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축 ․ 추 모
月隱 김복수님 탄신 100주년
(1918.음12.1)
昌寧 조일순님 백수(1920.음4.18)
가족모임 기념
*일시:2019.1.5일(음12.1)14:00 ~ 6일 11:00
*장소:안산시 단원구 공마루길(대부도동)68-3
펜션시티
대추를 털며
김 옥 남
달큰한 햇살 내리는 대추밭에서
오십 다된 아들이
두 키가 넘는 장대를 내리쳐
대추를 턴다.
여든 드신 아버님
야- 야-
그렇게 내리치면 가지 다 찢어진다
흝듯이 털어야지
힘은 쓸 대다 써야 하는 것이다.
대추나무거리 지나다가
어찌 어찌 풀숲을 뒤져 찾아낸
숨은 대추 두어 낱을
아까워서 못먹은 그
배고팠던 시절
지금 여기
몇 번을 흝어 털어 낸
널브러진 생대추 볼붉은 알들
오늘은
받아먹을 눈빛 맑은 소년 하나 없구나
육십고개 바라보는 누님
참 대추가 달고 맛있네.
사모곡 6
아가 느그들 왔냐.
규민이가
*행자 왔냐
너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
외할매가 그러셨어요.
설빈이가 웃고 있다.
그놈 용케도 잘 기억하고 있구나.
아무리 그런다고
외할매를 빌어 엄마를 함부로 하는 놈이 어디 있다냐
잡풀이 무성하여
호랭이 새끼 친 엄니 무덤 잡풀 뜯으며
여름이 일찍 온
어린이날
퇴깽이 같이 생긴 생질들과
막내 행자와 이야길 했다.
그전
논밭 잡풀하나 못 보시더니 만
이제 당신에게 돋아난 것 하나 못 뽑으시니 원
*행자 = 막내 향자
청주김씨고창문중 조산파
근겸 시조공 13세손 참찬공 김린(金麟)의 네 아들 중 장남 시생(始生, 都宗派) 장흥파이다. 22세손(9대) 세유(世維,1695)의 아드님 23세손(10대) 덕형(德亨,1712)은 전북 고창군 고수면 조산에 사촌인 덕방(德芳)은 고창 상하, 덕화(德華)는 고창 무장을 *세거지(世居地)로 삼았다. 어떤 연유로 그리 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덕형 조상님 앞선 5대조 휴응(休應,1555), 춘기(春起,1583), 풍용(豊龍,1614), 여신(麗信,1644), 세유(世維,1695)님 들의 묘소마저 잃어버려 단비를 세우고 시제를 모신다. 단지 임진왜란(1592~1598)으로 피란과 기근을 피해 고향을 떠나 보다 북쪽지역인 고창으로 세거지를 옮겨온 것이 아닌가 한다.
조산을 세거지로 삼고 평화롭고 번영을 누리던 조산마을은 1950년 6.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빨치산 토벌대 출장소가 만들어지면서 격전지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빨치산들의 집중공격 대상이 되어 동네가 전소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1952.1.1일 일제 때부터 계획되어 풍문이 돌던 저수지 건설이 주민생계를 돕고 농지 수리시설을 건설하려는 정부정책에 따라 주민 소개를 시켰다(유년의 추억, 불바다와 물바다). 1956년 청주김씨고창문중 본바닥이 통체로 분해되어 물바다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그 때 할아버지 댁을 위시하여 큰집, 당숙집이 우리가 살고 있던 조산마을 옆 하말치로 옮겨왔다. 동네 이름은 그대로 조산(造山)으로 부르기로 했는데 우리 일가들과 임씨 몇 집이 옮겨와 터를 잡아 장성 피란민과 저수지 공사로 이주해 와서 사는 사람까지 뒤엉켜 40여호를 이뤘다.
*조부모님
할아버지 석흥(錫興 1892.음6.18)은 자가 덕오(德五)이고 호가 운산(雲山)이다. 할머니는 진주강씨 삼례(晉州姜氏 三禮) 1906년 성송면 남창에서 결혼하셔서 조산에서 평생을 사셨다. 호가 운산(雲山)이듯이 *소목장으로 산위에 떠도는 구름같이 목공 연장을 짊어지고 떠돌며 밥상과 옷장 등 민중들이 필요로 하는 작은 가구들을 제작 해주고 수리하며 다니셨다.
