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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이는 글>
-오늘의 금융위기를 한탄하며
IMF가 오기 전 무슨 이야기 끝에 내가 나라 걱정을 하니 옆에 있던 낯선 아줌마가 “아저씨가 왜 나라 걱정하느냐”고 하며 핀잔을 주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에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정말 걱정해야 될 사람들이 걱정을 않으니 나 같은 사람이라도 걱정을 해야 할 것 아닌가” 하고. 그 말을 하고보니 정말 나라가 망하는 데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쓴 글이 졸고 “오늘의 한국경제문제 그 원인과 해법”1)이다. 논문을 탈고하기 불과 사흘 전에 나라경제가 치욕의 IMF 사태를 맞게 된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그 논문을 한국경제신문, 월간조선 등의 언론사에 보내게 되고 영남일보에 1998년, 1999년 적극적인 기고와 경제칼럼을 썼다. 그리고 민주화 세대가 경제개발 세대보다 더 부패해가는 여러 현상들을 보면서 부패청산의 글들을 썼다. 필부가 무슨 수로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
먹고 사는 문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옛날 그 아주머니의 말처럼 이제는 정말 나 같은 필부가 나라걱정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는데 지금도 영 그렇지가 못한 것 같다.
가난이란 그냥 밤이슬을 맞고 한데서 잠자는 것이 아니다. 가난이란 그냥 배고픔이 아니다. 온갖 멸시와 천대가 뒤 따르고 가족들이 흩어지고 인격이 무너지고 마침내는 육신마저도 낙엽처럼 바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자립이란 나도 인격이고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자립이란 나도 생각이 있는 자유인이라고 실증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힘이다. 찬란한 문화도 먹을 것 위에서 싹이 트는 법. 지도자가 미래를 내다보는 거시적인 안목이 없고 쓸데없는 명분싸움과 권모술수에만 능하니 백성이 힘이 든다.
오감도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중략)/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중략)/(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천재 시인 이상의 「오감도」제1호의 내용이다.
세상은 혼돈하고 믿음은 보이지 않고 온통 무서움과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겁에 질린 아해들은 어디든지 달아나야 한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질식하여 죽을 것 같다. 첫째 아해도, 둘째 아해도, 셋째 아해도, 그리고 마침내는 무서워하는 아해까지도 분위기에 휩쓸려 도로를 질주한다. 달리는 길이 막다른 골목인지, 새로운 세상으로 향한 열린 길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달린다.
불안에 싸여 제 가는 길도 모르면서 무작정 헤매고 있는 군상들의 모습이 이 천재 시인의 눈에는 새 조(鳥)자도 모르는 까마귀(烏) 떼 같아 보여 조감도를 오감도(烏瞰圖)라 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지난 한 세기동안 이루어 놓은 공든 탑이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모든 국민들이 두려움의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등 그동안 힘들여 쌓아올린 공든 탑들이 무너지고 구조조정, 고용조정, 정리해고, 명예퇴직, 빅딜 등 이름도 생소한 아해들이 도로를 질주하자, 영문도 모르는 아해들이 죄다 공포에 젖어 방향모르는 질주를 하고 있다.
바벨탑의 붕괴는 믿음의 붕괴다. 믿음의 성은 결코 하루아침에 쌓을 수 없다.
지도자에 대한 믿음, 금융에 대한 믿음, 제품에 대한 믿음,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세우기 위한 조감도(鳥瞰圖), 우리에게는 지금 질주가 아니라 단 한 장의 조감도가 먼저 필요한 것이다.(영남일보 문화산책 1998년 9월4일)
불확실성의 시대
장엄한 새 천년의 개막을 앞두고 인류는 지금 엄청난 혼돈에 빠져있다. 금융이 규칙성을 상실하고 널뛰듯 하자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모든 산업시설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있으며, 신흥공업국의 화폐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하여 소슬한 가을 뒷골목을 나뒹굴고 있다. 전 세계가 금융이라는 괴물이 휘두르는 두개의 칼바람(환율과 금리) 앞에 운명을 내맡긴 채 내일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는 깃발을 내걸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를 붉은 환각 속에 몰아넣은 공산주의가 자기모순에 빠져 종언을 고한 것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자본주의도 자기모순 속에서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동인(動因)에 의해 상업자본주의에서 산업자본주의로, 그리고 금융자본주의로 발전해 나간다. 금융자본주의 뒤에는 어떤 자본주의가 등장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미래학자들은 불행하게도 아직 없다. 공산주의와의 한판승부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가 자기모순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몰하고 만다면, 그 후 어떤 새로운 이념이 인류를 이끌어가게 될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갈브레이드 교수는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일찍이 「불확실성의 시대」로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불확실한 가운데서도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면 칠흑 같은 혼돈 속에서도 새로운 규칙성을 발견해내고 그 규칙에 순응하여 나가리란 점이다. 오늘 지구촌 곳곳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금융의 고삐를 잘 잡아, 더 이상 이 괴물이 인류를 자신의 노예로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물질의 주인으로서의 위치를 되찾아 줄 초인을 기다려본다.
