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문신
조각가 문신, 그는 영감(靈感)의 노예였다.
이 달 균(시인. 자유기고가)
합포만이 보이는 문신미술관
봄 햇살이 마산바다 한가운데서 풀잎처럼 돋아나고 있습니다
미술관 뜨락에도 매화가 바다를 불러올립니다
전시실 '흑단'을 적시는 파도소리가 들립니다
마산바다는 미술관의 큐레이터입니다
문신을 파리로 떠나보낸 바다는
다시 그를 데리러 파리까지 항해를 했습니다
문신이 외로울 때 바다는 언제나 그의 머리맡에 출렁거렸습니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은 문신의 영혼이었습니다
요즘 바다는 밤마다 불 꺼진 미술관까지 올라와 문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바다는 자신의 몸속에서 아직도 작품을 빚고 있는 문신의 '손'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이제는 문신의 부재(不在)가 뒤척이는 바다를 다독여 줍니다 문신은 바로 마산입니다
이광석-<문신미술관에서> 전문
시인 이광석은 문신미술관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있다. 합포만은 봄 햇살을 피워 올리고, 매화 꽃망울도 매만진다. 파도소리는 선생이 즐겨 조각하던 단단한 흑단 작품의 귀 어귀까지 차올라와 출렁인다. 미술관의 큐레이터는 마산바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바다는 햇살과 매화, 파도소리 등을 오브제로 하여 미술관을 장식한다. 그 바다는 선생이 파리로 떠났을 때도 함께하였고, 타관에서 노스탤지어에 젖어 외로울 때도 함께하였다. 아니, 선생이 떠난 지금도 늘 미술관 뜰을 서성이며 감 놔라 배 놔라 채근한다. 선생을 떠나보내고 외로운 바다이기에 이곳으로 파도소리를 올려 보낸다. 하지만 지금은 외려 선생의 영혼이 바다를 다독여 준다. 선생은 스스로 마산이 되어 바다와 미술관, 도시의 하늘을 지키는 존재가 되었다고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
한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짧은 글 속에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조각가 문신 같은 거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필자는 문신에 관한 책들을 뒤적이면서 본인이 말한 어록들에 주목하려고 했다.
"나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같이 생활하고 신처럼 창조한다"
이 말은 문신선생이 작품을 대하는 좌우명이다. 주어인 ‘나’를 빼면 모든 예술가들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가 된다. 이 말은 바로 선생의 생애이며 맞닿은 지고지순한 것들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다.
생전에 몇 번 선생을 뵌 적이 있다. 내 기억은 늘 뿌연 석고가루를 뒤집어쓴 장인의 모습이거나 큰 돌덩이를 안고 나르는 노예의 모습이었다. 미술관 건립을 위해 손수 인부의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직 작업에 열중하는 선생 곁에 곧바로 다가갈 수 없는 숭고함을 느꼈다. 노예는 주인의 부름에 따라 일하므로 행복하진 않다. 하지만 선생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영감(靈感)을 충실히 따르는 노예였기에 누구보다 행복했다.
문신미술관은 서민들의 언덕, 추산공원에 있다. 합포만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손수 지은 미술관은 거창하지 않아 좋다. 대규모 콘크리트를 쏟아 붓고 인위적으로 조성한 집과는 다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관보 제 52호에 의거 미술관건립 허가를 얻어낸다. 선생은 땅을 풀어 부자가 되기보다 미술관을 지어 국가에 영원히 남기고 싶다는 바램으로 초석을 다져나갔다.
‘서민과 함께’라는 작가정신은 변함없었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당시 마산시의 달동네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미술관 바로 옆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것이다. 오래 그곳에 산 서민들의 숙원인 고층아파트와 마산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아담하게 지어진 미술관과의 공존은 간단치 않았다. 언론에선 연일 이를 보도했고, 선생은 용인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 사정으로 3년 전 발병한 위병이 악화되어 1995년 5월 24일 새벽, 문신미술관에서 영면에 들었다. 이후 2004년 4월 30일 선생의 유언에 따라 마산문신미술관은 시립미술관으로 헌납되었고, 2004년 5월 10일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이 개관되었다.
방랑은 곧 예술혼이었다.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작업을 하는 동안에 이 형태들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며
궁극적으로 생명의 의미성을 가지게 되길 바랄 뿐이다.”
선생은 1922년 1월 6일 일본의 남단 쿠우슈 지방의 북서부에 위치한 사카켄(佐賀縣)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문안신(文安信)이었다. 식민치하 이주한국인의 생활은 힘들었다. 여기서 5살 까지 살다가 마산으로 왔고, 일본인인 어머니는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 년 후 다시 아버지가 일본으로 가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다.
선생의 재능이 발견 된 때는 5세 무렵이었다. 마산의 해룡사란 간판집에서 제작한 광고판은 어린 문신에겐 신선함 그 자체였다. 이날 본 작업실의 모든 것은 미술가의 길을 예감케 했다. 하지만 생활의 어려움은 말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죽고 12살 나던 해에 아버지가 영구귀국하기 전까지는 고아나 다름없이 살았다. 이 고난의 경험은 훗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귀중한 힘이 되었다.