한 집안의 종손으로 하나있는 동생 종조할아버지 석만(錫萬1898.음7.20)은 27세14대 두칠(斗七)종조부께서 절손되어 양손자(養孫子)로 출계하고 종조할머니와 고향을 지키며 사셨다. 그이는 영수(永洙), 생수(生洙)두 아들을 두고 딸 귀례와 손자도 주봉, 주식, 주진과 주호를 두고 손녀는 화자, 순자, 옥례(점자), 숙자, 지혜, 지숙 등 오랜만에 벌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가문을 새로이 이룰 후손을 두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시대 한가운데서 한가문의 종손이라는 책무를 운명적으로 짊어진 채 가난과 가정의 불행을 가득 안고 사셨다. 장손인 나의 큰아버지 송산 장수(章洙 은암 1910.3.3.음)님은 큰어머니 강성환(姜星桓 1917)님과 1935년 결혼하셨다. 내가 어려서부터 큰 아버지는 힘도 좋으시고 농사일도 어느 것 하나 거리낌 없이 잘 해치우는 선천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자애로워 항상 큰아버지를 따르며 가까이 했다. 명절이나 제삿날에 밤을 치는(깎는) 걸 보면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예쁘고 정교하게 깎아 내는 걸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는 할아버지의 소목장인의 손끝을 타고 나셨다 생각한다. 집안에서는 음력 3월3일이 생일이라서 삼질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우리 종손 집안은 손이 귀한 집안이라 여긴다. 큰집 맹순누님(1936)은 연동으로 매형 서기남과 결혼하여 4남 2녀, 이순누님(1942)는 나이가 나의 옥자누님과 같으면서도 나이가 3살이나 적은 나와 고수국민학교 동창생이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지 70세가 넘어서도 지금 중•고교과정을 공부하고 계시다. 영순(옥희)동생은 한 동네 은봉기와 결혼하여 아이들을 잘 가르쳐 행복한 생활을 한다. 그이 동생 은정기는 나와 고수국민학교부터 고창고등학교 까지 동창생이다. 동생 복희는 유왕종과 결혼하여 고창에다 미도여행사를 차려 성공하였고 딸 유미나는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지금 헌법재판소 헌법연구원으로, 일가 김이수 헌법재판관과 한곳에서 근무 한다. 동생 방순(명희)이는 막내 향자와 동창으로 내내 고창에서 살다가 전남 완도에서 생활 하고 있다. 이런 딸부자집이면서 가문을 이어갈 종손 주홍(柱弘 1952)동생이 나보다 7년이나 늦게 태어났으니 고창청주김씨 조산파 일가들의 열망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세거지(世居地) : 조상 대대로 살고 있는 곳.
*소목장(小木匠) : 나무로 여러 가지 가구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 조일순(曺一順)은 1920.4.18.(음)생으로 창녕조씨(昌寧曺氏) 집성촌인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의 조일동(曺日東) 외할아버님과 외할머니 이점례(李点禮)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금지옥엽으로 가문 좋은 집안에서 자랐다. 아들을 낳지 못한 외할아버지께서는 바로 아래 동생 조영환(칠곡양반)의 큰 아들 조기홍을 양자로 들이고 외숙모 박정순 사이에 큰아들 조정호를 비롯한 4남2녀를 두어 아들 없던 친정 집안이 크게 발흥하니 행복해 하셨다.
아버지는 외동딸을 맞아 아내로 삼은 공덕을 평생 처가의 가례(家禮)를 비롯하여 대소가에 어려운 일을 맞아 온갖 정성을 다해 도와주어 많은 칭송과 귀빈대접 받았다. 이는 외삼촌이 일찍 병환으로 돌아가신 탓도 있다. 그동안 외숙모님은 한 집안을 크게 일으키고 지켜낸 그 공이 대단한데 말년에 고향 석정마을을 비롯한 주변이 온천단지로 지정되어 20여 연년 간 개발도 되지 않으면서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는 비운을 맞았다.