(영남일보 문화산책1998. 9. 25)
고뇌하는 가인의 후예
고교시절, 이웃한 효성여고 강당 앞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모조 조각품이 있었다. 벌거벗은 한 청년이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서 무지의 껍질을 깨기 위해 고뇌하고 있는 모습. 지식이란 무엇이며, 지성이란 무엇인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자 하며,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다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깊은 고뇌에 빠져 있는 조각품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생각」이란 진리를 읽어 내는 데에는 불혹을 넘기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고뇌를 두려워하는 지성은 겉멋만 부리고, 사색이 없는 이성은 눈뜬장님에 불과하며,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되는 길은 오직 사유(思惟)라는 진리를 이제 사 깨우친 것이다.
오늘도 신문 사회면에는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에게 주어야 할 수재의연금품을 착복하고, 국가의 조세권을 남용하여 대선자금을 모았으며, 가난이 죄가 되어 보험금을 위해 열 살 난 어린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천형(天刑)을 받게 된 남의 이야기들로만 가득하다. 그런데 그들을 향하여 분노의 돌을 던지고 있는 생각 없는 군상들 속에는 내 모습도 보인다.
성경 창세기 3.4장은 인간 타락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신은 인간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첫 번째 질문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숨어버린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두 번째 질문은 아우를 죽인 형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가인의 후예들인 우리 마음에서 마성(魔性)을 몰아내고 신성(神性)을 회복하려면 우리는 늘 나 자신과 내 이웃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고 있는 이 근원적인 물음에 답해야 한다.
돌을 던지기에 앞서 내가 있는 곳, 네가 있는 곳,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있어야 할 곳에 대해 좀 더 고뇌해 보자.(영남일보 문화산책 1998년 10월16일)
박노해 시인 귀하
노해 형!
지난 한 시대를 형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노해(勞解)라는 이름으로 참 부지런히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양심수 대사면 때 석방되어 조선일보와의 회견에서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하루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가족들과 오순도순 평온한 저녁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의 그림에는 밀레가 그린 만종에서 보이는 소박하면서도 성스럽고 평화로우면서도 거룩한 노동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최소한의 평안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하는 속박된 노동의 모습과 그 작은 안식마저 외부의 침탈로부터 잃어버리지는 않을까하는 가슴 졸인 평안만이 느껴짐은 무슨 까닭일까요?
노해 형!
형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는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인데 노동자가 주인이 되면 그때부터 그는 주인이기에 새로운 타도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삶의 진정한 주체자로서 모든 경제적 의사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주인, 노동자의 참된 해방은 그가 주인으로 완전히 거듭나는 길 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고용을 창출하여 실업을 극복하고 평생고용이 아닌 평생노동을 보장하는 길은 노동자 천국을 꿈꾸어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며, 사장천국을 만들어야 가능합니다.
한시적으로 사장 수업을 받고자 하는 청년들 외에는 누구나 사장이 되고자 하는 세상, 노동자의 삶은 필경 망할 수밖에 없으며 사용자의 삶은 너무나 황홀하여 모든 노동자가 사장이 되기를 갈망하는 세상, 그리고 그 꿈은 특출한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환상이 아니라 정상적인 노력을 통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이상이 되도록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때 노동은 참된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사장을 하지 않으려는데 노동인들 어디서 하겠습니까? (영남일보 문화산책 1998년 9월 11일)
고르비의 회한
고르바초프는 체르넨코 정권의 제 2인자의 자리에서 농업, 경제, 이데올로기, 당 인사 정책 등 중요 직책을 담당한 실력과 신뢰를 겸비한 소련 정치국의 신진 기대주였다.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죽은 후 당 서기장에 선출된 그는 과감한 세대교체를 단행하여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로의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천명하고 개방된 새로운 환경을 수용하기 위한 페레스트로이카(국내 개혁)를 추진하였다. 그는 공산주의 방식으로는 결코 소련 국민들을 배고픔에서 구원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영원히 가난과 질곡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부동의 신념을 갖고 개혁정책의 1차적 과제를 군비 감축에 두고 미국과 「중거리핵전력협정」(INF Treaty)을 체결하고 9년 동안 점령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 시켰다.
