다. 그러나 그들이 대중집회를 통해 복음을 전한 성과는 대단했다. CCM 음악세계에서는 레코드를 내는 것보다 콘서트를 통한 선교가 훨씬 중요했다. 반대로 어떤 음악인들은 레코딩 작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주님이 의도하시는 방향에서 어긋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3. 크리스천 커피 하우스
예수 음악 초창기에는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가 벽에 걸려 있는 크리스천 커피하우스가 등장했다. 시끄러운 음악으로 떠나갈 듯하고 연기가 자욱한 곳보다는 편하고 부담없는 크리스천 커피하우스에 젊은이들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에는 아서 블레싯이 세운 '주의 집'이라는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거기서도 작은 공연이 매일 밤 있었는데 술취한 젊은이들이 우연히 들어왔다가 복음을 듣는 경우도 많았다.
크리스천 커피하우스는 젊은 예수 음악인들에게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인디애나 주의 '아담의 사과'라는 커피하우스도 수많은 음악인들의 데뷔 장소였다. 이 곳은 갈보리 교회가 후원해 주는 곳이었는데, 처음엔 크리스천이 아닌 일반 록 그룹도 출연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곳은 크리스천 아티스트들의 전문 공연장이 되었다. 당대의 가장 유명한 예수 음악인이었고 지금도 가장 유명한 크리스천 아티스트인 그룹 페트라와 낸시 허니츄리도 거기서 공연을 하며 음악선교를 시작했다.
전통사회에 반기를 든 히피였던 낸시 허니츄리는 점성술, 환각제, 동방종교, 공상, 급진 사회운동 등 히피로서의 행동을 마음껏 한 젊은이였다. 그녀는 호기심으로 언니가 다니는 갈보리 교회에 들렀다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 그러나 자신의 히피 생활과 교회 생활이 심하게 상충되자 다시 마약에 빠졌다. 그러다가 '아담의 사과' 커피하우스에서 예수가 자신을 떠나지 않고 친근하게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아담의 사과'는 교회가 노방선교를 지원하고 예수 음악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74년에 출반한 사도행전 2장의 첫 앨범에는 "부활절 노래(Easter Song)"가 있었는데 이 곡은 출반 후 몇 주일 만에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다. "Easter Song"이 주는 기쁨은 대단해서 이 노래가 나오면 사람들은 몸을 흔들며 불렀다. 이들은 1973,4년 CCM이 표면에 나서지 못하고 언더그라운드에서 머물고 있을 무렵, CCM을 전달하는 대사처럼 활동했다. 사도행전 2장의 음악은 가벼운 록 음악과 찬송가를 잘 조화시킨 듯한 음악이었다. 그래서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 모두에게 거부감 없이 들려졌다.
배리 맥가이어라는 배관공 출신의 가수가 초창기 크리스천 음악계에 등장했다. 노래로 미국을 변화시킨 가수를 든다면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다음으로 손꼽힐 만큼 그는 팝 음악계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그는 노래가 좋아 배관공 일을 그만두고 음악계에 뛰어들어 친구들과 함께 뉴크리스티 민스트럴스(New Christy Minstrels)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그후 4년 동안 이 그룹은 세계적인 톱 그룹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유럽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최초로 상업적인 레코드를 낸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배리 맥가이어는 부와 명성으로 상류사회로 뛰어올랐으나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이 진실 발견보다 쾌락 추구에 전력한다는 사실을 목도한 배리는 냉소적으로 변하고 급기야 환멸에 빠졌다. 그러던 중 친구 집에 가서 우연히 신약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진리를 발견한 후 그는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계약을 끊고 시골의 크리스천 공동체와 더불어 살면서 크리스천 레코드 레이블인 '머(Myrrh)'와 계약을 하고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을 녹음하였다. 그도 그렇게 해서 CCM의 선구자가 되었다.
초기의 크리스천 록
1972년 말부터 1974년까지는 수많은 크리스천 작곡가들이 작곡활동과 함께 CCM이 제 스스로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했다.
새로운 음악인들 중에서도 좀 보수적인 경향을 띤, 즉 전통적인 가스펠과 클래시컬한 음악 스타일의 음악인들은 교회나 집회장소에서 주로 공연했는데 교회는 그들의 음악에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진보적인 크리스천 음악인들, 즉 지저스-록이나 컨템퍼러리 음악을 하는 이들은 종종 교회 지도자나 보수적인 신자들로부터 경멸을 받거나 적대감을 사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서 예수 음악인들이 대부분의 교회에서 용인될 무렵에도 진보적인 음악인들은 여전히 의구심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1970년대 초반 당시에는 교회에서 드럼을 사용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예수 음악인들의 교회 공연은 꾸준히 청소년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 나갔다.
첫 앨범을 지저스-록으로만 장식한 그룹 페트라의 경우 "우리는 록 지향의 그룹이다. '페트라'라는 말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그 반석의 의미를 갖는다. 바위라는 말이 그리스어로 페트라이다. '페트라'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그 고백 위에서 결성됐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관을 주셨으며, 그 인생관이 우리의 음악에 반영되었다"면서 크리스천 록을 시작했다. 페트라의 음악은 완전한 록 음악이다. 록 음악자체로도 훌륭한 수준을 지니고 있는 페트라는 거기에 정신적인 차원을 더 담고 있어서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새로운 생활방식이 될 수 있었다.