지금은 *석정휴스파&힐링카운티를 만들어 대규모 휴양시설로 발전했다.
겨우 옆 이주 단지에 마을을 유지하고 있으나 논밭이 없어지고 정든 고향땅이 상전벽해가 된 지금 조산마을이 저수지가 되어 청주김씨 뿌리가 뽑혀버린 비운과, 골프장과 휴양지가 되어 한 구석에 쪼그라져 엎드려있는 창녕조씨 집성촌 석정마을의 비운이나 다를 바 없다. 자식들마저 외지로 모두 떠나 홀로 늙고 병든 몸을 지탱하며 이를 지켜보며 사시는 외숙모님의 외로움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살갑게 대하며 외동딸의 외손주들을 사랑해 주신 외할머니의 정을 잊지 못하며 혼자 바느질을 하거나 콩을 까면서,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시며 흥얼거리듯 부르시던 정겨운 노랫가락을 하나도 녹음 해두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상전벽해가 되어버린 듯한 외가 마을 석정휴스파에 갈 때면 외할머니와 외숙모님 그리고 옛 가족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감, 복숭아, 호두, 대추,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이 과일들이 항상 풍성했고 책가방을 매고 나서는 나의 손에 지전을 한 움큼 쥐어주던 외숙모님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2014.6.1.일 외사촌 큰동생 정호의 회갑연이 열러 갔더니 마침 외숙모님과 4남2여와 사위, 손주들이 모두 모여 한바탕 잔치를 벌이니 오랜만에 외가 잔치에 참석한 고모네 식구들인 우리부부, 주필부부, 향자를 맞은 외숙모님의 환한 모습과 함께하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2016년 여름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떠나셨다.
1943년 광복되기 2년 전에 갑자기 할머니 강삼례(姜三禮)께서 돌아가셨다. 아버지 나이 25세 결혼하신지 2년밖에 안된 시기에 하늘이 의지하던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 처지나 할아버지의 심중은 헤아리기 어렵다.
1941년부터 45년까지 격변의 시기에 할아버님 가계에도 세상의 굴곡만큼이나 어려운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41년 둘째아들 아버님 결혼, 42년 큰집 둘째 이순, 우리집 옥자누님 출생하고 43년 할머니가 별세하셨다.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대동아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징용을 피해 평양으로 양복기술 배우러 가가셨다.
45년 아버님 귀향, 군청 취직과 고창 이주 군청 퇴직, 장손인 옥남(주원)출생, 아버지 외가인 남창으로 이사, 46년 조산으로 귀향 등 숨 막히게 돌아가는 국내외 정세와 개인사가 뒤엉킨 삶에서 할머니를 잃은 할아버지의 방황은 자세히 들어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다. 1948년 정순이 고모가 태어나신 것으로 충분히 이해된다. 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를 잃고 방황하시며 전남 영광군 대마면 갈매에 사시던 새 할머니 봉진임님을 모셔 방황을 멈추고 조산에서 사신 듯하다.
이미 슬하에 있던 판식이 아제와 정례고모를 대리고 오셔서 어울려 살았다. 의식주가 부족하고 한참 자라는 아이들이 엉켜 지내다 보면 다툼이 심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전쟁까지 겪어야 했던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어렵기는 매 한가지지만 우선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지 않는 배 고품은 어른들을 더욱 심신의 고통을 더욱 힘들게 했으리라. 그런 와중에도 전혀 인명 손실 없이 그 고난을 이겨낸 할아버지를 비롯한 큰집, 작은집들과 부모님의 지난했던 과거를 돌이켜보며 절로 숙연해 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해방과 더불어 생계를 이끌며 바느질을 시작했다.
평양에 가셔서 충분히 배우지 못하여 양복 짓는 기술에서 조끼와 오버 만드는 기술을 배워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왜냐하면 해방 후 양복 입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학생들이 많아짐에 일본인 기술자들이 떠난 자리와 기술자 수요를 충당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고창읍내 김재덕 양복점에서 일을 하셨는데 예전이나 요즘이나 일 배우며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생계가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얼마 후 고수 황산에 방을 얻어 *싱가재봉틀 하나 사서 학생들 옷을 지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지고 귀향했다.