어린 시절 마산은 작가를 위한 거대한 캔버스였다. 바닷가에선 모래로 온갖 형상들을 만들었고, 간판집과 영화관을 전전하며 예술가를 향한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어떤 화가들은 극장 간판을 그려 생계를 이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쉬쉬하지만 선생은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선생은 마산에서의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어머님과 함께 오동동 소전거리 옆에 살았는데 어머니는 뜨개질을 잘하셔서 뜨개질로 생계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긴 여름날이면 어머님은 나와 같이 갈밭샘 앞 바닷가에서 개발을 까기에 종일을 소일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바닷물을 머금은 모래를 끌어 모아 사람도 만들고 집도 짓고 조개껍질을 모아 비가 새지 않게 하는 양 얹어보는 등 해는 어느새 서산에 기우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16세가 되던 1938년 어머니를 만나겠다는 마음과 화가를 향한 열정을 품고 일본행 밀항선에 오른다. 동경의 일본미술학교 양화과를 다니면서 특유의 근면성으로 돈을 모아 고향의 아버지께 보냈다. 이 돈은 훗날 문신미술관이 설 토대가 된다. 8.15해방으로 귀국하여 마산, 부산, 서울 등지에서 10여 차례 개인전을 갖는다.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전향하면서 한국 모더니즘의 도입과 정착에 기여한다.
예술가에게 방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선생의 가슴 속에 꿈틀거리는 예술혼을 실현시키기엔 일본과 한국에선 한계가 있었다. 1962년 2월 드디어 프랑스 땅을 밟게 된다. 인간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단돈 50불 밖에 수중에 없었기에 파리의 라브넬 성을 수리하는 공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것이 작가로서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3년간에 걸친 공사는 석공, 미장, 목수 등등 자신이 가졌던 조각적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하긴 14세 때에 자동차운전과 자동차 분해수리를 익힐 만큼 나무 ․ 돌 ․ 금속 등에 대한 남다른 친화력을 보였으니 잠재적 재능의 재발견이었다. 고성 수리와 장식복원 작업은 작업실 마련과 함께 조각가의 입지마련을 위한 호기가 되었다.
우주와 생명의 운율을 시각화 하다
“나는 어떤 것을 표현하려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표현된 것이다.
요컨대 숨겨져 있던 생명이 그런 미로써 나타난 것이다.”
1965년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1967년 프랑스로 간다. 1979년까지 활발한 창작활동으로 ‘좌우대칭에 의한 동양적 사고관’이란 독특한 입지를 구축하며 세계적 조각가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그에 비례하여 조국과 고향 마산에 대한 향수는 쌓여만 갔다. 이때부터 그는 한국근대미술 보고의 출발지를 문신미술관으로 꿈꾸게 된다.
조각가 문신은 예술가로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가정적으로는 결코 행복한 작가는 아니었다. 첫 부인과의 사별, 두 번째 부인과의 이혼, 다시 세 번째 부인 최성숙과의 결혼을 거치는 동안 감내하기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궁핍과 방랑, 치열한 예술혼으로 점철된 삶의 궤적은 “명상의 신비”라는 문신예술 영감의 프로세스로 작용하게 된다.
50년대까지는 국내에서 모더니즘을 구현하는 몇 안 되는 화가로 활약했다. 조각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던 70년대에도 데생과 채색화를 병행했다. 초기회화에서도 붓, 캔버스, 액자와 액자틀을 손수 제작했다. 액자엔 새긴 부조는 또 하나의 정교한 조각작품이었다. 이런 잠재력은 결국 프랑스에서 빛을 보게 된다.
처음 프랑스행이 조각가 문신의 입문기라면 두 번째 프랑스행은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절에 해당된다.
1970년 뽀르 바카레스 국제 야외 조각전은 조각가 문신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태양의 사자>라는 13미터의 거대한 목조 토템을 제작 발표하면서 일약 유럽 화단에 주목받는 작가로 등단한다. 조각가 데뷔작이면서 문신 작품세계의 일단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세포분열 하듯 증식되는 좌우대칭의 생명은 음과 양으로 대변되는 동양정신의 구현이었다. 이 작품은 훗날 서울올림픽조각공원에 25미터 높이의 스테인리스 조각 <올림픽 1988>로 승화된다.
이후 좌우대칭(symmetry)은 조각가 문신의 상징이 된다. 뿌리와 향토정신을 바탕으로 시공과 지역을 초월하여 동서 모두가 공감하는 예술세계를 이룩하는 것이 문신예술의 요체다. 선생의 시메트리(symmetry)는 컴퍼스 등속의 기계를 사용치 않은 오로지 작화로만 이뤄졌다. 좌우균제 수법 중 어떤 부분의 파격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동식물이 자라면서 뜻하지 않게 균형을 깨뜨리는 생명의 자연스러움을 연상케 한다.