경제 개발을 위해 소모적 예산을 줄여야하는 소련의 처지로서는 미소 간의 군비경쟁 종식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군비 감축으로 일시에 처량한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게 된 소련 군인들은 개혁 불만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개혁반대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역사의 흐름을 역류시키지는 못하였다. 쿠테타로 인해 고르비는 실각하고 소련은 붕괴되었으며 개혁 추진은 지지부진해져 오늘날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파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고르비가 새로운 소련의 건설을 위해 추진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이 양대 정책 때문에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지배 이념의 한 축으로 버텨온 공산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그에게는 노벨 평화상이란 영광과 쿠데타에 의한 실각이라는 아픔을 동시에 주었다.
러시아는 지금 개혁의 실패로 엄청난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자기 조국 러시아를 바라보는 고르비의 심정은 영광도 고통도 아닌 실패한 개혁에 대한 회한만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됨은 작금의 우리가 처한 현실이 주는 동병상련2) 때문이 아닐까. (1998년 8월 28일)
IMF 극복 조건
우리가 언제쯤 IMF를 벗어나서 고생을 면하겠는가를 주변에 물어보면 한 2~3년 후라고 낙관적인 추측들을 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대사조는 시장경제원칙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원칙이 아무리 이 시대의 조류라 하더라도 이 원칙이 적용되어서는 안 될 곳이 있다. 홍진에 묻혀 제 욕심만 쫓아다니는 몽매한 중생을 제도해야 할 종교계가 그 하나요, 자라나는 다음 세대들에게 양심과 정의와 진리를 가르쳐야 할 교육계가 그 둘이며,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밝혀 사실대로 전달하고 대중을 향한 정론직필을 생명으로 삼아야 할 언론계가 그 셋이다.
이들 3계(界)는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 아닌데도 영악한 시장경제론자들에 의해 이곳까지 이익을 쫒는 자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신도들의 표를 몰아줄 수 있다고 교세나 자랑하며 권력자를 위한 기도회에나 참석하고 낮은 곳을 향한 봉사보다 헌금이나 강요하는 종교계,「꿩 잡는 게 매」니까 한 달 과외비가 1천만 원을 넘는다는 족집게 과외를 통해서라도 성적부터 올리고 보자고 고교교사와 대학총장까지 나서는 교육계, 권력에 굴종하여 대중선동이나 잘하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광고수입을 위해 판매부수와 시청률에만 매달리고 있는 언론계….
“눈치 빠른 놈은 절에 가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 요령을 신봉해서는 절대로 안 될 우리사회의 정신적 지도집단들이 이렇게 깊은 병이 든 상태에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 나라가 단시간 내에 IMF를 극복한다는 말인가.
장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이 밀어낸다. 그런데 뒷 물결이 더 썩어 있다면 IMF 극복은커녕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기적 아닌가. IMF 극복은 나 이후에 내 자리를 물려받아 일할 다음 세대가 나아갈 바를 올바로 교육할 때, 빨라야 10년 정도 걸릴 것이다.(영남일보 문화산책 1998년 9월 18일)
조작시비의 언론과 정치
임진왜란 2년 전, 왜란의 징후를 감지한 당시 조정이 일본정세 탐지를 위해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으나 돌아온 서인의 통신정사 황윤길과 동인의 통신부사 김성일은 완전히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그러자 조정은 동인 서인으로 갈라져 자당의 인물을 비호하며 싸우다 결국은 침략의 조짐이 전혀 없다고 보고한 김성일의 주장을 채택하고는 그나마 일부에서 전쟁에 대한 방비를 하던 것까지 중단시켜 버렸다.
죄 없는 백성들은 7년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내동댕이쳐버린 우리 역사에서 가장 한심한 사건이다.