전쟁 후 학교가 정상화됨으로 집에서 어머니와 손발을 맞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복을 지었다. 사실은 내가 부모님 옷 짓는 걸 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아버님은 치수를 재서 옷감 마름질을 하고 재봉틀 질을 하여 옷을 만들었다. 어머님께서는 단추 구멍 만들기와 단추달기, 실밥 뜯고 마무리하여 찾으러 오면 내주는 일을 하셨다. 잠시도 쉴 새 없이 호롱불 아래 심지를 돋우고 일하셨는데 그런 와중에도 내 밑으로 동생을 하나 낳아서 얼마간 키우다 잃었다.
잠시시름 겨워하셨으나 삶에 지칠 새도 없이 새벽 밥 해서 학교 보내고 아버지 뒷감당과 집에 오가는 손님들 밥 챙기고 땅뙈기 놀리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얼마간 양복 일을 하시다 김재덕씨가 보리를 치러 다니는 뒤를 봐줬는데 그의 4마력짜리 작은 발동기를 물려주고 읍내에서 다른 사업을 했다. 보리 때 보리를 타작하고 평소에는 쌀, 보리방아를 찌었다. 그 때가 내 중고 시절이었다.
제법 농사도 많이 짓게 됨에 동네일이나 면내 출입을 하시며 위아래 동네에서 제법 유지로 대접받았다. 내 기억으로는 그 근방에서 처음으로 농촌지도소에서 실시한 못줄을 이용한 개량된 농사법을 처음으로 배워와 보급시켰다. 긴 삼 줄에 빨간색 옷감조각을 6촌(18Cm)나 7촌(21Cm) 길이마다 끼워 장줄은 논길이 방향으로 길게 두 막대로 꽂아 쳐둔다. 단줄은 장줄과 직각방향으로 엇갈리게 장줄 꽃에 맞추어 논둑과 언덕 쪽에 노인이나 아이들을 새워 못줄을 옮기게 했다. 모심는 이들이 한 줄로 서서 뒤쪽으로 한 칸 씩 물러나며 심어나가는 방법인데 요즘은 기계모를 심기 때문에 이런 혁신적인 모심기가 수십 년 동안 주류를 이뤘다. 그 이전에는 흩어 심기라 해서 마구잡이로 심었는데 이는 농사관리에 여러 불편한 점이 많고 일정한 량의 수확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또 한 가지는 보리심을 때 흩어 뿌림으로 했는데 *황산식이라 해서 보리 씨앗을 일정간격으로 2~3알씩 심어나갔다. 이는 심는 과정은 더디고 복잡하지만 보리씨앗이 일정간격으로 균일하게 잘 나서 나중 포기가 많이 퍼져 풀매기가 쉽고 수확이 많았다. 농민들은 종래 해오던 방식을 고집하지만 한번 해보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돌아온다는 걸 알면 하지 말라 해도 바꾼다. 아버지가 새로운 농사법을 남보다 앞서 배우고 개량하여 실천하면 동네사람들은 그대로 잘 따랐다.
아버지는 항상 앞서나가며 삶을 개선하고 혁신하여 입식부엌, 연탄보일러, 석유보일러를 도입하셨고 사익보다는 공익을 앞세웠다. 그래서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 일 때 금싸라기 같은 집 앞 논을 동네 길 넓히는데 내 놓아 성사시켰다. 농사지으시며 농약을 덜 쓰려 무척 노력하여 시장에 내는 것이나 자식들 먹이는 걸 구분 않고 지으셨다.
한번은 80년대 말 창원기공에 근무 할 때 벼멸구가 순식간으로 번져 분제만이 유일하게 필요했는데 전라북도에 품귀가 되어 촌각을 다투게 되었다. 나에게 전화가 와서 선생님들에게 긴급히 구원을 요청하니 다행히 인근 농협에 비축되어 있었다. 택시로 옮겨서 마산에서 버스를 타고 순천까지 갔다. 광주에 살던 주영동생이 대기하다 고향으로 한밤중에 수송하여 동네벼멸구를 박멸하여 한해 농사를 살려냈다.