페트라보다 더 비트가 강한 초창기 크리스천 록 그룹은 아가페였다. 이들은 예수운동의 절정기인 1971년과 1972년에 앨범 두 장을 발표했다. 그들은 가장 격렬한 록을 연주해서 비기독교인인 록 음악 팬들의 마음까지도 뒤흔들었다. 하드록이 일상 언어처럼 되어버린 청소년들에게 아가페와 페트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결과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음악 때문에 기독교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은 지저스-록 음악을 공유하게 된 친구들을 알고 기뻐하지 않은 수 없었다.
아가페와 페트라의 음악은 대부분의 기독교 라디오 방송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상태였으나 엑스폴로'72가 열렸던 달라스의 KDTX-FM 방송은 이들의 음악을 편성하였다. 이 방송은 1972년 폴 베이커가 진행하는 4시간짜리 CCM 프로그램인 "A Joyful Noise"를 편성했다. 역시 이 프로그램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이 함께 대두되었다. 그러나 예수 음악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일도 일어났다. 예수 음악을 통해 그리스도를 발견한 젊은이들의 간증도 많았지만, 예수 음악에 반대하는 견해도 계속 대두되었다. 어느 전도사는 젊은이들에게 록 음악을 담은 테이프나 레코드 그리고 관련 책자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라고 말할 정도였다.
밥 라슨(Bob Larson) 목사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의 록 음악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사람이었다. 원래 대중음악을 했던 그는 1967년초 이미 로큰롤을 '사탄의 오락'이라고 비난하는 『로큰롤:악마의 오락(Rock & Roll:The Devil's Diversion)』책을 썼다. 그후 『록과 교회(Rock & Church)』와 『음악이 사라지는 날(The Day the Music Died)』이 나왔다. 밥 라슨은 교회와 고등학교에서 강연하면서 시범 연주를 들려 주며 록을 비판했다. 그는 크리스천 록에도 찬동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그는 "크리스천 록을 사용하는 것은 뻔뻔스럽게 타협하는 행위이며, 영적으로는 세속에 눈이 어두워 있는 사람만이 이를 받아들인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크리스천 록 콘서트가 진정한 거듭남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라슨의 논점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제시하긴 했지만 크리스천 록의 정당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크리스천 록 음악인들로부터 분노를 샀다. 그에 이어서 다른 목회자들도 록 음악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비록 예수 음악인 중에서도 크리스천 록(가스펠 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긴 했어도 그들은 가스펠 록을 통한 복음전도의 열매를 보았다.
대부분의 크리스천 록 음악인들은 "예수는 육신도 선하나 영혼은 더욱 크시다. 그분이야말로 세상적이 아닌 록-구르지 않는 반석이시다"라는 래리 노먼의 견해에 동감했다.
시카고의 Jesus People USA(JPUSA)가 후원하고 있는 ≪코너스톤≫지는 리저렉션 밴드(Resurrection Band)를 만들었다. 이 밴드는 크리스천 메시지가 담긴 하드록을 주로 연주했는데, 1971년부터 고등학교, 교도소 그리고 거리에서 선교사역과 연주 활동을 해 왔다. JPUSA와 잡지 ≪코너스톤≫, 레즈 밴드 그리고 JPUSA의 산하 드라마 팀인 '성령의 배우들(The Holy Ghost Players)'은 파격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달했다. 그들은 잡지를 최신 디자인으로 꾸몄고 귀가 찢어질 듯한 기타 연주 등 놀란거리가 될 만한 것들을 다루었다.
앤티 록커(반 록 음악 운동가)들에 의해 비춰진 이미지와는 달리 젊은 크리스천 록 음악인들은 다른 어떤 크리스천보다도 더 담대하게 예수 구원을 외쳤다. JPUSA의 활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소란스러운 음악에 대한 불만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으며, 록 음악은 절대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다는 적대적인 생각도 차츰 줄어들었다.
크리스천 록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젊은 작곡가들은 주님이 그들을 사용하신다는 확신가운데 음악을 창조해 나갔으나 재정적 지원이 거의 없어서 겨우 꾸려가는 형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전문적이고 순수한 CCM 음악인 이외는 이 일을 하기 힘들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 음악은 상당히 순수한 형태로 존속했다. 몇몇 종교음악을 포함한 다른 음악에서처럼 풍요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부패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 음악이 주요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회피되고 있는 동안에도 젊은이들은 입으로 그 음악을 전파해 나갔다. 라디오 전파를 타기는 여전히 힘들었고, 증가해 나가는 예수 음악 레코드를 상점에서 찾는 것도 여전히 어려웠다. 일반 레코드점의 소유주는 예수 음악 판매를 거부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예수 음악은 그 싹을 틔워 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발매된 앨범들은 거의가 그 품질이 낮았다. 물질적 여유가 없는 이들은 전문적인 레코딩으로 평가받을 만한 수준의 앨범을 만들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앨범은 제작 기술이나 음악 수준이 일반 팝 음악보다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예수 음악의 선봉인 젊은이들도 자신의 음악을 조심성 없게 교회에 불쑥 내밀어 교회를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불행하게도 이들에게는 편향되지 않은 안내를 해 줌으로써 이들의 음악을 북돋워 주고 동시에 과욕을 진정시켜 줄만큼 컨템퍼러리 음악을 이해했던 기성세대가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젊은 크리스천 음악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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