30년 전 울진 삼척지역 두메산골에 무장공비가 침투하여 고 이승복군의 일가족을 무자비하게 참살한 사건을 두고 당시 이승복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란 말을 했느냐, 아니냐를 두고 최근 일부 언론사들 간에 이데올로기에 의한 기사 조작의 시비를 불러일으키더니 정치권마저 여․ 야가 지난 대선, 총선 때 자당 선거에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북한 집단으로 하여금 판문점에서 총격을 가하여 달라고 「주문했다」 「조작이다」로 대립되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그 진위가 밝혀지지 않아 국민들은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안보와 국방」이 이러한 논쟁에 의해 희생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고 이승복군의 죽음을 기리는 이유는 한 소년의 영웅적인 죽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방어할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 어린 생명에게 가한 무장공비들의 잔혹한 만행을 상기하고자 한 때문이며 「북풍」「총풍설」에 아연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함은 정치하는 자들이 4백 년 전의 임진왜란 때처럼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정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변죽을 울려 본질을 호도하고 사익을 위해 국기(國基)를 흔드는 소인배들이 설치지 못하도록 모두가 깨어 있어야겠다.(영남일보 1998년 10월23일)
저승유람기
저승 유람기이다.
먼저 지옥, 식사시간이 되자 걸귀들이 식탁 앞으로 우르르 몰려든다. 흰 쌀밥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런데 숟가락이 너무 길어 아무리 떠 넣어도 밥은 입으로 들어가질 않고 어깨너머로 계속 떨어진다. 식사시간이 끝나도록 한술의 식사도 못하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퇴장한다.
이제 천당. 지옥과 하나 다른 것이 없다. 흰 쌀밥에 큰 숟가락이 준비되어 있다. 살이 포동포동한 귀신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식사를 한다. 긴 숟가락을 들고 앞에 앉은 사람을 먹여준다. 서로가 서로를 열심히 먹여주고 있다. 본디 하나인 저승이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천당과 지옥으로 나뉘고 있는 것이다.
세기말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전 인류의 최대 공포는 세계경제대공황이다. 인류의 절반이 굶주려 죽는다는 세계대공황은 오는가? 그리고 이를 피할 길은 없는가?
외환위기에 처한 나라들은 외화를 더 벌기 위해서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환율인상)한다. 약삭빠르게 먼저 평가절하한 나라는 일시적으로 수출이 늘어나게 되고, 어느 정도 외환위기를 해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국도 똑같이 외화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라 뒤이어 자국통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하게 되며, 이어 모든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자국의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
무역은 전혀 일어나질 않게 되고, 세계경제는 피할 수 없는 대 파국을 맞게 된다. 모든 나라가 이기심의 포로가 되어 수출을 늘리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황이 오는 것이다. 수입 없는 수출이 어디 있는가? 세계경제를 살리는 유일한 길은 모든 국가 지도자들이 협력하여 자국통화의 평가절상을 통한 수입을 촉진 시키는 길 뿐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둘러보면 모두가 제 입에만 밥을 퍼 넣겠다고 아비규환이다.(영남일보 문화산책 1998년 10월 9일)
DJ노믹스의 임무
DJ노믹스로 불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경제철학을 담은「국민과 함께 내일을 연다」가 최근 출간되었다.
이 책은 “시장경제원리란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바탕으로 경제활동의 자유가 보장되고 개인에 대한 보상이 시장경쟁을 통해 결정되며 경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체제”라고 설명한다. 이는 시장은 늘 손실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에 반드시 이익과 보상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곳이며, 시장을 움직이는 룰은 계약이므로 우리는 계약법의 정신에 따라 스스로 그 득실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로 재해석된다.