내가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고 가슴이 저려온다. 6남매가 학교(초·중·고)다니는 동안 새벽밥을 지어 먹였다.
또 집에서 머슴을 부리며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자식들 문제를 떠나 새벽 4시면 일어나셔서 앞 샘에서 첫물을 떠다 밥을 지었다. 술을 좋아 하셨던 아버지가 읍이나 면에 가셔서 취하여 늦게 오시면 등불을 들고 신평 학교 또는 공판장까지 가셔서 동행 하셨다. 그리고 반듯이 저녁을 차려 식사를 하고 주무시게 했다.
어머니는 평생 글을 모르고 사신 걸 의례히 그러려니 하면서 살다 돌아가신지 이미 24년이 지난 지금 가슴을 치고 후회한다. 자식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가르치면서 평생 까막눈으로 고통스럽게 사시게 한 죄를 어찌 갚아야 할까? 평생 객지로 떠돌며 살았다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1963년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재수하며 사방사업에 동원되어 다녔던 시기에 문맹퇴치 사업이 한창 벌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동네에서도 얼마간 시도를 했는데 하루 종일농사일 하고 피곤한 몸으로 먹고살 일도 아니라서 시들해지고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최소한 이름 석 자와 주소 쓰고 버스 노선 볼 수 있고 돈 샘할 수 있는 것 정도라도 알았다면 스스로 깨우쳐‘주원이 보아라,’에‘어머님 전상서’라 하는 편지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엄마와 객지에 사는 큰아들 소식도 알면서 아버지와 소통이 잘 되었을 것이다. 더러 아버지께 편지를 올린 일들도 있었지만 자상하게 편지를 읽어줄 분이 아니기에 본인만 보고 던져뒀다. 혹 ‘무라고 왔오?’하면 응, 유월 말에(음력) 방학하면 온다 능만, 하면 그만이어서 속 알이가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평생‘*가슴에 피’를 앓고 속이 끓어 한참 씩 숨이 멎는 고통을 안고 살며 가슴을 안정시키는 담배를 피우셨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위엄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사셨다. 그런 엄니를 아버지는 평생 걱정하시며 피주사라는 영양제를 사다가 가끔 손수 놔주시기도 했다.
집안에 둘째이면서 큰아버지의 장애로 그 역할을 평생 대신하다시피하며 대소사를 챙기고 큰집 누님들 시집보내는 일까지 감당하셨다. 큰집 둘째누님의 평탄치 못한 결혼생활에 대한 원망을 독으로 들었다. 옥자누님은 1965.1.15.일에 마당바우에 사시는 고수양조장을 경영하시는 분 큰아들인 이종한 선배에게 시집갔다. 그 후 갑자기 가산을 정리하여 대전으로 이사가서 대전역 구내식당을 운영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식당이 수용되며 사업이 몰락하여 누님이 궁핍하게 객지살이를 하는 큰 딸을 바라보며 사위의 뜬구름 같은 비현실적 사고를 크게 나무라기도 했다. 이는 사위를 미워했다기보다 누님을 고생시키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함에 대한 책망이었다. 매형 바로 아래동생은 나보다 두 살 많은 이종수는 고수초등학교 동창이다.
아버지는 나를 광주로 대학에 보내며 좋아하시던 담배를 끊고 보신탕을 일절 드시지 않았다. 그분들에게는 자식들은 바로 삶에 대한 신앙이고 존재가치였다. 언잰가 주위 분들이 물은 일이 있다. 우연히 들었지만 ‘어찌 자식들을 가르치며 먹을 것 다 먹고 잠 다자면서 하겠느냐?’또 객지에 내보내면서 나 좋다고 안 좋다는 보신탕을 먹을 수는 없다하셨다. 그런데 왜 술은 계속 마시느냐? 그것도 끊을 수 있는데 일 할 때 허기가 지고 지칠 때면 요기삼아 한잔하면 계속 일 할 수 있어 절주만 하면 별 문제없기 때문에 마신다.
