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에 맺은 인연
뜨거운 숨소리를 밖으로 뱉으려는 듯 교무실 창문만 열어놓았다. 정겨운 풍금소리도, 어린이들 책 읽는 소리도 모두 방학에 들어가고 벌거벗은 여름 태양만 교정 가득히 정열을 불태우려 내려 쪼인다. 가르치고, 배우던 열기는 닫혀있는 빈 교실에서 숨도 쉬지 않는 듯 조용하다.
파란 하늘에 행복을 그리던 어린이들은 도시로, 친척집으로 다 빠져나갔는가? 학생이 없는 학교는 물고기 없는 호수보다 더 쓸쓸하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운동장은 텅 비어있고, 장맛비 지나간 흔적이 생채기 같이 남아있지만 그 흔적을 지우며 뛰어 놀 사람은 없다. 잡초들만이 웅성거리며 땅을 비집고 일어선다. 열려있는 교문만이 하품을 하며 사람을 기다리는 듯……
왜 이렇게 농촌은 점점 더 고독해질까? 텅- 빈 시내버스는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이 비어있는 산길을 돌아 정오의 여름, 뜨거운 아스팔트를 밟고 교문 앞을 지나간다. 아직 개학은 멀었으니 잡초들 세상이요, 매미들 노래경연장이다. 정든 벗 님 아니더라도 정적(靜寂)을 흔들어 함께 깨울 사람이 그리워진다. 조용한 시간을 아까워하면서도 날아다니는 잠자리 같이 자리를 옮기며 더위를 피할 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풍금 앞에 앉아 동요도 연주 해 보고, TV도 켜 보지만 내 마음엔 채워지는 것이 없다. 음악방송에 다이얼을 맞추고 응접의자에 길게 누웠다. 잠깐인 것 같은데 잠이 들었던지 라디오만 혼자 중얼거린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오후 한 시가 지난 시각 낯선 사람이 보인다. 자전거를 세워놓고 녹음교실 시멘트의자에 길게 누워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면서도 혹시나 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다가갔다. 땀에 절어있는 학생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흔들어 깨우니 몽롱한 듯 나를 쳐다보며 여기가 어디쯤 되느냐고 묻는다. 교무실로 안내하고 선풍기를 가까이 해주며 결명자 끓인 얼음물을 한 컵 주니 단숨에 마셔버리고 미안하지만 더 있느냐고 한다. 그 학생이 더위를 식히는 동안 조용한 음악테이프를 틀었다. 학생은 호수 건너 항건산을 바라보며 넋을 잃는다. 더위 탓이리라 늘어진 젊음을 다독이려고 대화를 건네니 예의바르게 대답한다. 학생은 내 빈 가슴에 벌써 고운 언어로 세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대전 B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다. 책을 펴놓고 공부하려고 애쓰면 애 쓸수록 죽은 친구 얼굴이 떠올라 공부든, 뭐든, 다 팽개치고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떠나왔다는 것이다. 친구를 잃은 사고의 충격이 가슴을 휘젓고 있으리라. 장마 빗물이 가득 고여 있는 교문 앞 보청호 물빛 같이 학생의 흐려진 눈빛을 바라본다. 슬픔이 가라앉기를 바라면서, 학생의 닫혀있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손을 잡았다. 선풍기 바람이 땀 냄새를 날리며 반복 윤회를 하는 동안 결혼을 앞둔 연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미래를 설계하듯 고생했던 내 인생이야기를 담아내며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는 그 학생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생스러워 좌절했던 나의 학창시절 울며 방황하던 고향 밤길을 떠 올렸다. 저 학생도 어두운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리라. 학생에게 그 길은 힘든 삶의 길이며, 아픈 추억이 가슴에 남는 인생 길이 되겠지.
학생이 떠난 자리가 휑하니 비어있다. 내 작은 가슴에 그 학생이 머물다 간 보금자리를 다독이며 지친 날개를 쉬고 날아갈 힘을 주고 싶다. 설원만리(雪原萬里)가 봄기운에 녹아내리 듯 힘겨웠던 고뇌가 가슴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 학생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관아! 어쩌면 얼떨떨한 기분일 거야 우연히 만나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고 속마음까지 보인다는 것은 조금은 실례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것에 비하면 큰 인연이지.
관아! 큰 업적을 남기신 위인들 생활의 특징은 시간을 아껴 최대로 활용했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분들이다. 특별한 수재보다는 보통 사람이 많았고, 끈기와 인내력에서는 남다를 점이 있었단다.
잊어라! 슬픔을! 앞을 바라보며 가슴을 비워라 그리고 푸른 꿈으로 채워라.
정적(靜寂)이 겹겹 쌓인 교정에 애절한 사연이 눈에 밟히고, 마음에 밟히고, 발에 밟힌다. 정(情)이란 무엇이기에 저리도 마음 아파하며 방황하는가? 학생 마음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긴- 산 그림자를 밟고 사색에 잠긴다.
비우면 채워지는 가보다, 서로의 간절함이 가슴에 전율하면 운명은 만남을 주선하는가, 오늘 우리들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산사의 스님이 빈 가슴에 목탁소리로 불경을 담듯 학생과 연을 맺고 사랑의 점 하나를 가슴에 찍었다. 여름방학이 지나가는 학교는 학생과 선생님을 기다리며 하루가 저문다. 해는 서산을 넘고 있는데 막차는 아직도 오지 않고, 나만 홀로 서서 긴 그림자를 만들며 인연공덕을 가슴에 담는다.
(옛 동정초등학교 근무시절)
첫댓글 방학을 맞은 빈 교정의 수채화같은 한폭의 그림을 감상하고 갑니다.
선생님은 늘 옛스승님을 대하는 것같고 때론 아버지같아요.작은 인연도 소중히 여기고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님이 늘 존경스럽습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이 전해져옵니다. 아버지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날이기도 하구요. 언제쯤이면 아픔없이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오라버님 보청호가 나오고 동정초교가 나오니 혹시 보은군인가요?
두레박 동상 ! 지금은 비림 박물관 자리. 옛 동정초등학교 교감으로 2년 10개월간 근무할때 선생님들 강습가고 학교지킬 때 이야기를 회상하여 쓴 졸작이지요.
늘 따듯함으로 대해주시는 일곡 선생님과 맺은 인연은 좋은 연 일겁니다..
일곡 같으신 선생님만 만났었드라도 연꽃 승천 했을텐데.... 지금도 곁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숙연해 집니다.
수업시간에 토의한것과 교수님 지도 해 주심을 참고로 수정해 보았습니다. 지도 부탁 올리겠습니다.
수정해도 흡족하지 않아 재차 수정을 하였습니다. 무엇이 다르냐구요? 또 지도 해 주셔요.
개여울 동상! 동상의 의견을 첨부하니 글이 좀 부드러워진 느낌이 드는군! 동상 고마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