계약법에 따르면 법률이 별도로 금하고 있지 않은 한 모든 계약체결은 자유롭고, 이를 위반하면 과실 있는 자가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계약에는 일방적인 권리만 있거나 의무만 있는 경우는 없으며, 쌍방이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는다. 계약법의 근본정신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국 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규율하는 법체계는 대부분이 공법(公法)체계였다. 사법(私法)체계인 계약법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정부가 우월한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국민들에게 작위(해라), 부작위(하지마라), 수인(참아라) 등의 임무를 과하고서 이를 어기면 처벌한다는 식의 규제 일변도의 공법관계(公法關係)를 중심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 해왔기 때문에 계약법의 정신이 국민의식 저변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DJ노믹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법체계를 규제와 처벌위주의 공법체계에서 계약과 손해배상중심의 사법체계로 신속히 전환해야 한다. 손해배상을 통한 책임추궁은 처벌보다 더 강력한 질서유지의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영남일보 문화산책 1998년 10월 2일)
뒷물 맑기 운동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한 것이 부정부패 추방 운동이다. 역대 정권들이 그 집권 초기마다 사정과 감찰 활동으로 수많은 부패 정치인과 공무원들을 정리한다고 하였지만 세월이 갈수록 부패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부패 추방의 바람이 불면 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논리로 고위층들부터 사정한다. 그러나 사정을 당하는 자들은 늘 권력의 중심에서 비켜선 자들이 대부분이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사정을 당하는 자들로부터도 반발을 불러와 결국 부패 추방의 바람은 한때의 겁주기로 끝나고 만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땅에서 부정부패가 없어지기를 원한다면 「윗물 맑기 운동」에서 「뒷물 맑기 운동」으로 구호를 바꿔야 한다. 「윗물과 아랫물」간의 책임 공방을 따져 봐도 상하가 한 통속에 있는데 정화가 되겠는가?
이제라도 부패 추방 운동에 「앞 물과 뒷물」의 세대 교체적 순리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앞 시대의 부패 정리는 세월에 맡기고 부패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뒷시대가 사회 모든 분야에 유입되도록 해야 한다.
청렴한 자나 부패한 자나 인간은 세월을 이길 수가 없다. 이 땅을 하직하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나는 사람들이 년 간 50만 명이나 된다. 10년만 지나면 모든 분야에서 500만 명이 저절로 교체된다. 우리가 진정 공해 없는 맑은 환경에서 살고자 한다면 이미 흘러간 앞 물을 정화하기 위해 호들갑을 떨며 새로운 오염을 만들지 말고 청년들부터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하자.
부패를 청산한다고 어깨띠 머리띠를 두르고 오늘도 모든 기관 단체들이 다짐과 결의대회라는 푸닥거리를 벌이고 있다. 10년 20년 후의 세상은 청년들의 것이다. 청년들이여! 미래의 주인답게 오늘의 이 한심한 상황을 떨치고 일어나 내일을 향한 정의의 목소리를 외치라! (1998년 10월 27일)
바람 풍과 바담 풍
옛날 어느 산골 서당에서 혀가 짧은 훈장님께서 아이들을 모아 천자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하늘 천(天), 땅지(地) 하고 훈장님이 선창하면 학동들이 뒤를 이어 따라 읽기를 하는데 이 훈장님은 혀가 짧아 바람 풍(風)자를 읽을 때면 늘 「바담 풍」이라 하였다.
훈장님께서 허리를 곧추세우고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점잖게 「바담 풍!」하면 아이들도 낭랑한 목소리로 「바담 풍!」한다. 학동들의 발음이 틀리자 훈장님은 다시 톤을 높여 「바담 풍!!」이라 하자 아이들도 같이 소리를 높여 「바담 풍!!」이라 한다. 훈장님이 노하여 “아니 이 녀석들아 바담 풍이 아니고 바담(람) 풍이야” 하고 발음을 바로 잡으려 하지만 학동들 귀에는 계속 「바람 풍」이 「바담 풍」으로 들리고 있다.
그 마을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발음을 바로 잡으려는 훈장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계속 바담 풍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는 선비가 이를 보고 바로 잡아 주었는데 그 후로 훈장님은 「바담 풍!」, 학동들은 「바람 풍!」이라 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는 가르치는 자의 자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주는 우스개 소리지만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이야기라 할 것이다. 선생님이 ‘바담 풍’이라 한다고 배우는 후학들까지 ‘바담 풍’ 해서야 되겠는가?