어머니가 짓는 밭농사는 이상하다 할 만큼 곡식이 잘 여물었다. 밭가에 심어놓은 오이, 호박, 동부 콩, 가지 등 비주류 식품들도 밭에 가실 때마다 한소쿠리 씩 따 오셔서 이웃과 나눴다. 텃밭에 심은 호박넝쿨에 열리지 않으면 부지깽이를 들고나가 잎과 줄기를 두드리며 ‘오늘 장에 호박 팔러가야 하는데 열리지 않았다’고 타박하며 행위 극을 연출하고 나면 틀림없이 호박이 열렸다.
TV에나온 교수가 옛 선인들 생활의 지혜를 이야기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생명체에게 외부자극을 주면 위험을 느낀 호박넝쿨이 생존본능이 작동하여 열린다는 과학적 근거를 이야기 하는 걸 듣고 놀랐다. 아마 어머니도 외할머니 또는 증조외할머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보며 자랐을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가 옆에 없어도 천년만년 그렇게 사실 줄 알았다. 의례 방학이나 농번기 방학 때면 며칠씩 귀향하여 같이 지내고 명절 때나 힘든 귀향길을 해치고 달려가 찾아 뵙고 왔다. 그런 동안 주영, 주필, 대인, 향자를 대학교 또는 고등학교 까지 가르쳐 결혼시키고 사회에 내보냈다.
나보다 3살, 5살이나 늦게 태어난 정례 고모와 행수 숙부를 결혼시켜 살림을 냈다. 할아버지는 내내 한동네 조산에 따로 사시다가 내가 결혼한 해인 1974년 4.14일 82세로 한 많은 청주김씨 종손의 큰 짐을 벗고 큰집에서 떠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떠나시고 한동안 마을에 계시다가‘안구석이’논을 처분하여 영광 갈뫼‘판식’이 아제(큰아들) 한태로 합가하셨다.
논을 팔고 떠나실 때 아버지와는 일언반구 상의 없이 유두석씨에게 팔아버려 속 깊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 어린 행수 작은아버지의 장래를 생각하여 그 논이라도 남겨두지 않고 그렇게 하신 것을 여간 섭섭해 하셨다. 아마 할머니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타곳으로 나가 살다 큰아들이라고 찾아들며 빈손으로 가시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마 어려서부터 친자식들에게 베풀었던 얼마간 사랑이라도 나누어 줄 수 없었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거나 변명조차 못하고 끝까지 함구하셨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시키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 평생을 작은 형님에게 존경심을 갖도록 정성을 다해 도왔다.
또 영광군 대마면 원당(원흥) 산 46의34번지에 있는 5대조부모 상오(相伍)선조의 산소 성묘를 한가위와 설 때면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그 때는 꼭 갈뫼에 계시는 두 살 위인 할머니를 찾아뵙고 문안인사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큰집 주홍동생이나 나와 동생들과 옆지기 까지 주원이 각시라며 어찌나 좋아 하시는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일산에 사시는 행수 작은 아버지와 윤정남 작은 어머니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충분히 배우지 못하고 부모 사랑 많이 받아보지 못하고 사회에 나가 삶을 개척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경험 한 사람은 잘 안다. 숙부 내외도 결혼하자마자 서울 살 이를 시작하여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건축과 토목기술을 배워 험한 일터에서 잔뼈를 키우며 생존경쟁을 익혀나갔다.
한참 동남아와 중동바람을 타고 해외로 나가던 바람을 타고 현대건설 팀에 합류하여 동남아로 떠나 해외건설기술을 익히며 삶을 개척했다. 가끔 작은 어머니는 그 때 살기 힘든 고개를 넘는 시기로 홀로남아 아이들 남매 키우며 하루 한 끼 해결하기 힘든 시기에 시골 시숙님이 애써지은 나락을 찧어 쌀자루를 짊어지고 갈현동 고개 집을 찾아 오셨을 때 얼마나 고맙고 눈물 났는지 모른다고 회고하셨다. 시숙이 아버지 같고 작은 성님이 엄니 같기만 했다고 하며 이미 두 분 다 가신 분들을 격찬했다. 나는 그런 눈물 나는 사연을 잘 알지 못한다.