1971~1972년엔 ‘아르 콩딱트’개설기념전에 6명의 조각가와 참여하였고, 살롱 ‘아트 사크레’, 현대조각그룹전 등에 참가한다. 1973년엔 목조각 7인전, 국제현대미술교류전 등에 참가한다. 이후 1979년까지 국내외에서 개인전 및 중요 그룹전에 참가하여 세계적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1989년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등 동유럽 순회전시를 함으로써 한국인의 예술적 입지와 문화적 위상을 드높인다.
몇 해 전 우연히 프랑스의 로터리회원 10여명이 문신미술관을 다녀간 적이 있다. 이때 흑단작품을 보면서 신기한 듯 딱정벌레를 닮았다고 했다. 실제 그의 작품은 나비나 장수하늘소, 여체와 개미 혹은 낯익은 무엇을 닮았지만 딱히 뭐라 꼬집을 수 없는 어떤 형상을 닮았다. 작가의 심상 속에 내재하는 그 무엇, 즉 만져지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혀 낯설거나 이질적이지 않다. 우리가 동심의 세계에서 만난 그 무엇과도 흡사한 정겨움이 묻어난다. 대부분의 작품이 <무제>인 것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제어하지 않으려는 의도라도 여겨진다.
1995년 이승을 마감하는 날까지 우주와 생명의 운율을 시각화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사후에 더욱 활발히 조명되는 조각가 문신
영감의 전이(轉移)는 새로운 즐거움이다. 이산 김광섭은 시 ‘저녁에’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고 노래했다. 그 구절 하나로 수화 김환기는 불멸의 대표작을 창작하였고, 다시 유심초에 의해 대중음악으로 표현되었다.
사후에 선생을 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영감의 전이에 의해 음악으로 문학으로 끊임없이 변주된다. 생활 속에서의 도구로도 재탄생되고 있으며, 문신예술문화산업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2007년 10월 15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는 <세계적 조각가 문신의 예술과 국가문화산업발전전략>이란 주제의 심포지엄이 열렸고, 2008년 10월 28일 마산 3.15 아트센터에서는 독일작곡가 안드레아스 케어스팅(Andreas Kersting)의 대규모 관현악곡 ‘Eleonnthit'이 초연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이미 2007년 독일 바덴바덴 시에서 공식적으로 기획한 문신영상음악제에서 154년 전통의 바덴바덴 필하모니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된바 있다.
또한 2009년 7월, 개관 10주년을 맞은 숙명여대 문신미술관(관장 최성숙)은 ‘자연과 생명의 빛’이라는 문화행사를 열어 황금찬, 오세영 등 저명 시인들이 문신예술을 노래하는 시인의 밤, 문신예술을 국가 브랜드로 육성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는 <문신예술 국가브랜드화 기반구축을 위한 특별 심포지엄> 등 다채로운 기획으로 마련하였다.
이처럼 문신미술세계는 음악으로 문학으로 외연을 넓혀나가고 있다. 선생의 상상력은 작곡가에겐 음악적 영감을 주고 시인에겐 시적 영감을 준다. 조각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내재율을 가졌기 때문이다. 질서정연한 기하학적 도형인 동시에 오묘한 환상의 세계 그 자체다.
조각가 문신은 불멸의 작품들과 함께 살아 있다.
글쓴이 이달균
이달균 시인은 1987년 <지평>을 통해 문단활동을 시작하였고, 계간 <시와 생명> 편집인, <경남문학>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장롱의 말>, <북행열차를 타고>, <남해행> 등이 있으며,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마산시 문화상, 경남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경남신문-이달균 칼럼>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활발한 기고활동을 하고 있다.
첫댓글 드래그 해야 보이는 글... --; 마술도 아니고.. 배경이 깜깜해서... 좀 길어도 읽으면 좋은글입니다..^^
예술가에게 방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같이 생활하고 신처럼 창조한다" 라는 문구가 공감10000000%...감동이였습니다.
^^미대에서 조소과는 요즘은 조각과로 바뀐듯도해여...조소과라면 잘 모르더라구여...조소과라면 보통 노가다과라도 한답니다...그만큼 작가나 모델두 육체적으로 힘이 마니 들어가는 작업이져...^^
이쪽일과 관련된 일을해서 관심이 많아서 찾아보니...세계적인 분이시군여..조각만 하시는게 아니라...드로잉부터..회화,판화까지두....정통 고전미술쪽보단..현대미술쪽인 작품들이 많은거 같습니다...^^이분의 인체조각상과 드로잉 작품을 보고 싶은데.....있다면여....^^
문신미술관이 있다고 하니 한번 가보셔요..ㅎㅎㅎ
이분의 미술관이라면....서울에 있겠죠?서울 갈일 있을때 가봐야 겠네여....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는데..살리지 못했네여....나이드니 펜과붓을 다시 잡지를 못하겠네여...감각이 죽은듯...
마산에 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아 마산여..?방가운 소식이네여..부산에서는 한시간거리니....담주 날씨 풀림 다녀와야 할꺼같네여...감사합니다..^^