비록 혀가 짧아 ‘바담 풍’이라 하지만 학생들까지 ‘바담 풍’이라 해서는 안 된다고 애태우는 마음이 가르치는 자에게 있고, 틀린 발음이지만 바르게 듣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배우는 자에게 있다면 우리나라의 장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자만이 남을 지도하고 사회를 개혁할 자격이 있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세월을 오로지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은총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영남일보 1998년 8월 30일 기고)
시인은 노래하지 않고
- 정리해고 된 친구를 위하여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데/ 비틀린 새벽도 찬란한 서기가 하늘로 뻗치고/ 만물이 홰를 치며 승천할 것인지/ 난 모르오/ 그 날이 오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행복이 들꽃처럼 흐드러지게 핀다는데/ 누런 황톳물에 걷잡을 수 없이 휩쓸려 가는 저 들판에도/ 가녀린 줄기 곧추세운 들국화 한 송이나마 피어날 것인지/ 난 모르오/ 비리․법․권․천이라는데/ 하늘보다 권세인지 권세보다 하늘인지/ 법 위에 비리인지 비리 위에 법인지/ 난 도무지 모르것소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출 그날이 오면/ 종로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겠다던 시인도 가고/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을 위하여/ 빈 의자를 찾으러 다니던 시인도 지치고/ 인경소리는 어느 때나 들릴지 알 수가 없는데/ 도대체 새벽이란 어린 분이 오기는 오는지 영 모르것소/ 정리 해고되어 주머니가 한결 가벼워진 친구가 찾아와/ 오히려 남은 자를 위하여 점심 값을 내고 갔다/ 죽은 자들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유일한 부조는/ 그냥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친구를 위해/ 침묵함 뿐인가?
욕설과/ 변명과/ 부조리의 잡초 속에서/ 아, 무엇을 더 바라리요/ 바라리요?/ 다만 종말의 날에/ 정결한 찬 이슬이라도 흠뻑 마셨으면…/ 이 시대의 시인은 노래하지 않는다/ 슬픈 애가이든, 환희의 찬가이든/ 분노의 함성이든, 좌절의 체념이든/ 시인이 노래하지 않으니/ 시인도 아닌 놈이 남의 시를 섞어 제 시 인양 쓴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면 파란 물감이 푹 쏟아질 것 같다.
친구야! 저 푸르고 싱싱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고 우렁찬 함성을 질러보자. 모든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마음껏 들이쉬고 이 풍진세상을 거침없이 살아보자.(영남일보 문화 산책 1998년 10월 30일)
「평화의 소」 남북한 교류 계기삼자
지난해 여름 홍수 때 임진강에서 북한의 황소 한 마리가 떠내려 와 우리 군에 구조돼 평화의 소로 명명되어 어느 목장에서 길러지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 찡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현대그룹의 정주영명예회장이 소 1천 마리를 판문점을 통하여 북한에 보내고, 북한은 92년 10월 정부의 남포조사단 방북이후 지금까지 허용한 적이 없는 판문점을 열어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한다. 참으로 박수를 치면서 기뻐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에게 소는 믿음직한 동무요, 집에서 가장 큰 재산이요, 모든 어려운 일을 씩씩하게 해내는 자랑스러운 일꾼이요, 때로는 어두운 밤길에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주인을 보호하는 든든한 보호자였다. 물기 촉촉한 크고 맑은 눈망울을 들여다보노라면 누구나 금세 소의 눈을 닮고 만다.
북한의 이번 선택이 「명분이냐 실리냐」의 갈림길에서 실리를 선택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하지 말고 소처럼 살아온 우리 민족의 가슴 가슴 그 심연(深淵)에 자리한 순수한 민족의 동질성이 숱한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변치 않고 맥맥히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쾌거가 성사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북한 측에서도 가능하면 어미암소를 받고 이 소들이 새끼를 낳는 내년에는 따뜻한 동포애에 보답하는 의미로 다시 이 판문점을 통하여 송아지로 갚겠다고 하자.
평화의 소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풀릴 수 있는 보다 가시적인 조처들이 잇따라 일어나길 바라며 기왕이면 1천명의 아이들이 이 소 떼를 몰고 가서 북한의 1천명의 아이들 손에 고삐를 쥐어주게 하고 내년에는 다시 북한 어린이 1천명이 판문점을 통하여 송아지를 몰고 남으로 오게 한다면 전 세계를 흥분시킬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지 않겠는가. (영남일보 1998.5.14 기고)
선출직 임기 중 사퇴 땐 책임 물어야
000 마포 구청장 등 서울 시내 23개 구청장과 구청장 당선자들이 지난해 지방 자치 단체장이 임기 중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 등에 입후보할 수 없도록 규정한 공직 선거법 53조 3항 등이 헌법상 공무 담임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이라며 헌법 소원을 낸데 이어, 대구시 8개구(군) 단체장들이 부화뇌동하여 위헌 결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는 건의문에 공동 서명하여 헌법재판소장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에게 발송했다고 한다.