사람의 관계는 마음하나 어찌 먹느냐에 따라 자기 앉은자리가 극락도 되고 지옥도 된다. 작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지금 용인에 살며 오랜만에 일가친척들과 모일기회가 있고 만나지만 숙부내외의 역할에 대하여 큰 언덕임을 느끼며 의지하는 바 크다.
그분들을 만나면 큰 조카님!하며 살갑게 대할 때면 어렴풋이 나를 신뢰하며 의지가 되나보다 생각하곤 한다. 이제 사시는데 큰 어려움 없이 되셨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만한 고통과 노력이 있었겠나 생각하면 눈물이 날 지경이고 그분들 살아가는 지주가 되신 분들이 나의 아버지, 어머니란 것을 알게 되니 고맙게 느껴진다.
그런데 두 분 말년이 그렇게 순탄하거나 자식들의 사랑을 받으며 복을 누린 삶이 아님에 충분히 그런 복을 누릴 자격과 삶을 사시고도 박복하게 마감하신 것에 미안함과 비통을 느낀다. 50여 일 동안 차가운 병상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가신어머님이나 7년여 년 동안 아내 먼저 보내고 또 촉망받던 둘째를 억울하게 먼저 보내고 그 슬픔에 빠져 미몽에 헤매다가 겨우 1년 반 정도 나에게 몸을 의탁하여 생존하셨던 말년 삶이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라 인정되지 않아 부모님을 생각하면 자식 사랑은 역시 부모 사랑의 만분의1도 안됨을 실감한다.
객지로 떠도는 큰아들이 고향에 정착하기는 그른 일이고 당신이 평생 가졌던 농사가 희망 없음을 잘 알아 당대에 끝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은 오랜듯하였다. 집뒤 대밭에 당신과어머니 음택을 짓고 그 앞서 1993년 대동보를 하면서 내 아래 가계를 이어갈 아들(당신 손주) 자리에 봉섭이를 써 넣고 아들 없음을 단 한 번도 언급하시지 않았다.
셋째동생 주필에게‘너의 큰애 봉섭이를 형에게 주어라.’아마 이런 말씀을 하시기 위해 얼마나 긴 날들을 안개 속을 헤매듯 방황하시며 고민했을 까? 이런 것도 세대차라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내 속마음에도 부모님에게 참으로 죄송한 마음 외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 말씀 끝에 주필동생의 간단명료한 대답은‘아버님 뜻대로 하세요.’예전같이 양자제도가 엄존하여 그날부터 큰집으로 옮겨 살면서 가계 이어갈 수업을 받으며 일생을 그리 사는 것도 아니지만 누군가는 한사람 명목은 필요하기에 정하신 듯하다.
그런데 둘째동생 주영네 광주 제수씨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절연관계를 만들어 심각한 상태를 유지 하며 몇 번 명섭이 대신 봉섭이를 양자로 들였다고 하기에 그건 아버님의 뜻에 따랐고 장미까지 남자로 태었다면 제수씨가 싫다 해도 명섭이가 이어가는 게 맞는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만약 주필동생이 아들하나가 여자 애라면 그나마도 가계가 절손된다는 이치를 설명했다. 그렇다면 명섭이를 양자로 주고 동생네 절손되어도 좋냐 라고 해도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사실 부모님 유산이 많아 그 욕심이면 이해라도 되겠는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다.
분명한 이야기지만 난 재산에 대한 용심이 없고 부모님 유산은 고향과 함께 길이 보존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모님으로부터 나에게 전해진 유산은 고스란히 봉섭에게 전하겠다. 그다음은 준서가 이어가겠지.
우리 형제자매들은 이 세상에 어디다 내 놓아도 부모님 제산에 욕심낼 사람들이 아니라고 자부 한다. 세상 살아가면서 옥자누님, 먼저 떠난 주영, 몸이 안 좋았던 대인동생이 힘들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 내밀면서 재산 축내려 덤벼들지 않았다. 부모님들이 그런 자식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더한 고통을 느끼며 피눈물을 삼키였을까를 너무나 잘 아는 착한 형제들이다. 막내 향자네는 알콩달콩 잘 산다.