공직 선거법의 동 조항이 위헌이 되는지는 헌법재판소가 판단할 문제이나, 이러한 헌법 소원이 제기된 근본 동기는 현행 지방의원 및 자치 단체장의 선거 시기와 국회의원, 대통령의 선거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틈을 노려 지방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장에 당선된 자들이 보다 상위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개인적 야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선거에 출마하여 자기를 뽑아 준다면 임기 동안 국민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성실히 봉사하겠다고 확성기까지 동원하여 떠들던 자들이 상위의 선거 직 출마를 위해 자신의 직위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사퇴한다면 선거는 과연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 그들이 임기 중 사퇴하게 되면 해당 지역은 사퇴한 그 사람 때문에 또다시 보궐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재. 보궐 선거에 드는 막대한 선거비용과 유권자들의 시간과 비용 낭비는 또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그 비용은 몽땅 선거에 몸서리치는 국민들이 부담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출직 공무원들의 임기 중 다른 선거 출마 제한 행위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요소가 있는지 몰라도 그 이전선거에 출마한 행위와 출마자에 대한 유권자들의 선택은 당선자와 해당 지역 유권자들 사이의 「사법(私法)상의 계약 행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선거에 의하여 취임하는 정무직 공무원들이 임기 중 질병이나 사망 등 불가항력적인 사유 없이 그 직을 사퇴(불법 선거운동으로 인한 당선 취소 또는 무효까지 포함하여)한다면 그것은 「근무 고용계약」위반 행위로서, 그로 인해 빚어진 모든 손해는 사퇴하는 공직자가 배상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없다면 법을 제정해서라도 손해 배상 하도록 해야 한다.)
보궐선거, 재선거는 국민의 혈세를 내다 버리는 행위이니, 현행 공직 선거법의 위헌 여부문제 이전에 보궐선거의 원인 제공자에게 보궐선거에 따른 선거비용과 유권자들이 입게 되는 기타의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여, 공익 정신없이 출세욕에 눈이 멀어 함부로 공인이 되고자하는 자들을 정치판에서 추방해야 할 것이다. (영남일보 1999년 3월 6일)
패거리 문화 척결
희랍신화에 나오는 법의 신 테미스는 여신으로서 오른손에는 저울을 왼손에는 검을 든 모습을 하고 있다. 법을 다루는 자는 공평무사하게 죄의 크기를 형량한 후, 처벌은 검처럼 날카롭게 하되 그 냉혹함 뒤에는 여인의 가슴처럼 따뜻함이 있어야 한다는 법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00 변호사의 사건 수임 기록부가 언론에 공개되자, 사상 최대의 법조 비리가 터져 나왔다고 세상은 온통 법조인들의 부도덕성을 비난하고 있으며, 사직 당국은 관련자들을 엄히 처벌하겠다고 나섰다. 이 사건도 우리가 처해있는 우리 주변의 근본적인 환경을 치료하지 않는다면 이제까지 보여 온 여타 경천동지의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비난과 처벌로써 일단락되고 말 뿐,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언제 그러한 일이 있었더냐. 는 식의 미련한 짓이 계속 되풀이 될 게 뻔하다.
우리 사회에 보편적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는 불의와 무질서의 근원은 우리 국민들의 패거리 문화에 있다. 족벌, 학벌, 문벌, 재벌, 군벌 등 어느 특정 집단의 한 계보를 형성하지 않으면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오랜 문화적 풍토가 근대화 이후 몰아닥친 효율성에 편승하여 자기 이익을 도모함으로써, 공정성과 정의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어 이런 대형 사건들이 계속 터지는 것이다.
비난과 처벌은 대중의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피해자이지 결코 관찰자가 아니기에 미래에 대한 개선의 전망이 없는 현실의 강제적 수용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미래에 대한 발전적 희망이 없는 현실의 강요는 또 다른 형태의 억울한 폭력일 뿐이다.
경천동지의 사건이 터질 때는 그러한 일들이 이미 우리 사회에 널리 보편화되어 곪을 대로 곪아 있으니, 이를 바로 잡으라는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 오늘의 문제들을 개선하여 미래의 좋은 세상을 열어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대형 사건의 수습에는 현재의 부패관행이 어디서 연유하고, 또 이를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인가에 현자들의 지혜를 모아야 하는 것이다. (영남일보 1999년 1월 30일 기고)
촌지 뿌리 뽑아야
전통적으로 떡값, 전별금, 촌지는 그 속에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염치와 겸양이 가득 담긴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촌지와 떡값은 우리 사회 상층부에 부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졸부들이 끼어들어 손쉽게 자신의 이익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능력이나 노력을 통한 성공보다는 연줄과 인맥을 통한 성공을 도모하는 자들에 의해 그 줄과 맥을 더욱 튼튼히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보험금으로 이용되고 있다.