정년퇴임 후 2008년 7~8월경 고향 부모님께서 평생사신 집을 3,000여만 원 들여서 수리했다. 고향을 오가며 쉴 곳으로 어릴 때 추억이 어려 있고 부모님 체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더러 형제들이나 친지들도 고창 여행시 제공되고 벌초와 성묘 때 가족이 편히 쉴 수 있어서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것은 호남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서씨 제각과 우리 마을을 가르고 지나가니 소란하고 동네가 주거지로 아주 나쁜 환경이 되어버려 예전 적막강산 같은 고요는 없게 되었다.
2019.1.6일(음1918.12.1)이 아버님 탄신 100주년과 어머님백수 (음1920.4.18일)를 맞아 두 분 자손들이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경축과 추모하는 마음을 같이 가집니다.
오늘을 있게 한 은공을 길이길이 새기며 감사와 기쁨 마음을 함께 나눕니다. 영면하소서!
2019.1.6일
큰 아들 김옥남 삼가 올림.
*휴정휴스파&힐링카운티 :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 방산산 아래에 서울 송도병원 그룹과 서울 시니어타워(주)가 20여 년간 방치된 석정온천단지 30여만 평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여 의 료기술, 자연치유를 접목하여 온천장, 치유센터, 골프장, 삼림욕장, 펜션, 실버타운 등 종 합 휴양센터를 조성함.
*싱가(Singer)재봉틀 : 예전 부라더 국산재봉틀이 나오기 전까지 일제 때부터 썼던 세계적 인 메이커 재봉틀임. 미제, 독일제, 일제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가 주로사용 됨
*황산식 보리심기 : 1940년대 후반에 벼의 온상식 밭못자리가 개발되었는데 이를 보리농사 에 적용하여 보리를 점묘식으로 심던 방식. 벼는 1950년대 보온절충밭못자리로 발전하였 다.
*가슴에 피 : 가슴에 피가 난다고 해서 우리 조상들이 불렀던 오늘날의 심장병. 울화병, 심장박동이 빨라지거나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뛰어 심하게 통증을 느끼는 중상.
전라도 지역 방언.
*길안내 : https://place.map.daum.net/17507481
*대전 : 김영미. 안영렬 부부 늦게 참석하여 총원에서 빠짐. 총 29명참석
월은공 김복수님 탄신 100주년 ․ 창녕 조일순님 백수 기념 지출 현황표 2019.1.5~6 단위 원
순번 | 내 용 | 수 입 | 지 출 | 잔 금 | 기 타 |
1 | 가족 회비 | 3,6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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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간 |
2 | 후원금 | 3,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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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남,김주필, 김대인, 김향자 |
3 | 부모님수입금 | 1,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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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 사용료 |
4 | 대전 후원금 | 3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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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린 결혼후원금 |
5 | 통장이자 | 3,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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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사과(10k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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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자 |
7 | 양주(1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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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숙 |
8 | 펜션이용료 |
| 830,000 |
| 1박2일(1.5~6일) |
9 | 저녁식사비 |
| 493,000 |
| 5일 |
10 | 아침식사비 |
| 136,000 |
| 6일 |
11 | 단체복 |
| 517,000 |
| 김보람.김바래(27벌) |
12 | 수건 |
| 225,000 |
| 김미수(25세트) |
13 | 간식 |
| 200,000 |
| 김향자(현수막포함) |
14 | 떡 |
| 100,000 |
| 박송희 준비 |
15 | 축하 케익 |
| 24,300 |
| 〃 |
16 | 경품구입비 |
| 188,940 |
| 이석준 준비 |
17 | 쓰레기봉투 |
| 3,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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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 | ․ | ․ | ․ | ․ |
총계 |
| 7,903,133 | 2,717,740 | 5,185,393 | *잔금회비로 저축 |
*김봉섭 : 사진. *최규민 : 방송, 영상담당. *총무 박송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