부정한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들을 더욱 열등한 위치에 몰아넣게 되고, 법에도 없는 괘씸죄 처벌까지 당하게 한다. 그러다보니 보험금은커녕 밉보이지 않으려고 선량한 국민들까지 촌지의 대열에 가세하고 있는 것이다.
촌지가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대학교 총장실까지 만연되고, 힘없는 자로부터 힘을 가진 자에게로, 위로 올라 갈수록 그 규모가 커져 10억, 100억원도 떡값이나 촌지란 이름으로 불려지고, 대다수 국민들은 혹시나 보잘 것 없는 촌지마저 드리지 못한 죄로 내 자식이, 내가 하는 일이 부당하게 차별 대접받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다 빚을 내어서라도 가져다 바치고서야 겨우 안심하게 되니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의 촌지는 더 이상 미풍양속이 아니라 부정부패이며 국민의 고통인 것이다.
변호사 수임 비리 사건에 대한 인과성이 결여된 처벌과 그에 대한 내부저항에 대해 일말의 동정도 보내지 않고 이 사건이 법조 개혁으로 완성되길 바라는 이유는 이처럼 국민들은 사안의 껍데기를 보지 않고 본질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약한 국민들의 억울함에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왔으며 때로는 앞장서서 힘 있는 자의 시녀 노릇을 자청해온 법조인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법조 개혁이 완성되어 우리 사회 상층부에 만연된 촌지와 떡값으로 위장된 부정부패를 바로 잡을 것인지를 국민들은 지금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모순에 맞닥뜨릴 때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피고든, 검찰이든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욕구이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의 체험에 있어서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반항의 충동이 일어난 순간부터 그 고통은 만인의 일이 된다.」고 간파했다.
말도 안 되는 촌지와 떡값의 이 부조리한 관행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이 사회의 모순이며 떡값을 줄 형편이 못되는 국민들은 영원히 이 사회의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가? 국민은 어리석게 보이나 결코 어리석지 않다. (영남일보 1999년 2월 13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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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임표선생님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돋보입니다. 구구절절 올바른 말씀을 하셨군요. 저도 나중에 차분하게 정독 하겠습니다.
이선생님, 임선생님 고맙습니다. 이런 류의 글은 문학적인 글은 아닙니다. 최근의 금융 위기를 보니 나라 지도자란 분들이 하는 일이란게 항상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답답한 마음에 과거에 쓴 글들을 올린 것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은 인간을 분발시키고 제도와 시스템을 고쳐서 자립하는 인간을 만드는 일을 하지요.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앞가림만 한다면 , 다시 말하면 자립만 할 수 있다면 진정한 평화가 오겠지요. 자기 한몸 이 땅에 세우는 일, 자립, 자립,자립, 자립 그게 어려운 이유가 뭘까요? 자립하는 인간이라야 자주적 의사 결정을 할 수가 있겠지요. 자립하고자 하는 의지-, "금과 은은 내게 없어도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걸어라!" 베드로가 한 이말은 자립이 바로 근본적인 치유라는 말씀 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소선 여사님이 저의 고모 뻘이 됩니다. 전태일 열사의 외조모가 저의 제종조모가 되시지요. 모두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뿐 입니다. 이선생님, 자기를 위하여 울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 남을 위해 운다는 것은 일면 참 건방진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때 " 너희는 너 자신을 위해서 울라" 고 하셨습니다
제 글에서 "박노해"는 실존 인물을 말씀한게 아니고 이념을 말한 것입니다. 당시 그분은 이미 세인의 주목을 받는 공인이었기에 제가 그런 투의 글을 쓸 수 있지 않았는가 생각 됩니다. 혹시 개인 박노해님께 누가 되었다면 공개 사과 드립니다. 회월 박영희가 "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고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지요. 그래서 저는 지난 날 제가 쓴 이런 류의 글보다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순수 서정문학의 길을 가야 옳다고 생각 합니다. 화가 난게 아니니 손 내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